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8일 목요일
한봉래 형제님
< 01. 고난의 유익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저희의 죄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셨고 그와같은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으셨지만, 참으로 사람이 생각할때 억울한 일이지만 주님은 그 고난을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고난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것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 사역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저희들이 가장 많이 알고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신 죽음일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죽음을 함께 죽을 수 있도록 본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와같은 죽음을 보이셨은즉, 우리도 주님과 같은 죽음을 죽어야 한다. 이것이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바 입니다. 물론 대속의 죽음은 주님 외에 누구도 질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사람의 죄를 대신할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십자가에 가신 그 길을 주님처럼 따라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본으로 주님의 십자가가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한 말입니다.
잠깐, 이번 집회기간동안에 특별히 베드로전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베드로를 보면요,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와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베드로가 약간 다릅니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의 부활을 경험한 후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에 다르지만 그 차이를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번째로 복음서에서 보면,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위대한 선지자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대답을 들으신후에 다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성령의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 참 주님이 어떤분인가를 아는 고백을 했을때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때부터 주님이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다시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소' 말씀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말씀 하셨을때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냐면,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주님께 미치지 못하리이다."입니다. 베드로의 반응은 고난에 대한, 그리고 십자가 죽음에 대한 베드로의 첫번째 반응은 그 고난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 고난은 회피할수 있다면 회피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 그리마옵소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리스도께서 왜 그와같은 비참한 죽음을 죽으셔야 합니까? 그리마옵소서."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강력하게 책망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나라."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보면 베드로의 고난에 대한 첫번째 반응을 보면 '고난은 피하고 싶다.'였습니다.
그 다음 복음서에서 계속 살펴보면, 베드로가 두번째로 배우는 것은 변화산에서 입니다. 주님께서 변화산에 베드로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왕으로 다시오실 그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도 합니다.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 속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었냐면 고난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별세하실것을-누가복음의 표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성경의 온 주제를 가리키는 이 두사람이 주님과 나눈 대화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두번째로 이 고난이 영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고난에 대한 두번째 이해 입니다.
세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잡수시는 그날, 주님께서 여러가지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와함께 모든 시험에 함께 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내 보좌에 앉아 함께 통치하게 해 주겠다." 이것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 라고 했었던 그때 입니다. 주님이 이 열한제자들을 훗날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하실 것입니다.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요? 그들이 주님과 함께 고난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영광이 함께 묶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이 너를 밀까부르듯하려고 시험하였으나 내가 너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했다. 네가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 베드로는 자기가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부인하는 끔찍한 고난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하는데 사용될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고난과 관련해서 이해한 내용들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에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목도하고 삼일후에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후로 이제 베드로는 고난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첫번째는 사도행전 4장에보면,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해서 앉은뱅이가 "이 사람이 나를 고쳤다."해서 사람들이 몰려드니, 솔로몬 행각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4장의 복음의 핵심이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입니다. "구원받을만한 다른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구원받을만한 유일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을 이제 구원의 주로 소개 합니다. 그런데 이 주님을 어떻게 묘사를 하냐면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이분만이 우리의 구원자 이시다. 이분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다시 말해서 구원자는 반드시 고난받으신 분이 구원자다. 입니다. 주님 그리마옵소서 하던자가 이제 설명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그는 고난에 대한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회원들이 위협합니다. "그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 말라."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 입니다. 이제는 공회원들이 그를 위협할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느냐?" 그가 갑자기 고난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가 교회로 옵니다. 교회로 와서 함께 기도합니다. 기도하면서 시편을 인용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시편에 있는대로 세상 군왕들이 주의 이름을 대적하기 위해 이 성에 모여 있나이다." 