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기드온 쿠 형제님

창세기 8,9장 : 노아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

박이레 2023. 10. 13. 18:42

< 창세기 8,9장 : 노아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 > 기드온 쿠 형제님

여러분 모두 안녕하십니까, 참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시고 또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저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함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노아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또 특별히 그에게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앞서서 이 찬송가를 불렀는데요. 참 그 찬송가에 오늘의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우리가 굳게 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좀 길지만 8장 15절부터 9장 끝까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15-22).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세에 죽었더라"(창 9:1-29).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복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좀 젊은 나이에 이제 주일학교 학생들을 이제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학생들은 저에게 때때로 아주 좋은 질문을 하곤 하였습니다. 때때로 어른들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아이들이 하곤 합니다. 먼저 그들이 하는 질문 중에 하나는, 어떻게 노아가 그 많은 짐승들을 다 방주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노아는 이 방주 안에 1년 넘게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40일 밤낮을 비가 내린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날짜들을 다 따져본다면, 노아는 실제로 방주 안에 약 1년 동안을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1년 동안에 그 많은 짐승들을 노아는 어떻게 다 관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한 답변을 드리기 전에, 그리고 특별히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격려를 이것과 함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가르침에 있어서 어떤 영감이 필요하다면 아이들을 한번 가르쳐보시기 바랍니다. 그 아이들이 그러한 과정 중에 여러분에게 오히려 가르침에 필요한 영감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쉬운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어려운 질문을 하고, 이제 선생님으로 하여금 이것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서 더욱 자세하게 생각해 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이 청년들에게 이와 같이 말을 합니다. 만약에 당신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이해한다면 어른들은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또한 청소년들에게 가르쳐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그러한 일입니다.
어떻게 노아는 그 많은 짐승들을 방주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고, 그리고 이제 정글에 가서 그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찾아다녀야 되겠습니까? 그들에게 이제 밧줄을 던져서, 꽁꽁 묶어가지고 방죽 안으로 당겨 끌여드려야 되겠습니까? 제가 노아가 어떻게 그들을 모두 들여보낼 수 있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그들을 방주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때 이 동물들은 모두 줄을 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노아는 이 땅에 존재한 가장 놀라운 동물학자 중에 한 명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노아가 그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제 동물들로 하여금 방주 앞에 모여서 일렬로 줄을 서게 하고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때가 되자 그 많은 동물들은 이제 숲에서 나와서 줄을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들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 암수 그 쌍으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제 거기에 빠지는 호랑이들은 그냥 밀림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단지 한 수컷과 한 암컷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모두 주관하신 것입니다. 여기 노아의 방주에는 단지 문이 하나만 있었습니다. 많은 수천 명의 동물들이 한꺼번에 거기로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서로 밟아서 죽이는 이런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도 다 망가뜨려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날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렬로 줄을 서고 그들은 어린아이들보다 더 잘 행동하면서 질서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일렬로 질서 있게 줄을 서서 한 쌍씩, 또 각 짐승대로 그들은 아주 질서를 지키면서 정연하게 그 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또한 방주 안에서 1년 동안을 지내게 됩니다. 거기에 어떠한 혼란이 있었겠습니까? 거기에 아주 끔찍한 냄새로 가득 찬 그런 공간만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공격하거나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주 더러운 동물도 노아의 방주 안에서는 가장 깨끗한 돼지로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그 노아의 방주의 화장실도 아주 깨끗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여러분은 기드온 형제님이 너무 과장하시네,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면 참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주 잘 행동하는 동물들이었습니다. 그 노아의 권위 아래서 그들은 아주 잘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그는 그 동물의 왕국에서 그의 지휘권을 약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또한 그들을 다스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시대에 이제 그는 사자에게 명해서 그 앞으로 와서 앉으라고 하면 사자들이 그렇게 따랐습니다. 그리고 표범에게 내 등 좀 긁어달라고 하면 그가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모두가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또 과장하시네."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사야서 11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천 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리실 때에 그 동물들은 모두 다시 한 번 사람에게 완전히 다스림을 받는 그 순종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이제 아주 위험한 짐승들하고 함께 뛰어놀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 뱀의 굴에 손을 집어넣어도 어떤 해도 받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소가 곰과 함께 옆에 같이 나란히 있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시대에 대해서 참으로 모든 짐승들이 평화롭게 함께 지내는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람은 그 동물의 세계에 대해서 완전히 그의 권위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는 이제 그와 같은 권위를 다 거의 잃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아주 개를 잘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개를 한 마리 키웁니다. 제가 달마시안 두 마리를 키웠습니다. 여기 이렇게 점이 있는 그런 개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가지고 그들 모두 다 이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도 그들이 나를 주인으로 잘 따랐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저의 말을 안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사람이 그 온전한 그들에 대한 다스림의 권위를 잃어버렸구나, 라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사자에게 "여기 와서 옆에 앉아라." 