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림, 그리스도 > 기드온 쿠 형제님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가지시고 또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오후 시간은 결코 쉽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저보다도 여러분이 더 힘드실 거라 생각이 듭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종종 우리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요. 여러분이 졸리거나 피곤을 느끼면 여러분이 이제 잠을 깨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지금 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여러 성도님들이 "기드온 형제님 참 이제 피곤해 보이십니다."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하지만 통역하는 강형제님이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단지 열 단어만 말을 했는데 한국어로 통역하면서 20마디나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단어로만 따지자면 통역하는 형제님이 저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머릿속에 있는 것만 말을 할 뿐입니다. 단지 말을 많이 해야 될 뿐만 아니라, 저는 말도 하고 듣기도 하니까 통역하는 분이 더 힘든 것입니다. 참으로 통역하는 형제님이 저보다 더 그런 면에서 수고하고 있습니다.다시 한 번 여러분께서 이런 시간에 함께 교제를 나누길 원해서 오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에 아주 중요한 장을 보고자 창세기 22장입니다. 창세기 22장 전체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창 22:1-24).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짧게 몇 구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부터 16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4-16).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부터 19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 보배로운 말씀으로 인해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제 지난 시간 이후로 꽤 빠르게 진도를 나가서 지금 22장을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삭이 태어난 그런 장면들은 그냥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라는 그가 이삭을 낳고 그 아브라함의 아들로 낳은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또 다른 아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이스마엘입니다. 그래서 이 이삭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 낳은 아이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노년에 얻은 아들입니다. 참으로 그와 같은 나이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사라가 그 웃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이 없어서 그 하나님의 약속을 들을 때에 웃었다라고 우리는 종종 말을 합니다. 물론 사라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주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사라가 웃기 전에 아브라함도 웃었다는 것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17장에 가보면 아브라함은 단지 웃었을 뿐만 아니라 정말 바닥을 뒹굴면서 웃을 정도를 그가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아이를 낳을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냥 사라가 웃었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이 그는 엎드려가지고 크게 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 표현을 그대로 우리가 이해하자면 그는 정말 바닥을 구르면서 웃었고 그의 믿음도 그와 같은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인내하셔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언약을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제 3명의 방문객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을 때에 이제 사라는 부엌에서 그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라는 웃고 그리고 거기 그로부터 이삭의 이름이 나오게 됩니다.
그 이삭의 이름은 히브리로 하면은 '이스 하크'라는 그런 히브리어입니다. 그것은 웃다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받은 것 중에 얼마나 이상한 이름입니까? 저에게 얼마 전에 형제 자매님 여러분이 저의 중국어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답변하기를 저는 영어 이름을 좋아하는데 저의 중국어 이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여권에 나와 있는 대로 저의 영어 이름은 기드온 쿠 입니다. 그런데 여권에 중국어 이름도 역시 같이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제 중국어 이름을 말해주기를 싫어합니다. 저는 이 중국어 이름을 한번 바꿨으면 바랐습니다. 하지만 제 이름은 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제 중국어 이름은 어떤 이 특정한 중국 한자를 가지고 있는데요. 그 한자는 두 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는 이제 '큰 형'이라는 뜻이고, 제가 가장 맏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단어는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곤충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저를 이름을 가지고 놀렸는데 저에게 벌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받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임의 부모님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합니다. 아이 이름을 지을 때 조심하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고려해야 되는 것은 그 이름을 쉽게 웃길 수 있는, 다른 친구들이 비웃을 수 있는 그런 이름으로 바꾸는 이름은 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은 웃음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을 분이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그 아들을 이삭으로 이름을 부를 때에, 아마도 이제 이삭이 어렸을 때 이삭이 잘못하면 "이삭아, 그렇게 하지 마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그를 불러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못한 그 때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삭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그 때를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것을 또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창세기 21장 그 앞장을 읽어보실 때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21장에 사라와 하갈 사이에 또 여러 가지 일들로 말미암아 하갈은 그 집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또한 그에게 약속하시기를 이스마엘도 또한 큰 민족을 이룰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떠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삭만 그 집에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22장의 배경은 아브라함에게는 오직 한 아들만 집에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미 아브라함은 이삭을 가장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삭만 집에 남아 있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의 시험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22장 1절에 "그 일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그일'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 앞장에 일어난 모든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오직 이삭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고 계십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그 이삭마저도 데려가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이 시험의 어려움이 어떠했을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부르시자 이제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네 아들을 취하여" "너의 독자 이삭을" "네가 사랑하는"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정확하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어에서는 그 목적어를 지칭하는 어떤 특별한 지시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독자들로 하여금 그 목적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지칭해 주는 그러한 표시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내가 볼을 찬다라고 말할 때 이 '차다'라는 것은 '동사'이고 그리고 '공'이 '목적어' 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는 그 공 앞에 이것이 목적어다라고 표현해 주는 '지시자'가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적어다라고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찰 필요가 없습니다. 