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정형모 형제님
< 플러싱 여름 수양회 02_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그로 왕들을 치리하게 하되 그들로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사41:2).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41:8-9).
이사야 41장에서 저희들이 읽은 두 말씀에서 우리는 두 종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41장 2절 말씀에 나타난 동방에서 일으킬 사람, 고레스 입니다. 하나님의 종 입니다. 그런데 8절 말씀에 '이스라엘'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 그를 가리켜서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내 택한 사람을 보라." 라고 합니다. 이사야 41장 42장에 세 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레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지 모르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종입니다.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고레스를 말하고 있습니다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지 모르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내키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행한 종입니다. 마음에 기꺼운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 아니고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마지못해 하고 불순종하고 떠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42장에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 메시아께서 나타나십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42:1).
"내가 붙드는" 이라고 할때 하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위가 있습니다. 둘째, "나의 종"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종입니다. 세번째, "내 마음에 기뻐하는 종"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종입니다. "나의 택한 사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힘을 주시는 종입니다. 그 다음에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종 입니다.
저희들은 어떤 종이 될까요? 우리는 물론 부족한 사람입니다.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41장 42장에 나타난 세가지 종을 볼때에 우리는 모르고 쓰임을 받는 그와같은 종일까요? 아니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행하는 종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 뜻을 이루고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는 종일까요? 1964년 5월 22일날 미국은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 당하고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후임으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64년 5월달에 존슨 대통령이 연설을 했습니다. 미국에 대해서 대통령으로서 이야기 할때, "나는 부유한 사회, 강력한 사회, 그리고 위대한 사회를 향해 나갈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 부유한 사회, 이것은 다 세상사람들이 국가들이 원하는 그런 사회 입니다. 그리고 강력한 사회, 힘이 있는 사회를 원하지요. 그런데 위대한 사회, 이것은 조금 다른 것 입니다. 강력하지만 그리고 부유하지만 위대하지 않은 사회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서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만일 내 말씀에 순종하면 너희는 세상의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하겠다. 영적인 선진국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 했습니다. 존슨 대통령이 이야기한 이 부유하고 강력하고 위대한 사회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입한다면, 이사야 41장 42장에서 자기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될때 자기 민족에게 빗대어서 말했지요. 부유한 사회,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되어 가는데 부유합니까? 그들은 다 빼앗기고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회였지요. 두번째, 강력한 사회 입니까? 왕도 없고 성전도 없고 국가도 없습니다. 참으로 무력한 국민 입니다. 세번째, 위대한 사회인가요? 그들은 징계로 인해서 수치스럽고 세상의 먼지와 같이 다른 민족에 짖밟히는 민족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모습을 가만히 볼때 이사야 선지자는 뭐라고 얘기 했습니까? 위대한 종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종을 보라"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40:9).
이사야는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기 민족이 불순종하고 먼 나라로 포로되어갈 먼 미래를 내다 보면서 우리에게는 유일한 소망은 그것은 하나님의 종 너의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보내실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종이신데 그 종의 모습을 보게 될때 그것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까요? 잠시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누가복음 12장에서 누가는 다섯가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12:1).
첫번째,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5).
두번째는 탐심에 관한 것입니다. 첫번째는 위선, 두번째는 탐심입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눅12:22).
세번째는 염려, 걱정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눅12:35-36).
여기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바인데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네번째,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 기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눅12:56-57).
