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2015년 플러싱수양회(요약)

< 뉴욕 플러싱 모임 여름수양회 16 >

박이레 2022. 7. 13. 23:20

2015년 9월 4일 금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뉴욕 플러싱 모임 여름수양회 16 >

 

디모데 전서를 통해서 계속 선한 싸움에 대한 말씀들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6:6-8, 개역한글)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딤전6:11-12, 개역한글)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

 

디모데전서 전체가 믿음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며 사도바울의 참 아들들입니다.
이제 6장에 이르러 만족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한싸움은 하나님께서 주신것으로 만족할것이냐, 아니면 내가 원하는것을 더 이루야 한다고 생각하는 싸움이냐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 가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것 뿐만 아니라 지식이나 지위정도의 부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 떠나서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것에 만족하는 삶을 사는가 가 중요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내게 충분하신 분이라는것을 인정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8-9장은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극한 가난속에서 넘치는 연보를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힘에 넘치는 연보를 가져갈수 없다고 하였지만 마게도냐 교회는 이 헌금을 제발 가져가 주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9장 8절의 내용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넉넉하게 주신다는 내용 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것이기에 만족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주신것으로 만족할수 있을까요?

 

1. 경건을 이익보다 더 크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6:6, 개역한글)

 

불만이 있다면, 내가 영적인 것을 중시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2. 영원을 이 땅보다 중시할때 만족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6:7, 개역한글)

 

우리는 이세상에 빈손으로 왔으며 빈손으로 떠날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고향으로, 하나님께서 계신곳으로 돌아갈것입니다.

 

3. 우리의 삶은 단순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6:8, 개역한글)

 

무엇을 먹던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먹고 입는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것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 여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티비는 가족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다 티비의 내용에 빠져들어 교제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다 각각 핸드폰을 하나씩 가지고 자기방에 들어가서 가족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삶이 복잡해 지고 있습니다.

 

삶의 단순함을 이 세상의 물질적 부요가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파괴하고자 하는것은 '관계'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서 죽였는데 그 아들의 죽음앞에서 하나님께 경배한 사람을 압니다. 그는 욥 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자랑하셨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질투하여 한날에 욥의 모든 자녀를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 배후에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것을 욥을 압니다.
욥은 이때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빼앗은자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찬양할찌라"

 

자기 자녀가 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할수 있을까요? 궁극적으로 영적인것이 중요한것이라는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지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가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결과물을 가지시겠습니까?

 

우리가 지난시간에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로 떡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선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떡을 원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것은 주님의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는것은 주님이라는것입니다. 
떡을 베부르게 먹는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나의 생명의 떡이요,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는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을 이세상보다 중시할 때 만족할수 있습니다.
먹는것과 입는것이 있으면 만족할 줄 알라 하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국민중에 먹을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입을 옷이 없어서 벌거벗고 다녀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현대에는 대부분이 다이어트 해야합니다. 먹을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옷장을 열면 옷이 계절별, 색깔별로 있는것입니다.

 

주님 수준은 먹을것과 입는것이 있으면 만족할줄 알아야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행복지수가 가장 떨어집니다. 먹는것과 입는것이 풍부한데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곳은 방글라데시 입니다. 그곳은 아주 가난한 곳입니다. 어째서 이렇습니까?

 

우리는 삶에서 경건을 중시하고 영적인 만족을 추구해야 합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7-10, 개역한글)

 

사도바울이 만족을 배웠던 경험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몸에는 가시, 사단의 사자가 있었습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 여러가지로 생각할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사도가 막상 그몸에 사단의 사자가 있다는것은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것이 자기에게서 떠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네 능력이 네게 족하도다 네가 약할때에 네 능력이 온전하여 진다"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연약이 있고 부족이 있고, 시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약하고 부족하고 시련이 있는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덜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첫번째, 고난을 당하면 그 사람은 죄에서 벗어납니다.
두번째, 시련이 왔을때 내 믿음을 시험합니다. 내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딱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번째, 시련이 오면 좋은것은 베드로처럼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른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네번째, 시련으로 인해 가장 좋은것은 시련이 오면 겸손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셨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시련을 주어서 그를 겸손케 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시련이 오면 절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시련이 오면 주님께 기도할수 있습니다.
시련을 가지고 주님앞에 나아가서 "주님 저에게 시련이 왔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습니다.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지혜가 부족하거든 너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짓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
하나님께 나가 구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약한 가운데서 제대로 발휘된다 >
이 경험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배웁니다. 이것이 그의 삶의 원칙이 됩니다. 
"나의 약한것을 자랑하리라"

