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 방법 > 강성찬 형제님
누가복음 18장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여기 주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여기 바리새인은 이제 그때 당시에 종교적인 행위를 아주 철저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기록된 것처럼 "토색을 하지 않고" 이제 토색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돈을 강압적으로, 억지로 뺏어내는 이제 그런 것을 이제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 하지 않고 "불의를 행치 않고 간음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 사람은 이제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뿐만 아니라 이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자기가 얻은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고 있습니다. 이게 여기 나온 한 사람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이제 우리 시대에는 이제 세금을 걷는 이제 그런 이제 직업이 괜찮은 직업이지만 이제 그때 당시에 이 세리라는 것은, 그때 당시에 세금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정해진 룰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임의로 다른 사람에게 세금을 정하고 그것을 취하고 이제 불의하게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되는 돈이 아닌 억지로 돈을 뺏아가지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이제 그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이제 불의한 자들, 죄인들, 나라를 배신하고 자신의 동족들을 등쳐먹는 이제 그러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여기까지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둘 중에 누가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겠습니까?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질문을 드리자면 이 둘 중에 누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리새인이죠. 다른 사람의 물건을 억지로 뺏은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는, 그리고 꼬박꼬박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그 바리새인이죠." 라고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이걸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인정하시는 것입니까? 이 말씀을 보면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을 좋아하나 보다 이렇게 잘못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차이점은 거기에 달려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 그 바리새인이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한 것은 맞습니다.그리고 세리가 분명히 나쁜 짓을 한 것은 맞습니다. 그것은 바꿀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첫 번째로는 이 세리의 태도를 보면 세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선 첫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세리는 13절에 보면은 멀리 서 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합니다. 그가 하는 것은 그냥 가슴만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그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서가지고 당당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 이유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 세리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으로소이다" 그는 자기가 심판을 받아야 되는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 세리가 가지고 있었던 중요한 두 가지 차이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좀 더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종교와 성경의 하나님과의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바로 이 세리가 보여주는 그 두 가지 차이점입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들은 여러분께서는 "다른 세상의 신들도 두려워하는데?"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다른 우상들을 사람들은 많이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왜 우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제가 알고 있는 이제 어떤 한 분은 "내 아들이 아팠을 때에 그 아들을 위해서 어떤 우상 신에게 빌었는데 그 아들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우상을 떠나면은 그 우상이 다시 그 아들을 병들고 아프게 할까 봐 그게 두려워가지고 그 우상을 떠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걸 두려워하시더라고요.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아예 복음을 들으려고도 안 하는, 그 듣는 것 자체가 굉장히 두려운 일이 되는 그러한 분인 것입니다. 그분은 그 우상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상을 두려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우상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뭔가 나쁜 일을 할까 봐입니다. 그 우상의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나에게 뭔가 나쁜 일을 할까 봐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여기 이 세리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이 세리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뭔가 나쁜 짓을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세리가 "나는 죄인으로소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 세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죄인이고 그리고 하나님은 죄가 없는 거룩한 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리는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과 세상의 다른 우상과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우상들이 있는데 우상을 거룩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도덕적이지 못한 일을 하도록 장려하는 그런 우상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우상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우상의 수준이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우상의 도덕적인 기준이 자신의 도덕적인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우상도 그런 도덕적인 것을 말하는 우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도덕적인 수준이 사람들 수준입니다. 그것이 최선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는 정말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것처럼 이렇게 비도덕적인 일을 장려하는 우상이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특히 아이들을 그 우상에게 바쳐서 우상이 자신에게 좋은 일을 행하도록 하는 이제 그런 우상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우상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상이 도덕적인 수준이 딱 사람들 수준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도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데 자신의 생각으로 그 도덕적인 기준을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이 정도 하면은 괜찮잖아라고 생각한 만큼 이제 하나님도 이 정도 하면 괜찮겠다고 생각하시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거룩함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거룩한 것입니다. 세리는 그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 거룩함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느낀 것입니다. 그는 그 거룩함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은 그 거룩함의 기준이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이기 때문에 이 정도면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금식하면은 이제 그 정도면 거룩하다라고 말하는데 난 그 이상을 할 거야 일주일에 두 번 할 거야 일주일에 두 번씩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했어, 나는. 하지만 그렇게 했어도 하나님의 거룩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내 길은 너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처럼 그와 같이 너희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성경의 말씀을 들어봐야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이것을 들어봐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임의적으로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이사야 성경을 보면은 이제 천사들이 나오는데요. 