다섯번째,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상은 아는데, 날씨가 이러면 비가 올 것이다. 하는 것은 즉각 알아차리면서도 왜 옳은것,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둔함 입니다. 첫째 위선, 두번째 탐심, 세번째 염려, 네번째 기다리지 못함, 깨어있지 못함, 다섯번째 영적인 둔함, 이 다섯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나요? 디모데후서에 보면 우리는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고통하는 때'라 할때 이 고통한다는 말은 마태복음 8장 28절에 주님께서 가다라에 갔을때 거기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귀신들린 사람을 묘사할때 쓴 말이 '그 사람은 심히 사납다' 라는 말인데 이것이 똑같은 말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와 심히 사납다고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심히 사납다고 하는 이 시람, 무덤가에서 살고 있고 귀신들려, 엄청나게 많은 귀신이 그를 영향하고 그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라고 하는것은 어떤 때인가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귀신이, 마귀가 영향하고 통제하고 있는 시대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를 가만히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때에 자기를 사랑하지요. 돈을 사랑하지요. 그리고 교만하지요. 자고 하지요. 그리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절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지 않습니다. 사납습니다.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악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배반하고 신용을 지키지 아니하고 조급하고 그리고 교만하고 자고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런 시대에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무슨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이와같이 마귀의 영향을 받고 있고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에 복음 말씀을 듣고싶지 않습니다. 복음집회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은가 하는 이와같은 것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멸망으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시대를 절감하고 있나요? 누가복음 10장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는 다섯가지를 요약해서 말씀하시는데요. 거기에 위선이나 탐심이나 염려의 문제나 또는 깨어있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 그리고 영적으로 둔한것, 이 모든 것들은 마귀에 의해서 영향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할수 없고 하나님과 교통한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와같은 타락의 상태로 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땅을 바라보고 있고, 잠깐 있는 이 세상에 잠깐동안에 있을 일들에 대해서 염려하고 사는 사람, 이와같은 시대에 하나님의 종은 무엇을 할까요?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이제 다섯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위선은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들 가운데 위선이 들어올수 있습니다. 위선의 원래 뜻은 가면이라는 뜻입니다. 가면을 썼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나를 그대로 드러내고 말과 행동과 일치하는 삶이 아니라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죠. 영적인 것이 아닌데 영적인 것처럼 나타내고 부자가 아닌데부자인 것처럼 나타내고 연극하는 삶 입니다. 그것이 참 피곤한 삶이죠. 바리새인의 누룩, 그것은 그런 삶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은 그런 것이었죠.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고 성도들에게도 들어올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는 사회에서는, 마귀가 역사하는 고통하는 사회에서는 이 위선이 완전히 세상을 지배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속에 있는 것 그 이상으로 드러내서 연기하고 사는 삶 입니다. 두번째는 탐심 입니다. 부자 농부 얘기가 나오지요."너희는 탐심을 물리치라" 말씀 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탐심은 우리로 하여금 파멸로 들어가게 하고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탐심으로 인해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이제 막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다른데 가 있습니다. 영원한 것에 대해서 위대한 가치에 대해서 정말로 우리는 생각하고 있나요? 하나님의 종은 무엇입니까? 위선이 아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탐심은 아니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주인이 오실때에 기다릴 사람인가? 그분을 깨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쿨쿨 자고 있는 상태인가요? 하나님의 종은 자고있지 않고 깨어 있습니다. 깨어서 주님오심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위한 삶을 산다면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42장에 나타난 위대한 주님, 완전하신 주님, 그분은 정말로 깨어있는 분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깨어 있었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영원한 계획이 무엇인지 잠시도 그것에 대해서 놓치않고 사는 분이셨습니다. 깨어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주인이 다시올때 그 종은 주인에 대해서 정말로 기다리고 있는가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 솔로몬 시대에 스바여왕이 예멘에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왔습니다. 수많은 왕들이 왔고 스바여왕이 왔을때에 솔로몬의 위대한 지혜에 대해서 감탄했고 수많은 것에 대해서 감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왕의 상에서 옆에 종들이 시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종의 자세 입니다. 종의 섬기고자 하는 이와같은 자세, 항상 준비되어 있는 자세 입니다. 소방서에서 일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소방서를 지나가다가 보면 그들은 항상 놀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거기 와서 8시간 일하는 동안에 불이 언제날지 모르니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언제나 준비하고 불이 났다하면 당장에 달려갈수 있는 사람입니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린다면 그분에 대한 사모심이 있습니다. 