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4일 금요일 / 한봉래 형제님
< 교회 14. 지역모임의 교제 >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의 책, 그분의 이름으로 모임, 13장입니다. 주제는 지역모임간의 교제라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저희들이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볼때 아주 기본적인 구절로 생각했던 구절입니다. 42절 보면, "저희가" 이것이 최초에 세워졌던 예루살렘 성도들이죠. 이 땅에 세워진 첫번째 교회의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이것이 첫번째 간증입니다. 여기서 교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나머지 단어들은 다 이해할수 있는데요. 가르침 받았다, 교제했다, 떡을 뗐다, 기도했다. 가르침을 받았다. 떡을 뗐다, 이것은 만찬예배인데요. 기도했다. 그러면 저희들이 개념을 쉽게 잡을수 있죠. 그런데 교제했다. 이것이 뭐냐는 것이죠. 교제한다라고 하는 개념을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무엇이 교제하는 것인가? 영어로는 펠로우쉽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도 아주 익숙한 단어입니다. 코이노니아. 영어로는 펠로우쉽, 우리나라 말로는 교제, 이것이 뭔가를 이번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제일먼저 교제에 관한, 교제를 나타내는 첫번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 5:7).
누가복음 5장은 베드로의 배에서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말씀이 끝나고 난 후에 베드로가 지난밤에 물고기를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물을 던져라 했을때에 베드로가 순종해서 그물을 던집니다. 그랬을때에, 주님이 던지라고 한 그물은 복수형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배에 있는 복수의 그물을 다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던진 그물은 단수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단수, 복수가 잘 표현이 안되어 있어서, 그런데 하나만 던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집니다. 큰일났죠. 그랬을때에 베드로가 누구에게 그랬느냐면, 아마도 요한, 야고보로 느껴지는데요. 요한 야고보가 이 갈릴리 바다에서 함께 고기를 잡았던 동업자, 친구들입니다. 자기의 배의 그물이 찢어져서 애써 잡은고기가 다 빠져 나가게 된거죠. 그래서 도와달라고 하니까, 요한 야고보가 와서 같이 도와서 그 잡힌 물고기를 배로 다 끌어내는 일을 합니다. 이것이 교제 입니다. 그래서 이건 세상적인 일에서 교제이죠. 교제는 뭐냐면, 교제는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함께 협력하는것, 이렇게 정의할수 있습니다. 고기를 잡는다는 공동목표를 위해서 베드로도 협력하고 또 다른, 요한 야고보도 협력해서 함께 이 고기를 잡는다. 이것이 '교제하다' 입니다. 그래서 교제를 다른 단어로 바꾸면 우리가 흔히쓰는, 요즘에 쓰는 단어로 바꾸면, '동업하다' 입니다. 동업해서 한 목표를 이루어내다. 같이 한 목표를 이루어내다. 이것이 세상적인 일에서의 교제 입니다. 영적인 일에서의 교제도 있습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 2:9).
여기보면 '교제의 악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악수 했는데, 이것이 교제를 나타내는 악수 입니다. '이 악수 하는 사람은 함께 교제하는 사이입니다.'라는것을 악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악수가 뭐냐 하면, 그것을 다시 보시면,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그래서 한쪽 그룹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아까 배에 나왔던, 누가복음 5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쪽은 바나바와 바울, 이 두사람이 교제 했습니다. 어떤 교제를 했느냐면, 이 두 팀의 공동목표는 '사람들을 구원하자' 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교회에 넣자. 이게 공동 목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하고, 그래서 둘이 한꺼번에 교회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이가 없는거니까요. 어쨋든간에, 그 민족은 어떻더라도, 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교회에서 모임 생활을 한다. 라고하는 공동 목표를, 베드로 팀과 바울팀하고가 함께 이루어낸다. 협력해서 함께, 그분들이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서로 율법문제, 이런문제 함께 의논해서 합의하고 처리하지요. 그래서 교제라고 하는것은 공동 목표를 함께 이루어낸다. 세상적인 일에서도, 물고기 잡는 일에도 교제가 있고 영적인 일에도 교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제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어떤 목표를, 주님이 주신 목표를 사람들이 협력에서 이루어낸다는 것 외에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제 입니다. 이 일을 사람들이 협력하는데, 사실은 사람들의 협력속에 주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함께하는 교제 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제자들이, 열두제자들이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이 명령하셨지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파해라."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셨지요. 그래서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실 보면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능력이 있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고 결국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사용해서 결국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주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고 주님에게 공이 있는거죠. 그래서 ㅇ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과 함께 역사했다. 이것을 교제했다 입니다. 그래ㅑ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교제했다. 구원이라는 공동목표,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공동목표를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님이 보낸 사도들과 하나님이 함께 이루어냈다. 이것이 교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제는 함께 같은 목표를, 협력해서 이루어내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인 일에만 쓰는것이 아니고, 세상적인 일에도 쓰고, 동업자들, 같이 회사를 차려서 이익을 얻어서 같이 분배하고. 그런것이 교제 입니다. 영적인 일에도 있고 그 다음에 주님이 함께하신 것이다. 이것이 교제에 대한 정의 입니다. 두번째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그럼 이런 교제가 사람이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한다는 것인데요. 지역모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를 몇가지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빌 1:7).
