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서 06. 계속되는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한 신랑의 찬사 > 2014년 / 정형모 형제님
오늘 아가서 4장 7절부터 문맥적으로 저희들이 5장 1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아 4:7-16).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아 5:1).
주님께서 오늘도 저희들이 읽은 말씀에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이 어제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들에 대해서 찬사를 보낸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찬사를 들은 신부는 그 마음 속에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희미함, 이런 것에 대해서 더욱 더 느끼고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이 말씀은 물론 우리가 2장 마지막 부분에서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 돌아와서 베데르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는 말씀과 연대해서요. 우리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동시에 그때까지 내 마음은 주님의 죽으심과 또 주님의 생애를 통해서 나타내 보이신 아름다운 향의 내 마음이 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소망, 또 그의 의지를 말씀한 것이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칭찬을 들었을때요. 그 마음 속에 부족을 느낍니다. 자기 마음 속에 아직도 환한 것이 아니고 아직도 동이 틀것 같은 희미함, 그것을 그는 느끼고 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위대한 은혜, 이 아름다움에 감탄한다고 하는 것은 참 기이한 것이 아닙니까? 저희들이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단과 동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저희들이 범죄하기 훨씬 전에,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들을 택하시고 아버지와 아드님의 언약 가운데 저희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이 위대한 계획을 따라서 저희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이것도 저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죠. 저희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하신 저희들을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저희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희들의 모양이 하나님의 아드님과 점점 닮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때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그리고 저희들을 찬양한다. 저희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저희들에게 매력이 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은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죠. 놀라운 은혜입니다. 저희들을 구원하신 것도, 또한 저희들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은혜도 모두가 다 놀라운 것입니다. 이 은혜의 말씀을 들었을때 신부가 그 마음 속에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지요. 그 말씀이 있고 난 다음에 오늘 읽은 7절 말씀 이하에서는요. 다시 한번 신랑이 신부를 향해서 아름다운 찬사가 계속된다. 이것 참,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사랑' 신부를 부를때마다 '나의 사랑'이라고 말하죠. "너는 순전히 어여뻐" 이 순전히 어여쁘다는 말은요, 전체로 어여쁘다는 말입니다. 전체로 어여쁘다. 이 말씀을 우리는 4장에서 보게 됩니다만, 5장에 가면요. 우리는 신부가 신랑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얘기하는, 선포하는 그런 말씀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그때 이 신부는 신랑께서 자기에게 사용해 주셨던 그 말씀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 위에 뛰어난다" 그리고나서 저 끝에 가서는 "그 전체로 사랑스럽다" 이런 말씀을 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언어 구사는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주님과 교제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가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게 될 때에, 우리의 언어도 그렇게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희들 가운데 고안하신 계획이십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다" 이 말씀도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과연 이 신부가 아무 흠이 없을까요? 우리는 이 에베소서에서 있는 말씀에서요, 우리 주님께서 저희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뜻을 잠깐 보겠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여기 25-27절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25절은 과거에 어떻게 일하셨는가,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이것은 과거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죠. 놀라운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그런데 26절 말씀에서는요, 현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하고 계시는가?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물로 씻습니다. 우리를 좀더 거룩하게,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27절 말씀은요, 이렇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변해가고 아름다워져 가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이 오시게 될때 어떻게 될까? 이 미래에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흠이 없고 점도 없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만드셔서 이제 이 교회를 증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입니다. 따라서 이 신랑이 신부보고 흠이 없다, 라고 하는 말씀은 흠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소원하시고 기대하시고 또 지금도 역사하는 것, 과거에 우리를 위해서 주님 돌아셨고 현재는 구속받은 우리를 정결케 하고 계시고, 또한 미래에는 주님께서 마음 속에 가지고 계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를 완전히 정결하고 흠이 없고 또함 조금도 티나 주름, 이런 것이 전혀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우리를 증정해 드릴 그런 계획을 주님께서는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신랑이 신부를 향해서 아가서 4장 7절 말씀에서 "너는 아무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신랑께서 가지고 계신 계획 속에서요. 그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 놀라운 은혜죠. 우리 주님은 저희들을 향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소원, 인품적으로, 성품적으로 주님과 같이 변하는 것, 그것이 소원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과 같이 충성되이, 헌신적으로 주님 앞에서 결단 가운데 주님을 계속해서 섬기는 것, 놀라운 헌신, 그것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소원하고 계시죠.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소원하고 계신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소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물론 우리에게 능력도 주십니다. 도우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가능케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소원,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사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소원에 대해서도 귀히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의 부족한 것에 대해서 항상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주님의 소원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 지기를 우리는 소원하는 것이죠.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아 4:8).
