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기드온 쿠 형제님

창세기 11, 12장 : 바벨탑과 아브라함, 시험 + 성경읽는 법

박이레 2023. 10. 20. 17:58

< 창세기 11,12장 : 바벨탑과 아브라함, 시험 + 성경읽는 법 > 기드온 쿠 형제님

오늘 이 시간 또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것을 볼 때에 또 저에게도 큰 격려가 됩니다. 또한 이번 결혼식에 그 신랑과 신부에 대해서 또 그 신랑 신부의 가족에 대해서 특별히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제가 경험한 첫 번째 한국식 결혼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제 이번 방문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먼저 제가 이번 방문 기간 동안에 이제 비슷한 질문을 여러 번 받게 되었습니다.
제일 많은 질문이 제가 몇 살이냐는 질문이었고요.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이 '성경을 어떻게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까?' 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창세기 말씀을 함께 교제를 나누고 있는데요. 한 10분에서 15분 정도 제가 어떻게 성경을 상구하고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디모데 후서 말씀 3장 16절과 1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우리가 우리 손에 들고 있는 이 성경책은 다른 세상의 책들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한 글자 한 철자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손으로 들고 있는 이 성경책이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그런 글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감동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러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방 종교에서 귀신들이 사람에게 들어와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렸을 때에 그 귀신이 그 사람을 완전히 장악해서 조종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귀신이 그 사람을 완전히 조정합니다. 그건 실제로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서 사용하실 때는, 우리는 '성령이 그를 장악했다.'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감동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보게 됩니다. 귀신이 들린 것은 그 사람은 이제 자신의 의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어떤 한 사람에게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하실 때는, 사도바울일 때나,또는 마태일 때나, 구약의 여러 기자들에게도 성령께서 그를 영감하실 때에 그는 동시에 자기에 대해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주위 환경에 대해서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서 이 글을 기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느끼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기자들이 기록하는 그 필체를 느낄 수가 있으며 그들의 어떠함이 이 기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할 때에 그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삶과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여기에 기록하게 됩니다. 때때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감정도 여기에 기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의 펜을 들어서 이 성경에 모든 페이지를 기록할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팬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경 기자의 경험과 그의 성격과 그의 감정을 사용하셔가지고 이제 하나님이 정확하게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감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문장과 모든 단어와 모든 그 한 철자는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것이지만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아주 보배로운 책입니다. 우리는 이 책 외에 다른 어떤 세상의 책이 "하나님께서 영감하셨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오직 이 책만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점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소설이나 사람들이 기록한 책과는 다른 하나님이 기록하신 책입니다.
첫 번째로 이것은 생명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유합이다. 또한 그것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냥 어린이 동화책처럼 그냥 한번 쭉 읽어보십시오, 라고 할 만한 그런 성격의 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책은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천년 전에도 우리와 관련된 책이었으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지 않겠지만, 또한 이 세계가 수천 년이 더 흘러간다 할지라도 이 말씀은 여전히 또한 관련되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이것을 읽으라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에 어떻게 읽을까요? 라는 질문을 우리는 자주 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4개 또는 5개의 몇 가지 힌트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이제 시간입니다. 여기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이 성경을 평생을 거쳐 읽는다 할지라도 이것을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떤 장들은 특별히 제가 몇 년 동안 연구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장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인내를 필요로 하는 책임이다. 여러분께서 이제 몇 년 동안 이 성경책을 읽어오셨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보다 더 많은 기간을 읽어오셨을 것입니다. 저보다도 더 많은 세월을 읽으면서 오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연령대에 여러분께서 여러 가지 경험을 이 성경을 통해 하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성경을 상고하고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평생을 걸쳐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생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시간을 드린다면, 여러분께서 이 말씀을 상고하는 데 더욱 헌신되게 시간을 사용하신다면, 그리고 여러분은 분명히 풍성하게 그 상급을 누릴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것을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하지 않길 바랍니다. 