여기 빌립보서, 특별히 교제에 대해서는 빌립보서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쭉 살퍄보려고 하는데요. 빌립보 교회는, 지금 사도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빌롭보 교회는 빌립보 성도들이 함께 모여 있지요. 그리고 로마의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7절에 보면, "참예했다" 참여도 아니고 참예했다. '참예' 이것이 옛날식 표현인데요. 참예했다. 이것이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왜 편지를 쓰지요? 서로 교제하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공동목표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있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는, 사도바울과 빌립보 성도 사이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느냐? 왜 그들은 서로 교제하느냐? 이유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이기 때문" 공통점, 은혜 받은자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받은자, 무슨 은혜죠? 예수님의 은혜, 십자가의 죄 용서의 은혜, 죄인 되었을때에,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우리가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믿는자를 구원하시는 그 은혜, 이 은혜에 사도바울도 들어갔습니다. 빌립보 성도들도 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나 빌립보 성도나 다 동일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면에서 은혜 가운데 교제하고 있다. 이런 표현이 나오고요. 그 다음에 빌립보서에서 교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고요. 이들이 어떤 교제를 실제로 행하느냐 하는 것은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5).
개역한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복음의 교제가 있습니다. 복음의 교제는 이런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공동목표, 이것을 위해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협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교제라고 했을때, 공동 목표가 무엇인가?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이 공동목표입니다. 함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위해서 함께 협력하자. 어떻게 협력했냐 하느냐면, 사도바울은 직접 복음을 전합니다. 빌립보 교회뿐만 아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사도행전에 보면, 2차 전도여행때에 사도바울이 빌립보를 갑니다. 빌립보에서 핍박을 받습니다. 감옥에 갇히죠.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귀신을 쫓아버립니다. 그 귀신 때문에, 그 여종때문에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고소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간수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빌립보를 떠답니다. 떠나서 어디로 가느냐면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거기서 또 핍박이 있습니다. 그해서 다시 베뢰아로 갑니다. 베뢰아에서도 또 핍박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로 갔다가 고린도로 가죠. 이렇게 사도바울은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을 위해서 헌금을 합니다. 그들이 헌금만 이유, 복음을 증거하는데 사용되도록, 사도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것을 그들이 도운 것입니다. 이런의미에서 사도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교제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한 교제. 그래서 복음을 위한 교제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도자를 데려오고,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해주고, 어떤 사람이 위해서 기도해 주고, 또 어떤 사람은 그 구도자가 복음을 잘 들을수 있도록, 맛있는것을 사주고, 하여간 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여러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복음도 한사람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복음으로는 깨지지 않으니까, 한 사람은 밭을 갈고 다른사람이 열매를 따고, 그래서 복음도 여러사람이 다양한 각도에서 전하고, 또 여러사람이 기도하고, 교회가 기도하고 또 다양한 사람들이 섬겨주고 이런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섬김을 통해서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도 복음을 위하여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을 위하여 교제하는 것입니다. 아마 저희들이 기도집회때 나오는 기도중의 하나가, 늘 구도자를 위하여 기도 합니다. 그 구도자 가운데 관심이 있는 분도 있고요. 혹 나올수 있는 분, 이런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어떤분은 나오지도 않아요. 아무 관심도 없어요. 그래도 기도 합니다. 저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최근에 강성찬 형제, 자매, 박수경 자매의 외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문상 갔다 왔는데요. 대전 사시죠. 여러번 명절때 와보면 할머니 이야기 하면 안들으시고 그래도 하여간 우리가 기도했습니다. 기도했다고 다 구원받는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복음에 관심이 없어도, 주님이 사랑하는 가족 친족으로 주셨으니까, 우리 책임은 기도하고, 기회를 닿는대로 복음을 전하고, 여기까지가 우리 책임이죠. 그 분이 구원받고 안받고는 주님 몫이죠. 우리몫이 아닙니다. 하여간 저희들이 늘 기도집회때에 어떤 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래서 저희들도 계속 강성찬 형제님의 장인어른, 최근에 위암 수술을 하셨는데, 그래도 전혀 마음이 복음으로 향하지도 않고, 계속 전화 걸어서 박수경 자매님 아버지, 어머니, 박수경 자매에게 계속 전화 걸어서 "너희들 모이지 마라. 모이면 되느냐? 신천지보다 더 나쁜 것들아." 그럼 어떡합니까? 몰라서 그러시는데, 그것 마음에 담아두면 어떡해요. 그냥 그래서 그러시니, 상식적으로 말씀하시는 거니까, 틀린말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 하면서 또 기도하고, 이것이 다 복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수경 자매가 그런 소리를 하면 다른 분들이 듣고 또 기도해 주고, 우리 생각에는 가능성이 없어도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수 있으므로, 사도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네가 미쳤도다" 그런 소리를 들었지요.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아지요. "내가 미친것이 아니고, 다 나와같이 되기를 원한다." "정신차린 말을 합니다." 이렇게 하는것처럼, 복음을 위한 교제 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가족 친족, 또 친구로 두신 영혼들, 그 중에서 전부는 아니라 할찌라도 마음에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는 것, 이것이 다 복음을 위한 교제 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또 그리고 혼자만 가서 그렇게 할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과 같이 가서, 하고, 이것이 다 복음을 위한 교제 입니다. 저희들이 이것을 하고 있고, 또 사도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제의 첫번째 항목입니다. 우리는 무슨 교제를 하느냐? 복음을 위해서 교제 한다. 그 다음 두번째 교제에 대해서 빌립보서 2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 2:1).