공을 차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는 여러 개의 그 목적어를 가르치는 지시자가 나옵니다. 이 목적어를 나타낸 지시자는 또한 독자가 이것을 읽을 때에 보다 더 천천하게 천천히 주의 깊게 읽도록 만듭니다. 그 목적어 지시자도 같이 발음을 해줘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어 지시자는 '에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장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어 지시자를 계속 사용하십니다. 그 목적어에다가 각각 강조하면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오해 없이 분명히 듣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에스' "너의 아들"이라고 목적어 지시자를 붙여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에스' "너의 사랑하는 독자" 그리고 '에스' "이삭"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라." 그래서 각 목적어를 말씀하실 때마다 천천히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은 그것을 명확하게 주의 깊게 듣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하나님 제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것입니까? 물을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각각의 목적어를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가 오해의 여지가 없이, 다시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스마엘은 지금 떠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마지막 남은 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고 계신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초점을 계속해서 분명하게 여기로 나타내 보셨습니다. "너의 아들" "너의 독자" "이삭"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이삭 말고 누가 그 사람이겠습니까?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여기 기록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뭘 말했는지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말씀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무엇이라고 말씀하겠습니까? 만약에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라면 하나님에게 맨 먼저 하는 단어는 "그러나"라고 먼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리고 여러분은 그 외에 이어지는 여러 가지 것이 안 된다는 설명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완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입에서 어떠한 '그러나'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 한 번 다른 질문을 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 다음 구절 3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거나 저라면, 만약에 우리의 유일한 독자를 드리라라는 명령을 받게 됐을 때에, 단지 그냥 하나님께 그러나라는 말만 할 뿐만 아니라,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아브라함처럼 일찍이 일어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녁까지 계속 시간을 끌고자 할 것입니다. 혹시 시간을 끌어서 하나님이 그 마음을 바꾸지는 않을지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좀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즉각적으로 그가 급하게 이와 같이 말씀에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주 너무나 어려운 일을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납니다. 그리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 이삭을 드려야 되는 그 장소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3절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계속적으로 연속적으로, 그가 급하게 준비해가지고 빠르게 행동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고, 나귀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가지고, 자기의 지시하신 곳으로 간 것입니다. 그는 단지 그냥 시간을 끌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떠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계속적으로 연속적으로 빠르게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이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그 장소", "그 장소" 이러한 표현을 여러분이 또한 주의 깊게 계속해서 살펴보시길 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 장소에 대해서 이미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곳" "바로 그 장소" "그곳" 거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22장에 나와 있는 '그 장소'는 다른 장소입니다. 이 장소는 하나님의 집은 아니고 바로 이 장소는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이삭을 희생 제사로 드리는 장소가 됩니다. 그리고 이 장소가 상징적으로 갈보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이고 가장 위대한 그 장소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 곳이, 그 이삭을 희생 제사로 드리는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장소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아버지와 아들 간에는 별로 대화가 없습니다. 참으로 이 현대 시대는 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라던 시대에는 아버지에게 긴 대화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주로 아버지가 "학교 어땠니?" 그러면 "좋았어요." 이와 같이 그냥 하루에 짧은 두 세마디만 하고 끝나는 게 아버지와 아들과의 대화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에는 또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하늘부터 땅까지 여러 가지 일들을 다양하게 말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아버지가 권위의 상징이었고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브라함과 이삭과의 관계도 어떠했을지는 잘 모르지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참 여기도 대화가 많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3일 동안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4절에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그들이 어떤 대화를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많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 장소까지 3일 길을 걸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들의 그 심장에 칼을 꽂아야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들에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것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그러한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참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 아브라함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그 순종으로 인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을 순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장소를 이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환들에게 여기 머무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가서,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이 무슨 의미로 한 것입니까? 