 

그는 이러한 원칙을 다른 모든것에도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경험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만족을 배울수 있을까요? 고난과 약함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만족을 배울수 있습니다.

 

만족에 대한것을 원리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
(빌4:10-20, 개역한글)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갖혀있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이 소식을 듣고 에바브로 디도를 통해서 헌금을 보냅니다. 에바브라 디도는 계속 그곳에 남아 사도바울을 섬깁니다. 에바브라 디도가 병이나자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다시 디도를 보냅니다. 그때 이 서신을 써서 같이 보냅니다.

 

이 서신의 내용을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뜻입니다.
< 여러분이 보내준 헌금을 잘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에겐 이 헌금이 필요없습니다. 내게 필요한 모든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저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기뻐하는것은 여러분이 헌금을 줘서 제 필요가 채워졌다는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헌금을 하기 위해 희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풍성을 따라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실것입니다. >

 

감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 여러분이 헌금할수 있을만큼 성숙해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이편지의 주된 내용입니다.

 

저희 모임에서 선교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헌금을 합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헌금을 하고 그러면 감사 편지를 받습니다. 감사 편지라고 하지만 감사 편지가 아니고 이것은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을 돕고, 또한 하나님의 일꾼이 더욱 힘을 내서 주님의 일을 할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들입니다.

 

저의 바람은 사도바울의 감사편지와 같은 감사편지를 받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 내 필요를 채웠습니다 " 라는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물론, 그것을 비난하거나 수준이 낮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편지를 받고 보내는 사람사이에 이와같은 영적인 수준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1-12,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이 모든것을 <배웠다> 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와같은것을 배울수 있을까요? 한번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4:10, 개역한글)

 

< 싹이 남이니 >

 

사도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였으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게도냐로 갑니다. 제일 처음간곳은 빌립보 입니다. 그곳에서 박수에게 붙어 있는 귀신을 쫓아내고 빌립보 사람들은 정치적인 문제로 사도바울을 가두고 그를 때립니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간수가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빌립보를 떠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세 안식일, 길게잡아 한달을 머물고 또 다른곳으로 떠답니다.
사도바울은 전도 여행을 쫒겨나는 삶을 삽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복음을 전하게 해주십니다.
고린도에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을 위해서 빌립보 교회는 두번 헌금을 보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너희가 처음부터 나와 복음에 교제했었다" 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없었지만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고 고린도에서 장막을 만들며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을 볼때 아마도 그때에 다른지역에서 헌금이 와서 사도바울이 주님의 일을 할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에 사도바울을 물질적으로 돕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추정하기를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사도바울이 감옥에 갖히게 됩니다. 이 10년간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에게 헌금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구원초기에 전해준 복음에 너무 감사해서 사도바울에게 헌금을 보낸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10년간 헌금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만족하는 비결입니다.

 

10년 후 이 헌금을 받고 "이제 다시 싹이 났다"라고 말했습니다.
싹이라는것은 수분이 없으면 나지 않습니다. 또한 흙의 양분이 맞아야 합니다. 씨는 환경적인 도움이 있어야 싹이 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씨로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환경적으로 돕기 어려웠습니다. 
사도바울이 너무 빨리 여행함으로, 혹은 빌립보 교회의 어려움으로 그 마음에 있는 사랑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배후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씨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가 없으면 그 씨는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결정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적과 섭리를 생각할때, 우리눈에서는 기적이 더 인상적으로 보입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병든자가 낫는것을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섭리야 말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법칙입니다. 섭리라는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을 깨버리는 것이 아니고 수만가지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면서 그 일을 이루시는것,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 만족해 하는것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할때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1, 개역한글)

