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교회

< 15. 자매들의 섬김 (1) >

박이레 2021. 7. 20. 23:48

2020년 5월 29일 금요일 / 한봉래 형제님

< 교회 15_자매들의 섬김 (1) >

저희들이 교회진리를 윌리암 맥도날드 형제님께서 쓰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교회' 하고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이 쓰신 '주의 이름으로 모임'이라는 책을 놓고 저희가 여러가지 주제를 죽 따라서 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이 14장, 그래서 꼭 집에 가셔서 책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보통 이렇게 하다보면 성도님들은 책을 안 읽어오고 저만 열심히 읽고오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려고 하는것은 노만 크로포트 형제님, '주의 이름으로 모임'이라는 책의 14장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 안에서 자매들의 섬김' 이라는 주제입니다. 그게 14장이고요. 15장까지 자매들의 섬김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번달에는 자매들의 섬김을, 구약과 신약에서는 복음서에서만 다룹니다. 다음달에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자매님들이 어떻게 섬길것인가 하는 내용을 다루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내용은 구약성경과 복음서까지, 시간이 잘 될지 모르겠습니만 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저희들이 잘 아는 것입니다. 돕는배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1-6).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1-15).

우선 구약성경에서 여자들의 섬김에 대해서 첫번째로 다루는것이 하와입니다. 두번째로는 사라를 다룰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두 여자만 다룰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범죄 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 디모데전서를 보면 교회 안에서 자매들의 역할이 잠잠하고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잠잠하고 순종하는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그런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제일먼저 다시 창세기 3장으로 오셔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단이 에덴동산에 살고있는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기 위해서 여자에게 질문하고, 그래서 결국 여성이 따 먹었잖아요. 그때 여자가 어떤것을 잘못했지요? 말씀을 더하고 뺀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가감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하거나 빼면 안됩니다. 하와가 덧붇이고 뺀것은 죽을까 하노라 한것입니다. 덧붙인것은 만지지 말라라고 한것입니다. 하와의 실수가 첫번째 보면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뱀과 논쟁을 하다가 더 넣은 것입니다. 더 넣은것은 좋은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성경대로만 해야 합니다. 성경보다 강하게하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성경대로만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성경에 있는것을 빼면 안되죠. 이것을 다시 교훈을 받아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잘 여러번 에덴동산은 최초에 범죄가 일어난 현장이기 때문에, 죄는 어떤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는 중요한 장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자주 다루는 것이죠. 여기서 잘못된것을 보겠습니다. 첫번째, 창세기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참으로" 이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맞느냐? 하고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맞느냐고 뱀이 여자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그때 여자가 대답합니다. 먹을수 있되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서 넣고 빼 버린거죠. 그래서 첫번째 교훈 입니다. 만약 뱀이 이렇게 말을 걸어올때에 하와가 대답하면서 넣고 빼면서 문제가 됬는데 하와는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하와는 어떻게 했어야 하느냐면,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신 목적이 돕는 배필입니다. 돕게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와가 처리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이 처리해야 할 일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불러야 합니다. "여보, 여기 뱀이 뭐라고 말하는데 와서 처리하세요." 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이게 하와의 첫번째 잘못입니다. 여자가 지금 잘못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나 남편이 한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하신 말씀이나 하나님이 머리로 세운 남편을 통해서 한 말을 들어야 합니다. 듣지않고 하나님도 아니고 남편말도 아니고 다른사람의 말에 대응했던 것이 첫번째 잘못입니다. 그래서 하와는 아담을 불렀어야 합니다. 자기가 처리할 몫이 아닙니다. 아담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여보, 여기 말하는 뱀봄 보세요. 뱀이 말을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을해요. 당신이 와서 처리하세요." 이것이 정답입니다. 이렇게하지 않은것이 첫번째 잘못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사단이 공격하는 것, 첫번째 공격하는 것은 말씀 입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넣거나 배면 안되는거죠. 그래서 저희들이 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이유 입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이것이 첫번째 질문이고요. 그 다음에 뱀이 두번째 하는 방법입니다. 이 구절은 제가 말씀 전할때 늘 쓰는 것인데요. 미션임파서블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불가능한 임무입니다. 사단은 불가능한 임무를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환경입니다. 이제까지 죄가 없었던 곳입니다. 거기에 한번도 죄를 경험하지 못한 아담과 하와가 살고 있습니다. 완벽한 환경에서 죄 없는 인간이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 죄를 도입해야 합니다. 이 두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게 제가볼때, 미션임파서블 입니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죄없는 환경에서 죄를 지은적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범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방법이 간단 합니다. 뱀이 많은 말을 안합니다. 뱀이 말하는 것은 1절과 4,5절을 말하고 끝납니다. 그리고 죄는 들어옵니다. 그래서 죄가 굉장히 간단하게 도입 됩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5절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다. 