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모 형제님/아가서

아가서 07. 또 다시 꿈꾸는 신부

박이레 2022. 5. 7. 23:11

< 아가서 07. 또 다시 꿈꾸는 신부, 5장 2-8절 > 2014년 / 정형모 형제님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 5:2-8).

주님께서 저희들이 읽은 말씀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은 이제 지난번에 저희들이 말씀을 상고하게 될때 3장에서 술람미 여인이 꿈을 꾼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찾아 거리를 헤매던 그런 꿈 말이죠. 저희들이 이제 5장에 오면 다시 술람미 여인이 꿈을 꿉니다. 두번째 꿈입니다. 이것이 꿈이라고 하는 것은, 술람미 여인은 왕의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그녀의 모든 품성과 품행, 그 자체는 꿈에서 말하는 것처럼 밤에 여성이 홀로 길거리를 걸어다니고 방황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또 이 꿈에서 왕의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서 행순하는 자가 폭행을 하거나, 옷을 벗기거나, 이와 같은 일은 불가능하다. 이 내용은 이 술람미 여인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꿈을 꾸고 있을까? 왜 이와 같은 꿈이 이 여인 마음 속에는 다시 또 나타났을까, 라고 하는 점을 저희들이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아 5:2).

2절 말씀에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잠잡니다만 마음은 깨어 있다. 이 구절을 저희들이 마음에 두고요, 이 내용을 계속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 구나 문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술람미 여인이 잠자고 있는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있다 말이죠. 잠을 자고 있지만 그 음성을 듣고 있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부르죠. 그런데 이 내용에서는 이제 이 사랑하는 자가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 그 음성도 들었습니다. 또 잠자지만 깨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지 않습니다. 모순 아닙니까?
여기 이제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사랑하는 자의 호소, 그 내용을 듣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내용입니까? 여기 호칭을 보십시요. "나의 누이" 나의 누이라고 하는 것은, 신랑과 신부의 두 사람과의 관계가 대단히 부드럽고도 순결하다. 특별히 누이라고 하는 용어는 4장에 처음으로 사용이 되었죠. 이 관계는 부드러운 순결함, 그것이 지속되는 관계다. 특히 '나의 누이'라는 호칭에서 우리가 발견할수 있습니다. "나의 신부" 이것은 솔로몬이 술람이 여인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애정의 대상이다. 나의 신부라, 이렇게 부르고 있죠. 그 다음에 "나의 비둘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둘기의 모습을 아가서에서 너무나 자주 보지요. 아가서는 비둘기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나왔습니다. 그 비둘기의 눈은 우리가 본 것처럼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눈이고 그 눈은 오직 한 대상만 보고있는 그런거죠. 그래서 이 애정의 유일한 대상을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비둘기야" 또 비둘기라고 할때 유일한 대상이기 때문에 그 헌신도 오로지 상대에게만 두고있다. 바라보는 것과 헌신과 이것은 오로지 그 대상만 향하고 있다, 라고 하는 그런 아름다운 호칭인데 그 다음에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나의 완전한 자야" 이것은 '완전한 자'라고 할때 흠이 없다, 전혀 티도 없다, 라고 하는 거죠.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우리 주님께서 티도 없고, 흠도 없고, 주름잡힌 것도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증정하실 것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신분은 온전한 겁니다. 저희들은 흠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분이 저희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은혜 가운데 저희들이 얻은 신분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흠이 없다. 우리 때문이 아니고요,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의 완전하심과 온전하신 구속 때문이죠. 그래서 완전한 자, 참 아름다운 호칭들로 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이러한 부름을 듣고도 문을 안 열수 있을까? 참 기이하죠? 또 한가지, 이 여인이 문을 열어드려야 될, 지금까지 이 호칭만 봐도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만, 거기에 추가해서,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구나" 이 말씀은 이 신랑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신랑은 대단히 불편한 상황에 있습니다. 그 여인은 방에 들어가서 평안하게 자고 있고, 신랑은 밤에 와서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데,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맺혀 있다. 머리에는 이슬, 그리고 그 표현을 보십시요. 머리털에는 밤 이슬, 이것은 강조하고 있으면서 신랑의 지금 처해있는 상황,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가, 얼마나 불편한 상황인가, 라고 하는 것을 지금 말씀해 주고 있죠. 우리 주님은 지금 거절 당하고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또 죽음을 맛보시고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을 높이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이셨지만 그러나 배도하는 이 세상, 반역하는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그 아들을 지금도 거절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전히 주님께서 배척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저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따라가고 있고 이 시대에 주님을 따라간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로 배척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핍박과 또 반대와 배척과 이 모든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제자가 선생보다 더 높지 못하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것을 저희들은 기억합니다. 이제 이 신랑이 와서 신부를 향해서,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서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오" 라고 이야기 할때 이 신부는 많은 사랑을 느껴왔고, 또 지금도 그 호칭 속에서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어줘야 될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는 이슬이 있고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있다고 하는데도, 그 다음 내용은 참 이상하죠.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아 5:3).

