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5일 토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
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침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1:10-17, 개역한글)
여기서 본격적으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첫번째 문제는 분쟁입니다.
이 문제를 '글로에 집'편의 소식으로 사도바울은 들었습니다. 글로에는 자매의 이름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3:3, 개역한글)
<시기>
고린도 교회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분쟁> 우리나라 성경에는 분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갈등이 옳은 번역 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1:11, 개역한글)
또한 고린도교회는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고린도는 그리스에 있는 도시 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식이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철학자이고 많은 학파들이 거기서 나왓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와같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의 문화 였습니다.
그러한 그리스의 사람들이 구원 받으면서 그리스의 세상지식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문제 입니다.
구원은 세상적인 지식과는 관계가 없어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까지는 특별히 교회안에 세상의 지혜와 사람의 방법이 들어왔을때 생기는 문제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1:12, 개역한글)
교린도교회 안에 네개의 파가 생겼습니다. 이들은 각각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나뉜 것일까요?
첫번째는 바울에게 속한 자를 보겠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당대 그리스인들에게 바울의 이미지는 어떠했을까요? 바울, 게바, 아볼로 모두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고 부름받은 일군이지만 그것을 제하고 사도바울의 겉으로 드러난 그들과는 다른 특징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율법에서 자유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가는곳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 했습니다.
그는 구원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기능이 그에 있지않음을 말하며 그래서 할례를 반대 합니다.
하지만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 모든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옳습니까? 모든것을 행하지 않아도 되나요? 그렇지 않음을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해 율법을 지키게 됨을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고 또한 주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당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었던 인상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방종으로 쓰려는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에대해 사도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겨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전6:12, 개역한글)
이것이 사도바울의 삶의 원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빙자해서 모든것이 거칠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무익한것을 하지 않는다."
"나는 제제를 받지 않지만, 또한 나는 나에게 중독성이 있는것을 하지 않는다."
기준은 유익을 끼쳐야 하며, 또한 우리를 다시 얽어매는 것이어서는 안됨을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제 아볼로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그 당시에 가장 큰 도시는 로마입니다. 두번째로 큰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입니다. 그곳은 도서관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왕이 세계의 모든 고전들을 헬라어로 번역합니다. 또한 그곳에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 했습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다수가 지식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구원받았지만 대단한 지식인 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지식인이었지만 그는 구원받은 후에 그 이전의 지식을 잘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구원받은 후에 그가 가진 지식으로 복음을 구변으로 잘 표현해 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이 가지고 있는(지식, 외모, 재능 등) 것을 가치있게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고후10:10, 개역한글)
그들은 사도바울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 합니다.
편지는 힘이 있지만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니 별 힘이 없었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서신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써진 서신이었기 때문에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사도바울을 구원하셔서 은혜로 그를 쓰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바울의 그러함을 보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인간적인 부분, 그의 성품적인부분, 천부적인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1,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사람의 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잘 표현해 낼수 있을찌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지혜로 사람들이 잘 이해할수 있도록, 감탄할수 있도록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3, 개역한글)
그렇기에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칭하는 고린도 성도들은 사도바울을 낮게 평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들을 분별해 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만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것은 민감하게 분별해 낼줄 알뿐 입니다.
이제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 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통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때에 열두명을 부르셨습니다. 그 중에서 세명을 부르셨고 또한 그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또한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왔을 때 이방인과 식사를 하지 않은척 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를 따르는 사람들은 과거의 율법적인것을 붇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서는 안되는 목록이 요즘도 있는 듯합니다.
그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은 노란머리를 하면 안된다 이고 또는 교회에서 반바지를 입으면 안된다 등이 있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목록을 가지고 정해진 규범르로 지키고자 하면 위험해지는것이 바리새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리새인처럼 외적인 규칙이 삶을 규제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열심히 지키면 겉은 깨끗해보이지만 속은 부패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세상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분별해 낼수 없게 됩니다.
그럼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살피겠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나는 그리스도에게 직접 속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세운 일군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아볼로를 인정하지 않으며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만 옳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적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안에 이렇게 네가지 분파가 있는것처럼 지금도 성도들의 심령속에 이러한 네가지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것을 치유해 내고 올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이에대한 사도바울의 처방은 이것입니다
<같은 말을 하고,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뜻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회복시키실때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깁는다는것은 다시 물고기를 낚을때에 잘 낚기 위해서 모으는 것입니다. 이 깁는것이 여기나온 '같이하고'의 '합하다'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하고>
말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제가 처음 강서 모임에서 더해졌을때 형제님들이 열분정도 계셨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에는 기혼 형제님만 모였습니다. 그리고 오랜시간 토론하다가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였음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또 가정에서 아내에게 교회의 결정 사항을 말하며 한가지씩 추가합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교회의 결정에 성도들이 마음이 합하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뜻이 같아야 합니다. 뜻이 같은것은 판단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판단이 같은것은 분별이 같은 것입니다.
같은 판단을 가지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성경에 대해서 바로 제시할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좋다 싫다가 아니라 말씀에서 말씀하는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성경에서 이렇게 제시하더라도 쉬이 따르고자 하지 않는 성도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수 있는 목자가 있어야 하며, 성경의 말씀을 제시할수 있는 교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가 부족해서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서로 마음이 다르니 시기하고 교만해지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주님 구원사역과 같은 중요한것의 분별이 갈리워져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이 아닌, 작고 시시한 것 때문에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것을 살필 수 있는 목자들이 모임에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는 교리적인 것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경향의 문제가 충돌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1:17, 개역한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그들의 분쟁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의 가치에 대해서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기에 이러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심령을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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