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05. 시련이 주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 >

박이레 2021. 7. 25. 21:53

2019년 7월 22일 월요일

한봉래 형제님

< 05. 시련이 주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 >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시련이, 다른 표현으로 하면 고난이, 다른말로 하면 여러 어려움이 우리를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며 도구이다. 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것들을 성경에서 다른 예들을 살펴보며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찌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이에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할꼬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지라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가로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삼상5:1-12).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합니다. 아시겠지만, 앞에서 전쟁을 했는데 이스라엘이 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결정합니다. "언약궤를 가져오자."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전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패 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은 이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신을 상징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이 언약궤를 가지고 자기들의 신전앞, 다곤신상 앞에 두었습니다. 자기들의 신이 이스라엘 신보다 강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긴것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지키십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을찌라도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스스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다릅니다. 이틑날 와보니까 다곤 신상이 여호와 궤 앞에 옆드려져 있었습니다. 아침일찍 신전을 관리하는 사람이 와보니, 제사장이겠죠. 이상한 일이 벌어진 거죠. 바람이 불었나? 왜 이렇게 엎드러져 있지? 이제까지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하고 다시 신상을 똑바로 세워놓고 갑니다. 그들이 못알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들의 신이 강해서 이긴것이 아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징계 했을 뿐이다. 나는 너희들의 신과는 다른 유일하고 살아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이다." 이런것들은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워놓고 갔지요. 그 다음날에 와 봤더니 이번에는 그 신상의 목이 잘라져 있고 손이 잘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몸 뚱아리만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사인 입니다. 우리신이 더 강한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했을찌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패배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모든, 우리의 신과는 다른 어떤분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세워놓고 갑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 지경에 독종, 아마 피부병을 일으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 합니다. 아, 하나님의 이 언약궤가 우리 가운데 있음으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어떡해야 하지요? 그들은 이렇게 결정합니다. 언약궤를 다른곳으로 보내 버리자. 그래서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보좌 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 그것을 못견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앞에 있기를 무서워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피해 버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앞에 계시므로 그들에게 일어난 이 고통스러운 사건들은 그들에게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자기들의 신이 우리가 생각하는것과 다르고 자기들의 신이 정말 이긴것이 아니고 그러면 이 이스라엘의 신은 왜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허락했는가? 이 능력이 있으면서, 우리 신보다 강한데 왜 자기 백성을 패배 시켰는가?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이 언약궤를 왜 가져왔는가?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할수 있는 좋은 기회 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언약궤가 있음으로 자기들에게 고통이 생기고 그러므로 생각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고 이 언약궤가 있어서 골치가 아픈것이다. 보내 버리자 합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한가지 생각할 것은 이 다곤 신전은 삼손이 무너뜨린 전적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가로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삿16:23).

그들은 드릴라의 유혹으로 삼손의 머리를 잘라버리고 삼손의 힘을 빼앗고 체포해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동안 삼손을 체포하려고 여러가지 시도를 해 왔는데 실패해 왔습니다. 드디어 성공한 것입니다. 이 성공의 배후에 우리신 다곤의 은혜가 있다 했습니다. 그래서 다곤 신전앞에서 큰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삼손의 묘기를 보자고 하고, 삼손을 맷돌을 돌리게 합니다. 그때 삼손이 이렇게 합니다. 자기를 붙들고 있는 소년에게 이 신전 기둥을 나눠잡게 하라.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마지막으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요. 이들과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던 사람이 다 죽은 그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과거에 그렇게 했을때에 하나님께서 그게 아닌것을 드러낸 것이죠.