여기 8절 말씀에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자" 2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씀했죠. 여기에 "함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는 저 고산에 올라가서 레바논의 산에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우리가 함께 가자, 이것은 고산의, 정상의 경험을 함께하자는 겁니다. 주님께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향해서 이와 같은 경험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호칭은 "나의 신부"입니다. 새로운 용어가, 호칭이 나옵니다. "나의 신부" 라고 하는 말은 이 아가서에서 여섯번 나오는데요. 이 4장과 5장에 여섯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4장 8, 9, 10, 11, 12절 계속해서 연이어 "나의 신부" 나의 신부라고 하는 것이 영어에서는 '배우자'라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만, '나의 신부' 자신의 파트너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함께 나오는 호칭이 있는데 그 다음절에 보면 "나의 누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신부" "나의 누이" 이 두가지 호칭은 4장에서 참으로 새롭게 이제 나타나는 호칭으로서요. 이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가운데 이 신부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 이 아가서에서 레바논이 참 자주 나오죠. 레바논, 우리는 지중해가, 대해가 있고요. 이 레바논 지역, 옛날로 말하면 두로와 시돈 지역, 거기 바다편 가까운 쪽이 레바논 산맥이고요. 그 다음에 그곳과 평행하게 좀더 내륙으로 달리고 있는 산맥은 항레바논 산맥이죠. 이 레바논 산맥으로, 산 꼭대기로 나와 함께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요청했어요. 놀라운 특권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은 참 놀라운, 저희들에게 기회입니다. 특히 이 경험은 높은 곳에서의 경험입니다. 독특한 것은 정상에서의 경험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전에 높은 곳에 올라갔었죠. 거룩한 산입니다. 베드로는 그곳에 가서 했던 경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 당시에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심 내용을 우리는 거룩한 산에서 들었다. 베드로는 평생 그와 같은 경험을 잊을 수가 없었고 서신에서에서 그는 분명히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랑은 높은 산에, 이쪽이 항 레바논 산맥이라면 저쪽은 레바논 산맥입니다. 저쪽 편에는 대해, 지중해가 있습니다. 이곳으로 가자. 술람미 여인의 고향은 갈릴리죠. 갈릴리에서, 레바논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 헤르몬입니다. 헤르몬은 거의 3천미터죠. 그 꼭대기에는 이 헤르몬뿐만 아니라 레바논 산맥의 많은 산들이 만년설로 덮여 있습니다. 이 갈릴리 지방에서 저 북쪽을 보면 헤르몬산을 이 여인을 항상 바라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이 여인을 향해서 나와 함께 높은 산에 가서 거기서부터, 산에서부터 함께 가자고 초청했어요. 그러면서 세 봉우리를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마나, 그 다음에 스닐, 헤르몬, 이 세 봉우리, 아마나는 제일 위에 있습니다. 아마나에서 아바나강이 흘러 내려옵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치료하러 이스라엘에 내려왔죠. 선지자가 너는 요단강에 가서 잠그라. 그는 화를 냅니다. 아니 내 나라에, 이 다메섹강에 아바나와 바르발과 같은 멋진 강이 있는데 그런 것을 놔두고 요단강을 가냐, 그런 말을 했지요. 거기에 나오는 아바나강, 그것은 아마나에서부터 시작하는 강입니다. 조금 내려오면 스닐이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북서쪽에 있는 봉우리입니다. 그리고 이 항레바논 산맥의 가장 남쪽 끝단에 오면 헐몬산, 헤르몬산이 있습니다. 이곳을, 이 정상을 함께 가자고 하는 겁니다.
이 산에 올라가서 뭘 할까요? 솔로몬은 통치자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다스리는 왕국이 있습니다. 이 왕국을 높은 산에서 아래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 신부도 같이 가서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업, 위대한 영지, 이것을 높은 곳에서 바라본다. 솔로몬은 통치자로서요. 자기의 사랑하는 자와 함께 그것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이곳에 올라가서 그곳을 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참 놀라운 경험이죠. 일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일 겁니다. 정상의 경험은 놀라운 겁니다. 우리가 때때로 골짜기 경험을 합니다. 정상의 경험을 할때가 있어요. 골짜기 경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정상의 경험을 하게 될때, 또 우리는 무엇을 배울까? 골짜기 경험에서 우리가 실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상의 경험에서 우리는 오만해 질수 있습니다. 다 위험이 있습니다. 정상의 경험에서 여기 위험한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정상 꼭대기에 올라갔을때 가장 가까운 곳에 사자굴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표범산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상의 경험을 하게 될때요. 우리 마음이 교만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위험, 그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 우리는 주님과 함께해야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우리는 마음이 겸손해야 됩니다. 조금 전에 여인이요, 4장 1-5절까지의 신랑이 칭찬을 쭉 했어요. 그랬더니 신부는 어떻습니까? 신부의 마음은 교만해졌습니까? 아니요. 자기의 연약, 자기의 부족, 그것을 느낍니다. 그것을 느꼈을때 우리 주님께서는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다" 이렇게 말씀해 주죠.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닮아서 겸손하게 될때, 온유하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를 높이십니다. 거기는 안전한 곳입니다. 우리가 겸손해지는 곳은, 겸손하게 될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는 것, 이것은 우리가 모든 마음을 다해서 경계해야 될 일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이 표범과 이 사자는 언제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오는가? 우리의 마음이 오만해지게 될때, 교만해지게 될때, 우리는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은 얼마나 여러번 우리에게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여러차례, 겸손한 자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서요, 정상의 경험에서는 위험이 따르고 있다. 가까운 곳에 위험이 있습니다. 우는 사자가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함께할때, 우리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 주님과 함께하는 이 여인이 주님과 함께 걸어가고 정상의 경험을 해도 주님 가운데서, 교제 가운데서, 겸손을 유지하게 될때, 안전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은 안전합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아 4:9).
"나의 누이, 나의 신부" 처음에 나의 신부라고 8절에서 말씀했지요. 그리고나서 9절에 와서는 새로운 호칭, "나의 누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누이라고 할때, 신부라고 할때, 이것은 뭘 의미할까? 신부라고 하는 것은 신랑의 파트너입니다. 그는 애정적으로 정열적인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이라고 하는 것은 순결합니다. 순결한 의미를 가지고 있죠. 우리가 모임 안에서 자매님을 대하게 될때, 어떻게 대한다고 말씀했습니까? 누이같이 대하라고 했어요. 거기에 순결함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혈육관계에 관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신랑이 신부를 부르게 될때, "나의 신부야" 이것은 그의 아내입니다. 그의 파트너입니다. 그런데 "너의 누이야" 라고 할때, 그것은 혈육관계, 물론 이것은 혈육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 담긴 순결이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잘 배합이 되었다. 균형이 잡혀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저희들을 신부로 삼으셨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어요.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는 바로 나의 신부, 나의 누이라고 말씀하시는 그런 관계입니다.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이거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신부가 신랑의 마음을 다 빼앗았다. 어떻게 빼앗았습니까? 아첨으로요? 아닙니다. 호리는 말로? 아닙니다. 여기에 신랑은 4장 1절서부터 계속해서 신부를 칭찬하게 될때, 저희들이 어제도 본 것처럼 이 신부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영적인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신랑의 마음이 빼앗겼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죠. 주님께서 저희들을 바라보시게 될때, 마음이 빼앗기시고 계신가, 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요. 어떤 면에서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빼앗을수 있을까? 다른 면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빼앗을수가 없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마음 속의 그 기뻐함을 심어줄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 마음을 완전히 우리가 송두리째 빠앗을 수 있을까?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우리가 주님께서 소원하시는 바, 그 아름다움을 주님을 통해서 얻게 될때,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다." 두가지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 우리는 어제 신랑이 신부를 바라볼때 아름다움이 적어도 일곱가지의 매력 포인트가 있었는데 그 중에 제일 첫번째 것이 무엇이었죠? 눈이었습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아 4:1).