이것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하나님이 못먹게 한것,은 너희들을 그 좋은것을 못먹게 해서 너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늘 복종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두번째 책략입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흔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슷하게 말하면서 아닌쪽으로 지금 간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저희들에게 적용해 보면요, 저희들이 언제 불순종하느냐면, 하나님이 선하실까 의심될때 불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언제 불순종하느냐? 우리의 형편이 고난속에 있을때 입니다. 우리가 고난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금방 이렇게 의심합니다. "아니 하나님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너무하신다. 왜 나에게 병을 주셨는가?" "왜 나에게 이와같은 불행을 허락하셨는가?" 이게 상황을 보고 그리고나서 무엇을 의심하느냐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거나, 선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사단의 두번째 책략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된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붇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요셉, 요셉은 어린 나이에 열세살이 되던해에 형들에 의해서 죽임 당할뻔 하다가 애굽에 종으로 팔려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 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종으로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은 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훗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행한 악을 선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나를 애굽에 보낸것은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이게 그 사람들의 악함과 어리석은 행동들을 그는 배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바꾸어낸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다. 내가 볼때에 지금 당장 내 눈으로 볼때에 불행해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찌라도 이것이 사랑의 손길이다. 사랑하셔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믿는것이 믿음입니다. 두번째는 그렇고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먹으면 눈이 밝아" 이렇게 했는데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거고요. 두번째는 어떻게 이해할수 있느냐면, 하나님의 명령은 이것입니다. 모든 나무를 다 먹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 하나를 금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는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선한 은혜는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것 하나에 집중합니다. 이게 사단의 전략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이 그것을 왜 못먹게 했느냐? 그것을 못먹게 한 하나님의 태도가 의심스럽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나머지는 다먹게 했는데 그것을 빼는거죠.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신 수많은 축복들을, 그래서 이런 찬송이 있죠. '네게주신 복을 세어 보아라' 구원받게 하시고 하늘나라 소망을 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지금도 은혜 가운데 우리를 끌고 가시고 지역 모임 가운데서 주님을 예배드리게 하시고 수많은 은혜가 있는데, 이것 하나에 주목하게 하는것, 이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그 다음 세번째 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것, 하나님이 뭔가를 금했습니다. 예를들면 저희들은 신약으로 넘어오면 자매들은 교회에서 잠잠하게 되어 있습니다. 순종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관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지하는것이 나쁜 거냐? 하나님이 왜 금지했을까, 허용하면 좋을텐데, 다 먹으라 그러지시.. 이 좋은것을 못먹게 했다. 그리고 모임 안에서 자매들이, 자매들이 더 훌륭하고 더 똑똑하고 말씀도 잘하는데, 입을 다물게 했다. 하나님이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금한것이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서 못하게 하신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금지한것은 하나님의 선한의도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여기보면 시편에 있는 기자가, 혹은 뒤에 야고보같은 신약의 기자들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좋은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좋은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시면 좋은 것입니다. 금지할만한 이유가 있기 떄문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제한하고 우리를 낮추기 위해서 금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5절에서 세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케 하고,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가 아닌 한가지 금지에 주목하게 하고, 그 금지가 하나님의 선한 의도임을 믿지 않게 하는것, 이게 사단이 하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으로 넘어가는 거죠. 그 다음에 세번째로 죄를 짓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서 뱀은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불어 넣고요. 그리고 5절에 "그것은 좋은것인데 좋은것을 하나님이 제한했다"라고 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4절입니다. 뱀이 한 세가지 입니다. 이 세가지만 하면 딱 죄로 넘어갑니다.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여러가지 말씀 중에서 사단이 부인한 첫번째 내용이 무엇이냐? 심판을 부인 합니다.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완전범죄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벌하신다. 그 죄에대한 댓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놓치니까 사람들이 합니다. 죄가 이익이라고 생각 합니다. 죄를 짓고 벌이 없다면 그 죄는 할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게 세번째 입니다. 말씀을 의심 시켜야 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의심케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케 하고, 세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합니다. 잠깐 다시 보겠습니다. 뱀이 말을 할때, 1절에서 뱀이 말을 걸어올때 하와가 해야하는 태도 입니다. 첫번째, 아담을 불러야 합니다. 자기가 다룰일이 아닙니다. 뱀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질문해 오면, 자기는 물러서고 아담더로 와서 이거에 대응하게 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두번째 입니다. 5절에 뱀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좋은것을 너희들에게 안주고 있는거다 라고 말했을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외곡하는 사람과 대화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사람과 더이상 대화해서는 안됩니다. 