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7일 금요일 / 한봉래 형제님
< 11. 은사의 종류 >
저희들이 계속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은사에 관한 것을 살펴볼텐데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0-17).
여기 사도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가서 18개월동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떠나 갔습니다. 그리고나서 남은 성도들이 모임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때 어떻게 모임 생활을 할것인지 그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것입니다. 어떻게 생활해야 되느냐, 교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번째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터를 닦아두었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관해서 가르친 것입니다. 이미 복음과 교회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터 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서 배운 복음, 사도바울은 어떻게 배웠느냐?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계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시대만 그런 것입니다. 그 후로는, 사도시대 끝나고나서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한 주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장면에서 보면 사도바울은 주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사도바울이 핍박한 것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를 핍박한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핍박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처음으로 배웁니다. 주님과 교회는 뗄수 없다. 주님이 머리고 교회는 몸이다. 이 분명한 사실을 그가 배운거죠.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이 눈이 멀고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아나니아가 침례를 주고 이렇게 하죠.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아라비아, 사우디 아라비아 아니고 다메섹 근처에 있는 아라비아로 갑니다. 명백하게 나와있지 않은데 많은 형제님들이 아라비아에서 홀로, 사도바울이 구원받고 예루살렘에 있는 열두사도를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배운것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운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배운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3년간 아라비아에서 있으면서 주님으로부터 여러 계시를 받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교회에 관한 진리는 열두사도보다, 열두사도들에게도 말씀하셨지만 사도바울에게 교회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떡과 잔을 하는데 "이는 내가 주께 받은 것이니" 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그때 열한제자가 있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나가고 열한제자가 있었는데 그때 주님이 열한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그 다음에 잔을 돌리시면서 "이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기 때문에 열한사도들이 이 교회를 세울때에 주님을 기억하는 만찬을 전합니다. 실제로 행하고 그렇게 전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떡을 떼며, 이렇게 한거죠. 그렇게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고린도교회에게 "이는 주께 받은 것이니" 그렇게 만찬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만찬예배는, 주님이 만찬을 제정하실때에 사도바울은 그때 없었습니다. 그때는 믿는 사람도 아니었죠. 그 만찬 의식은 열한사도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에게 또 준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이것을 베드로에게 들은것 아니다. 요한에게 배우지도 않았다. 주님에게서 직접 배웠다"고 말하죠. 특별히 교회에 관한것은 오히려 사도바울에게 주님께서 많이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고린도교회에 가르친 것입니다. 주님이 누군지, 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 그 다음에 믿는자들이 교회를 이루게 될때, 그 교회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어떻게 집회를 하고,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서로 섬기고, 이런것을 쭉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복음과 교회 생활에 관한 가르침, 이것이 터입니다. 이 터가 있는거고요. 첫번째,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터가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이죠. 그 위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터라고 하는것은 이렇게 되어 있죠. 건물의 기초지요. 그 위에 건물을 세웁니다. 그런데 터가 아닌 곳에서 건물을 세우면 그것은 건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다시말하면 사도바울이 가르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벗어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죠. "내 가르침 안에서 교회 생활해야 한다. 내가 가르친것과 다르게 교회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첫번째로 사도바울이 말씀하신 것이고요. 그리고 두번째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터를 닦아둔것이 7절에 되어 있고요. 그 다음에 11절에는 어떻게 표현되어야 있느냐면,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를 조심할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이 교회생활을 할때, 교회에서 섬길때, 예배드릴때, 혹은 교회에서 여러 집회에 참여해서 그 집회의 여러가지 활동을 할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첫번째 원칙입니다. 사도바울이 가르친것이 있고, 그 가르친것을 어긋내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조심할 뿐만 아니라 12절에 보시면, 11절에 터가 나오고요. 10절에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12절에 뭘로 섬겨야 하느냐면 비유로 말한것이죠. 금은 보석으로 해야 한다. 금은 보석, 하나님께서 가치있다고 인정하는 행동으로 교회생활을 해야한다는 거죠. 그리고,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백보좌 심판,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가는 심판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다. 내 죄때문에 예수님이 죄없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혈육을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두번다시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됬네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하나님이 다 받아주시네요." 한다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구원받고나서 너 잘못했지?" 이것을 묻는것이 아니고 이번에는 우리의 섬김을 묻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했는가? 이 부분을 묻습니다. 그래서 그와같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동을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교회를 세우고 했던 이런것들에 대해서 상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우리의 잘못을 찾아내서 책망하는 목표가 아니고 우리가 잘한것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책망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것을 하나님이 찾아내서 상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터가 있고 터 위에 조심해서 세워야 합니다. 