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 / 강성찬 형제님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창 3:8-11).
여기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 질문은 성경에 처음 나와있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의 내용이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는, 여러분을 찾고 있는 질문입니다. 특별히 이 질문이 첫번째인,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성경의 전체적으로 그 내용이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묻고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을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이 어디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에게 묻는 것은 여러분이 자신이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알도록,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도록 물어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내가 지금 어느 상황 가운데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성경은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가 지금 어떤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그런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을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단 하나였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지만 아담은 그 말씀을 어겼고 그는 지금 숨어있게 됩니다. 그가 지금 있는 장소는 숨어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지금 있게 된 장소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들의 기본적인 장소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숨어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숨어있지 않습니까? 아담은 언제 숨었느냐면, 자신이 범죄하고나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나서,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때, 하나님이 저기 오시는구나, 그리고 그때 숨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묻습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숨었나이다." 숨어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른이나 아이나 숨어있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하면, "요즘에는 인터넷이나 홈페이지에 자기가 뭐하고 있는지 다 올립니다. 요즘에는 자기가 뭘 먹었는지도 오릴고, 자기가 여디 여행 갔는지, 지금 꽃구경 갔는지도 다 사진 찍어서 올리고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데요?" 라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잘 보면,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 그런 모습들을 보이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항상 자기의 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싫어합니다. 집에 아이들만 있고 부모들은 밖에서 일하고 들어가면, "아빠왔다!" 하고 들어가면 아이들은 그때가 제일 바쁩니다. 후다닥하면서 숨기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자기들이 뭐하고 놀고 있었는지 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이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학교에 가서도, 이제 선생님으로부터 숨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언제오나 하고 한명 망을 세워놓고 교실에서 노는거죠. 선생님 오면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숨기고 딱 앉아있게 됩니다. 학생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 회사에 가서도 사장님이 들어오면 숨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실때에 사람들은 숨습니다.
왜 숨습니까? 죄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것을 하고 있는, 그것을 숨기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죄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부모님께 부끄러운 것이고 선생님께 부끄러운 것이고 사장님께 부끄러운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것을 두려워하여 숨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의 상태가 어떠한지,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때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떳떳하게 나갈수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지금 "~야, 네가 지금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실때, 지금 이 범죄한 아담처럼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지, 한번 정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부르실때에 이렇게 숨어야 한다면, 부끄럽고 두려워서 숨어야 된다면, 여러분은 그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창피를 주려고,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에게 벌을 주려고 찾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문제가 있으니까, 그 문제를 깨닫고,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그들은 그 죄로 인해서 부끄러움 가운데 자기들이 그것을 처리해 보려고 잎사귀를 가져다가 옷을 만들어서 입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참된 해결책이 되지 않았습니다. 잎사귀로 만든 옷은 금방 망가져 버리고 그들의 수치는 다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해결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죽여서, 2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죄 없는 한 짐승을 죽여서 그 짐승의 가죽으로 그들의 죄를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고 그리고 죄로 인해서 부끄러움 가운데, 두려움 가운데 숨어있는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별로 관심없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여러분의 양심에 묻고 있습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또 다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한번 또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우리 인생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말해주는 책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1-5).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요 3:9-11).
