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히긴스 형제님

베드로후서 3장

박이레 2023. 1. 13. 13:46

< 베드로후서 3장 > 히긴스 형제님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벧후 3:1-18).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함께 이룬것에 대해서 축복하실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특별히 후서와 관련되서는 사도들은 마지막 때에 대해서 경고를 합니다. 우리 성경에서 이와같은 두번째 편지가 다섯권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사도바울 개인에 대해서 대적들이 공격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예언적인 입장에서 그 하나님의 계획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는 목자의 관점에서 이제 그 목회서신을 디모데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2서는 교리와 관련되서 어떤 한 자매에게 보내고 있는 편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이 베드로후서에서는 하나님의 교리를, 하나님의 진리를 변괴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와 함께 쓰고있는 것입니다. 우선 1장에서는 그들 중에서 그 하나님의 진리를 공격하는 공격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장래와 관련되서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는 공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여 사도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가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1장에서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신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우리가 이 부분을 읽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의롭게 결국에 통치하실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거짓 교사들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다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3장, 여기서는 빛나는, 그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3장에서는 이 한가지를 잊지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거짓된 공격 가운데에 이 한가지를 잊지 말아야지 그들이 경고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악한 일들이 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는데 하늘이 아무 소리를 내지 않고 잠잠히 있다는 것입니다." 왜 악한 자들이 아주 번성하는 것처럼 보일까요? 왜 의인들은 그토록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 이 현 세상에 왜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이 일어나도록 허락하고 계시는 겁니까? 우리가 알고있는 그 악한 범죄들은 대해서 왜 하나님은 허락하고 계시는 겁니까? 사람들이 사람을 노예로 삼고 인신매매를 하는 것들을 왜 허락하고 있습니까? 아주 대량으로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참으로 비극이 연달아서 일어나게 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시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잠잠하신 그 이유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잠잠하시다는 것은 시편에서도 여러번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까지니이까?"라고 시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대적들이 우리를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이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하게 내버려 두시겠나이까?" 시편 기자가 그와같은 질문을 가졌고 또한 우리도 그와같은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뿐만 아니라 또한 많은 선지자들도 그와같은 것을 하나님께 질문 하였습니다. 이사야도 '얼마나 오랫동안'이라고 질문하였습니다. 모세도 그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예레미야와 하박국도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질문했던 것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모든 질문에 대해서 이 장에 나와있는 이 한가지가 그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 한가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바라보시는 관점은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과 매우 다릅니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하나님의 능력을 가르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라면 천년동안 걸리는 성취를 단 하루만에 이루시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니님께서는 사람들이라면 하루도 못참는 일을 천년동안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한가지가 이 특별한 장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사도가 말하고 있던 톤이, 분위기가 3장에서는 달라져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2장에서는 그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서 아주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드르이 거짓된 가르침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짓된 삶에 대해서도 잘못되었다고 분명하게 지적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3장에서는 네번에 거쳐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성도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14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17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사실 그리고 이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나온 이 부분이 이 장을 네 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1절부터 7절까지는 기롱하는 자들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하지만 8절부터 10절까지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1절부터 16절까지는 이 장래의 왕국을 바라보며 우리가 현재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절과 18절은 하나님의 학교에서 우리가 학생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세대에서 악한 자들이 번영하고 있습니다. 그 악한 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아무 형벌도 받지않고 도망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악한 정부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상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1-7절까지 이 기롱하는 자들이 어떻게 비웃고 있는지를 말하는 부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기를 원한다"라고 1절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기 쉬운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하는 그러한 말씀집회를 갖는것은 굉장히 필요한 일입니다. 오래전에 가르침을 받은 것들을 다시 한번 우리 마음을 새롭게 상기시키고 일깨워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헬라어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평생에 거쳐서 그 헬라어 원어를 연구한 그 성경 학자들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원어 해설에 따르면 2절에 나와있는 말씀하신 것, 명하신 것은 그것이 지금도 말씀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로 통해서 말씀하셨을뿐 아니라 또한 신약의 사도들로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연구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거룩한 선지자가 먼저 나오고 사도들이 그 다음에 나온다는 그 순서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 어느 부분에서는 "사도와 선지자들"이라고 나와있는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이렇게 순서가 바뀌어서 나올때는 신약 시대에 있는 사도와 선지자들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가 먼저 나온것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먼저 언급한 것입니다. 이 신약에 있어서 '선지자들'이라고 하는것은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시대에 이제 계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지역모임에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그러한 선지자들이 신약의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서신에서 네번, 또는 다섯번에 거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그 명령을 듣게 됩니다. 