저는 이것을 볼 때 궁금하게 생각이 됩니다. 그냥 단순하게 내가 돌아올 거라고 그냥 말하는 그런 일상적인 의미였을까요? 아니면 정말로 이 소년이, 아들이 나와 함께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말한 것일까요? 그래서 사실 이 사환들에게는 아브라함이 조금 다 말해주지 않고 약간 거짓말을 한 셈이 됩니다. 만약에 이 소년이 자기와 함께 정말로 돌아올 것을 말했다면, 제가 이것에 대해서 지금 당장 답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머릿속에 두고 한번 나중에 함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어떤 일을 합니까?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그리고 불을 취하고 그리고 칼을 손에 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동행하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이 동행하였다라는 표현은 사실 여러 번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나란히 서서 그 산을 올라갔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아름다운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실 때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항상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을 의식하면서 행동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아들과의 그 가까운 교제가 항상 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지나 십자가로 나아가실 때에, 그래서 그분께서는 "아버지가 항상 나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아들이 결코 그것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그 완전한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 분이 동행하셨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그림을 여기 22장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22장의 그림이 이상적인 그림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 공사역을 통해서 십자가로 나아가실 때 그분은 자기가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주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이삭의 경우에서는 그러한 부분에서 이제 불완전한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지금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나아가고 있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로 가시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지금 자신이 이 순간에는 번제단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직 어둠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무를 아들에게 지웠습니다. 그 나무는 그 자신이 죽게 되는 그 불을 뿜는 나무가 됩니다. 참으로 그가 자신이 희생 제사로 드려지는 것을 이제 태우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구약에 우리에게 아주 기본적인 교훈을 알려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여기에 젊은 청년 형제, 자매 여러분들은 아주 잘 배우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 성경에서 나무가 나올 때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어떤 나무를 볼 때마다, 그 나무는 항상 우리 주님의 인성을 가리키는 도구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나무를 이삭에게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중에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분께서는 참으로 사람이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무의 여러 가구들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많은 가구들이 나무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옆에, 그 표면에 금으로 싸여집니다. 언약궤가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금상이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금 향단도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어떤 가구들은 완전히 금으로만 만들어진 가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은 싯딤나무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금으로 표면이 덮여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게 알려주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그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면을 감싸고 있는 금은 그분이 사람이 되어 오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이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청년 여러분들께서 이것을 주의 깊게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50%만 사람이고 50%만 하나님이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100% 하나님이시며 또한 100% 사람이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때에 그분이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 중 어느 작은 것 하나라도 없어지고 버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실 때에 그분의 하나님의 영광을 베일로 가리셨지만, 하지만 항상 어느 순간에나 그분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이삭은 이와 같이 나무를 지고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구주의 인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삭이 그 나무를 지고 왔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불과 칼을 손에 들고 갑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아름다운 그림을 바라보게 됩니다. 참으로 십자가에서 그 아들에게 형벌을 내리신 분은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칼을 들고, 그분께서 불을 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우리에게 내려지는 그 심판이 이제 아들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신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 나무를 지고 아브라함이 불과 칼을 든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제 여기서 이삭은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전에 했었던 그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를 드리러 가는 여행과 비슷한데, "아버지 여기 불과 나무는 있는데 그 짐승은 어디 있습니까?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습니까?" 참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어려운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 한국에 와서 아주 어려운 질문들을 많이 듣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익한 그런 시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께서, 또 젊은 청년 성도님들께서 계속 그런 질문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시는 질문이 이제 좀 더 어려워진다면 저는 질문마다 이제 2달러씩을 받겠습니다.(웃음)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통역하는 형제님을 통해서 질문도 가능합니다. 다르게 통역한 것 같습니다마는(웃음)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잘 설명해 줍니다. 