이단에 넘어갈때 늘 그런것입니다. 이단들이 이상한 이론들을 펴서 성경을 교묘하게 설명할때 그만둬야 합니다. 아담에게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만둬야 합니다. 세번째, 4절에 "결코 죽지 않는다" 라고 얘기했을때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부인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정확하게 하나님의 벌이 시행됩니다. 뱀은 죽지 않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죽는다고 했지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누구말이 맞나 보시죠. 6절에서 먹습니다. 먹을때 세가지가 들어갑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합니다. 이 세가지가, 되어있는데요. 사람들은 이 세가지가 있으면 살것 같은거예요. 그래서 6절에서 먹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7절에 보면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누구말이 맞는거죠? 하나님께서 죽는다고 했는데 먹고 안 죽었잔아요? 그럼 죽음이라고 하는것이 뭐죠. 그래서 저희들이 장례식할때마다 자꾸 다루는 것인데요. 죽음이 뭐냐 할때, 각 나라마다 죽음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 죽음이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육체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숨을 안쉬는 것, 심장이 안뛰는것, 뇌사, 여러가지를 죽음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장이 정지 되었을때, 혹은 뇌는 죽었는데 심장은 뛰고 있다면 어떤것을 죽음이라고 할것이냐 복잡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 입니다. 사람은 세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나와 있는데, 몸과 혼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세 요소입니다. 육체죠, 혼이 있습니다. 혼은 우리의 이성입니다.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영은 하나님을 알아보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영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사람은 셋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몸과 혼과 영입니다. 그런데 이 영과 혼은 함께 묶여 있습니다. 이 둘은 구분 됩니다. 그래서 이 둘은 항상 같이 갑니다. 그래서 보통은 둘로 표현하죠. 몸과 영혼.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은 항상 분리를 말합니다. 영혼이 몸에서 떠나가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아담과 하와는 죽습니다. 하나님이 말하는 죽음은,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할수 없습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이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이라는 단어의 뜻은 분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교제가 끊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르면 숨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게 죽음 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의식도 없는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지금 안믿으시는 분들,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여기 1절에 보면 죄인들입니다. 아직 죄가 용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자기의 죄를 믿음으로 깨끗케 한적이 없습니다. 죄인이죠. 그 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로 죽었던" 죄는 영적인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어떻게 살리시느냐? 믿음으로 살리십니다. 성령으로 믿는자를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살려 냅니다. 구원받기 전의 모습을 2-4절이 말하고 있는데요. 구원받지 전에는 세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번째, 세상을 따라갑니다. 두번째, 공중의 권세 잡은자 사단을 따라갑니다. 세번째, 육체의 욕심을 따라 갑니다. 육신 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세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육신이 원하는 걸 행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따라갑니다. 세상에서 다 그렇게 하거든요. 그리고 그 배후에 사단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영적으로 죽어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구절을 설명 하면서 지금 안믿는데 정열적으로 자기의 목표를 위해서, 예를들면 국회의원 나오시는 분들 보면, 자기를 뽑아 달라고 하면서 열심 입니다. 그리고 돈 벌기 위해서 하루종일 일하시는 분들, 죽었는데 열심히 활동하는거죠. 이것을 제가 농담처럼 뭐라고 부르냐면 좀비라고 합니다. 서양으로 말하면 좀비 입니다. 신체인데 돌아다니는 거죠. 이것을 중국식으로 말하면 강시 입니다. 전부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사는거예요. 그것을 보고 열정이 있구나. 저게 사람 사는 거구나. 아닙니다. 지금 강시가 뻣뻣한 몸으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죽었는데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필요한 것, 그들이 영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믿지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정열과 그 목표의식과 그 열심은 전부 죽은 시체가 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단과 육체와 세상과, 이 셋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하느냐?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않도록 어둡게 만듭니다. 성경을 읽고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취지 않도록 어둡게 하는 것이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세상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반대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에 보면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면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영적인 것과 정 반대되는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그것을 열심히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 다음, 육신이 하는 행동은 뭐냐하면 영적인 것들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열심히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과 세상과 육신이 우리를 계속해서, 믿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승리한 것이고요.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속의 이 세가지 요소들이 우리가 영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계속, 우리를 붇들고 있는 것들입니다. 영적인 것을 못보게 합니다. 영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세상입니다. 영적인 것을 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못가게 붇잡고 뒤로 끌어 당기는 것이 육신입니다. 