그가 고난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4장입니다. 사도행전 5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그가 감옥에 갇힙니다. 다시 풀려납니다. 풀려나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시 끌려와서 채찍에 맞습니다. 그가 고난을 받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전하다가 잘못해서 고난을 받은것이 아니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고난 받은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을만한자로 봐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가 고난에 대해서 어떤 관점으로 바뀌어져 갔는가?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이렇게 선언 합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우리도 주님의 발자취를 쫓아 가도록 본을 세우신 것이다." 이렇게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희들도 고난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고난이 있으면 불평이 나는 것이 사실 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에 걸쳐서 고난이 주는 유익들, 고난이 왜 필요한가? 하는 가르침들을 이해하고 혹은 고난받을때에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서 베드로전서가 아니고 성경전체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난에 대해서 첫번째 유익입니다. 첫번째 예는 고린도 교회를 생각해 보면,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시작이 되느냐면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위해서 고린도로갑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함으로 고린도교회가 시작이 되지요. 그런데 고린도에서 사도바울이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사도바울의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에서 거하면서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이 브리스길라 아굴라 가정이 고린도에 와서 사도바울을 만나서 함께 거하면서 복음사역을 함께하고 교회를 세운거죠.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어디서 왔지요? 그들은 원래 로마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를 보면 그들이 여러가지 경로를 거쳐서 다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래 로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로마황제가 로마에 사는 모든 유대인은 로마를 떠나라 라고 했기 때문에 그가 떠나간 것입니다. 왜 떠나라고 했을까요? 이유가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틀림없이 어떤 유대인 중에 구원받은 성도가 로마에 가서 그 로마에 있는 유대인 사회에 복음을 전해서, 복음이 들어가면 항상 갈라집니다.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로 갈라집니다. 중간이 없습니다. 믿지않으면 대체적으로 핍박합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로마에 살고있는 유대인 사회가 동요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황제는 그 사회에 소동이 일어나고, 사실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도바울은 세상을 뒤엎는자라는 평을 받습니다. 복음이 들어갈때마다 세상이 엎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황제가 유대인들 때문에 이 사회가-세계의 수도인데- 복잡해 지겠다하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로마를 떠나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서 장막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하며 살까? 하고 있을때 그가 고린도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고린도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잘 살고 있는 로마에, 어느 도시에 갑자기 정치적으로 이상한 일이 생겨서 다 떠나라 하니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고난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고린도에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그와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난의 유익입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고난 받았지만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것도 저희들이 잘 아는 것인데요.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로마의 감옥에서 사도바울은 헌금을 보내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편지의 내용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내가 감옥에 갇힌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힌것이 복음에 지장을 줄거 같습니다. 가장 복음을 잘 전하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꾼입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갇혀버렸습니다. 복음이 정체 될까요?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갇힌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것을 알기를 원한다." 어떻게 복음에 진보가 되었을까요? 이것이 빌립보서 1장에 납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들이 사도바울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는 것이죠. 그리고 그 가운데 여러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사도바울을 시기해서 잘못된 동기로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신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나오고 또 하나는 사도바울을 동정하여 사도바울을 대신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또 사도바울이 갇히지 안항ㅆ으면 만날 수 없었던 로마황제의 직속부대 군인들을 접촉하게 되고 복음의 진보가 일어납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을 사용해서 여러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해서 전도에 대한 열정을 세우고 또 새로운 구도자들을 준비시키시고 그래서 가이사의 집 사람 몇이 안부합니다. 이런 구절들이 빌립보서에 써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난을 사용해서 다른 영혼에게 유익을 끼치는 일을 하나님은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한 원히를 통해서 지금 이 시대에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거 하나 베드로와 관련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죄없는 고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에 그가 왜 그와같은 실수를 하게 됬는지 주님이 그렇게 한다고 예고 하셨어도 왜 주님의 말씀을 따라 경각심을 갖지 못하고 그와같은 실수에 빠져 버렸는지 그는 그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가 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슬픈 경험이 슬픔 경험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가 베드로전서 후서를 쓰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형제들을 굳게하는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씁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렇게 쓸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사단에게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단과 대적하여 이길수 있는지를 그가 베드로전후서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여러가지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는 교훈인 것입니다.
고난이 다른사람들을 위할뿐 아니라 지역모임에 여러가지 의미를 준다고 하는 것을 잠깐 찾아보겠습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1:7).
