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로렌스 퍼킨스 형제님(요약)

07. 주님의 아름다움

박이레 2022. 7. 14. 15:19

2015년 7월 1일 수요일   강사 : 로렌스 퍼킨스 형제님

 

저는 성경 넘기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27:4, 개역한글)

 

특별히 왕인 다윗이 이 말씀을 말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런 그가 내가 구하는 한가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더많은돈이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참놀라운 것은 그가 구하는것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동일한 것을 구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었지만 여러곳에 서신서를 보냅니다.

 

그는 교회에 부활에 참예함을 알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그분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습니까?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 (슥9:17, 개역한글)

 

우리는 여기서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많은사람들이 그아름다움을 보고 감사합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속한 것이든지, 멋진 건축물이든지, 저와 제 아내는 제가 묵고 있는 숙소가 멋지고 훌륭한 것에 감탄합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육체와 관련되고 물질적인것이라면 그것은 임시적인 것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면 그 아름다움은 사라집니다.
아주 멋진 건축물도 세월이 흐르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잠언 31장에서 잠언기자는 아름다운것도 헌된것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인 아름다움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 깊고 지속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품과 관련된 아름다움입니다.
그 인격의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주 그리스도에게서 완벽하게 보여집니다.
스가랴가 기록하기를 그래서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그리 큰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것은 주님께서 이땅에 계실때 그의 외모는 아름다운것이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사야를 기록할때 흠모할만한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에게 끌리는 것은 외모가 아닌 인격으로 인해 끌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은 주님의 창조물 가운데서도 보여집니다.

 

저와 아내는 숙서근처에 아름다운 곷들이 피어 있는것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아름다움은 만물을 통해서 보여지고 만물을 통해서 감탄합니다.

 

또한 주님의 아름다움은 주님의 사람들로 인해서 나타납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을 보면 그는 아주 어렸을때 종으로 팔리지만 그는 어렸어도 하나님께 신실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보디발의 아내가 보디발에게 거짓말 한것을 잘 알고 계실것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수년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길래 그의 종을 수년간 감옥에 가두는가 할것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모든것이 변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는 애굽에서 둘째가는 총리가 된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롭게 대하셨는지 보게 됩니다.
이제 신약성경에서 주님의 인격이 어떻게 아름답게 드러났는지 보고자 합니다.

 

먼저 주님의 자비하심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로 부자나 권력자들이 자비롭지 않다는것을 잘 아실것입니다.
그들은 위로 가기위해 다른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많은사람들에게 자비롭게 대하셨습니다.

 

어떤 귀신들린 한 남자에 대해서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그는 인생가운데서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묘지 근처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돌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했고 사람들을 그를 제어할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께서 폭풍을 지나서 그 남자에게로 오신것입니다.
그분은 갈릴리의 폭풍을 지나서 오신것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오신것입니다.
그사암에게 있는 모든귀신을 주님께서 좇아내신것을 아실것입니다.

 

그리고 그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해 주님앞에 앉은것을 알것입니다.
그사람은 주님을 따라가고 싶어했습니다. 주님은 그남자에게 마을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어떠한 큰일로 그를 도우셨는지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남자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본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때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폭풍을 지나서 오신것처럼 골고다의 십자가를 통해서 오신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앞에 나온 우리는 지옥으로 가야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형제자매님들 주님이 아니었다면 지옥에 있어야 할 우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린는 지옥에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지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디메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디메오는 소경으로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위해서 그길을 가지만 그는 그곳에 가지 못했습니다.
많은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바디메오는 이것을 알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지릅니다.
주님께서는 이 바디메오를 위해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다른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주님은 그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바디메오는 선택할수 있었습니다.
바디메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즉시 볼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부분을 통해서 배울수 있는것이 무엇인가요
그 바디메오가 그리스도를 따라 나가게 된것입니다. 바디메오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것이 아닌가요
저는 바디메오가 주님의 십자가까지 계속 따르지 않았을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디메오를 고치신 때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얼마남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두사람에 대해서 자비를 베푸신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자비만 베푸신것이 아닙니다.