특별히 금은 보석같이 하나님이 가치있게 여기는, 하나님이 소중하게 보시는 것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교회는 성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의 그림자가 구약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성막입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는것을 나타내는 성막을 지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로치면 교회를 세우는 겁니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요. 구약으로 오면 솔로몬 성전, 성막이고 그 다음에 이 성전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가운데" 성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이냐? 성령께서 계신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교회를 살피는 겁니다. 주님 이름으로 구원받은, 주님 이름으로 말씀을 따라 모여서 예배 드리고, 그 다음에 서로 기도하고 성경을 제시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이렇게 하는거죠. 이 지역교회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성령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 지역교회가 성전이고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령님이 이 가운데 계신다 입니다. 저희들이 쭉 해왔던것을 다시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지역모임에서 중요한것은 이 지역모임을 인도해가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이것을 나타내는 것이 지역모임에서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그래서 저희들이 흔히하는거죠. 우리 예배시간에는 주보가 없습니다. 예를들면 자꾸 다른곳을 비판하는 것처럼 들려서 그렇습니다만, 보통은 이렇게 합니다. 주보를 보면 찬송가 몇장, 예배 순서가 나와 있습니다. 처음에는 묵도로 시작합니다. 피아노가 쭉 쳐지고 묵도를 하죠. 찬송 몇장, 성가대에서 찬송이 쭉 나옵니다. 그 다음에.. 소위 말하는 그 예배의 순서가 사전에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반대 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지금 우리눈에 안보이지만 성령께서 계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어떻게? 각 성도의 마음을 감동해서. 그래서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자유롭게 찬양을 고릅니다. 물론 책임이 있습니다. 찬송가를 고르시는 형제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골라야 합니다. 물론 그 책임은 있지만 어째거나 형제님께서는 일어나서 "내가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함께 그와같이 찬송하죠. 조금 있다가 다른 형제님이 "나는 이 찬양을 올려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예배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죠. 그러고 있으면 어떤 다른 형제님이 일어나서 "나는 하나님께 이와같은 감사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혹은 하늘 영광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주님, 겸손하게 낮아지신 주님, 이것을 어떤 형제님께서 감사드리고요. 다른 형제님이 일어나서 그와같이 낮아지셨을찌라도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부활시키시고 다시 하나님 우편에 올리신 지금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나는 찬양한다. 그래서 주님의 관한 여러 측면들을, 이것도 형제님들이 책임이 있습니다. 다 각각 주님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그 영광을 보고, 그리고 그 영광이 실제로 자기 마음에 감사가 되고 그리고 와서 이렇게 하는거죠. 감사가 되지 않는데 살아보니까, 감사를 드려야 되니까 하는것이 아니고 주님은 아십니다. 정말 내 마음속에서, 주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가지고 나와서 드리는거죠. 그래서 사람이 정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인도하신다. 그래서 저희들이 계속 살펴보고 있는것은 지역모임은 성령이 인도하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모임이어야 한다. 이것이 저희들이 믿는 교회진리 입니다. 성경을 대라 그러면 이 구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다른 구절도 많이 있습니다만, 이 구절을 근거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집회를 한다. 그래서 사전에 사람들이 정하고 게획하지 않고 그렇게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저희들이 말씀시간도 정하지 않죠. 물론 특별히 정할때가 있습니다. 또 사회자를 정할때가 있고, 규모를 위해서, 너무 오래 시간을 끌거나 성도님들이 어색하지 않도록 정할때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흐름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도록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령이 틀림없이 인도하시는 것을 우리가 목격할수 있다.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저희들이 믿고있는 교회진리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성령께서 여기 계시고,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성령께서 역사하신다고 했을때 저희들이 이제까지 뭘 살펴봤냐면 첫번째로 각 성도님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각 성도님들이 가장 좋은 방법은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뭐냐? 살펴온 것입니다. 각 성도님들이 성령충만해서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지역모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거죠. 그렇다면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저희들이 에베소서 골로세서를 하면서 살펴본 것이고요. 그 다음에 저희들이 경계해야 하는것, 성령을 근심시켜서는 안된다. 그럼 어떤 경우에 성령이 근심하시는가를 살펴왔습니다. 그 다음에 서령이 소멸되면 안된다. 그래서 성령충만, 성령근심, 성령소멸, 그리고 하나 더, 성령의 인도. 성령의 인도라고 하는 표현은 두군데 나옵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8장 입니다. 이 두군데에 성령의 인도가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는 무엇인가? 마음에 뭔가 감동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감정적인 것이냐? 머리로도 이해되는 것이냐? 이런것들을 저희들이 살펴왔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지역모임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인도하는데가 아니다. 했을때에 성령의 인도에 대해서 첫번째, 모든 성도님들이 개인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경험해야 한다. 두번째, 성령님께서 그 모임을 인도하실때 두번째 본게, 장로들을 세우셔서 인도한다입니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성령께서 직접 하시지만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을 사용해서 인도한다. 이것이 장로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장로의 자격, 그 다음에 장로를 어떻게 세우는가? 성령께서 장로를 세운다고 할때에 어떤것을 말하는 것인가 라고 하는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세번째 입니다. 세번째는 모임에서 여러가지 집회에서, 예배를 빼는 겁니다. 여러가지 집회에서 은사를 따라 집회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성령을 인정하는 모임의 특징입니다. 으나대로 섬긴다. 나이대로 섬기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섬기는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분이 참 경건하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정말 존경스럽게 삽니다. 그 삶이. 그래도 은사가 아니면 강단에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사대로 섬긴다. 이것이 오늘 저희들이 다룰려고 하는 내용이고 이게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의 책의 9장 입니다. 9장의 내용을 제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서 읽어보시고, 조금있다 프린트를 나눠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모임이 되야되고 그와같은것을 실행한다고 할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것은 은사대로 섬긴다. 은사가 아니면 안된다. 제가 잠깐 이야기 해보면요. 제가 존경하는 형제님 가운데 김인수 형제님이 계신데요. 