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서 05. 신랑이 말하는 신부의 일곱가지 아름다움 > 2014년 / 정형모 형제님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아 4:1-6).
주님께서 오늘도 저희들이 읽은 말씀에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희들은 신부가 밤에 침상에서 그의 신랑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또 거리로 나가서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파수꾼을 만나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는데, 그 꿈 속에서의 이와 같은 같은 노력, 그의 마음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 보았지요. 다행히 그녀는 꿈 속에서 신랑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꼭 붇들고 다시 놓지 않겠다고 하는 마음을 저희들이 기억합니다. 그 후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신부를 60명의 군사들이 옹위하고 솔로몬의 연에 태워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그런 모습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오늘 4장에 와서는 신랑이 이제 신부에게 아름다운 말로 칭찬하고 있는 내용이 가득히 담겨있습니다. 4장은 6절 말씀과 16절 말씀, 이 두 말씀에서만 신부가 이야기하고 나머지 모든 말씀은 신랑이 신부를 향해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아 4:1).
4장 1절에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여여쁘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내 사랑"이라는 말씀을 보십시요. 이 '내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는요, 아가서에서요. 이번에 4장 1절에서 여섯번째로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1장 9절 말씀에서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이런 칭찬이 있었죠. 그 다음 1장 15절 말씀에서요,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이런 칭찬이 있었습니다. 2장 2절 말씀을 보면요,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 이것이 세번째 '내 사랑'이었죠. 네번째는 2장 10절 말씀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함께가자는 것을 제안하는 신랑의 목소리에 '내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다섯번째로 2장 13절 말씀에 다시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두번 함께 가자고 할때, "나의 사랑"이라고 하는 호칭을 신랑이 신부를 향해서 사용했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4장 말씀에 들어와서 4장 1절에 "내 사랑" 이제 4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이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계신데요. 여기 일곱가지 신부의 아름다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입술과 입' 이것을 하나로 볼때 일곱이고요. 이것을 만약 따로 본다면 여덟인데, 신랑이 신부에 대해서 이와 같이 칭찬하는 말씀, 이것은 아첨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이 말씀을 기록했죠. 여기에 신부의 아름다움에 관한 그것은 적절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 아니고요. 또한 비범하게도 튀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이 여인에게 합당한 그런 말씀이다. 이 여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도 저희들이 보겠습니다. 1절 말씀에 "내 사랑"이라고 신부를 향해서 이야기 했지요. 그 다음에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여기서 두번째 아가서에서 나옵니다. 제일 첫번째, 1장 15절 말씀에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이렇게 어여쁘다는 말씀을 했지요. 여기 4장에 와서 두번째, 내 사랑일뿐만 아니라 너는 어여쁘다.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신랑의 마음 속에 신부를 향한 애정어린 표현이죠. 우리가 1장 15절 말씀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이런 이야기를 했을때에, 바로 그 다음에 16절 말씀에서요.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신부가 신랑에게 이제 화답하는 말이거든요. 신랑이 신부에게 어여쁘다고 얘기했을때에, 신부도 신랑을 향해서 어여쁘다라고 화답했습니다. 이제 두번째 어여쁘다는 말씀이 여기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제 우리는 신부의 아름다움, 신부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생각할때, 아가서에서 계속해서 원칙은 뭡니까? 신부에게는 원래 아름다움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 신랑은 아름다운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죠. 그분은 5장 말씀에 가서 보면 "희고도 붉어 전체로 사랑스럽구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서, 적어도 성도들이 우리 주님을 묘사하게 될때, 그것은 너무나 성도들의 인구에 회자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게 될때, 또한 우리 주님을 생각하게 될때, 그분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전체로 아름답다, 사랑스럽다라고 하는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 미적인 감각에 있어서나 그분의 아름다움의 차원에 있어서 그분은 확실하게 절대적으로 100% 그분은 아름다운 분입니다. 어느 한 부분에서, 어느 각도에서 그분을 봐도, 그분에게서 어떠한 흠도 찾을수가 없다. 너무나 완벽하다. 너무나 균형잡혔다. 너무나 전체로 사랑스럽다라고 하는 분입니다. 바로 이분의 사랑을 입은 이 여인이, 이제 이렇게 완전한 분께서 완전하지도 않았고 또 흠 투성이었고, 그런데 그 은혜로 인해서 이 신랑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요, 위대한 선택 때문에, 아무런 가치가 없었는데 그분의 은혜로 인해서 발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분이 이 신부를 향해서 아름답다고 하는 이 이야기는 참 기이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희들이 입었습니다. 그 모든 일에 이 은혜를 주시는 그분께서 모든 것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설명할수 없는 주권적인 은혜로 저희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을 아름다운 모양으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향해서 아름답다고 말씀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은혜인가? 우리는 그분 앞에 엎드려서 온 세기를 통해서, 영원한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될 겁니다.
