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모데후서 2장 > 히긴스 형제님
*녹음파일에 잡음이 있어 속기내용이 불분명하게 기록된 부분이 조금 있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1-26).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때에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제 이 장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어떠한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7가지를 주목해 볼수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묶여져 있는 청지기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청지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사도바울이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청지기에게 구할것은 그의 충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청지기 직을 생각할때에 우리는 첫번째로 우리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재물들, 우리의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청지기 직과 관련되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위(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맡겨져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남편으로서 가정과 아내를 책임지는 청지기 입니다. 그리고 청지기 직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것을 어떻게 행했는지 고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또한 군인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전쟁에서 싸우는 군입니다. 여기에 경주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달려가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농부로서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꾼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릇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청지기 직을 생각할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인을 생각할때에 그가 반드시 싸워야 되는 전투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기하는 자를 생각할때에 그의 인생 가운데서 그가 어떠한 법대로 경기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농부를 생각할때에 그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어떠한 수고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꾼을 생각할때에 그가 그 일을 할때에 사용하게 되는 책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릇을 생각할때에는 그 그릇이 얼마나 깨끗하게 그러한 상태에 있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종을 생각할때에 마귀에게 사로잡혀있는 자를 어떻게 조심스럽게, 지혜롭게 회복시킬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는 또한 지역모임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전망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지만 또한 모임에게 보낸 서신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에서는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떨어뜨려 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도 디모데는 여전히 에베소에서 그가 그 모임을 보아야(?) 되는 일을 하고있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 저점에서 교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지역교회보다도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 모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20장에서는 사도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함께 모임을 가진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가 그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일곱교회 중에 에베소에 있는 지역교회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성경에 있는 말씀들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서신서에서는 지역교회에 관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모임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에 가장 큰 대적인 마귀가 직접 공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밖에서, 또한 안에서 발생하빈다. 그리고 사단으로부터 그 문제가 공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말다툼을 하지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절에 "망령되고 헛된 말들" 이것은 모임에 전혀 유익이 안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그릇된 거짓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툼을 이뤄내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26절에서는 마지막으로 마귀가 지역모임을 공격하는 공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것과 균형을 잡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능력을, 그 모든 위험(위협?)에서 이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여러가지 가능한 문제들을 생각하게 될때에 우리는 포기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마주치는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손에, 그리고 마음에 힘을 얻게하는 그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이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확신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그 말씀에 우리가 전심에서 연구하기를 힘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주의 종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이 어려움과 악을 싸워 이기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2장에 대해서 이렇게 한번 나눠보겠습니다. 1-2절은 장래의 세대들에게 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3-14절까지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험과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21절까지는 그 일꾼이 사용해야 되는 도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26절은 대적의 전술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것을 잘 기록해 두도록 한번 반복해 보겠습니다. 1-2절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3-14절은 하나님의 종의 시험과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15-21절은 그 일꾼이 사용하는 도구를 말합니다. 그리고 22-26절은 그 대적의 전술입니다.
이 각 섹션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기 전에 말씀을 먼저 드릴것이 있습니다. 우선 1-2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이 장을 시작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내 아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계를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부분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다음 세대와 관계를 맺는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여러분이 그들을 돌보고 있다. 여러분이 그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단지 여러분이 머리속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을 옮겨놓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고 그들을 어떻게 잘 도울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됩니다. 모든 문화에서, 모든 나라에서 이와같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각각 다른 방법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저희 나라에서는 모임의 인도자들이 젊은 성도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에는 저녁식사를 그들을 초청해서 대접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들과 서로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관심을 함께 나눈다면, 그리고나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데 보다 더 쉬운 일이 됩니다. 그래서 젊은 성도들과 그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힘쓰시길 바랍니다. 각각에 대해서 그같이(똑같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굉장히 가치있는 일입니다. 또 나이든 자매님들이 어린 자매님들을 멘토로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의 인도하는 형제님들이 또한 젊은 형제들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 디모데의 책임을 말하기 전에 사도바울은 먼저 이와같이 디모데와 가지고 있는 관계를 언급하였습니다.