베드로 자신이 그가 주님을 세번 부인하였을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는 돌이키게 됩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회복의 첫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이때 한 여인이 울면서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서 주님께서 살아나셨고 거기 계시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그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복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며 우리가 그렇게 울고있는 슬픔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그러한 어려움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주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제자들은 그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활하고 나서야 제자들은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에도 그 성전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때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께서 부활하셨을때 그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성경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슬픔 가운데서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고 회복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더욱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말씀을 드린 후에 한가지 여러분에게 주의사항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많은 경우에 이런 전자기기들을 사용합니다. 저는 컴퓨터가 몇대가 있습니다. 아이패드도 있고 아이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컴퓨터에는 다 성경 프로그램을 설치해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아주 잘못되어 있는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뭐가 잘못되었느냐면, 너무나 쉽게 성경을 찾아 볼수 있으니까 머리속에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기억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내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단이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하러 왔을때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시는데 그 말씀은 아이패드를 꺼내서 거기서 찾아서 하신것이 아니라 주님의 그 기억 가운데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 이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을 기억하는 것을, 그리고 암송하는 것을 컴퓨터를 이용해서 쉽게 찾아서 읽는 것으로 대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촉구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을 조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자리에 있는 나이드신 성도님들이 젊은 성도님들을 위해서 그 부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들이 학교에 가게 될때, 그들은 여러분이 어린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그 분위기와는 다른, 또 다른 분위기의 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여러분이 직장생활을 했던 분위기와는 또 다른 직장생활의 분위기를 그들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롱당하고 비웃음 거리가 되는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지도 않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대답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에 대해서 조롱하는데 거리껴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잠잠한 것에 대해서 이 하나님이 없다고 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롱하는 자들은 3절에 자신의 정욕이 그들의 동기임을 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계속해서 죄 가운데서 살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의 강림하신다는 그의 약속을 비웃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이 무엇을 언급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 거룩한 선지자들이 주의 오신다는 약속을 어떤 의미로서 하신 것입니까? 그들은 휴거에 대해서 그렇게 예언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언한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 가운데 개입하셔서 그들의 약한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예언해온 거룩한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러한 주의 날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말해 왔습니다. 이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은 아주 대담하게 하나님은 안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또한 일부러 무엇을 스스로 잊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개입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홍수가 있었고 그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심판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불과 유황으로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나안 족속의 악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심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조롱하는 사람들은 일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개입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잊고있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흥미롭게도 세상에 대해서 세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그때 세상"이라는 표현이 있고요. 그리고 7절에서는 "지금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세상'은 파괴된 세상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이라고 되어 있는 세상은 곧 파괴될 세상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이 올 세상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 영원한 세상입니다. 그 주의 날이 올거라는 말씀을 사도는 하게 됩니다. 이 지구상에서는 지구 자체를 파괴시킬 그러한 속성이 이 지구 안에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그 불사르기 위하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의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것이 바로 이 현 세상입니다. 그 장차 올 날에 그것이 불살라질 모든 필요한 요소가 이미 이 세상 가운데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8절에서는 주님의 날에 대해서 언급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날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도는 사람의 날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싶은 대로 선택할 수 있는 그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가 갈보리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날입니다. 그것은 휴거로부터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그 날 가운데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혼인이 거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시기 전까지의 시기가 바로 그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그래서 '하늘에 속한 것이고 교회와 관련된 것'입니다. '주의 날'은 '땅과 관련된 것'이고 '이스라엘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는지는 잠깐(?)의 의견 차가 있습니다. 주의 날의 시작입니다. 저는 그 주의 날의 시작이 환난이 시작되는 시점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계시록 6장에서는 보좌에서 "오라" 하였을때 이제 이 세상에 그 심판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날'이 사람들의 이 일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개입하는 날입니다. 그것은 환난의 시대를 포함하고 있고 그리고 천년왕국 시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년 후에 사단이 최종적으로 이제 속박 당하는 그 기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은 그 주의 날이 어떻게 끝나는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 하나님의 날이라는 것을 또한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날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와있는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 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비슷한 표현이 오직 한번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영원한 날까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네가지 날의 중요한 언급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날이 있고, 그리스도의 날이 있습니다. 주의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의 날이 오고있는 것이 분명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되서 이 8절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완됩니다. 