이것이 제일 첫번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이 신부를 바라보며 자기 마음이 다 송두리째 빼앗겼다라고 하실때,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 눈이 아름답니다. 보는것이 아름답습니다. 누구를 봅니까? 신랑을 보죠. 신랑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야, 영적으로 우리는 어디를 보고 있을까?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 그분에게 모든 시야가 고정이 되어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도 "내 마음이 빼았겼다."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또 한가지는 "네 목의 그술 한 꿰미로 내마음을 빼앗았구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1장에서도 비슷한 말씀들이 나왔죠. "목의 구슬꿰미로" 우리는 아가서에 나오는 이런 여러 비슷한 말씀들을 보게 될때, 이 말씀들은 뭘까?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단장할까, 라고 하는 점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 2:9-10).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권면하시는 것은, 단장을 어떻게 해야 될까? 그것을 아가서가 우리에게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고 우리 마음 속에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는 것들, 그것은 여러가지 아름다운 보석과 금 사슬과, 금에 은을 박은 것,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가 다 우리에게 영적인 현실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리의 단장, 영적인 단장은 어떤 것일까? 여기 분명히 땋은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라. 아가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림, 그것은 그림이다. 그 그림 속에 담겨있는 영적인 현실은 바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어떻게 합니까? 아담한 옷을 입고, 그 다음에 염치와 정절로 단장한다고 했습니다. 염치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염치라고 하는 것은 꼴사나운 것에 대해서 도덕적인 거부감, 이게 염치입니다. 모양이 사나운 것, 보기가 흉한 것,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일히 설명하지 않아도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께서 내 마음 속에 계신 우리들이라면 영적인 분별로 대단히 간단하고 단순하게도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아담한 것인지, 어떤 것이 보기가 흉한 것인지, 그래서 염치라고 하는 것은요. 보기 흉한 것에 대해서 내 마음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이것이 염치입니다. 그래서 보통 염치가 없다고 할때, 흉한 것 받아들인다 그 말이죠. 또 하나는 정절, 정절이라는 말은요. 그것은 건전한 마음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 헬라어 말 자체가 '건전한 마음이다.' 다른 말로 하면 건전한 판단이다. 그 말입니다. 건전한 판단,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령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건전한 판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적인 욕구, 이런 것들이, 그와 같은 건전한 판단에서는 육체적인 어떤 욕구나 이런 것들, 욕심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절제한다, 그 말이예요. 그래서 정절입니다. 염치와 정절로 단장한다. 이 단장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것이죠. 그것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나 이구동성으로 우리의 단장은 어떤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죠. 그래서요, 저희들이 본문으로 돌아와서요. 이 신부가 신랑의 완전히 송두리째 빼앗은 것은, 보는 것, 한번 보는것, 그리고 또 하나는 목의 구슬이다. 단장이다, 그 말입니다. 그가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 대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라고 하는 그 모습, 그것이 마음을 빼앗았어요. 또 하나는 그의 내적인 도덕적인 영적인 단장, 그 단장은 아담하고 그 단장은 영적으로 세련됬다. 영적으로 고상하다, 그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 신랑은 신부 때문에 마음이 완전히 빼앗겼다. 참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이렇게 자주 호칭이 같이가죠.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아 4:10).
우리는 1장 제일 처음에, 아가서 시작에서 신부가 신랑을 향해서요.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 이런 말을 했어요.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아 1:2-3).
신부가 신랑을 바라보게 될때 발견한 것은 사랑이 포도주보다 훨씬 승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쏟은 향기름과도 같다. 이렇게 표현했지요. 그것은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이름, 그것을 보게 될때 포도주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향기름같이 너무나 아름답다. 이것을 이미 이야기 했어요. 그것을 이야기 했다고 하는 것은 신부가 신랑을 통해서 그 모양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습니까? 4장에 와서는 신랑이 신부의 모양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 모양이 신부가 신랑의 아름다운 것을 이야기하던 것과 비슷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신부가 신랑의 아름다움을 봤는데요. 교제하면서 신랑의 아름다움이 이제 자기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자기에게 온 거예요, 이제 신부의 것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신랑은 그것을 보고서는 여기서 감탄하지요. 매력을 느낍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실때, 주님이 우리 개인을 보실때, 주님이 우리의 가정을 보실때, 주님이 우리의 모임을 보실때, 주님께서 마음이 빼앗긴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가 소원하는 바입니까? 우리는 그냥 구원받고 이 세상에서 대충 대충 살아가는 삶이 아니고요. 단 한번 있는 인생, 단 한번 사는 이 생애, 단 한번 있는 이 기회, 나를 사랑하신 그분의 마음을 내가 송두리째 빼앗고 그렇게 가는 삶, 그런 것을 아가서는 우리 각인에게 소망하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번 있는 생애,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 분의 마음을 내가 확 뺏고 우리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자, 라고 하는 생각은 없습니까?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마음 속에요, 진정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소원하는 바입니다. 그냥 평범한 삶 아니고요. 그냥 적당히 살아가는 삶 아니고, 구원 받았으니까 하늘나라에 갈거다. 그런 생각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는데 그 정열적인 사랑, 그 위대한 사랑, 인생뿐만 아니라 영원을 통해서 그 사랑을 아무리 우리가 이야기한들, 다 평가할 수 없고 다 측량할 수 없는 이 위대한 사랑을 우리가 받았는데, 우리로 그분께서 소원하시는 그것에 대해서 그 소원을 들어드리고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송두리째 뺏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 주님의 모습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닮아갈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교훈의 말씀 아니겠어요? 여기 이제 계속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아 4: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여기 '내 신부'라 말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는 무엇을 지적합니까? 아까는 눈을 지적했는데요. 여기는 입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제 저희들이 생각했던 일곱가지의 신부의 아름다움 가운데 입술은 중앙에 있습니다. 네번째입니다. 입술, 이것은 언어입니다. 표현입니다. 우리 주님은요,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없었어요. 하나님을 우리는 욕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욕된 것이고 또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찬양은 물론 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하나님께서요,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고 우리로부터 표현을 듣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이죠.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표현, 무엇을 말하는가? 이 입술로부터 무엇이 나올까? 여기 신랑이 매료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요.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그 입술에서 꿀 방울이 떨어진다. 이 꿀방울이 떨어진다는 말, 우리가 성경에서 조심스럽게 봐야 될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잠언 5장 말씀을 보면 여기는 꿀 방울이 부정적인 꿀 방울입니다. 잠언에는 현숙한 여인이 있는가 하면, 음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잠언 5장에서는 음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잠 5:3-4).