빌립보서 2장에 또 교제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령의 교제'라는 단어가 나와있습니다. 그럼 성령의 교제는 뭘까? 생각해 보는 건데요. 제가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면, 저희 모임의 어떤 형제님이, 저희들이 교제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씁니다. 강단에 나가서 주일날 말씀을 전하거나 복음을 전하면 저희들은 이렇게 표현 합니다. 말씀교제, 복음교제, 이렇게 합니다. 또 어떤분에게 헌금을 해 드리면 그런것도 얼마를 교제해 드렸다. 이렇게 하는거죠. 그래서 교제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쓰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님이 교제라는 단어를 모임에서 계속 쓰고, 웬만하면 교제라는 말을 넣는거죠. 그래서 자기가 세상에 나가서, 어떤 여자분에게 복음을 전할때에 이렇게 말했대요. "조금 있다가 시간이 나면 저와 교제를 한번 하시죠." 이렇게 말했대요. 이건 자기는 그렇게 생각했대요. "복음을 내가 설명할테니까, 그때 시간나면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이 말을 "있다가 시간이 나면 저와 교제좀 할까요?"라고 한겁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분이 오해하기를 하기를 '지금 나랑 사귀자고 한건가? 아니 사귀자고 하면 좀 다른식으로 프로포즈를 해야 하는데, 영 분위기와는 안맞게 왜 교제라는 단어를 쓰는가?' 이렇게 교제라는 단어가 모임에서 굉장히 쓰고 세상에서는 보통 이런식으로 안쓰는 단어 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교제는 무엇을 말하느냐면, 내용이 어떤 뜻이냐면, 빌립보서 2장이 어떤 흐름속에 있냐면, 빌립보 교회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요. 교리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불일치 입니다. 똑같이 어떤일을 하는데 약간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달라서 그것이 다툼과 분열과 긴장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 4:2).
이것이 두 자매님 이름입니다. 두 자매님이 서로 견해가 다른 거예요. 그래서 모임에서 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성도님들 의견이 갈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공개적으로 편지를 통해서 "한마음을 품으십시요." 그리고 빌립보서 2장을 오시면, 3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이런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이렇게 되어 있는거죠. 2장의 큰 주제는 어떤일을 할때 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교제는 뭐냐 그러면, 성령께서 교회를 인도 하십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어 가실때, 성령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하나가 일치하고 조화로운 것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다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을 품고, 한 목표를 향해서 한 방법으로 이렇게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됨을 원하시는데요. 사람들은 다 개성이 있어서 성도님 수가 20명이면 의견은 20개가 나옵니다. 어떤때는 성도님이 20명이면 의견은 한 40개가 나옵니다. 그래서 각각 달라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이게 낫겠다.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그런데 성령님은 하나되어야 한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하나되게 만들거냐? 사람은 모든 면에서 다 개성이 있고, 경험이 다르고, 그래서 나름대로 의견이 다를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수 있느냐? 이것이 교회 진리 입니다. 이 다양한 의견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말씀대로, 하나님은 어지로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우리가 실행하면 하나되게 되 있습니다. 의견이 통일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임이 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번째, 성령의 교제는 모임의 하나됨과 평안함 입니다. 모임이 하나되고 평안하고 서로 기쁨으로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고, 그러면서 전체적으로는 하나되서 연합해서 일을 이루어나가는, 이 교제가 되는것입니다. 이것이 두번째입니다. 첫번째는 복음을 위해서, 두번째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우리가 다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드려 보겠습니다. 한 지역모임에서, 지역모임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나, 말씀을 듣기 위해서나, 그와같은 큰 목표를 위해서 작은 실행들을 합니다. 언제 복음집회를 하자, 언제 성도집회를 하자, 또 언제 함께 야유회를 가자, 이렇게 서로 뭔가를 계획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원래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더 큰 목표를, 영적인 목표를 위해서 계획 했는데, 이것을 하위 계획을 세울때 의견이 달라집니다. 복음집회 언제 했으면 좋겠다. 아니, 그 날짜보다 이 날짜가 좋겠다. 또, 강사는 누가 좋겠느냐? 거기서 의견이 갈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이니까, 다 의견이 다를수 있고요.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를수 있는데, 이것을 하나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만들때 어떻게 만드느냐?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에, 각자의 마음속에 교제해 주십니다. 양보해라. 별것도 아닌데, 더 큰 목표를 위해서 그 정도는 상관없지 않느냐고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계속적으로 말하십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분열이 일어 납니다. 그러면 사람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어도 그 사람이 드러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교제는 지역모임이 큰 목표를 위하여 작은 실행을 할때, 사람들의 차이를 작게 여기고, 그것이 진리를 어긋내지 않는 한, 기꺼이 양보하고 하나됨을 추구하는것이 우리의 교제의 두번째 목표 입니다. 그 다음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세번째 교제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런 교제를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참예한다. 교제하는 것인데요.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한다."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고난을 받으셨느냐면, 하늘 영광을 떠나 이 죄악된 세상에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예를들면,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사셔서, 나사렛 예수 되어 있는데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런데 그분이 누구냐면, 나사렛 예수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금방 뭐라고 하느냐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나겠느냐?" 주님께서 그런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전부 어떻게 했느냐면, 사람들이 "정말 저분이 그리스도인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그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할수없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가? 했을때에,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그와같은 백성들의 생각을 뭉개버릴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무엇이었냐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에 있는 마을 이름인데요, 그들이 말합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안난다."