이제 천사들은 여러분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이제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들은 이제 죄를 짓지 않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떻게 하냐면 자기의 날개로 자기의 발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는 그 거룩함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제 그와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죄 없는 천사들도 그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참 여러분은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정말로 깨달았다면 이 세리처럼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가 그 거룩함 앞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구나를 인식하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게 정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하는 걸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이제까지 이제 우상 신을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이제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하니까는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원하니까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믿겠다라고 예전에 했던 거랑 똑같이 우상에게 했던 거랑 똑같이 이제 하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이름만 바꿔가지고 예전에는 우상신을 잘 대해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잘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그렇게 합니다. 사실 바리새인은 우상에게도 잘하고 우상에게도 여러 가지 것들 우상이 좋아할 만한 것들 잘 바치고 이제 이제 그게 아니고 하나님을 섬겨야 돼, 하나님께도 잘 할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과 전혀 다른 분입니다. 예전에 하던 방식과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먼저 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임을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이구나 이렇게 회개하고 엎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앞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그 앞에 차마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결코 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어야 됩니다. 이건 사실 이것도 제 우상하고 이제 반대되는 이제 그러한 내용입니다. 우상은 죄하고 상관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죄인이라도 죄를 짓고 있어도 그 죄에 대해서 전혀 뉘우치지 않고 그냥 우상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우상이 좋아하는 일만 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가 반드시 처리돼야 됩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가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처리돼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리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여기서 이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단지 저를 동정해 주세요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감정적으로 저를 불쌍하게 여기시옵소서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의 원뜻을 살펴보면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그 피로 말미암아 그 피를 속죄해 주십시오라는 그런 특별한 단어입니다. 좀 이제 어려운 단어가 이제 사용됐습니다. 좀 더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를 받으시고 저를 심판하지 말아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단지 그냥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속죄 제사를 받으시고 그 속죄 제사로 말미암아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심판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러한 뜻이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라는 그런 단어입니다. 이 세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른 우상과 성경의 하나님과의 차이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신명기 말씀을 잠깐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4장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3-24).
여기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다른 존재의 죄에 대해서 아무 상관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혼자만 거룩하시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시냐 하면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소멸하는 불이라는 것은 불은 다른 어떤 것을 태웁니다. 그런데 태우는데 완전히 소멸시켜버립니다.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완전히 태워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 자신이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또한 그 거룩하심을 따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거기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은 모두 다 태워버리시는 소멸하는 불이신 것입니다.
잠깐 다른 한 구절을 또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박국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 좀 뒷부분으로 가셔가지고 하박국서 1장 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참아 보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악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패역을 참아 보지 않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그리고 그분 자신이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지 않는 것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리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고 나는 죄인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이 하신 적이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고 정말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제가 이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심판하신 분이라고 말씀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아주 까다로운 분이셔 가지고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이제 그런 분이라고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한편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하나님과 거리를 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죄가 없었을 때는 하나님과 사람이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그 에덴 동산 가운데서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난 것입니다. 이 세리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도 이제 우상과 차이가 있습니다. 우상이 까다로운 존재입니다. 우상은 항상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우상의 마음에 혹시나 안들까 봐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참 우리가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단은 거꾸로 하나님이 그렇게 까다로운 분이라고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나타나서 한 말이 그 말입니다. 맨 처음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들 때에 사단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기적이어서 너희들한테 좋은 것을 주지 않으려고 그 선악과가 좋은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만 취하시려고 너희들한테 먹지 못하게 한 거다." 하나님이 이기적인 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이 이기적이고 까다로운 분이 아니라 제 우상이 그런 존재입니다. 우상이 이기적이고 까다롭고 그래서 우상은 여러분에게 이제는 영원히 이 우상신과 나의 관계가 괜찮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우상이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의 심사를 살피고 있어야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여러분의 관계는 죄가 문제이고 그 죄가 해결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평안한 관계로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여러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신 분이고 그렇게 그 관계를 가지길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이 하나님과 평안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 죄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평안한 관계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세리는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여기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이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했던 그 단어와 같은 단어가 사용된 부분을 로마서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여기 이제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돼 있는데요. 