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히긴스 형제님

디모데후서 4장

박이레 2022. 12. 15. 20:51

< 디모데후서 4장 > 히긴스 형제님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딤후 4:1-22).

우리가 공적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가운데 하나님께서 복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 단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뿐 아니라 사도바울의 마지막 말을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야곱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모세와 여호수아의 마지막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 다윗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3장부터 17장까지 요한복음에서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것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는 사도바울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때로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마지막 말로 그 인생의 허무함을 고백하고 죽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말은 이제 앞으로 다가올 그 위대한 것을 전망하면서 소망을 말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여기서는 앞으로 다가올 그 왕국을 전망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도바울의 그 인생의 목적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생 가운데 그가 어떠한 힘으로 살았는지를 듣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면에서 그의 마지막 말을 함께 상고해 보겠습니다.
또한 이 장에 그의 외로움이 뭍어나 있습니다. 그가 이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버린 것들이 이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3-5절까지는 진리에서 떠난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데마도 역시 떠난 사람입니다. 또한 그레스게와 디도도 이제 그가 가진 임무로 인해서 떠났습니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처음 변명할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음을, 다 떠났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의 시대에 가장 충성된 그 하나님의 종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우리와 같이 같은 성정을 가지고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를 떠남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그 영광과 존귀한 그 날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땅에서 그는 범죄자로 고소를 받고 형벌을 받을 것이지만 이제 그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보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몇가지 것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때에 그 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지를 앞선 시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이 장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또한 우리가 그 분에 대해서 배우는 것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5절까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뭔가를 맡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그가 어떻게 다루었는지 직고할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6-8절까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의한 재판장인 네로와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또한 보상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이 행한 모든 일에 합당하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온전히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분의 종들에 대해서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9-13절까지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분의 종들에 대해서 기록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그리고 슬픈 기록의 하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데마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사도바울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것을 이 부분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요한이라는 마가가 초기에는 다른 일로 떠나버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마가는 유익한 종으로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회복시키시고 또한 악한 자들에게 그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14절에서 구리장색 알렉산더에게 주께서 그에게 행하신대로 갚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19절까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조하시는, 건지시는 분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이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그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디모데를 떠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디모데에게 있어서 놀라운 축복이 되었던 한 교사를 자신과 이별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그 옆에서 영적인 아버지로 함께했던 자가 이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있어서 그와같은 사도바울을 잃게 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일지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에게 사도바울이 상기시키는 것은 나는 가지만 주께서는 항상 너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마지막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였던 나이든 영적인 선배들,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그분들은 떠날지라도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남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을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을 읽을때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아 보십시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첫번째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발견하는 것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입니다. 그는 거짓된 고소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에 같히게 됩니다. 그리고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홀로 죽음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가오는 그 면류관을 기쁨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면에서 사도바울은 우리 주님을 닮아있는 것입니다. 참 우리가 이 생을 마감하게 될때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 본향에, 하늘에 이르게 될 때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도덕적으로 같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변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놀랍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닮아있는 사람은 더 놀랍게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의 이 땅에서의 목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이제 이 장을 몇부분으로 나눠서 보겠습니다. 