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성경읽기(요약글)/열왕기하 성경읽기(요약) 완료

성경읽기 : 열왕기하 4장 29-37절(요약)

박이레 2021. 8. 18. 22:18

성경읽기 : 열왕기하 4장 29-37절(요약)

29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찌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30 아이의 어미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좇아가니라
31 게하시가 저희의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는 모양도 없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가로되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32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서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가로되 네 아들을 취하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왕하4:29-37, 개역한글)


[ 29-37절 성경읽기 ]
최재홍 형제님 사회 : 오늘 교제할 내용 중에 엘리사가 자신의 지팡이를 게하시에게 보내는 장면도 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교제해주시길 바란다. 이 행동에 의미가 없는것 같은데 왜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또한 엘리사가 죽은 아이의 위에 올라간 행동들이 어떠한 이유 때문인가 하는 것도 교제해 주시길 바란다.

- 전의석 형제님 : 엘리야에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모습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때보다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이를 살리는 모습에서 어떻게 살리는 것에 대한 정보가 나오는듯 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더러 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모습이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주님께서도 죽은 자를 살리셨다.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모습에는 이러한 복잡한 행동이 없었다. 성질적으로 다르고 능력의 차이도 분명히 있음을 보게 된다.
지팡이는 모세 때부터해서 그 사람의 권능을 나타낸다고 한다. 지팡이로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이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팡이로는 죽은 사람을 살릴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다고 앞선 형제님들은 교제 하셨다. 

엘리사는 죽은 아이가 자기 침상 위에 있었는데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한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를 위한 누군가의 기도가 반드시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34절의 모습은 엘리야가 아이를 살리는 모습과 비슷하다. 이 모습은 죽은 사람과 내가 일치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아이를 생각하고 마음을 쓰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생각할때에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어떠한 낮은 모습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가, 그 사람을 살리고자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주님 또한 이러한 낮은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섬기셨다. 

37절에서 수넴여인을 부른다. 4장에서는 수넴여인을 세번 부른다. 엘리사는 여인에 대한 호의에 대해서 육신적인 충족을 물었을때 여인은 충분히 평안하다는 대답을 한다.(12절) 두번째 다시 불렀을때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15절) 그리고 그 아들이 잠깐 잃어버린 바가 되었을때 그 아이를 다시 살려 여인을 불렀다. 이 부름에는 각각 의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37절) 주님이 우리를 부르심에는 각각 그 부르심이 다름을 생각하게 된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늘 은혜와 선함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 김보영 형제님 : 29절에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가서 아이의 얼굴 위에 올려놓으라고 한다. 이것은 아주 신속하게 가라고 한다. 
우리도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지체할 수 없는 처지 속에 살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경륜의 때가 있다. 그때를 놓치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때가 오게 된다. 

또 하나는 지팡이를 갖다 놓으라고 했다. 게하시는 이 지팡이를 가지고 가면서 이 지팡이가 어떠한 큰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사람들은 믿음의 선진들이 쓴 물건들에 많은 집착을 한다. 그 물건이 어떠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물건 자체가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물건이 우상이 되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지팡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바로를 만나러 가는 모세에게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을 맏겼다는 증표가 되는 것이지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교회당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임을 깨닫게 한다.

엘리사가 아이의 얼굴에 지팡이를 놓으라고 명령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라고 했다는 하나의 증표이다. 이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았다는 것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아이를 살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신앙적인 고백이다. 이같은 것은 나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 아이를 살리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신앙적인 고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수 있다. 

- 김대현 형제님 : 30절에서 수넴여인은 엘리사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고 엘리사는 일어나 여인을 좇아간다. 수넴여인의 고백은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많이 했던 고백이다. 엘리사는 벧엘, 여리고, 요단까지 엘리야와 동행하였다. 엘리사는 자기의 고백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는 수넴여인을 따라 좇아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게하시가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았지만 아이가 깨지 않았다. 지팡이가 가지는 의미가 구약에만 50번이 나온다. 지팡이는 권위, 상징, 징표, 능력, 이적 등으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이적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않자 그 지팡이는 아무런 이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여인을 따라서 수넴여인의 집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서 능력을 일으키시를 원하고 계셨다.

또한 아이는 일곱번 재채기하고 살아난다. 이 재채기는 호흡의 소생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37절에 수넴 여인은 땅에 엎드려 절했다. 이는 엘리사를 통해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는 우상숭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 김보영 형제님 : 32-33절 말씀을 보면 엘리사는 여인의 집에 들어가서 자기 침상에 누워있는 아이의 죽음을 확실하게 확인한다. "아이가 죽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었다, 기절했다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문을 닫으니 두사람 뿐이라" 아이는 이미 죽어서 사람이라 할수 없다. 그러나 "두사람 뿐이라" 살아있는 사람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는 엘리사가 이 아이가 살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할수 있는 고백이라 할수 있다. 엘리사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아 아이를 살린다고 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아이가 살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 가운데 기도하였다.

- 장승훈 형제님 :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산으로 올라가셨다.

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막9:14-15, 개역한글)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막9:17-18, 개역한글)

아까 언급했던 세명의 제자 외에 아홉명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아달라 했지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일을 하신다.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9:28-29, 개역한글)

기도가 핵심이다. 어떤 일을 할때에 우리가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나는 이 일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느냐, 아니면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느냐의 차이이다. 오직 그 능력이 주님께만 있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신다고 굳게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먼저 보낸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했던 말을 동일하게 한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 엘리사가 그 말을 받아들였다. 게하시를 보내놓고 여인의 말을 받아들여서 따라서 아들에게 가는 것이다. 
그리고 게하시가 갔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엘리사는 방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한다. 여기서는 게하시의 허영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수넴 여인에 대한 시험인지, 아니면 게하시를 향한 시험인지는 확신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게하시와 엘리사의 행동 비교를 통해서 기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수넴 여인의 행동은 매우 일관된다. 그녀의 마음은 불타고 있다. 그 마음이 내용의 중간 중간에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믿음을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엘리사가 이 여인의 아이를 살린 것을 보게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할 때에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 최재홍 형제님 : 29-31절의 말씀을 보면 엘리사가 지팡이를 보낸 것이 불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엘리사의 지팡이는 자신을 상징하는 물건이고, 자신을 대신하는 물건이다. 그러나 그 지팡이로는 죽은 아이를 살리지 못했다.
이는 두가지 교훈을 주고있다. 첫번째는 수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한 것으로 보인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신뢰함을 시험하고 있다.
두번째는 게하시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게하시에게 엘리사를 상징하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기도만이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3절에서는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리는 행동을 한다. 이는 죽은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자신은 이 아이를 살릴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맞아야 한다.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게 되는 것을 볼때에, 엘리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엘리사는 방 안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자신이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라는 것을 실감하며 다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마침내 아이는 살아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