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서 04. 신랑의 임재를 찾는 신부, 그리고 첫사랑의 회복, 3장 1-11절 > 2014년 / 정형모 형제님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솔로몬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아 3:1-11).
주님께서 읽은 말씀에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희들은 신랑이 이제 신부에게 "나와 함께 가자" 겨울도 그치고 또 비도 끝났는데, 주변에 꽃이 피고 공중에 새가노래할 때가 이르렀다. 이제 2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 베데르산에서 노루와도 같이, 또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그 격리된 산을 넘어서 사랑하는 분이 빠른 속도로, 노루와도 같이 또 어린 사슴과도 같이 오실 것에 대해서 고대하는 그런 신부의 마음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아 3:1).
3장에 들어와서는 이제 갑자기 침상에서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이 마음에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1장에서 이미 언급된 바가 있습니다. 1장 7절 말씀에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정오에 쉬게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거기서 신부가 신랑에게 가장 친밀한 사랑의 호칭으로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3장에 와서 이제 침상에서 이 여인이 이 신랑을 찾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3장 1절에서 5절 사이에 나타난 이 광경은 신부가 사랑하는 분을, 그분의 임재를 지금 상실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솔로몬의 임재, 그것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 여인은 침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찾아도 1절 말씀에 발견하지 못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 이제 주님의 임재에 관해서 생각하게 될때, 시편 139편의 말씀을 잠깐 펴서 보겠습니다. 시편 139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속성을 잘 말씀해주고 있는데요. 1-6절 사이에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지식의 기이함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 다음에 7-12절 말씀에서는요. 하나님의 임재, 그분의 무소부재하심, 어디에나 계심, 그런 속성을 말씀하고 있고, 그 이후에 하나님의 전능함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7-12).
여기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주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라고 하게될때, 주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저희 믿는 사람들에게 곁에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 임재를 반드시 느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임재해 계시다는 사실과 주님의 임재를 내가 느끼는 것과 내가 감지하고 있는 것과 그것은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주님은 계시지만 문제는 내가 그것을 못느끼고 있다는 말씀이죠. 왜 이 여인은 이 아가서 3장 말씀에서 왜 밤에 침상에서 이 여인은 신랑을 찾고 있을까? 찾아도 또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까? 우리가 주님과 사랑을 나누고 주님의 임재를 즐기다가,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릴까봐 우리가 염려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또 한가지 가능성은요, 2장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서, 신랑께서 신부를 향해서 "나와함께 가자" 라고 말씀했습니다. 함께 가자고 할때, 신부편에서 희생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사모하기도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 속에 한쪽 구석에 온전히 그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하는 몇퍼센트가 그와 같은 성분이 있을까, 만일 그것이 있다면, 우리 믿는 사람 마음 속에 그것이 있다면, 우리는 마음 속에서는 이제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생길수 있다는 그 말입니다.
여기 이제 밤의 침상에서, 이제 찾지 못했는데, 2절 말씀을 보면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아 3:2).
1절과 2절 말씀에서 침상에서 찾았고, 그 다음에는 거리에서 찾는다. 이 여인은 정숙한 여인입니다. 수넴 출신으로, 갈릴리 출신으로 정숙한 여인이죠. 솔로몬이 저 북방으로 올라갔다가 만난 여인입니다. 솔로몬이 이 여인에게 구애했습니다. 그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아가서 말씀을 추적해 나가게 될때, 솔로몬은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죠. 사랑했습니다. 솔로몬이 사랑하는 것을 이 여인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마음 속에 함께 가자고 할때, 마음 속에 100% 다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전혀 부인하는거 아닙니다. 함께 가자고 할때,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거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온전히 준비되어 있지 못하게 될때, 이 여인에게는 이제 임재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3장에서는 그가 침상에서 찾고 거리에 나가서 찾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그것도 밤길에, 거리에 나가서 찾는다고 하는 말은,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이 여인은 정숙한 여인입니다. 밤길에 길을 헤매면서 그렇게 할 여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이 여인이 침상에서 찾고, 거리에 나간다고 할때, 그가 꿈꾸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지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바로가 꿈을 꿉니다. 바로는 애굽의 대제국의 황제죠. 그 나라 안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 민족이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요셉 시대에 바로가 꿈을 꾸었지요. 바로가 꿈을 꾸었지만 꿈을 알고 있었어요. 해석할수 없어서 요셉이 해석합니다. 왜 그 꿈을 꾸었을까? 하나님께서 물론 그의 뇌에 꿈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마음 속에, 그는 언제나 마음 속에, 큰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만 그러나 그는 황제로서 마음 속에 마음 속에 국가에 대한 안보, 자기 위치에 관한 모든 염려, 옩갖 종류의 반란의 가능성, 또한 천재지벼이나 온갖 종류의 국가의 안보를 위협할수 있는 통치를 반대할 수 있는 수많은 여건들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생각하는 사람이 황제죠. 그래서 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큰 소리를 치고 온 세상을 향해서 호령하지만 마음 속에 언제나 염려가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는 그 시대의 큰 염려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주신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느부갓네살, 어떻습니까? 다니엘 시대에 그도 꿈을 꾸었지요. 그 사람은 꿈 꾸었을때, 꿈도 얘기하고 해석도 하라. 바로보다도 더 혹독한 명령을 내렸고 물론 바벨론의 박사들은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보게 될때, 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 속에 있는 산란함, 마음 속에 있는 많은 압박 속에서, 스트레스 속에서, 그는 마음의 편치 않은 여러 상황 속에서 꿈에 그와 같은 것이 반영되고 있다. 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신랑을 사랑했습니다. 이 여인은 신랑을 사랑하지 않는 여인이 아닙니다. 신랑을 참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경험을 할수 있다. 더더군다나 사랑하기 때문에, 만일 그 신랑께서 나와 함께 가자, 라고 하게 될때, 그 마음 속에 온전히 그것에 대해서 수긍할 수 없었다면, 마음 속에 이와 같은 염려가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염려합니다. 밤에 침상에서 신랑을 찾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어요. 또 이제 꿈이 전개되면서 이 여인은 거리로 나가서 헤매지요. 찾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될때, 이 신부의 모습을 보게될때, 이 신부의 마음 속에 갈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2장 말씀에서 이 여인은 사랑으로 인해서 병이 났다고 하는 점도 우리가 보았지요. 여인의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랑의 임재에 대해서, 임재가 사라져버린 것과 같은 느낌, 그것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모습, 이 모든 것들은 이 여인이 신랑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부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꿈에서 그 여인은 사방으로 다니는데, 거리로 나가서, 또 성중에서 돌아다니죠. 