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냐?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다." 사실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왔지요. 그런데 그런식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시골 촌동네를 무시한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 거죠. 여러가지로, 심지어는 주님께서 논쟁 하실 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렇게 하시죠.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죠. 그렇게 했을때에 주님이 이런 말을 하시죠. "너희들은 죄의 종이다. 내가 자유케 할때 참으로 너희가 자유를 누린다." 이렇게 말을 했을때, 유대인들이 말하죠. "우리는 종된적이 없다. 우리가 아부라함의 자손인데 언제 종이 되었느냐?" 자기들이 지금 로마 식민지인데도 그런 소리를 합니다. 그렇게 주님과 대화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음란한데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 말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예수님의 탄생은, 예수님은 어떻게 탄생하시냐면,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우리식으로 말하면 약혼하고 결혼하기 전에 잉태됩니다. 성령으로 잉태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것을, 누가 알거나 믿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음란한데서, 예수님은 정상적인 결혼으로 생긴 아이가 아니라고 하는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여러가지 고난이 있습니다. 자,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고난에 자기가 동참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과 오해와 무시를 받으셨는가? 나도 주님처럼 고난을 받겠다. 주님이 왜 그렇게 고난을 받으셨느냐면, 주님이 고난 받으신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그와같은 삶에 대해서 오해하고 그리고 그것을 비난 했습니다. 이게 주님 생애 입니다. 사도바울도 주님처럼,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다보면 사도바울도 여러가지 말도 안되는 비난과 오해와 무시와 멸시를 받습니다. 사도바울은 "나도 그와같은 고난을 받겠다." 이것이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에 이렇게 나와 있죠.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런데 어떤분들은 핍박이 올것 같으면 도망가려고 합니다. "핍박은 싫다. 내가 왜 이 핍박을 받아야 하느냐? 억울하게?" 나의 정당성을 말하고 내가 옳음을 말하고,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굉장히 억울하시지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빌라도도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부 십자가에 못박으라 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변호하거나 억울해 하시지 않고, 이것이 그들이 구원하는 유일한 길인것을 아시고 잠잠한 양처럼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주님을 뒤따르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면 반드시 고난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 중의 하나가, 고난중의 하나가 오해 입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오해를 받았습니까? 사도바울이 받은 오해중에 하나는, 고린도전후서에 많이 나오는데요. 고린도 전후서를 보면 참으로 사도바울은 기가막힌 사람입니다. 고린도교회를 자기가 세웠습니다. 그가 2차 전도여행때 고린도에 가서, 1년 6개월, 18개월동안 자기가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과 함께, 장막을 만들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 복음을 전하고, 밤낮으로 수고해서 고린도 교회로부터 한푼 돈을받지 않고, 고린도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말하느냐? 거짓 교사들의 영향을 받아서 사도바울이 사도가 아니다. 첫번째, 어떻게 말하느냐면 "사도는 예수님 살아계실때 열두 제자가 사도다. 사도바울은 그때 예수님 제자도 아니었다. 그가 무슨 사도냐?" 이렇게 공격합니다.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에는 헌금을 받습니다.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헌금은 하나도 안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돈때문에 일하는 사람이다. 그가 일을 하는 이유는, 겉으로는 뭐라고 말해도, 실제로는 돈이다." 이런 오해를 받습니다. 사도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습니다. 이와같은 오해들이 오게 되어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 보면 헌금에 관한 이야기를 쭉 하는데요. 그때도, 사도바울을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느냐면, 사도바울은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걷어서, 그러니까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 교회가 세워졌는지는 모릅니다. 세워졌다면 베뢰아, 그 다음 고린도, 이런 지역모들에서 헌금을 모아다가 예루살렘 교회에 갖다줍니다. 왜요? 교회는 민족이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과 유대인은 세상에서 원수 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취급을 받은 이방인들은 유대인을 적대시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명을 죽여버립니다. 그게 역사 입니다. 그렇게 둘이 적대적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형제입니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직접가서 전달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르다. 우리는 거듭났다. 우리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전부 뭐라고 비난하냐면 이렇게 비난합니다. "이방인의 돈을 가져다가 자기 동족에게 가져다 준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이다." 자꾸 이런 비난을 듣는것입니다. 그럼, 이방인인 고린도 교회는 돈이 많느냐? 고린도 성도들도 다 가난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서 자꾸 갖다준다." 이런 비난을 계속 듣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비난을 들으면 이런사람이 있습니다. "에잇, 그런 소리 들으니까 안해! 내가 그런거 해서 이득본게 뭐가 있다고! 안해!" 이렇게하면 고난에 참예하지 않는것입니다. 그 고난을 당하고 고난 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주님도 그렇게 고난 당하셨고, 사도바울은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받고싶어 원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물론 우리가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리고 그 문제를 지적한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것을 변명하는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사람이, 혹은 세상이,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비난은 기꺼이 감수하면서 변함없이 그 길을 가야한다. 성경 하나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여기보면 "그리스도의 남은고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셨고 남은 고난은 없습니다. 주님이 고난을 남긴 것은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셨기 때문에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신 거죠. 남은 고난은 무슨 뜻이냐면, 그리고 하나 더, 그리스도의 고난 중에서 우리가 참여할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속의 고난 입니다. 대신 사람들의 죄를 대신지고 죽는 고난은, 그것은 우리가 안당합니다. 그것은 죄없는 주님만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못집니다. 