이게 세가지 기능 입니다. 다시 창세기 3장에 보시면 "정녕 죽으리라" 그랬어요. 죄를지면 하나님 말씀하셨어요. 죽는다. 그런데 죽는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제일 문제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순간 영적인 죽음을 경험 합니다. 이제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과 말을 걸었어요. 상상해봅니다. "하나님 그런데 이건 왜 창조하셨어요?" "하나님 이건 진짜 잘 만드신것 같아요" 각 동물들의 이름을 붙여주고 하나님의 창조속에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를 보고, 하나님과 이야기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기뻐하고 이렇게 살았던 거죠. 그런데 범죄한 후로는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숨어버립니다. 이게 죽음입니다. 성경 보기 싫고, 말씀대로 살고 싫고, 성경에 있는 영적인 아름다움, 그게 뭐야? 실감이 안간다. 이렇게 되는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고요. 그 다음에 육체적인 죽음은 후에 죽습니다. 그가 구백몇살 살다가 죽잔아요. 그때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두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죽음, 그리고 둘째사망, 지옥에 가는 죽음, 두개가 있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두개가 있습니다. 처음에 태어날때는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두번째 태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두번이고 죽는것도 두개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번 죽는것만 생각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죽음은 히브리서 9장에 있는 것이죠. "한번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래서 한번 죽는것, 아담의 후손들은 다 한번 죽어야 합니다. 예외 없이.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작은 것입니다. 정말로 큰 것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말을 했는데요. 죽음에 있어서 제일 어려운것은, 우리 편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죄를 범하면 죽는다고 했는데 이 죽음이 사람들의 눈에는 죽음같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엇, 살아있네?" 이렇게 되는거죠.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죄를 짓고도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막 짓는 거예요. "괜찮네 뭐, 하나님이 넘어가시네."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미 끊어진 겁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서는 주님께서 철장으로 다스립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서 잘못을 하면 즉각 그 잘못에 대한 벌이 집행됩니다. 이게 천년왕국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죄를 짓고도 그 벌이 즉각적으로 시행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느슨하게 생각합니다. 이게 비극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두가지 결과를 가져 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롬 6:20).

죄의 특징입니다. 종이 됩니다. 죄를 지면 자기가 죄를 선택한것 같아도 죄가 그의 주인 입니다.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가 죄에서 못빠져 나옵니다. 죄를 지고싶지 않을때도 그는 죄를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경험합니다. 내가 처음에는 죄를 선택했을찌라도 죄가 나를 장악했구나. 아주 극단적인 예는 술 같은 경우에, 술을 경험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지요. 그런데 나중에는 술이 그 사람을 먹습니다. 담배도 그렇지요. 담배도 처음에 배울때는, 저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담배를 배우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쉽지 않더라고요, 꾹 참고 그래야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못 끊습니다. 그것을 끊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죄의 특징입니다. 내가 죄를 선택한것 같아도 한번 택하고 나면 죄가 내 주인입니다. 이것이 죄의 특징입니다. 그다음 두번째, 종이 되었을때는, 죄는 반드시 부끄러움을 가져 옵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심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했는데요. 그 죄로 다윗이 많은 댓가를 지불합니다. 한번의 자기 만족을 위해서 그가 지불해야 하는 댓가가 뭐냐면 자기 아들들 네명이 죽어야 합니다. 또 자기 후궁들이 압살롬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동침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다윗왕에게, 사실은 다윗은 훌륭한 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입니다. 저희들이 함부로 말할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교훈을 위해서 저희들이 다윗에게 물어볼수 있습니다. "다시 하시겠습니까?" "밧세바처럼 예쁜 여자가 또 한번 있다면 다시 하시겠습니까?" 다윗은 말할 것입니다. "두번다시 내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 범죄가 성경에 기록되어서 수많은 사람에 의해서 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그리고 그 죄를 그가 어떻게 짓기로 결정했는지, 그리고 그 후에 그가 받아야 했던 결과들이 수많은 성도들에 의해서 이것이 지금 교훈받고 있는 것이죠. 그가 두번다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죄는 그 벌이 당장 눈앞에 안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그 죄에 대한 댓가에 대하서 말씀하신것을 반드시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두려워 할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뭐냐? 암이 아닙니다. 암이 무서우면 안됩니다. 가난한것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죄 짓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짓는것, 이것처럼 무서운것이 없습니다. 죄를 두려워 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여간 최초의 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는가? 뱀이 하와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하와는 대답했어야 합니다. 자기가 대답하지 않고 아담을 불렀어야 합니다. 두번째, 뱀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하는 발언을 했을때, 하나님의 복된 성품을 의심케 하는 발언을 했을때 끝내야 합니다. 말 안해야 합니다. 내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과 나는 더이상 말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경배 드리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비난하는 사람과 나는 같은 자리에서 말하지 않는다. 이게 그가 취했어야 할 두번째 태도 입니다. 그 다음 세번째, 죽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했을때, 그는 사단과 단호하게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가 행한, 그런게 있죠. 