1-5절까지는 매우 엄중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명령을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올 왕국과 그 왕국의 영광 앞에서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이 한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라" 그리고 6-8절까지는 사도바울이 어떠한 인생을 살았는지, 그 요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요약하자면 싸움을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13절까지는 사도바울이 어떠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책을 가져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18절까지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다른 이에 대한 동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신실치 못한 자들에게도 그는 그와같은 마음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그는 인사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 대한 문안 인사입니다. 제가 이 모든것을 다룰 시간이 없다는 것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런데 이 마지막 문안 인사 부분을 살펴보게 될 때에 굉장히 특별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특별히 네명의 사람이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세명은 형제고 한명은 자매입니다. 이분들은 다른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마지막 말 중에서도 마지막에 그들이 영예롭게 언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신자들도 잊힌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어떠한 섬김도 하나님 앞에서 무시되고 잊혀지는 섬김이 없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두 선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다시 기억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않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너희의 사랑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도바울의 마지막 말에서 이와같이 잊혀지지 않는 이들에 대한 언급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와같은 격려를 드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계속 주님을 섬기십시요. 이와같이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임에 아주 드러나 보이는 중요한 일을 맡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또한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조용히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일학교 봉사를 그와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거동이 불편한 나이드신 성도님들을 방문하는 일을 또한 조용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그런 많은 섬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상급과 보상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요. 그 세미나 시작 전에 어떤 질문지를 저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미나를 다 마친 후에 그 세미나가 다 끝난 후에 이제 그 질문지에 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에 이것을 물어볼 것이다, 라고 질문지를 준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겠습니까? 많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그 전도자가 상급을 크게 받겠습니까? 또는 수년동안 주일학교에서 수고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그렇다고해서 구원받은 그 자매님이 큰 상급을 받겠습니까? 누가 더 큰 상급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공을 따라 상급을 주십니까? 아니면 충성됨에 따라 상급을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성됨을 따라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작은 영역에서 그것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에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기신다면 여러분은 놀라운 명성을 가진 전도자보다 더 큰 상급을 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그와같은 점에 있어서 나의 책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각양 좋은 은사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 그 은사를 받은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은사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사람이 내 은사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 한 몸에서 하나님께서는 각각 서로 다른 은사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을 바라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에 내가 얼만큼 충성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은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에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겼다면 그는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한 명성있는 자보다 더 큰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각자에게 주신 것에 충성되도록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격려를 얻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살고있는 그 시대로 인해서, 또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로 인해서 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살고있던 그 시대를 관통하는 그 정신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1-5절까지는 서양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그 사고방식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비자가 이끄는 종교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를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업에서 고객이 뭘 원하는지 알고 그것에 맞춰주는 것처럼 종교도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서 바꿔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오락을 원한다면 교회에서 오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주 재미있는 여러가지 활동들을 원한다면 교회가 그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시대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둔다. 그리고 이 현 시대에 대한 사도바울의 경고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바로 이 시대에, 이 세상에서 데마가 거기에 빠져들어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기록된 것 이상으로 쉽게 짐작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데마가 여기서 어떤 심각한 죄에 빠졌다고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데마가 원한것은 이게 쉽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겠다고 그렇게 선택한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려움을 많이 가져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 가서, 그곳은 모임이 있는 곳이죠. 거기서 쉬운 모임 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물질주의 사상에 쉽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쉽고 그냥 편안하게 사는 그 삶의 방식에 너무나 쉽게 마음이 끌립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희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현 시대에서 계속 우리를 끌어당기는 이 영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시대의 압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나는 이제부터 믿음을 버린다고 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대로 단순하게 보자면 사도바울이 이제 재판을 받고 있을때 그의 옆에서 같이 도와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삶에 있어서 여러가지 면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따뜻하게 해줄 겉옷과 책을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그의 충성된 종 중에 하나가 또 병든것을 보게 됩니다.
