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싱 모임 수양회/2018년 여름 수양회

< 플러싱 여름 수양회 11_고린도전서 2장. 성령 >

박이레 2021. 7. 24. 15:40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플러싱 여름 수양회 11_고린도전서 2장. 성령 >

이 시간에는 고린도전서 2장 전체를 살펴볼텐데요. 몇절 뽑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3-5).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9-10).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3-14).

고린도전서 2장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왔을때 그리고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만났을때, 그리고 함께 장막을 만들면서 복음을 전했던 그 시절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 그 가르침을 따라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었던 그 첫사랑, 그 처음 구원받은 구 순간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을 회고 하는데 내용이 세가지 입니다.
첫번째로 복음을 전했던 전도자들, 하나님의 일꾼들의 태도 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 사도바울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그는 연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 내용이 나옵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종들이 전했던 메세지 입니다. 그들이 전한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눈으로 본적도 없고 귀로 들은적도 없고 상상력으로 생각해 낼수 없었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교회는 세상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것을 사도들에게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받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말을 전하고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해 주었던 내용입니다.
세번째, 고린도 성도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가, 그래서 그들에게 구원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태도,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받는 태도, 이 세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처음 시작됬던날, 그 초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었던 놀라운 역사를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고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 그들이 그 첫사랑에서, 처음 상태에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이탈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원래의 지점을 가리키면서 얼마나 많은 간격이 생겼는가를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가지인데 우선 첫번째 입니다. 메세지를 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들이 왜 두려워하며 떨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때는 그의 2차 전도여행입니다. 사도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갈라디아 내의 더베, 이고니온 지역들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떨었을까요? 사도바울이 왜 떨어야 했을까요? 저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때 우리에게 제일먼저 필요한 태도는 두렵고 떨림 입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해야 합니다. 이 메세지는 사람이 생각해 낼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사도바울이 떨었느냐 하면, 그것은 단순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해낼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구원하는 일은 사도바울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이 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불가능하고 하나님만이 가능한 이 일을 그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두렵고 떠는 것입니다. 예를 모세를 통해서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임무를 부여 합니다. 이때 모세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0-11).

이것이 모세의 첫번째 거절 입니다. 이 거절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대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두번째, 변명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3:13).

이것이 모세가 두번째로 위대한 하나님의 임무를 받아들일수 없었던 변명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4-15).

세번째 모세의 변명입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출4:1-2).

모세의 세번째 변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출4:2-3).

이제 마지막으로 모세의 네번째 변명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0-12).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그는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영혼들이 구원받으면 그들을 교회로 모이게 할 것입니다. 이 임무를 띠고 그가 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임무를 앞두고 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모세와 같이 보겠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임무를 주십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거기서 건져내서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세의 임무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자기가 감당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마음이 고린도에 있는 사도바울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처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이백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며, 또한 애굽의 바로를 설득시킬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임무를 맏았을때 모세의 첫번째 느낌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느꼈을 것입니다. 아직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여기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영혼들이 거기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이곳에 내 백성이 많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 입니까? 타락한 죄인들입니다. 고린도라고 하는 그 당시 그리스에서 타락한 도시 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우상숭배자와 탐심과 음란과 거짓말하는 자들이 있더니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케함을 입었느니라" 그들이 똑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복음으로 구원시켜서 하나님의 교회로 만드는 일을 그가 어떻게 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제가 할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첫번째 부담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일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영적인 일은 우리의 육신적인 능력으로 이루어 낼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영혼을 돌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것들입니다. 그의 나의 육신적인 인간적인 능력과 힘으로 해낼수 없습니다. 만일 한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 임무앞에 모세가 섰었고 사도바울이 두렵고 떨렸던 것입니다. 첫번째가 그 임무는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만이 할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내가 너와함께 하겠다" 네가 하는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함께 있어서 너를 사용해서 그 일을 할것이다. 라고 하는것이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영적인것 앞에 우리가 막막해 할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영적인 관점에 서게 하고 영적인 능력을 주고 그리고 영적인 그 일을 해내게 할 것이다." 이것이 있을때 우리는 비로소 그 일을 해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그들은 지금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종살이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도 우상숭배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사람들이 내 말을 들을까요?" 했습니다. 자기를 볼때 어려움이 있고 해야할 대상들을 생각할때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영혼들을 보면 '저 사람이 구원 받을수 있을까? 정말 구원받을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린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 고린도 교회는 구원을 받았어도 고린도전서 5장을 보면 누가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도 없는 죄 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수준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을 보았을때 '이 사람들이 구원받을수 있을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에게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죄가 많은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를 보낸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 하십니다. "내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라 말하라."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모세를 보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하나님께서 홀로 둘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400년동안 종살이 한 후에 내가 그들을 건져내리라고 약속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이 없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와같은 능력이 없을찌라도 하나님이 자기의 능력으로 택한 자들을 반드시 데려가시겠다. 하는것이 하나님의 해결책 입니다.