그것도 밤에, 우리가 이제 시편 말씀을 보면, 첫째, 시편 42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 속에 고대하는 마음,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사슴이 시냇물을 갈하는 것처럼 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시편 42편 1절 말씀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여기서 "갈급함"이라는 말은 헐떡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숨을 쉬게 될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이것은 적절한 시간 간격을 통해서 리듬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호흡입니다. 그러나 갈하다는 말은 헐떡이다는 말은, 이것은 숨을 대단히 빨리 쉬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빨리 달리거나 그러면 헐떡거리죠. 그러나 그런 육체적인 문제 때문에 헐떡 거린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갈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의 영혼이 지금 헐떡거리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가서에 나타난 신부는 신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고대하는 마음,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이것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2장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주님을 향해 사랑을 표현하고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즐기고 할때, 있는 위험 중에 하나가 주님과의 사랑을 계속해서 즐기는 그 안에서만, 계속해서 그와 같은 것을 누리고 살고 싶은, 그런 마음,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그냥 계속해서 거기서 즐거워하고 살고싶은 그런 마음, 저 산 아래서 있는 여러가지 비극, 또한 현실적인 여러가지 문제점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잊고 주님과만 즐거움을 누리고 살고싶은 그런 마음, 사실 이런 마음들은, 우리 주님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때, 이 세상의 여러가지 어려움들에 대해서 항상 마음 속에 두고 오셨죠. 그리고 제자들도 부르셨죠.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합니다. 그들과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제자들이 항상 주님과 함께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소원을 항상 주님께서 가지고 계시죠. 얼만큼 우리가 거기에 부응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될때 우리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요, 또한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요, 이제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위기 속에 빠져있다. 침상에 누워서 주님을 찾고 있다. 시편 84편 말씀도 보겠습니다. 고라 자손이 쓴 시, 대단히 유명하지요. 영혼의 갈급함에 대해서 여기 쓰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시 84:1-4).
여기에서 저자는 어떤 이유 때문에 성전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율법에서 1년에 세번, 유월절, 그리고 초막절, 오순절, 여호와 앞에 나가야 하죠.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에 나가지 못했을때, 이 영혼과 육체가 여호와로 인해서, 여호와의 임재를 놓고, 그 궁정 또 성전을 향해서 마음 속에 갈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죠.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여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쇄약함이여"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 구약 시대에 여호와께서 계신 곳이죠. 주님의 임재입니다. 이 임재를 이 영혼은 그곳에 가서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기를 원하고 그렇게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사모가운데 육체와 영혼이 쇄약해져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꼐 부르짖나이다" 그러면서 이제 미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 물론 제비나 참새가 성전에, 제단에 와서 둥지를 틀고, 이것은 사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언제나 제사장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사람의 고라의 자손의 저자의 마음 속에 성전에 가지 못한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 누리지 못하는 그의 마음은 온갖 것을 다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비도, 또 참새도, 참새는 무가치한 새입니다. 제비, 안정하지 못하고 사방, 그저 항상 움직이는 새예요. 그래서 다 무가치한 새입니다만, 그것들도 여호와의 궁정 안에서 깃들이고 있다. 거기에 거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마음 속에 생각하면서 그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 미물의 그와 같은 모습이라도 나는 너무나 부럽다. 그와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우리가 사모하는 것은 주님의 임재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얼만큼 우리가 매 순간 느끼고 있는가? 어떤 때는 주님의 임재를 느꼈다가 잊고 있다가 이제 다시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간헐적인 그와 같은 느낌, 간헐적인 감각이 아니고요. 항상 우리가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우리가 항상 즐기고 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영혼이 그것을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와 같은 문제가 이제 이 신부가 느끼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침상에서 찾았습니다.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 다음에 이 여인은 성중으로 나갔습니다. 길거리로 나갔어요. 거기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아 3:3).
세번째는요, 길거리 가다가, 밤길을 가다가, 이 행순하는 자는 도성의 안보를 위해서 항상 순찰하는 그런 사람이죠. 길에서 행순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물었습니다. "어디에 내 사랑하는 분이 계신가?" 이 말씀을 보면 전혀 대답을 했다, 그런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떠났습니다. 다시 말해서요. 아까 시편 84편에 고라 자손이, 그 저자가 하나님의 전에 나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그는 그렇게 고대했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나가지 못했을때, 마음 속에 막 쇄약해 질 정도로 그것을 사모하다보면, 무슨 생각까지 합니까? 심지어는 제비도 참새도, 그 전에 가서, 그 전에서 하나님이 계신 거기에 있을텐데, 나는 이것이 뭘까, 라고 하는 그런 생각, 그런 생각 속에 사로 잡힌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아니지만, 그 마음 속에 그와 같이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그 마음이 무엇을 느끼느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반영해 주는 말씀이지요. 여기에 이 여인도 꿈꾸고 있습니다. 침상에서 찾았어요. 거리에 나가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을 그렇게 꾼다고 하는 말은 이 여인의 마음 속에 주님의 임재를 놓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결코 그 마음 속에 받아들일수 없는 그와 같은 현실이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 어떻게까지 갔어요? 순찰하는 사람을 만나서 묻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할때요, 우리 학생들 이런 꿈 많이 꾸지요. 밤새도록 수학 문제를 시험장에서 푸는 꿈을 꾸는데요. 밤새도록 깰 때까지 문제를 하나도 못풀어요. 왜 그렇습니까? 낮에 그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기 떄문에, 그것은 밤에도 그런 꿈이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그 꿈은 그 시험은 0점입니다. 밤새도록 고민하는 것입니다. 꿈에서도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시편 84편의 고라의 자손의 시나, 아가서에 나타난 신부의 모습이나, 모두가 다 여호와의 임재에 대해서, 주님의 임재에 대해서, 그렇게 사모하고 있다. 병이 날 정도다. 허약해질 정도다. 그래서 밤에 꿈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막 찾고 있는데도 찾지 못했다. 행순하는 자에게 물어봐도 대답도 없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 속에서 꿈은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이 여인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죠.