제가 그 형제님과 같은 모임생활을 직접 안해봤기 때문에 제가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어떤 형제님이 강단에 나가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형제님이 듣기에 은사가 아니예요. 은사가 아닌데 열심히 특심 하시는 분이 열심히 전하시니까, 김인수 형제님이 메모를 해서 '내려오십시요'라고 해서 올려놨다는 그런 에피소드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렇게하면 사이가 나빠질수 있지요. 그런데 형제님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는 은사대로 섬겨야 한다. 형제님은 말씀 은사가 아닙니다. 형제님은 다른데 은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조심해야 할 것중의 하나가 이때까지 저희들이 이런 실수들을 많이 했지요.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특별한 은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안보이는 곳에서 주님만이 아시는 어떤 섬김을 하는것보다 여러 사람들이 다 있는데서 성경을 펴서 설명하고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따라갑니다. 사실이죠. 그렇다고해서 그 은사가 특별난 은사라든지 누구나 사모해야 하는 은사라든지 그런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면에서 속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일 뿐이고 그래서 그 은사가 기능하는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은사도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하나님이 변함없이 칭찬하시고 동일하게 인정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않고 인간적인 경쟁심, 그리고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원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그런것이 높은 것처럼, 이렇게해가지고 교회가 육신적이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희들이 이런 오류를 많이 범해온 경험이 있는 것이죠. 하여간 은사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은사가 아니면 본인도 어렵고 받는사람도 어렵고, 그럼 누구를 위해서 하는거냐? 그래서 정직하게 자기가 원하는 은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남들이 알아주는 은사가 아니라 할찌라도 그것을 영적으로 받아 들이고 주님이 주신 은사에 승복할줄 아는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사람이 저 은사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자꾸 인정받는것에 대해서 시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니까, 그것을 인정할수 있는 영적인 마음이 저희들에게 깔려 있어야 은사대로 섬길수 있는거죠. 하여간 은사대로 섬겨야 하는 내용을 계속 얘기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성경구절 4개를 찾아보겠습니다.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8-11).
여기보면 은사가 쭉 나와 있는데요. 8절을 보시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이것이 은사입니다. 지혜, 지식. 그 다음에 두번째로 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횟불주석이라고 하는 책에 나와 있는 것인데요. 혹은 영어로는 왓더바이블 티치스(What the Bible teaches)라는 책 시리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을 잠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9절에 보면 "다른"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에 은사가 보면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행함, 예언, 영 분별' 쭉 은사가 나와 있습니다. 첫번째 카테고리에는 지혜, 지식이 있고요. 두번째 카테고리에는 쭉 기록되어 있지만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겠습니다. 9절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영 분별까지가 두번째 카테고리 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카테고리 입니다. '다른'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다른'이라고 하는 이 단어를 기준으로 8절부터 10절 사이에 여러 은사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다른 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셋으로 나눠집니다. '지혜, 지식' 그 다음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영분별' 그리고 세번째 카테고리가 '방언, 통역'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가지 종류의 은사가 나와있고, 개수로 치면 8개의 은사가 나와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 원어로 헬라어에는 다르다고 하는 것이 두가지 단어가 쓰입니다. 예를들면 똑같은 종류인데 다르다는 표현이 있고요. 영어로도 그렇지 않나요? 영어로도 똑같은 종류인데 구분하는 것(other)이 있고, 종류 자체가 다른것이 있습니다. 동물, 식물, 이것은 종류 자체가 다른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이 그 단어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가 똑같은 종류인데 약간 성향이 다르다는 단어가 쓰인것이 아니고 이것은 앞에 것과 이것은 종류가 다르다고 하는 다른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세가지 다른 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이렇게 은사가 나와 있고요. 한번 설명해 보지요. "지혜의 말씀" 하면 이런 뜻입니다. 어떻게해야 하나? 성도들이 모임 생활을 할때, 믿음 생활을 할때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지?' 라고 했을때에 이렇게 하는것이 주님 뜻이다. 이것이 지혜의 말씀입니다. 적용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하는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려주는 은사 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지식의 말씀은 지혜는 적용하는 거고요. 지식은 이론이죠. 지금 어떠어떠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보통 이런예를 드는데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전부 헌금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딱 보고 압니다. "전부냐?" "전부인데요."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밭을 가지고 있어도 네 재산이고 팔아서 헌금을 하지 않아도 다 네마음이다. 그런데 왜 헌금이라고 하는 영적인 행동을 하면서 거기에 거짓말을 하느냐?" 그냥 밭을 팔았는데, 제가 믿음이 그래서 500만원만 헌금했습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혹은 100만원만 헌금했습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천만원을 받았는데 천만원을 전부 헌금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실은 천만원 이상을 받은거죠. 그래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물어봅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네가 사람을 속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거짓말 한것이다. 그리고 아나니아가 죽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밭 팔아서 헌금했는데, 그 밭값이 얼마인지 헌금이 얼마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압니다. 어떻게요? 지식의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떤것들이 지식의 말씀이고요. 그다음에 9절에 있는 믿음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니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 아무도 안될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이것 가능하다 하는 믿음입니다. 그 다음 병고치는것은 잘 아시고요. 그 다음 능력, 병고침 이외의 여러가지 능력, 귀신을 쫓아낸다하든지 하는거죠. 그 다음 예언, 이것은 미리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 영분별은 누가 구원받았는지 안받았는지 금방 아는거죠. 그 다음에 방언, 통역, 이런 은사들이 그 당시 고린도지역의 하나님의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사들의 공통점은 기적적인 은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전부 기적적이고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입니다. 기적적이면서 현재는 사라진 은사들입니다. 이제 이런은사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12:28).