안에서 나오는 답변은, 그 반응은 밖에서 부르는 그 이름과 또 신랑의 자기 상태, 이런 상태에 있는데 그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데 두가지 이유를 대고있죠. "내가 옷을 벗었는데 어찌 다시 입겠는가" 불편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 그 말이죠. "또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침상에서 일어나면 팔레스타인에서는 바닥에 닿게 될때, 또 흑이 뭍죠. 먼지가 뭍죠. 그러니까 다시 발을 씻어야 된다. 옷을 입어야 된다. 발을 씻어야 된다, 이 모든 것들은 불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꿈 내용에서 신랑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 당장 나가서 문을 열어 드려야 될 텐데, 그렇지 않고 있다. 저희들은 전에도 이 꿈이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내용들의 방향이다. 그것이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 꿈 속의 스크린에 반영이 되어있다, 라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여인은 마음 속으로 그분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4장 말씀에서요, 자기 자신은 무엇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동산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 마지막 부분에 와서 북풍도 일고 남풍도 일어서 나의 동산에 불어서 이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께서 그 동산에 들어오셔서 아름다운 실과를 또 거기의 향기를 흠향하기를 원한다, 라고 하는 소원을 이미 말씀을 했지요. 이 여인은 신랑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의 가까이 하심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저희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구원받고 나서 주님과 동행을 하면서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세상에서 매일과 같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염려들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그 염려가 우리에게 생기게 될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게 될 때에 관한 말씀인데요. 마지막 때에 특별히 조심할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방탕한 것, 그 다음에 술취하는 것, 그리고 생활의 염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방탕하지 않고 삽니다. 술 취하지 않고 삽니다.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지요. 그런데 많은 경우에 생활의 염려 때문에 마음이 둔해 집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찾아오는 것들이죠. 흔히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매일과 같이 사는 삶 속에서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생활의 염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저렇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요, 나 자신의 문제, 또 부부간의 문제, 가정 안에서 자녀들에 관한 문제, 염려, 수많은 문제들이 매일과 같이 찾아오는데, 이것을 어떻게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생활의 염려 때문에 문제는 마음이 둔해지는 겁니다. 우리 마음의 감도가 떨어진다. 주님과 교제하는 이 교제의 즐거움,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민감함, 이런 것들이 둔해져 버린다. 이 여인은 이런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우리 마음 속에 이와 같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 그것은 생활의 염려다. 주님이 계시고요. 제가 있고, 우리가 주님과 교제합니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과 대화합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즐깁니다. 그런데 슬며시 여러가지 생활의 염려가, 다양한 것들이요, 주님과 내 사이에 슬며시 끼어들어와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게 될때, 그 시야가 뿌얘집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그 아름다움과 주님과 함께 교제함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 속에 즐거워 함, 이런 모든 것들이 이제 전과 같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내 마음이 둔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주님과의 교제라고 하는 것이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나의 편에서 주님을 바라볼 수 없도록 무언가 끼어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필름이 들어와서 슬며시 가로막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잘 느끼지 못하도록 가는 또 한가지의 이유는 우리 마음 속의 무언가 소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어떤 때는 야망입니다. 내가 목표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어떤 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요, 거룩한 주님의 성스러운 목표와 일치되는 그런 나의 소원, 그런 것이 있고요. 그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그래서 내가 원하는데, 혹시 주님의 뜻이 내 뜻과 일치하지 않으면 어떡할까, 라고 하는 두려움, 그러면서도 추구하고 싶은 마음, 이런 것은 갈등이죠. 이런 갈등 속에 있게 될때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온전히 느낄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함을 받게 될때, 주님의 인도함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온전히 저의 생애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저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저의 모든 것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가 이 순간 이 순간, 살아가게 될때 저를 향하신 뜻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성공적이고 번영을 가지고 오고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한 우리 자신에게 행복한 것이 될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이 알고 계시고 주님은 그 뜻을 따라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인도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어야 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지 못하면서 우리는 여러가지 것을 놓고 무작정 기도합니다. 그 기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말은 기도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 뜻을 주님 앞에 그냥 일방적으로 알리면서 떼쓰는 겁니다. 이와 같이 될때,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라갈 수 없죠. 동시에 그와 같은 순간에 우리는 주님의 임재로 인해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즐거움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야망이 나와 주님 사이에 살며시 끼어들어 온다면, 아까 염려가 나와 주님 사이에 끼어들어 온것처럼 나는 주님을 느낄 수가 없다. 감도가 떨어진다, 그 말이죠. 둔해지는 것입니다. 이 술람미 여인은 마음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꿈에 지금 반영되고 있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또 한가지, 이 꿈과 관련해서 직접적으로 볼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가 없는 요인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의 편리함을 추구하려고 할때, 나는 주님의 임재를... 매우 주님과 대화하고요.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내 마음이 기쁘고, 또 주님의 음성을 내가 듣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즐거워 할수 있는 이런 모든 것들이 이제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내 편리함을 추구하게 될때, 또 주님의 일과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 부르심에서 나 자신이 실망 가운데 때때로는 기울이게 될때, 내가 슬며시 중단하고자 할때, 나는 너무 피곤하다. 어떤 때는요, 주님 일을 하다가 주님과 교제가 아니고요. 주님 일에 내가 치여서요, 완전히 나 자신이, 안이 다 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완전히 지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 주님의 인격으로 인해서 그분과의 대화 속에서 내가 즐기는 즐거움으로 인해서 나의 봉사와 그 섬김이 나와야 될 터인데, 그게 아니고 내 봉사가 제 1번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다 보니까 주님은 어디로 가버렸다, 라고 하는 것이죠. 때때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것 참 좋은 일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감사하는 것은 얼마나 마땅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연연하다 보니까, 주신 분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는 것, 이런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요, 우리가 사랑하시는 그분을 위해서 살게 될때, 일하는 것, 봉사하는 것, 그것보다 먼저 그분과의 교제를 내 마음 속에 즐기고 그분의 아름다움이 내 마음 속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역사하게 될때, 그때 우리는 주님을 기꺼이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재원입니다. 주님의 임재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마음 속에 이제 둔감한 것들이 오겠지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사람이 시험받는 것은요, 자기 욕심에 끌린다. 우리가 때로는 염려 때문에 둔해 지고요, 때로는 욕심 때문에, 야망 때문에 둔해 집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는 모든 소원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주님의 대의를 위해서, 주님의 영예를 위해서 우리가 모든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면서요, 나의 영광과 나의 목표를 거기다 연대시켜 버리면 내 마음 속은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양심은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인도를 온전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나의 욕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진하게 될때 주님을 거기에 연대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경건한 이름을 거기에 사용하면서 추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여전히 불편한 것입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6:6-11).

