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서 03. 신랑의 요청, 2장 8-17절> 2014년 / 정형모 형제님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아 2:8-17).
주님께서 저희들이 읽은 말씀을 위해서 복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저희들은 신랑의 인도를 받고 잔치집에 들어갔던 신부가 그 신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을 느끼고 그 사랑을 가리켜서 내 위의 기라고 말한 것을 보았지요. 엄청난 사랑을 그녀는 느꼈고요. 그래서 사랑으로 인해서 지쳐서 병에 걸렸던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건포도 떡으로 또 사과로 힘을 돕고 또 신선케하라는 말씀도 저희들이 기억합니다. 이제 신랑이 그 신부를 왼팔로 배게해주고 또 오른팔로 안아주는 지주와 또 애정, 이 표현을 또한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노루와 들사슴으로 부탁한다고 하는 말씀, 저희들이 기억합니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라.
이제 이 여인이 8절 말씀에 와서 보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는 2장에도 나오고 이제 5장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가 2장과 5장에 나오게 될때 그 이후에 이 여인은 꿈을 꾸고 이 꿈 안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파수꾼을 만나고 또 사랑하는 자를 찾아 헤매고 이런 모습을 저희들이 3장과 5장에서 보게 되는데요. 이 목소리, 그 목소리를 이 여인은 이제 듣고 있습니다. 마치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처럼 그 여인은 그 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가 8절 말씀을 보면 그 목소리와 함께,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아 2:8).
산을 넘어오는 그 신랑의 모습에 대해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노루와 어린 사슴은 소심하고 민감하고 하지만 또한 대단히 빠르죠. 특별히 산을 넘어오게 될때 빨리 넘어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 2:9).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넘어 빨리 오는구나"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그런데 이제 9절 말씀에는요.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여기 벽이 있고요. 여기 창이 있습니다. 그 벽은 우리 벽이고 이 창은 격자 창입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창이 작은 구멍들로, 구멍을 통해서 볼수 있는 그런 창이죠. 여기는 창살 틈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통해서 아가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씀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생각해 보았는데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총교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지역교회의 관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우리 개개인의 관계를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먼저 경륜적으로 보게 될때, 여기 이 말씀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이 신부는 신랑이 이제 산을 넘어서, 높은산, 작은산, 이것을 빨리 넘어서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경륜적으로 보게 될때, 첫째, 교회는요. 이천년동안 주님께서 떠나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제자들을 떠났어요. 사도행전 1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보는데서 따나신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는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 또 다락방에서도 말씀하셨지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했어요. 다시오면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인도하리라. 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오심에 대해서 공중재림, 우리는 휴거 될 겁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곧 오시게 될때, 하늘로 올라갈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습니까? 경륜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은 주님을 배척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은 유대인들을 봐도 그렇게 완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저렇게 배척할수 있을까? 저희는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만 많은 유대인들을 보지만 그들은 강력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아주 극소수의 유대인들이, 소위 미사이아닉(?) 주라고 해서 메시아를 자기들의 구세주로 믿는다. 유대인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메시아를 믿는 유대인들이라는 근거는 어디서부터 시작됬는가?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부터 시작됬다. 교회가 처음 시작될때 누가 복음을 전했습니까? 유대인들이 전했죠. 이방인들이 복음 전한게 아니고요. 유대인들부터 복음을 전했죠.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언서를 통해서 이제 그들 가운데 거짓 메시아,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될때, 유대인들은 얼마나 그 거짓 메시아를 자기들의 메시아인 줄 착각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환난시대에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적그리스도와 또한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 고통을 겪을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창살 틈을 통해서 옅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서 창으로 들여다보고 창살 틈으로 옅보는구나" 그냥 커다란 창에 자기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니고요. 격자 창입니다. 그래서 작은 구멍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분이 이렇게 나타난 모습을 보게 될때, 틈을 통해서밖에 볼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의 모형과 또 에언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이 메시아에 관해서,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씀했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 격자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돌아가는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요. 하나님 말씀뿐만 아니라, 사건들을 통해서, 이 사건들은 무엇입니까?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많은 일들을 주님께서 다루시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게 될때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말씀했지만 이 마지막에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아들은 만유의 후사이시고 영광의 광채이시고 그 형상의 본체라. 그분을 통해서 천지를 지으셨고 또한 그분을 통해서 천지는 말씀에 의해서 붇들려지고 있다. 달과 해와 천체는 우리 주님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붇들려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물리적인 것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흘러가는 모든 역사는 우리 주님께서 붇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천체만 붇들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흘러가는 모든 역사도 붇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겔서 1장 말씀을 보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는데, 거기에 병거가 나오죠. 거기에 바퀴가 있습니다. 바퀴가 빨리 돌아갑니다. 또한 그 병거가 빨리 움직입니다. 이리로 저리로 원하는대로 움직이는데, 그 위에는 보좌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가 되어서 먼 나라에 가 있지만 그리고 에스겔이 보게 될때 답답한 마음 가운데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섰을때에 하나님께서는 환상 가운데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비참하고 포로 가운데, 바벨론의 포로로 가장 암담한 현실 속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러나 에스겔에게 보여준 환상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고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이 바퀴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입니다. 그것은 그냥 돌아가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가 주권적인 능력 가운데 이 모든 사건들을 통제하고 계시다. 그래서 에스겔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은혜 가운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되어지는 일들은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현재 이슬람 국가가 일어나서 또 이란에서 난리를 겪고 있고 또 러시아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진하고 있고 세상이 돌아가는 경제적인 문제, 또한 사회적인, 국가적인, 군사적인, 상당히 많은 분야의 문제를 보게 될 때에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저희들 마음 속에 하나님 앞에 언제나 위로와 희망을 갖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보좌에 지금도 앉아 계시다. 