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18일 목요일
정형모 형제님
< 0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
"리브가가 일어나 비자와 함께 약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창24:61).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창세기 24장의 아브라함의 종이 이제 하란에 가서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데리고 함께 오지요. 이것은 우리 주님의 모습과 교회의 모습을 잘 말씀해 주고 있고요. 특별히 종이 리브가를 인도해서 하란에서 브엘라해로이, 이삭에게로까지 오는 과정은 교회가 우리 주님을 만날때까지의 여행을 그림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리브가가 낙타를 타고 아브라함의 종과 함께 올때에 무슨 얘기를 했을까? 한번도 이삭을 본적이 없습니다. 이삭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 당시에는 사진도 없습니다. 그런데 결정하고 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여기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믿고 말할수 없는 영광이 가득한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는 이런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사랑 합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해도 알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여기보면 믿음으로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나 지금도 믿고 말할수 없는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기쁨이 있습니다. 어떤때는 비루한 기쁨이 있습니다. 불법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합당치 않은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합법적인 기쁨 정도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기쁨이고 존경할만한 기쁨이다. 가치있는 기쁨이다, 찬란한 기쁨이다. 누구때문에요? 예수님 때문에요. 보지 못하는데 그분을 아는 그 지식때문에 그분을 아는 것때문에 우리가 기뻐한다. 긴 여행중에 종에게 계속 물어봤겠지요. "이삭은 누구입니까? 이삭은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가 주님을 만날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때 기뻐할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실망 가운데 갈때 우리 주님께서 좇아갔지요. 그리고 슬픔 가운데 가던 사람들이 우리 주님과 누군지 모르고 대화하다가 그들이 엠마오로 거의 다 갔을때에 강권해서 집으로 모시지요. 그리고 떡을 먹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축사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떠나가셨지요. 그때 그들 마음속에 말로 할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우울했습니다. 힘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았습니다. 소망이 다 사라진것 같았어요. 그러나 주님을 만났을때,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지만 그 말씀을,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이야기 해 주었을때 그들 마음속에는 엄청난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강권해서 모셨을뿐 아니라 주님이 떠나간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어요.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고 제자들을 만나게 되죠.
우리가 주님을 배우게 될때, 말씀에서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될때,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고난도 주님이 주시는 힘을 가지고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독특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인격은 어디서도 발견할수 없습니다. 어느 세상에서도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어디서도 발견할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땅에 오셔서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죄를 위해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십니다. 이 모든 주님의 모습을 우리가 조금씩 살펴볼때에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아는 위대한 지식, 아가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분은 희고도 붉어 만인중에 뛰어난다. 전체로 사랑스럽다. 그 모든 아름다움, 기이함 이런 말씀을 우리가 말씀에서 발견하게 될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그냥 지식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은 우리의 마음속에 위로가 되고 권면이 되고 또한 우리를 덕 세우는 이와같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이 변화되고 실생활에서 우리에게 변화를 주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알게 될때, 주님의 인격을 알게 될때 우리는 그분을 조금씩 닮아갈수 있습니다. 모습을 닮아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아는 이 기이함 그 아름다움에 우리가 매료될때 우리는 주님을 예배할수 있습니다. 분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섬기게 될때 합당하게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길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것과 주님을 그냥 섬기기 때문에, 아니면 습관적으로 해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죠.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예배도 섬김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될때 닮아갈수 있습니다.
제일 첫번째 우리 주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9:6).
