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고린도전서

< 고린도전서 4장 >

박이레 2022. 7. 12. 21:39

2018년 5월 7일 월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고린도전서 4장 >

고린도전서 4장에는 고린도 교회에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3장 후반부부터 살피겠습니다.

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3:18-23, 개역한글)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4:6-20, 개역한글)

교린도 교회안의 분쟁의 문제를 고린도전서 1-4장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분쟁이 생기게 된 원인에 대한 사도바울의 가르침은, 모임안에 세상의 방법과 사람의 지혜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지혜로 영적인 것을 알지 못함을 1장에서 말하고 2장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셔야만 사람이 하나님을 알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가르침이 교회에 들어오면 생기는 문제를 말씀했습니다.
이제 4장에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똑바로 이해하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성도라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영적이지 않은 곳에서 사람이 자기의 능력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적인 곳에서 자기의 지혜로 성공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또한 일군은 누구입니까? 바울과 아볼로 게바는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임무를 부여하시고 그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무익한 종이며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1-3장까지 다루어온 내용입니다.

이제 4장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네번째 방법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4:6, 개역한글)

<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사도바울을 본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4:16, 개역한글)

본 받는것은 '내가 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하면 고린도교회안에 분쟁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한 일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4:15,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스승이 아니고 아비였습니다.
저희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기존에 가지고 있는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안됩니다.
'스승"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군사부일체라고 하여 아버지와 스승과 임금을 동일한 반열에 두고 있습니다.
그 이미지를 가지고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스승에 적용하면 안됩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스승,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몽학선생은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을 가르치는 종입니다.
또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스승은, 말로만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곧,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말만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부요하고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임에서도 똑같은 것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일군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한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굶주리고 정처가 없었습니다.
고린도교회안의 잘못된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고 그곳에서 자기들의 세상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사도바울의 삶처럼 사는것이 분쟁의 궁극적인 해결책입니다.

그럼 사도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말로만 무엇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영적인 아비였습니다. 그는 복음으로 성도를 낳았 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먼저 복음(진리)이 전해져야 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1:23, 개역한글)

두번째로, 성령님께서 그 복음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 복음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이 마음에 세겨지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영적인 아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해져야 하며 또한 그는 깨끗한 그릇이어야 하며 그렇게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고린도까지 보내셨습니다. 거기서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만나고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계시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그 말씀대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나의 믿음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디모데와 디도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사도바울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문제가 많았지만 그들에게도 '나의 자녀들아'라고 했던 사도바울이 왜 고린도 교회에는 그러한 말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는 세상적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의 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고린도 서신서의 독특한 표현은 '나의 자녀들아'라는 표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인 아비의 길이어야 합니다. 아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저 말로만 하고 말만 잘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은 이렇게 전하는것이라고 말을 잘하는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고전4:14, 개역한글)

아비의 두번째 특징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세상의 개념을 가져와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은 다른 것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후6:13, 개역한글)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는 사랑에 대해서 여러가지 표현을 사도바울은 고린도서에서 합니다.
그 중 첫번째는 마음을 넓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의 상처와 그의 형편의 여러가지 것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지만 연약한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을것이라고 마음을 넓혀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11:2, 개역한글)

두번째로, 아버지가 딸을 중매하는 것입니다. 곧, 좋은신랑을 만날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이것을 고린도서에 씁니다. 아비는 자기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합당하도록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의 삶이 주님께 합당한 삶이 되도록 권면하는 사람이 아버지 입니다.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고후12:14, 개역한글)

영적인 부모의 세번째 특징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재물, 시간을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며 사용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여러가지 물질을 배려하고 줍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자기가 가진 좋은 것들을 기꺼이 희생하며 쓰는 사람입니다.

