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찬 형제님/복음 말씀

복음 : 참된 위로가 되시는 예수님

박이레 2021. 12. 21. 17:05

2021년 12월 19일 일요일 / 강성찬 형제님
< 복음집회 : 참된 위로가 되시는 예수님 >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18).

이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주님을 찾고 계시는 분들께서 우리 주님을 영접하는 그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읽은 마지막 부분에, 18절에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한번 여러분들에게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합니다. 참 위로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너무나 슬픔이 커서 그 위로를 받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혹 한강에 있는 다리를 걸어서 건너갈때가 있습니다. 한강에 있는 다리가 대교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 것처럼, 긴 거리가, 한 2km정도 됩니다. 그래서 보통 차로 지나다니죠. 그런데 간혹 그 다리를 걸어서 건널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리를 걸어서 건너다 보면 신기한 것을 보게 되는데 어떤 지점을 지나가고 있을때, 그 다리의 난간에 불이 들어옵니다. 지나가면 그 위치에 불이 들어오오는데, 그 불에 글씨가 써져 있습니다. 어떤 글씨가 써져 있느냐면 '다 괜찮아' '잘 될거야'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이런 문구가, 지나가는 움직임을 감지해서 다리에 문구가 불이 딱딱 들어오더라고요. 왜 그런 설치를 해 놓았을까 생각을 해 보니까, 그 다리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생각해 보라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정부에서 그런 문구를 설치를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봤을 때, 그런 문구로 그것을 돌이킬수 있을까?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마음을 먹은 사람들을 그 문구로 돌이킬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잘 안되겠지만 그래도 그 생명이 귀한 것이기 때문에 혹여나 이것을 보고 그것을  돌이킨다면, 그런 마음으로 그것을 설치해 놓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참 이 시대는 많은 슬픔을 가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슬픔 가운데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또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위로를 하고자 하는데 그 위로가 거절되는 시대입니다. 그런 말로 자신의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람들의 말이 위로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로를 거절하는,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받지 않는 그러한 시대입니다.
왜 이런 시대가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을 때, 마태복음 2장을 읽은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슬픔의 그 이유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기 기록된 사건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인데요. 성탄절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태어난 날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념하는 그런 날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정확히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수 없습니다. 단지 12월 25일이라는 크리스마스는 사람들이 정한 그런 날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사람들이 그 날을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로 기념을 하고 있는데요. 실제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날에 어떤일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때 당시 이스라엘은 헤롯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헤옷왕에게 어떤 박사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박사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석,박사에 해당하는 박사인데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죠. 특별히 어떤 공부를 많이 했느냐면 별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냐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특별히 별이 나타낼 것이고 그리고 그 유대인의 왕은 단지 유대인의 왕일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이시다. 이런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관심있게 그 별을 연구하고 그 별이 나타나자 그 별의 움직임을 보고 이 이스라엘 땅으로 와서 헤롯왕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그의 별을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왕은 이제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나실 것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태어날 그 장소에 대해서도 미리 정하시고 기록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사들은 베들레헴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헤롯왕은 한가지 부탁을 하게 됩니다.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거든 나에게도 그 정확한 위치를 알려달라. 나도 그분께 가서 경배하겠다."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왕은 좋은 뜻에서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왕은 내가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그렇다면 그를 없애야 겠다.' 아기로 아직 크지 않았을때, 아기였을때 죽여서 내 자리를 위협하는 그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을 죽여야 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치를 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박사들을,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헤롯왕은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들을 보내어 어떻게 하느냐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다 죽여버립니다. 두살이하로 모든 갓난 아이들을 다 죽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그 아이의 어머니들이 슬피 울고 있을 때에, 이것이 역시 기록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왜 위로도 할수 없는 그 슬픔이 있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이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 이 땅 가운데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죄 때문입니다. 무고한 아이들을 죽여버리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기심으로 죽이는 그런 죄 때문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이 헤롯왕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도 있는 그러한 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런 끔찍한 학살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그러한 갓난 아이들을, 많은 아이들을 무고하게 죽인 적이 없는데, 이렇게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는 헤롯왕처럼 내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내 자리를 누군가 위협한다면 그를 미워하고 그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롯과 우리와의 차이는 헤롯은 많은 군대가 있어서 그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사람만 보내면 그 마을에 있는 모든 아이를 다 손쉽게 죽일 수 있는 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군대가 없으니까, 내가 힘이 없으니까, 내가 저 사람이 싫고 미운데 내가 힘이 없으니까 못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도 내 말의 명령으로 간단하게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군대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떠한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헤롯왕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은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높은 자리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참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이것은 내 인생이니까, 내 마음대로 살수 있다. '이거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드시고 여러분을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헤롯처럼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아이들을 죽이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그러한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 가운데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가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위로할 수 없는 그런 슬픔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한가지 더 기록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로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마태복음에서 읽었던 사람, 라헬이라는 사람,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한 그 라헬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창세기 35장에 등장합니다. 그 마태복음 말씀이 창세기 35장에 있는 사건을, 정확히 같은 사건은 아닙니다만, 그 사건을 모티브로 기록된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창 35:16-20).