이사야가 오래전에 우리 주님을 예언하게 될때,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주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초기에 제일 첫번째로 나온 이단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부인하는 이단의 가장 첫번째 것은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만 사람이 아니다고 하면서 마귀는 전략을 그렇게 썼습니다. 그런데 4세기가 되어서 아인스라고 하는 사람이 알렉산더에서 우리 주님은 이제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우리가 회막에 들어가면, 성전에 들어가면 휘장뒤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조각목과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조각목으로 상자를 만들어 안밖으로 금을 입혔습니다. 인성과 신성입니다. 이 두가지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고 너무나 정말로 기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이땅에 오셔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있는데, 바로 그분께서 나사렛 목수같은 모양으로 그렇게 사셨고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 걸어가신 그분,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사도바울은 그는 인간이라고 생각했고 핍박했지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눈은 멀었지만 그의 마음은 열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했을때에 그는 처음으로 그가 핍박하던 주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고 그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저희들을 위해서 구원하신 주님,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 하는 것을 만일 안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할까요? 그분 앞에 어떻게 감히 나갈수 있을까? 라고 하는 기이함과 경외심과 이와같은 믿음으로 주님앞에 나가게 될때 우리는 그분앞에 우리가 해야 할 자세가 있겠지요. 우리가 이것을 좀더 마음속에 깊이 느낀다면 우리의 실제적인 주님을 섬기는 삶, 예배하는 삶, 성도들과 교제하는 삶,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신 교회가 어떤 것인가? 라고 하는것을 알고 주님앞에 순종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이십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시24:7-10).
여기 넉절 안에 '영광의 왕'이라는 칭호가 다섯번 나옵니다. 그런데 이분은 다시 오실 분입니다. 다시 오실때, 그 문으로 들어오세요. 강림하실때 영광 가운데 왕으로 오실 메시아 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요? 그분이 어떤 분이시냐면 만군의 여호와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세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세요. 그분께서는 이런 칭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 그분께서 다시 오실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오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분앞에 우리는 어떤 기대와 어떻게 이 땅에서 우리가 살게 될때 그분을 향해서 정말로 순수하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가리켜서 황금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우리 주님, 하나님이신 주님을 말씀하고 있지요. 마태, 마가, 누가,요한, 이것은 성막의 네가지 실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늘게 꼰 베실,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 그 중에 청색실, 요한복음이죠. 황금복음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그분, 하늘의 위대한 신성의 영광이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을 읽게될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어떠한 증거를 하셨습니까?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1:15).
침례요한은 주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지요. 그런데 침례요한은 우리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보다 먼저 되신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브라함보다 내가 훨씬 먼저 있다." 훨씬 정도가 아니죠. 영원전이죠. 영원전부터 주님은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침례요한의 증거 입니다. 우리 주님 자신이 증거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 이전에 내가 있었다." 요한복음 18장 말씀을 보시죠.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요18:5).
"누구를 찾느냐?" "우리는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 그때 우리 주님 뭐라고 했어요? "내로라" 라고 얘기 했을때, 뒤로 쓰러져 버렸어요. 여기 '내로다'하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냥 인칭 "나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가리켜서 말씀하실때 주님의 이름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 있을때에 애굽으로 보낼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했지요. "그들이 물을 겁니다."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것이 주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약의 '여호와' 신약에 '우리 주 그리스도' 이십니다. 요한복음 황금의 복음 안에 "나는"이라는 말씀이 계속 나오죠.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우리 주님 말씀 했어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선한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구약의 여호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세요. 그런 칭호입니다.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입고오신 그분께서 그분은 원래 영원전부터 계신 분이다. 그런데 어떠한 은혜로 이 땅에 오셨을까? 신성의 증표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때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어요. 많은 기적이 있지만 요한복음에 일곱가지 기적이 있지요. 가나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왕의 신하 아들을 주님께서 말씀으로 살렸습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38년된 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또한 오병이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까? 호수를 걸어가셨죠.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9장에 주님께서 나면서부터 눈먼 장님을 고쳤습니다. 11장에 가면 우리 주님께서 나사로를 죽은자 가운데 살리셨어요.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기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전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쑥덕거리고 서로 생각하는 그런것을 다 알고 계셨지요. 참람하다 얘기할때 우리 주님께서 벌써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라" "네 남편이 다섯있다." 하셨습니다. 언제 봤다고요? 우리 주님께서는 아세요. 전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무소부재하세요. 무소부재하다고요? 우리 주님께서 이땅에 육식을 입고 오시는데 어떻게 무소부재 하십니까? 어떻게 동시에 여러곳에 있을까요? 물론 육신으로는 그렇게 할수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 말씀을 순종하지요. 말씀을 지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같이 한다." 이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저기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약속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함께 하신다 말씀했습니다.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함께 하겠다" 주님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제 어떤 분이신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
우리 주님께서 옛날에 선지자로 말씀하게 하셨는데 하나님이신 아드님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 많은 말씀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 주님이 최종적으로 말씀하셨어요. 또한 우리 주님께서 만유의 후사가 되셨습니다. 후사의 권리를 가졌어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후사가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능력에서 영광이십니다. 영광의 능력,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붙들고 계세요. 위대한 능력이죠. 어떻게 이 거대한 우주를 붇들고 계세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삼라만상들을 창조하셨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을까요? 위대한 능력입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영광의 광채 입니다. 태양이 빛을 발하죠? 태양 자체가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빛은 태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 찬란함, 같은 동질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왔어요. 우리 하나님이신 아버지 하나님 아드님과 성령이 계신데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다. 그리고 본체의 형상이시다. 도장이 있으면 꽉 찍으면 도장 모양과 똑같은게 나와요. 하나님이 계시고요. 우리 주님이 계세요.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으로부터 나온 피조물이 아니고 그분으로부터 나오신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정결케하게 될때 인간이 되셔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고 이제 승격되셔서이제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히1:8).