고린도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가 아시아에서 어떤 고난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고난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습니다. 그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께서 왜 이 고난을 주셨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난이 다른성도를 위로하기 위함인것을 압니다. 고린도교회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난은 다른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고린도교회에도 사도바울처럼 고난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고난을 받았는데 하나님은 그 고난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받는 고난을 보고 사도바울을 비판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바울을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이다." 마치 욥의 친구 같지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도바울의 내밀한 죄가 있고 그 죄를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숨은 죄'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간증합니다. "이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계하시거나 교정하시는 것이 아니고 나의 고난을 하나님이 위로해 주셨다. 나의 고난을 하나님이 동정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그 고난당한 이상으로 위로해 주셨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사람에게, 사도바울의 고난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에게 "나는 하나님께 책망받는 것이 아니고 고난으로 위로받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 합니다. "고난받는 고린도교회를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회복될 것을, 고린도 교회가 참으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1장부터 보면 분쟁이 있었고 음행이 있었고 형제간에 송사가 있었고 심지어는 부활을 부인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교제할수 있는가 싶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정의 편지를 보내고 이 교정하는 고린도서를 만약에 고린도 교회가 거부한다면 사도바울은 교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고린도 교회는 완전히 촛대가 옮겨진 그런 교회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고린도교회가 말씀을 받고 교정하고 회복되어서 오늘날 저희들에게까지 서신이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다시 세워질 것을 어떻게 확신했느냐? 그 가운데 고난받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확신합니다. "나의 고난을 하나님이 위로해 주셨듯이 고린도교회에 고난받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위로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위로해 주신다고 하는것은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진다는 의미다."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고린도 성도의 고난이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예를 잠깐만 더 보겠습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엡6:21-22).
사도바울은 두기고를 에베소 교회로 보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얼마나 고난받고 있는지를 전달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의 사정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고난받고 있는 사정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가 위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성도의 고난과 그 성도에 대한 위로와 또 그 소식을 듣는 자들의 기도와 감사가 지역교회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누가 고난 받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수 있습니다. 또 주님의 뜻을 따라 도울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형태의 위로를 제공할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한 지역교회의 지체인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두번째 이유 입니다. 다른성도들을 위할뿐 아니라 지역교회가 지역교회로써 기능할수 있도록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유익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넘어가보겠습니다. 고난은 고난받는 사람을 겸손하게 낮추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아까 읽은 고린도후서 1장인데요.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자신이 감당할수 없는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을 받아도 감당할수 없는,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수 없는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이라는게 원래 감당할수가 없는 것이지만, 사도바울은 감당할수 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각오했습니다. "이제 주님께 간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고난을 주셨을까? 이 고난을 통해서 데려가지 않으시면서 왜 이 고난을 주셨을까?'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사도바울같은 분이 자기를 의지할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내가 가진 것들을 의지하는지 모릅니다. 의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님만 바라본다고 하면서도 막상 어려움이 되면 주님앞에 나가기보다 본능적으로 계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주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 경험을 하고요. 고린도후서 12장으로 가면 사도바울이 이와같이 변합니다. 자기의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주님께 세번 기도 했으나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주님이 은혜를 적게 주셔서 육체에 가시가 있는게 아닙니다. 주님이 은혜를 충분히 베푸셨는데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입니다. 사단의 사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약할때 내가 강하다." 우리는 약해야 합니다. 우리가 강할때에 주님이 약하십니다. 우리가 약할때에 주님이 강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놀라운 발언입니다. "나는 약한것을 자랑하리라." 강한것을 자랑하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연약을 자랑하리라. 이와같이 주님만 의지하는것을 배운 것입니다.
저희들이 그런예를 많이 보는데요. 구약으로 치면 모세를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모세가 40세에 자기동족 이스라엘을 위해서 애굽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노예된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애굽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자신의 헌신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사용하셔서 자기를 출애굽 인도자로 삼으실줄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때 안쓰셨습니다. 그리고 언제 쓰셧죠? 80세 되던해에 주님에 "내가 너를 불러 출애굽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대답이 이거지요. "내가 누구관대" 내가 누구관대 할때 쓰시고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할때 쓰시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있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이와같은 원리들이 나와 있습니다.