이 모든 일들 위에 그들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겉으로 나타나지만 그 위에서 하나님께서 통제하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모든 일들을 이제 그의 계획 가운데 프로그램 속에서 이끌어가고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승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결국 성취될 것이다, 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격자 창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세상에 돌아가는 수많은 사건들입니다. 이 수많은 사건은 하나님 말씀과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하게 될때, 우리는 주님께서 지금 오고 계시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온전히 볼수 없는, 격자 창에서는 그 모습을 온전히 볼수 없어요. 그러나 그 모습이 보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제와 그리고 그 말씀과 관련해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보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지금 오고 계시다. 주님의 발자국 소리, 예리성을 우리는 듣고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천년이 흘렀습니다. 주님은 곧 오실 겁니다. 공중재림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노루와도 같이, 또한 어린 사슴과도 같이, 높은 산들을 대단히 빨리 넘어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지금 메시아를 거절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환난시대 동안에 그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습니다. 그들의 불신과 또한 메시아를 거절한 이 모든 결과를 통해서 그들이 겪을 고통이 있습니다. 말씀도 그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 민족,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 민족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재림하심으로 인해서 이 민족은 이제 회개하고 그들 가운데 성신이 임하고 그들이 온전히 회복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통해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방 온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후예인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은혜와 또한 긍휼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륜적으로 보게 될때,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이 신부가 그 신랑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말씀 속에서 잘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한 가지, 우리가 경륜적으로 볼 때에 피조물들이요. 어떻습니까?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피조물들이, 모든 창조물들이요. 로마서 8장 말씀을 보면 다 탄식하고 신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될때, 왕의 왕으로 주의 주로 이 땅에 오셔서 온 세계를 통치하게 되실때, 그때 어떤 현상이 일어날겁니까? 온 세상이, 모든 피조물들이 완전히 회복될 겁니다. 그 모든 질서가 다시 회복되고 사막에서 장미꽃 피고 놀라운 환경적 변화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도 구원받습니다. 이 위대한 일들이요. 우리는 경륜적인 측면에서 보게 될 때에 일어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교회만 구속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도 구속하시고, 또한 그의 부활의 능력 가운데 저희들을 세우신 이분께서 다시 오시게 될때, 일어나게 될 놀라운 일이다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지요. 신부의 소망은 이분이 오시는 것입니다. 빨리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빨리 오실수 있어요.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아무리 높은 언덕이라도 그분은요, 누루와도 같이, 사슴과도 같이 재빨리 오실수 있다. 어떤 것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는, 방해할수 있는, 그런 존재는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말씀에서 발견할수 있죠.
그런데 이제 실제적인 면에서 우리가 또 보겠습니다. 여기 "벽"이라는 말씀이 있어요. "우리의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옅보는구나" 이제 음성,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 8절 말씀에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이 여인이 그 목소리를 들었죠. 이 여인은 조금 전에 사랑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사랑,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해서 그 사랑은 너무나 고귀하고요.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것도 바꿀수 없고 우리를 그렇게 신선하게 만들어 주었고 우리로 하여금 온 세상이 달리 보이도록까지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신부의 문제, 사실 우리 초신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요,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라앟시는 것은 너무나 귀합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그 사랑에 그냥 빠져있기만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상에 올라갔을때 그들은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우리 주님께서 거기에 나타나셨죠. 거기에 모세도 나타났고 엘리야도 나타났어요. 베드로는 너무나 활홍한 그와 같은 분위기, 그리스도께서, 주님께서 미래에서 나타나실 영광을 예고편으로 보여주시는 이 위대한 산상에서의, 정상에서의 이 경험, 그것은 베드로 마음 속에 너무나 고귀해서요. 그는 여기에 초막을 지읍시다. 그냥 여기 머물러 있읍시다. 라고 이야기 했지요.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무슨 일들이 있었습니까? 거기 산에서 내려 왔을때 거기 귀신들린 그 아이가 고통 가운데 거품을 물고, 그 아버지는 그 아이를 낫게 할수 없는 현실을 보고 너무나 고통 가운데 있었죠. 산 아래에서는 여전히 사단이 지배하는, 죄 가운데서 고통 가운데 사람들이 신음하는, 그와 같은 현실이 있었다. 그런데 산 위에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우리 여기에 초막을 짓고 여기 그냥 계속, 여기서 이 즐거운, 이 환상적인 이런 경험을 계속해서 하고 싶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쉽게 빠질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놓치지 않고 싶습니다. 주님과 교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하고만 교제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잊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벽이예요.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 신랑은 이렇게 말하죠.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이 음성은요, 이 음성은 오시는 음성, 그리고 그분께서 뭔가 제시하시는 음성입니다. 함께 가자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그 사랑을 우리가 증기고 감사하고, 어제 저희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게 될때,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가 느끼게 되죠. 그 사랑을 우리가 느끼게 될때,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느끼게 될때, 정상적이라면 우리는 사랑을 주신만큼, 그만큼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간사를 표현하게 되겠지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과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죠.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 귀의 음악입니다. 우리는 주님앞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죄인이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아름답게 단장해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그리고 우리보고 아름답다고 이야기 해 주실때, 우리는 얼마나 기쁩니까? 우리는 그냥 여기에 빠져있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랑에 만일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랑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타락하게 될 겁니다. 우리 주님과의 관계가 이제 시들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간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너희는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하는 주님의 계명이 있습니다. 주님의 권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범사, 모든 일들 가운데 주님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그것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일 가운데서, 주님과 관련이 있고 주님의 음성이 그 가운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감사한다, 라고 하는거죠. 주님과의 대화에서, 주님과의 사랑을 즐기는 관계에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땅한 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감사하는 겁니다. 이 감사를 통해서 우리는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또한 사랑을 우리가 마땅히, 합당히, 그리고 즐겁게 즐길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감사를 표현하게 될때 주님은 기뻐하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점점 깊어지게 될 겁니다. 그런데 여기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이 신랑이 이 여인에게 이야기하죠. 이 여인은 그분의 음성을 들었어요. 산을 넘어오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어요.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아 2:11).