부모는 거룩을 요구하고 자녀를 이해하고 자녀를 거룩으로 끌고가고 그를 위해서 자기의 여러가지 것들을 희생하는 존재입니다.
모임에 이러한 분들이 있다면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고후12:15, 개역한글)

부모의 사랑의 마지막 특징은 자녀들이 보답하지 않아도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그사랑에 보답하지 않는다해도 변함없이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사랑을 고린도전서에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부모는 1.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기도하고 권하고 있어야 합니다. 2. 또한 성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 세번째를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고전4:14, 개역한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4:16, 개역한글)

<권하노니>

부모의 세번재 특징은 권하는것입니다. 책망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할때 반드시 지적하여 고쳐내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실패하는 구약의 인물이 있습니다.

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삼상2:22-25, 개역한글)

엘리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날 한시에 죽습니다. 그날 엘리또한 죽습니다.
그리고 며느리가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합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잘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앞에 제사 드리러 온 사람에게 어떻게 행했는지 압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을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부도덕했습니다.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삼상2:24, 개역한글)

두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이스라엘 백성들을 실족하게)했고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는 이 두가지를 아들들에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와서 무어라고 말하나요?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삼상2:29, 개역한글)

그는 아들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것보다 우선시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중심에서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또 한번 지적하십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삼상3:13, 개역한글)

이제 엘리의 죄는 용서되지 않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잘못한 문제가 있지만 그 아들들을 다루지 못한 엘리로 인해서 그 집에 영원한 저주가 내립니다.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엘리는 그 아들들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엘리의 제일 큰 잘못입니다. 그 아들들이 범한 죄가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는 죄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 짖는 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는 그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함으로 그 행동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혹, 엘리의 입장에서 억울한 부분이 있을까요?
"그래도 하나님, 저는 아들들에게 그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아들들이 듣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는 이렇게 변명할런지 모르겠습니다.

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삼상2:12-17, 개역한글)

이것이 그들이 행한 죄입니다. 이일에 대해서 엘리가  행한 조취가 무엇입니까? 그냥 말로 그렇게 행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두 아들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2절, 그들은 우선 구원받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자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취입니다.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뿐 아니라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드리러 올때 제사장의 몫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몫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데다 갈고리로 찔러서 가져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3. 백성이 한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힘으로 빼았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저희가 천거서를 가져오면 그 천거서에 보통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성도의 예절로 맞이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악하게 행동했을찌라도 제사드리러 온 사람이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기름은 하나님께 태워드리게 해주십시오." 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예절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는 그 아들들이 하는 모든 직분에서 그들을 베재 시켜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말로만 아들들을 책망하고 그쳤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자를 내가 멸시하리라>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말씀 입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올림픽에 출전 했는데, 자기의 주종목 시합이 주일에 있었기에 그는ㅍ자기의 주 종목에 출전하지 않습니다.
그의 결정이 어떠하든, 그가 일요일에 경주하지 않는것이 그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속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분으로 존중히 여기고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보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자녀들을 가르칠때 엘리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이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가장 존중히 여기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을때 그 죄가 성경에서 출교에 해당하는 죄라면 출교해야 합니다.

저희들은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하는것이 잘 교육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 때리는것이 사랑입니다. 징계해야 그가 사람답게 자라납니다. 징계받지 않은 아이는 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희들에게 이러한 부분에서 연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실히 아이를 낳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징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믿지않는 배우자를 둔 가정에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을 말로 하지 말고 변화된 삶으로 전하십시오."

자기의 삶이 달라져야 배우자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구원의 역사가 적은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삶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복음이 잘 전파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저희들이 반성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저희들의 삶이 달라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7, 개역한글)

<누구든지> 이는 모든 사람을 포함 합니다. 그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26, 개역한글)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33, 개역한글)