게으름에 대해서 잠언 기자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많은 요인들이 있는데요. 나 자신의 게으름 가운데 나의 편리를 추구하려고 할때, 때때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서요. 나는 너무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결정을 하고 "나는 조금 더 많이 쉴 필요가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는 그와 반대로 야망 속에서 자기가 다 불타 없어질때까지, 피곤해서 더 이상 갈수 없을 정도에도 계속해서 가려고 하는 그와 같은 때가 있지요. 그것도 주님과의 교제를 가로막습니다. 반대로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자기를 바라봅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 속에서요, 나는 좀 게으름 속에 들어가도 합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나는 좀 편리를 추구하고 싶다는 생각이죠. 아가서 술람미 여인이 꿈에서 사랑하는 분이 오셔서 문을 두드리고 머리털에 이슬과 밤이슬이 가득했다고 이야기했는데도 나는 잠자리에 들어갔으니 일어날수가 없다. 내가 발을 씻었는데 또 발을 씻으랴.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편리를 원하는 것이죠. 이런 모든 것들은 주님과의 교제에 막대한 방해꾼들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생각하게 될 때요, 우리는 아가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임재, 그 임재 속에서 그분을 느끼면서 사랑, 그것을 즐거워하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저희들이 보고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 그것은 언제나 이 말씀을 읽게될때 저희들의 마음 속에 도전이 되고 또한 저들의 마음 속에 경각심을 주고 또 저희들의 마음 속에 즐거움과 또 마음의 감동을 주고 또 저희들도 주님을 이렇게 사랑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 그런 방향으로 저희들을 인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저희들이 아가서 안에 담겨있는 이와 같은 주님의 임재를 저희들이 즐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것은 우리가 주님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 이전에 그것은 먼저 우리에게 선행되어질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아가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와 같이 주객이 전도되고 순서가 뒤틀려서 우리는 먼저해야 될 것을 뒤로하고 뒤에 있는 것들이 앞으로 와서 행하게 될때, 우리는 많은 낭패와 또 많은 실패감과 또 많은 피곤을 느끼게 되고 또 하기는 하지만 대단히 억지로 해야되는 그런 상황 속으로 우리가 들어갑니다. 그렇게 달려가게 될때 우리는 스스로 모순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가야 되기 때문에 가야 한다면 우리 마음 속에 얼마나 공허함을 느끼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하는 우리가 공허함을 느낀다. 이것은 뭔가 모순된 일들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말이죠.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아가서에서는 지금 다루고 있습니다. 아가서에 있는 말씀을 보게 될때 어떤 말씀들은 대단히 정상적인 사랑의 관계를 지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또 아가서에 있는 이 말씀은 정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그러지 못할 가능성을 우리의 마음 속에 염려하고 있는 그런 것, 사실상 이것은요. 우리 마음 속에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100% 언제나, 24시간, 365일, 나는 주님을 언제나 사랑한다.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고 또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산상보훈에 보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 중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얻을 것임이요."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여기 아가서 5장에 나타난 이 여인의 꿈 안에서, 이 여인이 지금 어떤 것을 느끼고 있는가. 무엇을 지금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꿈이라고 하는 스크린에 반영이 되었는가,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때 이 여인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을까? 애통하는 마음이 있다, 그 말입니다. 애통하는 마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 또 여러가지 환경,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나서 신실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성도가 외적으로, 환경적으로, 똑같은 상황에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어떤때에 성도들 마음 속에 같이 믿는 성도인데, 왜 어떤 성도는 행복하게 보이고 환경이 이렇게 좋고 나는 왜 이런가? 라는 자기연민이요, 또 하나님을 향한 의구심, 이런 것들이 때때로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뭘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지족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환경에 대해서는 만족하라. 그 모든 것 위에 주님께서 우리를 주권적인 은혜 가운데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엎드려서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인정해야 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됩니다. 그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야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우리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특별히 주님과의 교제,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문제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 영적인 분야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부족함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로 만족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만족하지 않게 될때, 우리는 언제나 애통하는 것입니다.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적인, 외적인 환경에 대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항상 애통하게 될때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위로를 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 아가서 5장 말씀에서 이 여인이 어떻게 위로를 받는가? 우리는 곧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의 마음 속에, 그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라고 하는 이 동산 안에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다 즐기고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아름답지요. 주님이 저희들 안에, 저희들 속에 아무런 아름다운 것이 없었고요. 아무런 향기나는 것이 없었고, 아무런 시원케 하는 것이 없었는데 주님이 저희들을 구원하시고 난 후에 저희들의 마음 속에 이와 같은 것들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저희들을 정원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정원은 잠근 정원입니다. 주님을 향해서만 열려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우리에게 와서 우리 것을 즐길 수가 없어요. 이 '우리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아름다운 향기들과, 또한 과실들과, 이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즐기십시요. 심지어는 이 여인은 때로는 좋은 환경의 남풍이 불고, 때로는 어려운 환경의 북풍이 분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방향에서 와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향기는 날릴 것이고 그 향기를 주님께서 흠향 하실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미 이야기를 했어요. 이 여인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감지하지만 마음 속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혹시 내 마음 속에 세상의 염려로 인해서 주님의 임재를 내가 느끼지 못하면 어떡할까,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이러한 염려가 있습니까? 또 우리의, 내 욕심 때문에 주님과의 교제가 깨어지면 어떡할까? 그 임재를 내가 느껴야 할 만큼 느끼지 못하면 어떡할까,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는가? 또 나의 편리함 때문에 내가 주님과의 이 관계에서 소원해지면 어떡할까, 라고 하는 두려움, 그와 같은 애통함, 그것은요, 이 여인의 마음 속에 꿈으로 나타났습니다. 얼만큼 강력한가? 이 여인이 3장에서 꿈을 꾸었을때는 그 사랑하는 분을 찾아서 길로 막 쫓아 나갔지요. 그래서 못찾았습니다. 행순하는 자를 만나서 물어보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분이 어디 계신가?" 답변을 못들었죠. 그리고나서 이제 그가 떠나고 난 후에 주님을 만난 꿈을 꾸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떻습니까? 여기서는 한걸음 더 나갔어요. 비슷하게 이 꿈에서도 이 여인은 이제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다가 문을 열어줍니다. 문을 열었을때, 그분은 가 버렸어요. 그래서 이제 찾아나가죠. 거기까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행순하는 자, 또 성벽을 파수하는 자, 이런 사람들을 만났을때 폭행을 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 여인의 마음 속에 주님과의 교제가 원활하지 못하면 어떡할까, 라고 하는 애통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 말입니다. 저희들이 주님과 교제하는 그 즐거움, 거기서 우리가 누리고 또 느끼는 것은 뭘까? 아가서에서는 지금까지 여러 부분에서 많은 상징이나 심상을 통해서 우리가 봤습니다. 우리 주님과의 교제에서 다윗은 뭐라고 했어요?