아들에 관해서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볼때에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마찬가지의 경외심과 또한 사랑과 존경과 이 모든것이 있습니다. 기이한 관계 입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것은 너무나 놀라운 관계이죠. 우리는 다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세요. 하나님은 세분 아니예요. 하나님은 삼위일체입니다. 한 하나님이신데 세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 신성은 서로 공유하고 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속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고 계세요. 하나님은 스스로 충분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없어요. 하나님은 영원하세요. 하나님은 무한하세요. 하나님은 완전하세요. 하나님은 전능하고 전지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중에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세요. 절대로 변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주권적이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의뢰해서 통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깊으신 뜻을 따라서 통치하십니다. 주권적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다 이해할수 없어요. 하나님을 우리가 다 측량할수 없어요. 하나님은 그리고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공의로운 분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셔요. 하나님은 성실하시고 충성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아니예요. 하나님은 선하세요. 하나님은 오래 참으세요. 하나님은 긍훌과 은혜가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영광이시고 하나님은 독특하시고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세요. 이와같은 모든 속성을 아버지도 가지고 계시고 아드님도 똑같이 가지고 계십니다.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당하신 그분은 이런 모든것을 다 가지고 계신 절대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머리고 아는것이 아니고 마음속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리브가가 이삭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종에게 물어봤습니다. 종은 잘알고 있어요. 매일과 같이 묻습니다. 그 지루한 여행길을 가게 될때 항상 이야기하면서 갔지요. 마지막에 이삭을 만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말씀에서 살펴보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분이 하나님이시구나 하는것을 알았습니다. 전격적으로 변했지요. 다메섹에 들어간 다음에 그는 무엇을 전했습니까? 지금까지 핍박한 사람이 이제 그가 전한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9:20).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9:22).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서 사도바울은 이 서신을 끝내시면서 축도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고후13:13).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삼위일체 하나님이예요. 주님은 바로이런 하나님이세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우리 주님안에 하나님의 성품, 그것이 모든 충만한 하나님의 성품이 육체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생각해 볼때 또 한가지 생각해 볼수 있는것은 우리 주님을 가리켜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잠30:1-2).
아굴이 누굴까? 어떤 사람은 솔로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고요. 아니다. 아굴은 솔로몬 시대에 지혜로운 현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확실히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가맃켜서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지혜있는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아요. "나는 짐승이라" 그랫어요. 나는 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 정말로 지혜있는 사람은 자기의 무지함, 자기의 부족, 자기의 지혜없음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제 4절에 이런말씀을 하고 있지요.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잠30:4).