책임 못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의 남은 고난은 이런 뜻이죠. 주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하면 하늘에 계십니다. 이 땅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주님을 미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미워할수가 없어요. 대신 누구를 미워하느냐면 그 몸인 교회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핍박하거든, 세상이 나를 미워한줄로 알라." 그래서 교회를 핍박할때, 교회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를 정말 싫어하네.' 아니요, 세상은 우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말씀을 드리냐면, "우리를 싫어하는거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럼 우리가 좀 고쳐보지, 뭐. 세상이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도록 우리가 약간 변화를 주지. 약간 변하면 세상이 그렇게 싫어하지 않을거아냐?" 아닙니다. 우리를 미워하는것이 아니고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고난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을 부인하면 됩니다.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끝까지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닌, 물론 우리가 태도라든지, 인격에 있어서 잘못된 것이 있죠. 그런 것들은 저희들이 개선 해야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지금 세상과 교회 사이에 영적인 갈등이 있을때, 그것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좋게 지낼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안 믿는다 선언하면 됩니다. 주님을 안따라가면 됩니다. 세상과 똑같이 되면, 그럴수 없다면 이 고난은 피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 주님을 이세상에 대표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인, 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받는 고난은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입니다. 남겨뒀다는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이 땅에 남아있는 교회가 받는 고난,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고난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이게 그가 추구한 교제의 내용 입니다. 다시요, 교제는 복음을 위한 교제가 있고요. 교회의 일치를 위한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되어 나가도록 하는 교제. 세번째, 세상에서 교회가 부득이하게 받아야 하는 고난의 교제가 있습니다. 그 다음 네번째, 빌립보 4장 마지막에 교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빌 4:14-16).
네번째 교제는 물질을 주는 교제입니다. 헌금입니다. 헌금이 교제의 일부 입니다. 14절에 보면 "참예했다"라고 하죠.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했다." 그리고 15절에서도 "참예했다" 교제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여러가지 모양으로 도왔을 뿐 아니라 물질로 도왔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를 따라 데살로니가에 갔을때, 두번 헌금을 보냅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약 십몇년후에, 사도바울이 로마에 갇혀 있을때, 또 물질을 보냅니다. 그 보낸 물질에 대해서 감사 편지가 빌립보서 입니다. 이것이 세번째 물질적 공급 입니다. 하여간,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주님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자기 생업을 놓고 전적으로 주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현실적인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헌금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제 입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교제도 많이 있습니다만, 빌립보서에 나온 교제는 네개 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됨을 위해서, 고난을 위해서, 그리고 물질적 도움을 통해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게 저희들이 살펴본 교제 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제는 공동목표를 위해서 함께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게 지역모임 안에서, 혹은 지역모임과 관련해서 교제하는 거고요. 그 다음 두번째 항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의 책은 이 항목을 주로 다루는 것인다. A모임과 B모임이 서로 공동 목표를 위해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행 11:22).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생기고요.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서 여러 지역교회가 생깁니다. 예루살렘 말고도,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니까, 유대 지역에 교회가 생기고요. 그 다음에 사마리아에도 교회가 생깁니다. 여러 지역에 교회가 있었을 것이고요. 그리고 이방인 교회, 완전히 이방인들쪽에서 교회가 세워진것이 안디옥 교회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느냐하면요, 잠깐 보겠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행 11:19).
이분들이 원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합니다. 그때,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하고 옷을 받아둔 사람이 사울(바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 외에는 전부 흩어집니다. 사실은 예루살렘 성도들이죠. 그렇게 성도들이 흩어져서, 20절에 보면 안디옥까지 옵니다. 여러지역으로 흩어지는데 그 중의 일부가 안디옥까지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합니다. 헬라인에게, 그리스 사람에게 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역사해서 많은 믿는 사람들이 생겨 집니다. 이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가 듣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들이 흩어졌어도, 그들 가운데 서로 연락하고 교제하고 기도하고 이런 관계가 계속 있는거죠. 그 중에서 안디옥에 그와같이 성도들이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21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격려자인, 바나바가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런 바나바를 보내줍니다. 그래서 여기 두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가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교제는 의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요.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는 의도해서 되는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인도 하십니다. 어떻게 인도하시냐면, 성도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소식과 필요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교제한다 이런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도들 어디로 피했는데, 그 지역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가운데 누가 가자, 가서 도와주자.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것인가? 그럼 누가 갈까? 우리 가운데 칭찬받는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가 시작 됩니다. 그 다음, 두번째를 보겠습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7-30).