우리는 이 지혜서에서요, 솔로몬이 어떻게 우리가 분별할까? 이 언어를 우리가 어떻게 분별할까. 그것이 아무리 미끄럽고 아무리 매끄럽고, 아무리 달콤해도 음녀로부터 나오는 말이라는 것은 거기에는 반드시 마지막에 쑥같이 쓰고 칼같이 날카롭다. 고통스럽다.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죠.
그러나 아가서에서 지금 말씀하고 있는 이 신부의 입술, 그 신부의 입술의 아름다움, 거기서 꿀 방울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 신부의 이야기를 들을때, 그 표현을 듣게 될때 그 마음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주님께 즐거움을 드리는 겁니다. 주님께 어떻게 즐거움을 드리겠습니까? 우리의 혀를 사용해서, 우리의 입술을 사용해서 어떻게 즐거움을 드리겠어요?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잘 살펴보고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우리 마음 속에 감동이 되고요. 그 아름다운 매력을 우리가 소화하고 그것을 주님에게 돌려드리면서 표현하는 것, 그것 주님께서 우리로부터 듣기 원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를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를 지으신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이 세상에 나가서 하루종일 일하고 돈 벌고, 그렇게 어덯게 살고, 자식 먹여 살리고, 또 우리의 커리어를 위해서 열심히 나가고,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창조자이시요. 예배 받으시기 합당한 분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모든 전인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릴수 있느냐, 라고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로부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지성으로부터 나오는, 그리고 그 모든 전인으로부터 나오는 이 예배를 우리 하나님께서는 듣기를 원하셨다. 사단은 물론 그것을 다 파괴해 버렸죠. 우리로 하여금 예배할 수 없는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는 타락했어요.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절대로 중단하지 않았고 사실은 이 모든 일,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가 어떻게 더 고차원적으로 죄로 인해서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타락한 사람들을 다시 구원하시고 구속하시고 그들의 입술로부터 어떻게 놀라운 차원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만 얘기할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창조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속하셨느냐, 라고 하는 위대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주님을 어떻게 우리가 예배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창조때부터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관심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구속받은 이 여인, 이 사랑하는 이 여인으로부터, 그 입술로부터 꿀 방울이 떨어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맛보기에 너무나 달콤한 것, 그것은 예배입니다.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예배의 말씀, 주님께 찬양을 올리는 것.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만큼, 무엇을 해 주셨는가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격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는 아닙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떤 분이시냐? 그분 자체가 어떤 분이시냐? 그분이 우리에게 뭘 주셨느냐가 아니라 그분 자체가, 그분이 어떤분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말씀드리는 것이죠. 우리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예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신랑은 그 얘기를 들었을때 너무나 기뻤습니다.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입술과 혀, 이것은 주님을 찬양하는데,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기 위해서는요. 우리는 많은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지식만 있어서는 안되고 우리 마음 속에, 엄청난 마음 속에, 심령에 감탄과 감격이 있어야 됩니다. 또한 우리 마음에 그 사랑으로 녹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넘쳐야 되는 것입니다. 필객의 붓처럼 우리 말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우리는 조금 전에 이 신부가 신랑과 함께 어디갔다 온지 알고 있죠. 높은 산에 갔어요. 레바논 산으로 갔어요. 레바논 산에 가면 거기는 백향목으로 가득합니다. 그 산은 창조 이후에, 산 속에 백향목의 향기가 아예 베어 있습니다. 거기를 지나게 될때, 당연히 그곳은 향기로 베이죠. 백향목이라고 할때, 백향목의 아름다움, 그것은 위엄입니다. 기상입니다. 그 나무를 보게 될때, 그 나무의 위엄, 레바논 국기를 보면 레바논 국기에는 백향목이 담겨 있습니다. 거기의 위대한 자태, 기상, 그리고 그 나무가 멋지고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장엄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아름다운 향기를 내고 있다. 절대로 썩지 않는다. 부촌에서요, 지중의 기와를 백향목으로 합니다. 어느 부촌에서는 절대로 다른 기와를 쓸수 없도록 법으로 만듭니다. 그 정도로 백향목은 썩지 않습니다. 향기가 있습니다. 자태가 아름답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을 말씀해주고 있죠. 주님을 향한 위대한 향기, 위대한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이 여인의 의복에 베어있다. 의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행실입니다. 우리의 걸어가는 발걸음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라고 하는 삶의 간증입니다. 옷은 간증입니다. 우리가 살아갈때 개인적인 간증이 있습니다. 우리 모임의 간증이 있습니다. 이 모임의 간증, 개인적인 간증은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증거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왜 당신은 이분을 믿는가, 라고 묻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인센티브입니다. 이옷의 향기, 그것은 레바논입니다. 높은 곳이예요, 형기가 가득한 곳이예요. 우리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셨지요. 아름다운 향기를 가지고 오셨지요. 우리는 그분을 믿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간 모든 삶,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동, 그분의 결정, 그리고 그분의 충성,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보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의복에, 우리의 간증에 베어 있어야 되겠다. 또 하나 있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 4: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여기서는 동산이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은요, 동산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셨을때 제일 처음 동산에다 우리 인간을 두셨습니다. 에덴 동산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동산에서 쫓겨났어요. 동산을 잃어버렸어요. 다시 인류로 하여금 그 동산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어요. 이 세상에 살게 될때, 주님께서는 동산에 가셔서 자주 기도하셨어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올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죠.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후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의 죽은 시체는 동산에 장사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 동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동산, 그것은 하나님의 프로그램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관심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지으신 동산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동산에서 쫓겨났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동산으로 들어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슬픔을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에덴동산에는 나무도 있고 강도 있었어요. 거기에 비손과 기혼과 힛데겔과 또 유브라데, 네 강이 흘렀지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앞으로 위대한 동산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생명나무가 있어요. 거기에 강이 흐릅니다. 거기에 놀라운 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이 동산에 들어가서 살게 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는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을 항상 동산으로 비유하고 있어요. 이사야서 58장 말씀을 보면요. 그의 백성들을 가리켜서 "물댄 동산"이라, 예레미야서 31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물댄 동산"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백성들은 물댄 동산입니다. 하나님은요, 그의 백성들이 물댄 동산과 같이 청청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잉예요. 우리가 범죄함으로 쫓겨나서 건조한 곳, 사막에 가서, 고독한 곳에 가서 살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이끌어서 물댄 동산과 같이 만드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아가서에 보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곳에는 "잠근 동산"이 있습니다. 잠근 동산, 이 동산은 잠근 동산이예요. 다시 말해서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또는 짐승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동산이다. 잠근 동산이예요. 왜 잠근 동산일까? 사실 이 동산은 신부르 가리켜 말하는 거예요. 신부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이제부터 말씀해주고 있어요. 신랑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신랑이 신부를 바라보게 될때, "당신은 동산이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속에 내가 들어가서 나는 여러가지 것을 즐길 수 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개인에게, 우리 모임에 찾아오셔서 주님께서 여러가지 즐거운 것들을 누릴 수 있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행복이죠. 우리는 이 신부를 통해서 이제 그것을 보겠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 4:12).