아가서 4장 1절 말씀의 하반절에요. 제일 첫번째, 이 여인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은 사실은 이 완벽한 그분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그분이 제일 첫번째 칭찬하신 그 아름다움은 뭘까요? 보통 우리는 세상에서 미를 가리켜서 팔방미인이다. 사실은 동서남북, 그래서 사방인데 그것보다 좀더 세분해서 들어가면 이제 동서남북 사이사이에 방향이 또 있어서 팔방이 됩니다. 8가지 방향에서 봐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팔방미인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일곱가지, 아니면 여덟가지 아름다움으로 주님께서 이 여인을 향해서 아름다운 매력의 포인트를 지적하고 계시다. 그런데 저희들의 관심의 제일 첫번째 것은 주님이 이 신부를 향해서 무엇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이 아름다움을 지적하고 계실까? 이것이 저희들의 관심입니다. 그것은 눈입니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같고" 그런데 그냥 눈이 아니고요. "너울 속에 있는 눈" 입니다. 여기 매력의 포인트, 일곱가지, 혹 여덟가지의 매력의 포인트에서요. 두가지가 너울 속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어요. 첫째는 눈이고요. 그 다음에 뺨입니다. 뺨도 너울 속에 있는 뺨입니다. 3절에 "너울 속의 네 뺨은" 이렇게 나오죠. 그래서 너울 속의 눈과 너울 속의 뺨, 그냥 눈이 아니고요. 그냥 눈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냥 뺨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신부를 향해서 말씀하실때, 눈은 너울 속에 있어야 된다. 그것이 아름답다. 그 다음에 뺨도 너울 속에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너울 속에 있는 눈을 어디에 비유했습니까? "네 눈은 비둘기 같다" 이미 비둘기에 관해서는 여러번 저희들이 만나봤죠. 아가서는 비둘기다. 이미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아가서 전권에 이 비둘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 비둘기, 특별히 눈과 관련해서요. 비둘기의 눈은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무리 봐도 그 눈을 보고 있으면요. 저희들의 마음이 빠져 들어갑니다. 어쩌면 이렇게 부드러운 눈일까? 어쩌면 이렇게 그윽한 눈일까? 그 눈은 완전히 눈이 큽니다. 산비둘기의 눈이죠. 산비둘기의 눈은 머리에 차지하고 있는 눈의 비율이 상당히 큽니다. 그리고 눈은 완전히 명확한 윤곽으로, 흰 줄로 둘러싸여 있고 그리고 그 안은 완전히 까만 눈동자다. 그래서 마치 그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물 속에 제가 얼굴을 비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 눈, 그 비둘기의 모양과 생태와 또한 행동과 그 자태와 이 모든 것을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부의 아름다움 가운데 제일 첫번째 그 눈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 눈은 너울 속에 있는 눈이다. 제일 첫번째 이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이미 말씀드린대로, 아가서에 있는 모든 말씀들 가운데 대단히 섬세한 말씀입니다. 대단히 어떤때는 직접적인 말씀입니다. 어떤때는 대단히 노골적인 말씀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성령님께서 가장 영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가장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 속에 심상, 그림을 비춰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선택하신 적절한 단어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적인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가지고 육적인 생각을 합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사랑했다. 요나단을 사랑한 것이 여자를 사랑한 것보다 더욱 더 깊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얼마나 세상의 육적인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 무슨 동성연애와 같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생각하는 이와 같은 저열하고 비열한 생각들을 성경 말씀과 함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가서는요, 아가서라는 말 자체가 노래 중의 노래다,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을 가리켜서 주 중의 주요, 왕 중의 왕이다라고 말하죠. 그 다음에 지성소를 뭐라고 말씀합니까? 거룩한 곳들 중의 거룩한 곳, 홀리 오브 홀리스라고 말합니다. 아가서의 말씀을 읽게 될때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육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물론 아닙니다. 이것은, 아가서는 다른 모든 말씀과도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서 이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 담긴 위대한 영적인 진리를 우리가 마음 속에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 가운데 담긴 위대한 교훈,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따라서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네 눈이 비둘기와 같다고 이야기할때, 이 비둘기의 눈, 그 눈은 어떤 점에서 아름다울까? 한 지점만 보고 있다. 한 대상만 보고 있다. 이것이 비둘기의 눈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이 비둘기, 신부의 눈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눈의 매력 포인트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영적인 시력입니다. 영적인 시력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감지력입니다. 대상, 신랑만 바라보는 눈, 그것이 아름다운 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님만 바라보는 눈, 세상의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거기에 시선을 두지 아니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눈, 그것은 일편단심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해서 절대적인 충성, 거기에서만 아름다움이 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그것을 바라보지요.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향해서 어떠한 매력을 느끼고 바라보고 있습니까? 사실은 이 여인이 이렇게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왜 아름다운가?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비결은 그녀는 '나는 검다. 나는 아름답지 않다. 게달의 장막같다. 그러나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다.' 라는 것을 침궁에서 느꼈지요. 그 여인은 본성적으로 아름답지 못했는데 그분의 은혜로 인해서 아름다운 쪽으로 변해 버렸어요. 그리고 그분께서 이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아름답다고 할때, 눈을 지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주님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게 될때, 우리의 모양이 서서히 변화합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계속 앉아 있어서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계속해서 묵상하게 될때,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살게 될때, 우리의 삶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도 변하고 우리의 모양도 변하고 우리의 성품도 변하고 우리의 모든 것이 전부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시게 될때, 저희들의 신랑되신 분이 저희들을 향해서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 눈은, 신부는 신랑만 바라보고 있었다. 영적인 시력의 아름다움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산상보훈을 저희들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 속에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했어요. "눈이 만일 성하면" 그 말은요, 영어 표현에서는 "눈이 만일 하나면"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은 둘입니다. 눈이 어떻게 하나가 되겠어요? 해부학적으로 눈은 두개지만 이 두 눈이 기능적으로 한 지점을 보는 눈, 그것을 성경은, 주님은 한 눈이다. 성한 눈이다, 이러헤 말씀하고 있어요. 그 성한 눈을 갖게 될때, 우리 온 몸이 성하다. 만약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워진다고 말씀했어요. 우리 온 몸이 어두워진다고 하는 것은 분별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우리 눈이 합당치 못하면요, 우리는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온 몸에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의 암흑의 병입니다. 분별력의 상실의 질병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바른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이고 어떤 길로 가는 것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어떤 것이 주님께 슬픔을 안겨다 드리느냐, 라는 분명한 분별, 이것은 눈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눈이 아름답다. 눈이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눈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너울 속에 있어야 된다. 이 여인의 분별력, 주님만 바라보는, 그리고 기뻐하는 그 마음, 그와 같은 시력, 그것에 대해서 세상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너울 속에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요,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크게 있는 것으로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때로는 핍박도 합니다. 반대하고요. 심기가 불편한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영적인 분별과 또한 영적인 것을 지각하는 모든 것은 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 지식,주님을 바라보는 이것, 그것은요. 그와 같은 위대한 지식은, 그것은 통제 하에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8장 말씀에 보면 지식은 교만케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 지식, 그것이 통제되지 않으면, 이 통제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절제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지식, 그것은 전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요, 우리 주님의 은혜 가운데 그 베일 아래 들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될때, 사랑 가운데 이 지식을 사용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덕을 세울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눈, 그것은 신랑이 이 신부를 향해서 감탄하고 있는 눈입니다.