앞에 나온 조롱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잊어버리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잊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그 세상과 관련된 비밀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왜 하나님이 지금 잠잠히 계시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 가지가 그 기롱하는 자들에게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가지가 모든 우리가 맞딱뜨리는 비극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 위험한 세상 가운데서 이 한가지는 우리에게 안전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에 신실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1장에서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2장 19절에서는 그 거짓 교사들의 거짓된 약속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그들은 종을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약속에 대해서 세번 언급됩니다. 조롱하는 자들이 그 약속을 조롱할때 한번 사용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사도는 주의 약속은 더딘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안심시켜 줄 때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제 13절에서는 그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책임이 있는지를 언급할 때에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견고하게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9절 말씀은 왜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아니하시고 잠잠히 계시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굉장히 담대한 기도를 보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저에게 보여 주십시요."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그 이름의 영광을 그 모세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실 때에 나는 오래참는 하나님이시라고 그분이 계시 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2장에서도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또한 배경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그 배경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4절에서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이야기 합니다. 그 오래 참으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케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와같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사람들을 구원함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우리를 즉각적으로 대하신다면 우리 중에 아무도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 받기에 충분히 오랫동안 그 인생이 허락될 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맨 처음에 짓는 단 하나의 죄도 우리의 생명이 그 형벌을 받아 죽게되는, 합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그러듯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바울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에게 오래 참으셨는지를 언급 하였습니다. 참 내가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본으로서 내 뒤에 그 믿을 사람들을 위해서 나와같은 사람을 구원하셨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400년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나안 땅에 살고있는 아말렉인들의 죄악이 충분히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400년을 오래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첫번째 서신서에서 3장에서 언급 하였습니다. 제가 본론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노아가 사람들을 초청해서 "방주로 오십시요."라고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회개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홍수를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장차오는 심판에 대해서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오랫동안 그 사람들의 회개치 않음을 참으셨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 구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오래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조롱을 받고 계시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기회를 주시고 그들이 회개할 날을 더 주신다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분명히 또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도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그 공의를 행사하실 때에 이제 모든 것들은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늘은 사라지고 그리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게 됩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모든 것들이 이 하나님의 날에 완전히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의가 평안히 거하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것처럼 오직 그 가운데는 의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년왕국 시대와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천년왕국 동안 주님께서는 의로 통치 하십니다. 만약 어떤 악이 발생하면 의롭게 그것을 처리하시는 그 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그분의 다스림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분이 철장을 가지고 다스리리라." 그 천년왕국 시대에는 의로움이 악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시행되는 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 하나님의 날에는 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그 하나님의 의를 손상시키실 수 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와같은 것을 우리가 앞두고 있을때에 현재의 우리의 삶에서 그 의로움이 어떻게 나타나야 되는지를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이것은 문자적으로 '어떠한 나라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주님께 대하여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이분은 과연 어떠한 분이기에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고" 그런데 똑같은 표현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느나라 사람들이기에 저렇게 행동하고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인생 가운데서 의로움이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 보여야 됩니다. 이 의가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히 거하는, 도전받지 않는 그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성격이 여러분과 저의 생활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사업에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생활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의 결혼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생활 가운데 우리의 행동이 의로 특징 되어야 됩니다. 특별히 여기에 사도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하 이것이 사도가 베드로전서에서 기록한 표현인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그것을 언급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속된 것이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다." 할때, 이 동일한 표현이 사용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의로와야 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저는 베드로가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수년 전을 상기했을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한 산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산에서 사람들에게 의에 주리고 의에 갈급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 의로움에 대해서 갈망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도 주님꼐서 가졌던 그 갈망을 우리 마음속에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또한 사도는 베드로가 기록한 저작에 대해서도 이렇게 언급하게 됩니다. 