4절 말씀에 보면 이제 행순하는 자가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4절에 가서 만났어요.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4).
행순하느 자가 떠나고 나니까, 어떻게 솔로몬이 거기에 나타났는지 우리는 알수 없어요. 그 거리에 밤거리에 솔로몬왕이, 그 신랑이 그곳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어째든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우리 주님과 주님의 육신의 부모와 이야기에 관해서 잘 알고 있죠. 주님의 가족도 구약의 말씀에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지요.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 2:41-49).
주님이 열두살 되었을때, 이 이야기는 우리 주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잠깐의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나서 우리 주님은 30세에 공생애 시작서부터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죠. 그래서 우리 주님의 탄생서부터 아주 어릴때, 잠간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주님께서 30세가 되실때까지 중간의 일은 거의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여기 열두살때 우리 주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죠. 이 사건은 독특한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의 육신의 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거기에 물론 육신으로 오신 우리 주님도 계셨지요.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절기를 마치고 돌아갈때에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남으셨는데 마리아와 요셉은 그냥 가는 행렬 속에 가족들 중에 있는 줄로 알고 계속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알지 못했다. 주님의 임재에 대해서 그 육신의 부모는 모르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하룻길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룻길을 간 다음에 깨달았어요. 아! 주님은 부재 중에 계시구나, 라고 하는 것을 그때가서 깨달았다. 주님이 임재하시는 사실과 주님이 임재하시는 사실을 우리가 느끼는 것, 깨닫는 것, 인식하고 있는 것은 다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부모는 알지 못하고 갔어요. 그래서 하루길을 간 후에 깨닫고 나서 다시 추적하지요. 어떻게 찾습니까?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서요. 어디가서 찾습니까? 왜 주님의 부모는 성전에 가셨을까?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계셔야 될 만한 곳은 바로 거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계시다. 성전에서 박사들과 성서에 대해서 박식한 사람들과 함께 열두살 소년이 그곳에 앉아서 말씀을 나누고 있었다. 이 사건은요, 주님께서 사실 이 땅에 계실때, 심지어는 아진 틴에이저가 되기 전입니다. 열두살이니까, 요즘 말로는 틴에이지가 거의 될 나이죠. 그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에 대해서 내가 신경써야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까? 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주님은 아직 어릴때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인데요. 문제는 부모님은,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꼐서 거기 계신줄을 몰랐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냥 계신 줄로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요, 예수님이 안계신데 계신줄로 착각했어요.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데 안계신건 줄로 알고 눈물 흘리고 울고 있었죠. 우리는 주님의 임재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상상하고 있는가, 아니면 추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잘못 착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 있는가? 즐기고 있는가? 이것은 다별개의 문제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요. 어떻게 하면 주님의 임재를 우리가 느끼고 즐기고 갈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이 아가서 말씀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4절 말씀에 드디어 이 꿈에서 여인은 자신의 신랑을 찾았습니다. 찾았을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게 될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락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못느끼는데도 그냥 살아갈수 있다고 하는 것은 타락이죠. 타락한 성도가 어떻게 하면 찾을수 있느냐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회복의 기미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의 임재에 대해서 마음 속에 어떻게 하면 찾을수 있을까? 나는 주님의 임재를 못느끼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임재를 못느끼고 있다면 우리 마음은 답답한 것입니다. 숨이 찬 겁니다. 숨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정상적이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감기 걸리면 열나고 어떤때는 몸살까지 오면 근육이 또 아프고 식욕도 없고, 뭐 여러가지 증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주님의 임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실제로 많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주님의 임재를 다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요, 이 문제에 대해서, 주님의 임재는 이 여인에 대해서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했을때, 그래서 밤에 고민하고 밤에 꿈에서 찾고 그래서 찾았습니다. 찾았을때 어떻게 했어요? 타락한 성도가 주님의 임재를 다시 찾게 될때 그분의 임재로 인해서 즐거움을 회복하게 될때, 다시는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여기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4).
