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모데후서 3장 > 2017년 / 조나단 블락 형제님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17).
오늘 이 시대는 참으로 모든 것을 다 소비해 버리는 경향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결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생산되는 제품과 또 제공되는 그런 서비스들이 굉장히 짧은 사이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주문할때, 또 어떤 것을 사려고 할때, 그 제품이 이미 다 팔려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런 색깔이 이제 시대에 뒤떨어졌습니다. 그러한 제품이 더이상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서비스가 바라는 사람들이 더이상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책들이 이 시대에는 더이상 타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한 사고방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계속해서 광고는 새롭고 또 개선된 것이라고 광고를 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 스마트폰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광고들을 볼 때에 그러한 영향들을 계속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한 사고방식이 우리의 모임 가운데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참으로 변치않는 분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제사직분이 변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사람은 영원토록 계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2017년 오늘에도 우리의 하나님은 그분의 성품이 변치 않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참으로 지금 하늘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셨던 그대로 그분은 변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해서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에서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치 않는 것입니다. 오직 유일하게 좋은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킬때 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3장에서 14절부터 17절,19절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디모데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격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장에서도, 3장 1절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나와있는 것처럼 이때는 고통하는 때인 것입니다. 이제 이 장에서는 이 말세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이제 그 후의 일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언급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마지막 시간에 대해서 말하였고, 여기서는 마지막 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볼 때에 사도바울은 단지 디모데가 살고있는 그 시대를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를 고려하면서 썼던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세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모르는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외향적으로는 경건의 모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실되지 못했고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들이 행하고 있는 비도덕적인 행위에서 볼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여성들과 대하는 태도는 비도덕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슬프게도 이 세대에는 많은 큰 대형 교회들이 있습니다. 아주 부유한 목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유명한 목사들의 삶이 종종 추문으로 얼룩져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참으로 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때가 오늘날인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도 두명의 사람이 1장과 2장에서처럼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 8절에 '얀네와 얌브레'가 구약성경에는 비록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이 두사람은 모세에게 대항해서 그 애굽의 술사들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의 특징은 진리에 대해서 대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바로 그와같은 사람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간주해내는 것을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지역모임에서 인도자들이 이러한 사람들을 잘 분별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이 지역모임 안으로 영접되어 들어온다면 아주 파괴적인 일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지역모임에 들어오게 될 때에, 그리고 어떠한 천거서 없이 오게 될 때에, 우리는 그분들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봐야 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여기 나와있는 것처럼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세에 우리가 얼마나 조심해야 되는 것을 여기서 경고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3장의 후반부에서는 이것과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2장에서 사도바울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었습니다. 이제 3장에서는 우리에게 대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10절에서 "그러나"(우리말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는)를 통해서 그것이 반전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말세의 여러가지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디모데는 이렇게 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3장을 통해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것은 계속해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계속해서 함에 있어서 세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4절과 15절에서는 첫번째로 우리가 확신 가운데서 계속해야 됨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배워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우리는 이 교훈받는 것을 계속해야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성경의 영감이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온전케 되는 것을 계속하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되는 것의 중요함을 이 마지막 구절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먼저 14절과 15절에 나와있는 성경을 통해서 계속해서 배우게 되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학교, 이 하나님의 대학교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학생으로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지 얼마나 오래됐든지간에, 여러분이 나이많은 성도이든 젊은 성도간에 모두가 학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졸업하지 않는, 그러한 학교인 것입니다. 여기에 디모데가 계속해서 해야되는 네가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첫번째 것입니다. 우선 배워야 됩니다. "너희가 배운 것에 계속 거하라" 거하다는 것이 계속하다는 뜻입니다. 이제 디모데가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2장 2절에서 그가 배운 것은 사도바울에게 들은 바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그가 사도바울에게 배운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릴레이 경주에서 그 바톤을 다음 주자에게 던져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디모데는 그가 구약성경 안에 계속 거해야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15절에서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두가지가 디모데가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배운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성경 교사로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단지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단지 디모데가 배운것에 거할뿐만 아니라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에게 이것을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게 된, 확신하게 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진리에서부터 우리는 이와같은 확신을 얻어낼수가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서 여러분에게 오늘날 진리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것을 이론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감명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내가 감명을 받았고 내가 기억해야 되겠다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것이어서 내가 정말 그대로 행하겠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확신한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 대해서 공격을 해 올때에 여러분은 내가 알고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내가 그것을 행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하지만 이제 확신한다는 것은 이것을 다시 무너뜨리지 않고 떠나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확신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핍박할 때에도 여러분이 그것을 위해서 감옥에 갇힌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포기하지 않겠다. 