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8일 목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고린도전서 강해 <16>
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고전9:1-18, 개역한글)
처음오신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고림도전서 1장부터 9장에 이르렀습니다. 내용은 헌금과 돈에 대한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겨냥해서 한 말씀이 아니므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는것은 우리의 선입견으로 은해 어려울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바울이 질문했고, 그에대해 사도바울이 대답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8:1, 개역한글)
'~ 대하여는' 이라는 것은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것에 대한 사도바울의 대답은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전8:13, 개역한글)
입니다. 우상의 제물은 먹을수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어려워하는 형제가 있다면 먹지 않는것이 답입니다.
이것은 지난시간에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든것은 자유로 할수 있는지만, 그 자유는 사랑에 의해서 제한을 받습니다.
9장 1절부터 10장 13절까지가 그 예가 나옵니다. 10장 14절부터 11장 1절까지 그 원칙을 적용시킵니다.
이것이 큰 흐름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 자유를 제한하는 예의 첫번째 예입니다. 곧, 사도바울의 자신의 예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예는 10장 1절부터 나오는 이스라엘의 예 입니다.
문맥은 이와같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어떤 자유가 있었으나 쓰지 않았는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었으나 그 권리를 쓰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교회가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할 권리 6가지를 듭니다.
사도바울이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여섯가지 이유중 첫번째는, 그가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사도이겠습니까?
사도의 조건이 무엇이겠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1:22, 개역한글)
1. 사도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여야 합니다.
-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사도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적어도 세번 목격합니다 (1.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받을때 2. 고린도 지역에 왔을때 -사도행전 9장 18절-19절- 3.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왔을때 - 사도행전 22장 17-18절- )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18:9-10, 개역한글)
-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환란으로 고민할때 주님께서 환상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행22:17-18,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사도이기 때문에 교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전9:2, 개역한글)
2. 고린도 교회가 사도바울이 사도인 증거입니다.
-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이 사도인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일 뿐만 아니라 권리를 행사할수 있는 자유인 입니다.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고전9:3, 개역한글)
힐문한다는 것은 공적으로 사도바울이 사도가 맞는지를 다루는 것이며 사도바울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고전9:4, 개역한글)
사도는 이와같은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고전9:5, 개역한글)
사도들은 가정을 꾸릴 권한이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하나님의 일꾼을 재정적으로 지원할뿐 아니라 그 아내와 같이 살수 있도록 공급할 책임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예로 들면 이러합니다)
예를들어 강사형제님이 오실때 숙박을 제공하는것이 이와같은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재정지원을 받을수 있는 첫번째 근거는 그가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그것이 이세상에서 행해지는 상습적이고 건전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고전9:7-8, 개역한글)
어떤 군인이 공짜로 군인일을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농민이 낮에 농사를 짖고 저녁에 먹고살기 위해서 다른일을 하나요.
어떤 사람도 본업을 두고 먹고살기위해서 투잡을 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꾼도 하나님의 일을하고 그 대가를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세번째 근거는, 하나님의 법도 이와같이 말한다 입니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고전9:9, 개역한글)
소가 타작을 합니다. 소가 일을 하면서 그 일에서 나오는 보상을 못받게 하도록 그 입에 망을 씌우는 것은 율법적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21장에 나오는데 신명기 21장은 문맥적으로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젊은사자가 굶주려 울부짖을때 그 사자에게 먹을것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동물들을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고전9:10, 개역한글)
우리가 어떤 밭일을 할때에는 소망을 가지고 합니다. 그 일을 함으로써 곡식이 나올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일하는것은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고전9:11, 개역한글)
저희모임은 성경대로 하는 모임입니다. 말씀대로 하기를 원하며, 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과하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제가 자라면서 이러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삯을 주면 안된다" 곧, 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재정을 볼때,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가난해야 한다, 그를 위해서도 가난하게 해야 한다"
이말은 곧 신령한것을 뿌리고 육신의 것을 거두면 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헌금에 대해서 잘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잘 봐야 합니다.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후8:2-5,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이방인 교회에서 헌금을 걷어 그것을 전달합니다.
마게도냐에는 1.빌립보 교회와 2.데살로니가 교회가 있었습니다 세번째로 3.뵈레아 교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 교회들은 환란가운데, 핍박가운데 있었습니다. 주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쫒겨나며 왕따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극한 가난속에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먹을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넘치는 연보를 하였습니다.
곧, 헌금은 수입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섬기는 모임에 대한 자부심이 이러한 헌금을 하게 된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헌금을 보고 힘대로 한것이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도바울은 그 헌금을 많이 한것을 3-4절사이에서 말린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4절에서 마게도냐 교회는 '제발 받아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구합니다.
어떻게 이와같은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꾼에 재정적으로 지원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꾼에게 넉넉하게 줘야 합니다.
일꾼이 넉넉하면 좋지않다, 가난해야 한다, 굶어죽지만 않을정도면 된다 라는것은 성경의 원리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고전9:5, 개역한글)
이것은 개인적으로 본것을 이야기 합니다.
