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2015년 플러싱수양회(요약)

< 뉴욕 플러싱 모임 여름수양회 8 >

박이레 2022. 7. 13. 23:16

2015년 8월 25일 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뉴욕 플러싱 모임 여름수양회 8 >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4:6, 개역한글)

 

저희들은 선한싸움에 대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이제 선한싸움을 사우는 선한일꾼에 대해서 나옵니다.
선한싸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선한일꾼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게 행하는 자입니다.

 

일꾼을 종이라고 하는데 종이라는것은 원어로 두가지 나뉩니다.
1. 돌로스 : 돌로스는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자입니다.
2. 디아코노스 : 디아코노스는 주인의 말을 효과적으로 해내는 자입니다.

 

우리는 선한싸움을 얼마나 합당하게 싸워내야 할까요?

 

1. 우리는 형제를 깨우쳐야 합니다.
< 형제를 깨우치면 >
이것은 영어로  remember 로 되어 있습니다. 곧,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2.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우리는 형제를 상기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싸움에 있는것임을 기억나게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1절에는 귀신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귀신도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세상은 사단의 가르침을 받고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와같이 사단의 가르침이 있는 곳에서 선한싸움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부르심과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선한 싸움을 어떻게 싸웠나요? 다시한번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기를 원합니다.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고전16:5-12, 개역한글)

 

여기에 사도바울이 선한싸움을 싸우는 원칙 7가지가 나와있습니다.

 

1. 그는 필요를 항상 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여러번 세우고 그것을 고린도전후서에 씁니다.
고린도서는 에베소에서 쓰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느라 바쁜중에서도 사도바울은 고린도를 잊지않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적인 필요를 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했다하면 우리는 항상 영적인 필요를 봐야 합니다.
구도자를 보면 구원의 필요성을 보고 그를 도와야 합니다.
성도를 보아도 그 성도에게 필요한 필요를 보고 채워야 합니다.

 

심지어 로마서를 보면 사도바울은 로마에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가 그의 최종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페인, 그 당시의 땅끝까지 가려고 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 느헤미야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떤사람이 예루살렘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예루살렘의 상황을 물었습니다.
그 당시에 성전은 세워졌으나 성벽이 세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성벽이 없으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그 소식을 듣고 울며 기도합니다. 그는 필요를 알고 그 필요를 어떻게 채울줄도 압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술 관원이었기에 임의대로 휴가를 낼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왕이 허락하느냐 였습니다. 그는 휴가를 신청해서 합법적으로 휴가를 얻을수 없는 신분입니다. 오직 왕이 허락해야 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어느날 느헤미야가 왕앞에 나왔습니다. 왕은 느헤미야의 얼굴에서 근심을 보았습니다.
원래 왕의 관원은 그 얼굴에 수색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잘못하면 반역과 연루되는 일로 목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수색을 얼굴에서 감췄으나 하나님께서 왕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잠시 기도하고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왕은 느헤미야에게 갔다오라고 허락합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항상 영적인 필요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했습니다.
우리또한 그와같은 선한 일꾼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합당한 예라고 할수 없지만.. 인도에서 선교를 하기 원하는 구두수선공의 직업을 가진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인도가 그려진 지도를 보며 눈물로써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직업이 구두수선이 아니라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것이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가 구두수선일을 소홀이 했다는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인 필요를 보고 기도할때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방법으로 이 필요를 채우십니다.

 

2.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유연함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하려는 계획을 세웠을찌라도, 그것은 인간적으로 세운계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그 계획이 변경됩니다.
고린도 후서에 보면 이 부분을 사람들은 비난합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므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또한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이에대해 사도바울은 자기 양심을 따라 전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지만 나의 해석이 틀릴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아시아쪽으로 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이 여행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전도여행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그래도 사도바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꿈으로 환상중에 메게도냐 사람이 "이리로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계시를 받고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영국의 리빙스톤이라고 유명한 전도자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아프리카의 유명한 전도자이시지만 원래 그분은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으므로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한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필요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하는 유연함'이 있어야 합니다.

 

3. 주님의 일을 철저하게 완수하려 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고전16:7,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고 합니다. 겨울을 지내려고 하는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일을 할때 철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정도면 됐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명령하셨습니다. <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어떤사람을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만드는것이 다가 아닙니다.
< 내가 분부한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우리는 그 구원받은자가 말씀을 알고 그 알게된대로 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1,2,3차 전도여행을 합니다. 저는 처음에 그 사도바울의 여행지가 다 다를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다르지만 각 여행지가 중복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갈라디아로 마칩니다. 그리고 2차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은 갈라디아로 시작되고 갈라디아를 지나갑니다. 전도여행인데 왜 복음을 이미 전한 갈라디아를 지나가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이 일을 철저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주님께서 지시하는 수준까지 가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모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습니다. >
주님또한 십자가에서 다이루셨다 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를 가르쳐 너희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 >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는 수준까지 이루려 노력하나요, 아니면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나요?