교회사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언제 가장 성장해 왔는가? 그것은 바로 교회가 핍박을 받을때였습니다. 우리가 비록 핍박을 일부러 찾아 나서지는 않스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핍박을 견딜때에 한가지 좋은것은 우리가 진정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에게 이 시간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단지 배울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배운것을 확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분이 그것을 떠나보내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고 그것을 팔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번째로 거하는 것에 대해서 말할때에 배운 것과 또 확신한 일을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또한 알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뢰'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었고 디모데는 바울에 대해서 신뢰하며 그가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젊은 성도님들이,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성도님들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어야 됩니다. 대학교에서는 여러분이 배우는 것에 대해서 계속 질문을 던지라고 교육을 받게 됩니다.물론 배움에 있어서 질문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모임 안에서 여러분을 가르치는 그 장로들에 대해서 여러분은 합당한 존경과 신뢰를 가지고 그들이 가르치는 바를 잘 받아들여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단지 진리를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많은 시간에 걸친 진리를 경험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딤후 3:10).
사도바울은 그가 가르치는 교훈과 동일한 행실과 교훈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오직 디모데가 신뢰할 수 있는 그 교사, 바울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는 그에게 성경을 가르쳐준 경건한 어머니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 어머니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 이 해답의 이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바로 이 구절은 이 복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름답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침례받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어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단지 우리가 기도할 줄 안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그리스도 예수라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살펴봐야 될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서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구원의 복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믿음을 그리스도께 둘 때에 여러분은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은 줄 알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내가 구원받았다는 감정을 느껴서가 아닙니다. 왜녀하면 여러분의 감정은 항상 바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구원받은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는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내용들을 복음을 전할때에, 야외 전도를 할때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마음에 염두해 두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슬프게도 이 복음주의적 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더이상 이 복음에 대해서 다루지 않고 끊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단지 영화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단지 연극으로 이 복음에 대해서 보여주기만 합니다. 하지만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엘리사벳이라는 그 경건한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그 침례요한의 부모님입니다. 이제 그의 이름을 정할때에 무엇이라고 정할까 의논하였습니다. 이제 엘리사벳의 친척들은 그를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사가랴라고 이름 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아이를 위해서 분명하게 맞섰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를 요한이라고 칭하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가족의 문화를 그를 스가랴라고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요한이라고 붙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와있는 성경이라는 표현은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여기서 이 성경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그라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자적으로는 글자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라마라는 것은 성경의 알파벳, A,B,C, 각 철자들을 모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야 하는 네가지 중요한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배운 것에 계속 거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확신한 일에 거해야 됩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믿는 그 교사들에 대해서 계속 거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운 성경에 우리가 계속 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보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계속 거해야 되는 다른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 "성경에"라는 표현과 같이 거룩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에, 그리고 말씀을 가르칠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능력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이유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통해서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냐면 바로 그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의 번역에 대해서 많은 이론과 평을 듣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작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감동'이라는 단어는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유리창에 제 입김을 불었을때 그 유리창에 제 마크가 분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저의 그 독특한 입김이 창문에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의 감동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 성경은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만들어 내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계시하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서신서에서 경건한 자들을 택하셔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성령님을 사용해서 기록하게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이 여러분에게, 저에게 오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이것은 단지 어떤 음악가나 시인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 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대해서 특별한 측면을 우리는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것은 또한 계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요한계시록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감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달시키는 방법이며 이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메세지 그 자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사실에 관한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구속의 사실에 관한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동과 관련되서 세번째로 그 이상을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세번째가 해석입니다. 오늘날 강형제가 조나단 형제님을 통역해 주고 있습니다. 그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달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게 될때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해석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광야에서 빌립을 만나서 이러한 것을 행한 것을 보게 됩니다. 