하면 사자가 말을 듣습니까? 하지만 이제 미래에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그 방주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시적으로 노아에게 온전한 그 다스림의 권위를 주셨고 이제 노아는 그 많은 짐승들을 그가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그렇게 들어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문을 닫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주의 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그 문을 닫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문을 닫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아 뒤에서 하나님이 그 문을 닫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그 홍수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 자세히 말씀드릴 시간은 없겠습니다마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 이후에 새로운 시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언약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의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성경에 나와 있는 중요한 다른 언약들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고 연구해 보시기를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의 뜻이면 이번 말씀 집회 기간 동안에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이 집회 기간 동안에 보지는 않겠지만 다윗의 언약에 대해서도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언약 중에 가장 유명한 언약 중에 하나는 모세와 맺으신 언약일 것입니다. 모세와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그런데 모세의 언약보다 사실 더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살펴보지 않은 것 중에 하나가 새 언약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많이 들여서 상고해 봐야 될 주제입니다.
그리고 제가 믿기로 이 노아의 언약이 이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언약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 첫 번째 언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이슈에 대해서 다루기는 조금 기술적인 부분이 있어서 바로 노아의 언약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노아와 그의 가족과 또한 여러 짐승들은 그 홍수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되자 모든 그 물들이 감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적합한 날씨가 되었고, 그리고 이 모든 짐승들은, 가족들은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어떻게 노아가 이것을 알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노아는 아직 지금은 나가서 살 만한 때가 아니라고 알고, 어떨 때는 지금이 나가야 될 때라고 알게 된 것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새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 그는 까마귀를 내보내게 됩니다. 그는 그 까마귀를 문을 통해서 내보낸 것이 아니라 창을 통해서 내보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까마귀가 나갔고 그 까마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은 까마귀가 있었습니다. 왜 그 까마귀는 결코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까? 그 까마귀는 이제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가 부정한 이유는 그가 아무거나 먹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난 더러운 것, 그런 것 위에도 앉는 그런 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도 그는 이제 깨끗하지 않은 그러한 새입니다. 왜 까마귀가 그래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까? 그 까마귀는 그냥 쉽게 물에 떠다니는 시체 위에 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썩어져 가는 시체를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까마귀는 부정한 대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그래 까마귀는 살펴보기 위해서 내보낼 만한 좋은 적합한 새가 아니다라고 그는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비둘기를 보냅니다. 그래서 비둘기가 나가게 되고 비둘기는 까마귀와는 다른 새입니다. 그는 정한 새입니다. 그 비둘기는 아무 곳에서나 살 수 없는 그런 새입니다. 그는 썩어져 가는 시체를 먹을 수 없는 새입니다. 그 죽은 시체 위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는 밖에 나가서 그가 접촉할 곳을, 발을 댈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비둘기가 그렇게 다시 돌아오게 됐을 때 노아는 아직 우리가 나갈 때가 아니다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7일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나서 비둘기를 다시 내보냅니다. 이번에는 약간 다른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둘기가 돌아왔을 때에 그는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돌아온 것입니다. 초록색의 잎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나무들이 풀들이 지금 자라기 시작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였습니다. 만일 하지만 땅은 아직 사람이 내려가서 살 만큼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 비둘기가 그가 발을 댈 아직 적합한 땅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잎사귀를 입에 물고 돌아왔지만 다시 방주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다시 한 번 7일간을 기다리게 됩니다. 다시 비둘기를 내보냈고, 그리고 이번에 비둘기가 나갔을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이제 그들이 나갈 수 있게 된 적합한 땅인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비둘기인가, 이제 까마귀인가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당신이 비둘기입니까? 까마귀입니까? 라고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물론 제가 이제 상징적으로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더러움 가운데 어디에 가서나 발을 댈 수가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참으로 부정한 것도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그 죽은 자들 가운데서 편안하게 그냥 있을 수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은 아니면 비둘기입니까? 참으로 이 세상에 그 타락한, 그리고 그 죽음 가운데서 편안하게 도저히 그것을 견뎌야 하지 못하는 그 비둘기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참으로 이 세상은 사실 죽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멸망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그냥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더럽혀짐에 대해서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 까마귀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냥 구별이라든지, 성별에 대한 감각 없이, 그것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둘기처럼 살아야 됩니다. 이 부정한 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참으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썩어져 가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신자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이 세상에 직장 동료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합니까? 그것은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의 친구가 그리스도인보다 더 내 생각을 해준다." 만약에 어떤 신자가 이렇게 말한다면, 참으로 그의 발은 이미 모임 밖으로 한 발 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또는 그녀의 삶 가운데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성도들보다 세상에서 더 편안하게 살고 있다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되는 감각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가 해야 되는 질문입니다. '나는 비둘기인가, 아니면 까마귀인가?'