인생은 첫번째로, 인간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 아끼는 사람, 돌봐주고 싶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생은 두번째로, 내가 성취하고 싶은것이 있고 의미추구가 있고 여가생활 등이 있습니다.
인생의 세번째는, 물질입니다. 소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세 영역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할것을 요구하십니다.
부모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또한 자식을 우리가 사랑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쉬거나 여가시간을 보내거나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서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 물질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갈때 자기가 짖지 아니한 집에서 살고 자기가 일구지 않은 포도원의 포도를 먹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모든것을 자기가 이루어 내었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자청년의 예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려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체면 때문에 함부로 뛰지 않습니다. 이 모습만 보면 그는 칭찬할만한 바람직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주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질문합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에 대해 주님은 단 두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죄인임을 아느냐?' 이것을 "성경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부자청년은 그것을 내가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네 재산을 다 팔아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네 재물의 주인이 너냐, 하나님이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개의 영역에서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부자청년은 영생에 대한 필요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이 두가지를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주님을 떠나갑니다.

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9:57-62, 개역한글)

여기 세사람이 나옵니다.
첫번째 사람은 아마도 주님의 말씀이나 인격에 감동을 받아 주님을 따라가리라 결단한 사람라고 생각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보면 훌륭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 마음의 부족이 있음을 주님께서는 보았습니다.

<여우도 굴이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그가 마음에 놓치고 있는것은 그의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가족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집'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가족,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나를 위하여 가족이나 재물을 버리는 자는 하늘에서 백배의 보상을 얻고>

이 땅에 소망이 있지 않기에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하늘에 있는것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따르는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또 다른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제 아버지가 돌아가실때까지 모시고 돌아가시면 유산을 받아 그 돈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사역자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가난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중동에 가서 돈을 벌어와 그 재산으로 사역을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과 어긋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죽은자는 죽은자가 장사하게 내어버려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

부른자가 부름을 받은자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서 군인을 모집하면 그의 먹고 쓸것을 군대에서 공급하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필요를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든것을 책임지십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준비하겠다고 하는것은 주님께서 자기를 책임질만한 능력이 없다고 하는것과 같습니다.

물론 사역자에 대한 많은 공급을 교회가 할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교회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나로 먼저>

우리의 삶은 나로먼저가 아닌 주님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먼저>
주님을 따를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사람도 이것이 문제가 되지만 주님을 따르는 사람도 이것이 문제 됩니다. 일하는 자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을 섬길때 뒤를 돌아보거나 세상을 돌아보며 후회 해서는 안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이제 뒤를 돌이보지 않는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길을 갔습니다. 그는 세상을 돌아보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이 왕인 세상, 주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산다면 세상은 반드시 핍박합니다.

만일 우리삶에 핍박이 없다면 우리가 경건하게 살지 않는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2:19, 개역한글)

우리가 순수하게 말씀을 지키고자 하고, 주님을 위한 길을 가고자 할때 반드시 어려움이 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거부한 세상에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삶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가 영생의 축복을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고난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과, 고린도교회에 새로 세워진 말을 잘하고 지혜롭게 말하고 부요하고 자신을 높이는 사람과 자신을 대조 합니다.
그들은 가짜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안에 가짜들이 우세할 수 있습니다

어떤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고전4:18, 개역한글)

그들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관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구테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고린도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사도바울이 교회의 터를 세웠지만 사도바울은 관련이 없다고 그들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고전4:19,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속히 갈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갈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주께서 허락하시면> 이라는 조건을 말합니다. 그는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전4:20-21, 개역한글)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합니다.
사도바울의 사도권대로 그들을 징계하고 출교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사도바울과의 교제를 끊을것인지를 확실히 하라고 말씀합니다.

거짓교사의 거짓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이 말로 된다면, 설득으로 된다면, 인간의 이성으로 호소해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인간에게 말로 해결될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복음과 성령을 보내사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생각으로는 가능성이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스스로 높아지고 분쟁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누르고 주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엎드려야 합니다.

또한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들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교회가 높습니까? 일군이 높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사용하신것이 바울이고 아볼로고 게바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일군을 높이는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공부시키려고 과외선생을 고용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가 아닌 과외선생을 존경한다면 그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군들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네번째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뿐이 아닌 실제적인 삶을 살아야 힙니다
저희 주변에 항상 이러한 위험들이 상주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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