두번째, 전쟁에서 언약궤를 가져왔습니다. 삼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 안에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그 언약궤 입니다.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 그때도 그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때,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삼손이 죽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손이 죽을때에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숫자가 삼손이 살아서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숫자보다 많았더라 이렇게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삼손은 자기를 부인해야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죽인 사람보다, 그가 비로소 자기를 부인했을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배워야 하는 교훈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때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셔서 이루시는 역사가 내가 내 힘으로 내 계획으로 내 능력으로 이루었던 것보다 훨씬 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비극적인 것은 이와같은 사건이 일어났을때 블레셋이 깨닫지 못합니다. 이스라엘도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할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이상한 일을 합니다.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습1:9).

다곤신이 목이 잘리고 그 손이 문지방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동해 놓은 것이죠. 하나님이 치고 장소를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블레셋 사람들은 아스돗에 있는 이 다곤신전의 문지방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우상은 우상을 낳고 미신이 미신을 낳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날 문턱을 뛰어넘어서 문지방을 밟지 않고 건너뛰어야 한다고 하는 이 이방 풍속을 따르고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징계 하실것입니다.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그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듣지 않는 사람, 사실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스스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실패 했을때에도 그분의 영광은 홀로 빛나고 있는 분입니다.

"벨사살왕이 그 귀인 일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단5:1-5).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단5:22-23).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단5:25-28).

구약성경에서 또 한번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잘못 해석한 사람의 예가 벨사살 왕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죽고 그의 아들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그의 처남이 그를 암살하고 자기가 왕이 됩니다. 그리고나서 그가 죽고 그의 아들이 왕을 이어가는데 그의 아들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바벨론 제국은 사실상 군대 장관들이 배후에서 정치를 쥐락펴락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어떤 군인이 힘을 잡고 그가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정통성을 잡기 위해서 느부갓네살왕의 딸과 결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왕된 지위를 정통성을 잡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딸이 낳은 아들이 벨사살 왕입니다. 우리식으로 보면 느부갓네살왕의 외손자 입니다. 그렇게 나라가 권력 다툼에 들어가고 군대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해서 국력이 약화 됩니다. 그동안 고레스쪽의 힘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는데 이미 이 바벨론 성은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그날 벨사살 왕은 죽습니다. 그러니까 곧, 적은 왕궁 밖까지 와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가 나가면서 아들에게 왕궁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소식이 들려옵니다. 전쟁에서 졌고 아버지 왕은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이와같은 상황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벨사살 왕이 어떻게 하냐면, 천명을 모르고 잔치를 합니다. 대단한거죠. 손님을 천명을 모으고 잔치를 하니까요. 대 제국이죠. 잔치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뭘 먹냐면 술을 먹습니다. 술을 먹으면 사람의 이성이 마비 됩니다. 