여러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거짓말 했네,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지만 사실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 순간에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대답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대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르쳐주신 대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실 것을 아브라함이 그대로 대답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하기를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이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서 참 성경적이고 그리고 영원토록 그것이 참된 그 진리의 말을 그 순간 대답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또 다른 사람이 그와 비슷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는 아마도 이 구절을 생각하면서 그 말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는 이 대답을 기억하면서 그 말을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비록 그 연약한 가운데에 대답을 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대답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답은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그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예비하시리라. '번제할 어린 양을' 침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말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그 하나님의 어린 양.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역사 가운데 많은 경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주 자신의 짐승을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들이 돈을 내고 준비한 그런 제물입니다. 그것도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것을 소유하게 한 것이지만요.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준비해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직접적으로 정말 문자적인 그대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번제할 어린 양은 친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8절 후반부에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한 곳에 이른지라" 그 표현도 나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은 단을 쌓았습니까? 아브라함의 일생 가운데 그는 4개의 단을 쌓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우물을 이삭이 파게 됩니까? 많은 우물을 팠는데요, 그리고 또한 야곱은 얼마나 많은 기둥을 쌓게 됩니까? 그것을 4개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여기 창세기에 나온 이 위대한 인물들은 이와 같은 쌓고, 파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을 쌓는 것과 연관돼 있고, 이삭은 이제 우물과 관련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기둥과 관련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면 또 한 명의 유명한 사람을 함께 살펴볼 것인데요. 그것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이제 무엇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까? 그는 감옥에 있었던 걸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요셉은 그의 옷과 관련되어 유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께서 그 요셉의 옷이 언급된 곳을 한번 쭉 찾아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요셉의 삶과 그의 섬김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채색 옷을 줍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그의 옷을 벗겨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그가 다른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디발의 아내도 그의 옷을 취해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 있을 때 그 죄수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제 감옥에서 나올 때는 그 죄수의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바로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었을 때 바로는 그에게 이제 높은 옷을 그에게 선사하는 것입니다. 이제 요셉에 대해서 여기까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일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여기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것들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4개의 단을 쌓았는데, 그중에 어떠한 단도 정관사를 써서 '그 단'이라고 된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22장에 있는 그 단은 '그 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이 앞에 나와 있는 장에 단들은 이제 여러 개의 단 중에 그냥 하나의 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22장에서 그곳에 지은 단은 바로 '그 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도 성령께서 이 단이 특별한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이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3장에서 이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 나오실 때에 "'그곳에' 십자가에 못 박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곳이 그 외에 다른 곳일 수가 없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골고다가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바로 그 장소다. 갈보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바로 그 장소다. 그 언덕 위에, 참으로 해골의 곳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 장소, 그리고 성벽 밖에 있는 바로 그 장소, 그 범죄자들을 죽이는 바로 그 장소, 그 갈보리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주님을 못 박았더라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도 바로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에 무엇을 하게 됩니까? 나무를 버려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게 됩니다. 이 나무는 이삭에게 지워서 그가 지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죽음을 위해서 깔리게 됩니다. 여기에 어떠한 대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이 나눈 유일한 대화는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입니다.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떠한 대화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냥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이삭이 그 단 위에 놓여 있는 장면입니다.
