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강단말씀 요약글 모음/한봉래 형제님(요약)

고린도전서 강해 27

박이레 2022. 7. 12. 21:33

2015년 8월 12일 수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4, 개역한글)

 

한절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하지만 전제로 되는 말씀을 먼저 따로 살피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개역한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8, 개역한글)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다라고 말합니다.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때 가장많이 설명하는것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이 제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많은 찬송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그중 저는 이 가사를 들으면 맞다는 생각이 듣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것을 하신다는것을 ㅜㅇ리는 믿고 자녀가 되고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이 믿기도 전에 독생자를 보내서 당신을 죽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 세상사람들은 이렇게 뭍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이세상에는 비극이 많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을 지옥에 보내십니까?"
우리는 이에대해 대답해 줄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왜 교회가 징계를 합니까? 라고 뭍ㅌ습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 있을때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야고보에서 온 사람들이 왔을때에 도망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왔을때 피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은 베드로에게 면책합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어떤형제가 잘못하면 그 형제에게 가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듣지않으면 두세사람이 가서 면책하고, 그래도 듣지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말도 듣지않으면 출교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닌가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랑하지 않고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다시말하면 사랑은 고린도 교회의 말못을 덮어주는것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의 잘못을 드러내고 변화하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만일 안믿는사람이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그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것이 말이 되는가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대부분은 지옥에 넣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까? 그런데도 사랑이라고 할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노아의 시대때에 8명을 제외하고는 전인류가 몰살당했습니다. 그때 인류의 수를 추측한다면 최소 10억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소 10억의 인구를 홍수로 죽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까?

 

성경에서만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모든종교에서 자신이 믿는신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하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다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 하나님은 모든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

 

전능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모든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 후서 3장을 보면 이와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것입니다. 그누구도 ㅕㄹ망하는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 아는 악인이 죽는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

 

그렇다면 왜 대부분 지옥에가고 일부만 구원을 받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사람들은 4가지를 말합니다.

 

첫번째는 흔히 말하는 보편 구원론입니다. 이는 모든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것입니다. 
이 이론은 뭘 말하냐면 지옥을 없애버립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의 성품과 지옥은 모순된다고 느끼며 지옥을 없애는 것입니다. 지옥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됩니다.

 

두번째,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만 사랑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가 자기백성을 저희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좁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사랑하신게 ㅇ다니라 세상을 사랑하신것입니다.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막10:17-23, 개역한글)

 

어떤사람이 구원받고자 했습니다. 그사람의 태도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달려갑니다.
아마 이 부자청년의 신문을 보면 다른성경에서 그를 관원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우대사회에서 신분이 ㅣㅇㅆ는자들은 아무리 급해서 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꿇어 앉아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 계명을 지키라. 율법을 이야기 하십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첫번째로 해야하는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받을수 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쓰신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자기되를 주님앞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2. 나를 따르라.
주님을 내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게서 원하시는것을 자원하여 순종하는것이 구원입니다.

 

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자기의 행위를 근거로 그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죄인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두번째 주님을 따라갈때, 돈을 내려놔야만 따라갈수 ㅣㅇ썽ㅆ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내려놔야만 주님을 따를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10:21, 개역한글)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주님따르기를 거부하고 돈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런데 왜 인간을 지옥에 넣으실까요?
그러나 성도들이 죄를 범하면 처리해야 합니다. 어떤죄는 비공식적으로 어떤죄는 공식적으로 처리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없어서 입니까?

 

이런 문제를 풀기위해서 첫번째로 필요한것이 전도출판사에  이렇게 구분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구분하듯이 구분해야 합니다.

 

빌립보서에 <구원을 이루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구원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1.이미 이룬 구원이 있습니다.  2. 이뤄야할 구원이 있습니다.   3. 용광스럽게 올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구분할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의 경우에도 2가지가 있습니다. 1.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가 있습니다.
2. 아들로써 아버지 앞에 사죄하는 회개가 있습니다.

 

교회또한 하나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1. 몸된교회가 있습니다. 오순절부터 데살로니가 전서 4장까지 몸된 교회가 있습니다.   2. 지역교회가 있습니다. 특정한 지역에 모인 지역교회인것입니다.
이 둘을 구분할수 있어야 합니다. 이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말씀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사랑도 구분할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에 있어서 무제한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은 모든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와의 사랑을 차별적으로 하십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니다.