천지는 없어져도 호리라도 갚지 않으면 우리가 행한 작은것에 대해서 조그만한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 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저희들이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은혜가 참으로 감사한 거죠. 지역모임에서 저희들이 이와같은 것들을 알기 때문에 잠깐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사도바울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이 사건이 그냥 역사적인 사실일뿐만 아니라 지금도 지역모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뱀이 에덴동산을 찾아가서 하와를 범죄케 한 것처럼, 사단이 지금도 고린도 교회를 찾아와서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을,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깨끗함에서 떠나도록,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붇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물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이거다.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리고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나오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리고 죄를 짓도록 유혹하면 반드시 심판이 있다. 우리가 물론 지옥가는 심판은 받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물론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성도로서 지역모임에서 어떻게 섬겼느냐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라는 책에 보면 어떠 어떠한 항목을 심판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가 무엇무엇을 모임에서 성도로 지체로 살아갈때 유의해야할 것인가, 그게 나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에덴동산하고 지역교회가 똑같은 것입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그래서 말하는 거죠. 그래서 고린도후서는 1-7장까지는 교회의 문제를 쭉 다룹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 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이 떠나고나니까 다른사람이 들어와서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습니다. 사도바울을 공격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1-7장까지 다룹니다. 그리고 8-9장은 고린도 교회와 사도바울과는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헌금에 관한 말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지역모임이 모금하 헌금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8-9장에 나오고요. 그다음 10-13장까지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사도바울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아직도 남아있는 고린도교회에서 여전히 사도바울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복음, 다른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10-13장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13장은 영적인 전투의 예가 됩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딤전 2:11).

그 11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해놨습니다. "가르치는것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가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매들이 지역모임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남자를 주관하지 않습니다. 지역모임은 형제들이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의 인도에 대해서 배후에서 조종하면 안됩니다. 형제들이 잘못 인도해도 놔둬야 합니다. 여자들이 교정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준 몫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 이유를 줍니다. 13절, 첫번째 여자는 돕기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상 주관하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두번째 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의 순서가 하와와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범죄하고 남자가 그 범죄에 동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딤전 2:13).

그래서 창조의 순서가 나중이고 범죄의 순서상 여자가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같은 문제가 있었을찌라도 이와같은 문제에서 벗어날수 있는 원칙을 15절에 제시 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

저희들이 지역모임에서 이와같은 원칙들을 잘 지켜야 하는데요. 대체적으로 보면 지역모임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저희들의 경험상, 자매들 때문입니다. 자매들이 수고하시고 여러가지 자매님들의 도움없이 형제님들이, 저를 보고도 많은 분들이 그러거든요. 제가 이렇게 일할수 있는것은 저희 자매가 말없이 그 힘든 것을 참아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나라 가면 상이 저보다 많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잘 모르고도 말하세요. 그래서 저는 받아들입니다만, 하여간 실제로 저희들이 자매님들을 아끼고 자매님들의 섬김속에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지역 모임에서 문제가 나올때에 항상 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자매들입니다. 자매들이 항상 문제의 원인 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원칙을 모임이 잘 실행하지 않으면 항상 문제 가운데 늘 들어 갑니다. 첫번째로 여자의 가르치는것, 주관하는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지역모임에서는 자매가 가르치면 안됩니다. 심지어 저희들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봉사를 할때 자매님들이 주일학교 봉사에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남자아이를 가르치잖아요. 가능하면 안하면 좋습니다.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남자 아이가 구원받으면 절대로 자매가 못가르치게 합니다. 이것이 원칙에 어긋나니까요. 그런데 이런 면은 있어요. 집안에서 어머니가 있고 어머니가 자매예요, 그리고 아들이 있어요. 아들이 구원받아 형제가 된 거예요. 그러면 집안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마침 아버지 되는 분이 출장을 갔다. 식사 기도를 해야해요. 누가 기도해야 할까요? 그때는 어머니 자매가 기도할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지금 가정에서 적용할 것이냐, 모임에서 적용할 것이냐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괜찮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아무리 구원받았지만 아직 어리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여러가지 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로 들어오면, 모임으로 들어오면 안됩니다. 모임으로 들어오면 어떤 경우도 자매가 형제를 가르치러나 주관하거나 하면 안됩니다. 가르치는것이 안된다고 했는데 성경을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안된다고 하면 이 구절을 들어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딛 2:3-4).