 

<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
우리는 궁핍하면 항상 말합니다. "너무 어렵다" "이런 상황속에 어떻게 계속 있을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신의 물질적인 어려움 속에서 이런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상을 향하여 뛰어갔습니다. 자신이 온전히 이루었다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수준에 대해서 "나는 앞을 향하여 나아가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부족함을 말하면서 자신의 물질적인 부족함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물질적인 부족함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수준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경건을 물질의 이익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2, 개역한글)

 

3. 상황에 독립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공하면 교만해집니다. 실패하면 비굴해 집니다. 이것이 일반적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난중에도 자기가 못났다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지원해 주지 않아도 실패했다고 생각지 않았고, 많은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도 그 영광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어떤일들이 잘 풀렸을때 마음이 기뻐하고 높아지고, 일이 잘 풀려지지 않을때 좌절하고 우울해 하는것은 항상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내가 어떻게 평가되고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에서 자유로운것은, <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지 내가 중요하지 않다 > 고 여길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개역한글)

 

4. 우리가 만족할수 있는것은우리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이 있을때 만족할수 있습니다.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4:14,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칭찬합니다. 헌금을 해서가 아니라 사도바울의 고난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빌4:17, 개역한글)

 

5. 내가 아니라 다른사람의 유익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때에 그는 만족할 줄 압니다.

 

사도바울은 그 생애에서 최소한 주님께서 5번 나타나십니다.
첫번째는 다메섹 도상에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그는 지옥갈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스데반과 논쟁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생각했습니다.

 

두번째는 고린도에 있을때 입니다. 고린도에서 많은 어려움과 반대가 있어 사도바울이 고린도를 떠나고자 했을때 주님께서 나타나사 < 이곳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 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행동하려 할때 나타나신 것입니다.

 

세번째는 예루살렘에 있을때 입니다. (약간 시간순서를 바꾼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구원받고 다메섹에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도바울로 인해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두려워하여 성도들 중 아무도 그와 교제하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사도바울을 형제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가장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께 복음을 전할것을 기도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 나는 너를 이방인의 사도로 불렀다 >

 

사도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바리세인 중의 바리세인이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면 잘 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고, 유대인의 사도로는 베드로를 쓰셨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인가요? 어부입니다. 평범한 범인입니다.
이방은은 율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바울을 보냅니다. 이상하시죠?

 

네번째는 사도바울이 죄수가 되어 배를타고 로마로 갈때 입니다. 그 배는 파선합니다. 사람들은 두려워서 십여일동안 음식을 먹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이 이 배가 어찌될까 두려워 하며 배에 있는 물건들을 던질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 이 배에 속한 사람을 다 너에게 붙인다 >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할때 나타나셨습니다.

 

다섯번째는, 먼저 말씀 디모데후서 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딤후4:16-17,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로마에 두번째로 체포되어 갑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서 죽게 될것입니다. 그당시 황제가 네로입니다.
그때에 사도바울의 편에 서야 한다는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사도바울을 버렸습니다.

 

사도바울에게서 구원받고 사도바울을 통해서 성장하고 동역자가 되었던 사람들이 다 사도바울을 버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의 곁에 서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다섯번째 경험을 통해서 말합니다. < 내가 만족한다 >
"내가 잘못가고 있을때, 내게 어려움이 있을때, 내가 판단착오를 할때 마다, 필요할때 마다, 영적으로 도움이 필요할때마다 반드시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필요를 채우신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필요를 채우신다."

 

사도바울의 다섯가지 만족은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
나는 영적인 만족을 채우기 전에는 물질적인 만족을 말할 수 없다.
나는 자기 중심적이지 않기 때문에 주변상황에서 자유롭다
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만족한다.
나는 다른사람의 영적인 유익을 줄수 있기에 만족한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만족의 비결을 배운 원칙입니다. 저희들도 이것을 배워 만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싸움에서 만족한 그리스도인이 선한싸움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