그와같이 그는 인생의 모든 면들을 경험하고 지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모든 인생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와같은 것들은 모두 잠깐있는 것이고 모두 지나가는 것임을 사도바울은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장차오는 그 왕국입니다. 그래서 이와같은 구절들을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5절까지는 디모데에게 엄히 명한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라" 우리는 3장 마지막 부분에 그 말씀에 대해서 함께 보았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먼저 설명했고 이제 그것을 전파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파하는 명령을 장차올 그 왕국을 바라보면서 그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그 날을 앞에두고 말씀을 잔파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러 오실때에 그분께서는 산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왕국 끝에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차오는 왕국의 빛 가운데서 디모데는 말씀을 전파해야 되는 그 책임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 장차 올 왕국입니다. 우리 서양에서 존경받는 교사 형제님 중에 한분은 그분께서 말씀을 전하실때마다 항상 이 똑같은 것을, 왕국에 대해서 강조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은 이제 하늘나라에 간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역에만 근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성도님은 자신은 하늘에서 나와서 땅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행한 그 사역에 근거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잘 이해하도록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 일을 근거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이 땅을 통치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일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올 나라에서 여러분과 저의 그 위치는 내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이 땅 가운데 헌신했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충성했는지에 따라서 그 보상은 장차 올 왕국에서의 유용성이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달란트의 비유에서, 또 열므나의 비유에서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모데에게 그 왕국을 두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이 말씀 사역에 얼마나 충성했는지에 따라서 그는 그 왕국에서의 그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내용들이 그것을 뒷밭침해 주고 있습니다.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바로 그러한 것들이 3장에서 마지막에 나온 부분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메세지는 어떠해야 됨을 여기서 분명하게 배우게 됩니다. 그의 동기가 또한 어떠해야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는 유명한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은사를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로 인해서 많은 회심자가 있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것이 아닙니다. 장차 올 왕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떠한 태도로 해야 되는 것인지를 또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참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엄한 명령이 디모데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배고가 앞으로 다가와 있음을 경고받게 됩니다. 이런 때가 이른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교훈, 건전하고 건강한 교훈을 받지 않는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모임 안에 그 성도님들이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우리는 보존해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벌써 사도바울의 시대에도 그러한 진리에서 돌이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그들에게 편안하게 말해주는, 그들이 듣기좋은 말만 해주는 그런 선생들을 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모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들이 모두 전해져야 되는 그러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한 자들과는 다르게 디모데는 근신할 것을 명령받게 됩니다. 이 단어 자체로는 술취하다는 것과 대조되는 그러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이 시대의 악한 정신으로부터 깨어있는 것을 말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 자체로는 바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말을 해가지고 인기를 얻고자 하는 그런 시대정신을 따라 가는 사람들과 같이 하지말라. 그것이 근신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그는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아야 되는것을 언급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군사에 대한 비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전도인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그 씨를 인내를 가지고 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직무를 다하라, 완성하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할 일을 주셨다. 그것을 완전히 다 완성하도록 분명하게 해라.
종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젊은 성도님들이 자주하는 질문 중에 하나가 "내 은사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뭍습니다. "저는 진실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 은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런 분들에게 그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실 때에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내가 너를 무엇무엇이 되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젊은 성도님들이 첫번째 해야되는 책임은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그런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분이 원하는대로 여러분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사 여러분이 해야 될 일을 알게되는 그 환경 가운데로 주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필요를 채우고자 노력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여러분은 유용함을 개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같이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은사에 대해서 계속 모르게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에서, 여러분의 환경 가운데서 어떤 필요가 있는지를 먼저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일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 장막에서 문을 여는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그 놀라운 임무를 받게 됩니다. 룻은 그 밭의 한쪽 구석 모퉁이에서 곡식을 줍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는 그 밭 전체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 주위에서 어떤 일을 지금 필요로 하는지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나를 기꺼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다른 분들이 또한 조언을 할때에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한가지 이와같은 데서 비극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마치게 될 떄에 내가 그 목적을 모르고 살았구나. 나에게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살았구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구원하신 모든 성도들에게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모데에게 "네 직무를 다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6-8절까지 그와같은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사도바울의 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면서 이제 자신이 관제와 같이 벌써 부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믿음의 행동이며 또한 가장 큰 예배의 행동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그것이 구세주께 드리는 희생제사와 같은 관제와 같이 부어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살아있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던 사도가 이제 자신이 그와같이 궁극적인 희생제물로서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세가지 다른 비유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가지는 싸우는 자이고 한가지는 경주하는 자이며 또 한가지는 청지기 입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참으로 그가 싸워왔던 그 싸움은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선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참으로 구세주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길을 그는 다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만났을 때에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자 하는 그 소원을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가운데 있는 나이드신 성도님들도 이와같이 그 길을 잘 마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 결승점을 통과할때에 우리가 벌써 이 경주를 다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때 '아, 그때 이렇게 할걸.' 