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내가 보고싶다." 그랬습니다. 그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때 우리의 영은 만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를 창조하실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그래서 우리의 여러가지 속성 중에 하나님의 속성과 우리는 일치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즐거워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게 될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래 그것을 소원하셨고 우리가 죄로 인해서 그것을 상실해 버렸을때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우리를 좇아오셨습니까? 우리를 버리지 않고요. 하나님과 원수된 그런 상태, 사단과 동조해서 멀리멀리 갔을때까지, 끝까지 좇아 오셔서 아들을 통해서 그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어요. 그리고 이제 구속받은 우리가 주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더 놀라운 근거를 확보해 놓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게 될때, 그분의 임재를 느끼게 될때, 누리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아름다움, 그분의 임재 가운데 들어갔을때 우리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거룩함, 이것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참 외국적인 것이죠. 이방적인 것이죠. 세상 사람들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을 알수 없습니다. 우리도 거룩이라고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거룩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주님 믿고 난 이후에, 세상과는 달리요. 주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될때, 거룩함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그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사모합니다. 그 거룩함이 우리에게 안겨다주는 놀라운 미가 있습니다. 사실은 다윗은 여호와의 전에서 그 아름다움을 자기가 보고싶다고 이야기 했어요. 성전이라고 할때, 그 전은 거룩한 전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전이기 때문에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세상의 수많은 전과 성전은 다른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그런 신상을 모셔놓은 그런 집도 성전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러나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기에만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것 때문에 경건하게 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요. 우리가 사실 주님을 교제하면서 주님을 섬기게 될때, 이 섬김에서 가장 기본이고 근본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함과 경건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거룩함과 경건이 빠져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부분에서도, 어떻게도 주님을 섬길수가 없습니다. 슬프게도 많은 경우에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거기에 거룩함이 빠져있다. 이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냐고 하는 것은 시간이 가면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요, 우리가 또 사모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면서 주님의 아름다움 가운데 거룩을 우리가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또 그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이제 주님의 것으로 전수가 되어서요. 우리도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 되 가는 그런 것, 이것은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의 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게 될때 거기에는 또 다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지혜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지혜를 보게 될때 우리가 감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뿐만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분께서 얼만큼 강력하신 분이신가, 그분의 의지의, 그분의 뜻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래서요,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될때만 주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우리 주님의 뜻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가? 그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때, 나는 주님의 인도를 받고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이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의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주님과 함께 간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거부감이나 주저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의지, 나의 욕심, 그것이 선행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오늘날 개인도, 가정도, 하나님의 교회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인도를 받아가지고 간다면 우리의 삶, 우리 가정의 삶, 우리 모임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달라질 겁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게 될때, 주님의 부요함을 우리가 경험합니다. 그래서요, 그 부요함을 느끼고 있기 떄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때때로 세상의 부요한 사람들,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들, 그와 같은 사회 체제, 이런 것 속에서요. 우리 자신이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세상의 부요함이 몰고가는 강력한 힘과 그것이 안겨다주는 수많은 혜택과 같은 것들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신데렐라처럼 자기연민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속 저편에서는 세상의 부를 남모르게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제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뭘까요? 주님과 교제하게 될때 우리 주님이 가지고 있는 참된 부요함이 어떤 것이냐, 그것을 내 마음 속에 깊이 느끼게 될 때에, 우리는 그와 같은 것들, 세상이 가지고 있는 클레임하고 있는 그 엄청난 부와, 그 부가 안겨주는 수많은 혜택과 또 편리한 것들, 이 모든 것들을 바라봐도 그것을 우리가 부러워하지 않게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풍성함과 너그러움과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주님과 교제하게 될때 느낍니다.
우리가 사무엘하에 있는 말씀에서 잠깐 보겠습니다. 므비보셋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삼하 19:24).

다윗이 범죄함으로 인해서요. 불행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서 반역했습니다. 다윗은 물론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이길수 있는 충분한 저력이 있었습니다만, 그는 아들을 대하게 될때, 뿐만 아니라 자기 범죄로 인해서 그는 오히려 그 일을 피하죠. 그리고 도망가는 편을 택합니다. 이제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압살롬은 제거가 됬습니다. 다윗이 돌아오게 될때 므비보셋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될때 그는 마음 속에 다윗과 함께하던, 그 상에서 함께 먹던, 그런 것에 대해서 그 날부터 잊은 적이 없습니다. 자기는 사울의 손자로서 다윗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를 생명을 보존해 줬을뿐만 아니라 그에게 모든 재산을 주었고 뿐만 아니라 다윗의 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다윗의 임재를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었죠. 므비보셋은 항상 그것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어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바는 므비보셋을 속였지요. 그리고 다윗에게 나가서 마치 므비보셋이 다윗과 함께 가는것을 원치 않고, 또 사울의 때를 다시 한번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므비보셋을 팔아버렸죠. 다윗이 다시 돌아올때 므비보셋이 나가서 맞습니다. 므비보셋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다윗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 뭐라고 했습니까? 왕을 맞게 될 때요, 왕의 떠난 날부터 발을 맵시있게 하지 않았어요. 또한 수염도 깎지 않았어요. 옷도 빨지 않았어요. 이 모든 것은 무언가? 므비보셋에게 발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가슴아픈 부분이죠. 그는 두 다리를 쓸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실수도 아니었어요. 그것은 선천적인 것도 아니었어요. 그 유모가 너무나 급한 나머지 실수해서 생긴 일생동안 지고 갈 짐이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 자기의 몸의 여러 부분이 있지만 여러 지체 중에 가장 가슴 아프고 가장 아껴야 되고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 어디입니까? 발입니다. 발을 맵시 있게도 안했어요. 그렇다면 므비보셋은 얼마나 다윗의 임재에 대해서 마음 속에 고통 가운데 있었는가? 다윗의 부재로 인해서 그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말이죠. 다윗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는 모든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다 상실하고 만 것이다. 