그분께서 이제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겨울이 다 갔다. 비도 그쳤다. 이 비라고 하는 것은요. 봄비가 올 때에, 봄비가 오면 만물이 소생하고 시원해지죠. 신선해 집니다. 그러나 여기 비라고 하는 것은 그런 비가 아니고요.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암울하게 하고 춥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우울하게 만드는 그런 비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도 다 사라졌다. "겨울이 지나고" 조금 전에 우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 이천년 동안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지금도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섬기는 주님, 그분을 세상이 배척했기 때문에 교회도 세상은 밷어내는 것입니다. 선생보다 제자가 더 나을수가 없다. 우리 주님이 배척을 받았다면 교회는 당연히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배척받는 이 시기, 배척받은 우리 주님께서 계속해서 배척을 받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 이제 영광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분이 배척받을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올 때까지, 그것은 겨울입니다. 그것은 추운 비가 오는 그런 시절입니다. 이 때가 이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겨울도 가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온다. 경륜적으로 말하면요.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지금 겨울입니다. 그들은 무지 가운데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들은 메시아를 계속해서 배척하고 있지요. 그러나 환난이 끝나고 때가 올 겁니다. 그들 가운데 놀라운 꽃이 피고 이제 새가 노래하는 그때가 올 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랑되신 그분께서 이제 교회를 위해서 오실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놀라운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게 될 겁니다.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칠겁니다.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아 2:12).
지면에는 꽃이 피었다. 땅에는 미술입니다. 공중에는 음악입니다. 땅에는요, 꽃이 피었어요.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가면서 노래합니다. 땅과 하늘, 모든 것이 다 변할 것이다. 우리는 이 광경을 실제적으로 또 본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분으로 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부활 이전에 먼저 돌아가신 분입니다. 고난 받으신 분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피흘려 돌아가신 보혈을 흘리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부활하셨어요. 그 부활의 능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도 전해졌어요. 그 부활의 능력은 이제 우리 주님께서 행하는 일마다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오시게 될때, 아무것도, 주님을 곧 올수 없도록 방해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그분께서요, 이제 오시게 될때, 그때를 신부는 고대하죠. 이분께서 신부에게 제안합니다. "나와 함께 가자" 이 제안에 대해서 이 신부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우리는 3장에 가서 이 여인이 꿈을 꾸면서 막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요.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주님께서 가자고 하는데요. 온전히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 그 부활의 능력은요. 부활 생명의 풍성함으로 나타납니다. 여기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고요,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고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 이 모든 것들은요, 부활의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생명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 부활의 생명, 그것은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었을뿐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새 생명이 우리 속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말로할 수 없이 큰 것이죠. 우리 잠깐만 이것과 관련해서 빌립보서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도바울께서 빌립보서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 고난의 참여함" 즉, "고난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알려하여" 그 죽으심을 본받는다, 이렇게 말씀했어요. 그리스도를 알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될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부활의 권능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요, 이 아들을 살리시게 될때, 무한한 권능을 통해서 살리셨습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리셨습니다. 이 부활의 권능, 이 권능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이 권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능력 가운데, 새롭게 변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을 알게 될때, 또 한가지 알고자 하는 것은 그 고난의 교제가 무엇인가? 고난의 참여함을 알려한다. 부활을 알면요, 고난의 교제, 고난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은 순교입니다. 죽는 겁니다. 배척 받아서요. 수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작은 고난서부터 시작해서 큰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거절 당하고 배척받는 주님입니다. 그분을 따라가게 될때, 그분의 생명을 우리가 느끼게 될때,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는 배척받습니다. 우리는 핍박받습니다. 거절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상을 주고 높이 평가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타락했을때,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뭔가 칭송을 받았습니다. 버가모 교회, 그것은 일곱교회 중에서 우리에게 그러한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교회가 아닙니까? 세상은 절대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아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반대하는 것입니다. 배척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배척했듯 마찬가지로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도는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고난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원한다. 여기 아가서 2장에서는요, 신랑이 신부에게 나와 함께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는 겁니까?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그리로 가자는 겁니다.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생명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 주님의 고난이 무엇인지 그 고난의 교제가 무엇인지 우리는 그것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사랑한다. 어여쁘다. 이 아름답고, 또 참 마음에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게 될때, 이 신랑의 말씀 속에서요. 이제 나오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단계다. 이제는 나와 함께 이 부활의 권능 가운데 이제 나아가자. 그것은 고난이 무엇인지도 알자는 것입니다. 고난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알자. 여기 공중에는 새가 노래하지요. 땅에는 꽃이 피었지요. 미술과 음악, 이것은 영적인 예술입니다. 그것은 부활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위대한 현실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배척받은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승청하셨어요. 뿐만 아니라 그분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세요. 이제 그분은 때가 되면 오실 겁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위대한 능력을 우리가 알고 있고, 그 위대한 영광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 주님 오실때까지 그 기간 동안에 우리는 배척받을 것에 대해서, 반대 받을 것에 대해서 우리는 사실이라고 현실이라고 인정하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가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그 다음 말씀을 보면요.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3).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다시 한번 그런 이야기를 하죠. "나의 사랑"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이 신부와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구원해 주셨어요. 저희들이 구원받고 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희들의 죄를 용서받았을뿐 아니라 저희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때, 부활하신 것을 토대로 해서, 우리도 역시 부활했습니다. 새 생명이 우리 속에 역사합니다.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신령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 신령한 삶은 어떤 것으로 표현이 되는가? 그것은 주님과 함께 고난받는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배척받는 것으로 표현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영문밖으로 능욕을 지고 우리는 나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에 초청하신 것입니다. '나와 함께 가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바위 틈 낭떠러기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우리 주님께서 또 다른 심상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데요.