 

남자들에게만 자비를 베푸신것이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7장에서 죄인인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 마을에서 죄인이라고 불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여자는 주님께 다가와 그발에 입맞추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자리에 모인 많은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그녀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그녀는 그 식사자리에 초대된 사람이 아니었지만 주님을 보기위해 나아온 것입니다.

 

제 삶가운데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치 못하고 주님의 이름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나의 죄를 지고 가셨던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자리에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안다고 할수 있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에는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충성되심입니다.

 

제가 한국에 대해서는 잘모르지만 미국에서는 충성이라는 덕목이 칭찬받지 못함을 보게 됩니다.
특히 결혼에 있어 서로에게 충성됨이 존중받지 못합니다.
사업에서도 서로간의 신뢰와 충성됨이 존중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충성됨을 높이 사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을 주님에서 볼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30년간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부분은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정안에서 주님의 일을 충성되이 하셨습니다.
시편 96편에서 취한자들이 그의 노래를 만들어 부른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주님의 공적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혼자있을때도 충성되이 일할수 있나요? 아무도 보지 않을때 어려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주님은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도 충성되이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오병이어로 먹이셨을때, 사람들은 주님을 억지로 왕이되게 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주님을 왕으로 만드는것을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밤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날밤에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죄가 주님께 담당되게 되었습니다.
그 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고통을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기도를 생각하시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주 큰어려움과 압박가운데 직면했을때 이러한 기도를 할수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잘 풀릴때 우리는 충성되이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많은 압박가운데 있을때 다르게 행동할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만일 충성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충성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 이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충성되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 전날밤에 한잠도 주무시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잠을 자지 못하면 그다음날 제대로 일하지 못합니다.

 

그 상황은 점점더 어려워져 주님께서는 마지막에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받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충성되이 그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얼굴을 치고, 침뱉고, 손발에 못을 박을때에도, 주님앞에서 조롱하며 모욕할때에도 그러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님께 지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형벌을 주님께 내려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충선된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하심과 충성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주님의 인격의 성품들이 우리가운데서도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에서 이 두가지가 성령의 열매인것을 보게 됩니다. 곧, 자비와 충성입니다.

 

이제 나누고 픈 주님의 다른 속성은 주님의 돌보심입니다.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막4:35-41, 개역한글)

 

우리는 여기서 아주 큰 폭풍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물결이 부딧쳐 주님과 제자들이 있는 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38절에 제자들이 한말을 보시기 바랍니다

 

"선생이여 우리의 죽게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가 아마도 이 집회 가운데서 이런 질문을 드린적이 있는거 같은데요. 주님께서 여러분을 돌아보신다는것을 의심한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환경가운데서 더이상 여러분을 돌아보지 않는다는것을 의심한적이 있나요?
주님께서는 때때로 이러한 상황가운데 우리를 두시고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는지 보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바다에 가라앉는것을 내버려 둔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바다가운데 가라앉게 내버려 두셨나요? 이일은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바다는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폭풍가운데로 지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폭풍끝에 잔잔함이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이 삶가운데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온전한 잔잔함 평화를 누릴것을 압니다.

 

주님게서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제자들은 어째서 무서워 했나요? 그들이 무서워 한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상황입니다.

 

왜 제자들이 주님께서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의심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왜 믿음이 없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을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주님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폭풍가운데서 주님이 누구인지 더 알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일을 통해서 두가지를 알게 됩니다.
첫번째는 주님께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베드로는 분명 이배에 있었을 것입니다. 
수년이 흐른후에 베드로는 서신서에 주님께서 돌보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님의 돌보심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자비하심과 충성되심, 그리고 주님의 돌보심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돌보심은 각사람들에게 다양하게 나타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셔서 다윗왕과 같은 자세를 우리가 가지기를 바랍니다.

 

< 내가 여호와께 구한 한가지 일 > 은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는것이었습니다.
스가랴가 말한것처럼 고백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 참으로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큰지! >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