여기에 한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라헬이라는 한 여자와 라헬의 남편되는 야곱이 여행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앞과 뒤를 살펴보면, 그는 먼 길을 여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세겜이라는 곳을 떠나서 헤브론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리상으로 보면 한 100km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100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한 가족이 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라헬은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됩니다. 그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리고 그 상황 가운데에 라헬이 죽으면서 유모가 라헬을 위로하려고 하였지만 라헬은 그것을 거절하고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붇이게 됩니다. 베노니라는 것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베'가 아들이라는 뜻이고 '노니'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라헬은 '슬픔의 아들'이라고 라헬은 그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붇이고 죽게 됩니다. 참 이 일을 우리가 보게 될 때, 우리의 인생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의 인생은 여행과 같습니다. 걸어서 그 먼 길을 가는 고단한 여행과 같은 것이죠. 그리고 그런 여행 가운데에 우리는 결국엔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으로서 자신의 여정이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죽음이 언제 찾아오는가? 그게 특별히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죽음이 언제 우리에게 찾아오는가? 이 가족은, 야곱과 라헬은 자신의 아버지 이삭, 라헬의 시아버지 이삭을 만나러 헤브론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헤브론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에브라, 곧 베들레헴에 가기 직전에 죽게 됩니다. 여기보면 16절에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얼마 가면 베들레헴인데 그곳을 미처 못간 곳에서 출산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죽음이 언제 찾아옵니까? 아 내가 목적했던 것을 다 이룬 다음에, '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때 죽음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죽음은 갑자기 찾아옵니다. 아 저기까지만 가면 되는데, 조금만 더 가면 내가 바라던 것을 이루는데, 그리고 그 전에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곳이 아주 비옥한 곳입니다. 곡식이 아주 많은 곳이고요. 거기가면 쉴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어려운 여행길을 가면서 조금만 더 가자, 조금만 더 가면 저기서 좋은 식사를 할수 있고 편히 쉴수 있다. 그때 거기를 못가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까? 제가 장례식장에 부고를 듣고 방문하게 되면 항상 듣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 입니다. 이제까지 고생해서 살아왔고, 조금만 더 버텼으면 좋은 날을 살수 있었는데, 그래서 그 전에 이리 죽어서 얼마나 아쉬운지,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의 죽음인 것입니다.
여기 라헬이 아이를 낳을때에,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창 35:17).

이렇게 위로하게 됩니다. "괜찮다. 지금 당신이 아들을 낳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통해서 라헬이 얼마나 둘째 아들을, 또 아들을 낳기를 원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라헬이라는 어머니가 요셉을 첫째 아들로 낳습니다. 첫째 아들을 낳을때에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으면서, 왜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느냐면,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이 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또 아들을 주시기를 원한다, 해서 요셉이라고 첫째 아들의 아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이 금방 생기지 않았습니다. 계산을 해 보면, 10년 이상, 길게는 17년 뒤에 이 둘째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 오랜 기간동안 라헬은 둘째 아들이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매일처럼 하는 말이 그거였을 것입니다. "아 왜 아들이 또 안생길까? 언제 또 아들을 낳을까?"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리던 둘째 아들을 낳게 되자 산파가 이렇게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지금 네가 그토록 기다리는 둘째 아들이 태어나고 있다." 그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는데 라헬은 그 아들과 시간을 얼마 보내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참 이게 우리 인생의 모습이고 인생의 슬픔인 것입니다. 라헬은 그것을 느끼면서 그 아들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아비가 그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꿔버립니다. '베'라는 것이 아까처럼 아들이고 '냐민'이라는 뜻이 오른손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바꿉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도 하죠. 오른손을 성경에서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거기가 힘과 그리고 애정의 자리를 말합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슬픔의 아들에서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 그가 결국에는 참된 애정 가운데서, 참된 권위 가운데서, 참된 힘을 발휘하는 아들이 될 것이다, 라고 그 이름을 바꿔 붇이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왜 그 이름을 바꿀수가 있었을까요? 이 아버지, 야곱도 이게 굉장한 슬픔이었고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내게 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오히려 격한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창 48:7).