 

이 사랑의 깊이를 구분하애  합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5:38-42, 개역한글)

 

이런말씀 가운데서 <오른뺨을 치면 왼빰을 대라> <꾸고자하는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말씀의 의미를 구분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행하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는 법을따라 하시는 것입니다. 눈에는눈, 이에는 이 입니다.
교회에서 공적으로 다루는 일과, 개인적으로 다루는 일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공적인 일을 다룰때에 개인적인 일을 넣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을 다룰때에 공적인 일을 넣지 않습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것으로 주님게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볼수 있는것은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에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짓을 모름이니이다>
주님은 자신읖 죽이는자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자만 사랑한다는 말은 인간의 논리로 바꾼것에 불구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행14:17, 개역한글)

 

마태복음에는 <악인에게도 해와 비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믿는사람과 믿지 않는자를 구분해서 복을 주실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에게 해와 비를 주십니다.
악인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인지 아십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이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빛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통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인 혜택을 주십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19:41-44, 개역한글)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사 우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을 걱정하신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안에 살고 있는 백성을 보고 우신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의 미래를 아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로 올리신 40년후에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둘러쌀것입니다. 예루살렘성이 함락되었을때에 끔찍한 학살이 일어날것입니다.

 

돌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의 디도장군은 성전을 훼손시키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불이 붙었습니다. 벽에 금칠한 금이 녹아내리면서 흘러내렷습니다. 군인들은 그 금을 끍어내기 위해서 성전을 돌위에 돌하나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이 지옥에 가는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눈을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사랑의 증거입니다.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1-5, 개역한글)

 

그때나 지금이나 사고들이 있습니다. 
유대는 크게 두개로 나뉩니다. 갈리리와 예루살렘입니다. 갈릴리는 외부 변방이며,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지 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망대는 그 시절의 역사적인 건축물입니다. 그 건물이 당대 최고의 기술로 지어졌지만 무너기지도 합니다.
그것은 그당시 톱뉴스 일것입니다. 그런데 그 망대주변에 있던 18사람이 깔려 죽었습니다.

 

이제 갈릴리 사람을 예로 들겠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제사들이기 위해서 왔습니다. 절기를 지키러 온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로마는 긴장하고 대모가 일어나지 않도록 군인을 길가에 세웁니다.
그러던중 어떤사람들이 로마군인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그러던 중 시비가 붙은 유대인이 성전으로 도망갔습니다.
빌라도는 성전으로 들러가서 그사람을 끌어내어 그를 죽이고 그들이 드리던 제물에 피를 섞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주 잔인한 정책입니다. 이것이 그당시 쾨고의 뉴스입니다.

 

그들은 이사건을 주님께 뭍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많은 사고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고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것은 비극이 아닌것입니다. 진짜 비극은 회개치 않고 지옥에 가는것입니다. 지옥이 진정한 비극입니다.
구원받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사건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비극을 통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있으며 진정한 비극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자연적인 혜택을 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않고 멸망할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눅14:16, 개역한글)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14:23, 개역한글)

 

주님의 보편적인 사랑은 복음으로 초청하십니다.
주인은 많은사람에게 초청하지만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청을 받을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도 초청장이 날아갑니다.
이는 이방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모든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모든인간에게 영적으로 지옥에 가야 할때가 있다는것을 경고하고 복음을 전하십니다.
이것이 모든사람에게 베푸시는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단, 이것은 시간적인 제한이 있습니다.

 

< 보라 지금이 구원받을만한 날이로다>

 

지금, 오늘 구원받아야 합니다.
지금 구원받지 않고 죽는다면 그들은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 보편적인 믿지않는 사람에 대한 사랑에는 시간적 제한이 있습니다.
주님게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심이 아닙니다.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대한 사랑은 시간적 제약이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13:1, 개역한글)

 

두번째, 믿는자와 믿지않는 사람사이에는 사랑의 차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끝까지를 세가지 의미로 해석해보겠습니다.
1. 주님 십자가 지실때까지 사랑하십니다.
- 예를 들면 주님께서 부활하신후에 40일간 이 땅에 계십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계시는 생애의 끝가지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베드로의 연약을 아십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가서 네가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십니다.

 

- 또한 그들의 생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2.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실수 있는 사랑을 다하여 사랑하신것입니다. 사랑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천국에 갈뿐만 아니라 주님을 닮는자로, 주님의 영광을 반영하는자로 구원의 목표가 이루어질때까지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 이후 천년왕국에서 이 옇한제자를 보면 주님을 닮은것을 볼수 있도록 사랑하십니다.