여기 보시면 그렇게 교제하고 있었는데 어떤 소식이 들려오냐면, 성령께서 선지자를 통해 알려 주셨죠. "흉년이 든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흉년이 들면 가장 큰 피해는 예루살렘 교회가 당한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근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만약에 기근이 들면, 비가 안오고 추수가 적고 하면 예루살렘 교회가 굉장히 취약합니다. 그것을 알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이것을 미리 알려준것은 우리가 준비하라고 한것이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로 결정하고 헌금을 모으고,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을 보내서 돕습니다. 그래서 서로 영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지역모임간의 교제가 물질적인 교제로까지 확대됩니다. 이게 지역모임간의 자연스러운 교제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간의 교제는 이렇게 합니다. 첫번째,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제답게 서도록 돕는 것입니다. 지역모임간에 어떻게 돕느냐? 말씀으로 도왔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수 있는 사람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모임간에는 그렇게 영적인 교제가 있을뿐만 아니라 그것이 실질적인,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먹을것이 없는데 그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돕지 않으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수 있느냐? 이렇게 내용이 되어 있는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라면 성도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어려움을 보면 그것을 돕는것이 자연스러운 생명인 것입니다. 그것이 이 지역모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다음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사이가 하나 더 있지요.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1-2).
"유대로부터" 했으니까, 정확하지는 않은데요. 아마 예루살렘 교회로 느껴집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소문들 중에, 여기보면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구원 안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으려면 율법 지키고 할례 받아야 한다라고 이방인에게, 이렇게하니까, 2절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인도자들이죠. "이 가르침은 못받겠다. 안된다. 틀린 가르침이다." 이렇게 하니까, 다투고 논쟁을 하게 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로 보냅니다. 그래서 좋았던 두 지역모임 사이에 가르침이 잘못된 사람들이 끼어서 문제가, 그랬을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안디옥 모임 성도와 예루살렘 교회의 인도자들이 함께 만납니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보통 기독교에서는 제 1차 예루살렘 공회라고 붇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게 아니고요. 그러니까 마치 전 지역교회가 딱 모여있고, 본부가 있고, 그래서 여기서 문제를 다뤄서, 결정을 하면, 각 지역모임이 다 따르고, 이런게 아니고, 관련된 모임 두 인도자들이 각각 모여서 결정한 것입니다. 여기 보시면, 24절을 보시겠습니다. 편지가 있는데, 의논하고 편지, 공문서를 작성해서 안디옥 교회에 보내 줍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모임에도 유익이 되도록 그와같은 공문서를 보내는데요. 그 공문서가 이렇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행 15:24).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것도 없이 나가서" 그러니까 에루살렘 교회의 천거도 받지않고, 교회적인 천거없이, 교회적인 승인 없이, 나가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해결을 합니다. 그래서 지역모임 간에는 서로 긍정적인 교제가 있었을뿐 아니라 서로 난처한 상황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랬을때 그들이 주님 안에서 순전한 마음과 말씀대로 순종하는자 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 교제해서 이 문제를 해결 합니다. 그래서 지역모임과의 교제에 대해서 나왔고요. 그 다음 또 하나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롬 15:25-26).
마게도냐 교회는 빌립보 데사로니가 베뢰아 교회 입니다. 아가야 교회는 고린도 교회 입니다. 이 지역모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모금해서 헌금합니다. 이것이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 입니다. 교회의 하나됨과 또 주님의 서로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순종하여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예를들면, 마포모임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예를들면 아프리카 잠비아에 있는 모임, 또 카품파 형제님이라고 하는 형제님이 3년 모임생활을 하고 돌아 가셨는데요. 그래서 거기 계시니까, 그 모임, 잠비아가 굉장히 가난한 나라 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혹시 허락하시면 저희들이 도울수 있는 또 어떤, 것들을 드리면 도울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최근에 베네수엘라에서 한 자매님이 오셨는데요. 베네수엘라는 뉴스를 보면 굉장히 국가적으로 어려운 형편인거 같더라고요. 만약에 그런 경우도 주님이 도우시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또 저희들이 초청했던 형제님들 중에 엘살바도르에서 선교하시는 크랙 세이워드 형제님, 그 형제님은 저희들이 소식을 먼저 안것이 아니고 어느 지역모임에서 저희들에게 부탁해서 헌금을 좀 전해 달라, 세이워드 형제님에게, 저희들이 헌금을 전해 드리면서 소식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엘살바도르도 모임이 못모이고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일부러 하는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저희 가운데 그동안 여러가지로 사랑의 교제, 예를들면 복음 강사로 초청하고, 주님이 모임생활을 하게 하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떤 성도님들이 방문하고, 이런 일들을 통해서, 영적인, 그리고 필요하다면 물질적인 교제가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하나 더 보겠습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행 18:27-28).