여기 이제 '어머니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를 잉태한 그 방'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는 아가서 8장 말씀을 보면요, 아가서 8장 5절 말씀에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애쓴 사과나무 그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여기서 이것은 나중에 8장에 가서 우리가 다시 살펴보겠습니다만 이 구절과 관련해서 잠깐 말씀을 드립니다. "네 어미가 신고한" 고통을 느낀, '너를 낳은 자'라고 할때, 이 낳았다는 말은 그것은 맹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서약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나를 낳으셨다. 라고 할때, 낳은 곳, 여기서는 그곳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과나무 아래" 이것은 아름다운 심상입니다. 사과나무 아래서 아이를 낳지 않았겠죠. 그러나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게 될때 그것은 사랑을 맹약한 곳이다, 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3장 4절 말씀에서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낳은 것이 맹약이라면 잉태는, 잉태 이후에 열달 후에 낳지요. 다시 말해서 이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처음 만나서 구애를 받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의 출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맹약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랑을 맹약하죠. 이 모든 것은 사랑의 시초입니다. 그분의 임재를 발견하고 난 다음에, 그분을 붇들고 절대로 안놓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갑니까? 사랑의 시초의 그 장소로 간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에베소 교회에 주님께서 권면하시게 될때, 너희들은 여러가지 것들을 다 잘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에게 문제가 있다. 너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한다. 너희 첫사랑을 버렸다. 첫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첫사랑을 어떻게 회복합니까?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면 그분과의 사랑 처음에 사랑을 맫었던 이와 같은 장소로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에 대해서 희미해지고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회생활을 계속해서 하고 그냥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생활을 한다면 나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특권을 나는 상실하고 실제로 구원의 기쁨도 잃어버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내 마음 속에 얻어지는 위대한 확신, 그 모든 것들은 위대한 기쁨입니다. 이 사랑으로 인한 기쁨, 이것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여기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분을 찾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줄 알았는데, 하루동안 계속해서 가다 보니까요, 없어요. 부재라고 하는 것을 깨닳았을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계속 갈릴리로 가지 않았어요. 그들은 모든 비용과 모든 희생을 해서라도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디서 놓쳤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놓쳤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활한 예루살렘 도성에 어디 계실까? 예수님이 계셔야 될 곳은, 그곳은 성전이죠. 물론 거기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을 하고 계셨다. 여기에 이 여인이 꿈에 신랑을 찾기 위해서 막 다닐때 어디로 갔습니까? 도성 거리로 갔습니다. 그곳은 분주한 곳입니다. 거기는 사실은 시장입니다. 거기는 시끄러운 곳입니다. 산만한 곳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고 또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어제 우리들은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 보게하라 네 음성을 나는 듣고 싶다" 이것이 주님의 소원이죠. 이 사랑을 피자 나누는 것, 우리는 두번째날, 사랑의 대화를 어떻게 했느냐라고 하는 것을 1장과 2장 초반에서 우리는 봤어요.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우리는 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즐기고 그 사랑을 우리가 감사하고 그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을 나도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고 감사하고, 이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이어져서 가야 하는 것이죠. 이 여인이 어디가서 찾았습니까? 주님을 밤길에요, 물론 꿈입니다. 밤길에 예루살렘 거리에서, 시끄러운 곳에 가서 찾았습니다. 주님이 있을만한 곳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곳은 그곳은 사랑을 나눌만한 곳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을 꿈에 만났어요. 다행히 주님을 만났어요. 그의 사랑하는 신랑을 만났을때 꽉 잡았어요. 이것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놓치고 우리 삶 속에서 냉랭하고요. 그리그도인입니다. 하늘나라 갑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어요.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실속있는 삶, 주님과의 깊숙한 대화,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주시는 사랑을 내 마음 속에 깊이 느끼고 인식하고, 그리고 나도 감사하고, 그렇게 가끔 가끔이 아니고요. 지속적으로 매일과 같이 이렇게 살아 가느냐, 아니냐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임재를 놓쳤다면, 이 여인처럼, 우리 주님의 육신의 부모처럼 쫓아가야 됩니다. 만나야 됩니다. 만났을때 꼭 잡아야 됩니다. 그리고 어디로 갑니까? 사랑이 처음으로 시작됬던 곳, 저희들은요. 과거에 매여 살지 않지만 과거가 우리를 주장하도록 그렇게 허락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주님께서 권면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생각하게 될때, 주님께서 나를 처음 찾아오신 날, 그것에 대해서 나는 주자주자주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의 사랑을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주님이 나에게 프로포즈를 하셨다. 주님이 나에게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그 사랑을 내가 처음 느꼈을때, 주님을 내가 몰랐을때는 복음의 말씀을 내가 느꼈고 전도도 들어봤고, 말씀도 읽어봤고, 기도도 해 봤지만, 집회도 나가봤지만,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아무런 느낌도 없었고 아무런 현실도 없었으나 어느날 성령님께서 내 마음 속에 말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향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라고 하는 것을 내가 깨닳았을때 내 마음은 너무나 감동이 되어서 그분 앞에 눈물을 흘리고 주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 나는 엎드려서 내 온 생애는 변화 되었다. 바로 그 시점이 내 새로운 삶의, 구원의 삶의 시작이였죠. 전에는 사실은 살았지만 나에게는 삶이 없었어요.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처음으로 생명을 가지고 이제 영원한 삶을 향해서 나는 나아가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어느날 이분의 사랑, 그것이 시들해지기 시작했어요. 주님의 말씀도 별로입니다. 세상의 여러가지 바쁜 일들이나, 여러가지 유혹이나, 세상의 여러가지 비지니스나, 수많은 다른 요인 때문에 내 마음 속에 주님이 시들해 졌어요. 주님의 사랑이 시들해 졌어요. 그때, 우리 마음 속에 이제 찾아야 된다. 이 여인이 밤에 잠자지 못하고, 이제 밤에 침상에서 찾듯, 그리고 심지어는 꿈에 길거리에 나가서 찾든, 행순자를 만나서 물어봐도 대답이 없지만 그러나 그분을 만났다. 그분을 만났을때, 처음에 사랑했던 그곳으로 꼭 붇들고 갔다. 여러분, 주님께서 나를 처음으로 만났던 그곳, 그날, 그 지점, 그때의 내 마음 상태,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돌아가세요. 그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그 동안에 내가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왔던 이 모든 일들은, 그것은 뭔가 탈선했다. 주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부터 나는 멀어졌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우리는 돌이킬수 있습니까? 다시 그리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받았던 그 순간, 내 마음 속에 그렇게 감동적이었던 그 순간, 그리로 우리가 돌아가게 될 때요. 우리는 이제 위대한 임재를, 그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여기 5절 말씀에 두번째로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부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2장 7절 말씀에서는요, 이 여인이 사랑에 의해서 병이 났을때, 그리고 난 후에 부탁하죠.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아 3:5).
