< 창세기 32장 : 야곱의 귀환, 하나님의 이름 > 기드온 쿠 형제님
참으로 여러분께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앉아 계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또한 칭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참으로 모든 분께서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가지신 인내심, 그런 에너지, 힘, 그런 것에 대해서 찬사를 드립니다. 제가 좋은 소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1시간 반 동안 내내 말씀을 전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 번 집회 후에 그렇게 길게 한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쓰러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긴 하루였고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약간 좀 일찍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이 장은 특별히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을 충분히 하지만 또한 압축적으로 교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창세기 32장입니다. 창세기 32장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그 둘째와 세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쌔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창 32:1-32).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이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가 야곱의 생애와 관련된 몇 개의 장을 건너뛰었지만, 여러분이 그 전체 이야기를 아시리라 기대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성경 읽기에서, 이 창세기에서 중요한 주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뿌리느냐에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32장 전까지 야곱은 그가 뿌린 것을 계속 거두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그 스스로가 속임을 당하고 이용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그의 결혼식 날 밤에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저는 이 여인과 결혼하는 걸로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다른 여자였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그런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라반에게 그렇게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스스로 라반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가 나의 삯을 10번이나 번역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32장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라반의 집을 떠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기가 맨 처음 저질렀던 그 잘못을 다시 직면해야 되는 때가 왔습니다. 그는 지금 에서를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을 때 아직 그러한 경험은 야곱이 겪지를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그냥 에서를 아예 못 만나게 하시면 훨씬 좋지 않을까? 그냥 여러 가지 것들을, 잘못한 것들을, 다 더러운 것들을, 우리의 카페트 밑에 숨겨놓고 그냥 보지 않고 지나쳐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이 에서를 다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기 나와 있는 그 원리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못한 바로 그 장소에 다시 돌아가서 그것을 결국 해결해야 됩니다. 그는 에서에게 잘못된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이제 에서에게로 가서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존하시고 그리고 주권 가운데 행사하신다는 것을 야곱은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근이 왔을 때에 그는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읽은 대로 그전에 그는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굽으로 나중에 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는 그러한 일 가운데 아브라함을 다시 쫓아 내보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13장에 그는 다시 그가 맨 처음에 세운 그 단 있는 대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가 애굽으로 떠나갔던 바로 그 장소에 그는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참으로 우리가 적게 하길 바라지만 때때로 많이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좀 큰 실수고 어떤 것들은 작은 실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이 믿음의 삶을 살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한 그 장소에 다시 돌아가서 해결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잘못을 다시 한 번 직면해서 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냥 그것을 잊어버리고 떠나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가 실패한 바로 그 잘못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의 빛 가운데서 다시 한 번 그것을 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 그렇게 멀리 떠나도록 만들었던 원인으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돌아오게 여러분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다시 그 동일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의 손에 있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그 장소에서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함으로, 또한 회개로 그 장소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한 그 장소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입니다.
야곱에게 "야곱아, 너는 지금 온전한 축복을 바라고 있지 않느냐? 참으로 이 복이 확정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네가 저질렀던 그 잘못을 네가 다시 한 번 직면해서 해결해야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의 형을 만나야 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32장에 오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것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그는 에서의 삶을 사실상 망가뜨린 장본인입니다. 그의 미래, 그의 후손에 대해서도 그는 다 망쳐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알기로 에서는 아주 화를 잘 내는 그런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시간은 없지만은 33장에서 그런 부분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에서의 본 모습은 야곱이 생각한 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20년 넘게 만나지 못했던 그 두 형제가 다시 만나는 그 장면은 참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그 장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순간에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아주 그 공포감에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야곱이 생각하기를 에서는 그 400인을 거느리고 칼을 들고 와서 그와 그의 모든 가족을 몰살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야곱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들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전략을 세웁니다. 내가 이 형을 만나기 전에 그와 먼저 화목케 될 이런 방법들을 연구합니다. 여러분 야곱이 알다시피 아주 꾀를 잘 내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그가 오늘날 살고 있다면 그는 아마도 일론머스크와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는 이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아주 꾀를 잘 내는 사람입니다. 그가 스스로 어떤 것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은, 이제 사람들을 잘 다루어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는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그런 가운데서 그의 사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무엇을 합니까? 그는 이제 그의 가축들, 그리고 그 가지고 있는 것들, 가족들을 이제 어레인지를 합니다. 이제 에서에게 먼저 선물을 보내서 그와 화목하게 할 것을 먼저 시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게 되는 것은 야곱이 이때 당시에 아주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앞장에서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라반이 야곱에 대해서 화를 냈지요. 하지만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공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주시기를, 하나님께서 아주 천재적으로 어떻게 그 목자의 일을 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학자들이 그가 어떻게 했는지를 연구하고 있지만 그 이유를 모릅니다. 어떻게 그 짐승들을 서로 품종을 개량할지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아주 많은 재산을 라반의 집에서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그에게 있어서 그가 받았어야 마땅한 품삯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얻는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아주 많은 부를 얻었고 그는 마치 백만장자처럼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이용해서, 그런 가축들을 보내서, 에서와 평화를 이룰 것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양떼들, 염소들, 모든 가축들을 앞에 보내게 됩니다. 만약에 이제 야곱을 만나서 야 당신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라고 묻는다면, 참 우리는 이제 단순한 사람들이죠. 