아볼로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입니다. 에베소에서 구원받고 영접됬습니다. 에베소는 지금으로치면 터키 입니다. 아시아쪽이죠. 그런데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갑니다. 아가야는 고린도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으로치면 그리스 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다른거죠. 그런데 터키 형제가 그리스로 가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왜 가려고 했는지는 모릅니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 가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쪽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편지를 씁니다. "이 형제는 말씀에 은사가 있다.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당신네 교회 근처로 가게 되었습니다. 초청해서 말씀을 교제하게 하면 유익을 끼칠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천거서가 나갑니다. 그리고 28절에 보면, 공중 앞에서 성경을 들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강력하게 증거해 냅니다. 그리고 그때, 고린도에 있었던, 여러가지, "왜 예수님이 그리스도냐? 이것은 이 구절하고 모순되지 않느냐?" 이런 복잡한 이론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능히 깨끗하게 이겨 버리는, 유익을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역모임간에 은사있는 형제가 가서, 다른 나라가 다른 지역모임에 여러 교회에 영적인 유익을 끼쳤다. 그래서 저희들도 외국에 있는 은사있는 형제님들, 성령에 대해서 박식한, 이런 형제님들을 불러다가 말씀을 들음으로써, 또 우리가운데 연약한, 혹시,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이런것은 뭐지?" 했던 것들을 말끔하게 해소하고, 말씀을 평안한 가운데, 확신있게 좆아가는, 일런 일들이 저희 가운데 일어나는, 이런것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의 유익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롬 16:1-2).
저희들이 천거서를 쓸때, 영접해 주시고 그 다음에 성도의 예절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서 로마서, 16장 2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뵈뵈 자매인데요. 일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겐그레아 교회에서 섬기는 자매 입니다. 일꾼이라고 해서 직분을 가진것이 아니고, 그냥 겐그레아 교회에서 열심히 주님을 섬겼던 자매 입니다. 그 자매가 어떤 경우에 무슨일이 있어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천거서를 쓰는데, 이런 성도들간에 어떤 사업상, 또 저희들은 우리나라에서 국제 컨퍼런스가 많이 열리더라고요. 학술대회, 그런데 여기는, 서양 형제님들이 오시는데 그분이 또 성도님들이세요. 그래서 학술대회에 참석한 주일은 성도님이니까 주일은 예배를 드려야죠. 그래서 이런 경우에 연락을 해서 모임에 오고, 그래서 저희들이 온김에 형제님 말씀도 듣고 수양회도 하고, 하워드반즈 형제님, 그렇게 처음에 알았거든요. 이 형제님 한국에 학술대회가 있어서 참석해야 하는데, 뉴욕을 방문하셨습니다. 뉴욕을 방문해서 하다보니 뉴욕에는 한국 형제들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 형제들에게 "내가 한국을 가야 하는데 한국에 모임이 있느냐?" 모임이 있다 해서 마포모임을 가르쳐 줬습니다. 그래서 한국 제주도에서 언제 열리는 무슨 학술대회에 참석하시는구나. 그런데 서울에는 언제 오시는 구나. 그래서 말씀시간 드리고, 보니 은사가 있으세요. 그래서 그 다음번에 수양회때 강사로 초청하고, 이렇게 됬거든요. 그래서 이런식으로, 이때(사도행전)하고는 달리 그냥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한 시대인데요. 그렇게 되는거죠. 그래서 추천하는데, 여기는 이렇게까지 되어 있습니다. 뵈뵈 자매를 추천하면서 그냥 "예배드리게 해 주십시요." 정도가 아닙니다. 그를 성도의 예절로 영접하고, 그 다음에 "무엇이든지 소용되는바를 도와 주십시요." 만약에 뵈뵈 자매가 로마에서 사업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이민을 가고 싶어한다. 뭔지는 모르지만, 혹은 그 지역에 있는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십시요. 그 자매의 뜻을 실행할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가 이 곳에서 그와같이 여러 성도들을 그와같이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와같은 한 지역모임에서의 섬김을 다른 지역모임에서 그와같이 동일하게 섬겨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의 지역모임간의 교제가 쭉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보면 교제는 공동 목표를 위해서 피차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잊지 말아야 할것은, 이와같은 교제의 핵심은 주님과 함께 하는 교제다. 결국은 주님 중심으로, 공동 목표가 주님이 주신 목표여야 하고, 서로 협력하는 것도 주님의 방법대로 행해야 한다. 그 다음에 이런 지역모임간의 교제를 보면 틀이 있는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지역모임간에 자연스럽게, 그런 교제들을 이끌고 계신다. 예를들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다음에, "교회하면 예루살렘 교회지. 한번 교제해보자. 거기다가 한번 부탁하자." 그렇게 안합니다. 그냥 자기들 모여서 기도하고 그러면 성령님께서 소식이 가고, 그러면 그 모임에서 모여서 물품을 보내주고, 또 바나바는 바울을 초청하고 이렇게 성령님께서 그와같은 것을 인도하십니다. 지역모임간의 교제가 인위적이라기보다, 성령님께서 영적인, 또 소식을 알게되는대로 돕고 이런 대부분 지역모임간에 문제가 있을때, 성급하게 교제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만나서, 모여서, 그와같은 사정을 들어보고, "이분들이 누구냐?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냈냐?" "보내지 않았다. 우리가 시키지 않았는데 자기가 나가서 한거다." 