이건 다 열려 있는게 아닙니다. 봉한 겁니다. 닫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근 동산입니다.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어요. 사랑하는 이분께서요. 이 동산은 신부인데요. 신부가 "이것은 나의 동산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이 말씀을 쭉 읽어보면 이것은 신랑이 "이것은 내 동산이다."이렇게 말합니다. 이 동산 안에는 울타리가 있습니다. 이 동산에는요, 샘과 우물이 있습니다. 이 동산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이 동산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향기로 가득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우리가 살펴 보겠습니다. 이 잠근 동산, 왜 잠근 동산일까? 우리는 주님에게만 속한 것이고 주님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누구도 이 동산을 즐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잠근 동산이예요. 오로지 주님만 이곳에 들어오십니다. 주님만을 위해서, 주님의 전용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피로 사셨죠. 값주고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요구하실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요구에 응하게 될 때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담이 아니고 그것은 행복입니다. 왜?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울타리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잠근 동산이라고 할때 이것은 울타리를 빼고서는 말할 수 없어요. 울타리는 뭘 말하고 있을까? 첫째, 이 동산은 소유자에게 철저히 속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울타리가 쳐져 있어요. 담이 있어요. 이 담 안에 모든 재산은, 그리고 그 담 안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전체가 다 그분에게만 속한 것이다. 이것을 말씀해 주고 있어요.두번째, 왜 담이 있을까? 이 안에는 많은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향목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샘과 물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 아름다운 것들을 밖에서 온 것들이, 짐승이나, 또는 도적이나, 악한 자나, 이 안에 들어와서 이것을 파괴 하거나 무너뜨릴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잠근 동산입니다. 세번째, 왜 담이 있을까? 이 담이 있는 것은 주님께서, 신랑께서 이 안에 들어오셔서 신부와 친밀한 교제, 대단히 사사로운 그 교제를 누리는데 조금도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은 잠근 동산이다. 신부가 전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내 사람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 이런 부탁의 말을 우리가 많이 들었지요. 왜 그렇습니까? 신랑과 신부, 신부와 신랑 사이의 이 교제가 대단히 친밀하고 이것은 대단히 사사로운 교제입니다. 우리의 주님과의 교제는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한 교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그런 교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사사로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야 하는 그와 같은 교제입니다. 신미한 교제입니다. 사랑의 교제입니다. 따라서 외부에서 여러가지 산란한 것들, 우리의 마음을 부요케 하는 것들, 이런 모든 것들은, 방해꾼들 다 차단해야 된다. 이런 부탁을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습니까? 이제는 부탁이 아니라 아예 담을 쳐버렸어요. 그리고 이 주님께서 오셔서 주님만 누릴수 있고 즐길수 있고 그런 가운데 아름다운 교제를 누리기를 원한다고 하는 의지가 여기 철저히 담겨 있는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나 우리와의 친밀한 교제를 질투나게 원하시는가? 그것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알수 있습니다. "잠근 동산" 우리 주님은 질투의 하나님입니다. 질투나게 우리와만 교제를 하기를 원하신다. 세상 아니예요. 어떤 대상도 우리 주님과 교제할 수 없어요. 그런 대상으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에게 우리의 모든 관심과 우리의 모든 생각을 집중해서 주님과 교제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예배에서, 봉사에서,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을 위해서 나 자신을 바치는 일에 대해서,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그렇게 가야되지 않는가?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입니다.
네게서 나는 것은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석류가 있죠. 다양한 과수들이 있습니다. 고벨화, 나도초, 나도, 번홍화, 창포, 계수, 유향, 몰약, 침향, 다양한 향품, 이 많은 향들입니다. 여기 제일 첫번째 석류가 나오죠. 4장 1-5절 사이에 신부의 아름다움 중에서 석류는 뭐였어요? 뺨과 관련 있어요. 뺨은 신부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오셔서요, 우리가 잠근 동산이거든요. 우리 개인이 주님 앞에 잠근 동산입니다. 우리 모임이 주님 앞에 잠근 동산이예요. 우리 모임을 아무렇게나 문을 열고 아무나 오게 그렇게 할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요, 시장이 아닙니다. 이곳은 아무나 와서 주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잠근 동산이다, 기억해야 합니다. 이 잠근 동산에 주님께서 오셔서 누릴 것들이 있습니다. 그 누릴 것들에 대해서 여기 많은 목록이 기록된, 제일 첫번째,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모임에게 와서 주님께서 발견하고 즐기는 것 중에 제일 첫번째 것이 무엇입니까? 석류입니다.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이런 아름다움을 보여드린다. 도덕적인, 영적인 아름다움, 생명력을 통한, 그분의 부활을 통한, 그 부활을 우리는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 마음 속에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위대한 은혜, 이 부활의 생명으로 인해서, 석류와 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다움, 그것을 주님 앞에 드러냈는가? 그 힘을 가지고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주님이 오셔서 또 발견하는 것은요, 각종 아름다운 과수입니다. 그냥 과수가 아니고 아름다운 과수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과수원이 아니예요. 거기에는 아름다운 과수가 있어요. 이 과수라고 하는 말은 그냥 나무가 아니고요, 열매를 맺히는 나무죠. 우리 주님께서 이곳에 와서 많은 열매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계속해서 맺히는, 우리는 그런 과수, 많은 열매를 맺혀야 되지 않겠는가? 그것을 보실때 주님께서 얼마나 들어오셔서 즐거워 하실까? 형제자매님들, 이것을 우리는 그저 상징이나 아름다운 심상으로만 보고 넘길 것이 아니고요. 이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개인의 삶이고 우리의 모임의 지체로서의 교제 가운데 삶입니다.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특권이고 책임입니다.