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위 틈을 말하고 있습니다. "낭떠리지 은밀한 곳" 이것을 다른말로 하면요, 절벽이 아니라 계단과 같은, 그런 밋밋한게 아니죠. 한단계가 있고 또 그 위에 또 다른 범위가 있고, 그래서 마치 계단과 같습니다. 계단과 그 은밀한 곳이라고 말씀했어요. 바위 사이에, 바위 가운데 쪼개진 이 틈, 그리고 계단과 같은, 그와 같은, 절벽, 거기에 있는 나의 비둘기. 우리 주님께서는 1장에서 이미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그랬지요. 신랑이 신부에게 비둘기 눈과 같다고 말씀했어요. 여기서는 신부를 가리켜서 나의 비둘기라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비둘기" 어제 우리는 이 비둘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둘기는 그 눈이 아름답죠. 또한 이 비둘기는요, 짝에 대해서 충성합니다. 자기 짝이 죽으면 그렇게 슬퍼할수가 없어요. 이 비둘기의 부드러움, 비둘기의 눈, 그 눈은 독특하기 때문에, 비둘기를 통신용으로 오랫동안 썼지요. 왜냐하면 비둘기는 한 목표를 보면, 비둘기는 그 목표를 향해서 그대로 날라갑니다. 다른 데로, 그의 눈이 시선이 산란하지 않기 때문에, 통신용으로 쓸수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요, 그의 시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한 목표만 본다. 신약에서 우리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그렇게 말씀했지요. 우리의 눈이 성하면 온 몸이 성하다. 만일 우리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다 성하지 못하다. 눈은 이와 같이 대단히 중요하죠. 비둘기 눈은 그렇게 중요하다. 그래서 제일먼저 이 신부를 가리켜서 그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때, 비둘기 눈과 같다. 바로 그 비둘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하라 네 소리를 듣게하라" 이 비둘기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나와 함께 가자" 부활의 능력, 그 능력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엄청난 풍성한 생명, 그런 것을 우리가 안다면 세상이 배척하고 세상이 거절하는 그것도 우리는 마다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그것도 알기를 원한다.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요, 우리는 주님을 따라서 그렇게 가야 합니다. 여기보면 또 다른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비둘기가 바위 틈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바위 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지요. 십자가로 초청합니다. 부활의 권능, 그래서 고난의 교제로 초청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 그것을 얼마나 고귀하게 생각하는가? 그 지점으로 초청하고 있다. 십자가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을 구약은 우리에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게 될때, 물이 없었습니다. 물이 없을 때에, 그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쳤지죠. 그 반석을 쳤을때, 거기서 물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은 시원해 졌습니다. 지팡이가 바위를 쳤다. 바위는 상하는 겁니다. 상하게 될때, 거기에서 나오는 놀라운 생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주님께서 승천하시고나서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했어요.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물이 나왔지요. 넘치는 물이 그 모든 사람들의 갈증을 온전히 해소해 주었어요. 먼저 주님의 고난이 있고 성령이 오셨어요. 그와 같은 그림, 그것을 보게 될때, 주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 그것은 반석되신 주님께서 쪼개지신 것입니다. 그 쪼개진 틈,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비둘기, 나의 비둘기, 나의 신부, 나의 사랑, 그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한다고 이 신랑은 말하고 있어요. 나는 네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네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소리는 어디서 들려야 됩니까? 그 얼굴은 어디서 볼수 있어야 됩니까? 그것은 바위틈입니다. 바위틈이예요. 우리의 음성은요? 바윔틈에 들어가서 숨어있지 않으면 우리의 음성은 듣기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위틈에 들어가서 숨어 있을때,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될때, 거기서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사랑을 베풀어주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될때, 그때 우리는 바위 틈에 가 있는 겁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우리로부터 아름다운 음악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위 틈에 있지 않으면 우리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소리, 그 소리는요. 듣기 대단히 불쾌한 소리가 나올 겁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교제하게 될때,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게 될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아가서가 말씀하고 있는 주제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사랑을 생각하면, 신약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세가지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 로마서 8장 말씀을 보십시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랑, 이것은 가장 강력한 접착제다. 가장 강력하게 우리를 연합시켜주는, 붙여주는 그런 힘이 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죠.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은 바위 틈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있을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첫째, 안전합니다. 보세요, 이 바위 주변에 얼마나 많은 위험한 짐승들이 있습니까? 비둘기, 연약하지요. 자기 보호하기 위해서 바위 틈에 들어가 있어야 되요. 많은 맹금들이 비둘기를 잡아먹을 수 있어요. 그래서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안전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게 될때 그 사랑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그것은 안전한 겁니다. 언제 그렇게 할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이제 나는 네 소리를 듣고 싶다. 나는 네 얼굴을 보고 싶다. 라고 하는 그 장소, 그것은 바위 틈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묵상하고요,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가장 절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아가게 될때, 죄 없이 살았습니다. 온전히 살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흠없이 살아서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의 수준에서 전혀 손색이 없는 완전한 삶을 사신 바로 그분의 삶의 절정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우리를 향해서, 그 신랑은 우리를 향해서 난 너를 이렇게 사랑했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죠. 그 십자가를 우리가 생각할때, 우리 마음 속에 있었던 수많은 야심, 세상에 관한 관심,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시험거리, 수많은 것들, 우리의 시선을 산란하게 만들고요. 우리의 마음 나뉘게 만드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보호를 받을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고정할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배시간에 이곳에 와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힘들여 찾아내고 생각하고 우리의 마음을 그 순간만이라도 집중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요.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고정이 되어 있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틈 바구니, 바위의 틈 바구니, 그 속에 들어가 있어야 되겠다. 그 틈 바구니 속에 들어갈때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고난을 받으셨는가? 그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겠지요. 우리는 만찬상 앞에 오게 될때, 떡을 바라봅니다. 잔을 봅니다. 떡은 그것은 곧 부서질 떡입니다. 우리는 떡을 떼기 위해서 모이는 겁니다. 떡을 그냥 보존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 떡을 전시하지만 이 떡은 부서질 떡입니다. 또한 그 잔은, 그 잔속에 있는 것은 포도가 짓이겨져서 담겨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의 고통, 그것은 현실입니다. 물론 그 후에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어요. 그러나 분명히 주님께서는 죽음을 통과신 분입니다. 그 죽음은 나를 위해서, 주님께서 피흘려 돌아가셨다. 어떠한 사랑을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바치셨는가? 그 마음과 그 의지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 가운데 기도하시고 피와 같은 땀을 흘리시고 또한 십자가에 가시게 될때,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는가, 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가서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프로그램들을, 그 고통의 프로그램입니다. 그것을 모두 하나씩, 하나씩, 주님께서는 다 이행하셨다. 그 모든 주님의 보혈의 마지막 방울까지 흘러질 때까지 주님께서는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우리는 그 바위 틈에 들어가게 될때, 아가서가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을 우리는 마음 속에 깊이 깊이 생각하고 살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첫번째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은 어떠한 것도 우리를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무엇이 이 사랑에서 끊겠습니까? 어떤것이 감히 이 사랑에서 우리를 끊겠습니까?