이라는 후회가 없이 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다 달렸을때에 오직 남아있는 것이 후회만 있다면, '아 내가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 라고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다면 너무나 큰 슬픔인 것입니다. 많은 각자가 이와같이 달려갈 길이 있습니다. 그 경주의 끝에 모두 그 면류관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맡은 청지기로서 그는 믿음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 확신 가운데 참으로 그 면류관을 든 손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바울은 그와같은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모든 것들이 다 그것을 방해하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참으로 다른 것들이 그 면류관을 받도록 도와주는 그런것이 없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 대신 불의한 재판장 네로가 그를 다룰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장차 그의 모든것이 밝히 드러나고 그가 의롭다고 칭찬받을 날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교회의 휴거를 언급하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나타나심이라는 것은 그 환난이 끝나고 모든 세상 가운데 주께서 나타내 보이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자기 자신만 옳게 평가받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께서, 주님의 통치가 옳게 드러나는 그 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에 참으로 사도바울은 최종적으로 그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창으로 찔렀던 그 나라는 참으로 자기들이 찔렀던 그분이 메시아 였음을 옳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거부했던 사도바울, 그날에는 참으로 그가 옳았다. 옳은 하나님의 종이었다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역시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영광과 존귀를 참으로 합당하게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그래서 사모하는 것은 10절에서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다, 그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과 대조되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을 더욱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위험을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9-13절까지 사도바울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는 디모데가 돌아와서 함께 교제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9절과 21절에 두번이나 "너는 어서 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성숙함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그 영적인 것이 겨울에 그가 추위를 느낀다는 것으로부터 면제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겉옷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은 그때에 사도바울이 갑자기 체포되었기 때문에 미처 겉옷을 챙기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비교를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예를 보게 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올림을 받을때에 이제 엘리사에게 그 겉옷을 남겨놓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다시 한번 함께 일하고 있는 두사람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과 디모데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제 떠나게 될 때에 그는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디모데에게 말하게 됩니다. 이제 이것은 사도바울이 지금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는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겉옷과 그가 그 편안함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마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보게 될때에 하나님은 참으로 회복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아들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200명 정도 이 시간에 여기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하게 예언할 수 있는것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분명히 누군가는 하나님의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이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큰 잘못을 했기 때문에 내가 다시는 회복되어 하나님께 사용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냥 나중에 조용히 하늘나라 가는 것 뿐이다,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가운데 있는 많은 분들도 그러한 장소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하늘나라에 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있는것은 하나님은 회복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도 야곱과 관련해서 내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여러번 말씀하십니다. 야곱이야말로 여러번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 대해서 내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나의 회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와있는 여러 사람의 회복에 대해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회복이 전문이십니다. 그분은 그 실패한 사람을 유용하게 회복시키는데 능력이 있으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수 없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에 다시 축복을 가져다 주시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빈 손으로 여기 돌아오게 하였구나." 하지만 그의 삶이 얼마나 가득차게 되었는지 그는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어린 시기에 바울은 사도바울은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하나님을 위한 유익한 종으로 변화되어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고 또한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책과 그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이제 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책이라는 것은 특별히 구약성경이 기록된 두루마리 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기 책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것은 그는 계속해서 연구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교제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떨어져 있어서는 영적인 성장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 이제 성경에 대해서 다 안다고 하는것은 분명히 굉장히 영적으로 위험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책의 깊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또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것이 우리는 영원을 거쳐서도 우리는 이 책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다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늘나라에서 그곳을 걸으면서 계속적으로 이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왜 이것을 그때 몰랐지? 그런 생각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에 대해서 그분의 말씀으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성장은 멈출 수 없는, 완성될 수 없는 무언가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두번째 서신을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서 자라가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은혜는 그의 첫번째 서신서에서 강조되는 그러한 주제입니다. 제 기억상 말씀드리는 것이라서 틀릴 수 있지만 베드로전서에서 열번 '은혜'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에는 주요 단어가 '지식'입니다. 그래서 은혜 가운데서 자라가라는 것은 베드로전서의 주제이며 지식 가운데서 자라가는 것은 베드로후서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라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시대를 계속적으로, 계속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내가 이정도는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자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섬김에 있어서 우리는 시대의 제한을 받을지 몰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있어서는 제한이 없는 것입니다.