 

3.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경험하기 위해서 영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수 있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 끝내 주님을 다 알수 없겠지만, 주님은 이같은 사랑의 하나님이군요! 라고 말할수 있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는 불공평한 사랑입니다" 라고 우리는 말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민족에게 대한 사랑이 다릅니다.

 

지금의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성경을 읽을때에 공적으로 에스겔 16장을 읽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원래 어떤 이들이었는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6장에서 나온 '너는'이라는 단어는 남유다를 가르팁니다.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미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미는 헷 사람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며 (겔16:45, 개역한글)

 

이는 너희는 가나안 족속과 똑같은 출신이다 라는 말입니다.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좌편에 거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우편에 거하는 소돔이라 (겔16:46, 개역한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사마리아 입니다. 사마리아는 외국인과 혼혈이 되어버립니다. 사마리아와 소돔은 출신이 똑같습니다.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치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치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겔16:47, 개역한글)

 

세 민족을 볼때 유대가 제일 부패하였습니다.
소돔도 유다처럼 하지않았다고 하나님은 맹세하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치 아니하였느니라 (겔16:48, 개역한글)

 

50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51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치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한고로 너의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
(겔16:50-51, 개역한글)

 

소돔은 멸망당하고, 사마리아는 유대보다 절반밖에 죄를 범치 않았지만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유대를 조롱하십니다. 너희가 사마리아ㅘ 소돔을 상대적으로 의롭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큰 책망입니까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겔16:63, 개역한글)

 

그럼에도 하나님은 유대를 남겨두십니다. 유대는 더 나쁜죄를 짖고도 용서받습니다. 왜인가요?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니 (겔16:62, 개역한글)

 

단 한가지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기 대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신 그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인정받을만한 일을 한적이 없습니다. 소돔과 사마리아는 심판받지만, 유대는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차별적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엡2:7,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주신 목적중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증거하는 대상'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3:19, 개역한글)

 

넓이는 이러한 뜻입니다. 은혜시대에, 죄인중 괴수인 사도바울도 구원받습니다.
길이는, 한번구원받으면 영원토록 변치않는 사랑을 입습니다.
높이는 지옥에 갈 마땅한 사랑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같이 앉을것입니다.
깊이는 지옥에 갈 마땅한 사람도 믿을때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하시면서 왜 지옥에 보내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믿지않고 죽어서 지옥에 가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수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믿으면 너희죄를 다 용서해주겠다" 라고 말씀하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들이 믿겠습니까?
그들의 반응은 '문을 닫고 지옥으로 들어갈것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느니,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느니 차라리 지옥으로 들어가겠다 라고 하는것이 진실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하나님을 얼마나 거부하는지가 진실입니다.

 

세번째,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시31:1, 개역한글)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31:3, 개역한글)

 

시편기자는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입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요일2:12, 개역한글)

 

자녀는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자녀는 죄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용서를 받은 이유,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우리가 천국가는 것이 최종목표가 아닙니다. 최종목표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입니다. 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나타나나요? 이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드러날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단9:4, 개역한글)

 

이 기도 내용은 70년 바벨론 포로가 끝날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유를 달라고 기도드리는 내용입니다.

 

12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단9:12-13, 개역한글)

 

첫번째로 다니엘은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심판하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심판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다시 나중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않는자를 심판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시는 분입니다. 이는 잔인한것이 아닙니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단9:15, 개역한글)

 

그는 이제 다시 이스라엘을 고토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예레미야에게 주님께서 70년만에 돌아가게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에대한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회복시키시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기 때문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 영혼들에 대해서 안타깝게 여기고 이렇게 질문할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시고 인간에게 죄를 짖게 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재앙을 일으킬 결정권을 인간에게 주신걸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것을 궁극적인 목표가 됩니다.
주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피조물들은 행복할수 있습니다. 주님게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피조물은 괴롭게 됩니다.

 

하나님게서는 심판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출애굽때에 바로의 마음을 강파케하사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불공평 합니다. 왜 바로에게 책임을 물으십니까?" 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는사람에게 악역을 맡기지 않습니다. 바로가 악역을 맡기에 자처했기에 그마음이 강팍케된 것입니다.

 

욥에게 재앙이 임했을때 그는 어덯게 했습니까?
"주신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니 하나님게서 영광을 받으시리로다"
이러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게서 어떤사람을 지옥에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제한입니다. 그러나 그사랑에는 차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궁즉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입니다.