기다릴때에 두가지 종류의 기다림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기다릴때에 정말로 만나기를 원하는 애인을 기다린다면, 공항에서 그 애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면 그 마음속에 어떠한 감이 있습니까? 가슴이 뜁니다. 모든 생각을 가지고요, 만날를 생각하고 위대한 기대, 전율함 가운데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기다림이 있습니다. 관심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왔으면 "왔니?" 하는 정도의 기다림 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 오시는 것에 대해서 "주님이 오시나?" 하면서 세상일에 대단히 바쁘고 땅을 바라보고 있고 영혼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위대한 대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내 마음에 느낌이 없고 전율함이 없고 그냥 살아가다 보니 "때가 되어 주님께서 오셨구나" "아, 오셨어요, 주님?" 이라고 하는 덤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종으로서 일하겠습니까? 종의 동기는 주님의 다시오심에 대해서 마음속에 박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2장 말씀에서 깨어서 기다리는것이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다섯번째 둔함입니다. 둔함이라고 하는것은 무분별한 것입니다.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천기를 분별하지만 의로운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것에 대해서 분별이 없습니다. 둔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감각한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써 대단히 위험한 것이죠. 하나님은 둔한 사람을 바라보실때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요? 누가복음 12장 32절에 종에대한 말씀을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여기 두가지를 말씀 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허리에 띠를 띤다고 할때 이 말씀은, 구약에서 출애굽기에 나오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고 바로의 속박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게 될때 수많은 재난이 찾아왔지요. 하나님께서 말씀 했습니다. "바로가 절대로 너희를 호락호락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이 강팍해 졌습니다. "내가 그를 징계하게 될때, 기적을 베풀게 될때 마지막에 와서 그는 가게 할 것이다."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에 이 재앙이 떨어지게 될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고 그 양고기를 그 집안에서 먹을때에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지나갔지요. 그때, 그들은 어떤 상태에서 준비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준비합니까? 약속의 땅으로 사흘길을 걸어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나가야 합니다. 그 여행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먼저 허리에 띠를 띠었습니다. 긴 옷을 입고 걸어갈수 없지요. 그 옷을 입고 걸어가면 발에 걸립니다. 여행하기에 부적합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띠를 띠어야죠. 그래서 출발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를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즉,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허리에 띠를 띠고" 왜 그렇습니까? 그는 섬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락방에서 섬기게 될때 어떻게 섬겼습니까? 허리에 띠를 띠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래서 허리에 띠를 띤다고 하는 것은 종의 기본 자세 입니다. 그리고 명령이 떨어지게 될때 무언가 하려고 하는 자세 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에서는 그가 띠를 띠고 섬기게 될때, 주님이 오시게 될때 섬기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게 될까요? 아니면 나태한 가운데 게으른 가운데 아무일도 하고 있지 않은 가운데 땅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둔함 가운데 위선 가운데 염려 가운데 아니면 탐심 가운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까요? 누가는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허리에 띠가 있고 그 다음에 등불이 있습니다. "등불을 키고 서 있으라" 주님이 오시게 될때 등불은 간증입니다. 요한 계시록 1-3장에 나타난 일곱등대, 그것은 일곱교회의 간증이지요. 등불은 간증입니다. 그런데 등불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첫째, 안에 기름을 저장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심지가 있습니다. 기름은 계속해서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불이 켜져 있을때에 이 심지는 계속해서 가위로 잘라줘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항상 성소에 들어와서 그 일을 했어요. 계속해서 기름을 붓고 심지가 곧바로 서 있어서 환하게 불이 비추도록 했습니다. 심지를 잘라주지 않으면 불이 가불가불 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증을 말한다면, 우리가 간증을 위해서 간증을 얼마나 간수해야 할까요? 기름을 계속해서 공급하고 심지를 계속해서 다듬고, 이런 일들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인이 지금 결혼식에서 돌아옵니다.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리라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오시면 문을 열어주려고 문 앞에서 등불을 켜고 기다리고 띠를 띠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서 기다립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많은 감흥과 감동과 그리고 주인이 오시는 것에 대해서 마음속에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희락이 있습니다. 고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재림에 관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교회는 공중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이스라엘은 7년 환난 이후에 주님의 지상재림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공중재림을 기다릴텐데 이 공중 재림에 대해서 신약이 말씀하고 있는 서신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린도전서 또 하나는 데살로니가전서 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1:7).