또한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다. 그것은 그 마음 속에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의 소중함, 그것을 얼마나 귀히 생각하고 있느냐는 것을 잘 반영해주고 있는 말씀이죠.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케이스들을 여러 부분에서 많이 발견할수도 있습니다. 신약 말씀에서 신랑이 부재할때 우리는 금식한다는 말씀이 있었어요. 신랑이 함께 있으면 금식할수가 없다. 그러나 신랑이 떠나면 금식한다. 주님 그런 말씀을 했지요. 고라의 자손이 성소에 가지 못했을때 그 마음에 병이 날 정도로 주님의 임재에 대해서 주님의 아름다운 곳에 가서 즐길, 그러한 기대가 무너져 버렸을때 얼마나 그렇게 괴로워 했는지 우리는 알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에게도, 개인이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도 있습니다. 또 우리 가정이 주님의 임재를 느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임이 주님의 임재를 느껴야 될 것이 있죠.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게 될때, 마치 이 여인이 꿈 꾸는 것처럼, 꿈 꾸는 모양 같이 주님이 밖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주님이 밖에 나가 있어요. 그 안은 어떻습니까? 그 교회 안은요, 우리는 부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주님이 안계신데도 부요하다. 이것이 주님의 임재를 정말로 소중하게 느끼지 못하는 모임의 모습이죠. 슬픈 겁니다. 그들은 자만했습니다. 우리는 부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이렇게 여겼지요.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 주님이 계시지만 느끼지 못한다고 할때 나타나게 되는 증상은 뭡니까?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부자고, 나는 부자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슬픈 일이죠. 그들은 부자가 아니었어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너희가 곤고한 것을 깨달아야 한다. 너희 가난함과 가련함과 또한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되고 또 흰옷을 사서 입어야 되고 그래서 벌거벗은 것을 가려야 되고 그리고 안약을 사서 발라서 잘 볼수 있어야 된다. 이것은 무엇이겠어요?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 주님이 계신 것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한다. 모임이 만일 그렇게 된다면 모임 안에는 곤고로부터 시작해서 벌거벗은 것까지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 모임은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변화될 수 있어요? 어떻게 회개할 수 있습니까?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라고 말씀했지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케 해야 한다. 왜? 부요치 않기 때문에, 또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것을 가려야 된다. 이 벌거벗은 것은요, 육적인 겁니다. 육적인 것을 가려야 된다.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요. 모임 안에 주님 계신 것을 잘 모르면 모를수록 성도들은 믿음이 사라집니다. 불신이 서서히 힘을 얻습니다. 육적인 것들이 이제 서서히 여기서 주장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영적으로 분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안약이 필요합니다. 흰 옷을 사야 됩니다. 그리고 금을 사서 부요케 해야 됩니다. 왜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날까? 왜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주님의 임재는 사라졌는데, 주님은 밖에 나가서 문을 두드리는, 이와 같은 교회 안에서 왜 우리는 부요하다고 이야기 할까? 이와 같은 일들은 왜 일어났을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첫째, 지역 교회가요, 모임 내에 영접을 잘못할때 믿지 않는 사람이 슬며시 이 가운데 들어와서 이제 모임의 지체가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 발언하기 시작할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탈된 것을 가져오죠. 육적인 것을 선호합니다. 어떻게 그가 영적인 것을 선호하겠어요? 처음의 그와 같은 보이스가 대단히 작다 할지라도 이것은 마치 틈과 같아서 그 틈은 점점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점점점 그와 같은 사람의 아이디어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임 안에서는 오락을 원합니다. 말씀보다 오락을 원합니다. 엔터테이먼트를 원합니다. 영적인 것보다는 사교적인 것을 원하는 음성이 서서히 들려오는 것입니다. 모임 안에서 사회적인, 문화적인 것에 대해서 점점 추구하고자 하는 열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거룩하게 살고 주님과 교제하는 이런 것 보다는 다른 것들을 원한다 그 말입니다. 모임 안에서 찬양 예배를 통해서 자기의 탈랜트를 드러내기를 원하고 예배라는 미명하에 탈랜트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즐거워하고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이와 같은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지역 교회는요, 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을 집합적인 간증으로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임 안에 이와 같은 영접에서 잘못되게 될때, 이제 서서히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의 수가 하나씩 하나씩 늘어나게 될 겁니다. 그들의 보이스가 점점점 힘을 얻게 될 겁니다. 뿐만 아니라 모임 안의 모든 성도가 다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모임의 성도들 중에서, 구원받은 성도들로서 지체들 한사람 한사람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세속적이고 육적인 것을 원하는 성도가 늘어난다면, 모임 안에서는 영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은 저리로 밀려나갑니다. 이제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이 이 안에서 이제 대세를 이루고 힘을 얻게 될 겁니다. 그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주님은 저 밖에 나가 계세요. 주님은 문을 두들기지만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게 오라고 주님 말씀하시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셨죠.

우리 이제 아가서 본문으로 돌아와서요, 계속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가서 5장 3절에 문을 두들기고 또 사랑하는 자를 부르고 또 자기 자신은 밤 이슬로 가득했다고 말하는데도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는가,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발을 씻겠는가, 나를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태도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보세요. 4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아 5:4).

여기 중요한 전환점이 옵니다. 여태까지 문을 열지 않았는데요. 사랑하는 분께서요, 문 틈에 손을 밀어 넣었습니다. 이 문틈이라는 말은 그것은 문에 있는 구멍이라는 말인데요. 문을 잠그게 될때 이 당시에 빗장을 사용했죠. 빗장이 문에서부터 시작해서 문설주로 들어가죠. 거기서 걸려야 문이 안열리죠. 잠그죠. 이 빗장이 구멍 터널과 같은 구멍을 통과해서 저쪽까지 가야 이게 걸리죠. 그게 될 때에 걸리도록 하기 위해서 위에서 핀이 내려옵니다. 그래서 이 빗장에 있는 구멍 속으로 핀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걸려서 그 다음에는 이 문이 열릴수 없죠. 잠겨진 겁니다. 이 당시에 문에 열쇠와 자물쇠의 체제가 지금과 같이 철저하지 않고 약간 엉성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이 열쇠 구멍으로 이 열쇠를 통해서 이 빗장을 다시 끌어들여서요, 문을 열수 있도록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요, 이 핀이 빠져야 됩니다. 이 핀이 다시 빠지도록 하는게 열쇠죠. 그런데 그 문 구멍 속에, 사랑하는 분이 오셔서 그 구멍 안으로 손을 넣었어요. 그 손을 넣을때, 이 말씀까지에는 몰약이라는 말씀은 없지만 나중에 이제 신부의 마음이 동했어요. 지금까지는 잘지라도 마음이 깨어서요, 쿨쿨 자서 무슨 얘기도 못듣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거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여인은 완전히 잠에 빠져서 밖에서 누가 두드리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느낌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요, 혹시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까봐라고 할때 우리는 자지만 깨어 있어요.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요, 문 구멍으로 그분께서 손을 넣으셨을때 마음이 동했습니다. 여기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요, 우리가 빌립보서나 골로새서 성경의 여러부분에서 이 마음이라고 할때, 이 마음은 내장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심장이라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내장과 심장, 그것은 우리의 내적인 감정의 자리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적인 감정의 자리다. 거기에는요, 느낌입니다. 공감하는 그런 부분입니다. 애정의 자리입니다. 사랑의 자리입니다. 바로 거기를 건드렸다. 주님의 손이, 이 신랑의 손이 그 문구멍으로 들어갔을때, 그때 이 여인은 자고 있었지만 여전히 깨어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혹시 자기가 사랑하지 못하면 어떡할까라고 하는 두려움,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은 주님이 손을 넣을때 느낍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막 문으로 왔어요. 문을 엽니다. 문을 여는데 그분은 가버렸어요. 사라졌어요. 그런데 이제 그 다음 말씀을 보면요, 이 여인의 손에 변화가 있지요.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아 5:4-5).