읽고, 읽고 또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피조물입니다. 밖에 나가서 시간을 그냥 허비하고, 또한 모니터 앞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우리가 연구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대가로 요구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냥 시간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기꺼이 그렇게 하기를 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본문입니다. 이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을 말하는 텍스트 이 문자 보내는 데 우리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텍스트'라고 말씀을 드렸을 때 이 성경 본문을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경 자체를 읽으셔야 됩니다. 어떤 성경은 그 앞에 이제 요약 제목이 달려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좋은 성경책이 아닙니다. 제가 이제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에 있는 그 앞에 소 제목만 보고 '아, 그래 이 내용이지.'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냥 제목만 보고 넘어갑니다. 우리는 신문을 그렇게 봅니다. 그냥 헤드라인만 보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약간 요약된 것만 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 기사 본문은 그냥 읽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문 볼 때 대부분 그렇게 합니다. 물론 그 신문 뉴스 기사는 대부분 이제 쓰레기 기사들로 넘쳐납니다. 그냥 한 번 보고 말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뉴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단지 그 앞에 있는 제목만 보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제 이 한 장이 다 그런 내용이구나.' 하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는 최악의 성경 읽기입니다. 어떤 분들은 '스가야서 1장, 이건 너무나 어려운 장인데.'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몇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무엇을 해야 될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구글에 가서 검색을 하기 시작합니다. '스가랴서 1장 내용이 무엇입니까?'라고 구글에서 검색을 합니다. 이 20절이나 되는, 30절이나 되는 한 장이 이제 한 본문으로 요약해서 알려주기도 합니다. 점점 이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또한 쳇gpt를 이용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라고 말합니다. 쳇gpt한테 스그라서 1장에 대해서 한번 말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본문을 만들어봐라, 이렇게 시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절망적인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쳇tpt는 결코 여러분에게 에스가라서 1장을 정확하게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 본문 자체를 읽기를 바랍니다. 한 단어, 한 단어씩 읽기를 바랍니다. 한 구절씩 또 한 구절씩 읽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한 번에 쭉 읽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한 번 읽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낼 수 있는 한 그 시간을 사용해서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세세한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기에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냥 침대에서 누워서 있지 않길 바랍니다. 그 침대에 매트리스가 없다면 그렇게 하셔도 되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여러분 딱딱한 데서 읽으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아마도 많이 그 침대에서 성경을 읽으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제 점점 눈이 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자기의 가슴을 덮는 것입니다. 침대에서 성경을 읽으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돼버립니다. 여러분이 의자에 앉아서 읽기 바랍니다. 그리고 등불을 켜고, 그리고 이 본문을 읽으십시요.
그리고 세 번째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주제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장을 읽을 때, 그리고 또 여러 장을 또한 읽을 때에도, 제가 이렇게 해서 이제 많은 유익을 얻게 되는 방법인데요. 저는 한 장을 읽을 때 그 장에서 10단어를 넘지 않게 그 장에 대해서 요약을 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한 장에 대해서 또는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한 구절이 400단어가 넘는 그런 곳이 있다면, 그것을 요약할 때 그렇게 많은 단어를 사용해서 동일하게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요약을 해야 됩니다. 그냥 6 단어, 또는 7 단어로 요약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에 이미 요약되어 있는 그런 것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을 먼저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 스스로 제목을 붙여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본문을 읽어가면서 그 문맥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주제를 우리가 놓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몇 개의 단어로 계속 요약을 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명확하게 그 전체적인 주제를 계속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형제님들에게 격려를 드립니다. 그 설교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명료성입니다. 참으로 많은 경우에 설교자들이 명확하지 않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듣는 청중들에게, 성도들에게 따라오지 못하도록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본문 말씀을 스스로 요약을 해본다면 여러분에게 계속 명료하게 그 내용을 머릿속에 담고 있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러분은 그 한 장에서 그 주제를 뽑아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그 장의 앞에를 또한 먼저 살펴봐야 됩니다. 