여기서는 은사를 말하지 않고, 비슷한 소리입니다만, 은사있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두번째는 선지자 입니다. 예언을 하는 사람이 선지자죠. 세번째는 교사, 그 다음에 능력, 그 다음에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것과 다스리는것과 각종 방언하는 것,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이 고린도라고 하는 지역 교회에 주신 은사자들입니다. 사도바울도 왔었고 아가보도 왔었고 아볼로도 왔었고 이런 사람들이 와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두번째는 은사있는 사람들. 세번째로 가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
세번째 은사에 관한 이 언급은 맨 처음에는 은사 자체가 나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은사있는 사람을 언급하고요. 세번째는 은사있는 사람이 하는 일을 말했습니다. 은사 있는 사람이 그 은사를 가지고 뭘 하느냐, 그래서 어떤사람은 예언을 합니다. 어떤사람은 7절, 섬깁니다. 봉사한다는 거죠. 어떤사람은 성경을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권위 합니다. 권위한다고 하는것은 권면한다. 혹은 위로한다. 이런 뜻입니다. 구제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다스리는 자는 여러가지 일들을 행정 조직하고 그 다음에 긍휼을 베푸는자는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때 가서 돕고 그래서 여기는 은사있는 사람들이 하는 실제적인 일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여기서는 이제 저희들이 한가지 먼저 전제를 달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했을때 고린도는 지역교회 입니다. 고린도라고 하는 지역에 있었던 교회 입니다. 그 다음에 로마서도 마찮가지 입니다. 로마라고 하는 지역에 있는 교회 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고요. 로마서는 적어도 로마에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썼을때에 그 로마서를 받은 지역교회가 적어도 세개쯤은 된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로마서 16장을 보면 맨 마지막장에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인사를 보면 어디어디에 있는 교회에게 문안하라. 라고 해서 그 교회가 나옵니다. 로마는 큰 도시니까요. 예를들면 서울교회, 라고 하면 서울에 교회가 여러개가 있잖아요. 그런식으로 로마는 큰 도시이기 때문에 적어도 세개 이상의 지역교회가 받는 서신입니다. 어쨋거나 이것은 지역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서는 지역모임에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라고 하는 지역모임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뭐 똑같은데요. 그런데 주제가 지역교회를 다루지 않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다루고 있는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입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부르기로 했냐면 몸인 교회 입니다. 모임이 아니고 몸인 교회 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있는것은 한 지역교회에 주어진 은사가 아니고 우주적인 교회, 전체, 오순절에 시작되서 주님 공중에 오실때 끝나게 되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있는,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 그 교회를 향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11절의 사도, 선지자, 전도자, 그리고 교사 입니다. 네가지를 주셨습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전도자), 목사와 교사는 하나로 보겠습니다. 그래서 교사. 이렇게 네가지 종류의 사람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와 선지자의 중요한 역할은 성경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전부 사도들이 기록했습니다. 바울, 베드로, 요한, 이렇게 사도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아니면 사도에게서 배운사람들입니다. 예를들면 누가복음의 누가는 사도바울에게서 배웠고요. 그다음 마가복음의 마가는 베드로에게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성경을 기록하고 교회의 기초를 닦는 것입니다. 사도 선지자고요. 이분들은 현재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라지고 더이상 사도는 없습니다. 선지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와 선지자들이 쓴 글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이 성경이 우리에게 사도 선지자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금 있는것이 전도자이죠. 복음 전하는 사람, 그 다음에 교사 입니다. 이 목자와 교사는 하나인데요. 교사는 반드시 성도들을 돌보는, 성도들에게 양을치는, 그런 마음을 가진 교사 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교사 인데요. 하나 보시겠습니다. 여기 목사라고 하는 단어는, 이것은 목사제도를 사용하고 있는 곳에서 번역을 해서 목사라고 번역을 했지, 이 단어는 원어가 포이맨이라는 단어고, 그 단어의 뜻은 목동이라는 뜻입니다. 양을치는 목자, 그래서 이것은 엄밀하게 번역하려면 목자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목사라고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목자와 교사 입니다. 이 두개를 합쳐서 교파교회에서 이것을 목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이렇게 부르는데요, 이것은 교사 입니다. 그래서 이 네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우주적인 교회, 몸인 교회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성경을 기록하고 터를 닦았고, 우리 책임은 이 성경적인 터 위에서 세우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우리 마음대로 하지않고 이 터 위에서 세우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뭘로 세우느냐? 금은 보석, 하나님이 가치있게 보시는 것으로 세워야 합니다. 왜죠? 심판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상주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로 잘 섬기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몇가지를 보겠습니다. 첫번째 복음 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것이 한국모임에서 저희들이 많이 안타깝게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전도자는 영혼 구원이 목표가 아니고 교회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것이 핵심적입니다. 전도자는, 이것이 교회에 주신 은사 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의 역할을 영혼을 구원해야 되지요. 그렇지만 반드시 교회를 염두해두고 그가 교회에 들어가도록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도 그렇게 되어 있지요.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제자 삼아야 하고요. 그 다음에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항상 전도자들의 수고를 생각할때에 참으로 감사하지만 저희들이 전도자들의 기능이 교회를 염두해 두어야 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교회를 위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교사입니다. 