제가 이제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제가 이것을 한번 찾아보고 싶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33년간 공생애를 이 땅 가운데서 행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때 아버지께 올리신 그 기도의 내용을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기도 중의 일부를 기록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요한복음 17장에 나온 주님의 기도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겟세마네에서 올리신 기도를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그 사이에 그 외에 더 많은 대화를 듣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자주 우리 주님께서 산에 올라 홀로 기도하셨다라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하늘에 가게 됐을 때에, 우리가 하늘나라 가서 다윗이나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그런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먼저 찾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아주 그들을 보고 교제를 나누는 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참 여러분이 저한테 질문하신 것처럼 저도 하늘나라에 가면 그들에게 제가 할 질문 리스트를 여럿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실 때에 아버지께 드리신 그 대화의 내용을 들어보는 것이 아마도 가장 귀한 일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거기는 바로 그것은 지성소에 비교할 만한 가장 거룩한 그런 대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러한 가운데 요한복음 17장에 주님의 기도를 듣고 듣게 되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특권입니다. 참으로 그 다락방 강화에서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거기 적혀 있습니다. 저는 수년간 그 17장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열심히 그것을 연구를 해도, 하지만 그 깊이의 일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 기도에 담긴 그 부유한 의미의 그 높은 수준에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요한복음 17장을 참 열심히 상고하고 연구하면 할수록 참으로 그러한 부족함을, 그리고 또한 그 기도의 부유함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나라에 갔을 때 그것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실 때에 아버지와 그 기도로서 나눈 대화의 내용이 많이 우리에게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 창세기 22장에도 마찬가지로 그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이 자리에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이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눈앞에 더 놀라운 것이 펼쳐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 이삭을 묶게 됩니다. 여기에 그 이삭이 이러한 가운데에 못하게 하였는지 그걸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 이삭이 그것을 저항하였는지 그런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 이삭이 그러한 가운데 다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에게 잘 앉아 있어라라고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아이들은 "내가 왜 지금 앉아야 되는데?" 10개 넘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삭은 그렇게 단에 결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질문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저항도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 우주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게 됩니다. 왜 복음서 기자들은 우리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기록을 했을까요?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구주의 마음속에 어떠한 의심이 흔들림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그 십자가로 나아가기에 주저하셨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 기도가 우리에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복음서 기자들이 그 기도를 기록한 이유는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도 그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이 결코 가볍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인성에 대해서 아주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분 자신도 그 사람이신 것이 참으로 실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그 십자가는 실제적인 그 육체의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시는 그런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은 그 기도를 기록함으로써 우리 주님께서는 그 심판을 실체적으로 느끼고 계셨고, 알고 계셨고, 그것을 경험하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그 구주의 마음속에 한 작은 부분도 그 의심과 주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갈보리의 어두움이, 그 고난이 그분에게 실체적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또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냥 물 좀 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이제 식초를 줍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또한 주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또 실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그분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경감시킬 능력이 있다. 그냥 놀라운 능력을 사용해서 그분이 육체로 당하고 있는 고난을 다 없애버릴 수 있는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사람처럼 그분은 고난을 받으시고 그 죽음의 형벌을 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목마름을 제거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고 있는 고난은 그분이 인간으로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받고 있는 실질적인 고난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도 그 신성을 저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으로서 그 능력을 사용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경감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자원에서, 그리고 온전히 그 십자가의 고난을 다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사함을 온전히 치르시기 위하여,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순종함이 되어"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는 이삭으로부터 어떠한 저항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저항도 없이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 단에 결박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칼을 듭니다. 그리고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는 순간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다 행하고자 합니다. 아직 여전히 이삭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다른 말이 들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였습니다. 여러분께서 누가 그리고 누구에게 말을 했는지 한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사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표현이 성경에 나올 때마다 몇 개의 예외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두 번째 위격인 아들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그러한 내용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얘기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러분께서 제가 말씀드린 것을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이 여호와의 사자께서 우리 주 예수께서 그 칼이 이삭의 가슴에 꽂히는 순간에 그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것을 이제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오, 다행히도 아브라함이 이제 이삭을 죽이지 않아도 되겠구나.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또 이삭의 관점에서도 생각합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우리는 여호와의 사자의 관점에서 한번 이 순간을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이것을 외치는 순간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주 예수께서 네 손을 대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때가 오면 이것은 내가 할 일이다. 