우리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말씀하는데요. 이 기다림은 기대 가운데 기다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설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때에, 어제 저희들이 공항에 나가서 기다릴때에 설레는 것입니다. 만나면 무슨 표정을 할까, 만났을때 어떤 표정을 해야 할까, 어떠한 기대속에 상대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설렘 가운데 기다린다면 주님도 설렘 가운데 오실 채비를 주님은 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7절 말씀에 간절한 고대가 있다면 우리 삶은 어떨까요? 경건한 행동 가운데 살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께서 다시오심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것입니다. 둘째, 데살로니가 전서 1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9-10).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 가운데 기다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살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게 될때, 반대를 받게 될때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될때 좌절하지 아니하고 쓰러지지 아니하고 핍박을 우리는 영광스럽게 받을것이라는 이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당할때에 영광스럽다고 생각 했습니다. 핍박은 아무나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절 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제 영광 가운데 오실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거절 당한 것처럼 우리도 거절 당할 겁니다. 만일 그것을 피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눅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것을 보면" 얼마나 기뻐 하실까요? 종이 깨어서 문에서 설렘 가운데 기다리고 있어요. 그때 주인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35절 말씀을 보면 종이 띠를 띠고 주인을 오는것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 있는 말씀은 놀랍습니다. 주인이 오셔서요. 주인이 종이 설렘 가운데 띠를 띠고 기다리는것을 보고 너무나 기뻐서 주인이 띠를 띠고 주인이 섬깁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21:13-14).
13절 말씀에 주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제자들을 기다리십니다. 새벽에,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하나도 못잡았지요. 베드로가 "나는 갈릴리로 가서 고기나 잡자." 라고 해서 함께 갔습니다. 이 그룹들이 갈릴리에서 어부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고기도 못잡고 있을때에 주님께서는 거기에 가셔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호숫가에서 아침 새벽에 이미 음식을 장만하고 바베큐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떡을 가져다가 저들에게 주시고 그리고 생선도 그와같이 구워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보면 주님께서 전에 이 땅에 오시게 될때 수치와 조롱과 멸시와 그리고 배척의 대상이셨습니다. 수치 가운데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어떻게 섬겨 주셨습니까? 십자가에 피흘려 죽는데까지 섬겼습니다. 가장 낮은자리까지 주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생애에 여호와의 종으로서 근본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동등하실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섬겼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의 요구, 의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하신 그 모든 목적을 다 이루신 분께서 호숫가에서 제자들이 밤새도록 허탕을 치고 있었는데, 이 제자들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섬기고 계셨습니다. 떡도 굽고 생선도 굽고해서 먹여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 말씀을 보면요. 한가지 독특한 단어가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7).
여기 "종의 형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종의 모양'이라는 말입니다. 종의 모양이라는 이 말은, 우리 주님의 본질적인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의 형체라는 것은 본질적인 성격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되신것은 주님이 이땅에 오셨을때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더 이상 이간이 아닌 그런분이 아니고 그분의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하는것은 인간이 되었을때부터 영원한 인간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늘의 보좌 우편에 인간이 앉아 계세요. 그분은 그냥 인간이 아니고 부족한 인간이 아니고 죄가 있는 인간이 아니고 온전하신 인간, 무죄하신 인간, 그리고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 신이시면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분이 보좌 우편에 지금 앉아 계시고 영원토록 그분은 그렇게 계실 것입니다. 그분은 이땅에 수치 가운데 성육신 하셨을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분은 종이었어요. 그런데 그분께서는 계속해서 종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 입니다. 그분이 이땅에서만 우리를 위해서 종으로 섬겨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본질적으로 영원토록 종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 12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전에 종이셨다고 해도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이제 영원토록 종이시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고 있나요? 우리 주님의 위대한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할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있을때에 제자들을 다락방에서 발씻기고 섬겼잖아요? 그런데 그분께서 영원토록 종이 되셨습니다. 어떤분은 이렇게 말씀 했어요. 갈리리 바다가 이렇게 있는데, 바다 저편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못잡고 있던 제자들이, 피곤하고 춥고 배고플때에 주님께서 해안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제자들 중에서 "아 주님이시다!" 라고 소리 치니까 막 뛰어 갔잖아요? 그래서 주님 앞에 갔잖아요? 그 해안에 도착 했을때 섬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세상을 어떤때는 바다로 묘사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가서 해안 저편에 도달하게 될때, 그때 주님께서 섬겨 주신다. 그 아름다운 그림이 요한복음 21장에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땅에 오셨을때만 종이 아니고 영원토록 종이십니다. 이것은 어떠한 은혜 입니까? 그분은 영원한 온 우주를 지으시고 영원토록 예배를 받으시고 또한 무한한 권력과 무한한 주권과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고 전능하고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이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다 완성하시고 나서 여전히 그분께서 우리를 섬기시고 계시다는것은 우리에게 위대한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이것을 누가복음 12장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12:38).