두번째 매력 포인트는요, 머리털입니다. 이 머리털을 어디에 비유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머리털과 관련해서요. 머리털을 우리에게 조명해주시고 있는 그림이 있어요. 이 심상을 우리가 발견해야 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무리염소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마리가 아니고 무리의 염소입니다. 그것은 어디에 누워 있습니까? 길르앗 산 언덕 풀밭에 누워있습니다. 길르앗은 산악지대죠. 길르앗을 생각하면 그 산속에서, 그 언덕에서 기도하고 있던 엘리야를 생각합니다. 이 염소가요, 떼를 지어서 누워있다. 염소를 생각할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구약에 속죄일이 되면 속죄 제물로 염소가 사용되었죠. 염소를 생각할때 속죄 제물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즉각 헌신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합니다. 머리털과 관련해서 두번째 매력 포인트는요, 헌신의 아름다움입니다. 머리털을 생각할때 우리는 나실인을 빼고 생각할 수 없어요. 나실인은 자원해서 기꺼이 하나님 앞에 서원하죠. 자기를 드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어느 일정 기간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 이것이 나실인의 규례죠. 그래서 그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도주와 관련된 것을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체와 절대로 접촉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신이죠. 그것을 누가 그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헌신, 이것은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말씀에서 우리를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했어요. 산 제사라는 말은 스스로 언어 상에 있어서 모순 된다고 할수 있어요. 왜냐하면 제물은 죽는 것입니다. 제물은 죽여서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제물,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사도바울께서 말씀하신 권면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산 생명을 주님 앞에 제물로 드려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합당한 예배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우리는 변화를 받아서 본 받는다는 말은 어떤 모양이 있는데 그 모양과 같은 모양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변화라고 하는 것은 그 모양과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뀐다, 그것을 말합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모양, 세상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모양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불순종의 영입니다. 하나님을 반대합니다. 불순종합니다. 그와 같은 모든 것이 안에 있기 때문에,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그와 같은 속성들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도 그렇게 나타나죠. 그들이 살아가는 모든 라이프 스타일의 외적인 모양은 그 안에 있는 그것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걸어가고 있는 내적인 그 마음, 그것에 대해서 분별하십니까?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혐오를 느낍니까? 우리가 과거에는 저랬는데 주님의 은혜로 인해서 이제 변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모양을, 내적인 모양, 그것과는 거리가 멀게 가고 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요, 나에게 행복이다. 나에게 번영의 길이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별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그 모양 때문에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 스타일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얼굴 모양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의복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모든 외적인 형태도 내적인 것에 걸맞게 가고 있죠. 이 모든 것에도 우리는 혐오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모양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우리는 전혀 다른 변화를 받은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까? 바로 이렇게 하게 될때, 여기 두번째 매력 포인트가 있죠. 신랑이 신부를 보고 감탄하는 매력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첫째, 시력의 아름다움, 그것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시력,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눈. 두번째는 머리털이죠. 헌신하는 아름다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가운데서 기쁨을 얻으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의 모양이 변하기를 원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에 선택하시고 택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왜 예정하셨습니까? 왜냐하면 그분의 모양을 본받기 위해서요. 아들의 모습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예정했다. 그분은 선택했고 그분은 우리를 예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양이 변해야 됩니다. 어떻게 변해야 되느냐? 여기서 두번째 매력은 신부가 헌신하는 것이다. 주님을 향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염소가 희생 제물로 온전히 드려졌던 것처럼 드리는 것입니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아 4:2).
세번째 보겠습니다. "네 이는" 여기 세번째 매력 포인트가 있습니다.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세번째 아름다운 것은요, 이 입니다. 이 치아를 가리켜서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에 비유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보충 설명들이 있습니다. 암양은 암양인데 전부다 새끼가 있다. 그런데 그 새끼들은 전부가 다 쌍둥이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 말씀을 듣게 될때, 이 양을 보게 될때 상당히 많은 새끼들을 생산하고 있는 양이구나. 많은 번성케 하는 그와 같은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되죠. '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이는 씹는거죠. 음식을 우리가 입에 넣고 씹죠. 왜 씹습니까? 소화 시키기 위해서 씹지요. 그냥 삼키면 소화불량이 될수 있고 많은 것은 흡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는 저작합니다. 분쇄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것이 잘 효소와 섞여서 이제 장으로 들어갔을때, 잘 흡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는 그와 같은 노력을 하지요.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라고 하는 것의 아름다움은 무엇입니까? 이의 아름다움은요, 신부가 외부로 부터 음식을 먹었을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아름다움입니다. 먹지만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 소화불량, 그것 아닙니다. 말씀을 먹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 그냥 흘러가 버린다.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먹지만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고 내것으로 된 것이 없다. 말씀을 읽고 머리로는 알지만 그러나 내가 실천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머리만 커지고요, 손과 발은요, 너무나 미미해서, 저희들이 어릴때에 만화가 있었어요. 짱구 박사가 있었습니다. 머리는 이렇게 큰데, 손과 발은 너무나 작아요. 짱구 박사였어요. 우리는 영적으로 머리는 커지지만 아무런 순종하는 것이 없다. 지식적으로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그 말씀에 대해서 절대로 순종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죠. 여기에 이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을 소화하고, 그 말씀을 다시 꺼내서 묵상하고, 그래서 다시 넣고, 완전히 내것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나 실행에 있어서나 완전히 내것으로 하는 것이다. 두가지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읽고 이해하게 될때, 지식적으로 소화하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먼저 지식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끝난다면 의미가 없죠. 영적 짱구박사입니다. 그 아는 말씀을 내 생활 속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그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점검해 보는, 확인해 보는 그런 삶, 이것이 세번째 매력의 포인트입니다. 내것으로 하는 아름다움, 그것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이 신부의 이는 마치,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과 같다. 여기까지만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목욕장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은요, 양들이 이제 풀을 먹고 다니게 될때 더러워집니다. 여러분 양털을 보면 양털을 잘랐을때, 깎았을때 그 털들이 다 깨끗하진 않지요. 왜냐하면 양들이 항상 다니면서 먼지가 들어가고 더럽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목욕을 시켜야죠. 왜냐하면 털이 중요하기 때문에, 양털을 얻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 보면 털이 깎여진 양입니다. 그래서 목욕해서 나온 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게 될때, 신령한 사람이라야 이것을 먹습니다. 우리가 만일 육적인 눈을 가지고,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말씀을 육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죠. 니고데모가 주님을 만나서 "너는 거듭나야 한다." 그는 딴 생각 하고 있었어요. 주의 말씀을 이해할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거듭나야 된다고 이야기 할때, 그렇다면 제가 이 나이에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나와야 겠습니까?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죠. 그가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있을수도 없는 얘기입니다. 그는 주님 말씀을 이해해야 됩니다. 나중에 그는 이해했지요. 그는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령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령하기 위해서 우리는 겸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마음과 경건한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엎드려야 됩니다. 그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만한 지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헤아리고 또한 분석하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헛된 것들입니다. 그래서요, 여기 이 일을 가리켜서 털 깎인 암양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2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기 혼합하는 문제에 대해서 모세 율법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9-12).
