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모임(요약글)/덕언 말씀(요약)

덕언 : 아브라함의 실패와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

박이레 2023. 6. 18. 11:29

덕언 : 아브라함의 실패와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 / 23년 6월 18일 일요일(요약) / 김보영 형제님

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12:9-20, 개역한글)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창13:1, 개역한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너무나 연약한 모습이고 몰인정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기근이 닥쳐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갑니다. 기근이 왔을때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남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점점 남으로 가다가 종국에는 애굽땅까지 오게 됐습니다.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우거하는 것은 잠시 기근을 피한다는 의미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애굽에 우거하려고 내려간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의 아내를 자기의 누이라고 속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아내가 미인이기 떄문에 자기가 죽고 아내를 빼앗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자기가 살겠다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의 순결까지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의 대신들이 사라를 왕궁으로 데려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후궁으로 삼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인 절차를 거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을 후대해서 많은 재물을 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의 집에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립니다. 바로는 자기가 사라를 취한 것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알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을 크게 꾸짖습니다.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12:18-19, 개역한글)

하나님의 사람이 이방 사람에게 이러한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다. 비웃음과 책망을 당합니다. 참 성도가 왜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됩니까? 그런 책망을 받으면서도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잘못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0장에 가면 이런 일을 또 당합니다. 그때는 남방으로 내려가다가 블레셋 지방으로 가서 또 아내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합니다. 부부라는 사이를 놓고 생각해 보면 사라의 마음이 어땠을까? 얼마나 마음이 어려웠을까? 사랑하는 남편이 남의 남편으로 가라고 한다면 얼마나 괴롭고 남편의 사랑이 그런 사랑인가 하는 낙심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실패 원인을 살펴 보겠습니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9절) 한번에 애굽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심한 기근을 피하다가 점점 남방으로 이동하다가 애굽까지 간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애굽에 우거하려고 했습니다. "내려갔으니"라는 히브리 원어(야라드)의 뜻을 보면 기본적으로 낮은 지대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상징적으로는 지위가 낮아지다, 도덕성이 내려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생각과 지혜를 가지고 판단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하는것은 성도로서의 지위가 낮아질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성도가 할수없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사람들이 탐을 내니까 내줬잖아요.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올때 쓰였던 단어는 '알라크'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좆아 신앙적인 결단으로 본토 아비집을 떠날때는 '아라크'였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들어서 애굽땅으로 내려갈때는 '야라드'였습니다.
"우거하려 하여" 히브리어로 '그루'라는 단어인데 길 옆으로 벗어나다, 염려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애굽땅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두려움을 얻었습니다. 내려가자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머물라고 약속하신 땅을 벗어나서는 안되었습니다. 잠시라도 애굽에 우거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기근이 든 문제로, 그가 신앙의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가 기도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삼년 반을 비가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을때 삼년반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그가 다시 기도했을때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는이도 비를 내리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신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세상 지혜를 의뢰했을때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실패한 아브라함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순종해서 가나안으로 온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책망과 비웃음을 받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습니다. 그 언약이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개입을 통해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고 사라를 돌려 보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시궁창같은 텁텁한 추한 곳에 아브라함이 빠져 있는데 하나님은 그같은 것을 개의치 않고 그 시궁창 같은 곳에 들어가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시궁창에 빠진 아브라함과 사라를 구원해 냅니다.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하나님을 이 말씀 속에서 보게 됩니다. 너무나 잘못된 아브라함이고 사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구원해 낸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부터 보는 것처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더 말씀을 통해서 보는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신가를 봅니다. 사라가 왕의 후궁이 되어 정절을 잃었다면 사실 하나님의 언약은 꺠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민족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잃을 순간에 하나님은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고 바로에게 나타나셔서 사라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과 비슷한 실패를 여러번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연약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12장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온 후에 첫번째로 만나는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머무는 땅에 기근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영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시험하셨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세상적인 생각으로 세상적으로 활동했다고 하는 것이 그의 패인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사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똑같은 상황에 우리가 있다 할지라도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어떤 결정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매를 영적으로 세워주는데 모든 수고와 사랑을 아끼지 않아야 함을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패를 경험한 아브라함이 이같은 실수를 안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20장에서 똑같은 실패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12장은 아브라함 75세, 사라는 65세에 이러한 일을 당했습니다. 65세라면 늙은 나이인데 과연 그때 사라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을까 하는 생각하게 됩니다. 사라가 나이가 많아도 대단한 미모를 가졌다는 사실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미모가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남편이 그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어떻게 지켜줄 것인가 하는것은 지금도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내어줄 남편이라면 그것 참 실망스러운 남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실패 요인을 우리가 보았고 또한 그 가운데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