세상에는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간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종류로 다른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다 간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돌아가면 4절부터 17절까지 사랑에대한 15가지가 있습니다.
이중 두가지를 정의하겠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사랑은 방종이 아닙니다.
두번째, 사랑은 반드시 다른사람을 위하여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너희는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여 사랑으로 돌이키게 하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4, 개역한글)

 

1. 오래참고
오래참고는 사람에 대해서 참는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부다한 대우를 당했습니다.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복수할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않고 참는것이 사랑입니다.

 

부부간에 부부 싸움을 할수 있습니다. 이때 예를들면 부부싸움을 할때 하더라도 아내들이 밥을 차려주는것입니다.
이것이 '오래참는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흔번식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그렇다고 잘못한 성도를 무조건 용서하자는 아닙니다. 이는 성도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2. 온유하며
온유는 복수하지 않을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가 그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예를하나 들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베우라>

 

우리가 주님과 같이 멍에를 매면 주님이 손해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멍에를 매면 주님께서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와 멍에를 매고 5리가 아닌 10리를 가주시는 분입니다.

 

3. 투기하지 아니하면
투기는 다른사람이 가진것을 질투하는것입니다. 쉽게말해 다른사람이 나보다 뛰어난것을 못견뎌 하는것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12:31, 개역한글)

 

사모하라는 단어는 쿠기하다와 똑같은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적으로 해석합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시기하면 사랑하지 않는것이라고 맣합니다. 너희에겐 사랑이 없다.

 

사단은 뱀의 모습으로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처럼' 이 투기를 불러일으킨것입니다.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나요? '시기심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판것도 시기심 때문입니다.

 

이 시기를 극복한 사람이 구약에서는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그 다음 왕이 될것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되는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왜인가요?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시기를 극복합니다.

 

시기심이 일어나면 사랑하지 않는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사도바울을 들수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사람이 사도바울 괴롭게 하려고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바울은' 전파되는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기뻐하고 기뻐한다'
사랑만이 굣회안의 시기심을 극복할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랑하지 않고 시기함으로 은사사용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바울은 편지를 써서 사랑으로 문제를 극복할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문제가 되는사람을 덮어두는것이 아니라 말하여 교정하게 하는것입니다.

 

4.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랑은 시기와 거꾸로 입니다. 자랑은 내가 가진것을 다른사람에게 드러내는것입니다.
자랑하는 사람옆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랑하는자는 옆에 있는사람을 못나게 만듭니다.

 

자랑은 자기를 드러낼뿐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을 실족케 합니다. 자랑은 이중적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실족하게 된것은 모두가 장로가 되고자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인도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드러내고 누군가를 장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고린도교회 모두 '네가 인도자다' '내가 장로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결심하면 어떨까요? '성도와 대화할때마다 주님만 높이겟습니다' '주님을 높이지 않고 대화를 끝내지 않겠습니다' 라고 결심해야 합니다.

 

이세상에서 자기를 자랑해도 되는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게서 무어라고 말씀하셨나요?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요12:50, 개역한글)

 

주님이 입을열어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주님께서 이세상에 오셔 십자가에 죽으실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한번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교만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어떤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고전4:18, 개역한글)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어떤사람들은 사도바울이 우리교회를 오지 못할것이라고 교만해 졌습니다.
왜인가요? 그들은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와도 우리를 트겹ㄹ히 가르칠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교만하여 졌습니다.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4:6-8, 개역한글)

 

이말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진정으로 배불러서입니까? 이것은 반어법입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숭ㄴ종하여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0, 개역한글)

 

그들은 지혜롭다 생각하지만 미련합니다. 그들은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참으로 연약한 자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자랑한 이유는 그들에게 은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은사를 사용하여 자기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자기를 높이는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은도에 선교하러 갔습니다. 인도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어 신분계급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선교사의 신분이 높지 못했습니다. 인도인들이 그 선교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고국에서 구두를 만들었다면서요?"

 

선교사는 대답합니다. "아니요. 저는 구두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저는 구두를 수선하는 일을 했습니다"

 

침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사랑입니다. 교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를 참으로 하나님 자녀답게 하는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교회생활을 성격적으로 바꿔낼수 있는 유일한 힘이고 소망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각각 모임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원리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으로 행하고 있는가, 내가 교회를 세우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만일 내가 참을수 없고, 복수하고, 시기하고 있다면 내마음을 이 말씀에서 살피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살아야 합니다.

 

이를 하지 않으니 모임을 세우지 못하고, 모임의 약함만 보는 것입니다.
주님게서 저희를 도우셔서 모임을 세울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