예를들면 다윗도 그렇지요.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대신 성전을 지을수 있는 재료를 전부 준비합니다. 그리고 이제 솔로몬에게 식양을 건네주면서 "이 재료와 이 식양을 가지고 성전을 지어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가 무엇이관대 이 모든것을 주님께 드릴수 있었겠나이까? 하나님이 주신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렸을 뿐입니다." 다윗이 그 고난을 통과해서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름부으셨지만 그가 실제로 왕이 되는데에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어마어마한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그가 배웁니다. 하나님께 다 드리고도 주님이 주신것을 드린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역사 가운데 그와같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시고 영광을 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또 지역모임을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와같은 고난을 주실때에 우리도 믿음의 사람들처럼 이 고난을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지역모임이 기능하고 다른 성도들이 유익을 얻는 이와같은 기회로 삼을수 있을까요? 저희들이 이와같은 원칙들을 실제 삶에서 적용해 낼수 있는가 하는 이 대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잠깐 관점을 바꿔서 다윗과 골리앗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면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군인들 앞에서 나와 1:1로 붙자 라고 40일간 소리칩니다. 이스라엘 군인중에 아무도 그 골리앗을 보며 "내가 나와서 싸우겠다."고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우리가 생각할때, '군인이 비겁하게?' 하지만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을 묘사할때 보면 첫번째 묘사가 그의 신체 입니다. 키가 얼마고 그렇게 나오죠. 그때는 주로 사람이 몸으로 싸워야 하니까, 그렇게 키가 큰사람과 싸울수 없는 것이죠. 그의 육체가 클 뿐만 아니라 두번째로 그가 싸움을 돋우는자라고 되어 있는데요. 영어로는 챔피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군인들이 전쟁을 할때 전쟁 연습을 해야죠. 그래서 쳥소에 무기를 가지고 실전처럼 싸우는 연습을 하고 그래야죠. 그때 대회를 열어서 블레셋 군인들 중에서 제일 잘 싸우는 사람을 뽑으면 항상 골리앗이 뽑혔던 것입니다. 그가 수년간 블레셋의 최고의 군인 입니다. 그래서 그가 육체적으로 굉장한 사람일뿐 아니라 기술적으로 전술에 있어서 그가 블레셋 최고의 사람입니다. 또 하나 세번째로 묘사하는 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무기 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갑옷, 창, 이런것을 볼때에 싸울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가 싸웁니다. 골리앗과 다윗이 싸울때에 특이한 것은 다윗이 싸우러 나오니까 성경은 이렇게 묘사 합니다. 골리앗이 자존심이 상합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겨서 몽둥이를 들고 나오느냐?" 자존심이 상합니다. 다윗이 그렇게 나갑니다. 그리고 이 두사람이 싸우는것을 보면 다윗은 먼저 움직이지 않습니다. 싸울때에 보면 저희들이 옛날에 중고등학교 다닐때에 친구들이 싸울때에 어떻게 해야 하죠? 성도님들은 잘 안싸우고 크셔서 모르시겠지만 먼저 때려야 합니다. 예상치 못할때에 먼저 때려서 코피가 나면 이기는 거죠. 골리앗이 먼저 움직입니다. 다윗은 먼저 움직이지 않습니다. 골리앗이 먼저 달려오고 다윗은 골리앗이 움직일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골리앗이 움직이자 그가 움직입니다. 더 빨리 움직입니다. 성경이 그 싸우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긴다. 반드시 내가 이긴다 하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싸워볼까? 가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이기는 싸움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왜 그렇게 확신했던 것일까요? 그 확신을 배워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면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베드로 처럼 고난당하신 주님의 본을 좇아갈수 있을까요? 자신 있으십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낼수 있을까요? 이것을 다윗에게서 배워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할수 없는 시험이 있습니다. 각 성도님들마다 시험의 영역이 다릅니다. 어떤분은 돈에 약하고 또 어떤분은 다른데 약하고 그렇지요. 그런데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그 영역에서 시험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당할때에 주님처럼 대속의 고난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지역모임을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이 고난을 받을수 있는 이 길을 어떻게 갈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어린 소년이, 군인도 아닙니다. 형을 만나러 왔다가 그가 내가 골리앗을 반드시 이길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가 갑니다. 다윗이 확신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저 골리앗을 징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을 위해서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라면 나를 통해서 반드시 그뜻을 이루실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당할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의 본을 좇는다. 그 본을 끼치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발자취를 좇는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룰려고 할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할때 하나님이 나의 연약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제까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순종할수 있도록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확신을 다윗이 가졌던 것입니다.