또한 읽고 있는 장에 또 다음 장도 함께 고려를 해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다음 단어에 대해서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연관성입니다. 실타래처럼 연결돼 있는 것, 그것은 마치 끈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이 모든 성경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 책부터 마지막 책까지 그것은 모두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한분 동일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떤 한 구절만 가지고 그것을 따로 떼어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그 전체적인 연관성 가운데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를 고려해 봐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요한복음 5장을 읽는다고 할 때, 그리고 여러분은 이제 4장을 함께 고려하고, 또한 6장도 읽어봐야 됩니다. 5장은 읽지만, 그리고 4장을 읽으려은 요한복음 3장도 또 읽어봐야 됩니다. 또 6장을 이해하려면 7장도 읽어봐야 됩니다. 또 7장을 읽으면 8장도 읽어야 되는 필요성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 기드온 형제님이 우리로 하여금 전체 책을 다 읽게 만들려고 그러시나 보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체 성경을 읽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자가 전체 책에 걸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먼저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부분인 한 책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매일 이 성경을 읽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삶에 이제 습관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이 7일간 계속 성경을 읽는다면,
여러분은 2개의 읽기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한 축은 이제 그 성경을 폭넓게 읽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은 그 성경을 깊이 읽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요한복음 5장을 상고하실 때에 처음에는 깊게 읽어갑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날에는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읽어가는 것입니다. 또 어떤 날은 창세기를 매 각 장씩 읽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폭 넓게 성경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은 깊이 있게 파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성경의 전체적인 폭을 이렇게 파악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깊이 파는 그 기술도 연마하게 될 것입니다. 그 두 가지 모두 중요한 측면입니다. 여러분께서 그 폭을 이제 파악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성 있게 말씀하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깊이 있게 연구하신다면, 그 땅을 파는 것처럼 깊이 들어가서 각 구절과 단어들의 그 보석 같은 의미들을 파악해내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기술적으로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떤 난해 구절들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 성경을 전하고 가르쳐야 되는 책임 있는 형제님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격려를 드립니다. 그 성경에서 기술적인 작은 너트와 볼트와 같은 그런 것들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부분이고 그러한 것들은 내가 다룰 역량이 안 된다라고 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 어려움들을 이제 껴안고 달라붙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최대한으로 여러분께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이 또한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성경에 많은 도움을 주는 소프트웨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만 너무 의존하지 않길 바랍니다. 우선 좋은 성경책을 구하십시오. 형제님들에게 격려를 드립니다. 만약에 이 한국의 모임이 이제 영적으로 또 다음 단계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참으로 이 성경을 가르치고 또 전하는 형제님들이 특별히 이제 영어 실력이 그다음 단계로 높아져야 됩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것은 한국어가 나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왜 이것을 말씀드리냐면요, 왜냐하면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훌륭한 책자들이 영어로 써졌기 때문입니다. 아주 방대한 양의 경건한 훌륭한 서적들이 영어로 쓰였고 또 계속 영어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제 그러한 자료를 참고할 수 있는 그 능력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형제님들의 이 성경을 연구하는 그런 수준을 한 단계 높여드릴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이 참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거라 생각하고 말씀을 드립니다. 단지 그냥 번역에 의존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접적으로 그 소스에 접근해서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형제님들에게 킹 제임스 버전 영어 성경을 읽으시기를 또한 격려를 드립니다. 그 한국어 성경을 읽지만 또한 영어 성경도 함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매일처럼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믿기로 그로 인해서 많은 보상이 있을 걸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15분을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벌써 30분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처럼 저도 그렇게 예상치는 못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겠습니다. 11장 1절부터 9절까지 읽도록 하겠습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1-9).

12장입니다. 그리고 12장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창 12:1-20).