세번째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세는 그들이 안믿을것 같았습니다. 저희도 그런 생각이 들지요. 복음을 그렇게 전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그토록 여러가지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교회적인 실행이 일어나지 않고 그때 하나님께서 세가지 기적을 하십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뱀으로, 뱀을 다시지팡이로 바꾸셨습니다. 손을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다가 낫게 하셨습니다. 나일강의 물을 피가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능력입니다. 어떻게 지팡이가 뱀이 되겠습니까? 다시 뱀을 잡으면 그것이 어떻게 지팡이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많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그것을 위할수 있지만 오늘 저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아도, 그들이 믿지 않으려고 해도 그들의 불신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뜻을 두시고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다면 그들의 불신앙이, 그드르이 강팍함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저항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기적을 하나님께서 셋을 보여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모세가 그럽니다. "제가 말을 못합니다." 사실 모세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명에 의하연 그는 말과 행동에 능한 사람입니다. 그가 말을 못한다는것은 그의 말로는, 그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말을 잘한다 할찌라도 아무리 설득력있게 말한다 할찌라도 그 말로 사람들을 변화시킬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입에 함께 있어 주겠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이 그 말씀에 함께 있어서 그 말씀에 능력을 부여하시겠다. 하는것, 이것이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18장에서 고린도에 있을때 이와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일어나냐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때에 이렇게 전합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오고나서 사도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잡아 갑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모세처럼 두려워하며 떱니다. 그 임무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전해야 했던 그 고린도 사람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도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했던 내용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꾼들의 태도입니다. 두번째는 메세지 인데요.
고린도전서 2장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복음은 사람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내용입니다. 제가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욥이 있습니다. 욥이 고난 받았습니다. 참으로 혹독한 고난입니다. 자녀들을 일순간에 잃어버리고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건강도 잃어버리는 이와같은 고난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친구들이 갑니다. 그를 어떻게 위로할수 있을까요? 욥의 고난은 어디에서 계획되어 있는것이냐하면 하늘에서 입니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욥의 친구들 세명이 그를 위로 합니다. 그런데 이 세명의 위로가 실패로 끝납니다. 그리고 엘리후의 위로만이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세 친구는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받습니다. 그래서 욥이 그들을 위해서 대신 중보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럼 이 세친구가 어떤 입장에 섰냐면, 하나는 눈이고 하나는 귀고 하나는 생각입니다.
첫번째 친구의 이름이 엘리바스 입니다.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4:8).

그는 자기가 눈으로 본것을 말합니다. 그는 하늘의 일들을 위로할수 없습니다.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 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욥5:3).

그는 자기가 본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이 본적이 없는 내용입니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욥15:17)

이것이 엘리바스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친구 빌닷은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찌어다"(욥8:8).

그는 들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들은 것으로 위로하기 시작 합니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욥8:9).

그는 귀로 들은 것들을 통해서 욥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욥은 하늘로부터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생긴 문제로 인해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소발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초급함이니라"(욥20:1-2).

그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상상력으로 욥을 위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패합니다. 잘못된 충고 입니다. 그들은 위로가 아니고 괴롭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엘리후를 보겠습니다. 엘리후만이 참된 위로를, 하나님 앞으로 그를 인도해 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욥32:8).