여기 다시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은 혼란한 곳에서 내 마음이 분요한 곳에서 사랑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대화를 하게 될 때는,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하고 또한 그 이야기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듣고, 그리고 거기에 답변하고, 대화를 하고, 라고 하는 사랑은 잘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우리가 즐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모든 집중력을 다해서 그 말씀을 우리가 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것을 집중해서 주님께 말씀을 드려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읽게 될때, 가장 고요한 시간에, 가장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영혼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잡아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다시 말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감사하는 것이죠. 그 말씀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말씀을 드리게 될때, 기도할 때도, 골방에 들어가서 우리는 모든 마음을, 심령을, 영혼을 집중해서 주님 앞에, 주님을 찬양하고, 또 주님 앞에 나의 필요한 것 외에, 여러 성도들의 다른 필요한 것, 그리고 구도자들의 모든 필요들에 대해서 우리는 집중해서 주님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그분은 바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관계는 그 가운데서 정상적으로 계속해서 그 사랑의 관계가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냥 적당히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우리가 연명해 나가고 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이것으로 그냥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냥 나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아가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삶, 그와 같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아가서 안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서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모든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질적인 삶입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기쁨 가운데, 그래서 내 마음은 항상 충만하고,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고, 주님을 향한 나의 헐떡이는 마음, 그리고 내가 주님을 향해서 표현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사랑하는 말씀을 나는 더욱 더 듣고 싶은 마음, 이런 것으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저희들은 3장 1-5절에서요, 이 여인의 침상에서 뒤척거리는, 꿈속에서 고통 가운데 방황하고 찾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해피앤딩으로 끝났어요. 왜? 주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디로 다시 왔습니까? 처음 시작한 출발지로 다시 왔다.
그 다음에 6절 말씀부터 보면요, 갑자기 이야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갈릴리 지방에 있었던, 수넴의 이 여인, 거기에서 솔로몬은 이 여인을 만났고 거기에서 구애했고 거기에서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이 여인을 예루살렘으로 모셔오지요. 이 모셔오는 광경이 여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1장에서 아가서 제일 첫번째, 1장 시작에서 "솔로몬의 아가라.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침궁으로 인도하고 이미 예루살렘에 와 있는 광경을 우리는 봤지요. 이것은, 이 침궁은 왕의 침궁입니다. 이 여인은 이미 예루살렘에 와 있어요. 그렇다면 왜 여기서 갑자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는 광경을 여기에서 이야기 할까? 그런 점이라면요, 이 사건은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진 사건을 연대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이루어진 사건인데 이제와서 이야기하고 있는 연대에는 맞지 않는, 순서적으로 맞지 않는 그런 사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것은 뭐겠어요? 조금 전에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놓치고 있던 이 여인이 밤에 잠을 못자고 꿈꾸고 찾다가 발견하고 난 다음에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우리가 주님을 믿고나서 주님의 임재를 놓치고 살고 있다가, 덤덤하게 살고, 세상에 그냥 뭍혀서 살고,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요. 어느날 안되겠구나, 주님을 내가 다시 만나야 되겠구나.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사랑을 음성을 듣고, 주님께 나도 말씀을 드려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주님을 추적했을때, 주님을 만났을때, 우리는 이 아가서에 나타난 이 여인처럼, 주님을 만났을때는 꼭 붇들고 놓지 않을거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처음 사랑의 그 장소로 갈거죠. 바로 이와 같은 말씀으로 끝나고나서 이제 광경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 여인을 연에 태워서 육십명의 용맹한 군사들이 호위하고 지금 오고 있는 이 장엄한 광경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행진입니다. 왕실의 행진입니다. 이것은 이 여인을 가장 높이는, 사람들 앞에서 왕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며 어떤 자도 이 길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행진입니다. 이 행진은 그냥 단순히 왕권을 사용한 강력한 행진만이 아니라 왕의 모든 사랑이 이 술람미 여인에게 온전히 다 퍼 부어진 그와 같은 행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행진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 여인의 마음 속에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가 처음에 구애를 받고 사랑을 받고 그분이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에게 이와 같은 영예를 허락했던 이 모든 위대한 사랑, 그 사랑을 내가 마음 속에 두고 있다면, 내가 어찌 이분의 임재를 놓칠수 있으랴? 그 사건들을 지금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아 3:6).
여기 몰약과 유향이 소개되고 있죠. 연기 기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사'의 여기 장사라는 말은 무역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특별히 향품을, 이 당시에는 장사들 중에 가장 이윤을 남길수 있는 장사, 중세 시대에서 가장 이윤을 남길수 있는 장사는 그것은 프린팅이었습니다. 그래서 구텐베르크, 그는 성서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사람이예요. 그러나 그는 그가 발명했던 인쇄술을 가지고요. 가장 이윤을 남길수 있는 성서를 프린팅한거죠. 이 당시의 장사는 아라비아, 인디아, 뭐 이런 어려 곳에서 향품을 모아서, 다양한 향품, 이것은 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으면서 팔리고 있던 것입니다. 이 장사들이 가지고 오는 엄청난 양의, 다양한 종류의 향들이 있어요. 솔로몬이 자기가 사랑하는 이 여인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모셔오는 이 과정은 장엄한 겁니다. 그 행진은 첫째, 어떤 말씀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까? 향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제일 먼저 연기 기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기 기둥은 불을 때서 나오는 여기가 아니고요. 행진이 있습니다. 이것은 왕의 행진입니다. 왕이 자기 사랑하는 신부를 이제 예루살렘으로 모셔가는 행진입니다. 거기에는 그냥 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십명의 군인들이 호위하고 있었죠. 여기에 연 앞과 연 뒤에 연기가 올라갑니다. 이 연기는 어떤 연기인가? 향품으로부터 나오는 연기입니다. 거기에는 몰약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유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몰약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1장에서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몰약, 그 나무는 찔러서 거기서 나오는 수지를 말리든지 아니면 액체로 화하든지, 아니면 가지 속에 있는 몰약 자체를 사용하든지 고귀한 겁니다. 그것은 쓰고 향기는 대단히 향기롭다. 그래서 몰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죠. 몰약은 우리 주님의 죽음입니다.