이 신랑이 문 구멍에다가 손을 넣었어요. 사실은 그 안에 몰약이 가득하게 되어 버린거예요. 그리고 이 여인이 똑같은 구멍에 손을 넣었을때, 여인의 손에는 몰약이 묻었어요. 그 몰약이 뚝뚝뚝 문빗장으로 떨어졌어요. 이 여인은 문을 두드리고 "사랑하는 자야" 또 "내 머리에는 이슬이 맺혀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때도 나는 그냥 내가 다 벗고 자는데 내가 왜 또 옷을 입어야 하는가, 왜 내가 발을 또 씻어야 되는가? 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이 여인이 두려워하는 거죠. 자기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할까봐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꿈에서는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있는 도중에, 사랑하는 분의 손이 그 문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이 여자는 일어났죠. 그리고 반응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구멍에 자기도 손을 넣었어요. 이 신랑과 신부의 간격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 간격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은 어디서 연유했을까? 그것은 그 문구멍이었습니다. 주님의 손이 들어간 그곳이었어요. 그 구멍에 이 여인도 손이 들어갔어요. 그리고 어디서 만났습니까? 몰약에서 만났습니다. 몰약에서 만났어요. 주님은 몰약을 묻혀와서 그곳에 넣었어요. 왜 몰약을 묻혔는가? 몰약은 대단히 끈끈한 접착제입니다. 이 핀을, 열쇠를 가지고 이 문빗장을 옮겨서 문을 열어야죠. 그런데 열쇠는 그렇게 하죠. 열쇠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뭘 빼야 하냐면 핀을 빼야 됩니다. 이 문빗장 안에 박혀있는 여러 핀을 빼야 됩니다. 그래야 빗장이 움직이죠. 이 핀을 빼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한데 때때 접착제를 그 안에 넣고 붇여서 잡아 땡기면 이 핀이 올라옵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몰약이 그 안에 가득히 들어간 겁니다. 바로 그 구멍 안에 이 여인이 손을 넣었죠. 그래서 손을 빼었을때 몰약이 뚝뚝 떨어져요.
우리는 전에요, 4장 말씀에서 무엇을 봤습니까? 4장에서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주욱 이야기 했어요. 참 너무나 몸둘바를 모를만큼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움을 말했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움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신부의 아름다움은 신랑으로부터 다 받은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주님이 우리의 아름다움을 칭찬한다면 저희는 몸둘바를 모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저희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주님과 함께 교제하면서 우리가 함께 배운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얻은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이 모든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제 아름답다고 칭찬을 했을때에 이 신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자기는 날이 샐때까지 그림자가 갈때까지, 그 말은 자기는 아직도 희미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너무 아름답다고 이야기 했는데, 본인은요,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때 우리 자신은, "우리는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게 될때 우리는 너무나 희미합니다라고 얘기할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자기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날이 샐때까지 몰약산과 유향산에 갈 것이다." 그런 얘기를 했죠. 몰약산, 그것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이죠. 주님께서 피흘려 돌아가신 갈보리 골고다, 거기에서 주님께서 돌아가실때 주님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쓴 것을 맛보았어요. 몰약이 쓰죠. 맛은 쓰지만 그 향기는 너무나 아름답다. 이것은 항상 몰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인데, 갈보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몰약이죠. 거기에서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경험은 말로 할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말로 이야기하고 또 기도도 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 깊이와 그 고통의 넓이를 누가 가히 짐작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끼쳐진 영향력, 그것이 우리를 높이고 우리의 마음에 자유를 주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하고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넉넉히 넣어주신 것인데, 이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몰약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그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 받았어요.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따라갑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요, 주님의 임재로부터 소원해질까 두려워한다면, 또 소원해질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항상 어디로 가야 됩니까? 우리는 몰약산으로 가야 됩니다. 이 여인은요, 이 문에 좇아 나가서 그 사랑하는 분을 만나려고 문을 열 때에 사라져 버렸죠. 다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 문에 있는, 문빗장 안에 담겨있는 몰약이었어요. 거기에 손을 넣었다. 주님의 손 넣은 곳, 거기에는 몰약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 여인이 손을 넣었을때, 이 모든 일들은 새롭게 전개되죠.