이제 사도는 디모데에게 "강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아주 큰 어려움들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성푼을 생각해 볼때에 그는 부끄러워하고 수줍어하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앞으로 저돌적으로 나가는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헬라 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헬라어 배경에서 "강해라"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뭔가 밖에 있는 어떤것이 그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를 강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의 은혜 속에서 강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지켜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는 냉랭해지고 냉담해 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말하는 것을 주의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은혜 때문에 진리를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진리 때문에 은혜를 타협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진리를 은혜 가운데서 분명하게 하셨던 분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여기 디모데의 책임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이 가르친 것을 들었습니다. 많은 증인들 앞에서 그것을 들은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어떤것은 공개적으로 말하고 어떤것은 사적으로 말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가진 모든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전한 그대로 디모데는 변경하지 않고 그것을 전해야 됩니다. 다른 수정없이 들은 바를 그대로 충성된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똑똑한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전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전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충성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충성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네 세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달합니다. 디모데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충성된 사람들은 그 다음 세대에게 전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세대를 거쳐서 하나님의 진리가 전달되는지 그 원리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학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학교를 무시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지역모임이 그분의 학교로 쓰임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지역모임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리가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지고 전달되는 그 장소인 것입니다. 참으로 형제들에게 아주 큰 책임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르침은 공개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어린 성도들을 초청하여 또한 개인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디도서 1장과 2장에서는 나이든 자매님들이 또한 젊은 자매들에게 사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가 젊은 여성에게 가르치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자매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와같은 일들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는 그러한 중요한 사역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그 핍박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하는 그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많은 압박 가운데서 살게 될때에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서양에서는 그 사업가적 사고방식이 많은 신자들에게 침투해 있습니다. 사업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론적으로 일이 나느냐, 안나느냐입니다. 우리가 돈을 벌었는데 성공했느냐? 이것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크게 환영받고 크게 성공을 거뒀는가? 하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을 우리가 지역모임에 도입했을때 아주 큰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데 있어서 최종적인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우리가 충성되었느냐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그 종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라고 칭찬하셨지, 성공한 종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성공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세상에 있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에 믿음에 많은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종에 대해서 우리는 배워야되는 많은 교훈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지런하게 일해야되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17세의 소년 요셉은 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의 형제들이 그의 앞에 나와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까지는 수년의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의 형제들을 구원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40세가 되었을때 자신이 자신의 동족들을 구원할 구원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고나서 그후에 40년을 더 실제 일을 행할때까지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 질때까지 연기되는 그 훈련은 우리에게 굉장히 어려운 훈련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망의 훈련입니다. 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 제자는 주님께 말씀하기를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바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모들과 주일학교 선생들은 이 실망의 훈련을 많이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수년간 그 하나님의 말씀을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원의 열매를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다려도 그 결실이 나오지않는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된듯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때에 여러분에게 실망의 교훈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여러번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적어도 열개의 가뭄을 찾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다른 이유로 그러한 가뭄을 사용하십니다.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뭄을 사용해서 그들의 양심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 가뭄의 나날들은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을 떠났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뭄의 한가지 이유는 그들의 양심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가뭄의 이유는 그들의 헌신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룻기에는 그 가뭄이 나옵니다. 아비멜렉은 그 땅을 더나서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두번째로 나온 보아스는 그 땅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가뭄이 그들의 헌신의 정도를 시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그 땅과 그 율법에 헌신되었는지를 시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역모임에서도 그와같은 가뭄을 경험하게 될 때에 우리는 반응하는 몇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살펴보며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을 떠났는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우리가 회복이 필요한가 돌아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 어려울 때에 그 밭에 계속적으로 남아 있는가, 그 헌신의 테스트가 두번째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3-14절까지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고난 가운데서 시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7절까지는 권면을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군사와 그리고 그 군사의 전투를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와 상관없는 자기생활에 얶매이지 말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첫번째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어머니(?)에 있어서 첫번째 목표는 그들의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가정을 돌보고 자녀를 키울때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가정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다 잊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가정에 대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신다면 많은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군사에 대해서 여러가지 다른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6장에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은 군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그 대적이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 그 사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3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로 옷입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말하고 있는 전투는 우리 육체와의 싸움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의의 갑옷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거짓고소를 당한 그런 불의함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의 학교에서 그러한 상황 가운데 놓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의의 갑옷을 입은 군인으로서 그러한 책망 받을것 없이 의롭게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는 거짓교리가 또한 성도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의와 사랑의 흉배와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우리의 전투에 있어서 그 중요한 모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군인에 대해서 생각할때에 첫번째로 드는것은 이것은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과 같이 이러한 전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투에서 우리는 자주 낙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대해서 공격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의심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음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에서 경기하는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기합니다. 그는 금메달을 얻기 위해서 경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법대로 경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기의 끝에 면류관을 받을 가능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또한 다른 경우에서도 이 경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경주를 말합니다.(?)