여기 예수님께서 계실때에 한 바리새인이, 여기서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많이 공부한 그런 사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사람을 성경을 가르치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께 찾아옵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우리 인생들이 지금 있는곳은 밤입니다. 여기서 밤은 어두운 것이고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지만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공부한 사람도 알지 못하고 있는, 어두운 밤에 있는것 같은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하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까? "나는 밤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성경을 알고있다. 성경은 이런이런 내용이지 않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여러분에게 "당신은 지금 모르고 있다. 어둠 가운데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여러분에게 학교를 안다녀서 그래서 무식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안해서 여러분이 무지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아온 니고데모만큼 성경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도 성경은 어둠 가운데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지 하늘나라에 갈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 갈수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십니다. "거듭나야 된다. 다시 태어나야 된다." 거둡난다고 하는 것이, 거듭, 다시 한번 태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공부를 많이 한 니고데모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사람이 한번 태어났는데 어떻게 다시 한번 태어날수 있습니까? 내가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밤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경험했을때, 그때 알게 됩니다. 공부를 많이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정말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아, 이게 거듭나는 거구나! 이게 다시 태어나는 거구나!" 그때 알게 됩니다. 이 경험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였든지, 아니든지 간에 여러분은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참으로 이 말씀 앞에서 내가 정말 모르고 있구나.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하면 가는지 알고 있습니까? 이 거듭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또 한군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옆에 4장에 가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3-18).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우리 인생이 어디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그 장소는 우물 옆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물 옆에 있습니다. 우리는 숨어있고, 알지 못하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또 우리는 우물 옆에 있습니다. 우물 옆에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이 여자는 이 우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15절에, "여기 물길러 오지 않도록 하옵소서." 여기 다시 물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그렇게 말합니다. 이 우물물을 다시 기르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 우울물이 그에게 영원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갈증을 완전히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목마름으로 인해서, 그 영혼의 목마름으로 인해서 그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서 우물을 찾아갑니다. 그 우물 옆에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주는 물은 우리를 다시 목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물을 길러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우물을 다시 마셔도 또 목마르고, 그래서 다시 물을 길러오고 다시 마셔야 되는, 영원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그러한 가운데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가 읽은대로 남편이 다섯이나 있는 여자입니다. 참 어떤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길래, 그가 어떻게하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자세하게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그가 한 남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남편을 얻었으며, 또 그 남편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남편을 얻었으며, 그렇게 다섯명이나 남편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만족시지 못하는 우물 옆에 있는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영원한 만족을 누릴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숨어있을때에 그는 다른 어떤것으로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세상의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만족을 대체할수 없습니다. 어뚱한 곳에서 그 영원한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남자와 살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그래? 혹시 이게 부족한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조금 다른 이 남자와 살아봐도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의 특징이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세상에 있는것은, 하나님이 아닌, 어떤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인다 할지라도,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아마도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그런 경험을 가지고 계신 분일수록 더 공감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것이 정말 만족을 준 것이 있습니까? "아, 저것만 있으면 만족을 줄줄 알았는데" 항상 이 말이 참됨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항상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하나님이 주시는 물은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 밖에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 밖에 있는 것으로는 나를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을 변화시키고, 내 안에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고, 내 안에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영원한 만족을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럴때에만 우리는 참된 만족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참 이것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여러분이 지금 있는 장소가 헛된 만족을 구하는 장소라는 것을 깨달아 아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헛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것은 그 여인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그러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 여인의 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다섯번이나 결혼하고 그리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는 합법적으로 결혼한 관계가 아니고 그냥 동거하고 있는 남자입니다. 그래서 주님꼐서는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자를 주님께서는 남편이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의 상태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 가운데 있는지를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렇게만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부분을 드러내시고 정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본질적인 문제를, 여러분이 추구하던 것이 뭐가 문제였는지를 드러내시고 지금 여러분의 상태를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죄는 숨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렇게 과거를 숨기고자 하였지만 죄는 전혀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행동을 아실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도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라는 것은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한번 결혼하고 그것이 잘 안되서 이혼했으면 다음번 결혼할때 조금 주저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결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힘으로는 이것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만족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죄를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의 무서운 점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더 나빠집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합법적으로 결혼을 하기라도 했었는데, 이제 나중이 되니까 아무하고나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살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서가 아닌 잘못된 만족을 취하고자 할 때에, 죄를 지으면서 만족을 취하고자 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이제 우리 인생이 어느 장소에 있는지를 또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끝부분으로 가셔서 계시록 20장을 보겠습니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숨어있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둠 가운데 있게 되고, 그리고 알지 못하면서 엉뚱한 곳으로 만족을 구하려고 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쾌락을 좇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국에 우리는 요한계시록 20장의 이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가, 20장 11절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계 20:11).
이제 그 사람들의 결국은 심판대입니다. 그들이 숨어서 지내다가, 알지 못하며 지내다가, 자신의 정욕대로 살다가 죽어서 그냥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크고 흰 보좌, 그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거기에 구원받지 않고, 거듭나지 않고 죽은 모든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12절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들이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샇았던지 간에, 높은 지위를 가졌던지 간에, 아니면 비천하게 살았던지 간에, 그 모든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2-15).
여러분이 이 땅 가운데서 살면서 거듭나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하나님을 피해다니고, 숨어다니고, 알지 못하고, 여러부느이 정욕대로 살다가 죽었다면 이 심판대 앞에서 여러분의 행위대로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불못입니다. 영원토록 불 가운데서 고통받는 그 지옥이 인생의 마지막 있게 될 장소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러한 운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 장소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죄인들을 아주 기뻐하시면서, "너희들이 받아야 되는 마땅한 형벌이 이것이다." 하시면서, 그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이 심판받는것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여러분이 심판받아 불못에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있는 곳을 아느냐? 네가 있는 곳은 위험한 곳이다. 빨리 거기서 나와야 한다."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기서 벗어날수 있도록 구원자를 보내주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장소에서 건짐을 받을수 있도록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2-6).