다시 잠깐 다른 쪽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이 주님 말씀을 따라 전도하고 돌아와서 주님에게 보고하고 하던 이런때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잠깐 쉬도록 갈릴리 북쪽으로 갔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알고 사람들이 더 먼저 와서 남자만 5천명이 모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방법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져 갑니다. 제자들이 낸 아이디어는 이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이들을 먹일 수 없습니다. 여기는 빈들이고 사람들은 많고 날은 어두워지니 감당할수 없습니다. 이들을 보내서 각자 해결하게 하십시다." 이것이 제자들의 아이디어 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복음서에 나와 있으니 잘 읽어보면 그렇게 되어 있을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먹을것을 주어야 한다." 주님은 이들을 흩어서 보내서 각각 먹게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의 의도를 드러내셨습니다. '이들을 우리가 먹이자.' 주님의 뜻이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들을 우리가 먹인다.' 여기는 빈들이어도 사람은 많아도 주님의 뜻은 확고합니다. '먹인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낸 다음에 주님께서 빌립에게 질문하십니다. "어디서 떡을사서 이들을 먹일까?" 빌립은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대답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 만약 먹이시겠다면, 먹이시는 것이 주님 뜻이라면 이백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찌라도 주님 제가 가진 작은 돈, 몇개밖에 없지만 사오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먹이게 될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한가지는 주님이 그와같은 뜻을 품으시면 그렇게 하실수 있는 분입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수 있는 많은 경험을 하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오병이어 직전에 주님이 보내셔서 주님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그리고 기뻐서 돌아온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할수 없습니까? 우리가 구원받을때 어떻게 구원받을수 있겠습니까? 구스인이 어떻게 자기 피부를 하얗게 할수 있겠습니까? 표범이 반점을 없앨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어떻게 자기 죄를 깨끗하게 할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눈보다 희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때 죄만 용서하고 이 땅에서는 엉망으로 살더라도 죄가 용서되었으니 천국에 가도록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셨을뿐 아니라 죄의 형벌에서 용서하셨을뿐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 구원하시고 .마침내 죄가 없는 곳으로 데려가시는 구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지않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간증으로 이 세상을 살도록 구원하셨습니다. 세상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어떨때 그 사람의 진정한 특징이 드러납니까? 고난받을때 입니다. 고난받을때 그 사람을 알수 있습니다. 고난이 오면 어떻게 대응하는 가를 보면 그의 인격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가 알수 없는 크고 위대한 목표를 가지고 이루어가시며 그것을 내 고난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그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이렇게 정말 믿는다면,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합니까? "내가 주님의 길을 뒤따라 갈수 있다."입니다. 이것이 빌립이 놓친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한 행동입니다.
그 다음에 또 안드레도 있지요. 안드레가 우리가 가진것이 얼마 있는지를 보았더니 어린 소년이 가지고 있는 그의 한끼 식사량입니다. 오병이어 입니다. 그가 이것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100점 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먹이시겠다고 결정하셨으면 이것이 비록 작을찌라도 어떻게 하실지 저는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하실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100점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해버렸습니다. "이것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때 안드레가, 빌립이 다윗처럼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와 빌립이 아니고 우리가 고난 받을때 이 고난을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내가 살아내리라.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불평하거나 물러서지 아니하고 이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다른사람에게 유익이 끼쳐지고 그리고 지역모임이 교회답게 기능하는 이 일을 해내리라. 이 뜻을 위하여 주님이 고난을 주셨으면 내가 그뜻을 순종하는 힘도 함께 주신다. 하나님은 능력을 주지않고 명령하시는 법이 없는 분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반드시 그뜻을 이루실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고난 받을때 저희들이 제일 피해야 하는 것이 상대비교 입니다. 시편 73편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아삽이라는 분이 고난을 받는것이 나오는데요. 그분은 이렇게 보니까 자기는 주님 앞에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근신하며 경건하게 살고자 애쓰는데 자기 삶은 고난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죄인들은 고난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원하는 것보다 더 형통 합니다. 그것을 보고 그가 마음에 실족할뻔 했습니다. 이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받을 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세번 부인했을찌라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띠 띠우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것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죽을때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을 죽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또 실수 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난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고난받게 하시고 사도요한을 밧모섬에서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실제로 주님 오실때까지 사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은 계시록을 통해서 주님의 재림과 이후 역사를 쭉 계시 받습니다. 그리고 함께 변화산에 갔었던 야고보는 일찍 죽습니다. 이 모든것은 주님의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아삽이 쉽게 생각했던 것처럼 믿지 않는자는 그렇게 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인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믿는자는 항상 고난 당하고 믿지 않는자는 잘 사는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볼때 그렇게 보이지만 사정은, 인생은 만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안에 다 고통이 있는 것이고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물마다 하나님께서 웃음으로 보상해주시는 것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순비교해서 넘어질일이 아닙니다. 그렇게하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어떠한 시련도 주님의 본을 좇아 갈수 있도록 말씀하시고 힘 주셔서 주님께서 영광을 취하실 것입니다. 그와같은 은혜가 저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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