우리는 이 하늘로부터 온 소리를 듣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제 이삭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때가 이르면, 그 아들을 아끼지 않은 때가 올것입니다. 그 갈보리에, 그 단에 눕히게 되는 그때는 아들이 아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 단위의 그 아들을 놓고 결박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참으로 그때는 이 해도 그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습니까? 이삭에게 있어서는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하늘에서 소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이름이 두 번 연속으로 불려지게 될 때 그것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같은 이름을 두 번 부를 때는 뭔가 급히 바꾸셔야 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이제 사울은 완전히 변화되게 됩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날의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제 새로운 것이 이제 변화될 것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그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것이 가장 위대한 두 번 부르는 것이 있겠습니까? 여기 많은 이렇게 두 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어떤 사람들은 "사울아 사울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부른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떤 경우는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그렇게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경우가 여러 군데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그 두 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입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항상 하나님께서 사람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단 한 번,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실 때 그 사람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리고 또한 저는 이것을 경건하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 번 부를 때 하나님께서도 변화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다루심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와 전이 다른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 이후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다루시는 것이 완전히 달라지는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 번 부른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신 그분은 이제 미래에 그 자신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실 것을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13절에 그다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여 살펴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우리가 이제 여러 사본을 살펴볼 때에 그 정확한 원문은 우리 한국어 성경처럼 그가 눈을 들어 살펴보았을 때 한 수양이 뒤에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을 조금 이제 상상력을 더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에 여러분이 이런 점에서 여러분의 상상력을 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 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고자 할 때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삭이 내려오게 됩니다. 여기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잠시 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 양이 등장합니다. 이 양은 이제 치와와처럼 작은 짐승이 아닙니다. 작은 말티즈 같은 종이 아닙니다. 이 양은 아주 큰 그러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아서 그가 이미 거기 있는데 아브라함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까 거기 갑자기 수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양이 그 앞에 갑자기 등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아마도 그 양이 그 뒤에 있었나 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제 다른 번역본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기 '뒤에 있다'라는 게 빠져 있고 그냥 눈을 들어 살펴보니까 한 양을 본 것입니다. 이 양은 도대체 어떻게 거기 나타난 것입니까? 그 양은 그리고 뿔이 있는데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 그리고 그 지형은 많은 이제 수풀이 있는 그런 땅입니다. 물론 마른 땅이지만 그런 숯불이 군데군데 많이 나 있습니다. 갑자기 그런 가운데 수양이 나타날 확률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수양이 갑자 나타났고 또 그 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너무나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이상할 정도로 그게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앞에서 말한 것이 이제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번제할 어린 양은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양을 거기에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이 여기로 저기로 도망치지 않도록 그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게 하셨습니다.
이 양에 있어서 가장 강한 부분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뿔입니다. 그 양에 있어서 가장 강한 부분이 그가 걸려 있게 만드는 그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양의 가장 강한 부분이 그 양이 거기에 잡혀 있도록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계실 때에도 사람들은 많이 주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가 아직 이르기 전에 주님을 잡아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져 주님을 죽이고자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떠한 시도를 얼마나 많이 하든지 간에 그들은 그것을 이루어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가 이르자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때가 이르렀다고 하셨을 때, 단지 24시간 안에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종 이야기하는 대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1시간 빠르게 된 것도 아니고 1시간 느리게 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그 순간도 1분 더 빠르게 된 것도 아니고 1분 더 늦게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1분 1초의 시간을 모두 다 주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그 정확한 시간에 또한 정확한 장소인 그 갈보리 십자가에 주님이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있게 한 것입니까? 그것이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그 순간 달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시간 전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가지신 바로 그 능력이, 그 능력이 주님이 가지신 능력이, 주님의 죽으심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 주님께서는 갈보리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 양의 가장 강한 부분은 그 뿔입니다. 그것이 능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양의 가장 강력한 것을 나타내는 그 뿔이 그로 하여금 그 정확한 때에 정확한 장소에 있게 한 것입니다. 바로 그 수풀에 뿌리 걸려 잡혀 있는 수양이 우리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로 그 정확한 때에 정확한 장소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이해하셨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그 양은 이삭 대신에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이 장소에 이름을 이렇게 붙이게 됩니다.