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9년 여름 수양회

< 04. 산돌, 제사장 >

박이레 2021. 7. 25. 21:52

2019년 7월 21일 일요일

한봉래 형제님

< 04. 산돌, 제사장 >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4-9).

사도 베드로는 본인 스스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로 주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신 기도로 그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베드로전서를 쓰고 있습니다. 이 고난받는 성도들은 성전과 예루살렘과 제사장들과 그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먼 곳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위로하냐면, 그들은 그 화려한 솔로몬 성전, 물론 그것은 다 파괴되고 그 후에 스룹바벨 성전이 지어지고 또 다 훼파되고 그 후에 다시 헤롯이 키워낸 성전입니다만, 그들은 성전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제사장도 없습니다. 그들은 제사도 드릴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성전입니다. 여러분들이 모이는 모임이 신령한 집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제사장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기억하는 집회가 제사인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흐름입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난 날 안드레가 소개해 주었습니다. 안드레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 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봤을때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앞으로 게바라 하리라. 시몬이지만 이제부터 네 이름은 게바이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아마 베드로 입장에서는 굉장히 특이한 경험일 것입니다. 주님을 뵙자마자 주님께서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름을 바꾼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사레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시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신 하나님, 그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약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두번째 경험입니다. 베드로써는 잊을수 없는 경험입니다.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를 이야기 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주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베드로'라 바꿔주시고 다시 말하십니다. "너는 베드로다. 그런데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했을때에,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만, 카톨릭에서는 베드로가 반석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초대교황으로 하는 말도 안되는 일을 합니다. 아시지만 잠깐 설명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라는 단어는, 베드로라는 헬라어는 남성명사 입니다. 당연히 베드로니까 남성명사 입니다. 페트로 입니다. 그런데 이 반석은 페트라 입니다. 단어가 다릅니다. 이 단어는 여성명사 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일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라고 했을때 베드로는 반석의 일부 돌입니다. 돌이라는 단어가 헬라에 세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이 돌이라는 단어는 이 반석의 일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반석은 여성명사이고. 이 베드로같은 돌들이 모여진 것을 반석이라고 합니다. 하여튼간에 베드로는 두가지 자기의 이름을 돌로 바꿔주신 주님, 그리고 자기 이름을 거명하시면서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는 주님, 이 말씀을 그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서 아마 작고 초라한 지여모임을 이루고 있을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성전입니다. 여러분이 산 돌입니다. 여러분이 제사장입니다. 여러분이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깐 구약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한 주님, 이 말씀을 생각합니다. 돌이나 반석이라고 하는 단어가 최초로 언급된 곳은 창세기 입니다. 야곱이 죽으면서 아들들을 축복합니다. 열두아들들, 십이지파 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셉의 후손들을 축복하면서 요셉의 후손들에게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나옵니다. 요셉의 후손이니까, 에브라임과 므낫세지요. 거기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너희 후손중에 이스라엘의 목자가 나올것이라."라고 말합니다. 그 목자를 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의 돌이 나오리라." 하고 요셉 족속을 축복하는 곳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이따 살펴보겠습니다만, 므리바 맛사에서 반석을 한번치고 두번치고 모세가 가나안에 못들어가고 할때 반석이 나옵니다. 반석은 우리 주님이시죠. 그 다음에 구약성경에서 돌이나 반석은 어떤 성도를 가리키거나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키거나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돌과 반석이라는 표현들이 계속 나옵니다. 시편에 나오고 이사야서에 나오고 계속 나옵니다. 저희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큰 신상이 있는데, 느부갓네살부터 시작하죠.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쭉 가지요. 이 사람들이 세운 이 제국, 사람들이 세운 나라를, 한 산에서 떼어낸 돌,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떼지 않은 돌, 이 돌이 신상을 부수고 갑자기 돌들이 온 천하에 가득한 꿈이 나옵니다. 이것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뜨인 돌이라는 이미지가 저희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건축자들이 집을 지을때, 돌은 항상 건축재료 입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건축을할때 돌을 사용하고 성전을 전부 돌로 지었습니다. 대리석으로 지었습니다. 그래서 돌로 집을 짓는데 어떤 건축자가 이 돌이 쓸만한가를 보지요. 그런데 어떤 건축가가 이 돌은 안되겠다고 하고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것이 시편에 언급 됩니다. 사람들은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 돌을 사용해서 집의 기초석을 삼았다는 것이 시편 118편에 나옵니다. 이 구절을 주님이 인용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자신을 사람들이 버린 돌로 표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사용해서 나라를 세우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것은 임의대로 주관할수 있는 지도자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이사야서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시온헤 한 걸림돌을, 부딧치는 돌을 두었다. 누구든지 이 돌에 부딧치면 멸망할 것이다를 이사야서가 예언 합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인용합니다. 로마서 9장에서 인용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실패 했는가? 이스라엘이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바라보는데 실패했는가? 그것을 쭉 설명하면서 지식없는 열심이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거죠. 참 이스라엘은 혈통적인것이 아닌것을 쭉 설명하면서 결국 이 구절을 인용 합니다. 이사야서 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에 두신, 부딧히는 돌, 넘어지는 돌,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저희들이 읽은 이 대목에서 주님은 시편 하나를 인용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사야서를 인용 합니다. 베드로는 이 두 구절을 다 인용 합니다. 베드로는 돌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을 다 인용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산돌이요. 우리가 산돌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살아있다는 표현을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이 산 소망입니다. 산 돌은, 주님이 산 돌인데 이 산돌은 건축 재료일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또 함께 집으로 지어지도록 만드시는 돌이기 때문에 산 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내용을 잠깐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베드로전서 2장을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벧전2:4).