여기 세가지를 금지했는데요. 첫째는, 씨를 섞어 뿌리지 말라. 이것은 교리를, 진리의 교리와 합당하지 않은 악한 교리, 이 두가지를 섞어서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두번째는요. 소와 나귀를 겨리해서 갈지말라. 이것은 봉사의 문제 있어서 입니다. 봉사에 있어서요, 멍에를 정한 짐승과 정하지 않은 짐승을 둘을 같이해서 멍에를 씌워서 일하게 하지 말라. 부동멍에, 같지 않은 멍에, 그것은 합당치 않다. 즉, 봉사에 있어서 혼합된 겁니다. 소와 나귀가요, 사이즈도 달라요. 그의 걸어가는 한 발자국을 뗄떼, 그 거리도 다릅니다. 이 둘이 어떻게 같이 일하겠어요. 쟁기를 갈면 비뚤어집니다. 이것은 합당한 봉사가 될수 없어요. 말씀의 교리에 있어서 순수해야 됩니다. 봉사에 있어서 우리는 성별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세번째요, 옷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 옷이라고 하는 것은 간증입니다. 간증에 있어서 혼합된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래서 여기 두가지, 하나는 무엇입니까? 양털, 또 하나는 베실입니다. 베실이라고 하는 것은 가늘게 섞어 꼬은 베실을 이야기 할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말합니다. 성막의 휘장이나 직조물에 있어서는 이 가늘게 꼰 베실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물이죠. 의, 그런데 양털, 이것은 같이 섞으면 안됩니다. 양털은 무엇을 말합니까? 양털은 육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과 영이 함께 할 수가 없다. 육과 영의 혼합된 간증, 이것은 간증을 버리는 것이다. 율법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이제 본문으로 돌아오면요, 네 이는 털 깎인 암양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우리가 먹고 그것을 내것으로 해서,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가 필요할까? 육적인 것은 금물입니다. 육적인 생각과, 육적인 생각은 높아진 마음입니다. 교만한 마음,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일수 없는, 불순종하는, 불순종의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겠어요?
그래서요, 털깎인 암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양들은 처음부터 새끼를 낳았어요. 그 새끼들은 전부 쌍둥이입니다. 하나가 아니고요, 쌍둥이입니다. 이 쌍둥이, 아까는 눈과 뺨, 이 두가지가 다 베일 아래있다.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씀했는데요. 여기 쌍태 새끼를 얘기하는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이, 또 하나는 두 유방, 이것은 쌍태를 말합니다. 이 쌍태라고 이야기하게 될때, 이것은 균형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것으로 하게 될때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균형있게 먹어야 된다. 그리고 소화해서 우리 것으로 해야 된다. 우리 주님 믿고 나서요, 하나님 말씀볼때 어떻습니까? 듣기 좋은게 있고 듣기 싫은게 있어요. 우리가 듣기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달짝지근한것,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 나에게 칭찬하는 말씀, 좋은 말씀, 이런 것은 우리는 좋아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초콜렛, 계속 초콜렛 하는 것처럼, 시금치, 콩, 이런 것은 절대로 안먹습니다. 어머니는 쫓아다니면서 그러면 안된다고 하죠. 계속 입에다 넣으려고 해도 그냥 뱉어버리죠. 이와 같은 불균형, 이것은 절대로 유익하지 않죠. 이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만일 육적인 영역에서도 그렇다면, 영적인 영역에서 불균형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심각합니다. 어떤 성도는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만큼 해 주셨는가? 신분의 즐거움에만 빠져 있어요. 에베소서 같은 서서신서를 보게 될때, 1-3장 신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예요. 주님이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다. 그런데 4장에서 6장 후반부에서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 위치에 걸맞게, 부르심에 걸맞게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권면합니다. 책망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휘젖습니다. 이런 말씀들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을뿐 아니라 주님의 제자다.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좋은데 제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많은 희생과 헌신이 따라가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지요. 그것을 별로 원치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와 같은 길로 간다면, 그와 같은 말씀에서 우리가 먹는 것이 있고, 내 뱉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바로 성장할수 없어요. 그것은 쌍태가 아니고요, 그것은 한마리 양입니다. 한마리 새끼입니다. 그래서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깎인 암양, 그런데 모두가 다 새끼를 가지고 있는데 쌍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하나님 말씀 골고루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모세오경이 있습니다. 역사서가 있습니다. 문학서, 지혜서가 있습니다. 예언서가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복음서와 사도행전, 역사서입니다. 그 뒤에 서신서가 있습닌다. 여기 교리가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침례에 관해서, 또 주의 만찬에 관해서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교회가 할 일인데 미리 복음서에서 말씀하셨어요. 사도행전에서는요, 그 말씀대로 성도들이 초대교회에 실천했어요. 그 다음에 서신서에 들어가면 그 말씀에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요. 이 모든 말씀은 다른 각도에서 우리가 다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말씀에서 우리는 다각도에서 또한 여러가지 분야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그것이 위로의 말씀이든, 교훈의 말씀이든, 책망의 말씀이든, 그 모든 말씀을 우리는 기름으로 받아야 됩니다. 그것이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매력의 포인트죠. '이'입니다. 이가 너무 아름답다.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아 4:3).
그 다음은 입술입니다. 입술은 홍색실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 홍색실이라고 할때요, 시편 22편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시 22:6-8).