그리고 이와 같이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때 노아는 이제 나갈 때가 되었다고 알게 됩니다.

그리고 15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단지 노아는 지금 나가야 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노아가 이제 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노아는 이때 1년 넘게 방주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을 때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했을 때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가 이 8장 15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15절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1년 넘게 말씀하지 않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적어도 우리가 가진 이 기록상 말입니다.
사람들은, 또 우리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매일처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완전히 침묵하실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방주가 홍수를 통과하고 있을 때에 거기에 많은 물결과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여기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주 위험한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우리가 도대체 여기에 얼마나 더 있어야 될까?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내 가운데서 그들은 홍수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그 홍수를 통과하게 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인생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의 방주가 그러한 물결을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비록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분명히 나아가야 될 방향을 알고 그것을 인내하면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어떨 때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어려움을 지나고 있을 때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러 시련과 시험 가운데서 우리가 지나갈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것이 짧은 시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잠깐의 고난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런 어려움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그 고난을 감경시키지 않고 있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병이 걸렸을 때 그런 경험을 합니다. 우리의 사업에서도 그런 경험을 겪습니다. 우리의 직장생활에서 그런 일을 겪게 됩니다. 우리의 공부에서도 그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그와 같이 높을 때와 또 낮을 때, 어려울 때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을 때는 이 상태로 계속 진행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지만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는 이것이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잘 돼가고 날은 금방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이제 어려움에 낮은 곳을 통과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굉장히 길어집니다. 물론 여기에 그런 기록이 있지는 않지만, 그 기간은 분명히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믿음의 시험의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1년 넘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물결을 통과하면서 지나가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길 가운데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어려움과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여러분보다 더 생각하시고 또 잘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노아가 그 모든 것을 통과했듯이 여러분도 그렇게 되도록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때가 마치게 될 때에 우리는 그 목적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도 그와 같이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15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라고 기록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이제 말씀하시기를 방주 밖으로 나가라고 하십니다.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내 자부도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갈 때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짐승들, 그들이 모두 함께 나가라. 그리고 노아는 어떻게 그 모든 짐승들을 또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게 됩니까? 다시 한 번 노아가 그들을 밧줄로 묶어서 끌고 나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짐승들은 많은 새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1년 동안 방주 안에서 그렇게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이 열렸을 때에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 걸로 기대하게 됩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런 상황이었으면 아주 서로 먼저 나가려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 방주에서 내가 먼저 나가겠다고 서로 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짐승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그들은 이제 한 쌍씩 그들의 종류대로, 그들의 차례를 기다려서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씩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에 무엇을 맨 먼저 하게 됩니까? 우리가 방주에서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왔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큰 파티를 열었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물론 제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아까 말씀을 드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니고 단지 8명이지만 아주 큰 파티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큰 파티는 될 수 없겠죠. 하지만 우리는 이제 다시 이 땅에 내린 것에 대해서 아주 큰 잔치를 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노아가 맨 처음에 한 것이 아닙니다. 20절에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그 단은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단'이 맨 처음 나온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물론 저도 이제 아벨이 단 위에서 그의 희생 제사를 드렸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단'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기록된 것은 바로 여기가 첫 번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맨 먼저 단을 쌓은 사람은 노아입니다. 그가 단을 쌓고 그 위에 희생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는 정결한 짐승들을 더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그들로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 노아가 단을 쌓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알려줍니까? 첫 번째로 그것은 예배입니다. 우리가 아주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후에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고난을 통과하게 하신 후에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합니까? 그런 과정 중에 불행히도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그런데 우리 생각 가운데서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고난이 내게 있습니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빠져나오고 난 후에 그런데 그 그리스도인들이 불행에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참 우리가 모두가 다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그들이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을 때, 그리고 마치고 나서 감사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잘 됐을 때 참 감사드리는 것을 또한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 역사에서 계속 확인하게 되는 그러한 일들입니다. 오직 핍박 가운데 있는 신자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충성되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있을 때는 그들은 게을러지고 그리고 이제 편하게 그런 것만 찾아다닙니다. 이제 자기중심적이 돼버리고 그리고 그 인생 가운데서 단지 쾌락을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노아는 이제 그 새로운 시대를 자신이 맞아들였을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가장 먼저 하게 됩니다. 그는 이 단을 쌓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이 홍수와 그 모든 심판과 고난과 그 시련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단을 쌓음으로써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가 이와 같은 일을 했을 때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새로운 시대는 그 방주 문이 열렸을 때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발이 이 마른 땅에 디뎠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방주 안에 짐승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를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노아가 하나님께 단을 쌓았을 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것을 강조해서 말씀을 드립니까? 21절에 그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우선 이제 5장 말씀을 잠깐 읽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5장 29절입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 5:29).