세번째요, 고벨화. 우리는 1장 말씀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그 아름다움을 이미 토했어요. 그 아름다움을 여기서 말씀했는데, 그 아름다움이 여기 신부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고벨화 송이의 아름다움, 그것이 나타내는 향기, 그것을 우리가 이미 보았는데, 이것이 이 잠근 동산에 안에 나타나는 향기와 아름다움입니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은 나도초예요. 나도초라고 할때,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나도라고 하는 것은 다른 성경에 보면 '스파이크나도'라고 하고 '스파이크'라고 하는 것은 접두사로 '순수한 액체'라는 뜻인데 100% 순수한 액체의 나도향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 나무, 그것을 생각할때, 우리는 베다니의 마리아를 기억하죠. 그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접대하고 예배 드리기 위해서 그는 그 모든 것을 헌신해서 옥합을 샀지요. 옥합 안에는 나도 향이 가득 들었고, 그것이 깨지며 주님께 예배를 드리게 될때 그 향은 베다니 집의 온 집에 가득했다는 것은 요한복음 12장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나도, 값비싼 향입니다.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나오는 향입니다. 그 향을 베다니에서는 온전히 주님 앞에 다 드렸어요. 그와 같은 값비싼 향이, 이 나무 안에 있다. 그런 향기가 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바로 이 향기를 즐기신다. 저희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이와 같은 향, 사실 이 향은 주님에게 있는 향입니다. 주님이 가지고 있는 향입니다. 주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 담겨있는 위대한 향입니다. 우리는 그 향을 우리가 맡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향을 주님께 도로 드리는 겁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알고 그것을 주님 앞에 도로 드린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십사 장로가 면류관을 주님께 도로 드리죠. 우리는 주님 앞에 헌금을 할때,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리게 될때, 에너지를 드리게 될때, 시간을 드리게 될때, 또한 재정을 드리게 될때,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게 될때,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도로 돌려 드리는 것이죠. 여기의 모든 매력, 마찬가지 입니다. 이 위대한 매력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죠. 나도초, 그리고 또 다시 나도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이것들은, 나도는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적인 강조법입니다. 나도는 그렇게 중요하다. 그것은 예배와 관련해서 중요한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기 와서 무엇을 즐길까? 예배를 즐깁니다.
우리는 석류와 관련해서요, 아까 이 여인의 아름다움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한가지 더 보충해서 말씀드린다면 석류는 제사장의 의복 밑에, 금정과 석류, 이것이 교대로 달려 있어요. 그 다음에 석류라고 하면, 솔로몬의 성전에 앞에 두 기둥이 있죠. 현관 앞에 두 기둥이 있습니다. 야긴과 보아스, 이 두 기둥은 위에 머리가 있습니다. 그 머리에 네트가 있습니다. 그 머리의 두줄에 석류가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석류가 또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가나안 땅,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가리켜서, 신명기 8장에서는 그 땅은 무화과의 땅이다, 그리고 석류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에 석류는 무엇을 말합니까? 제사장과 관련 있어요. 성전과 관련 있어요. 석류는 예배와 관련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곳에 와서 기쁨을 취하는 것은 예배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아름다움을 주님에게 돌려드리는 것, 그것은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죠. 우리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주님 앞에 돌려 드리게 될때, 이것은 예배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그것을 원하십니다.