시편 22편은 우리 주님께서 선한 목자로 고난 받으신 모양을 예언으로 말씀하셨죠.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나는 벌레라" 벌레는 무가치한거죠.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배척을 받고 무가치한 존재와 같이 취급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나는 벌레라고 할때, 이 벌레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홍색실이라고 할때, 이 홍색실은 전통적으로 홍색물감을 얻어서, 염색해서 얻은 실인데 이 홍색 물감은 어디서 얻는가? 코카스캡타이라고 하는 벌레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선인장 균입니다. 선인장 잎사귀 표면 위에서 자라고 있는 균이예요. 그것을 사람들은 긁어다가 모아서 찝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홍생 염료가 나옵니다. 그 염료를 가지고 물감을 들인 실, 이것이 홍색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자기가 벌레라고 했어요. 주님이 벌레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하나님이세요.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자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어디까지 낮아지셨는가? 벌레로 되셨어요. 그분은 짖이김을 당했어요. 십자가 위에서의 고난입니다. 그분의 보혈, 보혈도 붉은색이죠. 내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흰눈같이 희게 되리라. 우리의 죄가 그렇게 붉다면요, 우리 주님의 피는 더욱 더 붉습니다. 그 홍색실, 짖이겨져서 얻어진 그런 색, 그것은 주님의 고난을 말씀합니다. 여기 신부의 입술은요, 주님의 고난에 관해서 잘 마음 속에 이해하고 그것을 감사하고 있는 그런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말, 입술입니다. 그 입술이기 때문에 그 입은 어여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입술과 입은 우리가 하나로 생각할수 있어요. 입술이 홍색이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그것은 적절하고 합당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적절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매력 포인트는 어디있습니까? 세상 사람과 다른데는 어디에 있습니까? 언어생활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분야에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차이가 있습니까? 저 자신도 주님 앞에서 검토해봐야 됩니다. 우리 모든 각인이 주님 앞에서 검토해 봐야 됩니다. 내 언어 생활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가? 골로새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우리 언어 생활에 있어서요, 사도바울께서 골로새서에서 권면하시는 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아름답게 정화 정도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언어생활은 정화된 언어생활 정도가 아니고 이것은 예술적인 언어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름다운 언어생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함 같이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저녁을 들때도 음식하는 얘기를 많이 했었는데요. 간 맞추는게 얼마나 어려운가, 간 맞추는게 얼마나 예술인가, 간을 잘 맞추면 얼마나 맛있고요. 간이 안되면 아무리 좋은 재료를 넣어도 맛이없죠.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참 놀라운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도 건강에 해롭고, 그것이 또 너무 없어도 너무 심심해서 우리는 살아갈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소금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느정도 적절하게 배합하느냐, 이것이 손끝 맛이죠. 우리는 언어 생활에 있어서 얼만큼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 그것이 문법적으로 바르냐, 틀리냐, 이 말보다, 언어 자체, 문장 자체, 우리의 대화 자체 안의 내용 속에 얼만큼 소금과 같은, 그렇게 아름다운 간을 만들어 줄수 있는 은혜가 담겨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죠. 이 은혜를 이 신부는 어디서 얻었습니까? 이 은혜는요, 우리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그 주님께서, 죽는데까지 자기를 사랑했다라고 하는 것을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그것이 홍색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께서 짖이겨졌다. 왜? 나때문에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다, 라고 하는 것을 항상 기억한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은요, 달라질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기억지 않으면, 우리는 생각나는대로, 내 느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막 말해버리는거죠.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정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실수는 우리가 생각지 않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는 것을 망각하고 우리가 이야기하게 될때, 우리는 대단히 엄청난 실수를 하죠.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입술은 홍색실 같다. 우리 주님의 언어생활을 한번 보십시요.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눅 4:22).
우리 주님께서 나사렛에서요, 말씀하신 그 말씀을 사람들이 들었을때,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 그렇게 말씀했어요. 아까 언어생활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소금으로 고르게 함과 같이 하라. 은혜 가운데, 은혜를 뺄 수가 없어요. 우리 주님의 말씀은요, 은혜 가운데, 은혜로운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기이히 여겼습니다. 너무나 이상하게, 어떻게 저렇게 말할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은 감탄했다. 주님의 언어생활이 그랬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신약 복음서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결론은 뭡니까? 아무도 그같이 말씀한 자가 없다. 권위에서나, 그분의 말씀에서 확실한데 있어서나, 정직함에 있어서나, 그분께서 말씀하실때, 은혜로움에 있어서나, 긍휼과 자비에 있어서나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때요, 마음 속에 감탄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감동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때요. 권위를 느껴서 기이하게 여겼어요. 뿐만 아니라 그렇게 위대한 권위가 가득한 말씀 속에 어떻게 그렇게 은혜가 가득할까,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기이하게 생각했다, 라고 하는거죠.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할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을때, 우리의 언어생활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우리는 지방에서, 어디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도 다르죠.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로부터 계속 그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말은 그냥 거기에 젖어 있어요. 그래서 내가 그 말로 구사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우리의 언어는 얼만큼 그 말을 들을수 있느냐? 얼만큼 들었는가? 거기에 내 자신이 동화 되었는가, 라고 하는거죠. 먼저 내가 말을 들어야 내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고 말씀을 듣는 것은 없어요. 먼저 듣고 그 다음에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어야 됩니다. 이 말씀 속에서요. 그래서 그 말씀 앞에 먼저 내것으로 하는 것의 아름다움이 먼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말,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먹는 것의 아름다움과요, 표현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도구 중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효과있고 가장 위대한 도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있어요. 그것은 언어입니다. 언어만큼 더 강력한 도구는 없습니다. 이 위대한 도구를 얼만큼 예술적으로 사용하는가, 얼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은혜 가운데 신령하게 사용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멋이요, 맛이다. 그래서 신랑은 이 신부의 입술 때문에 칭찬하고 있다. 또 한가지 보겠습니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시 45:1-2).
여기 보세요, "왕은 인생보다 아름답다" 우리 주님은 인생보다 아름답습니다. 그분의 입술은 어떻습니까?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언어와 관련해서는요, 각 구절마다 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어떤 은혜입니까? 그분이 홍색이 되셨다. 짖이겨졌다. 엄청난 사랑을 나를 위해서,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는 그분을 우리가 기억하게 될때, 우리의 언어 생활이 바로 갈수 있습니다. 첫째, 45편 1절에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나온다" 그랬어요. 마음과 말은 뗄레야 뗄수가 없어요. 말은 어디서 나옵니까? 말은 입술에서 나오는게 아닙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마음과 입술은 뗄레야 뗄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 마음, 그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잘 관리해야 됩니다. 그 생명을 관리하기 위해서, 그것을 지배하는 것은, 그것은 은혜라 그 말입니다. 또 한가지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을 알게 하시고..."(사 50:4).