그렇게 야곱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고, 우리는 단순하게 그냥 큰 수표를 큰 액수를 써가지고 에서에게 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도 에서에게 아주 많은 양의 선물을 갖다 주고 있지만, 그런데 그 선물을 주는데도 그는 이제 꾀를 사용해가지고 전달하게 됩니다. 그냥 그 선물을 한 번에 다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제 마치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하나씩 전달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첫 번째 물결로, 그리고 계속 여러 개로 나눠가지고 갖다 주게 됩니다. 그 에서가 다가오는데 첫 번째 선물의 물결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만나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전해줍니다. 이 선물은 당신의 종 야곱이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훨씬 뒤에 따라오고 있습니다. 야곱이 생각하기에 이제 에서는 아주 분노에 차가지고 그의 군인들을 데리고 쫓아오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선물을 받을 때 에서의 분노가 약간 낮아질 걸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선물의 물결이 도착했을 때, 그리고 이제 그 한인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조금 더 낮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세 번째로 보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계속 보냅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선물을 보내서 그의 분노가 완전히 낮아질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그냥 한 번에 그냥 다 모아가지고 보낸다면, 그냥 분노가 혹시 절반 정도만 줄어든다면, 아주 완전히 낮아진 게 아니라면, 그는 계속해서 그것을 조금씩 낮춰가지고 완전히 낮아질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만나는 하인마다 야곱 당신의 종입니다. 야곱은 당신의 종입니다. 계속 이런 말을 들으면서 결국 에서가 그래 야곱은 내 종이지라고 분노를 풀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얼마나 그 꾀를 잘 냈는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제 여기 남편들도 여러분의 아내가 화를 낸다면 이제 그런 방법을 한번 사용해 볼 만 합니다. 그냥 큰 꽃다발을 한 번 주고 끝낼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것을 12개 꽃송이로 나눠가지고 1개씩 한번 주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12번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의 화가 완전히 없어져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에게 그 기술을 말씀해 주지 않길 바랍니다. 여기 야곱이 뭘 말했습니까? 야곱은 계속해서 그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영리함을 이용합니다. 야곱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여러 가지 꾀를 내고 전략을 세우고 여러 가지 방법을 꾸며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변화된 것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어느 순간보다도 지금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공포 가운데 있습니다.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언제 야곱이 처음 기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아주 오래전의 일입니다. 28장에서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그때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걸 해주시고 저걸 해주신다면 나는 이 장소로 와서 이것을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야곱과 지금의 야곱은 꽤 달라져 있습니다. 9절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창 32:9-11).
저는 야곱이 전에는 이와 같은 기도를 한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분명히 그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분의 긍휼과 그분의 보호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에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그 복을 저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야곱은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의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형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오랜 기간 동안 그는 죄의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시고 그에게 확신을 주시는 말씀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가 완전히 손을 내밀어 잡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그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그 길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존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을 내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우리가 어린 나이였을 때 흔히 겪는 그러한 경험입니다. 때때로 그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드온 형제님." 이 가운데서 어떤 분들은 저한테 이제 엉클 기드온이라고 부르는데요. 제가 그렇게 나이 든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막 구원받은 분들이 이제 말레이시아에서는 이제 기드온 삼촌, 기드온 형제님, 이렇게 부릅니다. "왜 저는 제 구원에 대해서 종종 의심의 생각이 들죠?"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의 구원은 너의 구원은 너의 감정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성경을 계속 읽고 있니?" "아니요." "네가 지금 성경도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집회도 참석하지 않고 있다면 그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참으로 우리의 이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면 모든 종류의 의심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 야곱도 그와 같은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는데도 말입니다.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자기가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는 두려워합니까? 그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의 문제를 그가 다시 직면해서 해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친애하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많은 그런 유혹과 여러 가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모두가 지금 앞에서 전하고 있는 그 강사도 우리가 넘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을 듣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가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를 깨끗게 하는 그 피가 있음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요한은 그가 기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게 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여기에 하나님의 치리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은 분명히 안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이 손을 안 대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것을 다루십니다. 그분께서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특별히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배워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여러분이 지불해야 되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가고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였을 때 지불해야 되는 대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그 실패한 자리로 돌아와야 됩니다. 우리가 넘어진 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야곱은 이제 밤에 혼자 있게 됩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혼자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나와서 그와 씨름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제가 하늘나라에 가서 야곱에게 야곱을 만났을 때 하고자 하는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그날 밤에 야곱 당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참으로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경험은 야곱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어느 누구도 이전에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까? 그것은 야곱이 이 마지막에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 밤새도록 지속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경험을 야곱으로 하여금 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이 지금 절망적인 상태라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제 그의 실패한 순간으로 데려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해가 뜹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를 가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6절에 야곱이 말하기를 "나로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는 그날 밤에 자기와 씨름하고 있는 그 사람이,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의 절망 가운데서 그는 이 사람을 결코 놓아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그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야곱의 약한 점을 말해주고 있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의 절망에 그 극심한 가운데서 그는 있는 힘을 다 짜내서 그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를 절망스럽게 하였습니까? 