그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 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관하여는" 그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말할 때에, 어떤 사건을 말하냐면 그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이 죽은 것, 이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 가운데, 자신의 마음 깊이 슬픔으로 각인된 그러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야곱에게 있어서 그냥 아무런 일이 아닌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큰 슬픔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순간 야곱은 그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바꿀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창 48:3-4).

그는 이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나를 통해서, 우리 가문을 통해서, 우리 아들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많은 백성이 나게 하겠다. 이 약속을 하셨다. 나는 그 약속을 믿고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나는 위로를 받고 그 아들에게 희망적인 이름을 지어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주실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거절하지 말라. 이제는 그 위로를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참된 위로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위로처럼 위로할 수 없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위로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되서 구약성경 예레미야로 가서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 31:15).

마태복음에서 읽었던 그 말씀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동일하게 라헬이 나오고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는 왜 이러한 말을 기록하였는지, 그때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을 거절하고 그들이 원하는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상숭배를 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시는데, 다른 이방나라, 앗수르가 그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특별히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북이스라엘을 먼저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사람들을 포로 잡아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들이 포로되어 끌려 갈 때에, 그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격 되는 라헬이 그것을 보면서 통곡한다고, 위로받기를 거절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을때 이러한 슬픔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을 때에 그들 가운데 포로 되어 끌려가는 그 슬픔과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 그 하나님의 위로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슬픈 일이 있을때에 사람들이 위로할 때에, 위로가 안되고, 도 위로하기 어려운가 하면, 참된 위로가 되려면 그 위로하는 사람이 정말 그 슬픔을 공감해야 됩니다. 정말 자신의 일처럼, 그것이 어떠한 슬픔인지를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정말 그 사람의 입장이 된 것처럼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가 안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공감하시고 위로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16).

하나님께서 이렇게 위로하고 계십니다.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고 네 눈물을 흘리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20).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계신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냐면, 바로 지금 포로되어 끌려가고 있는 그 이스라엘 민족들이 사실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나의 자식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단지 이스라엘 민족들이 끌려갈 때에 그들의 육신의 어머니만 그것을 고통으로 느끼고 슬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 민족들을 자신의 아들, 자신의 자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여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슬픈 일을 당한 다른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그 일을 본인이 당하시는 것처럼 느끼고 계시다는 것을 여기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민망히 여기시고 그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로서 여러분의 부모님이 느꼈을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 그들을 깊이 생각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는 참된 위로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된 위로가 되는 두번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위로가 실제로 변화를 가져다 줘야 됩니다. "다 잘 될거야." 그것은 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은 희망적인 말 뿐이죠. 좋은 말이긴 하지만 실제로 우리 인간들에게는 다 잘되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절에,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너의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이다." 네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 가운데서 다시 회복될 것이다. 갚음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로 그렇게 되기 때문에 참된 위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변화 시키기시고, 그래서 온전히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그것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는 참된 위로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시면 그들이 어떠한 회복을 받을 것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느냐면, 그들의 마음 속에, 그들의 속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슬픔과 고통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와 같은 죄를 다시 범치 않도록 이제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두고 그들이 자원해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그러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 슬픔을 겪지 않는 그런 놀라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에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두운 그 실패와 슬픔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것처럼 그 라마에서 라헬이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한 그 슬픔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장에 가장 놀라운 회복이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그들을 회복시키시되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그 놀라운 회복을 해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히 10:16).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발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회복시켜 주실 그 말씀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회복이 일어난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놀라운 회복이,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우리 생각에 기록되는 놀라운 회복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0-14).

여기 이 놀라운 회복이 우리에게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0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을 십자가에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믿는다면 이제 그는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죄를 위하여 다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온전한, 그리고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지금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바로 이분이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야곱은 이러한 인생 가운데서 많은 슬픔이 있지만 결국에 오른손의 아들이 오셔서 그 모든 슬픔을 치유하실 것이다.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두심으로 그 슬픔의 문제를 치유하실 것이다. 야곱은 그러한 믿음으로 그 슬픔 가운데서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바꿔서 지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성경에 위로에 대해서 기록된 첫번째 단어를 보면 노아라는 사람의 이름이 위로입니다. 그때 당시에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죄악을 지으며 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시대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슬픔 가운데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예비하시고 그 가족을 구원하시는, 이것이 그 세상 가운데 참된 위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이름은 위로였습니다. 이 슬픔이 많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위로는 이러한 구원입니다. 죄 가운데서 구원,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참된 위로입니다. 여러분께서 이러한 위로를 받으시고 참된 기쁨 가운데서 복된 영생을 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