이 홍수가 있기 전에도 노아는 이미 노아라고 이름이 붙여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노아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은 그로 인해서 이루어질 어떤 한 예언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노아의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노아라는 그 이름은 '안위', '쉬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바로 이 노아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안식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전에는 수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많이 힘을 들여야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열매 없는 많은 일들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아담과 하와가 한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가인이 그가 땅에 소사를 가져온 것이 왜 특별히 잘못된 것인지 또한 함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이 저주받은 땅에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저주받은 땅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노아가 그것을 다시 바꿔놓을 것이다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아들이 "우리에게 안위하리라"라고 말합니다. 그 땅이 저주를 받아서 쉬지 못하고 수고만 하며 일하는 우리들을 이 아들이 안위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리고 이 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노아가 왔을 때에 이제 그것을 회복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의 이름이 노아라고 붙여진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자녀의 이름을 정할 때에 그 부모들은 아주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한국 분들은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서 제가 부러워합니다. 여러분 이제 김이라는 성이 많이 있는데요. 어떤 분들은 박이라는 성이 많이 있습니다. 뭐 또 이씨가 있겠죠 그리고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성경에 나온 이름을 가진 분들을 많이 못 봅니다. 제가 여러분이 성경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제가 여러분의 이름을 더 기억하기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가운데 성경 인물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참 많은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기드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기도처럼 살아야 되는 그 압박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호수아처럼 살아야 되는 또한 압박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은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또한 우리의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이름이 붙여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아들들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러분에게 놀랍게도 왕이라고 우리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라고도 부릅니다. 성경에서 이것이 얼마나 많은 이름으로 우리가 불려지고 있는지 여러 개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데 그 아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도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왕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 집은 궁궐처럼 좋지가 않은데요."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게 그게 아닙니다. 제 이 컵이 금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다. 제가 뭘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처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 가운데서 그러한 왕과 같은 위엄으로 살아야 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거지로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냥 거지처럼 이 땅에 떨어져 있는 그런 하찮은 쾌락을 주으러 다니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의 거지들처럼 그런 땅바닥에 떨어진 하찮은 곳을 주으러 다녀서는 안 됩니다. 여기 한국에 왕이 있습니까? 말레이시아에는 왕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제 왕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그런 왕이 길에 떨어져 있는 10원짜리 하나를 주으려고 이렇게 허리를 구부리는 것을 본 적 있습니까? "폐하, 왜 뭘 줍고 있습니까?" 그 땅바닥에 그냥 빵쪼가리가 떨어져 있는데 그걸 주우려고 이렇게 구부리고 다니는 왕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왕의 그 위엄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행동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와 같은 왕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우리 길 앞에 많은 그런 조각 부스러기를 뿌려놓고 다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영적인 거지로 그렇게 주으러 다닌다면, 우리가 이 땅에 떨어져 있는 그러한 쾌락의 부스러기를 주으러 다닌다면 우리는 영적인 거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신다면 우리는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의 이름에 맞게 삽니다. 그는 평화를, 안위를 가져다 줍니다.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안위였습니까? 그냥 집에 가만히 앉아가지고 커피를 마시면서 아무 일도 안 하는 그런 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쉬는 게 아닙니다. 그가 안위를 가져다 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읽어보게 될 때에, 그는 향기로운 향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는 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 그것이 어떻게 표현돼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은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이 표현이 "이것은 안위하는 향기"라고 문자적으로 히브리어 원어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쉬게 하는, 안식의 향기를 흠향하셨다라고 문자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그 노아의 이름이 들어가서 "노아의 향기를 흠향하셨다" 그래서 '그 쉼의 향기를 흠향하셨다'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노아 그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희생제사가 들여질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 안식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노아가 희생 제사로 그 향기를 올려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쉬게 하는 안식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시는 땅을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언약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모든 일에 시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래서 그 시작은 방주의 문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온 것이 시작이 아닙니다. 그 땅이 마른 것이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그 단 위에 하나님께 향기로운 희생 제사를 향기를 올려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안식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새로운 시작을 이렇게 약속을 하십니다.