그리고 그는 나를 축복하소서, 그 가운데서 말하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을 축복하셨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야곱이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에게 있어서는 그 축복이 아직 안전하고 자기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와 같은 약함 가운데 그 사람을 꽉 붙잡고 있는 힘을 내게 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내가 약할 때 강함이 있다라고 말한 그 고전적인 한 예가 되겠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약할 때에 강함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핍박 가운데 있을 때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삶이 아주 편안하게 진행된다면 우리는 지구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내가 이룬 성취로 인해서 아주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점점 감사하는 것을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약한 곳으로, 낮은 곳으로 인도하실 때, 아주 절망적인 순간에, 우리 삶에 많은 시험이 있을 때에, 우리는 그때 하나님을 꽉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믿음이 빛이 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사람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축복하소서." 그리고 그 사람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이것은 만약에 이분이 하나님이라면, 분명히 이분은 하나님이셨는데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참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모르고 질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여기서 그의 이름을 이렇게 물어보신 것입니까? 수년 전의 일입니다. 야곱의 수년 전에 어떤 한 사람이 야곱에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그때 뭐라고 대답하시는지 알고 있습니까? 에서라고 대답합니다. 왜 야곱은 그때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는 그의 형의 장자권을 속여서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왜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물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를 맨 처음에 그의 실패의 장소로 데려왔는지를 아실 것입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이것은 우리가 데자뷰라고 부릅니다. 그는 이 순간에 순식간에 수년 전에 그의 아버지의 장막에서 그 질문을 받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왜 이것을 질문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번에는 다시 에서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말하기를 "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그가 올바르게 대답했기 때문에, 이제 너의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속이는 자라고 부르지 않겠다. 너의 이름은 다시는 야곱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다. 이제 첫 번째로 바로 이 이름이 야곱에게 불려지게 됩니다. 이제 야곱은 그 이스라엘 나라의 시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라."
지금 이 시간에 이제 히브리어를 자세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아마도 적절하지 않겠습니다만, 저녁 6시 40분에 히브리어를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그래서 여러분에게 히브리어 문법을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놀랍게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제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왕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겼다'라는 것이 다른 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두 단어를 결합해가지고 이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 그리고 이제 야곱은 그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있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이렇게 물어보게 됩니다.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저는 이 순간에 야곱이 이미 이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믿습니다. 그런데도 왜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기서 묻고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이름을 사용하시는지에 따라서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축복의 종류가 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엘 샤다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는, 그리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체결하실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자기를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이 바로 언약과 관련돼서 하나님이 특별히 사용하시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이삭에게로 내려오게 되었을 때, 이삭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자기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족장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제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 언약의 밑에 이제 서명하시고, 그것이 이제 효력이 있고 실제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이 창세기에서 자주 그리고 중요하게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서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씀하실 때,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실 때 중요하게 또한 자주 사용하시는 이름은 '야훼'라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출애굽기, 또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거쳐서 하나님께서 자주 자신을 말씀하실 때,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반복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이스라엘에 주실 때에 그 율법의 맨 아래 서명처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서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다른 시기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른 이름을 그들에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유다가 바벨론으로 보러 내려갈 때에, 우리는 그 소선지서에서 그 포로 생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이름을 사용하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보게 될 때에, 여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거기서 자주 사용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그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나라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열방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뜻에서 그분은 아주 높이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이방 땅으로 포로되어 가기 전에 우리는 에스겔서에서 그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 그 예루살렘을 떠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키나 영광의 구름이 더 이상 그 지성소에 위치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과 멀리 떠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참으로 적합한 이름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에스라, 느헤미야에 있는 그때 당시에 그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그들과 가까이 역사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섭리적으로 그 열방을 주관하시면서 그들을 보존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만찬 예배 시간에 형제님들이 감사 기도를 드릴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또한 감사드리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이제 언급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이 시대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이 부활하신 다음에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나님, 곧 나의 아버지, 곧 너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또한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는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분의 이와 같은 이름이 오늘 이 시대에 합당한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아주 지나치게 비평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지만 그것이 또한 아주 정확한 우리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서신서에 가게 되면, 우리는 서신서에서 사도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물론 마태복음에서 '천부'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다 더 이스라엘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우리가 서신서에 오게 될 때에 '우리 아버지',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단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놀라운 특권인 것입니. 그리고 또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놀라운 특권입니다. 