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경주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9장을 살펴볼때에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뭐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것은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특권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전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것은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특권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또한 경기하는 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에 놓인것을 잡기 위해서 달려가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의 인생에 궁극적인 상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맥에서 그 상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를 닮을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원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지금부터 그리스도를 닮는것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기자는 경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인내로 경주 할 것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 앞에 있는 경주를 달려가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참으신 분입니다. 그 경주를 위한 본이요, 그리고 격려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그 경주와 관련되서 경주에 필요한 훈련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경주라는 것은 자기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먹는지를 조심하게 됩니다. 그는 계속해서 훈련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몸이 최상의 상태가 되도록 유지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 문제없이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절제하고 자신을 관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경주하는 자라고 했을때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자기 절제 가운데 있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법대로 경기해야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경주의 끝에 우리는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에 대해서 "이것은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 아닌가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의 생각을 제가 바꿔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우리는 그 어린양 앞에 둘러싼 예배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요한계시록 5장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신의 면류관을 벗어서 그 보좌앞에 내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면류관이 주님께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면류관은 그들의 예배와 관련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면류관은 우리가 얼마나 더 예배드릴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넓혀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면류관을 주님의 발 앞에 놓아드릴때에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경기하는 자는 자기 절제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제 농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여기 두가지 것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는 그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농부는 매일 밤낮으로 열심히 일을 해야 되는 그런 직업입니다. 그들은 그 추수를 얻기 전에 먼저 씨를 뿌려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추수때까지 도한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봄에 씨앗을 뿌리지만 여름과 가을에 추수할때까지 그들은 얻는 것이 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격려를 받게 됩니다. 어떤 씨를 뿌리는 것은 열매를 맺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을 할때에 그것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오래 기다려야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도 그러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실을 맺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수고하는 것과 인내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씨를 뿌리는 자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언급합니다. "어떤 자는 부리고 어떤 자는 거두나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구절의 끝에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장의 서두에 세개에 거쳐서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비유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8-10절까지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언급하고 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모든 만유의 합법적인 후계자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에 언급한 이 세가지 비유 모두가, 군인, 경지하는 자, 농부가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참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와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그분의 삶은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분의 삶이 참으로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신자들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사람들의 평가와 매우 다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의 분야에서 우리의(?) 예가 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도 그리스도를 성도들이 따라야 될 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성도들의 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성도들이 하나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모임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들이 한 마음으로 합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음식을 먹는데에 양심에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도들에게 다른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을 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가지 예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오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양초와 제단을 사용하는 그런 종교적인 분이셨습니다. 많은 종교적인 의식들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구원받은 다음에 자신이 행했던 그것들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그 양초가 자신에게 있어서 그렇게 쓸모없는 것임을 안 다음에는 다른 성도들이 그런 의미없이 사용하는 양초를 키는 행동도 굉장히 마음 속으로는 싫어하셨습니다. 미국에 많은 여성들이 집에서 특별한 식사 초대를 할때에 식탁에 양초를 키고 멋을 내고는 합니다. 그것은 아주 따뜻하고 좋은 분위기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할아버지께서 그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그러한 일들을 자원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양초를 키는것이 성경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의 이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때에 나는 자원해서 그 일을 하지않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타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하지 않으셨다고 그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경주의 본으로서 제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서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주는것의 본이되는 것을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성경말씀을 찾아보게 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있어서 본이 됨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결론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최종적으로 닮아있게 됩니다. 이와같은 그리스도를 말씀하는데 있어서 사도바울은 나는 매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정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방해하고 우리를 붙잡아 놓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스스로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오락이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해서 열매를 맺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씨앗이며 그리고 때가 될 때에 좋은 열매를 맺게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15-21절에서는 하나님의 일꾼의 놀라운 진리를 말해 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잘 다룰 수 있어야 됩니다. 여기서 "힘쓰라" 그것은 네 모든것을 드려서 힘쓴다는 것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 우리는 여기서 그가 올바른 방법을 사용해야 될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올바른 재료를 사용해야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에 다시 한번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잠시 젊은 성도님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에게 이와같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40대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여러분이 하고있는 일은 그 전에 여러분이 이미 여러분의 습관으로 만들어 놓은 일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습관이 여러분이 어렸을때에 만들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40세가 넘어서면 갑자기 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기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젊은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요, 라고 당부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읽는것에 있어서 힘써야 됩니다. 여러분이 '언제 한번 시간이 나면 아, 성경을 한번 읽어야지.'라고 하면 절대로 못읽습니다. 시간을 만들어서, 정해서 읽어야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쁩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건, 직장을 다니건 마찬가지 입니다. 집에 있건, 밖에 있건 마찬가지 입니다. 점점 더 많은 우리의 시간을 뺏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그 시간을 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하는 첫번째 일은 이와같이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읽을때마다 계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때에 인내심이 이제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와같이 힘쓰시기 바랍니다.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을 순차적으로 읽어나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창세기를 읽었다, 내일은 사도행전을 읽었다, 이렇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책을 선택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쭉 읽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때까지 그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읽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가지를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성경책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한장을 읽고나서 '내가 무엇을 읽었지?' 이렇게 하게 됩니다. 자동차 항속 (?)기능을 그냥 앉아있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되기가 쉽상입니다. 제가 성경을 읽을때에 그와같이 그냥 읽고는 있지만 자동 항속장치를 하고 운전하는 것처럼 그냥 읽을때가 있습니다. 방금 전에 읽은 장이 무엇이었는지를 까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확신 가운데 읽도록 제가 당부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싶어하신다는 그런 확신 가운데 성경을 읽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저할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신다는 그 의식 가운데 있는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세토록 있도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주의깊게 읽고 또한 확신 가운데 읽으십시요.