아버지께서 내게 학자의 혀를 주셨다. 그래서 나로 곤핍한 자, 당황 가운데 빠져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 실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포기하려고 이제 준비가 된 사람들, 이와 같은 사람들 마음 속에, 슬픔으로 가득차서, 도저히 일어설수 없는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무엇을 줄수 있을까? 때로는 말 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은 무엇을 말합니까? 말이 가지고 있는 힘을 말하죠. 적절한 말, 때에 맞는 말, 은쟁반의 금사과와 같은 말, 그것은 적절한 말입니다. 때에 합당한 말입니다. 이 합당한 말은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학자의 혀입니다. 이 학자의 혀로 이 곤핍한 사람을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로, 합당한 말씀으로 그 마음을 확 세워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하셨죠.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게 될때 자기 몸을 버리셨어요. 이 주님께서 신부를 향해서 이제 아름다움을 감탄하는데, 그 신부는 주님의 언어를 배운 그 신부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이 신랑은 이 신부를 감탄하죠. 그 입술, 그 입, 그 다음에 뺨입니다.
"너울 속의 네 뺨"을 석류 한쪽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너울 속의 뺨"입니다. 다섯번째 매력 포인트는 뺨이다. 뺨은 얼굴에 있습니다. 여기 얼굴에 있는 것은 눈도 있습니다.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뺨이 있어요. 눈과 뺨을 비교하게 될때, 뺨은 눈 바로 아래 있죠. 그런데 눈은 안구 속에 약간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이 뺨은 나와 있어요. 이 관골, 이 관골은 튀어나와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아름다움입니다. 개개인의 얼굴은 개개인을 말해주는데, 그 개개인에서 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말씀해주고 있어요. 그 아름다움은 어떤 아름다움일까? 뺨의 아름다움은 어떤 것일까? 우리 주님께서 보시는 뺨의 아름다움, 그것은 생명력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비유한 것은 석류 한쪽이라 말했습니다. 석류 한쪽, 석류라고 말하지 않고 석류 한쪽이라 말한 것, 석류를 쪼갰어요. 쪼개게 될때 그 안에 씨가 있죠. 석류는 독특한 식물이죠. 독특한 열매입니다. 석류 나무의 열매는 그것을 열리게 될때, 그 안에는 씨로 가득합니다. 씨라고 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으로 가득하다. 생명력, 우리 주님께서는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셨어요. 그분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을뿐 아니라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승격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다시 영광 가운데 오실 분입니다. 그분은 부활의 생명과 능력으로 가득한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수 있는 분입니다. 변화시키셨어요. 우리에게 부활을 통해서요, 새 생명 안에서 우리가 살도록 했어요. 석류 한쪽, 우리의 이 아름다움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력으로 기인한다. 그런데 그 생명력은요, 너울 밑에 있어요. 주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께서 시편 77편 말씀을 보시면 시편 기자가 계속해서, 9절까지 절망 가운데, 심지어는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는가? 라고 이야기 합니다. 절망 가운데서 그 절망의 늪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10절에 가면요,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납니다. 시편은요, 이런 시가 많습니다. 앞의 시작은요, 시편에서 처음에는 생명력 넘치게 찬양을 하다가 도중에 갑자기 절망에 빠지는 그런 시는 없어요. 처음에 여러가지 어려움 가운데, 절망 가운데, 마음 속의 곤고함 가운데, 심지어는 시편 77편의 기자와도 같이,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는가? 라고 이야기 하다가 이 시편 기자들이 보여주는 위대한 생명력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주님을 보는 겁니다. 그리고나서 그와 같은 환경은 하나도 변한게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마음 속에 찬양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생명력입니다. 이와 같은 생명력은 세상이 이해할수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요, 세상에서는 전설이냐? 그것은 가상의 그냥 막연한 소망이냐? 세상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 안에, 이 신부의 속에는 뺨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 뺨은 너울 속에 가려져 있어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인해서 기뻐하십니다. 생명력, 이 생명력은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앞에서는요, 입술로부터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언어표현입니다. 그런데 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표현입니까? 그것은 생명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얼굴표정입니다. 얼굴 표정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느냐, 이 문제가 아니고요. 얼굴에서 얼만큼 생명력이 나타나는가, 우리 마음 속에 우리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가? 시편 77편 기자가 처음에 실망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던 그런 모양이 아니고요. 그렇다면 슬픈 빛을 띄겠죠. 절망 가운데 어두운 얼굴이겠죠.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요. 주님을 발견하게 될때,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도 다 바꾸실수 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에게 의지하게 될때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앞에 나갑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갑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게 될때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우리는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붙듭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토대로해서 기도합니다. 이와 같은 관계,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게 될때,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나 자신 속에 푹 빠집니다. 자기연민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힘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실망이 우리를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지어는 그와 같은 상황 속에 있었다가도 우리 주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게 될때요, 주님의 엄연한 현실을 우리가 보게 될때, 그분의 약속을 우리가 다시 믿고 주님 앞에 우리가 엎드리게 될때, 우리의 상황은 순식간에 변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변의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황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활력입니다. 일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변의 환경이 안바껴도 내 마음이 바뀌면 찬양이 나옵니다. 거기서부터 일은 시작되는거죠. 그 가운데 주님께서는 환경도 바꾸실지도 모릅니다. 환경을 바꾸시든 바꾸시지 않든, 주님께서 우리에게 활력을 주십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베일 아래에서, 너울 아래에서 보게 될때, 주님께서는 우리로부터 매력을 느끼고 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가 때때로 절망 속에서 벌떡 일어난 그것을 보고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매력을 느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까? 여기 그래서 두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언어표현, 구두 표현, 그리고 얼굴 표현. 우리가 이것을 마음 속에 두고요, 우리가 살아가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로부터 매력을 느끼고 우리로 인해서 매료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또 한가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아 4:4).