왜냐면 그 이름이 담고 있는 그 관계에 담겨 있는 그 애정은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름이 이 경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하나님께서 맺고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제가 앞서서 그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왕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왕이십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그분은 만왕의 왕이라고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그분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주님'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기드온 형제님이 저렇게 지금 계속 말하고 있다면 6시 반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것이 실질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교리적으로도 우리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참으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그 용어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야곱은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서 어떤 언약을 할 때에는 어떤 특정한 이름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실 때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있어서는 그 28장 이후로 하나님이 야곱에게 직접 말씀하실 때는 내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야곱은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어제 성경 읽기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분명히 아주 큰 액수가 적혀 있는 수표를 주었지만 아직 그 서명이 거기에 적혀 있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고 그 이름를 더 이상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이제 야곱은 저에게 그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에는 야곱에게 그 이름을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의 환도뼈를 치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는 절름발이가 됩니다. 그는 이제 절뚝거리면서 걷게 됩니다. 그는 이제 그 절뚝거리면서 그는 브니엘에서 있었던 그날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언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야곱에게 말씀해 주십니까? 이제 먼 훗날은 아니지만 여전히 조금 시간이 지나야 됩니다.
우리는 28장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옷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여기 다시 돌아오게 한다면, 바로 이 장소에 이 벧엘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다라고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러한 놀라운 것들을 주고 여러 가지 것들을 다 주고 너를 큰 나라로 세울 것이며 이것을 다 말씀하셨을 때에, 그런데 야곱은 그의 머리로 생각하기에 저는 나는 지금 당장 내일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그 큰 복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는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지금 집을 떠나 도망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은 당장 내일의 먹을거리입니다. 내가 입을 옷입니다. 그리고 보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서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그냥 옷을 주신다면, 그리고 먹을 양식을 주신다면, 보호를 주신다면, 제가 여기 돌아와서..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너무나 못 미치게 다시 우리 그냥 필요한 것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큰 축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늘나라의 복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신령한 하늘에 속한 복들을 바라볼 시선이 어두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놀라운 특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단지 내일에 있을 것들만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청구서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인지, 참으로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는 것인지, 그 사업이 잘 될 수 있는 것인지, 그 월급을 잘 벌 수 있는지, 내가 보너스를 얻을 수 있는지, 물론 우리 인생 가운데 그것은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시야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참으로 크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 생에서, 그리고 오늘 생애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인생 가운데서 여러분이 많은 시험을 겪고 있지만, 그러한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모두 여러분을 복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이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전부 이루어주십니다. 그에게 옷을 주셨고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 이상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많은 부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은 그의 약속을 지킬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제 벧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벧엘로 돌아와야 하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제 에서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선물들을 나누어 가지고 쪼개서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도 야곱에게 동일하게 그렇게 선물을 잘게 잘라서 주시기 시작하십니다. 그에게 확신을 이제 조금씩 조금씩 주고 계십니다. "너의 이름은 이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이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안녕"하고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를 홀로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그의 약속을 다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35장에 그가 벧엘로 돌아오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28장에 그가 약속한 것을 그때 거기서 성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서와, 그의 형과 화해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제 네가 올바른 때에 올바른 장소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3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수표에 서명을 하십니다. 바로 그 35장에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것으로 그 이야기가 끝날 거라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을 다루시는 그 모든 다루심이 여기서 끝났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다른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우리가 잘못한 그러한 그 결과가 우리의 전체 여생을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35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야곱에게 말씀하셨을 때, 이제 야곱은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끝맺을 것 같습니다. 이제 에서와 화해하고 모든 것이 잘 정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과 완전히 그 정리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야곱, 그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그의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아주 큰 속임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온 생애 가운데 그는 속임 가운데 그가 당하고 살게 됩니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속입니다. 그의 아들들이 그를 속입니다. 그는 요셉을 사랑했고 그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아주 끝에서 겨우 만나게 됩니다. 그가 그의 여생을 마치게 될 때에 그때야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우리에게 심각한 것을 말해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안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치리하시는 그 손길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2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 축복을 경험하고 있는 동시에, 우리가 저지른 그 잘못의 대가를 동시에 치르게 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우리의 이 순례 여정을 인도하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하나님께 충성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그리고 거룩하게 유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오직 그분만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부터 떠나게 되는 그런 때가 있다면, 참으로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은 결코 그 가치를 여러분에게 주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또한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 신실하게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일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길 원합니다.
여러분께서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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