하여간 예루살렘 교회가 책임을 져야하는 면이 있는거죠. 이렇게 서로 정직하게, 이렇게 주님 앞에서 교제하고 교제의 어려운 점을 해결해냅니다. 이런식의 교제가 성경에서 나와있는 지역모임 사이의 교제 입니다. 그리고 지역모임 안에서의 교제는 구원받은 사람들끼리만 가능하고, 복음을 위해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가 이 세상에서 세워지기 위해서 반드시 고난 받아야 하는데 그 고난을 함께 지고 함께 욕을 먹고 세상에서 함께 비난을 당하고, 그리고 서로 위로하고 힘을 내고, 그리고 물질적인 도움을 통해서 교제하고, 이와같은 것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 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지역모임간의 교제를 할때, 전국 주소록이 있고 이게 다 교제해야하는 모임이고 그리고 다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교제를 인도해 주시고 또 교제하는 정도도 어느 지역모임이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는가? 또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따라서 그와같은 교제가 이루어진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저희들을 주님께서 성경적인 교제를 할수 있도록 기도하고요. 또 하나는 성도님들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것은, 지역모임의 교제가 있습니다. 지역모임에서 무언가를 기도하고 어떤 영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나갑니다. 그럴때에 각 성도님들이 이 지역모임의 영적인 목표 가운데 잘 들어오셔야 합니다. 마포모임을 생각해보면, 마포모임에 성도님들이 계신데요. 저희들이 기도 합니다. "몇월달에 어떤 형제님을 초청해서 집회를 한다."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광고하고 기도집회때에 기도합니다. 그럴때에 성도님들이 "아, 그 형제님 누구예요?" "초청하게 되는 이유는 뭔가요?" "초청해서 하나님께서 뭘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라시는 것인가요?" 그 다음에 "그 형제님 오시면 온 종일 머무시는데 제가 점심이라도 살까요?" 라든지, 하여간 교회가 이런식의 관심을 가지고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러가지 사정이 있으니까, 다 할수는 없지만 예를들면 시간이 없어서, 여러가지 사정으로 못하는것은 가능하죠. 그런데 관심이 없어서, 모임에서 그와같은 집회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그 동안에 그 집회를 통해서 들려진 그 말씀이 들리면, 그 말씀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고, "어떤 말씀은 참 좋다." "이 말씀은 내가 몰랐는데, 이렇게 살아야 겠다." 이런 관심을 보여야 하는데, 관심을 안보이고, 또 "나는 영어는 싫다. 알지도 못하는데 영어로 해가지고.." 라든지, 물론 영어에 대해서 두드러기가 있을수 있죠. 그런 분들도 이해하고 저희들이 합니다만. 해서 적극적으로 성도님들이 모임의 교제 가운데 참여하셔야 합니다. 모임에 속해 있다고 다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모임에 있어요. 집회에도 나오세요. 그런데 그 모임이 추구해가는 영적인 흐름, 영적인 목표,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을 성숙 시키고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답게 세워지고, 그래서 최종 목표는 주님께서 공중에 오실때에 우리가 편안하게 주님을 뵐수있고, 그리고 그때 우리가 주님을 닮아있고, 이것이 목표거든요. 이것이 큰 목표 입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지역모임들이 작은 실행, 수단들을 쓰거든요. 이럴때에 참여하시고 기도하시고 유익을 나누시고 함께 끼버하기를,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모두 그렇게 하시면 좋은데, 제가 마포모임에서 보면, 교회는 교회대로 가고, 나는 그냥 나오고 이런분들이 간혹 있으세요. 그래서 참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그런 분들을 자꾸 만나서 설명하고 이렇게 하지요. 저희들이 한 마음으로 다 함께 참여하고 조금이라도 방관하시는 분들이 없기를, 그래서 그래야 모임이 건강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그러기 위해서 저희들이, 교제가 뭔가? 내가 모임의 교제 가운데 있는가? 다시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했습니다. 교제는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첫번째 조건입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동일한 진리 가운데 있을때 교제 합니다. 가르침이 같아야 합니다. 그다음 두번째 이 교제가 힘있게 이루어지려면 기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 합니다. 관심도 없고, 머리로만 좋네, 혹은 동의가 안되는데 하면 교제가 안되고, 정말 우리가 배운대로 우리 지역모임이 그런 지역모임이 되도록, 우리 성도들이 그런 삶을 살도록, 기도하는 삶, 말씀대로 배우고, 기도로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이루어내는 사람들이 만찬 예배를 통해서 교제를 표현합니다. 이것이 교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기도의 능력으로 그 가르침이 이루어지고 그 이루어진 교제를 만찬예배로 표현한다. 이게 사도행전 2장 42절에 대한 저희드르이 이해 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참 그러고 있는가? 교제를 생각할때, 잘 배우고 있는가? 배운것이 이론이 아니고, 나 개인의 삶과 교회의 생활이 그와같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있는가? 그 기도의 응답으로 그래서 그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답게 세워지고 있는가? 이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일들을 저희들이 해낼때에 하늘에서 보시고, 또 저희 가운데 임재하셔서, 저희를 기뻐하시고 저희의 모든 삶을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계속 저희들을 도와주시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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