교사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것은 무엇이냐면, 자기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삶이 먼저있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안살면서 그렇게 살아라고 가르치면 힘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성령이 사용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교사들의 책임 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도록 권하는 일. 하여간 이렇게 네가지 은사를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다시 말씀을 살펴보면 은사 그러면 성경에 네번 나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첫번째는 은사 자체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은사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지역교회에 주신 은사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세번째, 로마서 12장에서는 그 은사들이 어떻게 활동하는가 하는것이 나오고요. 그 다음 에베소서 4장에서는, 지역교회에 주신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이고요. 몸된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사자들은 에베소서 4장입니다. 이렇게 저희들이 이해해 보겠습니다. 그 중에서 몇가지, 저희들이 은사들이 이렇게 있다. 그리고 이런 은사를 따라 섬길때에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모임이 된다. 입니다. 은사를 무시하면, 은사와 상관없이 살면 지역모임이 성전이다, 성령이 그 가운데 계신다는 원칙을 어긋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은사대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몇가지 문제가 되는 것들을 보겠습니다. 아까 은사가 여러가지가 나와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몇가지 교리적으로 알고 명심해야 하는 내용을 몇개 보겠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8-11).
은사에 관한 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고 13장에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8절에 보시면 예언, 방언, 지식, 이 세가지가 없어집니다. 예언, 방언, 지식 이 세 은사가 사라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사가 지금도 있다고 하면 안됩니다. 예언,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 그 다음 방언, 지금도 방언하면 안됩니다. 방언은 그쳐졌습니다. 그리고 방언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외국어 입니다. 외국어지, 혀 꼬부라지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 다음 지식도 폐해집니다. 예를들면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딱 보고 그가 헌금을 제대로 한것을 아니구나 한 것이 지식입니다. 그런 지식을 가진 사람은 지금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10절까지 보시면 은사들이 쭉 나열되어 있습니다.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이 은사들을 세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첫번째 8절, 지식 지혜. 9절 다른이라고 되었으니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영분별, 여기까지가 두번째 카테고리 입니다. 그 다음 세번째 카테고리가 '다른이에게는' 이라고 했으니까, 방언 통역입니다. 이 세가지 카테고리에서 하나씩을 언급한 것입니다. 자, 첫번째 카테고리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은 무엇을 뺏느냐면 지식을 뺐습니다. 두번째 카테고리에서는 예언을 뺏습니다. 그 다음 세번째 카테고리에서는 방언을 뺏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8절 입니다. 예언, 방언, 지식이 폐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와있는 모든 은사는 폐해진 것입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만 뺀 것입니다. 각 세개의 카테고리에서 하나씩만 언급했을 뿐이지 이 은사들은 전부 폐해져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첫번째 믿는 교리(doctrine) 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언한다, 지금도 방언한다, 지금도 영을 분별한다. 이것은 전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이상 없는 부분입니다. 그 부분이 첫번째 저희들이 기억해야 하는 부분이고요. 그 다음에 9절,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 합니다. 사도바울이 구원받고 당시 고린도서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보면 이천년 전이지요. 사도바울은 저희들이 존경하고 저희들이 따라갈수 없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 사도바울도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왜 이런말을 하느냐? 사도바울이 모르는것이 있을까요? 사도바울같은 분이? 그런데 이렇게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알고' 이것은 지식입니다. 사도바울의 지식은 부분적입니다. 그 다음에 9절, 사도바울이 예언하는 것. 사도바울이 이렇게 예언하지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모아놓고 자기는 예루살렘으로 떠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떠난후에 이리들이 들어올 것이다. 양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해칠 것이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에베소 교회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부분적이다. 부분적이 아닌것은 뭐죠?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10절, 그럼 사도바울의 지식과 예언과 대조되는 온전한것(10절) 신약성경입니다. 이 온전한 것은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이 완성될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들이 폐해집니다. 그래서 두번째 은사에 대해서 두번째 기억할것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는 모두 폐해졌다. 오늘날 더이상 없다. 이것을 지금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납니다. 사람을 미혹케 하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것들을 보여서 거기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사람을 끌고 가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셔서, 신약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온전한 것은 신약성경이다. 어떤분은 "온전한 것은 하늘나라에 갈때이지 않느냐?" 라고 보는 분이 있는데, 지금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대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이 땅과 하늘을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부분적인 예언과 그 다음에 온전한 것은, 사도바울은 신약성경의 일부를 씁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쓰고 또 야고보가 있고 또 복음서가 있고, 그래서 온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10절의 온전한 것은 신약성경이다. 그 다음에 11절, '어린아이'. 누가 어린아이냐? 저희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구약성경은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이렇게 표현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렇게 나옵니다. 신약은 그렇게 안나옵니다. 