그리고 사도행전으로 가서 7장 2절부터 5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입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행 7:2-5).

우리는 지난 시간에 노아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노아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는 못하였는데요 그때 노아는 술에 취하였고, 그리고 발가벗고 누워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벌거벗음의 부끄러움이 아담과 하하가 죄를 지었을 때 그것과 관련돼서 처음 언급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은 아주 죄악이 만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홍수로 인해서 새로운 세상이 되었을 때도 이제 노아로 말미암아 또한 벌거벗음의 부끄러움이 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노아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작이 되었을 때, 이제 모든 것이 좀 더 나아졌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그 죄도 사라진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노아가 벌거벗고 그 부끄러운 수치를 나타내고 있을 때에, 우리는 여전히 죄가 여기 남아 있으며, 그 죄가 부끄러움을 가져다 주고 있다는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세계의 그 시작의 여명에서도 노아는 여전히 그 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노아의 마지막 부분에 노아가 벌거벗은 이야기가 왜 기록되어 있는지 의아해하게 됩니다.
제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그 실타래처럼 계속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아담의 벌거벗은 것과 로아의 벌거 벗은 것을 그냥 각각 따로 읽는다면, 우리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전체적으로 읽어볼 때에 노아가 그 벌거벗음의 부끄러움이 왜 기록되어 있는지를 갑자기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새로운 시대에 대해서 잘못 생각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여전히 죄는 여기에 남아 있고 그 죄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죄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나빠진 것을 보게 됩니다.

11장에 기록된 것처럼 이제 온 세상이 서로 협력해서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날이라는 곳에 많은 종족들이 모여가지고 이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은 바벨론의 장소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그 탑을 쌓고 그곳을 바벨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이 한국어 성경에는 어떻게 표현되는지 모르겠지만은 그 바벨이라는 단어가 나타날 때마다 모든 성경에서 그 바벨이라는 단어는 바벨론을 가리키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한 번 그 실타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부터 바벨론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운데 부분에서도 바벨론이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다니엘서입니다. 이사야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시날 땅의 바벨론에 대해서 또한 스가라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책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을 보게 될 때에 그리고 거기서도 바벨론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와 같은 질문을 할 것입니다. "바벨론이 뭐길래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까?" "바벨론이 처음의 책에서도 나오고 왜 마지막 책에서도 등장하는 것입니까?" 때때로 그것은 이제 시날이라고 다른 데서 언급되기도 합니다. 여기 2절처럼 '시날 평지'라고도 언급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잡하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성경상에 서로 대립하는 두 성이 언급이 됩니다. 역사상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어디입니까? 여러분께서 서울이라고 말하지 않길 바랍니다. 쿠알라 룸푸르도 물론 아닙니다. 워싱턴 dc도 아닙니다. 온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것은 왕의 성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수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장차 올 미래에 그 성은 온 우주의 수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예루살렘을 대적하는 다른 한 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성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대립되듯이 말입니다. 이 성은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바벨론입니다. 이 역사 가운데 계속해서 바벨론은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을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바로 그 바벨론이 온갖 귀신들이 그 악한 영들이 모이는 성이라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서 그렇게 됩니다. "그 큰 성 바벨론"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녀의 성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악의 총 집합체가 되는 성인 것입니다. 그것은 음녀라고 나와 있으며 그것은 이제 적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성입니다.