이경, 삼경은 무슨 말입니까? 히브리의 시계는 6시에서 저녁 10시까지가 일경, 저녁 10시에서 새벽 2시까지가 이경, 새벽 2시에서 새벽 6시까지가 삼경입니다. 로마시계는 여섯시에서 아홉시까지가 일경, 이경, 삼경, 사경에서 넷으로 나누는데 반해서 히브리는 셋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이경과 삼경이라고 밤 열시부터 새벽 여섯시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밤이 어두울때, 아까 고통하는 때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영적으로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이기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고 그리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이와같은 시대에 절대로 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메세지를 말씀하고 또한 하나님의 위대한 메세지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하고 영감을 주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룰수 있도록 만드는 영향력을 가할수 있는 그와같은 종이 필요합니다. 그 종은 어떤 종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대의를 확실히 알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을 펴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이 영광받는 것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을 향해서 뭐라고 말씀 했어요? 우리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사람을 의식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이 시대, 사단이 영향하는 세상, 불신자 가운데서 구원받지 못하도록 역사하는 세상, 그리고 신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따라가지 못하고 중간에 교제가 소원해지도록 만들려고 하는 이와같은 사단의 노력,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적인 것에 대해서 둔감하게 만드는것, 위선하도록 만드는것, 탐심하도록 만드는 것, 그리고 깨어 기도하고 기다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와같은 모든 사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하나님을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와같이 하도록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지않고는 그 일을 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우리를 감동하고 우리를 강권하게 될때 가능하지요.
여기 누가복음 12장 말씀에 또 한가지의 종의 말씀이 있지요. 깨어서 기다리는 종이 있다면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 여기 '진실한 청지기'하다는 것은 충성된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청지기는 무엇입니까?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고 그것을 늘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선한 청지기 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라면, 종에 관해서 네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은 신뢰할수 있는 청지기 입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재산을 맏기게 될때, 믿을수 없다면 신뢰할수 없다면 어떻게 맏기겠어요? 그 재산을 낭비하고 다 갔다가 몰래 써버리고 도망가버린다면 이런 사람을 종이라고 말할수 없지요. 첫째, 지혜롭고 충성된 청지기, 신뢰할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맏기신 것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나에게 복음의 말씀과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맏겼다" 라고 말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맏기셨습니다. 형제님들이나 자매님들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맏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임이라는 이름속에 그저 사교적으로 교제하다가 가고 즐거워하며 모이는 이런식의 모임이 아닙니다. 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이 위대한 말씀을 맏기셨습니다. 복음의 말씀과 진리의 말씀, 이 말씀을 여러분과 저에게 맏기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늘릴까요? 복음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재산을 늘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더 위대한 성도, 아름다운 성도, 신뢰할수 있는 성도,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성도로, 성숙한 성도로 어떻게 만들수 있는가? 라고하는 것이죠. 충성된 청지기죠. 지혜있고 충성된 청지기는 첫째로 신뢰할수 있습니다.