두번째요. 우리는 에베세소서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8-19).
여기 두번째,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지식으로는 측량할 수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은 지식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 다음에,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떤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그것을 우리가 알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측량하려고 해도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광활한 바다 속에 우리는 계속해서 헤엄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즐길 겁니다. 그리고 감사할 겁니다. 그리고 예배할 겁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이 사랑은요, 다른 차원의, 지식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심령 속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울게 합니다. 우리를 그분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그 사랑, 그것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정복했습니다. 이 신랑께서 이 신부의 목소리와 얼굴을, 바로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기를 원한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주님 앞에 와서 공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될때, 또 사적으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될때,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죠. 그분의 죽음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공적으로 예배시간에 떡을 떼게 될때 와서 있을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와 있어야 된다. 바위 틈에 우리가 가 있어야 된다. 바로 거기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얼굴을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음성을 들려 드릴까요? 예배입니다. 예배는 여기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할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어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했어요. 사마리아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제는 예배드릴 때가 왔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드리는 자를 찾는다. 너희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 말씀했지요. 예배는 지식 가운데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 가운데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동시에 예배는 신령함 가운데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위대함, 그분의 생애와 그분의 죽음, 그 생애의 가장 절정은 죽음입니다. 그 생애가 완전하다면 그 생애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 완전한 삶은 죽음을 위해서 전구 기간이었어요. 또 그 삶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완전함을 드러내셨어요. 그리고나서 그 바로 완전하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너무나 기뻐하셨어요. 만족하셨어요. 그래서 그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은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열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앞에 오게 될때, 예배를 드리게 될때, 그분 앞에 오게 될때, 이 십자가,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 이것은 지식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것은요, 우리가 그 십자가를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어로 표현하지요. 우리는 십자가를 얘기하지요. 그러나 그 십자가의 깊이와 넓이와 폭을 우리는 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드리게 될때, 진리 가운데, 지식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십자가도 이야기하고 그분의 죽음도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이 예배 안에는 신비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게 될때, 우리는 신비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감탄 가운데 다 묘사할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것을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이 신랑은요, 이 신부 비둘기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다고 말씀했어요. 바로 거기서 이 비둘기의 얼굴 모습을 보기를 원했다. 얼굴 모습은 어떤 겁니까? 우리가 감사할때 얼굴 모습, 그것은 참 보기 좋은 얼굴입니다. 이 세상에서요, 기도할때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감사하는 얼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보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까? 우리는 예배시간에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찬송합니다. 음성을 들려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요, 예배 시간에 뭘 보기를 원합니까? 음성만 듣기를 원하는게 아니라 우리의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고 하는 겁니다. 어떤 얼굴입니까? 감사로 가득한 얼굴입니다. 감탄으로 가득한 얼굴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배드리러 여기 올때 어떤 얼굴로 오는 겁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때때로 불쾌해가지고 올 때가 있어요. 때때로 성낸 얼굴 가운데 아직 추스리지 못하고 올 때도 있어요. 왜? 시간에 쫓겨 오게 될때요, 아직 정리가 안되서 올 때가 있어요. 이것 얼마나 주님 앞에 부끄럽습니까? 이 정리안된 이 얼굴이 우리 주님 앞에 나타난다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여기 신랑은 신부를 통해서 두가지, 음성과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
이 또 한가지 그리스도의 사랑, 세번째는요. 신약이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세번째를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은요,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가장 강력한 접착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식에 초월하는 그런 사랑이다. 세번째는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강권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가 너무나 답답하고 실망한 얼굴 가운데 긴 얼굴로 갔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찾아오셨어요. 그래서 그들과 대화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구약에서 어떠한 고난 가운데 이 땅에 오시고 어떠한 영광 가운데 들어가실 것에 대해서 길 가면서 쭈욱 얘기 했어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왜 긴 얼굴을 하느냐? 그런 핀잔도 주지 않았어요. 주님께서 자세히 자기에 관한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그들과 나눴어요. 바로 본인, 우리 주님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요. 이들은 사실 가장 위대한 교제를 길 가면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 두사람은 그분이 누군지 몰랐다고 말씀하고 있죠. 그리고 그들이 엠마오로 거의 다 갔어요. 이제 주님께서는 그냥 가시려고 했어요. 해는 져가고 있어요. 주님은 가시려고 할때, 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뜨거움이 생겼어요. 그래서 주님보고 강권했습니다. "주님, 우리 집에 오십시요." 긴 얼굴을 하고 고향에 가던 그 사람들은요, 절대로 강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긴 얼굴을 하는 사람들은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난 관계 없다. 거기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뭐 이런 자세지요. 그들에게는 절대로 적극적인 자세가 없습니다. 그들은 소극적인 자세, 그들은 회피하려는 자세, 그들은 낙심 가운데, 암울 가운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어떻게 맛보았습니까? 주님께서 걸어가시면서 자기에 관해서 말씀했어요. 우리가 주님을 듣게 될때,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뵙게 될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왜 뜨거워 집니까?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강권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강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은요, 간권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야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전학 될때, 우리는 강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요, 죽으면 그냥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그것이 끝이지 뭐냐? 그들의 언어 속에는 체념과 우울함과 실망과 비관과 비극과 이런 것들로만 가득한 겁니다. 그것은 사단이 고스란히 그들 마음 속에 준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어떻습니까? 복음은 이와 같이 처절한 인생의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리의 마음 속을 다 뒤흔들어 놓는, 우리의 마음 속을 휘젓는, 그래서 사랑으로 가득차서, 하나님 앞에서 반응하도록 만들어 주는 강권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강권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이를 강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힘이 있어요. 이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을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거기서 주님은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어요. 더 이상 무얼 우리가 바라야 됩니까? 그 이상으로 어떠한 사랑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나는 그것을 생각하게 될때, 내 마음 속에 찾아오는 원망이나 내 마음 속에 찾아오는 여러가지 실망이나 내 마음 속에 찾아오는 허무나, 이런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은 나로 하여금 벌떡 서서 일어나서 다른 사람을 이끌어 갈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강력한 힘이 있다. 왜냐하면요, 그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언제요? 바위 틈에 들어갈때, 우리의 음성은 부드러워집니다. 왜 부드러워 집니까? 사랑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요, 얼굴빛도 다릅니다.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요, 그 아침에 들어올때, 코로 노래하고 들어와요, 여러분 사랑에 빠진 남녀가요, 걸어가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옆에서 가만히 보세요. 어떤가? 동기가 있습니다. 어려워도요. 그들이 뭐 세상에서 사랑하는 남녀가 세상에서 편하고 모든 일이 잘되는 일들만 있는거 아니예요. 그래도 어려워도요. 그런 어려움들이 그들을 절대로 압도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그것들을 압도합니다. 사랑의 힘이 바로 이거죠. 그래서 이 비둘기의 소리는 부드러운 겁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입니다. 그 마음 속에는 동기가 부여된 것입니다. 사랑이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 얘기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뒤에 보면, 예루살렘 여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자보다 뭐가 그렇게 나은가?"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하죠. "내가 사랑하는 분은 이러이러하다." 장엄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은요,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 소개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의 삶이 아닙니까?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전해야 한다. 그러지요.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 들을 때에, 그것을 우리의 부담이요, 의무로 이렇게 느껴집니까?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복음 전할 수 없어요. 우리의 복음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 말씀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분의 아름다움을 생각할때,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분의 사랑에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그분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살아나셨다. 그래서 이분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을수 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이것은 성도의 교제의 기본이죠. 사랑 안에서 우리는 교제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모임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신랑이 그렇게 얘기했어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하라 네 소리를 듣게하라" 여기에 괄호 하고 보충 설명한다면, '바로 바위 틈에 있는 너로부터' 이렇게 얘기해야 될 겁니다.