또 한가지 뭡니까? 번홍화, 번홍화라고 할때, 이 번홍화는 노랗다는 말입니다. 이 번홍화는요, 의약품이나, 특별히 요리에 씁니다. 음식에 이것을 넣으면 노랗게 변합니다. 그리고 대단히 향기로운 맛을 냅니다. 이것은 맛이예요. 우리 주님께서 향기를 즐기고 맛을 즐기십니다. 아름다운 맛,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는 많은 것들이 있어요. 번홍화, 창포와 계수와 몰약, 이 세가지는요. 출애굽기에 보면 관유가 있습니다. 관유라고 하면, 몰약, 액체몰약 오백세겔, 그리고요. 여기에 말하는 계수 오백세겔, 그리고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세겔, 그리고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세겔, 이 네가지를 합하고 감람유 한 힌을 섞으면 이것이 관유가 됩니다. 이 관유는 제사장에게 위임하게 될때 머리에 붓지요. 또한 성막의 모든 기구들에게 붓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특별히 구별된 사람이나 기구에게 붓는 것입니다. 그 향기가 퍼집니다. 시편 133편에서 아론에게 부은 이 기름이 수염을 거쳐서 어떻게 옷자락까지 서서히 유연하게,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말하죠. 성도들의 연합을 말하죠. 그것이 어떻게 유연하게 흘러내리는가? 그래서 그 향기로운 관유를 붓게 될때, 그것은 유연하게 액체가 되서 흘러가지만 흘러가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네가지 주요한 향은 사방을 향해서 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배와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기구와 이 모든 것들은 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중대한 향들이 동산 안에 가득하다. 우리는 또 뭘 볼수 있습니까? 유향, 흰 겁니다. 흰 향품입니다. 그 향품을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될때 전체로 다 드립니다. 이 향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우리 주님의 삶의 아름다움을 말해준다고 우리는 여러번 생각해 보았죠. 이 아름다움, 주님이 이곳에 와서 발견하는 이 많은 아름다운 향이 있어요. 주님이 흠향하십니다. 또 한가지 뭡니까? 침향, 몰약, 침향이라고 하는 것. 몰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때, 장사할때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가져온 것은 몰약과 침향입니다. 이 두가지는 시체를 장사하게 될때, 보존하게 될때, 향기로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죠. 대단히 고귀한 향입니다. 대단히 값진 향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다양한 향품이라고 말씀했어요. 모든 귀한 향품, 여기 보면 석류로부터 시작해서 침향까지 다양한 향을 내는 나무, 이런 것들에 대해서 쭉 목록으로 열거를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이렇게 많은 다양한 향기나는 것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어요. 다양한 것들이 있다. 우리 주님께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교회가 주님께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모임은 주님께 어떤 의미를 전달해 드리고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 모임이 아름다운 향기를 드린다면 이렇게 많은 향기들을 쭉 드리고 그리고나서 또 말로 할수 없는 수많은 향기들이 있다, 라는 말입니다. 표현할수가 없다. 이 말은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지, 표현할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임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엄청난 의미를 주셨어요. 주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제가 주님에게도 대단히 위대한, 또 대단히 놀라운 의미를 주님에게 드리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잠근 동산입니다. 잠근 동산 안에는 그곳에 들어와서, 주님께서 신부 안에 들어와서 신부로부터 많은 것을 주님이 즐기게 될때 주님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이 신부는 나에게 엄청난 많은 종류의 의미를 주고 있구나, 이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의 특권과 우리의 위대한 책임, 우리의 부르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게 될때, 주님은 엄청난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여전히 엄청난 의미를 돌려 드리는가? 이것이 오는 잠근 동산에 관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아 4:15).
여기 물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잠근 동산 안에 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물입니까? 동산의 샘, 생수의 우물입니다. 그 다음에 이 물들은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입니다. 이게 도대체 뭘까요? 이 신부가 사는, 신랑이 사는 이 땅은 물이 귀한데요. 하늘로부터 이른비, 늦은비, 이슬, 그런 것을 통해서 경작합니다. 물이 귀한 이 땅에, 여기서는 물이 계속해서 솟아 흘러요. 그런데 이 물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저 만년설이 있는 헐몬으로부터 거기서부터 내려오는 물입니다. 눈 녹은 물이 내려옵니다. 내려올때, 내려오자마자 그것은 땅 속으로 들어가요. 보이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땅 속으로 들어간 그 물이 이 동산에 와서는요, 거기서는 솟구쳐서 올라옵니다. 이것은 성령을 말해주고 있죠. 보이지 않는 시내가, 여기서부터 시내가 내려오다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땅속 깊이 들어가서 이 잠근 동산 안에서 물이 솟구쳐서 위로 올라온다. 성령님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 마음 속에, 또 모임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엄청난 물을 주십니다. 생수입니다. 이 생수는 우리로하여금 신선케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능력을 줍니다. 이 잠근 동산, 그 안에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그 근원이 저 높은 곳으로부터 왔어요. 우리 주님께서 떠나시면 내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했어요. 그 보혜사께서 오셔서 우리 가운데 보이지 않게 역사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 가운데 놀랍게 역사합니다. 우리는 이제 개인이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성령이 우리를 신선케함 가운데 살아갑니다.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우리가 모입니다. 성령의 인도 가운데 우리의 개개인들을 신선케 하고 우리가 성령의 인도 가운데서 하나가 된 가운데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겁니다. 이 가운데 엄청난 많은 양의 열매를 맫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많은 향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동산에 와서, 우리에게 와서, 우리 모임에 와서,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실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어떠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떠한 주님의 은혜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어떠한 것을 가지고 우리를 향해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기 16절 말씀에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신부는요, 이 동산이 안고 있는 정적인 아름다움, 다시 말씀드리면요. 이 동산 안에 수많은 과수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향을 내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샘도 있고 물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물도 있습니다. 이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그냥 그대로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이 신부는 그냥 정적인 아름다움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요, 이 신부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그래서 이 동산에 불어라." 왜 붑니까? 이 바람이 여기서 불게 될때만 향기가 흩날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북풍이 오면 밀려서 저쪽으로 가고, 남풍이 오면 다른 방향으로, 반대 방향으로, 이 향기는 흩날리는 것입니다. 요셉이 성공한 것이 있습니다. 요셉의 번영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마지막에 야곱이 세상을 떠나게 될때, 그 마지막에 아들들에게 한 말씀들 중에 담겨있죠. 요셉의 번영의 비결은 샘과 담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나무가 샘 옆에 있죠. 그런데 그 샘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그런데 그 샘 곁에 뿌리를 박고 자라고 있는 나무가 울타리를 넘어서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번영입니다. 여기에는 성별이 있습니다. 담이 있어서 성별이 있어요. 그리고 성별은 고립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울타리 안에 샘이 있습니다. 이 샘이 나무로 하여금 계속해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근원은 거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가지를 울타리 밖으로 뻩어서 나가는 겁니다. 밖으로부터 뭔가를 얻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으로요. 성병을 통해서 얻습니다. 아무렇게나 얻는 것이 아니라 성별을 통해서 얻습니다. 이 성별을 통해서 얻게 될때 가지는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세상을 향해서 공급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빛은 성도들입니다. 성도들 개인과 모임입니다. 이 빛이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부재시에 성도들과 모임은 세상을 향해 빛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요셉의 번영은 샘과 담에 있었다면 여기 잠근 동산에서의 아름다움, 그리고 잠근 동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매력,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적으로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동적으로요, 다이나믹하게 여기에서 바람이 불게 될때, 향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세요. 외부에서 들어와서 이것을 해칠 것을 주님은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담이 필요합니다. 성별이 필요합니다. 주님에게만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일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부는 "북풍아 오라, 남풍아 오라." 그렇다면 왜 동풍은 없고 서풍은 없을까? 우리 한번 지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동풍은 이쪽에서 오는 겁니다.동쪽에서 오는 바람이죠. 거기는 사막이예요. 거기서 오기 때문에 이 바람은 뜨거워서 말려 죽이는 겁니다. 바로가 꿈 꿨을때, 칠풍칠흉이죠.칠흉이 있을때, 어떻습니까? 바람이 동쪽에서 왔어요. 그래서 이 곡식들 다 말라 죽습니다. 말라 죽여버리는 그런 파괴의 바람입니다. 서풍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두가지 바람이 아니라 북풍과 남풍이다.북풍은 헐몬, 레바논 산맥, 거기는 눈 덮인 추운 곳이예요. 거기서 내려오는 찬바람입니다. 이것은 역경을 말합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어떻습니까? 유연하고 부드럽고 온화합니다. 이것은 좋은 환경이죠. 이 신부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들어가든 그것은 주님께 달려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는 다양한 환경 속에서, 여기에서, 이 동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무엇인가? 그것이 때때로 아름다운 좋은 환경의 바람이든, 아니면 역경의 바람이든, 바람이 오게 될때 나타나는 마지막의 결과는 향기를 사방으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은, 이 정원은 향기의 홍수가 나는 것입니다. 향기의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정원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향기가 사방으로 가득하다. 그곳에, 이 안에 들어갔을때 주님께서 이 향을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께서 향기를 느낄수 있도록, 이 동산은 그것이 목적입니다. 때때로 우리 개인이 우리가 주님에게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선한, 그리고 온화한, 그리고 아름다운 환경들, 그것들이 아름답게 향기를 내게 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허락해 드릴수 있습니다. 때때로 어려운 환경을 우리 개인이 통과하게 될때, 어려운 역경을 우리 모임이 통과하게 될때, 거기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이 향기가 흩날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아름답게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북풍이든 남풍이든 상관없이 이 두 바람이 오라, 라고 이야기 합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아 4:16).