목입니다. 이 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의지를 말하죠. 그래서 성경에서 어떤때는 예쁜 목, 어떤 때는 참 흉악한 목, 그것을 말합니다. 목이 뻗뻗하다. 목이 늘어진 목이다. 이런 목들은요, 그것은 자기 고집으로 가득한 목입니다. 자기 의지로 가득한 목이예요. 우리 원래 그렇게 살았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히 멋진 덕목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 고집, 그래서 그 사람은 고집이 세다고 할때, 은근히 그것이 아름다운 속성인양,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고집이 센가, 자기가 얼마나 의지가 강한가, 이것을 가지고 성공의 비결과도 같이 이야기하죠. 그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의지와 관련해서 그것이 목이라면, 우리 목은 어떤 목이여야 할까? 누가복음 13장 말씀을 보면요,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져서, 펼수 없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물론 거기와서 고쳐주셨어요. 그 허리가 꼬부라졌을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그는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항상 땅만 보고 살아야 합니다. 목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목을 여기서는 무엇에다 비유하고 있습니까? 망대, 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탑이라고 하는 것은 꼬부라진 탑, 없어요. 찹은요, 곧바릅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서 높이 올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망대, 이 탑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이것은 다윗의 망대입니다. 다윗은 전쟁의 사람이죠. 다윗은 패배한 적이 없어요. 그는 하나님 앞에 항상 이렇게 말하죠. 그는 목자로 일할때도 전쟁했어요. 사자와 곰과 싸워서 이깁니다. 왜 이길까요? 그는요, 양들을 돌보고 양들은 반드시 살려야 된다. 양은 자기 아버지 양이예요. 아버지의 재산입니다. 양을 불상히 여깁니다. 양을 사랑합니다. 그래서요, 절대로 사자에게 져서는 안되는 겁니다. 곰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된다. 내 사전에 패배는 없다. 왜? 양들을 돌봐야 되기 때문에, 목자의 심정입니다. 목자의 심정은 이래야 되는 것입니다.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굽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에서, 전쟁에서, 이긴다고 하는 마음, 그것은 다윗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그가 이제 골리앗을 물리치면서 그가 대비하죠. 그는 양을 돌보기 위해서 목자로서 실전에 짐승과 싸우는 전쟁이 아니고요. 그는 이제 군인이 되어서, 실전에 들어가서 싸우는 골리앗, 격파로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수많은 전쟁에서 그는 언제나 전쟁에 임하기 전에 "하나님 이 전쟁에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내가 이 전쟁을 너에게 붙였다." 다윗의 전쟁에 관한 예술은 그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활과 칼과 무력과 이런 것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붙이시느냐, 아니냐, 라고 하는데 있다는 것을 그는 터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쟁과 관련해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과 교신했습니다. 여기 이 신부는 목이 아름답습니다. 목이 부드러운 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목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의지에 있어서 순복하는 아름다움이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내 고집이 있는게 아니죠.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이다. 내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않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내뜻이다. 성령님께서 내 속에 계시고, 그 성령님은 언제나 나라고 하는 자유 의사를 가지고 있는, 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성령님의 의사와 언제나 일치한다. 그것은 순복이죠. 순복 없이는 절대로 이와 같은 일이 있을수 없어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남편, 아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합니다. 인간으로서 동등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가장입니다. 아내는 순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죠. 그것이 이루어지게 될때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깨지게 될때 가정은 어려워집니다. 부부관계는 어려워집니다. 가사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질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 우리는 전폭적으로 언제나 이 뜻을 받아들일 그런 자세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취사 선택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 두가지 중에서요, 우리는 순복, 그것은 신랑이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래서 그 순복과 관련해서 무엇이 여기 결부가 되어 있습니까? 그 망대 안에는 일천의 방패가 담겨있다. 에베소서 6장 말씀에서 방패는 '믿음의 방패'라 말씀하고 있죠. 이 방패는 방어하는 무기입니다. 이 방어하는 무기가 다윗의 망대 안에 가득차 있어요. 왜? 원수가 옵니다. 원수가 오는 것을 어디서 살펴 볼수 있어요? 망대에서 보는 것입니다. 원수의 움직임을 망대 위에서 보는 겁니다. 깨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깨어 기도하라"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원수에게 패배당합니까? 원수에게 농락당합니다. 원수로부터 우리는 많은 물자들을 뺏깁니다. 우리의 모든 명예도 상실해 버립니다. 엄청난 손실을 보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 망대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일천의 방패가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어할수 있습니다. 신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복함으로 자기를 방어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방어하지 못하면 우리는 노예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빼앗기는 거죠. 그래서는 안됩니다. 신랑은 이 신부를 바라보게 될때, 그런 면에서 아름다움을 감탄하고 있습니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아 4:5).
마지막으로 두 유방입니다. 일곱번째 매력 포인트는요, 두 유방이다. 가슴입니다. 그 가슴을 어디다가 비유하고 있습니까?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이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여기도 쌍태가 나옵니다. 이 두 유방, 가슴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애정과 양육의 자리입니다. 이 가슴은, 우리는 기억하죠. 아가서 1장 말씀에서 "왕의 상에 앉았을때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향낭이다." 이렇게 말씀했지요. 이 신부는 자기의 사랑하는 신랑을 몰약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 몰약은 적은 몰약이 아니고 많은 몰약을 모아서 주머니에 담아서 그것을 또 다른 주머니, 그것은 자기 가슴이예요. 그 가슴 사이에 뭍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품고 있습니다. 이 신부는 언제나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몰약이다. 아니, 몰약 주머니다. 몰약 향낭은 자기의 가슴이라고 하는 몰약 주머니 또 담고 있다. 그것을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있다. 그분의 고난, 그분의 죽음, 그 죽음은 자기를 향한 사랑의 정도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다 그 말이죠. 사랑의 깊이를 안다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는 말씀은 그것은 100% 아멘입니다. 그것은 전폭적으로 우리가 마음으로 지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변론의 여지가 없어요. "나와 함께 가자" 그렇지요, 가야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때, 그것은 모두가 다 나의 귀의 음악아닙니까?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의지,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언제나 유익이요, 기쁨아닙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 몰약향낭, 바로 그 자리가 이 두 유방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몰약향낭이 있는 곳이예요. 거기가 애정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가 양육의 자리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와 같다."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인다. 우리가 지난번에 2장에서도 그것을 봤지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
주님이 양떼 먹이는 자리는 언제나 백합화가 있는데서 양떼를 먹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6:3).
주님이 양떼 먹이는 곳은 언제나 백합화예요. 순결한 곳입니다. 거룩한 곳입니다. 양들은 그런 분위기에서 꼴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입니다. 목자의 책임입니다. 목자의 또한 특권입니다. 양들을 독초를 먹이겠습니까? 악한 것들을 먹이겠습니까? 양들은, 어린아이는 신령한 것을 먹어야 합니다. 신령한 젖을 먹어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가 어린 것들을 먹이는 자리다. 어린 것을 먹이는 자리는 순결한 곳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야 한다는 말이죠. 여기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이 말씀에서요, 이 두 유방의 아름다움. 이것은 애정과 양육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요.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들은 이 유월절을 먹어라. 그리고 그것을 지켜라. 그것을 지키게 될때, 반드시 너희 어린 아이들이 너희들에게 묻게 하라. 여호수아 때에요, 요단강에 있는 돌을 가지고 쌓았지요. 그것은 요단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고 하는 것을, 이 역사적인 위대한 사건을 대대로 기억토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것을 쌓게 하시고 기념돌입니다. 기념돌이라고 하는 것은 기 시대만이 아니라, 그 세대만이 아니라 그 후의 모든 세대가 그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된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요, 한 세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그 모든 위대한 일을 기억해야 된다고 하나님께서는 의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일은 계속해서 세대의, 다음의 또한 세대에, 또 그 다음 세대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 마음 속에 전수해 주고 하는 위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은 엄연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시편 78편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아삽의 교훈입니다.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78:1-8).