그는 성령께서 알려주신것, 전능자의 기운이 알려주신것으로 말합니다. 그만이 욥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낼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서양철학에서는 경험론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서양철학에서는 합리주의라고 합니다. 이와같은 사람의 생각으로 복음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복음은 그와같은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셨습니다. 교회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가지고 계신 생각을 사도들에게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지 않으면 알수없는 내용입니다. 사도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도들이 받은 계시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식으로 받으면 성경으로 기록하기 시작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계시가 있었고 성경을 기록하는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기록해 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읽을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조명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계시, 영광, 조명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성령께서 영감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합니다. 성경은 또한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이 과거의 것이라도 오늘날 나의 삶에 정확하게 적용할수 있습니다. 세가지를 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권위가 있고 틀림 없으며 진리이며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으로 들을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만약 저희들이 성경을 읽고도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성경을 읽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세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세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성경을 충분히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듣고있지 않고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읽고 쉽게 읽어버리고 하나님이 알려주실때까지 그 음성을 듣고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때 내가 구원받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개념, 혹은 세상의 개념을 가지고 성경에 도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람의 책처럼 사람의 생각으로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를찌라도 내가 그 말씀을 따르겠나이다."(요한복음 7장) 라고 하는 마음이 있을때에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한번 말해 보세요. 제가 들어보고 괜찮으면 순종하고 하나님이 아무리 말해도 내가 순종하지 않을수도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알리지 않습니다. 이 세가지,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을때, 혹은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때, 우리가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때 말씀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영감되어 나에게 전달될 이 말씀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핵심은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잠깐 성령님에 대해서 몇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믿는 자들에게 하시는 기능이 여러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것 몇가지를 보겠습니다. 첫번째, 에베소서 1장에 있는대로 성령께서 인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때, 구원받을때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십니다. 인친다고 하는것은 저희들이 잘 아는대로 동물들에게 어느집 동물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완전하지는 않는데요. 양 엉덩이에 어느 가문의 인을 찍습니다. 그것을 양은 모릅니다. 자기가 어느집 양인지 인을 친다고해서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셨다고 하고 인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거듭났다. 나는 이제 죽어도 천국에 간다." 라고 하는 확신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침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에 또 나옵니다. 성령의 보증이라고 하는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것은, 이 성령은 우리의 보증금입니다. 어떤 물건을 살때에 우선 계약금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갔다와서 다시 완전한 금액을 지불하고 이 물건을 사겠으니 이 물건은 다른사람에게 팔지 말라고 계약을 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증입니다. 성령님을 주시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냐면 "우리는 이땅에 살아도 하늘을 바라본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오시면 공중에서 주님을 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지금 여기서 하늘을 미리 맛볼수 있습니다. 100%가 아니지만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지만 주님의 영광과 그 영원한 나라의 놀라운 축복들을 이땅에서 미리 맛볼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보증입니다.

세번째로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므로 다른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이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성령께서 계시면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온 사람들입니다. 어둠은 두가지 입니다. 항상 무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빛은 무엇입니까?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분별력을 갖습니다. 이것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영향력의 차이가 있겠지만 분별력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입니다. 그 다음 네번째로 로마서 8장 6절에 보면 성령의 법이 우리를 사망의 법에서 건진다고 합니다. 성령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보통 가장 많이 드는 예는 중력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손에 잡고 있다가 놓으면 그것은 밑으로 떨어집니다. 중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것을 끌어 당기는 중력이 있기 때문에 떨어집니다. 우리는 사망과 육신의 법 속에 삽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혹을 느끼기도 하고 죄를 범하기도 하고 그렇게 삽니다. 우리가 이 법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영적으로 살수 있도록 성령의 법을 주셨습니다. 다시 비유를 들면 어떤 물건을 놓으면 떨어집니다. 안떨어질수 없습니다. 중력의 법칙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중력의 법칙을 상쇠할수 있는 것이 뭐냐면, 이 물건에 헬륨이 들어간 풍선을 달면 이 물건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물건이 공중으로 올라갈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의 법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법칙입니다. 이세상의 죄와 사망의 법칙에서, 이 법칙이 계속 작동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법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죄를 이길수 있도록 승리자가 될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 다음에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온유, 절제, 충성, 이와같은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죠?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변화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하시고 있는 일입니다. 그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하고 그가 하늘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고 그로 하여금 분별력을 갖게 하고 그로 하여금 승리자가 되게 하고 그리고 그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만드는 사역을 성령께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왜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에 빠질때가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고린도에서 두렵고 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임무를 맏기시고 그와 함께 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할수 있도록 그 임무를 완수할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 내 백성이 많다. 잠잠하지 말라. 복음을 계속 전해라." 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회당에 들어가고 또 다른 곳에서 성경을 열어 예수께서 그리스도인것을 증거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허다한 사람이 믿으니라.' 그리고 이 타락한 도시에 놀라운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 모든 일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고린도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육신적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역샇했을때 그들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변화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이 길로 돌아와야 한다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다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잠깐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2-14).