여기보면 3절에 나오는 늙은여자, 우리식으로 바꾸겠습니다. 나이많은 노성도님이 4절, 젊은 자매들을 가르치게 되어 있는거죠. 그런데 이것이 아까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과 모순 됩니다. 잠잠한것과 교훈하는것은 서로 안맞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이 구절을 모순없이 이해할것인가? 그래서 저희들이 성경이 충돌해 보이면 항상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문맥을 따라 해석한다. 어떤 문맥이냐면 성경 전체으 문맥, 신구약의 문맥, 그리고 그 책 전체의 문맥, 디모데책 전체의 문맥, 그리고 그 앞뒤 구절의 문맥 입니다. 디모데전서는 교회와 관련된 가르침 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에서 여자들은 잠잠하라는 가르침은 교회에서입니다. 그리고 디도서 2장에서의 배경은 가정입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이많은 여자가 젊은 여자를 가르치는것은 교회에서 가르치면 안됩니다. 집에 초청해서, 그 다음에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가르치는 내용,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에 관한 한 전부 형제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이 아니고 가르치는 내용이 무엇이냐면 가정을 어떻게 돌보는 것인가, 남편을 어떻게 섬기고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우리가 어떻게 형제들을 영적인 형제로 도울수 있을 것인가, 돕는배필이 될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2장은 가정 배경이고 가르치는 내용이 성경이 아니다. 가정과 관련된 것이다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으로 다시 가겠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배경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실패가 지역모임에서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를 밟으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승리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모이는 모임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실수가 반복되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어떤 실수가 반복되었느냐?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깬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단이 어떻게 접근하느냐면 하와가 혼자 있을때 뱀이 접근합니다. 하와가 남편과 있을때 접근 안합니다. 하와가 홀로 있을때, 접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그 다음에 아담, 그리고 하와 입니다. 그런데 들어가서 하와가 먼저 따 먹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줍니다. 그랬더니 아담이 먹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제를, 아담을 머리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들이 가정을 인도해야 합니다. 형제들이 인도 안하면 사단이 인도할 것입니다. 형제들이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보면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데요. 많은 가정에서 자매들이 다 합니다. 돈 쓰는것 다 합니다. 형제님들에게 "아니 형제님 왜 가만히 있으세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것은 가정의 평화가 아닙니다. 그냥 싸우지 않는것이 평화가 아닙니다. 형제가 형제답게 할때 가정에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그리고 아담에게 줍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4).