그 사도바울이 말한 것이 내가 말한것과 같다고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그가 기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6절에 또한 다른 성경을 언급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사도바울이 기록한 그 편지들을 다른 성경, 구약과 같은 위치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기록한 서신서가 참으로 영감받은 성경이라는 그 증거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한가지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푸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해석해 버리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오역하는 것은 이천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래서 오늘날에 그러한 일이 있을때에 놀랄만한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기록이 우리는 성경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우리는 그것을 합당한 태도로 그 말씀을 읽어야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아직 말씀하지 않은 한가지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수년 전에 바울은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다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피한것을 보고 그를 책망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베드로는 그러한 바울에 대하여 전혀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천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들간에 어떤 차이가 발생 됐을때 참으로 원망하고 다툼이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참으로 은혜 가운데서 그러한 다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책망을 받았고 오히려 그로 인해서 교훈을 받았고 이제 바울을 칭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7-18절에서 이렇게 결론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학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학생으로서 배워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미혹에 이끌려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있습니다. 그 악학 교리와 악한 교사들에 대해서 베드로후서에서 이미 언급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짓 교사들 뒤에 또한 악한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성경에서 마귀의 궤계를 우리가 모르는 바가 아니라는 그 마귀를 경고하는 그 말씀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마귀는 또한 거꾸로 훼손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를 분리시키는데 또한 마귀는 아주 전문가처럼 행동합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끊어 놓는데 또한 마귀가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모임을 나누게 분쟁시키는데 또한 마귀가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사용하고 있는 강력한 무기 중에 하나는 그렇게 나눠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염시키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문을 보든지, 텔레비전을 보든지, 심지어 광고 한조각을 보더라도 우리의 영혼이 오염되지 않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진 강력한 무기는 이것입니다. 그것은 낙담시키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로 낙담시키고 재정 문제로 낙담시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문제로 낙담하게 만듭니다. 우리 모임에서 이제 복음을 전하면서 씨를 뿌리는 수고를 했는데 어떠한 결과도 없을때 낙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후서에서 말하고 있는 마귀의 무기는 거짓교리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아주 좋아보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리고 요즘과 같이 인터넷이 잘 발달되어 있는 시기에는 그들의 거짓 교리가 더욱 쉽게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주 유창하게 말하는 설교자들을 사용해서 그 거짓교리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그 영광을 빼앗아 가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어떠한 가르침도 그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젊은 성도님들이 그들이 말하는 것을 처음 들을때에 잘 분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뭔가를 뺏어가고 있다면 그들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알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우리가 이렇게 보호를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미혹된대로 떨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는 것. 여러분은 이 성장에 있어서 많은 방해를 겪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세상이 하고있는 조롱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물질주의가 여러분이 성장하는데 방해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가 뭔가를 소유해야 한다고 그런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는 쉽게 그래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은 잔여근무를 하고 그대신 모임 참석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업하는데 있어서 많은 압박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셜미디어가 우리에게 많은 압박을 주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저에게 화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특별히 서양에 있어서 서양인들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요즘 세대는 그들의 삶의 목적이 오직 재미가 있으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진지하게 어려운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냥 모든 사람들이 재미있게, 그 재미만 추구하고 살고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문제가 여러분에게 있어서 아직 실제적이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인지 이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 대한 인생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의 행복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의 거룩함 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여러분의 삶을 가장 거룩하게 하는것이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 삶에 있어서 많은 비극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이 아니라 그런 고난과 시험일지라도 그로 인해서 여러분이 거룩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추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 중년이 되었을때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중년이 되서 내가 젊었을때 겪은 그 고난들, 그것을 내가 수억을 주고도 바꾸지 않겠다. 이렇게 마음이 바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 위치에 있지 않았을 것을 분명히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다른나라에 속해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결과는 이 서신의 마지막에 사도 베드로가 하고있는 것처럼 예배드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번에 거쳐서 사도 베드로는 송영을 하나님께 그의 서신서에서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두번 하나님께 송영의 찬송을 드렸고 그리고 베드로후서에서 한번 하나님께 송영의 찬송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송영에서 그는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여러분이 거룩함에서 점점 자라가면 자라갈수록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자라갈수록 여러분은 은혜 가운데 더욱 자라갈수록 그와같은 자람에 좋은점은 그 결과는 여러분이 더 나은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야 말로 우리를 영원한 시간 가운데 사로 잡을 수 있는 그러한 사역입니다.

이제 이 베드로후서 3장을 다시 돌아보면서 중요한 점을 다시 반복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적으로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은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시편에 두 말씀이 저에게 생각이 납니다. 시편 2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들이 허탄한 것을 도모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묶은 올무와 줄을 끊어버리자, 라고 도모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을 비웃으시며 "내가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리라"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십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이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도 또한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에 위대한 이름 중에 하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격을 우리는 만들어내야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때에 정확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시간이 늦어진다 생각할지 몰라도 그 시간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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