두번째,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때를따라 양식을 계속해서 공급하는 것입니다. 책임입니다. 청지기의 두번째는 신뢰 뿐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어떤 책임입니까? 성도들에게 말씀을 계속해서 양식을 나눠줄수 있는가? 물론 말씀의 은사가 있어서 이 말씀을 계속해서 나누어 줄수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같은 사람만 성도들에게 말씀을 나눠줄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와 책임을 통해서 그것을 통감하는 성도들은 성도들을 만나게 될때 웃음을 통해서도 사용할수 있습니다. 성도들과 이야기 하게 될때 배려하는 마음과 언어를 통해서 많은 역사를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위대한 말씀이 나의 태도와 언어를 통해서 역사할수 있습니다. 모든 순간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이와같은 책임이 있습니까? 복음과 성도들을 향한 유익 그것을 향한 위대한 주님의 의탁이 있습니다.
세번째는 무엇입니까? "주인이 이를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것을 보면" 주인이 오시는 때가 있습니다. 주인이 곧 올것입니다. 주인이 오실때에 종이 계속해서 그 일을 할까요? "그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맏기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자" 그런데 주인이 오실때에 그 종이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을 볼때에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여기보면 주인이 오실때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교회에게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입니다. 물론 여기있는 이 말씀은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기 보다는 대환난때에 이스라엘의 종들을 일차적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교회시대에 적용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면 우리들에게 묻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답변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맏긴 일에 대해서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서 주님이 물으실때 우리는 답변해야 합니다. 장로들은 모임을 인도하게 될때 하나님께서 모든일을 의탁하시고 대행권위를 주셨습니다만 그 일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답변해야할 모든 책임이 있습니다. 양들의 복지를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임의 간증을 위해서 장로들은 그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주님이 오시게 될때 그와같은 일을 하고 있나요? 아니면 이 자리에 없는가요? 정기집회에 우리는 참석하고 있습니다. 정기 집회에 빠져 버리고 다른 이런저런 일로 빠져 버리고 불성실하게 행하게 될때 주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얼마나 많은 재원의 손실인가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의 게으름과 무관심과 둔함과 염려와 위선과 이 모든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앞에 책임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앞에 가서 무슨 답변을 할 것인가요? 세상 사람들도 이런 얘기를 가끔 합니다. "조상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조상님을 만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주님 앞에서 답변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이세상에 일하게 될때 그냥 하루하루 그냥 지나가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는 주님앞에 가서 내가 한 모든 일들과 나의 동기와 나의 한 모든 주님을 섬긴 일들과 또한 인간의 관계와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내가 주님 앞에 가서 답변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의식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을 조금 달리 갈수 있겠지요.
"이것을 보면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답변할 책임 그리고 우리에게 맏겨주신 책임, 그리고 신뢰할수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맏겼거든요. 종은 행하게 될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맏겨주신 권위가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행할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어요. 주님이 우리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내 권위가 아니고 주님이 나에게 주신 권위 입니다. 오늘 저희들이 이제 이와같은 말씀을 읽게될때 불성실한 종이 있습니다. 주인이 오는것을 "더디오리라" 지레 짐작하고 놀고 책임없이 허송세월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될것인가 하는것이 그 다음에 나오지요. 오늘 누가복음 12장 말씀에서 이 시대의 위험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사단이 어떻게 영향하는가? 어떻게 지금이 고통하는 때인가? 바로 그런때이기 때문에 종들은 주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맏기신 책임에 대해서 우리는 이행해야 합니다. 때를따라 양식을 나눠주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읽기를 형제 자매님들 모두가 다 준비하고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매일과 같이 읽고 삽니까?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항상 내 마음속에, 사람들이 나에게 묻게 될때, "당신속에 있는 소망이 뭔가?"라고 묻게 될때를 위해서 항상 의식하고 살고 있는가, 그리고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그리고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내 마음속에 주님의 말씀이 가득차서 막 터지려고 하는가? 코카콜라 뚜껑을 열먼 막 터져 나오잖아요?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가 하는 것이죠. 이것이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오늘도 도와 주시고요. 종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할때, 첫째 우리 주님의 완전한 본이 있습니다. 그 본을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따라서 주님께서 종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앞에 계속해서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책임을 이행하고 주님 오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기다리는 마음으로 종의 특권을, 책임을 이행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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