 

4. 주님이 문을 여시는가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문이 있습니다. 문이 열리는것은 하나님께서 열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들어갈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문을 열때까지 기다릴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스데반과 빌립이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자 7명중 하나가 스데반과 빌립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과부를 공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때가 되어 문을 여시고, 스데반을 회당에서 논쟁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도록 사용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령으로 빌립을 부르사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을 열때까지 하나님께서 놓으신 지역모임에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또한 문이 열렸을때 우리는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문을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는 열린문이 있었습니다. 그문으로 들어가면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는 부자라, 나에게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실때까지 기다린다는것은 시간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것인가 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두가지 키를 가집니다. 1. 깨어있어야 합니다.   2. 우선순위를 확보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서 이 제한된 시간속에서 제일먼저 해야할것과 나중에 해야할것인지를 알고 실행해야 합니다.

 

저희 나이때 형제님들은 건강을 신경씁니다. 저도 고혈압이 있어 약을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매일 저에게 꾸준히 운동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운동을 하기전에 제일먼저 해야할 일을 생각합니다. 
기도를 먼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공부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일요일에도 예베전에 운동을 하고 왔다는 형제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물론, 운동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순위 1번을 주님으로 두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문을 여시면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5. 반대를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고전16:8-9,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이베소에 있으려고 합니다. 그이유는 1. 복음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2. 대적하는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장애가 있으면 그것을 꼭 회피해야 하는것은 아닙니다.
반대가 있는곳에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곳에서 사단은 일합니다. 사단이 방해하지 않는다는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는것입니다.

 

성도님께서 잘 아시는대로 아시아의 7개 교회가 에베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근에 있던 사람들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듣고 돌아가서 복음을 전해 세워진 교회가 있습니다. 그것이 고로새 교회입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마술서와 우상을 가져다 태웠습니다.
그일로 인해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장사가 되지 않으므로 )모여 바울을 반대했습니다. 2시간 동안이나 누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수없는 목소리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와같은 역사는 하나님께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대가 있는곳에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반대와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일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와같이 말했습니다. < 예수의 죽은것을 내등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

 

6. 혼자일하지 않고 함께 일합니다.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고전16:10,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말합니다. 그는 함께 일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갖히자 투기와 분쟁으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동기로 시작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 전파되는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기뻐하노라 >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가'만을 보는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원칙입니다.
서신서 끝에 24명의 동역자의 안부내용에 나옵니다. 그들은 다  사도바울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그들중에는 8명의 자매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홀로 모든일을 하는 영웅이 아닌, 함께 하나의 팀으로써 동역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동역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4:5,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이제 자기가 떠날 때를 알았습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의 마지막 서신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해 디모데를 구원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루스드라에서 칭찬받는 형제가 되었을때에 그에게 안수하고 동행하며 그를 가르쳤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이제 나는 없다. 이제 네가 이어서 달려가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원칙입니다.

 

7. 인내합니다.

 

마지막 일곱번째 원칙은 아볼로 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볼로에게 "같이 고린도 교회로 건너가시지요" 라고 많이 권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며 거절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직접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사도가 아닌 교사였습니다.
사도바울이 권했을때 아볼로 순종하는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볼로는 거절합니다.
이 거절의 배경에는 고린도 교회의 분파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가므로 다시 문제가 야기될것이라 염려 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아볼로가 가는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볼로에게는 그러한 심령이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기다립니다.
사도바울은 '나와 아볼로가 하나된 본을 보였다'고 합니다.

 

< 기회가 되면 가리라 >
사도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때가 될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15:58, 개역한글)

 

<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

 

한가지를 더 말하겠습니다. 위 말씀을 이렇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일을 힘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일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계속 수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도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

 

우리 생각으로는 그사람의 건강을 생각해서 일을 분산시키거나 줄이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말은 다릅니다.

 

< 감당치 못할 시험 밖에는 시험당함을 허락지 않으시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할수 있는반큼 일을 주십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2:30, 개역한글)

 

이는 에바브라 디도에 관한 표현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을 하는 원칙입니다. 에바브라 디도는 그일을 하다가 죽게 생겼다 할때에도 자기목숨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수고하는사람에게 말합니다. "더욱 하십시오, 더욱 해서 죽을지경에 이르더라도 목숨을 돌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의 일이 가장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 죽는다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선한싸움을 싸웠던 성도들이 가졌던 마음입니다.

 

사실, 이세상에서 두려운 것은 하나님외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려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두려워하지 말라 >

 

이것이 사도바울이 선한싸움을 효과적으로 싸운 본입니다.
선한일은 어떤일을 많이 해낸사람이 아니고, 능력이 있고, 결과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러한 영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