여기 보면요, 적어도 다섯, 여섯 세대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제일 처음에 3절 말씀을 보면 '우리 열조'가 나옵니다. 이것을 쓴 사람의 조상의 세대를 말합니다. 이것이 한 세대만이 아니고 여러 세대라면 이것은 많은 세대입니다. 우리 열조부터 시작해서 우리에게 전한 바 입니다. 또한 그것을 우리 자손에게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4절 하반절에 보면 후대에 전한다,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 5절 하반절에 보면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고" 그 다음에 6절에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하고 그들은 일어나 또 그 자손에게 알게하고" 얼마나 많은 세대들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교훈은 그것은 다음 세대에 전해져야 됩니다. 이것은 양육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교육에 열을 두지만 영적인 교육, 구원받아야 되고, 구원받고 주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또한 모임의 지체가 되어서 이땅에서 주님께서 두신 이 뜻을 이뤄나가는 일에 있어서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라고 하는 점은 이제 이 신부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사사기 2장 말씀에 보면요. 3세대가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죽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을때 그 세대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 세대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 세대, 세번째 세대, 여호수아 세대에는 그 다음 세대에게 말씀을 증거해 줬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따랐어요. 그런데 그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본인은 따랐어요. 그런데 전해주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3세대에 가서는 하나님을 떠났다. 이것이 사사기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3세대 경고입니다. 첫세대, 하나님의 말씀을 본인이 지켰어요. 그리고 본인만 지킨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다음 세대에 전해 줬어요. 그 다음에 두번째 세대는 본인은 지켰어요. 그러나 다음 세대에 전해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3세대에 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어요. 우리 책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세대가 말씀을 순종하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만이 다가 아니예요. 얼마나 많은 경우에 내가 주님 말씀 순종하면 됬다고 생각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가지 더 요구하시죠. 다음 세대에, 너도 순종하고, 다음 세대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순종하도록 하라. 우리 주님께서 위임하셨죠. 부활하신 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각처에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가르치는 것과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론으로 논파, 이론으로 설명하고, 이론으로 가르치고, 이런게 아니고요. 지식적인 하나님의 지식, 그것을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순종해야 된다. 내 세대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도 그렇게 해야 된다. 참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위임입니다. 이 여인은 쌍태 노루 새끼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아까 '이'도 쌍태였죠. 균형입니다. 여기도 균형이 있어요.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뿐만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 이것 균형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이, 우리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균형있게 배워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것을 다 얻고, 먹고, 그리고 우리 것으로 하듯, 우리 자녀들, 다음 세대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알고 배우고 순종하고 가야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소원이죠. 오늘 저희들은요, 이 신부 안에 있는 일곱가지 아름다움, 매력 포인트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참 주님이 그 신부에게 주신 놀라운 칭찬이죠.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만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아 4:6).
우리는 2장의 마지막 말씀에서, 2장 마지막절 17절에서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아가서에 두번,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간다"고 하는 구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2장이고, 하나는 4장입니다. 2장에서 동트는, 지금 아직 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고대하고 있어요. 2장에서, 17절에서는 뭐를 고대합니까? 베데르 산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 돌아와서, 라고 소원하고 있어요. 지금 주님의 부재시죠. 육신으로 부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주님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립니다. 베데르는 격리죠. 주님 떠나가셨어요. 대신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성령과 함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간절히 고대하고 있죠. 그런데 4장 6절 말씀을 가면, 이제 비슷한 말씀인데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여기까지 똑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디어디로 가리라" 아까는 그분이 오시는 것을 얘기했는데 이제는 내가 가리라. 어디로 갑니까? 몰약산과 유향산으로 갑니다. 여기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가 왔어요. 아직 주님은 부재중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이 오실때까지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두가지예요. 2장 17절에서는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고대해야 합니다. 또 한가지, 그냥 고대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요. 여기 균형이 있어요. 4장 6절 말씀에는 우리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의 책임은 뭔가? 우리는 고대할 뿐만 아니라 몰약산으로 가고 유향산으로 가야된다. 주님 오실때까지 우리는 어디에 우리 마음을 두고 있어야 됩니까? 몰약산,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유향산, 주님의 생애에서의 향기입니다. 몰약산과 유향산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죽음에서 나타난 향기, 그리고 생애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신 그분의 향기, 이 두가지에 우리는 항상 마음을 두고 살아야 됩니다. 주님 오실때까지요.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 주님의 오심의 거룩한 교리와 위대한 진실과 주님의 위대한 약속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불경건한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농락합니다. 얼마나 많은 악한 교리를 통해서요, 이익을 보고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 오실때까지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고대해야 됩니다. 그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오실 때까지 하는 일에 착념해야 됩니다. 누가복음이 그렇게 말씀했죠. 어떻게 착념합니까? 몰약산과 유향산의 그 향기를 우리가 맡고, 우리는 복음에서 그 진리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리는 모임으로 모여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간증을 나타내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개인의 삶의 간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고대하고 그리고 몰약산과 유향산에 거기가서 머물러야 됩니다. 또 한가지는요, 이 여인은 지금까지 칭찬을 받았어요. 팔방미인의 칭찬을 받았어요. 그러나 자기 자신은 아직 환하지 못하다. 아직도 동트는 때처럼 희미하다. 주님이 우리를 칭찬하시면요, 우리는 그렇지요.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지요.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더욱 더 몸둘 바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아직 날이 개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요, 아직도 부족한 것들이 많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모습으로 더욱 더 변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희들의 소원이죠. 이것이 저희들의 주님 앞에서의 합당한 자세죠.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고 계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앞에서, "주님 이 부족한 자를 계속해서 변화시켜 주십시요." 주님 앞에 우리가 그렇게 고백드려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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