여기 열개의 푹복을 말합니다. "산돌이신 예수께 나올수 있다." 예수님과 하나된다고 하는 것이 첫번째 축복입니다. 두번째, 5절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2:5).

두번째 제사장이 된다 입니다. 제사를 드릴수 있는 영적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된다. 세번째 축복은 6절입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벧전2:6).

세번째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입니다. 구원의 목표가 반드시 이루어질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네번째죠. "택하신 족속이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택하시고 교회를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택하신 족속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왕입니다. 주님과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거룩한 나라요 구분된 백성들입니다. 구분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삶의 주인이 주님이십니다.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빛 가운데 나와 있습니다. 주님이 빛이고 우리가 그 빛을 통해 참된 진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덕을 선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열가지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말할때에 몇가지만 이중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4절에 '나온다'는 것을 보겠습니다. 주님이 산 돌입니다. 우리의 돌을 주님이 바꿔가십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사도바울의 표현으로 보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 생애는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시는 생애 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통해 예배드리게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세상에 복음을 증거케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성도를 세우는 일을 하게 합니다. 이것이 산 돌입니다. 내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또 하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지신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우리안에 살아 계셔서 우리를 주님을 닮는자로 하나님이 계획한 영광으로 끌어갈 것입니다. 반드시 실패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순종한다면, 우리가 주님을 따라간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산 돌이신 주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른것을 보겠습니다. 두번째 5절에 보면 제사를 드린다고 했는데요. 예배라고 하는것이 뭐나면 구약으로치면 제사고 신약으로 치면 저희들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예배 입니다. 성경에서 예배라고 표현된 부분을 보겠습니다. 첫번째, 로마서 12장에 보면 "너희는 너희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이라고 하는것은 합당한,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이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 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첫번째,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죽여서 드렸습니다. 신약에서는 살아서 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이 육체가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감정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될수 있습니다.