'꾀임'이라고 했는데요. 속았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완전히 속아서 죄를 짓습니다. 여자는 뱀의 말이 진짜인줄 알고 하나님처럼 될거라고 생각하고, 죽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고 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래서 여자는 완전히 속은 것입니다. 속아서 죄를 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준 것입니다. 아담과 관련해서 우리가 이해해보자면 하와가 선악과를 줬어요. 아담은 먹었어야 합니까, 먹지 말았어야 합니까? 먹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먹었을까요? 이게 아담의 문제 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돕지 않았습니다. 돕지않고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도우라고 했는데 범죄하게 했습니다. 이제 하와는 그 자기의 잘못의 결과를 봐야 합니다. 자기가 죽고 아담이 죽을뿐만 아니라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쓰라린 죄의 결과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와가 줬어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굉장히 악한 말입니다. 그러면 안먹으면 하와는 죽고 자기는 영생하죠. 그러면 난처하게 되니까, 자기가 살면 되느냐, 그래서 같이 먹었다. 이런 해석을 하는 사람은 아주 나쁜 해석입니다. 아담은 속지 않았습니다. 범죄인것을 알고 죄를 짓습니다. 그는 고의적인 범죄입니다. 하와는 속아서 범죄 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누구에게 더 크냐, 아담의 범죄 입니다. 하나님이 아담부터 책망 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머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와가 잘못했어도 책임은 아담이 져야 합니다. 아담은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하와가 먹었어요. 먹고 준 거예요. 그런데 먹고 안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가 담대하게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눈으로 본 현실을 신뢰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잘못 선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일들이 지역모임 안에 일어나지 않도록 지역 모임에서는 형제들이 결정해야 합니다. 형제들이 결정하면, 제가 언제 이런말을 한적이 있는데요. 돕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똑똑하느냐면 돕는사람이 더 똑똑합니다. 그래야 도움이 되죠. 그래서 남자보다 여자들이 똑똑한게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임에서 형제들끼리 결정을 했어요. 그랬더니 집에 돌아가서 자매에게 다 이야기 한대요. "아 오늘 교회에서 회의가 있었는데 이렇게 결정됬다." 그러면 자매들이 다 뭐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주에 모여서 다 다시, 이러면 안됩니다. 형제들이 결정해야 합니다. 그 결정이 잘못되었어도 그 결정대로 시행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임무 입니다. 그리고 그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제 주님 뜻을 알아가고 모임이 성장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이 형제님들이 집에와서 뭐라고 하고 그 결정이 잘못됬을때, 그것을 잠잠히 받아들이고, "그런데 이런 측면이 있지않을까요?" 라고 하면서 도와야 합니다. 주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와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리브가 인데요. 이삭과 리브가는 멋지게 결혼합니다. 이삭은 결혼을 굉장히 성경적으로 합니다. 자기가 보지도 않았습니다. 종이 멀리가서 구해오니까 그냥 결혼 했습니다. 굉장한거죠. 그런데 이 가정이 결혼은 영적으로 해 놓고, 가정은 육신적입니다. 아버지와 엄마가 각각 좋아하는 사람이 달라요. 그래서 이삭은 에서를 좋아해서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니까 "에서야 네가 가서 짐승을 잡아서 별미를 만들어오면 그것을 먹고 너를 축복하겠다." 이 소리를 듣고 리브가가 어떻게 하죠? 야곱에게 "야, 네가 가서 에서 인척하고 복을 받아라" 이게 뭡니까? 어떻게해야 하죠? 남편이 비성경적인 결정을 했어요.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니다. 큰자가 작은자를 섬기리라고 말씀이 주어졌어요. 그런데 말씀과 반대로 이삭이 큰 자인 에서를 축복하려고 해요. 어떻게 해야 하죠? 돕는 배필입니다. 가서 남편에게 말해야 합니다. "여보, 내가 들으니 당신이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자녀가 없어 기도했을때, 하나님이 쌍둥이를 주셨고, 또 쌍둥이가 뱃속에서부터 싸울때 우리가 기도했더니 주님 말씀이 큰자가 작은자를 섬길 것이다. 곧 둘째가 장자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과 반대로 큰 애에게 복을 주려고 합니까? 안됩니다. 이것은 주님 말씀을 따릅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을 왜 안하는 거죠? 이것은 나중에 하늘나라 가서 물어봐야 하는데요. 이 두사람이, 결혼을 잘 해놓고 둘이 맨날 다투다보니까 이제는 서로 말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제가 부부간에 이야기 할때도 늘 그런데요. 부부간에 조심해야 할것이 무엇이냐면, 서로 잘 알잔아요? 그래서 이렇게만 해도 뭐하는지 알아요. 그래서 상대방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존재 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맨날 저러는 사람이야. 내가 그토록 말을 했는데 한번도 들은적이 없어." 말해봐야 입만 아파. 나는 포기야, 저 사람. 그리고 대화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에게 가서 다시한번 말하지 않고, 말해봐야, 내가 말하면 "쓸데없는 소리마. 됬어."라고 성질부릴텐데 내가 왜 당하느냐? 하면서 야곱을 시켜서 "네가가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때,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실때 차이가 있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가 뭡니까? 사람과 짐승과 결정적인 차이는 첫번째 언어 입니다.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담이 최초로 했던 것은 이름을 붇이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두번째는 짐승들과의 차이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짝짓기를 합니다. 그들은 후손을 만들기 위해서 짝짓기를 합니다. 사람은 짝짓기 하지 않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만약 사람이 이 두개를 빼면 짐승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사람은 말해야 합니다. 대화해야 합니다. 부부간에 대화를 하지 않으면 짐승과 차이가 없습니다. 