하여간, 우리는 구약성경이 좋아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앞에 확 나타나서 "너 이렇게 해라. 어디로 선교가라. 혹은 너는 은사가 무엇이니 이렇게 섬겨라." 이렇게 속시원히 말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어린아이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어린아이 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십니다. 이것 하나만 찾아보겠습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하나님이 딱 나타나서 이것이 선이고 저것이 악이다라고 해버리면 얼마나 간단하고 분명하고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린아이일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단한 식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생각해 내는 겁니다. 올바로 성경적인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단을 받아, 그리고 여러가지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이 하나님 뜻이구나 하는것을 분별력 있게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한자로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부러워하면 안됩니다. 그래도 모세는 떨기나무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모세야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다. 내가 너를 불러서 출애굽 시키겠다." 이것이 좋은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여러가지 상황과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길을 가라고 하시는지,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따라가고, 교회 가운데 상당하고, 그렇게해서 주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해서 말씀 드렸고요. 그 다음에 다시 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사야서 53장은 참 감동적인 대목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이사야가 자원합니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그래 네가 가라"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백성에게 아무리 말을해도 깨닫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자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합니다. 그 평생에, 그리고 그 결과가 거의 없습니다. 그는 평생 구원받는 사람을 못만들어 냅니다. 아무도 자기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한 사역입니다. 이사야를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픈거죠. 그리고 최근에 말레이지아 수양회를 다녀왔는데요. 거기서 부르심에 대해서 했습니다. 이샤야도 하고 요나도 하고 그중에 하나, 호세아를 했습니다. 제가 청년 두명과 같이 갔는데요. 그런데 호세아는 어떻게 부름을 받느냐면, 하나님이 "너는 음란한 여인하고 결혼해라"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음란한 여인입니다. 그 여자와 결혼합니다.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이 이름도 뭐냐면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 그런 이름을 붇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는데 이 여자가 바람을 피러 나갑니다. 그 말씀을 듣고 청년 형제가 저에게 와서 물어봤습니다. "이거 이상하잖아요, 형제님? 아니,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 형제들은 총각이니 아주 심각합니다. "간음중에 잡힌 여인은 돌로쳐서 죽이게 되어 있는데 그런 여자랑 결혼을 하라니요?" 만약에 저희가 호세아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십니다. 이사야도 부르십니다. "가라 한명도 네 말을 듣고 구원받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게 이사야 사역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오늘날 이사야 53장을 읽고 우리들 가운데 구원받는 사람이 나옵니다. 놀라운 거죠. 그래서 다시 보시면, 5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주님이 창에 찔림으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린 거죠. 주님이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창에 찔리고 못에 찔리고 한 것은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상함은" 그가 채찍에 맞으시고 그렇게 한것은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평안하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낫게 되고.. 이것이 놀라운 구절이지요. 6절에 보시면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다 지고 가셨다. 이것을 근거로 어떻게 잘못해석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4절 보시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이 질고라고 하는것은 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때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을뿐 아니라 우리의 병을 대신지고 죽으셨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다음 10절도 마찮가지죠. 10절에서도 "여호와께서 그로(예수님으로) 상함을 받게 하시고 우리 대신 병(질고)을 짊어지게 하셨다." 질고를 당케 하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요. 어떤사람이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요. 그리고 죄로 인한 가책을 받지 말고 오히려 십자가에서 대신 죽은 주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하시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이렇게 제시하지요. 그러듯이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병을 다 가져가셨기 때문에 병에 걸리면 이 병으로 고통 당하지 말고 이렇게 말하십시요. 나았다. 내 병은 예수님이 이천년전에 십자가에서 다 가져갔다." 라고 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성적으로 병에 걸리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병도 못고칩니다.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는데 못고칩니다. 세번 주님께 기도했지만 주님이 안고쳐주십니다. 드로비모는 에베소에 두었고, 디모데에게 자주나는 비위를 위해서 포도주를 쓰라고 했습니다. 사도가 안수해서 고쳐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못고칩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이사야 53장에 주님께서 죄와 동일하게 병을 짊어지셨다고 주장하면, 이 구절을 인용하면, 이 구절을 누가 인용하냐면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인용하십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이사야서에서 메시아께서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고 이사야가 52장에서 예언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이 메시아이기에 성취하십니다. 어떻게요? 이 땅에 오셔서 이천년전에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의 병든자를 고쳐주심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죄와 다릅니다. 