유향은 무엇입니까? 유향은 하얗습니다. 그 하얀 것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어요. 특별히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향 중에 엄청난 양의 향으로 쓰입니다. 특히 소제에서는요, 반드시 유향이 들어가야 됩니다. 유향, 그것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향기는 말로 할수 없어요. 유향은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나타내는 향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 땅에 오시게 될때 위대한 영광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 주님은 본래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영광, 본질적인 영광, 그것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영원부터 우리 주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던 본질적인 영광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게 될때, 자기를 가렸습니다. 이 본질적인 영광은 다 가려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때, 나타내 보이신 위대한 영광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려도, 주님은 자신을 아무리 가려도 주님께서 이 땅에 목수의 아들로서, 육신을 가지고 청년으로 걸어다닐때 나타났던 위대한 영광, 그것을 가리켜서 도덕적인 영광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생애 끝에, 사실은 완전한 생애 가장 절정인 순간,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제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승격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지극히 높은 곳에, 우편에 앉은 분이 되셨습니다. 세상은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온 세상을 향해서 이분은 의로운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을 높이셨어요. 자기는 낮아지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게 하시고, 앞으로 심판하시게 될때, 모든 입으로 그분을 주라 시인하게 하셨고, 모든 무릎으로 그 앞에 꿇게 하신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요.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은 획득한 영광이 아닙니다. 획득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얻은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본질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고 도덕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고 획득한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때, 그때는 본질적인 영광은 가려졌어요. 안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영광이 드러났다. 이것이 유향입니다. 왜냐하면 유향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살아가실때 나타나는 아름다운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몰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심으로 인해서 나타내신 위대한 향기, 우리는 유향을 생각하게 될때,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 우리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을 몇가지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 주님께서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자기를 종의 형체로,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허리를 굽히신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영광입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을 통해서 우리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그분이 허리를 굽혔어요. 그분은 하늘에 영광 가운데, 상아궁에서 수천만의 셀수 없는 천사들로부터 오랫동안 영광을 받고오신 분인데 그 모든 영광을 마다하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어요. 허리를 굽히신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도덕적인 영광입니다. 또 하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 나중에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도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만나서 헤어질때 이런 말씀을 했어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 이것은 복음서에 없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께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그 말씀은 자애로운 말씀입니다. 은혜가 넘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을때, 사람들은 감탄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수 있을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권세, 그들은 권세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하는 말에는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그 말씀으로 인한 권세는 없다.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권세뿐만 아니라 독특한 신성한 권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인애가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죠. "아무도 그분처럼 말한 자가 없다." 말씀에서 그분은 독특합니다. 말씀에서 그분을 필적할 수 잇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봉사는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의 봉사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을 봅니다. 자신을 낮춰서요, 하나님의 종이 되셨어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종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종으로 섬기게 될때, 이 세상의 어떠한 종과 비교할수 없는 종의 모습으로 주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셨어요. 주님의 종으로서의 충성, 종으로서 주인이 맡긴 일에 대해서 결단을 가지고 죽는 순간까지 그 모든 일들을 이루어 나가는 모든 성실함, 이 충성심에서요. 봉사와 관련해서, 사역과 관련해서, 주님이 나타내 보이신 충성은, 그것은 말로 할수가 없어요. 어떠한 인간과 비교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순복하신 일에 있어서요, 하나님과 동등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데요.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춰 여호와의 종이 되셨고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했습니다. 어디까지 순복했는가? 빌립보서 2장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순복하시되,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복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영광입니다. 그분의 도덕적인 영광 안에는 곧바름이 있습니다. 그분의 도덕적인 영광안에 사랑과 또한 부드러움과 신사와 같은 모습, 이 신사라고 하는 것은 한번 말하면 절대로 그 말을 번복하거나 또한 폐지하지 않는다. 한버 말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그 말씀을 지킨다. 이것이 우리 주님 아닙니까? 우리 주님은 정말로 신사이십니다. 우리 주님의 도덕적인 영광 속에 진실함이 있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영광 속에 우리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온유합니다. 겸손합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절대로 순복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철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100% 의존했습니다. 또한 그분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아버지 앞에 철저한 헌신을 했습니다. 그분께서 순결하십니다. 그분께서 행하신 일에는 엄청난 열심 속에서 행하셨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도덕적인 영광입니다.
여기에 행진이 있는데요. 술람미 여인이요, 형기 가운데서 지금 옮겨지고 있어요. 앞에도 형기, 뒤에도 향기, 어떤 향기입니까? 몰략과 유향의 향기, 그것은 왕이신 주인의 어떠한 향기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저를 신부로 맞이해서요. 이제 인도합니다. 혼인의 날까지 인도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이세상에서 행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몰약과 유향의 향기가 우리 앞과 뒤에 가득하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얼만큼 가득한가? 그것은 연기 기둥처럼 가득하다. 그 연기 기둥이 항상 연이 갈때에 앞 뒤로 에워싸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생애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죽음, 그것이 나타내는 위대한 향기, 이것을 우리는 이 세상에 이 거친 들을 우리가 통과하게 될때, 우리가 나타내는 것이죠. 그래서요, 장사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 한 이 행렬이 이제 지나가게 될때,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사실은 이 행진은 수넴, 이 갈릴리 지방 이 수넴서부터 시작해서요. 요단 골짜기, 요단강가를 끼어서 이 요단 골짜기를 따라서요, 이 낮은 지대를 따라서 내려오다가 예루살렘과 요단강 건너 여리고가 있죠. 그 사이에 예루살렘 거의 가까이 가서 광야가 있습니다. 이 광야를 지나게 될때, 이 주행 루트 속에, 거기에 광야가 있다면 예루살렘 거의 다 왔을때, 사람들이 이 행렬을 보고 이 거친 들에서 오는 저 여인이 누군가? 특별히 거친 들에서 오는 자라고 말씀했는데, 이 여인입니다. 거친 들에서 오는 저 여인은 누군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신부로 모셔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높여 주셨어요. 