여기 이제 그 다음 말씀을 보십시요.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음 여우를 잡으라" 이제 방해꾼을 제거해야 됩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우리를 감동하고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때, 우리 가운데 방해꾼들이 이어요. 우리를 위하여 여우를 잡는데, 특히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했어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것을 멸시하지 말라" 스가랴서에 보면요, 포로 후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너무나 절망 가운데 빠졌어요. 옛날 솔로몬 때는요, 얼마나 재정이 풍부했습니까? 레바논에서 백향목들이 그냥 막 들어오죠. 또 뭐 다윗이 이미 어청난 것들을 준비해 왔죠. 그리고 그때는 평화의 시대죠. 그리고 온 세계가 이스라엘을 우러러 보지요. 조공을 바치죠. 엄청난 재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지도자, 지혜의 왕, 그의 인도력 하에서요. 그는 자기의 생애를 거기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성전을 지었어요. 그런데 포로 후에 돌아왔을때, 재정도 딸립니다. 절치적으로 대단히 불안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이것저것 아무 분야에서도 하나도 장점이라고 이야기할 부분이 없었어요. 그래서 백성들은 이제 성전을 지으려고 하다가 이제 그만 두지요. 이제는 때가 아니다. 마음 속에 실망이 가득찼어요. 그때 두사람이 일어납니다. 학개와 스가랴, 학개는 선배고 스가랴는 후배입니다. 가히 선배, 후배 가릴것 없이 이 두사람이 분연히 일어나서 성령의 인도 가운데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전을 지어야 할 때가 바로 이때다. 백성들의 마음을 뒤 흔들었어요. 어떻게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요. 그래서 백성들이요, 분연히 일어났어요. 그때, 스가랴가 한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작은 날의 때라고 멸시라지 말라"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는 작은 것, 오늘날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습니다. 어떤때, 우리는 고통 가운데, 참 작은 날의 때다. 작은 것들의 시대다. 우리는 이렇게 맣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작은 것을, 작은 때라고, 우리가 멸시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했어요. 우리의 생의 시작은 무엇으로 시작합니까? 아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누구를 보내셨습니까? 아기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누구를 보냈습니까? 큰 군대를 애굽에서 보낸것이 아니라 아기, 그것의 바로의 칙령하에서 거반 죽어갈 수밖에 없는 아기,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 모세를 통해서요, 바로가 볼때, 모세는 없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작은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요, 하나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셨어요. 작은 것, 모세의 지팡이를 생각해 보세요. 작은 거예요. 그러나 모세의 지팡이는 홍해를 갈랐습니다. 다윗의 물매 다섯개의 돌, 골리앗을 격파했어요. 기드의 삼백명의 군대, 그리고 항아리와 횟불, 그것은 미디안의 어마어마한 대군을 격파시켜 버렸어요. 어린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 그것은 하나의 런치밖에는 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았어요. 작은 것, 그것을 우리는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작은 것에서 우리는 교훈을 받습니다. 때론, 세상의 대단히 위대한, 거대한 것들은 작은 것의 그 돌짝 위에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세요. 거꾸로, 마귀는 작은 것을 통해서 엄청난 파괴를 가져온다 그 말입니다. 포도원에서 여우를 잡아라. 그런데 특별히 작은 여우를 잡아라. 이 여우가요, 포도나무의 줄기에 껍질, 이거를 갉아 먹습니다. 이 작은 여우는요, 이 포도나무를 타고 막 뛰어 다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덩굴을 잘라야 하는데, 이 덩굴이 막 잘라져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포도 송이들을요, 이제 포도 송이가 조그맣게 나와서 커져야 되는데, 그것을 그냥 먹어버려요. 열매 다 없어지는 겁니다. 또 여우가 땅을 팝니다. 뿌리 밑까지 다 파서, 거기에 물이 들어가거나, 뿌리가 상하거나, 엄청난 손해를 가져오죠. 이 모든 것들, 우리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가운데 마귀가 역사하려고 하는 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큰것들의 대부분은 작은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은것, 조심해야 되겠다. 그래서 이 포도원을 허는 여우, 어떻게 작은 여우를 붇들어서 길들여서 좋은 여우로 만들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작은 여우는 잡아서 죽여야 됩니다. 그것은 개선할 수가 없어요. 우리 가운데 이 작은 일들, 성도들 사이의 관계나, 모임 안에서의 일들이나, 뭐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나, 어떻습니까? 작은 것들에서부터 그것을 관리하지 못할때에 큰 일로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모임 안에서 어린 아이들끼리 투닥투닥 싸운 일이, 이것이 발단이 되가지고요. 나중에는 두 부모 사이에 커다란 금이 가고 이것으로 인해서 모임 안에서 커다란 문제가 생기고, 이런 일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볼때, 이것은 대단히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게 될때, 얼마나 깨어 경계해야 될까, 라고 하는 겁니다. 마귀는 파괴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건설자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 걸어가게 될때, 우리는 세웁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는 허락하게 될때, 우리는 그 안에 파괴가 이미 시작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되죠. 그래서 작은 것,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
그 다음에요, 16절 말씀을 보십시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여기 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옵니다. 이 구절은요, 아가서를 우리가 쭉 추적해 가면, 신과 같은 구절이라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아가서 2장에서 이 말씀과 나옵니다. 여기에 뭐라고 하느냐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했고 나는 그에게 속했다" 이것이 2장 16절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6장 3절에 가면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했다." 이제 거꾸로입니다. 그 다음에 7장에 보세요. 7장 10절 말씀을보면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 구나" 여기 말씀을 보면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는 말로 끝납니다. 이 세가지는요, 이 가서에서 이 여인의 상태를 우리에게 잘 말씀해주고 있는 그런 씬이라 말할수 있어요. 첫번째, 2장 16절에서 우리가 읽은 말씀과도 같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했다. 여기서보면 신부가 중심예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했고 그 다음에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다. 그런데 두번째, 6장에서는 어떻습니까? 