한 형제님은 전심으로 교회일을 일하십니다. 그럼 아내들이 직장을 다니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교회는 형제가 아내를 데리고 다닐정도로 재정적으로 넉넉하게 지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넉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만 받을정도로만 주셨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넉넉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서 쓰던것을 안쓰면 교회에 가져오는것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마음으로 가져왔겠습니다만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은 1.사도가 먹고마실 권이 없겠느냐 2.세상이 이와같이 한다 3.율법이 이를 지지한다 라고 합니다.
네번째로는, 다른 사도들도 이러한 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린도교회에서 재정지원을 받은 전례가 있습니다.
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고전9:12, 개역한글)
다른 사도들중에는 베드로처럼 결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유다)
그리고 사도바울외에 다른사람들은 교회의 재정지원을 받고서 일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 예상컨데 베드로와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에서 사역을 했다면 그들은 고린도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았습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전9:13, 개역한글)
다섯번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칙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가 5개 있습니다.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져오는 제물중에는 반드시 제사장 몫이 있습니다.
번제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태우는데 가죽은 제사장의 몫입니다. 다른제사는 기름은 하나님께 태우고 고기는 제사장의 몫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전9:14, 개역한글)
여섯번째는,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제 말슴하셨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교회진리를 알려주실때 이와같은것을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에서 재정지원을 받을 권리가 여섯가지가 있습니다.
1. 사도바울은 사도입니다.
2. 세상에서 대가를 받는것은 당연합니다.
3. 율법이 지지합니다.
4. 다른 사도들도 이러한 권리를 누립니다.
5.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칙입니다.
6.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이 권리를 쓰지 않습니다.
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고전9:12, 개역한글)
<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고 >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어려움중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중에서도 범사에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에서 일하면서 장막을 만들며 돈을 벌어 필요를 채웠습니다.
이유는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애라는것은 전쟁을 할때 군대가 진격할 길이 막힌것을 뜻합니다.
곧, 막 구원받은 사람이 일꾼이 돈때문에 일하는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에서 헌금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러한 선교사들을 재정적으로 돕습니다. 이유는 복음의 장애를 받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 교회에서 헌금을 받았을까요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째서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재정 지원을 받은 것일까요
사도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에서 헌금을 받은것은 마게도냐 교회에서 떠나 있을때 받은 것입니다. 곧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하였을때 받은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갖혔을때에 재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헌금에 대해서 고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헌금 없이도 충분합니다, 나는 헌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헌금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빌립보 교회의 영적 성숙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을 받은것은 극한가난속에서도 넘치를 연보를 한 마게도냐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며 영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째서 재정지원을 받았을까요
사도바울은 이방에서 개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안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곧, 이와같이 일하는 삯을 받는것에 유대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살후3:8, 개역한글)
여기서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는다는 말은 식사제공조차 공짜로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정도로 철저하게 행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전하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하지 않겠다' 는 사도바울의 말은 사도바울의 특별한 은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성 교회가 있는곳에서도 우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때문에 그 권리를 제한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것을 쓸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쓰는것이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성도때문에 나의 권리를 제한할수 있습니까.
만일 다른 성도를 위해서 권리를 제한해야 할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에대한 우리의 생각에 사도바울은 이와같이 대답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9:16, 개역한글)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고전9:18, 개역한글)
여기에 자랑과, 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자랑이라는 단어는 상당수가 즐거워하다 기뻐하다라는 뜻이 번역된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사도바울이 알아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알려주신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복음을 자랑할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의 특징입니다
부르심을 받은자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렘1:5, 개역한글)
예레미야는 태어나기 전부터 선지자로 세우심을 받은 자입니다.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렘20:7-8, 개역한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때마다 반대를 받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고 바벨론의 항복을 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결심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20:9, 개역한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자, 예레미야는 더욱더 고통스러워 합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전9:16, 개역한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하는것도 어쩔수 없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요?
권리를 쓰지 않은 것이 자랑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는것이 우리의 권한이 되고 즐거움이되고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9:19, 개역한글)
고린도전서 9장은 자유가 사랑에 의해서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의 '예' 입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자기의 권한을 사랑 때문에 포기하고 참았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자랑이고 즐거움이라는것을 말합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세상사람들을 위해서 참는것이 무엇인가? 그 참는것으로 우리는 즐거워 합니까?
그렇다면 왜 성숙한 사람과 성숙하지 않은 사람, 교회내에서 분열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3:3, 개역한글)
1.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6:6, 개역한글)
2. 형제들 가운데서 갈등이 심각해져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대적합니다.
나중에는 복음에 장애가 되거나 말거나 하나님과 사람들의 눈을 신경쓰지 않는 경우입니다.
3. 자기의 자유를 사랑으로 제한하지 않을때(고린도전서9장) 교회는 어렵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젖입니다. 곧 성도들이 자라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아무리 성도님들 가운데 적대적인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됩니다.
다른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적대적인 감정을 키워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번째로 내 자유를 사랑으로 얼마나 제한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전8:13, 개역한글)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전9:23, 개역한글)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않고, 복음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고자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자유를 이야기 하면서 할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모든것을 할수 있지만 사랑으로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교회는 모든것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 모든것을 하지 않을수 있는 그러한 절제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모든것을 할수 없다고도 해서는 안되며 모든것을 할수 있다고 해서도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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