이제 어떤 형제님들이 이렇게 말씀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훌륭한 성경 교사들이 그렇게 말씀을 드리기도 하는데요. 이 바벨론 성이 실제로 있는 그런 성이 아니라 그냥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표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견해를 취하신다면, 뭐 특별히 문제는 없습니다마는 제가 여러분과 문제가 없다는 것은 여러분 그렇게 말하는 분들과도 다과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믿기로 이 바벨론이 문자적으로 실제로 있는 성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참으로 적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그 악한 종교들의 본산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견해들을 취하든지 간에 이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으로서 계속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의 앞부분에 11장에서 그 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지구상에 존재한 첫 번째에 그 많은 민족이 모이는 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이제 성을 쌓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스스로 내기를 원해서 그 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흩어지는 것을 싫어하였고, 그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이 모일 수 있는 중심 도시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날이나 또 옛날이나 사람들이 높이 건물을 쌓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도시에서도 많은 높은 빌딩들이 그렇게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 많은 인구들이 그러한 높이 쌓인 빌딩 주위에 몰려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역사상 처음으로 그 도시가 여기 설립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창세기 11장과 12장을 읽어보실 때에 또 다른 실타래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그 사람들은 이 한 성에 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하나님께 속한 무리들은 이제 장막에 거하며 순례자로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나온 그 영적인 교훈들이 분명하게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이 높은 성을, 높은 탑을 쌓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이 땅에서 최대한 살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사람의 손으로 지은 그런 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도성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땅을 장막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8-10).

우리는 창세기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성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리고 장막에 거하여 유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그 장막에 거하는 자들을 순례자요 또한 외국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순례자입니까?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그 성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는 사람들이 그 성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으시는 그 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그 아브라함의 시대에 아직 그 성이 물질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을 나그네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죽을 때까지 그는 장막에 유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와도 마찬가지인 것인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은 성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은 결국에는 이 땅 가운데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이 가운데 많은 부분들은 살아있을 때 그 성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오늘이라도 오신다면 참으로 그 성이 우리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좀 더 길어진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살 것입니다.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몸을 가지고 장막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참으로 장차 올 그 성을 기다립니다. 참으로 그 영광스러운 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우리 눈으로, 육체 눈으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분명히 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지만 영적인 우리의 믿음이 그것을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 놀라운 도성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올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그 성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순례자로서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땅에 그 성을 만들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인생을, 여러분의 모든 에너지를, 이 땅에 성을 쌓는 데 쏟아부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시간을 1초라도 다 짜내어가지고 이 땅에 그러한 성을 쌓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 땅은 장차 멸망받을 땅인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이 우리에게 그림으로써 그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아주 미개한 원시인들로서 그렇게 장막을 치고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냥 단지 그들 주위에는 짐승들만 돌아다닐 뿐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축들만 그들 주위에 있었다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냥 염소만 몇 마리 키우고 있었다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어떠한 성경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들, 어떤 드라마, 그런 책들이 우리가 성경적으로 이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굉장히 부유한 사람들로서, 그들이 이동할 때에 그 주위에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그것을 이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기록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이동할 때에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그들에게 내려주셨으므로 그 주위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그들을 보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가난해서 장막을 치고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마치 서울처럼 도성의 도시에 사는 것이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그들이 장막에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장막에 살았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시는 그 성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고고학에 대해서 관심이 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건 우리에게 많은 놀라운 것을 가져다 주는 그러한 연구입니다. 그 고고학적인 발견들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이 성경의 내용이 얼마나 사실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시날과 관련된 그 고고학적 발견을 살펴보게 될 때에, 우리는 고고학자들이 여러 가지 발견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그중에 이 바벨탑의 일부라고 불릴 만한 그러한 유적도 발견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 아브라함이 처음에 나온 우르 지역의 유적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르게 발음을 하는데요. 