6장에서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고, 여기서는 사랑하는 분이 주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분이 내게 속했다. 그것은 뒤로 나옵니다. 그리고 7자 10절에서는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했다. 6장에서 말씀의 내용의 첫번째 것만 말씀하고 끝납니다. 그분이 내게 속했다. 이런 말씀이 없어요. 다만 7장 10절에서는 그가나를 사모하는구나, 라는 말로 대체하고 있어요. 이 관계는, 이와 같은 말씀의 전개는 뭘 말씀해주고 있을까? 이 여인의 영적인 상태, 사랑하는 관계에서, 그의 입장이 어떻게 변하느냐 라고 하는 겁니다. 첫째,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속했다고 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을 내가 알게 될 때요, 참 기쁘죠. 너무나 신납니다. 그런데 그것은요, 나의 특권으로 항상 느끼는 겁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해줘요? 나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분에게 속했다고 하는 말은 내가 그분을 향한 책임입니다. 이 두가지, 관계를 우리는 마음 속에 두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 제일 첫번째, 이 신부가 하는 말은 특권부터 먼저 얘기했어요. 그 다음에 책임을 얘기 합니다. 그런데 두번째는 어떻습니까? 자기의 책임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그 다음에 특권을 얘기합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는 어떻습니까? 자기의 책임을 이야기하고 그것으로 끝났다. 이 여인의 사랑에서의 성숙을 말하죠. 그런데 사랑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사랑이 감정이라고 하는 말은, 세상의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하는 사랑의 개념 속에 담겨있는 감정입니다. 감정적인 사랑,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자기가 좋으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껴지고 자기가 싫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대단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사랑이다. 이와 같은 사랑에서는 수많은 문제를 우리는 환영할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이 여인은요, 주님의 전폭적인 사랑. 주님의 사랑은요, 세상의 사랑과는 전혀 다르죠. 주님은 우리가 가당치 않은 사람인데 찾아오셨어요. 관심을 가졌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범죄했을지라도, 그래서 타락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파멸 가운데 들어간 상태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창조라로서의 책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는 이 사실을 토대로 해서, 여전히 책임을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확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만 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이 사랑, 그 사랑을 깨닫고 난 다음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신성한 사랑을 깨달은 이 신부가 이 신랑을 사랑하지요. 그래서 이 사랑을 배워가는데 있어서 이 신부가 사랑 안에서의 성장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그 말입니다. 사랑에는 특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책임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요, 감정적인 사람들은 특권, 서로 특권만 주장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특권만 주장하게 될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파멸입니다. 여기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속했다. 이것 아름다운 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속했다는 말도 아름다운 말입니다. 왜? 그분이 나를 사랑해주니, 나는 얼마나 많은 특권을 누릴수 있는가? 이것은 얼마나 많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은혜입니까? 이것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는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이 신랑은 신부에게 나와 함께 가자고 이야기 했어요. 부활의 위대한 능력, 십자가의 위대한 현실, 그래서 너는 나와 함께 고난도, 거절도 받겠는가? 이것을 이야기 했어요. 거기에 대해서 이 여인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 여인의 영적인 상태, 사랑 안에서의 위치는, 그분은 나에게 속했고 나는 그분에게 속했다, 라고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 말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것 때문에 우리가 3장에 가면 이 여인은요. 마음 속에서 꿈을 꿉니다. 마음 속의 고민 때문에 꿈 속에서 많은 괴로움을 느끼는 겁니다. 물론 그와 같은 것은 이 여인이 사랑하게 될때, 사랑 안에서 성장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제일 첫번째,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했다. 나는 그에게 속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우리 주님은 목자입니다. 여기서도 어떤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습니까?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입니다. 양떼를 어디서 먹여야 합니까? 양떼를 더러운데서 먹이면 안되요. 양떼는 순결한 곳에서 먹여야 합니다. 우리 어린 아이들이 영적으로 신령한 젖을 먹어야 됩니다. 순수한 젖을 먹여야 한다. 거기에 독이 타진거나, 아니면 더러운 것이 섞여있는 거나, 아니면 오염된 것을 먹여서는 안되는 거예요. 우리 어린 아이들은 순결한데서 자라야 합니다. 이 양들은 거기서 자라야 되요. 우리 주님이 목양하는 방법은 바로 그것입니다. 순결한 곳에서 양들을 키운다. 양들을 먹인다.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아 2: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 아가서에서 이 구절, 이 구문은 두번 나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 2장 17절에서 나오고요. 그 다음에 4장 6절에 나옵니다. 이 두가지는 서로 같은 구문으로 시작합니다만, 서로 반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 2장 17절 말씀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4장 6절 말씀에서는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 '내가 가리라'"라고 말씀합니다. 2장 17절에서는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 여인은 지금이 어두운 때라고 느끼는 겁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라고 하는 것은, 이제 동쪽에서 해가 뜨려고 할때,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어두운 때에요. 성소에서는 등대가 있었습니다. 등대가 빛을 비췄어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때에 이제 "때가 낯이니 밤이 오면아무 일도 할수 없다. 낮이니까 이제 일해야 한다." 이런 말씀을 했어요. 밤이오면 아무일도 할수 없다. 주님게서 떠나십니다. 밤이 옵니다. 지금은 밤입니다. 주님의 부재 중에 세상은 밤입니다. 그런데 이 부재 중에 세상은 밤인데, 어두운데, 이 어두운 세상, 현재에 빛을 비추는 것은 누군가? 둘입니다. 하나는 요한계시록 1장이 말씀하고 있는 등대, 지역교회가 빛을 비춥니다. 오늘 이때는 주님의 부재의 시대입니다. 주님이 떠나가셨어요. 어둡습니다. 그때에 지역교회가 빛을 비춥니다. 