우리에게 영예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를 지나가고 있습니까? 거친 들을 지나가고 있어요. 왜 거친 들일까? 왜냐하면요, 이 거친 들은 경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친 들에는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는 고독한 것입니다. 거기는 모든 조건이 악조건이죠. 그래서 거친 들에서는 노동을 해도 효과가 없어요. 거기에는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슬픔이 있습니다. 이 거친 들에는 또한 위험이 있습니다. 거친 들에는 음식도 없고요, 마실 물도 없어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어떻게 통과했는지 잘 알죠. 그 모든 특징이 거친 들, 이 광야에 있습니다. 이 거친 들에서 오고있다. 사실은 우리에게 두가지 종류의 거친 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거친 들이 있어요. 우리 구원받아도 아직도 육적인 생각들, 아직도 세상적인 그와 같은 생각들, 아직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령한 그런 곳으로 도달하지 못한, 저속한, 육적인, 그리고 나 자신의 생각에 의존하는 이와 같은 모든 비루한 것들, 이것 전부 거친 들입니다. 내 속에 있는 거친 들이예요. 우리는 거기서 나와야 한다. 거친 들에서 나오는 여인이 누군가? 안에 있는 거친 들에서 우리는 나와야 한다. 또 하나는 밖에 있는 거친 들이 있어요.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주변 이 광야를 생각해 볼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많은 위험이 있습니다. 이 수많은 어려움의 요인들, 우리는 이 거친 들을 지나가게 될때 때로 시험을 받습니다. 시련 속을 통과합니다.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그리스도인이요. 모든 일들을 다 포기해 버릴 정도로, 그리고나서 그냥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런 생각, 때때로 마귀가 우리 마음 속에 넣어줍니다. 때때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게 될때, 우리는 어떤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여기 보면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군가? 이 사막을 통과하는 사람은요, 사막의 모래바람이 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이 있어요.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의 모양을 가만히 보면요, 그 사람들은 땅바닥보고 가는 사람이 없어요. 그 사람들은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가는 사람이 없어요. 그 모든 사람들은요, 사막을 통과할때, 하나도 예외없이 모두가 저 앞만 보고 갑니다. 왜냐하면 저 앞에 빨리 오아시스가 나오지 않을까, 그것만 고대하고 가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거친 들에서 나오는 자가 누구인가? 이 여인은요,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갑니다.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어요. 이제 위대한 위엄과 향 가운데서 갑니다. 그러나 거기는 여전히 거친 들입니다. 거친 들에서 나와야 되는 겁니다. 목적지에 도달해야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영광과 놀라운 즐거운 미래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아 3:7).
여기 우리는 7절서부터요, 솔로몬의 연이라. 이렇게 소개되는 말씀이 있는데요.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요, 첫째 솔로몬의 연, 솔로몬이 소개 됩니다. 두번째, 9절 말씀에서는 '솔로몬왕'이라고 소개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세번째, 11절 말씀에서는요, 여기에는 솔로몬왕인데요, '면류관을 쓴 솔로몬왕'입니다. 점진적으로 이 솔로몬이 점점 더 많은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랑, 자랑스러운 신랑입니다. 우리를 엄청나게 사랑하신 신랑입니다. 우리 마음을 완전히 정복하고 우리에게 위대한 사랑을 듬뿍 넣어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묘사하게 될때, 우리는 한이 없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말씀하게 될때, 가면 갈수록 그분에 대한 위대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솔로몬만이 아니예요. 그분은 솔로몬왕이, 면류관을 쓴 솔로몬왕이예요. 점점점 가면 갈수록 우리는 주님에 대한 지혜까 늘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지혜가, 그분에 대한 감사가 늘어가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서 할말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그 말씀을 드릴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도 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도들이 이 말씀을 서로 나누는 겁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제 육십명의 용사들이 이 연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육십명의 용사들이 왜 필요할까? 역사를 보게 될때, 이 당시에 팔레스타인에서 이제 결혼하게 될때 신랑이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옵니다. 결혼식날, 장례식으로 변하는 날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즐거운 날, 모든 비용을 들여서 아내를 모시고 올때, 길에서 도적떼들이 나타나서 죽이고 뺏고 이런 일들이 많았다. 이 길에는 위험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심지어는 왕이 그의 신부를 모셔온다 할지라도 거기에 많은 위험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이 연은 완전히 , 철저히 보호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신부는 이제 고향으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에 도달할때가지 온전한 영예가운데 가장 편한 편리함 가운데, 솔로몬이 제공하고자 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지금 제공하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외부로부터의 적들로부터 막아야 됩니다. 그래서 칼을 잘 쓰고 있어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서 이삭의, 아들의 신부를 데리고 올때, 종이 가서 리브가를 만나서 데리고 오죠. 리브가가 가겠습니다, 라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돌아갈때 어떻게 했습니까? 종이 낙타를 타고, 또 리브가를 데리고, 거기에 종들이 있고,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거기에 다른 종들이 함께 갑니다. 거기에 드보라, 리브가의 유모도 같이 갑니다. 이 행진이 여기의 낙타의 행진입니다.
이 행진이 이삭을 향해서 갈때, 이 여인은 종에게 무엇을 물어봤겠습니까? 그는 아직 한번도 자기의 남편을 본 적이 없어요. 결혼할 상대에 대해서 본 적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으로, 믿고, 지금 기대하고 가는거죠. 그래서 아마 종에게 물어봤을 겁니다. 이삭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의 모양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의 인격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것이 리브가가 물을, 이삭이 사는 동네의 여러가지 환경은 어떻습니까? 라고 물을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삭 자체, 이삭 개인의, 그의 인겨과 그의 성품과 그의 사람됨과 그의 모든 것에 대해서 가장 큰 관심이 있었겠죠. 이 행렬은 유명한 행렬입니다. 솔로몬이 이제 아내될 사람을 연에다가 모시고 그리고 호위하는 육십인의 칼을 쓰는 이 사람들을 해서 오는 겁니다. 여기에 솔로몬이 같이 왔는가, 아니냐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뒤에 보면 솔로몬을 보라,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을 보라. 11절에 그런 말씀이 있지요. 이런 말씀으로 보아서 솔로몬이 함께 있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째든, 솔로몬이 함께 했든, 안했든, 지금 이 행렬은 왕의 행렬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이름 하에서 이루어지는 행렬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있었다면 이것은 왕의 행렬이죠. 솔로몬이 없었어도 이것은 왕의 행렬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와 함께 오게 될때, 거기에 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행렬 속에서요. 이 행렬이 오게 될때, 여기에 육십인의 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행렬은 거친 들을 통과하는 행렬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될때,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이제 앞에 있는 결혼을 향해서 지금 거친 들을, 광야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가운데는 호위하는 육십인의 능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칼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칼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 이 행렬을 보호하는, 이 위대한 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모든 원수는 그들로 인해서, 칼로 인해서 격파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육십인의 호위병을 죽일수 있는 사람들은 없어요. 그것을 솔로몬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신부의 여행은 안전한 여행입니다. 그래서요, 오늘날 저희들이 그런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은혜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을 통해서, 또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이제 위대한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방어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 계속해서 드러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에게, 우리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솔로몬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아 3:9).