그리고 성경을 성경(격?)과 비교하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시편 1편을 알고 있습니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묻상하는 자입니다. 이 묵상하는 것이 젊은 성도님들이 아마도 익숙하지 않은 것일 겁니다. 여러분이 "도대체 묵상이 무언가요?" 이렇게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걱정을 할 줄 안다면 묵상을 할 줄도 아는 것이다." 여러분이 걱정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그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낮에도 여러가지 바쁜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것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침대에 들때에도 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걱정하는 것의 해답이 무엇인지를 계속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걱정할 줄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묵상할 줄도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시간 가운데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젊은 성도님들은 "제가 이 성경을 읽지만은 제가 여기서 어떤것도 얻어지지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나이많은 성도님들이 그 말씀을 가르치고 이야기 할때 "아, 내가 읽을때는 그런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라고 말합니다.
제가 네가지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적용한다면 여러분이 읽을때마다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의 한 장을 읽을때에 이것을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내가 사막 가운데서 혼자 낙오되었을때, 그리고 이 성경에 지금 내가 읽고있는 이 한장만 있다면 그것은 지금 나에게 뭘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의 모든 장에 거쳐 나와 있습니다. 그분의 약속으로, 또는 예언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그림으로서, 아니면 그분 자신이 나와 있습니다. 또한 비교로써, 아니면 대조로써 그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장에서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두번째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에게 지금 말하고 있는것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서 선택해야 되는 선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당면하고 있는 선택의 기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인도하시는지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삶에서 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어떤것을 내가 행하고 따를 것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역대기를 읽을때에 이 네가지 것들을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부분에서 이 네가지를 적용했을때 여러분들은 분명히 여러분의 영혼의 양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디모데후서로 돌아와서 그릇에 대해서 몇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귀히쓰는 그릇, 그리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있습니다. 여기에 금과 은의 그릇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강조점은 그 그릇이 어떠한 재질로 만들어졌느냐가 아니고 그 그릇이 깨끗한가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을 받고자 하는 자들의 또 다른 책임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깨끗한 것입니다. 우선 특별히 여기의 배경은 지역모임이 당면하고 있는 거짓 교리를 위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분명하게 있고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에게서 우리가 떠나야 되는 책임을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귀히쓰는 그릇이 되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실때에 선택하게 되는 그 그릇으로 우리가 준비되어 있어야 됩니다. 예레미야에서 그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합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릇이 상한 그릇입니다. 사용할 수 없는 그릇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단지 집어던져 깨뜨리기에만 적합한 그릇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그릇으로 사용되고 싶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섬김에 있어서 필요한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그 귀히 쓰이도록 선택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바울이 주님께서 "내 택한 그릇이다"라고 말한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많은 세월을 살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온전히 자신을 드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세상은 아직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깨끗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해서 사용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 되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그릇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비유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오염시키는 세상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신문이나 뉴스를 보게 될때에 오염되지 않고 뉴스 한조각을 읽을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유투브에 나오는 광고와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고도 우리를 오염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이러한 것으로부터 깨끗하도록 주의깊게 행해야 됩니다. 그 죄와 더러움에 대해서 민감해져야 됩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살고있는 위험성의 하나는 우리가 그 죄에 대해서 면역력이 생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것에 우리가 익숙해져 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우리 사이의 죄와 더러움으로부터 우리가 깨끗할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이 장의 마지막에는 회복을 위해서 일하는 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 중에 한가지가 어떤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 주의 종의 책임 중의 하나가 사단에게 사로잡힌 자를 회개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 큰 대적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3장부터 이 사단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것을 싫어하고 그것을 훼손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일하신다면 사단은 즉시로 여러분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사단은 하나님처럼 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디에나 임재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한 시간에 한 사람을 공격합니다. 모든 시간에 동시에 모든 신자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악한 영들을 자신의 부하로 부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의 그 정사와 권세들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 끔찍한 대적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됩니다. 여기에 그 신자들을 얽매는 올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올무에 걸린 신자를 다시 회복시키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다투거나 별론해서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는 온유하고 그리고 인내가 그의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하나님의 진리가 그를 회복시키는데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복시키는 목적의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좆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2장의 많은 부분을 시간상 그냥 건너뛰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에 대해서 많은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끝나고나서 통역하는 형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웃음)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복주시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