이 '화목 제물'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앞에서 세리가 말했던 '불쌍히 여기옵소서'라는 단어와 이제 같은 어근을 사용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같은 기본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세리는 자신의 죄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 이 화목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화목 제물은 바로 25절 앞부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화목 제물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그 피를 흘리신 것이 바로 그 화목 제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신 것을 나를 위한 것으로 믿으신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화목 제물로 온전히 만족하시고 여러분을 의롭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다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리는 이것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다른 어떤 것으로는 그 거룩함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세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어떤 금식을 하든지, 어떤 헌금을 내든지 그 거룩함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참으로 그 거룩함을 만족시킬 수 있는 화목 제물을 저에게 예비시켜주시옵소서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한 화목 제물이 바로 여기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신 것은 여러분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를 온전히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기준에 맞게 속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 화목 제물과 관련돼서 요한복음 말씀을 또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으로 가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여기 그 화목 제물에 대해서 그 예수님께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속하기 위한 화목 제물인 하나님의 어린 양인 것입니다. 옛적에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그 예수님에 대한 그림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죄인이 어린 양을 화목 제물로 들고 나와서 그 어린 양을 대신 죽이고 그 피를 뿌리면 그 제사를 드린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 양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진정한 화목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에 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몇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냥 어린 양이라고 되어 있지가 않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이 어린 양에 대해서 특별히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준비한 어린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어린 양을 준비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어린 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바리새인이 자기가 준비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 가지고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수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든지 간에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맞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리는 자기에게 나온 것으로는 그 거룩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하나님께 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화목 제물을 예비해 주십시오라고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어린 양을 친히 예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화목 제물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 없는 분으로서 여러분을 위해서 대신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참으로 그래서 그분은 이제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또 한 가지를 이유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편 말씀을 보겠습니다. 시편 22편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1-3).
여기 시편 22편 1절은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실 때에 그분께서 죽으실 때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여러분이 찾아서 읽어보신다면 이 똑같은 말씀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래서 이 시편 22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그런 시편입니다. 특별히 그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고 또 어떤 마음이셨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 말씀이 굉장히 특이하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 가운데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분께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그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면서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그냥 이제는 다 없는 것으로 쳐줄게." 그냥 이렇게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죄를 차마보지 못하는 분께서 그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께서 공의롭게 심판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받아야 되는 그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의로우신 분이신지를 그 십자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상에서 "주는 거룩하시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셨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는 분위기에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참으로 이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 얼마나 우리와 같은 죄인을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롭다 함을 얻기에 충분하신 분입니까?
또한 그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해서 이제 세 번째 것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그분이 특별히 또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말씀되고 있는지 베드로전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여기서 "이 어린 양의 흠 없고 점없는 보배로운 피로 우리가 구속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이제 썩어질 금이나 은 같은 것으로 구속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이나 금도 쉽게 썩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죠.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 있다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는 그거에 비해서도 그런 썩어지지 않는 금이나 은에 비해서도 더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얼마나 더 가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보배로운 피로 구속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아들이시고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위해서 흘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구속을 받은 자들이 "거룩할지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보배로운 피로 구속받은 자들은 이제 그들이 이제 하나님처럼 그 거룩함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참 의로운 자다 이제 온전히 거룩하게 되었다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으로도 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그 거룩한 생명을 가진 자들에게 가능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상과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차이입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그냥 그가 요구하는 것을 이제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품을 우리가 닮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고 그리고 우리도 거룩하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과 하나님과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분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룩하신 분위기에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그 거룩하신 분위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거룩하신 가운데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 거룩함대로 반드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길 바랍니다. 소멸하는 불로서 그 거룩함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다 태워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멸하시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길 원하시고, 우리를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길 원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화목 제물이십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과 저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모두 다 그 몸으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신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믿으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을 의롭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세리에게 의롭다 하신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참으로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또 구원의 복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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