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고린도전서

< 고린도전서 2장 >

박이레 2022. 7. 12. 21:37

2018년 5월 6일 일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고린도전서 2장 >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16, 개역한글)

고린도전서 1장의 앞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지혜로 영적인 것을 알아낼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지혜로 많은것을 알아내고 개발하지만 이것이 영적으로 오면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이러한 영적인 것, 하나님의 생각들을 사람이 어떻게 알게 하시는가를 살피겠습니다.

1-2절까지는 그 말씀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3-5절에는 전도자에 대해서 나옵니다. 6-10절까지는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11절부터 마지막까지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대하여 나와 있습니다.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행18:4-6, 개역한글)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18:8-10,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때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환상 중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9장에서 구원받고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1,2,3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여기 사도행전 18장은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 시점에 해당하는 구절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그 복음을 주님께 직접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때에 두려워 합니다. 왜 두려워 할까요?

성경에 아주 박식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 두려워 한다고 하는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가 두려워 하는 이유는 그가 복음을 전할때, 자기의 지혜로 전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가 80세에 하나님께서 가시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때의 모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그가 40세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낼만한 자신감도 있었고 지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의 그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80세가 되어서 "나는 하지 못합니다."라고 할때에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영적인 일을 받아들이는것은 사람이 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일을 맏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그는 항상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할수 없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때에 그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성경을 피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것을 증거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 말을 잘 알아듣도록 듣기좋은 인간적인 생각을 복음에 끼워넣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을 피고 성경을 죽 풉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능력이 없었나요? 혹은 지식이 없었나요?

그는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경험과 자식을 복음 전하는데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만 성경을 펴고, 이사야 53장에 나온 유월절의 어린양이 예수님 임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영적인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유일한 방법 이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행18:5, 개역한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행18:4, 개역한글)

<강론> <권면>

강론은 일반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질의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설득하는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선포한 것에 대해서 혹시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는 자들의 질문을 받아 대답해 주었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할때, '만에하나라도' 라는 말로 안믿는 것보다, 믿는것이 확률적으로 본인에게 유익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안믿으면 손해가 없지만 믿으면 유익이 있다는 복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고후5:11, 개역한글)

권하는 것은 그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4-15, 개역한글)

이것이 사도바울이 권하는 것입니다. 권하는것은 십자가의 내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하신일에 복종시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기에 모든사람이 죽은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신것은 저로 인해서 산 자들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하여 살게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것이 합당하고 논리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옛날처럼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고린도 회당에서 전했던 복음입니다.
그렇기에 이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기의 능력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을 맏은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복음은 하늘에 속한 진리가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받은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씀으로 구원받았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또한 사람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2:9, 개역한글)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어떻게 기록하셨는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교회는 창세전에 이미 계획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만들기 전에 먼저 우리, 교회가 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을 때, 삼위 하나님만 계실때가 있었습니다. 시간도 사실은 창조된 것입니다. 공간과 물질도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랑하는 신부를 만들어 주기로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께 감사해서 순종하는 교회를 만들어 주시기로 창세전에 작정 하셨습니다. 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과연 세상의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감히 짐작할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수많은 아들들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로 더해지기 전의 사람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위해서 아드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를 성령께서 기록하시고, 우리의 마음 문을 여시고 인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알게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택하십니다.
그들에게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2:10, 개역한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이는 계시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2, 개역한글)

<우리가> 이는 고린도교회가 아니라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은 이제 하나님께 계시받은것을 교회에 알려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언어를 사람의 언어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감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할때 그들은 최적의 단어를 사용해서 기록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2:13, 개역한글)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이것이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감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생각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전도자가 있습니다. 전도자는 두렵고 떨어야 합니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을 가진 전도자는 잘못된 전도자 입니다. 전도자는 오직 성경만을 말하고 영적인 말씀만을 말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각으로 알수 없는것을 성령으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저희쪽으로 와서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보겠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2:14, 개역한글)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구약성경을 펴고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제시 했습니다.
그리고 권합니다. 복음말씀에 대해 질문이나 이해 안되는 것이 있는지 권합니다.

그는 이렇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되고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는것이 합당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씀을 전했을때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2:13, 개역한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빌립보에 왔다가 얻어맞고 쫓겨온, 가는곳마다 반대를 받는 전도자 입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한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믿음의 일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그가 전하는 것이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그것은 사도바울이 성경을 대고 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성경과 일치하게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성경과 모순되면 그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갈4:13-15,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할때 갈라디아로 갑니다. 그곳은 도시가 아니라 우리나라로 치면 '도' 정도 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최소한 4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육체는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외모적으로 있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 그 여행이 너무나 힘이 들므로 마가는 도중에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 여정이 힘든것으로 인해서 사도바울이 병에 걸리거나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간질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찌라도 복음을 듣는 갈라디아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왜 그러한 반응이 나온 것인가요?
그 이유는 그가 성경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기준입니다.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17:11-12, 개역한글)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17:2, 개역한글)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행17:3-4, 개역한글)

여기 데살로니가와 베뢰아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를 나온 후에 데살로니가에서 3주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핍박으로 인해 베뢰아로 갑니다.
성경은 이 베뢰아 사람들을 매우 칭찬합니다.

<신사적이어서>

신사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나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펴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 마음이 진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람이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그 발 앞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것이 신사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죄 용서의 길이 나와 있고 인생의 참 의미가 담겨 있으며 우리가 가져야 할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처럼 놀라운 내용입니다.

두번재로, 베뢰아 사람들과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복음을 들었을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 자리에서 믿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했다가 집에 돌아가서 성경이 정말 그러한지 비교해보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베뢰아인들이 더 신사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받아들이는것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 신사적이라고 하시며 기뻐하시는것은 오늘 수양회 말씀을 잘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펴서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행17:3-4, 개역한글)

<권함을 받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권함'이라는 것은, "웬만하면 믿으시길 원합니다." 라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이 권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인들은 그 권함에 내 생각을 복종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권함을 받고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집에 돌아가 성경을 상고 했습니다.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17:12, 개역한글)

<믿는 사람이 많고> 이 믿는다는것은 능동태입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하나님께 맏기겠습니다." 라고 의지적으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권함을 받고 복종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은 자기의 생각대로 복음을 잘 포장해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람의 생각대로 복음을 전하면 복음이 사람의 생각대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전도자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는 질의응답을 하고 의문이 있으면 풀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신에 전할 정확한 단어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음성앞에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유일하신 주님앞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고 계시하시고 조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의미가 분명한 정확한 단어를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대충 읽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른 단어를 쓰셨을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내가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고 내 생각을 고집하는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가 안될때마다 무릎을 꿇어 엎드려서 "주여 알려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우리는 또한 그것이 자동으로 이해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다른 성도님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정말로 순종할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각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해햐 하는것에 대해 두렵고 떠는 전도자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님을 알게 하는데에 성경을 사용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는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도 계속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원칙 위에서 우리가 이것을 삶에서 드러내고 실행해 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한봉래 형제님 > 고린도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린도전서 4장 >  (0) 2022.07.12
< 고린도전서 3장 >  (0) 2022.07.12
<고린도전서 1장 18~25절_복음말씀>  (0) 2022.07.12
<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  (0) 2022.07.12
< 고린도전서 1장 1~9절 >  (0) 2022.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