여기 하나님의 위대함에 대해서 반문적인 질문, 수사학적인 의문, 이렇게 말하는데요.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했어요. 그리고 나서 그분의 두가지를 지금 말합니다. "창조자가 누군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가 생각하고 있는것은 아들의 이름입니다. 그는 하나님도 생각하고 있고요 아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9장을 보면요,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었고" "한 아이가 태어났다."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것은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십니다. 한 아들을 주셨다고 할때, 한 아들이 계시다고 하지 않고 한 아들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어요. 그 아들은 누구 입니까? 우리 주님입니다. 하나님이세요. 영원하신 하나님, 그 아들을 가리켜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 받을때 하늘문을 여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마자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갔을때에 마귀가 뭐라고 말했어요? "네가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사단이 그렇게 말했지요.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단은 그렇게 질문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복음서 안에서, 특히나 요한복음 안에서 얼마나 많이 자신의 아들됨을 이야기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독생자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가 이제 이와같은 내용을 가만히 볼때, 아들이라고 이야기 할때, 아들에 관해서 성경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다는것이 가장 흔한 아들의 의미지요. 그 외에도 성경은 여러가지 아들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먼 후손도 그냥 아들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민족의 아들이다. 예를 들어서 '동방나라의 아들이다.' 동방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동방의 아들이다. 그 다음에 사무엘을 가리켜서 엘리가 "아들아"라고 합니다. 아들 아닙니다. 그런데 사무엘에게 와서 함께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럴때에 그렇게 표현합니다. 영어에서 아들 할때에 아들은 내 아들일수 있지만 젊은 사람을 보고 my son이라고 말합니다. 젊은사람, 청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비류를 가리켜서 뭐라고 말합니까? 벨리알의 아들, 또 기름부은 자를, 스가랴서 4장에서 기름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다음에 채찍의 아들, 그 사람이 채찍에 맞아서 혼이 나야 할 사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채찍의 아들이라고 표현 합니다. 멸망의 아들, 가룟유다를 가리켜서 멸망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멸망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와같은 여러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들을 말합니다. 이런 수많은 아들의 의미가 있지만 그런 용법이 있지만 우리 주님을 이야기 하게 될때,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야기하게 될때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 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일까요?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7).
이 시편은 열두절로 되어 있어요. 석절씩 석절씩 말씀하는 분이 달라요. 첫번째 1-3절은 사람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막 대적 합니다. 두번째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세번째는 왕, 메시아께서 말씀하세요. 네번째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데 세번째 부분에 즉, 7-9절 사이에서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 거룩한 대화예요. 이 대화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어요.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하나님이 우리 주님을 가리켜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영원한 아들이예요. 독특한 아들이예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예요. 여러분 아브라함을 생각할때에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삭을 낳기전에 이스마엘이 있었어요. 그리고나서 그 후에 그두라의 소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또 다른 여러 아들들이 있어요. 이스마엘만 있는것이 아니고 그 후에도 또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가리켜서 하나님은 "네 아들 네 독생자를 달라." 하셨어요. 독생자 입니다. 왜 독생자 입니까? 이삭은 독특합니다. 언약에 있어서 독특합니다. 다른 어떤 아들들과 비교할수 없어요. 견줄수 없어요. 독특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해서 메시아께서 오십니다.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많은 아들이 있지만 다른 아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아들을 보았어요. 벨리알의 아들이니, 성경에 멸망의 아들이니, 천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그것은 복수이죠. 이런 여러 표현들이 있지만 그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독생자, 유일하신 분, 다른 어떤 존재와도 다른 그런 분이 계시다. 아들이예요. 그런데 여기보면 "너는 내 아들이라." 아들됨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영원전부터 아들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햄에서 탄생하실때에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아들이셨어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대화하게 될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이 왕께서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우리가 참 잘 이해해야 하는데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많은 악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하하면서 우리 주님을 무슨 피조물이니, 하나님 아버지보다 못한 존재니, 이렇게 말하지요. 이런 구절은 그런것으로 잘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 주님께서 영원한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 확증했어요. 그리고나서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신약에서 세번, 이 말씀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사도행전 13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행13:33-34).