이 여인은 신랑을 초청하지요. 내가 사랑하는 그분은 이 동산에 오셔서 여기서 아름다운 실과를 먹고 향기를 흠향하시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이것이 모임의 소원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가서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 여호와 하나님과 충성된 잔존자 이스라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경륜으로 우리가 생각한다면 실제적으로 우리 개인과 우리 모임,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에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와서 그것이 개인이든, 집합적으로 모임이든, 주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즐길수 있게 해드릴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골몰해야 될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거룩한 책임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초청했어요. 주님께서 오셔서, 나의 사랑하는 신랑께서 오셔서, 이 안에 들어오셔서, 이것은 주님의 것이 아닙니까?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이 여인이 이 동산을 "나의 동산"이라고 했어요.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의 동산에 들어가서" 이것은 나의 동산이지만 이것은 그분의 동산입니다. 왜냐하면 이 동산이 그분에게 속했죠. 그분을 위한 것이죠. 이 안에 있는 모든 내용물들은 모두가 다 그분에게 속한 겁니다. 그분에게 즐길 모든 권리가 있어요. 다른 사람은 절대로 누릴수 없다. 이것이 아가서에서의 독특한 매력입니다. 그리고 그 매력은 오늘날 우리에게 엄청난 특권으로, 그리고 엄청난 책임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아 5: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다시 이 호칭을 쓰지요. 이 말은 신랑 마음 속에 기쁨으로 가득한 겁니다. 왜냐하면 이 신부가 신랑, 사랑하는 분에게 "이 안에 들어오세요. 다 누리세요. 다 가지세요. 주님만 가지세요." 라고 초청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말씀을 듣게 될때 주님께서 기뻐하시죠. 우리 모임은 그렇습니까? 주님만 여기 들어오셔서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만, 우리가 주님께 그대로 돌려 드립니다. 그 모든 아름다운 향기를, 그 모든 달콤한 것들을, 주님께서 맛보십시요. 우리는 그렇게 할수 있습니까? 아니면 이 동산에는 주님 것도 있지만 여러가지 외부에서 들여온 수많은 것들이 있다. 주님께서 오셔서 참으로 흠향하신다고 할때, 불쾌한 것들이 많다. 이것을 우리는 살펴봐야 될 필요가 있어요. 이 동산은 정말 잠근 동산인가? 우리의 샘들은 봉한 샘인가? 더 큰 우물입니까? 이 여인은 초청했습니다. 그랬더니 5장 1절에서 이 신랑께서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여기 보세요. 주님께서 이것은 내 동산이다, 말씀하고 있죠. 이 신부의 동산에 들어가서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여기 보세요. '나'라고 하는 인칭 대명사, 이것은 주님의 대명사, 주님을 지칭하는 대명사죠. 모든 것이 다 주님에게 속했어요. '나의 동산'이죠. '나의 몰약'이죠. '나의 향재료'죠. '나의 꿀 송이와' '내 꿀과'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와서 즐기자' 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주님의 것이예요. 우리는 이것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삶,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믿는 자로서 사는 모든 삶, 이것은 오직 주님을 위해서만 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있다. 이것을 확고하게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모임은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에게,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즐거움을 위해서, 주님의 쾌락을 위해서, 주님의 거룩한 즐거움을 위해서 모든 것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취하십시요. 주님께서 오셔서 즐기십시요.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받으십시요, 라고 말쓰드려야 되겠죠. 그래서 주님께서, 신랑이 말합니다. "나의 친구들아 와서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우리 주님께서 너무 행복해 하십니다.
4장에서 6절과 16절 빼고는 모두가 다 신랑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말씀은 신부에 대한 아름다움, 매력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참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았으니 주님께 잠근 동산을 통해서요. 그것은 나 개인, 모임, 주님께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다 주님께 속한 것이고 그 안에 와서 주님께서 모든 것을 즐기십시요. 라고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흠향하실뿐 아니라 그 향기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딴 사람도 그 향기를 맡게 될 겁니다. 우리에게 찾아올 겁니다. 여기 이 아름다운 것들을 주님께서 먹고 찾고 즐기셨기 때문에 친구들이 와서 함께 즐기라고 말하고 있죠. 우리의 번영의 비결, 요셉에게 있었던 번영의 비결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은혜를 허락해 주시고요. 저희들이 이와같은 삶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나갈수 있도록 주님께서 저희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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