이제 이것을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단 위에 드려진 희생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 15절에 나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언을, 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상징을 또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식을 위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을 또 어디에 적어놓으셨습니까?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안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휴가를 보내는 그러한 안식입니다. 우리가 그냥 수영장 옆에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차를 마시면서, 그리고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안식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안식이 아닙니다. 성경을 따르면 우리가 비록 피곤하지만 기쁨의 안식을 동시에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안식은 하나님께만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안식은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그래서 그분만을 의지해서 내가 아무런 걱정이 없는 그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안식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을 온전히 의지하게 될 때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게 될 때에, 여러분은 그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벨론에 끌려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 7년마다 희년을 말씀하시고 그리고 땅을 경작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서 그 희연이 70번 반복이 될 동안, 490년 동안 한 번도 이 땅을 쉬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에 그 희연을 불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매 7년마다 쉬도록 하셨습니까? 그들이 쉴 뿐만 아니라 그 땅이 쉬도록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럼 먹을 것은 어디서 나는 것입니까? 그건 그냥 땅을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경작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뭘 또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땅에서 계속 너희가 먹을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7년째 말입니다. 그리고 8년째도 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습니다. 그리고 9년째에도 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6년이 지나고 7년째가 됐을 때 이제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뭘 먹는단 말인가?' '우리는 배고파지고, 먹을 것이 없고, 이제 다 파산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경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알고 있지만 정말 내가 그걸 믿고 그렇게 해야 되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 믿음이 없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서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 나라에서는 참으로 많은 젊은 사람들이 그냥 그 직장 생활을 하느라고 너무 바쁘게 생활을 합니다. 너무나 바쁘게 일을 하기 때문에 기도 집회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바쁘게 일을 해서 말씀 집회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그 사무실에서 월급이 인상될 것을 걱정하면서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자기 직장 상사에게 6시에 일어나서 집회에 가야 되기 때문에 지금 나온다고 하면 보너스를 받지 못할까 봐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안식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보기에는 어려운데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지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이러한 평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도 불행하게도 참된 그 안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믿음으로 화답한 우리는 안식으로 들어가는 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또한 현재도 우리는 실제적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안식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안식의 향기가 그분께서 흠향하실 때 이런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아들만큼 그분을 온전히 만족시키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분은 온전히 흠향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들의 죽음만이 하나님과 우리를 온전히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그 희생 제사를 드렸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땅을 저주하십니다. 그것은 또 하나 무슨 의미입니까?
