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본 세명의 제자 > 2023년 1월 7일 토요일 / 원인수 형제님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막9:2-8, 개역한글)
저희들은 어제 다니엘과 세 친구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세명의 제자가 나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으로 잡혀 갔을때 세가지 시험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때 광야에서 마귀에게 세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그 생애 중에 특별히 세명의 제자를 데리고 행하신 일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세번의 기록이 다 나옵니다. 특히 변화산 상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두번째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나머지 두가지 사건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명의 제자의 이름을 말할때에 항상 베드로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 관련된 말씀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약의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복음서에서 동일하게 세명의 사용되었고 신약에서 세명의 제자가 각각 한 부분에서 그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 세가지의 삶을 산다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야고보처럼 순교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이나 요한처럼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똑같이 가치있게 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바울처럼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은 야고보처럼 순교하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오래도록 주님 말씀을 순종하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똑같이 중요한 삶입니다.
그 중에 처음 베드로가 나옵니다. 다니엘에서 세가지 시험을 기억할 것입니다. 첫번째가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은 주님의 돌을 떡을 만들로 하는 시험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은 변화산에서 베드로에게 시험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면 제가 생각납니다. 저는 베드로처럼 급하고 실수하고 주님을 시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볼때마다 이것이 사람의 육신의 본질이구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육신의 구원은 주님이 공중에 오셔야 일어납니다. 먼저 주님 나라에 가신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에 모든 성도님들이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우리의 육신이 있음에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훈련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 이전의 시대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시대 이전의 사건을 통해서 교회시대를 위해서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 한가지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산에 올라갔는데 주님께서 산에 올라가시고 삼일 뒤에, 8일째에 몸이 변화되셨습니다. 그 변화된 모습이, 그분 자신이 변화되고 그분의 옷조차도 변화되었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막9:4, 개역한글)
모세는 구약에서 우리 주님의 죽음을 가장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우리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을 몸으로 나타낸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9장 3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이 세 사람이 이야기 한것을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을 보십시요.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9:5, 개역한글)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말을 들었음에도 내려가지 말자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을 보고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초막 셋을 지었지만 여기가 너무 좋으니 내려가지 말자고 합니다.
저는 침례식때에 천사를 본 형제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딱 한번 천사를 보았다는 거예요. 저는 그 말을 듣고 저도 천사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육신은 주님이 그 영광을 보여줘도 베드로처럼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누었던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것, 그것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여기 있는게 좋다고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일평생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것은 내 자신입니다. 내 눈, 내 손, 내 발이 나를 실족하게 합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9:7, 개역한글)
구름이 등장합니다. 복음서의 말씀이 교회시대 이전의 일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여기서 나온 구름이 성령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는 성령님을 나타내는 그림자가 많이 있습니다. 이 구름은 성령님의 그림자였습니다. 구름은 두가지 특징이 있는데 먼저는 저희를 덮었고 거기서 소리가 났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침례를 받습니다. 그것은 물이 몸을 덮고, 장사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침례 주시는 분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침례를 받는 것은 내가 성령으로 침례 받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내가 성령 안에 있어서 외부의 어떠한 것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중요한 원리입니다.
또한 성령은 말하시는 분입니다. 왜 말할까요? 어제 저희들이 강가에 가서 돌던지기 놀이를 했는데 안내하는 분들이 말을 하셨습니다. 왜 성령님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들어야 한다고 말할까요? 이끌림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대해서 "너는"이라고 표현하고 "이는"이라고 하실때가 있습니다. "너는"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는" 이 사랑하는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소개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잘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을 듣고서도 듣지 않고 주님을 세번 부인했습니다. 주님이 아가페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세번 다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나서 신약의 서신서에서 베드로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얘기합니다.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도다" 말씀을 보는 사람은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성령님께서 사랑하도록 하십니다. 애정이 있는 물건이나 애정이 있는 사람은 가까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가까이 하면 여러분을 귀히 쓰실 것입니다.
제가 어제 여러분이 뜻을 세우고 정하라고 한 것은 주님의 뜻에 함께 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을 쓰는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에 대해서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고보는 모든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 전에 스데반이 먼저 순교했습니다. 그는 집사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긴 말씀 가운데 한장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죽음은 딱 세줄 나옵니다. 그러면 성경이 차별을 한 거일까요? 아닙니다. 야고보는 세명의 제자 중에 하나였습니다. 열두살 소녀가 죽었을떼 야고보를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주님께서 살리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구워받은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잠에서 깨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죽어 멸망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잠시 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별의 슬픔으로 눈물도 흘리고 애도합니다. 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깨우십니다. 그것을 알기에 야고보는 담대한 것입니다. 많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죽을것 같은 고통이 아님에도 믿음에서 떠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을 주님께서 가치있게 보십니다.
세번째로 사도요한은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도입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마무리 하면서 그가 사도로서 죽습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그 밤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기도 내용은 "아버지여 할만 하시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할때에 그 기도를 하신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쁘고 행복해서 하나님의 원대로 살아야지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 죽기 전에, 예수님만이 이 잔을 옮겨 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분이예요. 그런데 그분께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나의 원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죄를 범한 이유는 하와가 자기 마음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지식을 가르칠때 자유는 방종을 포함하지만 자율은 방종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22:18-19, 개역한글)
성경의 마지막에 그 끝에 주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말씀에서 더했느냐, 말씀에서 뺏느냐? 여러분은 말씀의 경계를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그 안에서 근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말씀에서 내 마음대로 빼거나 하면 안됩니다. 말씀은 모든것 입니다. 말씀 안에 우리가 살아가는데 모든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매일 먹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굶어죽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미에 초청하셨습니다. 그곳에 나아가 하나님의 진미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여러분을 만찬에 초청한다면 시간을 내서 가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초청하시는데 가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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