빌립은 말하기를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말하였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말하기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이것을 어찌 알리요"라고 말하였습니다. 빌립은 그것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장에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필요성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바로 이 세가지 절차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헤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계속해서 거해야 되는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임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는 교훈입니다. 이것은 유니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교훈이라는 것은 가르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이와같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할때만 오직 유익한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 가르치는 것은 저의 생각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전혀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한 저에게도 여전히 능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도 이러한 가르침은 더이상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냥 단지 오락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보존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적으로 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교훈 외에 또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책망입니다. 이것은 확신의 또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어떻게 젊은 성도님들이 말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인터넷과 유투브에 많은 반대하는 것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계속보고 소비하는 것들은 여러분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에 오직 진정한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숨결이 여기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에 이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바르게 함에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바르게 함'이라는 의미는 흥미로운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 바르게 함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바르게 함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올바른 위치에 바르게 세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다른 사람을 세우는데, 다른 사람을 올바른 자리에 두는데 목적을 두고 가르쳐져야 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을 단지 비난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단지 바르게 회복하는데 그러한 목적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2장 마지막 부분에서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 사람 측면에서도, 받는 사람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하는 그러한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네번째로는 그것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교육이라는 것은 징계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성경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부부는 아볼로를 그들의 집으로 데려다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후에 아볼로는 성경에 대해서 보다 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제 마지막 계속해서 거하는 것의 마지막 주제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계속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변화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오직 처음 시작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작하신 일을 이제 완성하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온전케 하다'는 것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채비를 다 갖추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때 우리는 신분적으로 거룩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진보하기를 바라십니다. "온전케 하려 함이라" 이 단어는 우리 방에 어떤 가구들을 잘 배치하는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홀 위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갔을때 거기에는 필요한 가구들이 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유월절 보낼 다락방을 준비케 하셨을때, 제자들은 그 다락방이 잘 준비된 것을 보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그 다락방 안에는 가다 갖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거기는 대야가, 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대야를 통해서 주님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리고 거기는 수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지역교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행할때에 바로 그 유월절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하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교회 안에 온전하게 가구들이 놓여져야 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역교회 안에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오는 것을 금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따라야 되는 본을 주셨습니다. 마치 성막을 지을때 그렇게 하신 것처럼 하신 것입니다. 그 성막에 있는 가구들은 아주 거룩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모세가 언급되지 않은 다른 단을 그 성막 안으로 가져온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식양을 따라 성막이 만들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지역교회를 아주 독특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우리는 성경의 식양대로 그 지역교회를 만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지역교회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온전케 하고 계시는가? 우리는 1장에서 하나님은 나를 온전케 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를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성령님을 내주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십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필요한 것이고 또한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모일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도전받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제 삶에 대해서 한 방이라고 생각해 보게 될때에, 또한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이 한 방이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 방 안에, 여기에 들어와서는 안될 어떤 가구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쓴 것이 그 안에 있지 않습니까? 비도덕적인 그러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탐심이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이 장의 처음에 언급되고 있는 그 말세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를 거역하며" 그러한 것들은 우리 신자들의 방 안에 들어와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을때에 이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화살처럼 저의 마음을 찌르며 저에게 도전을 주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지금 제 마음에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은 제가 그 성령께서 요구하는 그 변화를 받아들일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이 3장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 낙심하고 계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더이상 내가 계속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그러한 분에게 계속해서 할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바로 여러분의 무릎 앞에 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성경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계속 교훈하도록 허용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여러분이 계속해서 이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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