제가 믿기로 이제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 죄를 짓기 전에 이 땅에 아주 크고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 땅을 경작할 것을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우리에게 이것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이 농작물들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자동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주 힘들게 일을 해야 됩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만 아니라, 이제 죄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고 오직 땅에서 채소와 그런 낮은 식물들만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나라에 와서 아주 맛있는 과일들을 많이 먹게 됩니다. 무화과를 먹었고 또한 석류도 먹었습니다. 포도도 많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집회가 끝날 때마다 포도가 나왔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은 후에는 이러한 열매 중에 어느 하나도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냥 지표면에 낮게 자라는 식물들만 자랄 뿐이었습니다. 때로는 밀, 또는 쌀, 그냥 땅바닥에 있는 여러 가지 채소들만 자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것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있는 이제 놀라운 열매들은 포도가 아닙니다. 또 무화가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말레이시아에 오면 이 땅에서 자라는 가장 맛있는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번 그것을 보면 절대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한 번 맛보면 그것을 계속 맛보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제 과일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두리안입니다. 그들은 두리안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니다. 그것은 높은 나무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전부는 낮은 땅에 자라는 채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노아가 단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저주를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을 더 이상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이제 여러 가지 거두는 것이 다시 반복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날씨는 열매를 맺도록 적합한 날씨가 다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에 대해서 저랑 동의하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우리는 잠시 후에 노아와 그의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그는 이제 농부가 됩니다. 그는 이제 열매를 거두는 농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땅의 저주를 회복시킨 그 결과물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잠시 후에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9장은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시작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다른 모든 짐승들이 너희를 두려워하고 너희를 무서워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사람이 짐승들을 다스리는 권위의 일부가 노아에게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명령하는 그런 권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제 너에게 좀 좋은 소식을 이야기를 해주겠다. 저는 이러한 좋은 소식에 대해서 기쁘게 듣게 됩니다. 노아는 그전에는 모두 이제 채소만 먹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짐승들을 다스리는 권위를 회복시키고 난 후에, 그들이 그에게 땅에서 그 저주가 회복된 땅에서 나는 열매를 먹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제 육식을 할 수 있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짐승들을 너희가 원하는 대로 잡아가지고 먹을 수 있다라고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 짐승들은 너희가 죽일 수 있지만, 사람은 죽일 수 없다라고 또한 제한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고기들은 먹을 수 있지만 산채로 먹지는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소가 지나가고 있는데 그냥 소를 잡아서 뜯어서 먹는 것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아주 그것은 이상한, 끔찍한,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분명히 이제 이 짐승은 먼저 죽어야 되고, 그리고 이 짐승의 죽음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하신 것입니다. 단지 노아뿐만 아니라 그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함께 언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노아의 언약에 그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비가 온 후에 무지개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신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 가운데 하나로 우리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 짐승들 위에 있는 우리의 지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짐승들을 다스리는 권위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을 먹을 수 있지만 짐승이 우리를 먹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가 가운데서 사람의 생명이 가장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죽이면 내 생명도 죽어야 되는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짐승들이 죽어야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생명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다른 짐승의 생명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모르지만은 이 세상에 이러한 그런 문화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젊은 분들이 조심해야 됩니다. 또 세상 친구들이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의 권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동물의 권리를 말하면서 그들은 뭘 말하고 있습니까? 그 동물의 권리가 사람의 권리와 같다라고 말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동물들을 잡아서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것은 아주 잔인한 일이 된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때때로 어떤 불교인들은 그것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은 짐승의 생명과 다른 것입니다. 물론 짐승들을 이렇게 고문하고 그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짐승의 생명들 또한 식물들의 생명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 짐승들을 학대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그 짐승의 생명의 가치가 사람의 생명의 가치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참 이러한 믿는 경향이 이제 채소만 먹는 그런 채식주의 운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또 하지만 그러한 경향을 따라가지 않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이제 채소 위주의 식단을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물론 이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것은 이 성경의 내용은 아니고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인데요. 저는 정말 야채만 먹는 게 정말 건강에 좋을까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고기를 먹으라고 그렇게 계획하시고 말씀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람에게 그 고기를 먹는 게 유익이 되니까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맨날 먹어서 여러분의 콜레스테롤이 높아지는 것을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셨을 때는 이런 고기들을 섭취해서, 단백질을 섭취하고 이런 것이 좋기 때문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채식주의가 건강에 정말로 좋은 건지 회의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제 건강을 위해서 이제 채소만 이렇게 며칠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항상 채소만 먹고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노아의 언약을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또 이런 의미에서 저는 기쁘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불고기를 드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빔밥도 드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숯불 구이도 먹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 노아와 언약을 이렇게 맺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한국 음식을 좋아합니다. 노아에게 또한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로 이제 사람들은 고기를 먹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노아의 언약을 통해서 사람 '정부'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6절에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

누구라도 살인을 저지른다면 다른 사람이 이제 그 범죄한 사람을 죽여야 됩니다. "사람에 의해 그 피를 흘릴 것이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그 다른 사람,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제가 믿기로 이것이 사람의 정부를 형성하는 최초의 말씀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살인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다루는 정부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그 정부에 의해 여러분은 체포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제 가둬지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이 사형 제도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레이시아에서 그 사람의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이제 사형 제도가 6개월 전에 이제 중단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데 이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정부를 말씀하셨고 그리고 누구든지 살인을 한다면 하나님의 권위에 따라서 그 살인자의 생명을 취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성경적인 사용 제도입니다. 제가 사람의 권위를 말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새로운 시대에, 노아가 그 새로운 시작을 출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 정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단지 5분만 남았는데요. 이 시간 동안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복 주시다는 것에 대해서, 이것을 우리가 이제 나중에 다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나중에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함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언약은 무엇입니까?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이제 합의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언약이 나옵니다. 어떤 경우에 언약은 이제 일방적인 언약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의 언약은 이제 상호가 동의를 하는 언약이 또한 있습니다. 이 서로가 상호 간에 동의하는 언약은 모세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고, "너희들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렇게 이러한 것들을 다 따른다면 그리고 내가 이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해주겠다." 하나, 둘, 셋, 넷, 여러 가지 열거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희들이 하나, 둘, 셋, 넷, 이것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또한 동일하게 하나, 둘, 셋, 넷, 이와 같은 것들의 벌을 주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은 그들이 이것을 잘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상호 협약한 언약입니다.