그런면에서 저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것들을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첫번째, 저희들이 은사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살펴보면서 다시한번 첫번째로 강조할것은 구원받을때에 모든 성도님들이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의 책임은 내 은사가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대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문제는 내가 무슨 은사인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은사를 알수 있는가? 라고 하는것이 우리 숙제 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말씀과 경건이라는 잡지에서 다뤄놓았습니다. 어떻게 은사를 알수 있는가? 그것을 읽어보시고 자기 은사를 알아내신 다음에 그 은사대로 섬겨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하지 않으면 우리 모임은 하나님의 모임답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모임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 은사대로 섬기지 않으면 사람의 뜻대로, 사람의 소원대로, 사람의 방법대로 끌어가지는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 은사대로 섬겨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원리다. 두번째 보시겠습니다. 은사하고 재능하고 구분되야 합니다. 여러번 말씀드리는 건데요. 어떤분이 음악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그런 음악적 전공이 있습니다. 그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것과는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찬양을 할때 물론 악보대로 불러야 하죠. 그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 노래를 잘부르는것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것과는 다르다.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부를 잘해요. 그래서 어떤 책을 읽고 내용파악을 하고 그것을 잘 설명해낼수 있어요. 그것과 성경에서 교사의 은사와는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원래부터 타고난 재능과 영적인 은사와는 구분된다.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어부 입니다. 그는 공부한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베드로 전후서를 씁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얼마나 우습냐면요. 베드로 전후서를 놓고 거기에 사용된 단어들, 거기에 사용된 문장들을 보고 안믿는사람들이 혹은 성경 신학자들이 "이것은 베드로가 썼을리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고급 문장을, 이렇게고급 단어를 무식한 갈릴리 어부가 썼을리 없다." 그래서 베드로 전후서는 지금도 베드로가 저자라고 하는것을 의심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교육받은적이 없지만 성령이 감동하시면 그가 놀라운 단어들을 사용하고 놀라운 개념들을 말할수 있는거죠. 이 두가지의 개념들은 다르다. 또 다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유대인의 사도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십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죠. 자기 유대인에게 나는 이방인에게 서로 교제의 악수를 하죠. 그런데 저희들이 생각해보면 누가 유대인의 사도가 되어야 적당하다고 생각되냐면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가 율법주의자, 또는 오랜 전통들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방인의 사도를 하면 딱 좋아 보입니다. 하나님은 거꾸로 하십니다. 왜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죠? 그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영광을 받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간이 설득해서 믿을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도자가 현란한 설득력으로 안믿는 사람을 막 설득시키면 안됩니다. 그렇게하면 사람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 사람 복음을 진짜 잘 설명한다. 그 사람과 개인 상담을 하면 안믿을수가 없겠던데?" 나쁜 전도자 입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전도방법은 성경적인 전도 방법이 아닙니다. 복음은 어떻게 나가느냐? 이렇게해서 저 사람이 믿을수 있을까? 싶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전해서는 아무도 못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여서, 그 전도자의 말을 사용해서 그 마음을 열어서 구원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거다." 저 어렵게 말했는데, 말도 안되게 말했는데 구원을 받은거예요. 이것이 항상 하나님의 방법이예요. 그래서 사람이 갖고있는 능력과 영적인 은사는 다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공부를 잘하고 내용파악을 잘하고 요약설명을 잘하니까, 그 사람에게 교사의 은사가 있는것처럼 절대로 인정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친화력이 있고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도 잘 말하고 어떤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복음을 제시한다고 해서 그를 전도자의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하는일이 다르다. 만약에 교회가 이것을 놓쳐 버리면 세상의 회사와 같이, 효과있게 어떤 일을 해내는, 예를들면 삼성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세상 회사는 어떤 사람을 뽑냐면요. 삼성에 들어가려면 스펙이 좋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능력있는 사람을 뽑습니다. 회사는 능력있는 사람을 뽑아서 그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사용해 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있는 사람을 안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전능하시거든요. 하나님은 능력있는 사람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쓰죠?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을 쓰십니다. 누구를 쓰시죠?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능력 필요없습니다. 이점이 회사와 교회가 다른점입니다. 저희들이 그런 면에서 그가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육신적인 재능과 하나님이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시는 영적인 은사가 구분되어야 한다. 이 부분이 은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러면 또 하나를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은사를 자꾸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모든 성도님들이, 그러니까 저희들이 반대하는 겁니다. 목사제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성직자들이 있고 특별한 전문가들이 있고, 회사의 경영진처럼, 그 교회를 경영해가는 사람들이 있고 추종해가는 사람들이 있고, 시킨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렇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요, 우리는 모두 한몸의 지체일 뿐 입니다. 누구는 눈이고 누구는 발이고 누구는 손이여서 그렇지, 우리는 다 한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패는 어디서 갈리나면 모든 지체가 역사하고 있는가에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아무도 실업자 없이, 영적 실업자 없이, 모든 성도가 다 함께 기도하며 책임감을 느끼며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며 이게 교회입니다. 