그 갈대아 우루의 유적들을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것을 볼 때에 우리는 흥미로운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 갈대아 우르 유적지와 그 시날에 나온 그 유적지를 살펴보게 될 때에 20~30km 떨어져 있는 그런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러한 사실을 보게 될 때에 아브라함도 그 바벨탑이 건설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그 가까운 거리상 알았을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은 그 아브라함은 시날 땅의 사람들과 싸운 적도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은 어쨌든 유대의 전승이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살던 곳과 그 바벨탑이 세워진 곳과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11장과 12장이 이렇게 가까이 연결되어 놓여 있다는 것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하늘에 닿으려고 탑을 쌓고 있습니다. 이름을 내려고 그들의 성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가족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데라에서 나온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 데라에서 그 모든 가족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여기는 성을 쌓고 있는 장이고 여기서는 장막에 거하는 사람들이 나온 장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12장을 잠시 후에 보면서 더 많은 대조점을 살펴볼 것입니다. 12장에 나온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과 11장에 그 성에 거하는 사람들을 대조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그 성경에 계속적인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에 이 대조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대조를 사용해서 여기 나쁜 것과 좋은 것을 동시에 우리에게 제시해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 성에 관한 사람들, 그리고 장막에 유거하는 사람들,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미치도록 그 성을 쌓고자 하였습니다. 하늘까지 미치는, 그들은 올라가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올라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낮아지져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 시날땅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날땅의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길 원했지만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에 이 대조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신날땅의 사람들과 그리고 이제 그 땅에서 나온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함을 알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이제 삼위일체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구약에 어디 삼위일체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 거기에 우리는 그 삼위일체의 진리를 보게 됩니다. 여기 11장에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보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 다시 한 번 '우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복수로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또한 그 삼위일체 진리의 또 한 단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삼위의 하나님께서 서로 간에 논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한 행동을 하십니다. "이제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자." 그들은 이제 높이 탑을 쌓아 올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에게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저는 영어를 말하고 여러분은 한국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 사이에서 저는 이제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그렇게 혼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할 때 여러분은 그냥 오리가 꽥꽥 하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모두 다 이 바벨탑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류를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많은 언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언어일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다 흩어진 후에, 저는 이러한 여러 사람들이 흩어지는 가운데에 데라와 그의 가족들이 흩어진 이유도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행전 7장을 볼 때 스데반은 이 사건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연구하고자 할 때 스데반이 사도행전 7장에서 말한 것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되는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 7장은 모든 구약의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장입니다. 이것은 요약인데도, 하지만 그 역사에서 기록하지 않았던 것을 스데반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스데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그에게 보여" 우리는 그전까지는 단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란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도행전 7장을 읽을 때에 하란에 있기 전, 그보다 훨씬 전에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꽤 초기부터, 데라가 아직 살아있을 때부터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인해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미 떠나라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에게 그 주위를 떠나서 구별되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가족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긍휼의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있는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갈대가 우리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의 인도력을 발휘해서 그의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거기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창세기 12장을 보겠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아주 특별한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해서 명령을 하십니다. 여기서 '떠나라'라는 그 표현이 아주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오직 아브라함에게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셈이 됩니다. 그것은 "너가 떠나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제 히브리어로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좀 더 이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보시길 바랍니다. '렛 라카하'라는 히브리어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ㅎ의 발음을 더 강하게 해서 발음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렛 라카하'라고 하셨습니다. "너가 떠나라." 그것은 너가 반드시 떠나야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 자신을 위해서 떠나라라는 말도 됩니다.