어떻게 전개 됩니까? 주님 찾아 나갑니다. 여러분과 제가 개인의 생활 속에서 내가 주님과 좀더 가까이 교제하고 싶다. 내가 전보다 지금은 소원해 진거 같다고 할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전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몰약산에 가야 됩니다. 거기가 다시 주님과, 주님에게도 다시 가서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바로 그 출발점 입니다. 거기서 이 여인은 주님과 만났어요. 사실은 거기서 만났지만 문 열였지만 주님은 안보이세요. 그것은 꿈입니다. 그 여인은 이제 주님을 찾아갑니다. 길거리고 나가고 나갔을때 파수꾼들에 의해서 그는 폭행을 당합니다. 마치 불순한 여인처럼, 헤픈 여자인 것처럼, 밤길에 혼자 막 방황하는 이와 같은 여인처럼 취급을 받았다. 이 여인 마음 속에요, 그것이 그 여인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던 주님의 임재에 관한 생각이었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놓친다면 이런 고통이 나에게 온다는 반향이다 그 말이죠. 그 마음, 그것이 애통하는 마음이고 그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꿈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겁니다. 애통하는 마음, 고통하는 마음이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위로를 주실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전진하도록 만들어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계속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전진 못합니다. 이상하지요. 우리 마음 속에 계속해서 만족과 즐거움과 이렇게만 가면 계속해서 될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요,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면서 우리 마음 속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아직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말씀처럼 "완전한 자"라고 말씀했어요. 완전한 자이며 완전하게 될 겁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인 우리를 주님이 사랑하시죠.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면 어떡할까,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요. 그 몰약에서 만나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한주를 지나고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매 순간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적으로 주님 말씀을 따라서 모임 안에서 주중 첫날, 우리가 여기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게 될때 우리는 어떡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옵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나와서,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합당하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은혜 때문에 주님 앞에 담대하게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 속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생활의 염려, 다른 죄들, 또 여러가지 야망, 또 나의 편리, 뭐 그 외에 이런 일로 인해서 내가 지은 죄로 인해서요. 주님 앞에나와서 예배드리기 합당하지 못하다고 내가 검토하고 있는가? 검토하죠. 우리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예배드릴때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이 몰약의 즙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거죠. 거기서 몰약은 뚝뚝 떨어집니다. 우리 예배를 마치고 주님 앞에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나오게 될때, 이 여인이요. 몰약이 가득히 담겨 있는 문틈, 거기에 주님이 손을 넣으셨던 곳인데 거기에 자기도 손을 넣으니, 거기에 몰약이 가득히 묻었어요. 이제 그것이 흘러내릴 정도가 아니라 뚝뚝 떨어집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이 끝나고 나올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까? 몰약으로 가득차지 않습니까? 그렇게 될때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새롭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 꿈을 통해서요, 주님의 임재에 대해서 마음 속에 염원하고 있던 것들이 이 꿈 속에서 나왔고요. 이 꿈이 끝나게 될때 이제 이 여인은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 5:8).

여기서 사랑병이 다시 나옵니다. 우리는요, 아가서 2장에 가보면, 지난번에 우리가 2장에서 사랑하믕로 병이 났다고 하는 사랑병에 관해서 우리가 보았죠. 그때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하는 것은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목자왕이신 그분으로부터 침궁에 갔었고, 그리고 연회장에 갔었고, 그리고 자기에게 끼쳐주신 엄청난 사랑 때문에요. 그 사랑은 내 위의 기라고 또 이야기 했죠. 그 사랑이 너무나 과하고 몸둘바를 모를만큼 그런 처지에 있는 이 여인들을 향해서요. 이 사랑하는 분이 얼만큼 사랑했는가, 라고 하는 것 때문에 감당하지 못해서, 육체적으로 감당하지 못해서 그래서 병이 났어요. 너무 사랑이 많아서요, 사랑이 많게 느껴져서요. 사랑이 많을뿐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당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5장에 와서는 또 사랑병이 있는데요. 여기 사랑병은요, 무엇입니까? 자기가 우리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자기가 찾아나갔어요. 그리고 행순하는 자를 통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순간에, 그분을 꿈에서 막 찾고 있는 겁니다. 그때에, 예루살렘 여자를 빙자해서 부탁하죠.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그렇게 전해달라." 이 여인은 그럼 우리 주님이 과연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고, 잃어버리고, 그렇게 된 상태가 되었을까. 우리가 나중에 모레 저희들이 살펴볼 말씀에 6장에 가면, 여기 예루살렘 여인들이요, 묻습니다. "극히 어여쁜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그때요, 이 여인이 대답합니다. 잃어버린 여인이, 주님을 잃어버린 여인이 대답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자기 동산으로 갔다." 자기 동산은 어디입니까? 자기 동산은 자기죠. 주님은 자기에게 있어요. 자기에게 와서 아름다운 것들을 흠향하고 먹습니다. 그것이 4장에서의 이 여인이 한 말 아니예요? 그리고 그것을 항상 환영하고 주님께서 오시기를 원했죠. 주님의 임재를 자기는 즐기기를 원하고 그것을 향해서, 그것을 위해서 자기는 주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요, 이 꿈에서 있었던 모든 현실은 주님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예루살렘 여인들아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면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그렇게 전해달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 다음에 보면 이 여인이 우리 주님에 대해서 얼만큼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 쭉 이야기하고 있는가. 우리는 내일 저희들이 그것을 보겠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 여인은요, 세상의 수많은 남녀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사이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특이하다. 너무나 탁월하다. 그래서 이 여인이 그 신랑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그렇게 깊은 찬사를 보냅니다. 그리고나서 이 "여인 중에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라고 할때, 자기 동산으로 갔다. 이렇게 대답하는 겁니다. 그 여인은 주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어요. 이 여인은 주님이 임재를 느끼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임재를 놓칠까봐 주님의 임재를 상실할까봐 마음 속에 항상 애통하는 것이 있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저희들을 구원해 주셔서 저희들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 앞에서 항상 이렇게 말하죠. "주님, 저희들이 주님을 사랑해야 할 만큼 주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저희들이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만큼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합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항상 원하는 것은, "주님 저희들이 주님을 사랑할 만큼 주님을 사랑하도록 해 주십시요." 라고 하는 소원이 있지요. 그래서 그만큼 저희들의 마음 속에 애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여인의 꿈처럼 우리도 이 꿈을 꾸게 될 겁니다. 주님을 상실했을때, 그때 우리에게 찾아올 꿈에서의 악몽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혼이 주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러한 영혼들이 모임의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와 같은 모임 안에 세속적인 것들이 점점 힘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이와 같은 성도들이 모여있는 모임 안에서 인간의 탈랜트를 자랑하면서 여기서 이와 같은 고민을 할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모임 안에서 우리는 세속적인 것들을 가지고 여기서 해야 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라고 하는 겁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거룩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으로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께 찬양하고 그것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내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을 우리가 갖지 않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가지 시간의 낭비가 우리에게 있을까봐, 그래서 우리를 주님을, 주님만, 주님의 사랑만큼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까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놀라운 일들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데, 저희들의 생애 속에서 우리의 시간을 혹시 낭비할까봐요. 