대단히 위대한, 대단히 엄청난 책임을, 그리고 특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것이죠. 모임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춘다. 다른 어떤 빛도 없다, 이 말입니다. 두번째, 우리 모임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이, 개인의 간증을 통해서 세상에 빛을 비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특권, 어떠한 위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맏기셨는가?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개인적으로요. 개개인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집합적으로 모임, 이 둘만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춘다. 그래서 신부는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빨리 오십시요. 이 세상에서 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러나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가 빛을 비춰야 되는데 빛을 못 비취게 만드는 그런 요인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대단히 합법적인 것들입니다. 합법적인 것들을 우리가 못비취게 한다고요? 예를 들어서 가사를 돌보는 일들, 또 우리가 직장 생활을 할때, 또 우리가 학생으로서 학교에서 여러가지 맡은 일들을 이수하고, 학업을 이수하게 될때, 다 이것 합법적인 일들이고 해야 될 일들입니다. 또 우리가 사업을 하게 될때, 가장으로서 아내로서, 또 자식으로서, 학생으로서, 그릿도인들은 이와 같은 합법적인 일들, 마땅이 해야 될 일들을 책임지고 매일 살아가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합법적인 일들, 대단히 미묘한 겁니다. 이 합법적인 일들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가 어려워져서 우리가 빛을 못비췰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마음 속에 두어야 됩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대 중에, 주님의 부재 중에 우리가 빛이다. 이 위대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서요. 우리는 대단히 조심해야 된다. 합법적인 일, 그것을 놓고도 우리는 어떻게 이 위대한 주님의 위임에 대해서 우리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갈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성장을 통해서, 주님과 가가운 교제, 주님이 오실때까지 여전 내가 빛으로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만큼 조심해야 될까?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지혜를 사용해야 됩니다. 또 한가지, 그런데 이제는 비합법적인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 세상이 우리의 삶 속에요. 유혹으로 찾아와서 세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물질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영적인 전진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 그 모두가 다 우리가 세상에 비취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죠. 우리 이것 조심해야 됩니다. 이제 이 여인이 이야기하는 말씀으로 다시 돌아와 보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아직까지는 어둡지만, 이제 곧 동이 튼다. 곧 새벽별이 이제 나타난다. 그것을 기대하고 있죠.
그때 "돌아와서 베데르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같아여라" 이거 보세요. 베데르산, 베데르산은 성경에서 정확하게 어디라고 하는것을 우리가 말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베데르산이라고 하는 것은 이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의 북부지방에, 즉 레바논, 항레바논 산맥, 여기는 레바논 산악지대죠. 이 산악지대 가까운 곳에 있는 산이 아닌가. 그 지리적인 그곳이 어디냐하고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여기서 베데르산이라고 하는 것은 베데르라는 말은 '격리'라 '분리'라 이런 뜻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우리를 격리시키는 이 산, 베데르 산이예요. 그런데 이 여인은요, 이제 날이 새려고 할때, 노루와 어린 사슴과 같아여라. 나의 사랑하는 자께서 노루와 어린 사슴, 노루와 어린 사슴을 우리는 앞에서 어떻게 봤어요? 대단히 빠른 짐승이죠. 빨리 달려옵니다. 산을 넘어서 달려옵니다. 베데르산을 넘어 오십시요. 주님 오실때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것은 이것입니다. 신부가 하는 것은, 주님이 빨리 오십시요.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하는 마음입니다. 베데르를 분리시킨, 주님은 떠나가셨어요. 세상은 어둡습니다. 주님 빨리 오십시요. 그런데 4장에서는 어떻습니까? 날이새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나는 갈거다. 2장에서는 오십시요라고 했는데, 4장에서는 나는 갈거다. 어디로 갑니까? 몰약산과 유향산으로 가는 겁니다. 주님 오실때까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몰약산과 유향산, 사실 이 두가지는 같은 것인데,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주님이 오시기를 2장에서는 바라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몰약산과 유향산에 가야 합니다. 그것은 4장에 가서 우리가 깊이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저희들은요, 주님의 부르심, 함께 가자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위험은 뭔가?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사랑합니다. 즐깁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그 사랑을 기뻐하면서 그냥 거기에 머무으려고 하는 것, 그냥 벽안에 있으려고 하는 것,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함께 가자라고 할때, 우리는 그 벽에서 나와서 주님과 가야 됩니다. 부활의 능력 가운데, 또한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 가운데,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거절해도, 세상이 우리에게 능욕을 준다해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가야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알고, 내가 고난의 교제를 알려하여" 라는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두고요. 오늘 주님이 배척받는 이 시대에, 주님은 언제까지나 배척받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이제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십니다. 이 신부가 얼마나 주님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분이 영광 가운데 오실 거거든요. 우리는 잠시 잠깐동안 주님과 함께 배척받는 겁니다. 이 배척받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입니다. 이 기간이 대단히 짧기 때문에 이 배척받는 것은 우리에게 기회입니다. 우리는 함께 능욕을 지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나가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영예다. 아무나 이것을 누릴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감사해야 됩니다. 바로 이것이 아가서 2장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그와 같은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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