우리는 이것과 관련돼서 주님의 뜻이면은 창세기 22장을 통해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똑같은 표현을 사용해서 '렛 라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 아주 중요한 일을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라 그는 떠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무엇을 또한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가지고 떠납니다. 그 모든 가족을 데리고 떠납니다. 그리고 롯도 그와 함께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5절 마지막에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그런데 6절 후반부에는 "그때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어디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창세기 11장과 또한 사도행전 7장을 보게 될 때에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 될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됩니다. 오직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는데 사실 가나안은 굉장히 넓은 그런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 방향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땅을 너에게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다'라는 그 작은 표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아브라함이라면은 이제 머리를 긁으면서 여기가 맞나?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가나안이라고만 말하시고 정확하게 어디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때에 "아니, 그럼 도대체 어디에요?" 이렇게 다시 질문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왔을 때에 여기에 많은 대적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에 또한 "어떻게 이 땅을 주신단 말씀입니까?"라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이 그의 평생을 다 살고 난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땅도 하나 얻지 못하고 그의 침상에 누워 죽게 될 때에 그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 땅을 주신단 말씀입니까?" 어디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도 몰랐습니다. 언제? 그것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냥 자연스럽게 생각하기는 이것은 그냥 농담이었나 보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나쁜 소식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기근이 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라면 "아니, 왜 이것을 주신단 말씀입니까?"라고 했을 것입니다. 많은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답은 없습니다. 때때로 이 순례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그냥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무얼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지 그분이 알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가지고 계시고 또한 그분의 때를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올라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모릅니다. 그것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길 바랍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는 그 모든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졌던 여러 가지 질문들이 지금 해답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은 결과적으로 큰 왕국이 됩니다. 물론 그 이스라엘이 가져야 되는 그 온전한 가능성을 다 성취한 것은 아니지만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그 이스라엘의 한 나라로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한 왕 앞에 선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가 성경을 믿고 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기에 처한 사람입니다. 그 왕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나에게 당신을 목을 베지 않아야 되는 이유를 두 단어만 말해봐라. 그리고 그 두 개의 단어는 참으로 이 성경이 참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내게 확신이 들게 해라." 그리고 그 순교자는 정말로 그 두 단어를 말했습니다. 했어 두 단어였는데요. "유대인들"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 유대인의 역사가, 그것이 바로 그 유대인의 역사가 성경의 예언의 기록이 참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주 많은 여러 민족들이 있습니다. 여기 중국인들이 있고요. 또한 애굽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인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들은 그 오랜 역사 동안 유지해온 그러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왕국들이 왕성했지만 지금은 멸망하고 사라진 많은 나라들을 수없이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리아' 그것은 아주 큰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라지고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베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어떻습니까? 그 왕국이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완전히 망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렇습니다. 여러 많은 나라들이 다시 망해버리고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스라엘만 살아남은 것입니다. 한 왕국이 망한 후에 다시 살아난 유일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 나라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1948년에 다시 이스라엘이 나라로 세워졌습니다. 어떤 한 나라가 망하고 2천년이 지난 후에 다시 세워진 나라가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언어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보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리아 언어는 사라지고 사용되지 않습니다. 아람어는 이제 사용되지 않은 사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인들이 고대에 사용했던 그들의 상형 문자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이 고대 히브리어만 다르게 오늘날의 그 이스라엘 민족의 이스라엘 나라의 그 나라의 언어가 된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늘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면, 그리고 몇 여러 그리스도인들도 그의 답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다 아직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어디서, 어떻게, 언제, 우리가 질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 격려를 또한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계속 주님께 두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은 너무나 복잡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그 처음과 끝을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해답에 대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의 평생 가운데서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참 그게 이제 우리의 문제인데요.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런 질문들의 해답을 모두 다 알기를 원합니다. 지금 알지 못하면 결코 알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인생이 단지 짧은 그냥 임시적인 지나가는 순간이라는 것을 까먹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순례자처럼 이 땅을 걷고 있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땅에서 몇 년을 더 살겠습니까? 50년, 60년 더 되겠습니까? 70년, 80년을 더 살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운이 좋다면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100년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그런 프로그램 가운데서 단지 한 작은 점에 불과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미래가 그것은 영광스럽고 위대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알게 하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그 모든 것을 꼭 다 알아야 된다고 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제 장차 올 그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면 그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기근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는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하란에서 모든 것을 두고 다 떠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가나안에 온 사람입니다. 