그다음 두번째로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입술의 열매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예배때에 드리는 것입니다. 떡과 잔을 놓고 성도들이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입술을 벌려 주님의 아름다움을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에서 말합니다.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여기서 관제는 사도바울의 죽음입니다. 사도바울이 생애를 주님께 드렸을 뿐 아니라 이제 감옥에 갇혀서 죽는 과정 가운데 들어갑니다. 재판을 받고 처형을 받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일단 풀려나는데요. 그런다 할찌라도 빌립보 교회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본 제사 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위에 붓는 관제 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제사 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죽음이 주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다. 제사다. 라고 말합니다. 저희들이 죽을때에 죽음 앞에서 성도답게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답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제가 최근에 한국의 어떤 모임을 방문 했는데요. 그 형제님이, 자매님이 대장암으로 의사가 삼개월에서 육개월이라고 했습니다. 그 자매님께서 예배때에 나오셨습니다. 그 자매님의 얼굴이 헬쓱하세요. 그래서 질문 했습니다. 그 형제님이 담담하게 말합니다. 정말로 저희들이 주님의 죄용서와 영원한 생명과 우리를 기다리는 주님의 소망이 분명하면, 사도바울은 항상 죽음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기회를 미루지 않았습니다. 항상 기꺼이 죽고자 했습니다. 죽음은 주님을 뵙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제처럼, 우리가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가 예배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히브리서에 나와 있는데요. 그래서 아까 입술의 열매, 찬미의 제사 말고 ㅇㅇ 나옵니다. "선행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니라."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이십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선한일을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자의 삶을 이 세상과 다른, 이 세상 사람들은 살인을 안하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 삶을 이 세상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리고 서로 물질 나누는 것, 필요한 자에게 물질을 공급하는 것, 이것이 제사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에바브라디도편에 물질을 받았습니다. 빌립보 교회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장을 씁니다. "이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다." 그래서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입니다. 예배 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다섯가지 제사 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이 베드로는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가 제사장이며 우리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며 제사의 내용이 무엇이며 이런것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특권들입니다. 잠깐 넘어가서 책임을 살펴보겠습니다.

책임은 므리바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20:7-13).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하는동안 물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출애굽 2세대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입니다. 1세대들은 광야 40년동안 다 죽었습니다. 2세대들을 데리고 가는 도중입니다. 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그 전에는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백성들 앞을 네가 지나가서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라." 하셨고 물이 나왔습니다. 두번째에는 주님께서 세가지를 명령하십니다 첫째, "지팡이를 취하라." 많은 형제님들이 이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고 아론의 지팡이일 것으로 이해 합니다. 두번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라." 세번째, "반석에게 물을 내라라고 명령하라." 이 세가지 명령에 대해서 모세가 두가지를 순종합니다. 그가 지팡이를 취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모읍니다. 그 다음 세번째입니다. 반석에게 말해야 합니다. 물을 내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모아놓고 반석에게 말해야 하는데 회중에게 말했습니다. 첫번째 잘못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잘못은 물을 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회중에게 자기 생각을 말해 버립니다. "너희같이 패역하고 완악한 너희들을 위해서 우리가 물을 내야 하겠느냐?" 이렇게 자기 감정과 생각을 말해 버립니다. 세번째 잘못입니다. 그리고 반석을 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첫번째 어떻게 일하시냐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십니다. 모세는 잘못했을찌라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품을 드러내십니다. 첫번째, 모세는 잘못했을찌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물을 내서 백성들을 먹이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않을찌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자신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물을 내셨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을 올바로 드러내지 못한 모세와 아론을 징계하십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순종했다면,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만약 모세가 순종 했다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반석에게 명령한 것처럼,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물을 먹인 것처럼" 그런데 이렇게 말하실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못드러낸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저희들은 말을 할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니면 복음을 세상의 어디가서 듣겠습니까? 어떻게 거듭날수 있는지 알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무엇인지, 예배가 무엇인지 어떻게 할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성도들에게 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하고 주님을 함께 따라가도록 본을 보이고 이렇게 삽니다. 이런것을 할때 제일먼저 하나님께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에게 말해 버렸습니다. 이들을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가나안에 집어 넣을 2세대 백성 들입니다. 그들이 비록 완악하고 패역했을찌라도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심으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의 현재 상태가 비록 완악하다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낼 백성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모세가 놓친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 하나님이 하라고 한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일러주신 말씀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진리 입니다. 주님이 스스로 말씀하셔도 주님은 진리를 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아버지께서 일러주신 말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말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말을 나눠야 합니다. 영적인 교제를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말해 버렸습니다. 자기 감정을 드러내 버렸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초래 했는가? 모세가 광야에서 반석에게 명한 것처럼 이라는 이 말이 성경에 기록될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자기 말을 해버리면 성경은 성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실패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가운데 행동하는가?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말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시대에 우리 상황에서 실패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책임입니다. 한가지 더 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찌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찌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그는 하나님의 식물의 지성물이든지 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나 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못할찌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라 이와 같이 그가 나의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레21:16-23).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들인데요. 제사장 중에서 이와같은 흠이 있으면 제사장직을 못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저희들이 영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제사장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다섯가지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 몸을 드리고, 우리의 입술을 드리고, 또 우리의 삶을 드리고, 또 우리의 물질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신체적인 하자가 있으면 제사장직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하자가 뭐냐면, 항목으로 나누면 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소경이나, 눈에 백막이 있으면,눈쪽에 문제가 있으면 제사장직을 못합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누군지를 똑바로 보지 못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고 싶어도 성경적인 제사장 기능을 못할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주님을 정확하게 보고 이해하고 보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애쓸 일입니다.