솔로몬왕이 만들었습니다. 이 연은 그냥 만든게 아니예요. 솔로몬왕이 만든 연입니다. 왜 만들었습니까?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목적입니다만, 신부를 데려오기 전에요. 이것은 솔로몬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만든 연입니다. 이 연은 만든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연을 만든 목적은 첫째, 솔로몬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둘째, 이 10절 말씀에서 하반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입혔다"라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개혁성경의 번역은 조금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성경의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른 번역에서는 "예루살렘 여자들을 위한 사랑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요, 이 연은 솔로몬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을뿐 아니라 예루살렘 여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었다. 그들의 사랑을 위해서 만들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솔로몬은 바로 이런 연을 가지고요. 신부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옮겨오는 일을 하고 있죠. 장엄한 행진입니다.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아 3:10).
그런데 솔로몬의 연에 대해서만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기둥은 은이라 했어요. 그 바닥은 금입니다. 우리 말에는 자리라고 했는데, 이 위의 덮개입니다. 이 덮개는 자색 담이다. 자색으로 되어진 천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한 사랑으로 도배했다는 말씀입니다. 제일 첫번째 소개되는 것은 기둥입니다. 이 기둥, 솔로몬 연의 기둥, 그것은 은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닥은 기초입니다. 이것은 금으로 되어 있어요. 이 두가지는요, 이미 저희들이 여러번 생각해 본 거죠. 금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왜냐하면 은은 항상 돈으로 사용 되었죠. 이 돈을 가지고 속전으로 이제 지불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는 겁니다. 팔려간 사람, 노예가 된 사람을 이 돈으로 사는거죠. 구속이죠. 그래서 은은 구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이것이 이 연이 행진할때, 계속해서 사방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향기가 드러나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드러납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에 관한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드님, 이분의 영광과 이분의 위대한 사역을 통한 구속, 그리고 세번째는요. 덮개는 자색입니다. 이 자색은 왕의 색깔이죠. 다시 말해서 이 연은 왕의 연이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데 이 자색이라고 하는 것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혼합입니다. 파란색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죠. 빨강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셔서 받으신 고난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 하나님이심, 또 완전한 인간이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완전한 인성의 혼합입니다. 완전한 자색이예요. 그래서 그분은 왕입니다. 그 왕께서 행진합니다. 그런데요, 이 덮개, 바닥, 그리고 기둥뿐만 아니라, 이 안에는 뭘로 가득합니까? 뭘로 완전히 도배를 했습니까? 그것은 사랑으로 도배했다. 아가서는 사랑 아닙니까? 우리 주님의 사랑 아니예요? 이 왕의 사랑입니다. 왕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이 위대한 사랑, 그 중에 가장 커다란 사랑은 신부를 향한 사랑입니다. 신부는요, 그 연 안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 가득히 담겨있다고 하는 거죠. 사랑이 완전히, 그 분위기가 완전히 사랑입니다. 주변은 완전히 사랑으로 도배되어 있다. 거기에 신부는 앉아 있습니다. 그 바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예요. 그 지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왕의 위대함입니다. 그리고 그 기둥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예요. 이와 같은 위대한 행진이 지속되지요. 그리고 이 행진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게 될때, 거친 들을 통과하죠.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아 3:11).
마음에 기쁠때요, 면류관을 쓰게 될때,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히브리서 12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았다. 우리 주님께서는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견딜수 없는, 그런 고통의 순간이었어요. 그래서 심지어는 우리 주님도 고뇌 가운데 있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우리 주님이 어떻게 기도 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게서 어떠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그 앞에서 주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말씀하셨고,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음식이라고 말씀하신대로 주님께서는 결단하시고 얼굴을 부싯돌같이 하시고 그리고 죽음의 장소까지 주님께서는 가셨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사역은 완성된 사역입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게 될때, 주님께서는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처럼,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참으셨다고 말씀했어요. 바로 이 즐거운 날, 그날, 이제 면류관을 쓰는 날입니다. 그 모친이 씌워줍니다. 그리고 누가 즐거워 합니까? 시온의 여자들이 즐거워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메시아로서 이제 전에 고난 받으신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지상강림하시게 될때, 왕의 왕, 주의 주로 이 땅에 오시게 될때, 주님께서 나라를 세우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면류관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제 혼인 날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그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거절했어요. 참 메시아를 거절했어요. 그 거절의 마지막 순간은 환난의 때입니다. 이 환난의 때, 이스라엘은요, 메시아는 제쳐놓고 그들의 거절의 극치, 즉, 적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7년 동안 고통 가운데 들어가지요. 그 모든 나날이 끝나고나서 이제 주님께서 오시게 될때, 회개하고 주님 앞에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우리 주님을 메시아로 영접할 겁니다. 그분에게 관을 씌워드릴 겁니다. 그때, 시온의 여자들이 , 유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이 위대함을 바라보고 기뻐할 겁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이제 신부를 데리고오는 이 광경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에서 나타나는 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와 같은 메시아 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신부다.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할까? 어떠한 사랑의 대화 가운데 우리의 삶이 지속되어야 할까?
이 여인이 오늘 3장 처음에 고민하고 뒤척이고 또한 마음 고생 가운데 그 사랑하는 분을 찾고 거리로 나가고 파수꾼을 만나고 했던 것처럼, 여기 만일 주님의 임재를 우리 편에서 잊고 있다면,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은 계속 사랑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될 겁니다. 그리고 처음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사랑을 구했던 바로 그곳으로 우리가 가야 할 겁니다. 거기서 우리가 시작이 될 겁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심령을 도와주시고요. 아가서를 통해서 저희들에게 계속해서 신령한 은혜를 주실 줄을 믿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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