여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시는 것을 알려주는 별을 보고 동쪽에 있는 나라에서 박사들이, 지혜로운 자들이, 그 별을 연구한 자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여기 또 하나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 기록된 첫번째 질문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첫번째 질문도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었고 신약성경의 첫번째 질문더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두개가 차이가 있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우리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 인생이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이었고, 두번째 이 질문은 구원자가 어디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를 그 끔찍한 장소에서 건져내실 구원자가 어디 계시뇨, 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첫번째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경은 또한 이 질문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어디 계시는지, 성경은 계속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구원자는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해 줍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그곳은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유대땅, 베들레헴에 나시도록 예언되어 있습니다."라고 성경을 보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자를 잘 찾을 수 있도록 어디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는 여기지, 라고 분명하게 알수 있도록, 동방에 있는 멀리 있는 사람도 알수 있도록 분명하게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계속적으로 여기다, 여기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 크리스마스에 어떤 카드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면을 그려놓은 모습을 여러분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그림이 정확하지 않을지라도, 하여튼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처럼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그리고 그 태어나신 장소가 바로 유대땅 베들레헴이라는 곳입니다. 이것은 이천년 전에 분명히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이땅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신 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를 그 끔찍한 장소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원자를 미리 예비하시고 700년 전에 이렇게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유대땅 베들레헴에 우리의 구원자가 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전에, 아담이 범죄하여 숨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말씀하십니다.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날 성령으로 잉태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말씀해 놓으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그 구원자를 통해서 우리는 더이상 숨어있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는 길을 여시는, 그분을 하나님은 미리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 우물에 대해서 말했는데요. 그 부분을 다시 한번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3-7).
여기 앞에, 우리가 앞에 읽었던 그 우물입니다. 그 우물에 예수님께서 일부러 찾아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여기 보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반드시 거기로 통행해야 하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 사마리아 여인, 그 만족을,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을 얻고자 했던 여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에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분께서는 우리로부터 멀리 더나 있는 곳에 가만히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 장소에, 여러분이 숨어 있는 장소에,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그 장소에, 여러분이 있는 우물 옆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는 "행로에 곤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걸어야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그에게 참된 생명수를 주기 위하여 그를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을 찾아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 가운데서 힘든 일이 있을때, 그들의 인생 가운데서 여러가지 것들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였을때, 낙심 가운데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너에게 찾아가고 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힘들여 찾아가신 것처럼, 바로 그 순간,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요 19:17-18).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 땅에 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를 미리 예비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물 곁에 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찾아오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해골이라는 곳에 계십니다. 그것은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 특별히 예수님이 계신 곳을 해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전부 해골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냥 골고다라고 해도 되는데, 우리 말로 잘 아시는 골고다, 갈보리, 이게 다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복음서 기자들이 해골이라고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이 예수 그리스도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장소인지를 강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가 해골이라는 곳에 계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사형장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자기의 죄로 그 형벌을 당하는 장소였습니다.그래서 그들의 시체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고, 때때로 해골들이 그 옆에 있었을 것입니다. 썩어져, 그 처참함을 보여주는 그러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전혀 해골이라는 곳과 어울리지 않을것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골이라는 곳에 가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지시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되는 그 형벌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정욕대로 살던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야 되는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고, 그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해골이라는 곳에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그런 사형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죄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말로도 전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고 모욕할때도 그 분의 입에서 전혀 반응하여 욕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 죄없는 분께서 바로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해골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인자도 들려야하니니"라는 말슴처럼, 여기 인자는' 사람의 아들',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들린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신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바로 나의 죄로 인한 것임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라..."(요 3:11).
공부를 많이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증거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이 말씀의 증거를 받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 증거를 받는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그대로 믿는 자가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우리는 참된 만족을 누립니다. 그리고 참된 앎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감을 얻게 됩니다. 참으로 이러한 복을 누리게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4장 말씀을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믿는 자들이 어디에 있게 되는지, 믿는 자들이 있게되는 그 장소를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믿는 자들은 아버지 집에 거하게 됩니다. 그 영원한 고통 가운데 있는 불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그분과 함께 하는 아버지 집. 참으로 따뜻한, 영원한 만족을 누리는, 이제 더이상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는 그러한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이 있는곳에 우리도 있고 하나님 아버지가 있는곳에 우리도 있는 그 아버지 집에 우리가 영원토록 있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놀라운 복이 이곳에 있는 모든 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믿고 이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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