정도에 지나치게 마시면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하지않을 일을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기명들을 내놓으라. 거기에 술을 담아 마시겠다." 이것은 지금 하나님께 도전한 것입니다. 자기 할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 성전에 있는 기명들을 자기 신의 신전에 두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한 것이죠. 우리 신이 이스라엘 신보다 강해서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다. 이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것을 다시 교정해 주십니다. 벨사살은 강대했던 바벨론 제국이 왜 이렇게 약화되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 이유를 어디서 찾냐면, 느부갓네살이 원래 하나님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 가운데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꿈을 꿉니다. 아무도 해석할수 없었습니다. 항상 이방왕들이 꿈을 꾸면- 하나님이 주신 꿈이죠- 항상 해석은 이스라엘 사람만 합니다.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7년 풍년이죠. 해석은 요셉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죠. 느부갓네살이 꿈을 꿉니다. 해석은 하나님의 백성만 합니다. 금신상이 있고 쭉 했지요. 그가 이렇게 요구 합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이것이 무슨 꿈인지 해석이 안된다." 바벨론 박사들이 꿈을 말씀하면 해몽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해몽이 맞는지 어떻게 아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구 합니다. "내가 꾼 꿈을 말하고 해석하라." 그래야 해석이 맞는 줄 알수 있죠. 그것을 요구 합니다. 그러자 바벨론 박사들이 그렇게 하는것은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화가 나지요. 전부 죽여버려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먹이고 지위 주고 했는데, 이것 하라고 했는데, 그때 다니엘이 들어가서 꿈을 말하고 꿈을 해석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다니엘의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후에 또 자기가 왕궁에서 쫓겨나고 하였을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의 쓴 조서를 보면 그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벨사살은 이렇게 강력했던 바벨론 제국이 이렇게 멸망하게 된 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우상을 숭배했던, 바벨론 제국은 강대국이었는데, 그래서 주변 나라를 다 정복하고 세계 제국이 되었었는데 그 제국을 이룬 후에 느부갓네살이 포로로 잡아온 이스라엘의 신을 믿는통에,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정합니다. 잔치를 할때, 그놈의 이스라엘 신의 신전에서 가져온 기명을 다 가져오라고 합니다. 거기다 술을 먹어야 겠다 합니다. 술을 마시고 바벨론의 전통적인 우상을 찬양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패배시키신 것은 하나님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으로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방인이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벨사살은, 설명은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느부갓네살의 손자로서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시인하게 된 과정, 그냥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경험합니다. 꿈을 꾸게 하시고 또 그로 하여금 미리 또 한번의 꿈을 꾸게 하시고 그가 교만하여 졌을때 인간 세상에서 쫓아버리시고 그러나 그가 다시 겸손해 졌을때, 그의 총명을 되돌아오게 하시고 그의 대제국의 왕 자리를 그동안 쭉 비웠다가 다시 왕으로 복귀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을 이 세상이 통치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을 입증하고 그가 믿은 것입니다.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벨사살이 거꾸로 행했습니다. 여기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번째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나의 호흡을 만드신 하나님 입니다. 또 하나는 나의 모든길을 내가 인생의 걷는 모든길을, 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을때 그는 결정 합니다. 이 불행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나는 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차라리 나에게 행복을 약속하고 있는 우상을 신뢰하겠다고 결정 합니다. 이것이 벨사살이 잘못한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저희들의 생애에 시련을 주십니다.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고쳐 주시기를 원하는 은혜 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고 나에게 화를 주시는 하나님, 안받아들인다. 이것이 벨사살이 선택한 것입니다.