삐졌으면 삐졌다고 말하고 섭섭하다고 말하고,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하고, 못해주겠다고 하면 타협하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어떤 경우도 말해야 합니다. 말 안하고 삐져가지고 집 나가서 한참있다 들어오는 것은 나쁜짓입니다. 말해야 합니다. 아무리 화났어도 말해야 합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해지기 전까지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랑을 확보하지 못하면 어려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보면 주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관하는 경우가 리브가 입니다. 남편이 잘못하니까 내가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고쳐버립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사랑하는 야곱, 못봅니다. 이제 둘이 헤어지죠. 에서가 화가나서 죽이려고 그러니까, 야곱에게 "너 잠깐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 있어라." 잠깐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징계 입니다.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두가지 입니다. 여자들은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놓고 가르치는 것은 여자들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자매님들이 보다가 어떤 자매가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 싶으면, 직접가서 가르치지 마십시요. 형제들에게 말하십시요. 장로들에게 말해보십시요. 그러면 장로들이 찾아가서, 성경으로 권면하고, 형제들에게 맡겨진 교회 입니다. 형제들이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매들은 일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뭐냐고요? 창조의 원리와 범죄의 순서 때문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것은 제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좋은건데 안주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자매들이 하면 더 잘할수 있고 더 효과적인데 못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자매들은 속기 쉽습니다. 속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안속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할떄부터 그렇게 특성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남녀관계에 대해서 더 잘 안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의 질서 입니다. 그래서 범죄가 어떻게 일어나느냐? 질서를 깸으로 인해서, 뱀의 말을 들은것입니다. 사람이, 여자가 뱀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안됩니다. 왜 뱀의 말을 듣습니까? 그리고 남자가 왜 여자 말을 듣습니다. 여자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합니다. 이 질서가 무너진것이 에덴 동산 범죄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에서 자매들에 대해서 형제들이 말합니다. "가르치지 말라. 그리고 주관하지 말라." 이렇게 말해놓고 이게 형제들에게 굉장히 큰 부담을 갖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잘 가르쳐야 합니다. 못가르치게 해놓고 자기들이 못가르치면 되겠습니까?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성경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도움을 구하고 그리고 가르쳐 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 중요한 결정,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자매들이 승복하도록 영적인 결정들을 해내야 합니다. 이 두개가 형제들의 책임 입니다. 그 책임은 쭉 어떻게 할것인지 나와 있고요. 지금 교회진리로서는 자매들의 경우는 말하지 말고, 주관하지 말고, 대신 자매님들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이 상황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입니다. 내가 개입하지 않고도, 하나님이 할수 있습니다. 아십니다. 하나님의 교회 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걸린 곳입니다.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분에게 신뢰하는 이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

이 '해산'은 문자적으로 아이를 낳는 해산입니다. 물론 주님이 자녀를 안주시면 상관 없습니다만, 주님이 자녀를 주시면 그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기르고,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이 구원은, 첫번째 해석입니다. 생활 구원입니다. 여자들이 다른데 쓸데없이 에너지를 쓰는, 영적이라는 미명하에, 여러 다른 일들을 개입하는데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키우는 일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애 키우고 남편 돌보고 가정 살림하고 기도하고 이와같은 일을 함으로써 쓸데없는일에 시간을 사용하는 데서부터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구원 입니다. 구원은 여자들이 아이를 낳아 미래 세대를 길러냄으로써 여자들이 여기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여자 떄문에 범죄가 들어왔다. 여자가 문제다.' 라고 하는데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들의 헌신과 수고로 남자들이 일할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이 여자들의 해산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래서 그 이름이 여자들의 불명예로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가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거룩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 믿는사람들 가운데 반드시 있는 세가지 요소지요. 그리고 "정절로서" 이는 균형감각을 갖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 속에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에 거하면 그와같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정도 하겠습니다. 사라를 해야 하는데요. 나머지 시간에, 저희들이 두시간에 거쳐서 하려고 했는데 세시간에 거쳐서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은 에덴동산의 사건과 지역모임에서의 질서의 원칙을 저희들이 순종함으로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시행되는 그런 지역모임 안에서 평안과 성장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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