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건 "야훼 이레"라고도 우리가 발음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로 '여호와께서 보실 것이다.' 우리는 22장에서 계속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고, 보고, 보고라는 말이 자주 나온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역사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여호와 이레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이 그 이삭에게 말했던 대로 그것이 비록 그가 아직 알지 못하고 연약한 때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했던 말이 참됨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러분께서 아브라함이 이 전체 그 일을 마치고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때때로 신약 성경은 그 아브라함이 이 사건 가운데서 느꼈을 이제 감정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 읽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그 아브라함의 머릿속의 사고, 그 생각들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생각한지라"라는 것은 우리가 이제 수학을 계산을 하는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로부터 우리는 이제 '로직'이라는 그 '논리'라는 뜻을 나중에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이제 제가 이렇게 한번 바꿔서 보다 더 분명하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논리적으로 생각한지라." 이제 여러 가지 것들을 함께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합이 어떻게 될지를 계산을 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 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원하신다면 능히 하실 수 있는 분이다라고 결론을 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발휘됩니까? 우리가 이 믿음을 발휘할 때 그냥 맹목적으로 흔히 맹목적으로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그냥 믿어, 그냥 믿어라고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믿는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되는지, 그리고 왜 믿어야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할 때,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 바로 이 단어 '논리'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4장에 그 '여기다'라는 단어가 여기 사용된 같은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라고 칭하셨다"라는 그 부분에서 똑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께서 이것을 주의 깊게 들으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결코 비논리가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된 그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내 믿음은 왜 이렇게 약한 거야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약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이라는 것은 이 진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알면 여러분은 무엇을 믿는지를 알 것이고,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성장하는 그런 방법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매일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동안 성경을 읽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무논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논리를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그는 그냥 맹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속에 그는 분명하게 신학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 교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다시 살리시길 원한다면 그분에게 뭐가 어렵겠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이 그 죽음 가운데 살아나지 못할 것도 가능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 믿음이라는 것은 항상 순종과 복종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수 있는 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실 것도, 않으신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 같이 있습니다. 여기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찬송에 나오는 대로 이것 외에 다른 복된 길이 없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길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에서, 또한 창세기 22장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따르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아브라함은 분명하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떠한 결과든지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말미암아서 이 아들이 온 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을 데려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권리라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믿음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시험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 대해서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 버렸습니다. 1분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맞추고자 하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그것은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 이렇게 조금 다르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자세하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간단하게 이렇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히브리어에는 중성형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영어에 해당하는 it라는 것이 없습니다. 남성형과 여성형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제 그 사람인지, 아니면 그것인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구절을 읽을 때 여호와의 산에서 그것이 준비되리라고 했을 때 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저에게 있어서 이것이 많이 생각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한번 제안을 드립니다. 이렇게, "이 여호와의 산에서 그분이 준비되리라" 또는 "그분이 보여지리라" 이렇게 이해하도록 제안을 드립니다. 여기서 그분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신 것입니까? 우리가 역대하 3장을 볼 때에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이 바로 이 장소에, 모리아산에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미래에 있을 그 성전도 바로 이 장소에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이 여호와의 이레는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그런 경험으로 끝나고 말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제 바로 그 장소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이 여호와의 이레의 온전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장소에 그 성전에 여호와께서, 우리 주님께서 그 자리에 앉아 계시고 그분이 거기서 보여지시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더 늦게 끝낸 것에 대해서 양해를 구합니다.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다음 집회에서는 10분 더 일찍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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