이제는 신약으로 오겠습니다.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눅24:20-23).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7).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24:35).

이것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입니다. 두 제자에게 굉장히 강력한 인상을 준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때, 피흘리시며 돌아가실때 그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제자들은 이것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이 비극적이고 슬픈 사건이 그의 눈 앞에 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가 자기들이 존경하고 따랐던 공회원, 당국 입니다. 자기들의 정부 입니다. 거기서 공식적으로 죽여야한다고 말하고 사형을 집행했던 것입니다. 이런 외적인 고통스러운 사건이 그 마음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이 들립니다. 주님이 부활했다. 부활의 증거, 첫번째 입니다. 하늘에서는 천사가 증거 합니다. "왜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살아나셨느니라.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이것이 하늘로부터의 증거입니다. 땅에서의 증거입니다. 빈 무덤입니다. 이것을 여자들이 봅니다. 가니까 무덤이 비어있고, 천사들은 살아났다고 하고 이 소식을 여자들이 전하고 이것이 퍼져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믿을수 없게 만드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 하는것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공회에서 예수님을 반대했다는 점,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성경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생생한 광경,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보지 못했다는 점을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집으로 가버립니다. 그러고 있는데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성경을 설명하십니다.

여기도 다시한번 하나님은, 주님은 자기 영광을 스스로 보존 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죽였을찌라도 주님이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죽음을 허락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했지요. "누가 내게서 목숨을 빼앗는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그리고 목숨을 다시 취할 권세가 있느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스스로 자기 영광을 보존 하십니다.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성경을 통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의 삶에 고난이 옵니다. 주님은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바벨론 사람에게도 고난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제시하고 그들도 하나님께 돌아올수 있는 길을 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전부 반대로 생각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없는 증거다. 고난은 일단 피한다. 나는 뭐라고 해도, 거기에 다른 영적인 영광이 있다해도 나는 고난은 싫다. 이것이 블레셋 사람의 태도입니다. 벨사살의 태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돌이켜 보는가? 국가가 멸망하고 약화되고, 그는 국가의 융성함이 그의 우상입니다. 국가는 있다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고 이미 말씀 하셨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말씀을 받아 들입니다. 성경을 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했을때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할수 없었지만 고난이 영광을 만든다는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받아들이게 됬냐면 주님께서 떡을 떼실때에 주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이 머물러야 하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하나님이 이름을 두신 도시 입니다. 이제 거기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면 안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난을 통한 영광을 보자마자 그들이 한 것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돌아갔더니 이미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모여 있고 자기들도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실때에 알았다는 것입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보통 만찬때에 떡을 뗍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사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찬을 주님과 함께 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경험한 것은, 주님이 떡을 뗀것을 그들이 경험한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일 때입니다. 주님께서 떡을 떼어 주실때에 오천명, 여러사람들이 보고 경험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떡을 뗀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다 어려워 했습니다. "어떻게 살을 먹을수 있느냐? 어떻게 피를 마실수 있느냐?"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 말씀에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수 있느냐?" 하면서 다 물러나 버리죠.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합니다. '내 살을 먹고'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믿을때에 그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내 피를 마시고'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피흘리심을 이루셨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간단한 것입니다. 그 사실이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주실때에 그들에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아, 주님은 성육신 하시는 겸손함을, 그 낮아짐과 고난을 받으셨다. 우리에게 살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구나." 하는것을 영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옵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성경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이라고 하는 고통을 자기들은, 이스라엘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믿었는데 당국이 죽여버렸을때, 그 생기는 실망감.. 그러나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갈 때에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갈때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예루살렘에 갈때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고 영적인 구원자로, 뿐만 아니라 훗날 지상에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분으로 그들은 이해하며 간 것입니다. 이제는 흔들리지 아니하고 이제는 말씀대로 고난을 이해할수 있는 마음으로 간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믿음의 시련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입니다. 칭찬은 이런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자주 보는 것이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다." 말로 공적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찬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오셨을때 그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 다음 영광은 그가 주님을 닮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영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뵐때에 주와 같은 모습으로 있다고 하는것, 이것이 영광입니다.

그 다음 존귀는 주님이 주시는 상급 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은 어디서 받을수 있을까요? 그 칭찬은 무엇이 만들어 냈나요? 시련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된 것, 무엇이 우리를 주님을 닮는자로 만들었나요? 성경은, 베드로는 말합니다. 시련입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상을 받게 하나요? 시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칭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할때에 이 시련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며 시련을 통해서 인내와 소망을 갖고 잘 통과했을때에 주님이 이렇게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 다음에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 됩니다. 그리고 상급은, 시련을 주시는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더욱 의지할뿐만 아니라 나의 시련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련을 통해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칭찬해 주실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시련을 받을때에 고통중에 있을때에 엠마오 제자처럼 낙심하고 실망했었습니다. 제 낙심 가운데 주님이 엠마오 제자를 찾아가셨던 것처럼 저희를 찾아오셔서 저희를 붇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칭찬할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닮아가는 것을 영광이라고 불러주실때 우리는 우리의 시련을 통해서 기이하게 그와같은 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련을 우리가 성경적으로 통과해 갈때, 우리의 시련을 사용하셔서 다른 영혼들이 주님앞에 돌아오고 다른 영혼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믿음으로 주님을 닮아가고 지역모임이 지역교회로서 기능함으로써 이제 영혼들이 돌아오는것을 통해서 주님이 상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칭찬하실때 우리는 면류관을 벗어 주님께 돌려드릴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시련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벨사살은 그 높은 위치에 있었으면서 그 복된 느부갓네살의 회심을 보고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그 복된 기회를 붇잡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