여기의 삶이 더 좋을 거라고 기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더 낫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근이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뭘 해야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합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생애를 요약해 주는 한 동사가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렛 라카하'라는 단어를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이것은 '할라크'라는 다른 단어에서 나온 동사입니다. 이것은 '걷다'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기를 가라, 저기를 가라, 할 때 아브라함은 걸어서 이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는 아브라함의 그 이동을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단어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디든지 갈 때에 그는 이렇게 걸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그때는 그 단어가 아닌 다른 단어가 사용이 됩니다. 그 '걸어가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것은 아브라함이 지금 그렇게 내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기록하기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애굽으로 낮아지는,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지형적으로도 아브라함은 고도가 낮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그가 지형적으로 그렇게 낮아진 곳으로 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적인 상태도 낮아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때때로 팬데믹에서 우리의 사업이 잘 되고 있지 않을 때에 그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또는 암에 걸렸을 때, 때때로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내가 뭘 해야 되지라고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가 그분을 계속 의지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그것을 실패할 때가 있지만,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내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손으로 뭔가를 해봐야겠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내 생각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애굽으로 내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됩니까? 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그러한 속임수에 동조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건 내 아내가 아니고 내 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걱정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아내를 취하고 나를 죽일까 봐 걱정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도 그와 같이 걱정합니다. 우리는 쓸모없는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건 사실 사실이 아닌데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필요 없는 걱정을 많이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순간까지 오게 됩니다. 걱정하고, 걱정하고, 계속 걱정만 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 여러 가지 이렇게 될 거야, 저렇게 될 거야, 잊지도 않을 것을 미리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 저렇게 해야겠다, 그래서 내 아내가 아니고 내 누이라고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이런 말을 들을 때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가 75세에 이제 나오게 됩니다. 제가 올바르게 기억한다면 사라는 그때 당시 10살이 아브라함보다 어렸을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자매님들이 웃고 계시는데요. 여기 이러한 걱정이 정말 할 만한 걱정이었을까요? 여러분도 65세가 되었어도 계속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라도 그랬습니다. 65세가 된 이 여인에게 그 많은 애굽인들이 정말 아름답다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와 같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자매님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고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모든 형제님들이 그것의 그런 영적인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특별히 이제 젊은 형제 자매님들이 이제 그런 결혼에 대해서 말레이시아는 어떻습니까? 라고 저에게 자주 묻습니다. 그래서 제가 때때로 이런 문제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해줍니다. 때때로 말레이시아에서 이제 젊은 자매님들이 말하자면, 영적으로 '톰 크루즈' 형제를 찾고 있습니다. 그냥 외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들도 자매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찾고 있습니다. 참으로 슈퍼 모델과 같이 예쁜 자매를 모임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런 분은 없습니다. 참 아름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내적인 아름다움에,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그것을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어찌 됐건 사라는 65세에도 불구하고 이제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실제로 그녀를 취해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그로 인해서 재앙을 내립니다. 바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게 왜 이렇게 된 것이냐고 묻습니다. "이 이 여자가 당신의 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제 이 여자는 당신 아내고,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주셨다. "네가 나한테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앞에 '렛 락카하'라는 단어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실 때 사용하시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사용합니다. "당신이 나를 잘못되게 만들었다. 내 삶과 내 가족의 생명을 앗아갈 뻔했다." 그리고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레크'라고 '나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로는 '렛 라카하'라고 하나님과 똑같이 그 전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표현의 첫 번째 단어 '레크'를 사용해가지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 히브리어 '레크'가 영어로 어 다리 레그과 같다고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너의 다리를 사용해서 여기서 당장 나가라라고 내 나라에서 나가라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바로가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을 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처음에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상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란에서 '렛 라카하'라고 떠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애굽에 와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을 사용해서 우리를 책망하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가 '레크'라고 했을 때, 참으로 아브라함은 마치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바로의 입을 사용해서 지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를 사용해서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입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애굽에서 나가라. 아브라함은 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다시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브 우리가 애굽으로 내려간다면 우리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인 척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속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어떤 면을 분명히 다르게 바꿔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삶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삶을 2개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중에는 다른 삶을 살고, 주일에만 아주 거룩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것은 이중 스파이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바로의 입을 통해서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가라." 그리고 아브라함은 나가게 됩니다.

다음 장에 대해서 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