우리가 주님을 합당하게 섬기지 못할까봐 우리 마음 속에 염려하는 것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애통하는 마음이야 말로 우리 개인을 계속해서 주님을 가까이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찬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염려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마음 속의 고민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만큼 사랑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주님께 말씀을 드려야 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지점이 우리가 주님을 섬겨 나갈수 있는 그런 유일한 길이다, 라고 하는 거죠. 때때로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모임이 가장 위태로울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뭔가를 이루어 놨다고 생각할때 입니다. 우리는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때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위에서 이제 놀라운 일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는 타락하고 우상숭배하는 거의 대부분의 모든 국민들, 그들을 향해서요.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인도하는 우상숭배의 본산, 이세벨과 아합, 그리고 그들이 먹여주고 녹을 주는 수많은 바알의 대제사장들, 그들을 향해서 선전포고했죠. 어떤데서 그는 어떤 힘을 얻어서 그렇게 선전포고를 했을까요? 갈멜산 위에서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바알의 선지자들이 소리쳤죠. 불이 내려오지 않았어요. 엘리야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가 오랫동안 기도해 왔던 똑같은 내용을 갈멜산 위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어요.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때 엘리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엘리야는 아무도 없는데로 올라가서 머리가 무릎사이로 들어가도록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이 위대한 일들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자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는데, 그는 이제 여기서부터 또 다른 출발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패배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우리가 성공했다고 느끼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전진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마음 속에 애통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에라도 우리는 주님이 떠나가시는 것에 대해서 견딜수 없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어디에 넣습니까? 그분께서 넣으신 그 문구멍에 넣을때에, 변화가 있었죠. 주님과 이 여인은 어디서 만났습니까? 문구멍 속에서 몰약 가운데 만났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그렇게 만나야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세상의 여러가지 매일과 같이 살면서 주님을 생각하지만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불청객, 뭡니까? 생활의 염려입니다. 학생들은 진학의 문제에 대해서, 졸업하게 되면 취업의 문제에 대해서, 또 자식들이 태어나면, 하나씩 더 태어나면, 더 많은 재정 때문에, 많은 염려가 매일과 같이 밀려옵니다. 형제님은 형제님대로, 자매님은 자매님대로, 독특한 수많은 문제들이 이제 시대에 따라서, 우리의 연령에 따라서, 또 상황에 따라서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하나가 해결이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옵니다. 이와 같은, 매일과 같은 염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는 엄청난 손실을 우리가 과연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염려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 염려하는 것이다." 그 말씀은 이거죠. 이방인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고 하는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여러가지 염려가 올 때에 우리는 다시 한번 상산보훈을 기억해야 될 겁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아니, 주님께서 공급하신다고 하는데 주님 먼저 구하라고, 먼저 주님의 의와 그의 나라, 그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엘리야가 사렙다에 찾아갔을때, 하나님께서 과부를 통해서 너를 먹인다고 말씀하셨을때, 엘리야가 사렙다에 갔지요. 갔을때에 그 성문에서 그 여인을 만났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라고만 말씀하셨는데, 그가 어디 사는지, 그 이름이 뭔지 전혀 말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갔을때에 성문에서 바로 그 여인을 만났어요. 그 여인은 어떤 순간이었습니까? 엘리야가 그 여인을 만났을때 그 여인은 마지막 가루, 그리고 마지막 기름, 그것 가지고 이제 하나밖에 없는, 남편은 오래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과 함께 먹고 이 둘은 죽습니다, 라고 하는 순간, 마지막 순간입니다. 마지막 벼랑 끝의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요, 벼랑 끝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요, 손이 짧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다 이방인이 염려하는 것이다. 그 말은 너희들은 내가 책임을 지겠다. 들에 있는 백합화, 또한 풀, 그리고 또한 하늘에 날아가는 새,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먹이지 않는가? 반드시 기억하라. 그들보다 훨씬 귀한 존재가 바로 너희들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했어요. 엘리야가 이 사렙다 여인을 만났을때 뭐라고 말씀했어요? "네가 나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나에게 주라." 대단히 이기적인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여인의 마음을 지금 다루고 계신 겁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 이 여인에게 실천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꼐서는 그래서 어떻게 이 여인을 먹이셨습니까? 그 통에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끝나지 않도록, 매일과 같이 그 양을 공급하셨죠. 기근이 끝날때까지 하나님꼐서 공급하셨죠. 주님의 임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도록 매일과 같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염려들,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우리 마음 속에 시시때떄로 욕심 때문에 생기는 야망, 나의 야망, 주님을 위한 소원이 아니고요. 나를 위한 야망, 때때로 우리가 그것이 주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만약에 여러분의 마음 속에, 저의 마음 속에 확신이 있다. 이것은 오로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이 있다면 우리 마음 속에는 염려가 없습니다. 변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욕망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결국해서 이야기하게 될때 나는 어딘지 모르게 변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거죠. 우리는 우리의 편리를 추구하게 될때, 우리의 편한 것을 우선으로 하게 될때, 주님의 대의나 주님의 영광은 사라지죠. 그것은 희생을 당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의 편리 때문에, 이와 같은 것들로 인해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지 않도록, 주님 저희들을 보호해 주십시요. 그래서 이 여인처럼 우리는 꿈꿉니다. 주님,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의 임재를 매일과 같이 즐길 수 있도록, 그래서 세상의 여러가지 염려가 가득한 세상을 우리가 주님과 교제함 가운데 이기고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세상의 수많은 일들로 인해서 내 마음 속에 때때로 찾아오는 이 욕심, 그래서 내 마음 속에 생기는 야망,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지혜일 수도 있고, 또 여러가지 명예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 사회 안에서 얻는 명예, 이런 것을 내가 추구한다고 하면, 나는 즉각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나는 영력을 읽어버리고 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즐거움을 상실하고 말 겁니다. 나의 편리를 추구할때 마찬가지죠.

그래서 이 여인이 꿈꾼 것을 오늘 생각해 보았어요.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애통함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이와 같은 성향과 나 자신의 이와 같은 모습,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교제를 하며, 주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누리지 못하도록 혹시나 가로막을까봐, 우리는 주님 앞에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위로를 주시도록 저희들이 지속적으로 이와 같은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더욱 더 겸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축복이 저희들 가운데 지속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살아가고 번영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저희들은 능력이 없지만 주님께서 저희들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저희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땅에서 저희들을 이끌어 나가시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 여인의 꿈을 생각할때, 주님 저희들 마음 속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저희들이 즐기지만 저희들은 계속해서 주님의 임재를 즐기고, 그래서 저희들이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저희들이 힘을 얻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저희들이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나갈수 있도록, 그리고 합당한 예배를 지속적으로 드리고 나갈수 있도록, 주님 저희들을 도와 주십시요. 이것이 저희들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