아마 이것이 고린도전서 2장을 썼을때의 사도바울의 심령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쓴 이유는 이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지말고 성령으로 육신을 이겨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이 구원받을때, 모임이 처음 세워졌을때 일어났었던 일이다. 그런데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인치시고 보증하시고 기름 부으시고 우리 가운데 그렇게 역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경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시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방법으로 돌아간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대해서 몇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산다고 하는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가장 쉬운 것부터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살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이 나에게 부탁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분명합니다.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겠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아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와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쓰고 있는 시간은 어디에 많이 쓰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그렇게 드려 놓고도 실질적인 면에 있어서 주님께 시간을 많이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해야하고 다른 것을 해야하고 해서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시간을 내서 주님의 일에 영적인 일에 성령만이 하실수 있는 일에 내 자신을 드리는 일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몇개 들어보겠습니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 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왕하4:1-7).

여기 여인이 가난했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와서 이 가난을 벗어날수 있도록 부탁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가진것이 무엇이냐? 여기 놀라운 상징이 있습니다. 기름입니다. 성령을님을 상징 합니다. 이 여인이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의 능력으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름이 부어져야 합니다. 이 기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름이 언제 부어지기 시작하냐면 문을 닫았을때 입니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았을때 기름이 부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으로서 육신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사역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도 다시 육신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성별되고 하나님의 일에 시간을 들이고 하나님의 일을 사모하고 하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찌로다 네 문 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33:24-25).

이것이 모세가 죽기전에 축복하는데 아셀지파에 대해서 이렇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찌로다" 이것은 마치 신약으로 오면 "너희들이 성령을 따라 걸으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와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때에 25절입니다. "네 문 빗장은-네 신(발)은(킹제임스)- 철과 놋이 될 것이니"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두가지 결과가 나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철과 놋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임이 견고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안정될 것입니다. 흔들리지 아니하고 복음을 증거하며 교회를 세우는 영적인 일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또 하나는 철로 된 구두를 신고 다시면, 놋으로 된 신을 신고 다니면 우리의 발자취가 이 땅에 분명하게 각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나타낼 것입니다.

아까 나온 열왕기하에 보면 엘리사가 주님 일을 하기 위해서 다녀갑니다. 그런데 수넴여인이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아봅니다. "그를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까요?"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그것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성령의 충만을 술취함과 비유합니다. 술취하면 딱 압니다. 그 사람이 술취했는지, 냄새가 나고 얼굴이 붉어지고 비틀거리고 알수 있습니다. 똑같이 성령충만하면 압니다. 육신적으로 행동하지 아니하고 사람으로서는 생각할수 없는 일들을 하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과 달리 반응합니다. 겸손하며 희생하며 기도하며 엎드립니다. 알아보는 것입니다. 수넴여인이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인것을 정확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행하기 위해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어떤 경우에 근심 시키지요? 성령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할때 성령이 근심 합니다. 성령이 무엇을 싫어하시죠? 죄를 미워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은 무엇이죠? 성령께서 우리에게 우리 양심에게 이것을 해라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거절 합니다. 그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셩령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성령이 하라고 하는 것을 안하고 하는 이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죄를 금하고 교회적인 삶에 있어서 은사를 사용하고, 이것이 성령의 근심과 성령의 소멸입니다. 그렇게하고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육신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에 드릴때에 우리가 다시 처음 구원받았을때,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을때에 그 순수했었던, 하나 되었던, 하나님을 기쁘게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그와같이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