이 구절에서 "일으키다"는 말씀이 두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그 다음 34절에 "저를 일으키사" 33절에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셨다라고 할때 우리 주님께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영으로서 함께 계셨었는데 그런데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전부터 존재해 계셨지요. 그런데 그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성육신하셔서 오시게 될때 그때 일으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을 영원전부터 존재하셨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나옴으로 인해서, 성육신을 통해서 그를 낳았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제출한 것입니다. 세상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상에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여기 34절에 보면 "다시 일으키사 썩음을 당치 않게 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이땅에 사시고 속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어요. 사흘만에 부활하셨어요. 부활을 통해서 다시 세상에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성결의 영" 우리 성령님은 거룩한 영입니다. 성결의 영, 능력의 영이죠. "그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성육신을 통해서 영원전부터 계셨던 그 하나님의 아드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나요?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습니다. 그 다음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고 무덤속에 있다가 사흘만에 나타나시게 될때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위대한 영광스러운 몸, 우리도 그런 영광스러운 몸을 가질 겁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들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오는 영광스러운 그분을 우리가 기다린다. 영광스러운 몸, 새로운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나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어요. 이제 놀라운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입니다.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셨어요. 이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낳았다." 성육신을 통해서 낳았고요. 이 낳았다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분께서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그런모양으로 세상에 만방에 드러내셨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아드님,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왔을때 성수태고지라 말하지요. 처녀가 수태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누구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분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 방면으로 선포하셨는데요. 가브리엘을 통해서 말씀하셨어요. 침례때에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여시고 말씀했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리고 변화산에서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같은말씀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백부장이, 그는 로마 군병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이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관해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4절에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하게 입증되었다고 말씀 했습니다. 이 땅에서 주님께서 계실때에 귀신들린 군단이 들어 있었죠. 그래서 군대라고 하는 이 미친사람이 우리 주님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어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하나님도, 천사도 우리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는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예수님을 가리켜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습니다. 바요나시몬아 이것을 네게 알게 한것은 육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라고 말씀했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 자신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26:63-64).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네가 말하였느니라" 대제사장이 질문할때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 그 사람의 말을받아서 "네가 말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세요. 원수도 그렇게 말했고 주님을 믿는 사람도 말했고 천사도 말했고 하나님 자신도 말씀하셨고 주님 자신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세요. 그 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들일까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존경해요. 아버지를 순종합니다. 참 이상하죠. 동등한데 순종해요.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를 향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항상 마음에 가지고 계신것은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그의 임무 입니다. 동등하신 분인데 서로 높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래서 높이셨어요. 보좌 우편에 앉히셨어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님의 이 교제, 이와같은 친밀한 관계,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가 하는것을 말해주고 있고요. 우리가 하나님을 보게 될때 어떠한 교제를 하고 있는가? 이것은 정말로 천성의 교제 입니다. 동등하신 분인데 얼마나 세 인격은 겸손하신가? 얼마나 보살피고 있는가? 살펴주고 있는가? 그리고 높이려고 하고 있는가? 우리 주님께서 아드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영원한 아드님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제한하셨습니다. 모든 속성을 아버지와 똑같은 것을 가지고 계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메세지입니다. 말씀이예요. 아버지의 모든 메세지가 바로 아들 자신입니다. 그 목적을 가지고 이땅에 오실것을 영원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아들은 바로 그런 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아들 자신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고 아버지께서 그것을 기대하고 계셨고 그것은 우리 인류의 죄를 위해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그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계셨고 그와같은 이름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아드님, 메세지 입니다. 온전히 순종하는 분이예요.
형제 자매님들 오늘 저희들은 두가지를 생각햇어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이분에 관해서 계속해서 여행하면서 마치 리브가가 종과 함께 여행하면서 이삭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삭이 누구입니까?" 이삭에 관해서 왜 그렇게 물을까요? 보지 못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가면 갈수록 점점 그 마음속에 희열과 즐거움과 기쁨과 기대가 충만해 집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하신 말씀처럼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어떻게 사랑해요?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랑해요?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충만한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기뻐한다. 우리의 기쁨은 비루한 기쁨이 아니예요. 우리의 기쁨은 기뻐할것도 아닌걸로 가지고 낄낄대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은 고귀한 기쁨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위대한 기쁨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 그것은 합법적인 기쁨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위대함과 또한 그 위대한 영광을 함께 나눌 그와같은 기쁨입니다. 기대속에 있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아는 기쁨 그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때 매료 될때의 기쁨,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예배하는 일에, 주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로 하여금 변화시켜주게 될 겁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여행하면서 우리 주님에 관해서 좀더 알기를 원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 마음속에 두고 우리가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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