그런데 또한 성경에서는 아주 중요한 일방적인 언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노아의 언약은 이렇게 일반적인 언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약속하신 것입니다. 노아가 잘하냐, 못하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인류가 그들이 선하게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찌 됐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존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맺은 언약도 이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그 왕이 다윗과 솔로몬의 후손으로 나실 것을 일방적으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후에 유다의 많은 왕들이 다 엉망이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이 그들로 인해서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또한 궁극적으로 그분께서 영광 중에 이 땅에 임하실 때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말씀하시기를 더 이상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더욱 악하게 될지라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보다 더 악하게 될까요? 참으로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마음만 먹으셨다면 홍수로 몇 번 이미 심판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내가 다시는 이 땅을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지금 홍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에 대해서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이 어떻게 그 습기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까? 여기 이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노아의 홍수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노아의 방주로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하늘에서 구름이 형성되는 것을 처음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름에서 심판이 내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더 이상 심판을 위해서 그 구름을 보내지 않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구름은 우리의 축복의 상징이 됩니다. 그 구름 속에 무지개를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4절에, 누가 그것을 보는 것입니까 그 인류가 사람들이 무지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또한 하나님이 "내가 모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리라" 그래서 이 무지개는 이 땅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실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또한 구름 속에 나타난 그 무지개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실 것을 그분 자신이 상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름은 이제 축복의 구름이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구름을 보고 이것은 시련의 구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구름만을 보고 '아, 이제 나쁜 소식, 이제 비가 내리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구름을 볼 때에 그 무지개를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그 무지개로 언약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볼 필요는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 구름을 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곧 죽게 되는 그 구름을, 어두운 구름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의 눈을 들어서 하늘에 나타난 그 무지개를 본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름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축복의 소나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아주 어두운 구름, 그래서 우리에게 슬픔을 가져다 줄 것 같은 구름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눈을 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미쁘신지를 말해주며 알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분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 노아에 대한 주제는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노아는 이제 포도를 열매를 따는 아주 큰 농부가 됩니다. 그 아들들도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었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함 족속입니다. '고넬료'는 야벳 족속입니다. 그리고 다소의 '사울'은 셈 족속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족속의 사람들이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들이 온 세상에 퍼져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노아는 그와 같은 의미의 농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으로 인해서 주신 축복을 그는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열매 맺는 나무를 키우게 되고 거기서 포도 열매를 먹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온전한 축복이 되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가 술에 취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축복을 그는 이제 낭비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고 회복한 것을 그는 잘못 사용한 것입니다. 그 축복의 상징이 된 것이 노아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움의 상징이 돼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 여러분,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와 같이 축복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그 영적인 충분한 풍성한 포도 열매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많이 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우리가 때때로 잘못 사용하고 있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생활 가운데서 성공한 것이, 그것이 우리가 신체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시초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많이 포기하게 된 것이 우리를 또한 실패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모두 우리가 이제 술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술 취하면 사람들이 올바른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가 술 취해서 아무런 말이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와 같은 물질주의에 술 취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취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축복이 될 것들이 우리에게 부끄러움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에 대해서 감사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 사역의 진보를 위해서 사용하길 바랍니다. 참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사용하길 바랍니다. 그것을 남용하지 않길 바랍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놀라운 포도 열매들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 경청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