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2일 금요일 강사 : 한봉래 형제님
고린도전서 강해 <15>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전8:4-13, 개역한글)
고린도전서 8장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 영역을 어떻게 행할것인가에대한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원칙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자유롭지만 그것을 다름사람앞에서 어떻게 행할것인가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는것에대한 잘못된 두가지 행동은 율법주의와 무법주의가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바리세인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은 영역에 대해서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기 시작하면 바리세적이 되며 율법적이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외적인 적이 아니라 내적인것이 우선됩니다. 중심에서 마음을 어떻게 가지는가가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이 목록을 작성해서 지정하고 규제하는 것은 외식에 빠질수 있는 첫번째 위험입니다.
두번째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므로 성경이 규범하지 않은것은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가 있습니다.
이 자유주의가 고린도주의입니다. 교린도 교회가 이 자유주의를 채택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우상의 제물을 먹겠다는 세가지 근거는
1. 성경에서 규정하고 있지 않다
2.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3. 식물을 먹는것을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지 않는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에 지식에 근거한 행동을 반대합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의 행동으로 인해 거치는 것이 있지않도록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4가지 행동을 절제하도록 합니다.
1. 우상의 제물 2. 피 3. 목메어 죽인것 4. 음행, 이 네가지 입니다.
이미 안디옥 교회에서 정제토록 한것을 고린도 교회에서는 먹어도 된다고 합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죄를 정당화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를 지면 부끄러워 하였으나 이제는 그 죄가 드러나도 지식을 가지고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고 믿는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전8:6, 개역한글)
우리 하나님은 1.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2.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3. 우리가 그를 위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가 우상과 우리 하나님과의 차이입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 너희들이 악할찌라도 자식에게 좋은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나님일까 보냐 >
아버지의 기본적인 뜻은 '좋은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호흡과 만물을 주시며, 구원을 주시며,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상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대체적인 이유는 신의진노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심청전을 보더라도 인당수에 사람을 제물로 바칩니다.
항상우상은 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화를 냅니다. 우리의 죄중 하나를 집어 혼내는 것이 우상이기에 사람은 제물을 바치며 안전을 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것을 주십니다.
그렇기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두번째, 우리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신 분입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위에것을 찾으라,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우리는 세상것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자들로, 하늘나라와 하나님과, 주님의 약속과 계획의 놀라움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상에 속한것은 전부 이세상의 부귀 영화에만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필요가 없어지면 찾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세상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급이십니다.
세번째, 우리가 하나님을 위합니다.
이말은 우리의 희생과, 노력과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야 합니다.
우상은 눈과귀가 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사람사이에는 서로가 끌려가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소통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소통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것이 우리의 양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 많은것을 인도하십니다.
어떤 책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읽은적이 있습니다. 한 아들이 대도시의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을 대도시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이성을 약화시키고 너의 감정을 강조하는 것을 조심해라, 예를들면 술을 먹지 마라.
술을 마시면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해지고 감정적이고 충동적이 된다.
너의 양심을 무디게 하는 일을 하지 마라.
너의 영성을 둔화시키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양심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우상은 이러한 것이 없습니다. 우상을 믿는 사람들이 양심이 민감해지고 이성이 날카로워지고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양심으로 인해 가책을 느끼고 돌이키게 되고 평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양심을 약화시키는 길을 간것입니다.
양심은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더라도 반복적으로 이일이 반복할때 양심은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나중에는 양심에 화인을 맞을수 있고 양심없는 사람이 될수도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겟습니다. 여기에 갓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우상의 제물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는 그 우상의 제물에서 돌이키고 주님안에서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여기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됩니다.
그는 지식적으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된다고 여기지만 그의 양심은 아직 우상의 제물을 먹는것을 죄로 여깁니다.
그의 양심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것을 소화시킬만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면 그는 죄를 짖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한사람을 구원하신다면, 처음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매우 민감한 양심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을 부모들은 간섭하고 보호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차츰차츰 자라가면 점차적으로 자유를 줍니다.
만일 우리가 연약한 사람을 물가로 가도록 하고 인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죄를 짖는것입니다.
세번째는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식물은 하나님앞에서 우리를 세우지 못합니다.
음식을 먹는다고 우리에게 영적으로 유익이 없고, 먹지 않는다고 영적으로 되는것도 아닙니다.
한가지 근거를 들자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기전에 꿈에서 하늘에서 부정한 동물들이 보자기에서 내려오며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교훈은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7:14-16, 개역한글)
음식은 사람을 더럽게 못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악한 것이 더러운 것입니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막7:18-19, 개역한글)
주님은 친히 모든 식물이 깨끗하다 하십니다.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13:9, 개역한글)
음식을 통해서 영적인 유익을 추구하는 경우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음식을 통해서 통제되지 않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안먹느냐는 그사람의 영적인 부분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러므로 먹는다 였고,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다른사람을 의식해라 라고 합니다.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8:10-12, 개역한글)
멸망은 죽는다는것이 아니라 죄를 집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관하시는 것음 음식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있는 다른 형제입니다.
이 형제를 위하여 주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없이하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돌아가셨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변화하도록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다른 형제가 그것을 보고 따라 먹으면 그 형제가 그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 그 형제는 믿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짖는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짖는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는 형제에게 죄를 짖게 할뿐아니라 주님께 죄를 짖는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인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갈때에 주님은 바울앞에 나타나셔서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또한 결산할때에 주님은 '내가 목마를때에 나에게 물을 주었다" 라고 하십니다. 곧 작은 소자에게 한것이 주님께 한 것으로 주님은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사람의 자유가 사람과 충돌할때, 우리는 이 자유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색지대를 통과하는 원리는 지식이 아닌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전8:7, 개역한글)
< 그러나 이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진리는 모든 사람이 누릴수 있는 진리여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올바른 가르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런 에베소를 향해 주님은 가장 큰 위협을 하셨습니다 " 네 촛대를 옮기리라" 가장 무서운 경고입니다.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9-10, 개역한글)
또한 사랑은 반드시 지식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합니다. 지식은 진리로 바꿀수 있습니다.
만일 사랑이 지식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사랑으로 인해 허물게 됩니다. 곧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사랑을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과 사랑은 함께 있어야만 서로에게 기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지식을 근거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것에 반대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 심지어 사도들과 장로들이 결정했던 결정을 번복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항상 감사하는 관계입니다.
또한 만물이상의 관계를 추구하며 양심을 따라 변화된 인격으로 주님을 위하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음식에 상관하지 않지만 음식을 보고 있는 형제를 위하여 고려해야 합니다.
약한 양심을 가진 형제를 위하여 우리는 삼가야 합니다.
그 형제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보다, 성령님보다 우리가 높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때 이것이 사랑인가, 이것이 다른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가, 나의 자녀들이 이와같이 행동해도 좋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말씀위에서 성령님께서 자유롭게 운행하시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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