두번째는 절뚝발이, 다리부러진자 입니다. 다리라고 하는것은 걷는 것입니다. 걷는것은 실질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 주님에 대한 이해가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이 땅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제 삶은, 저희들이 물온 간격이 없을수 없습니다만 너무 모순되게 행하는 것은 안됩니다. 그러면 제사장 기능을 할수 없습니다.

세번째는 코 입니다. 코라고 하는 것은 냄새를 맡는것입니다. 냄새라고 하는것은 보이지 않지만 맡아냅니다. 코라고 하는 것은 분별력으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소리가 있고 여러가지 뭔가가 있을때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것을 다 말해놓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는 원칙과 원리들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들을 적용해서 어떤 경우에 어떤 원리가 사용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든 모양이 되었다." 라고 하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런 실수를 합니다. 막 구원받은 성도가 술집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나는 이제 술을 먹지 않고 친구는 술을 먹으니까 가서 전합니다. 그런데 여기 분별력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 말씀이 그런 뜻인지를 잘 봐야 합니다. 그러다가 많이 넘어집니다. 넘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잘 약속합니다. "나도 너희교회 가볼테니까 너도 우리 교회 한번 와줘라." 해가지고 우리교회 온 사람은 구원 안받았는데 자기는 가 가지고 이상한 것에 빠져서 속을 상하게 만듭니다. 이런 방법들이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합당한 방법인지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 네번째는 손입니다. 손은 항상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희생할줄 알아야 합니다. 받을려고만 하지말고 어느정도 성장했으면 이제 섬기고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어느정도 성장했는데 섬기지 않으면, 그냥 자기일만 한다면 제사장으로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다섯번째, 등입니다. 곱사등, 곱추 인데요. 허리를 똑바로 펴고 담대하고 믿음으로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확신이 생기면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는 분명한 도덕적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겁먹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믿음의 걸음을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나머지 것들 전부 이렇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손가락이 여섯개라든지 이렇게 되면 정상적인 신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신체가 자꾸 변형 됩니다. 이런것들은 전부 뭘 말하냐면, 분명하게 성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점점 어른이 되면서 인간다운, 성숙한 사람다운 모습들로 커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뭔가 문제가 된 것이죠. 이런 경우에 영적으로 제사장 노릇을 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레위이기에서 이와같은 것을 보고 그림자로 말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성전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있는 그 화려한 성전보다, 혹은 비싼 돈을 드려 장식한 어떤 건물보다 우리가 교회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이 놀라운 특권을 가진 우리가 져야 할 책임, 그리고 조심해야 하는 것들을 살펴보면서 주님께서 저희들을 주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취하시는 존재로 저희를 계속 만들어 가시기를 원하고 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