어떤 똑똑한 사람 몇몇이서 이 교회를 싹 계획하고 좋은 방법을 쓰고, 그래서 예를들면 구도자들이 잘 구원받을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 복음의 좋은 어떤것을 가지고 있다. 성도들이 오면 그들을 잘 어떻게 할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이런것이 아니고 모든 지체들이 주어진 은사를 따라 섬길때만 하나님의 교회가 되는거고요.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령께서 주인인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저희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이것입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는 지옥에 안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안보내려면 아주 간단합니다. 창조를 안하면 됩니다. 지옥에 안보내는 것이 하나님 목표라면 안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의 목표는 지옥에 안보내는게 아니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내가 닮아가려면 어떤 방법을 해야 되느냐? 지금 저희들이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은사를 사용할때 내가 주님을 닮아 갑니다. 그래서 은사대로 섬겨야 하는 이유,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내가 구원받은 목표에 이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하나를 더 보시면, 은사는 개발되어야 합니다. 어떤 은사가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그 은사가 드러나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은사를 개발해 내야 합니다. 은사가 이것이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다음에 이 은사같다 그러면 그 은사를 계속해서 키워나가야 할 책임이 본인과 지역모임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에서도 어떤 형제님들의 은사를 격려하고 본인도 그 은사를 개발해야 할 책임을 주님앞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은사는 구원받을때에 주어진다. 그리고 두번째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아는 방법이고요. 그리고 알았을때 그 은사를 효과있게 사용하도록 그 은사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저희들이 모임 생활을 할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는 독특합니다. 보통 그런 예를 많이 보지요. 저희들이 눈송이를 보면 다 똑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눈송이 하나하나가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뿌려뜨려 내리는 그 눈송이도 각각 다르게 만들었는데 우리를 얼마나 개성있고 독특하게 만드셨겠습니까? 그래서 교사라고 해도 은사가 다 다르고 전도자라고 해도 다 다르고 또 장로일을 한다고 해도 다 다릅니다. 이 세상에 딱 한명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독특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유일한 독특성을 내가 잘 발휘해야 모임이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으면 항상 비교하게 되고, 잘못하면 시기하게 되고, 그래서 모임 가운데 갈등이 늘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모임이 모임답게 되기 위해서 내가 주님을 닮기 위해서 그리고 모임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내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내고 그 은사대로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은 일을 우리 가운데 이루셔서 주님께서 영광을 취하시고 또 저희들에게 참된 축복이 주어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만 더 간증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어떤모임, 미국에 있는 어떤 모임을 방문한적이 있습니다. 작은 모임인데 대전중구보다 더 작은 모임입니다. 그 모임에서는, 모임에서 굉장히 중요한것 중에 하나는-여러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어야 되고 그분이 말씀을 교제해야 하고 그런거죠. 그런데 그 모임에서는 그런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것은 성경 하나만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수 있느냐면 '내가 기왕이면 말씀 은사를 사모해야 되겠다.' 이렇게 해석하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원한다고, 그래서 구하고 그래서 받는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자기 뜻대로 나눠주시는 것이죠.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11).
그래서 우리가 뭘 원하고 갖고 싶다고 해서 갖는것이 아니고 주님이 어떤 은사를 주셨는지 내가 알고 그 은사를 사용할 뿐입니다. 쭉 흐름이 그렇게 가 있는데 여기와서 갑자기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라고 했으니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이렇게 합니다. "너희는"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지역모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지역모임은 우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교회를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은사자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임에 전도자가 필요하다면 기도하는 것이죠. 전도자를 주십시요. 우리 모임에 교사가 필요하다. 교사를 보내주십시요.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어떤 모임은 성도님 수도 적고 그렇게 어떻게 하냐하면, 그렇지만 교회로서 기능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거기는 과감하게 한달에 4주 잖아요? 4주를 전부 은사있는 사람을 외부에서 초청합니다. 자기들이 자체적으로 은사가 없거든요. 4주를 네번 다 외부에서 은사있는 형제를 초정해서 교회를 끌어 갑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래도 모임안에 누가 교제하는 사람 좀 있어야지. 장로의 조건을 보면 가르치기를 잘하는데." 이런 생각을 할수 있는데, 그런 모임도 보았습니다. 그 모임이 바람직하다 그런것이 아니고요. 하여간 그럴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 가운데 주님께서 교회를 인도하시되, 성령의 은사를 따라 교회가 인도되도록 하셨고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와같은 원칙을 어떻게 실행해 내고 있는가? 또 어떤 은사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저희들이 은사에 관해서 배우고 저희들이 고민하고 기도하고 또 실행해 내고, 이것을 한꺼번에 이루어낼수 없다 할찌라도 계속 오랫동안 기도제목을 가지고 이 일을 이루어내서 대전중구 모임이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께서 일하시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서희들의 마음의 소원을 이뤄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상입니다.
'한봉래 형제님 >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3. 교회의 복음전도 > (1) | 2021.07.20 |
---|---|
< 12. 제사장 > (0) | 2021.07.20 |
< 10. 성령님이 장로를 세우심 > (0) | 2021.07.20 |
< 09. 장로의 자격 > (0) | 2021.07.20 |
< 08. 성령 > (0) | 2021.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