14-18절을 또한 보시겠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충실치 못한 자들에 대해서 그는 용서를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여러분들에게 용서의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사실 내가 해야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정말 좋은 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서하기를 기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격의 문제로 여러번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 육신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분노로 말미암아 고의적으로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 용서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잘못했던지 간에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던지 간에 항상 내가 먼저 용서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가서 그 형제와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나한테 먼저 와서 사과를 구해야 된다고 말해야 할 도덕적인 권리가 없습니다. 여기 사도는 잘못 대우를 받았습니다.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사도를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는 주님께 그들을 맡기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는 구주를 닮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못박는 자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의 마지막 생애에서 그는 그와같은 말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 아시아에 있는 모든 자들이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과 또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굉장히 가능성이 높은것은 여기 버린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애의 전부를 바쳤는데 이제 그들은 이 순간에 사도바울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라는 사도바울의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사단이 사도바울을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무너뜨리고자 하는 사단의 계략입니다. 사도는 이것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섬겼던 사람들이 나를 버린 것에 대해서 그는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사도바울의 입장이 되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수 있는 모든것을 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들을 필요로 했을때 그들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사단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것은 너무나 사도바울에게 낙심케 하고 그는 그 기독교를, 이제 자신이 믿었던 신념을 버리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내가 그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그와같은 수고가 전혀 감사의 인사를 받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을때 여러분은 무엇으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이 하나님의 모임에서 그와같이 양육을 열심히 수고했던 사람들이 어떤 실패를 했는지 그런 소식을 들을때가 있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과 가장 많은 노력을 끼친 사람들이 주로 적은 감사를 표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종들에게 갚아 주십니다. 사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을지라도 주님은 결코 자신의 종들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 매인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 사람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이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섬기고 있는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 대한 감사와 그 보상은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 감사를 표해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그 감사를 먼저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그리고 "주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그가 첫번째로 감옥에 잡히게 될 때 주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7장에서 그가 돌을 맞게 될때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삶의 마지막에서도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잡힐 때에도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리고 배에서도 주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끝에서도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다섯번이나 거쳐서 하나님께서는 이 동일한 말씀을 반복해서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히브리서 13장에서 보게 됩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야곱이 그의 집을 떠날때에 첫번째로 언급된 것을 여기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에서 그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땅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이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그가 새로운 책임을 맡게 될 때에 하나님은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역대상 28장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때에 하나님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장에서 그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그 새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놀라운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면서 이것을 마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라는 확신 가운데서 이 송영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자신을 모든 것에서 건지시는, 그 돌보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세세토록 돌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이 찾아보실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 세번에 거친 송영이 나옵니다. 두개는 디모데전서에 나오고 여기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개의 송영 모두가 왕과 그 왕국과 관련되서 나와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그 생애(?)를 마지막으로 아끼고 있으면서, 다가올 왕국을 바라보며 이 송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네로의 그 다가오는 칼을 알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전한 그 하나님의 교리 안에서 사는 사람이 말하는 송영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하나님께 대한 영광과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은혜를 끼치는 삶이었음을 말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 두가지는 사도바울의 삶을 요약적으로 말해주는 두가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 삶, 그리고 그의 형제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삶.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이와같은 삶을 살게 하시기를 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뭔가를 더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 가운데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복이 임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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