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언 :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짐 자비스 형제님 / 26년 8워 30일 일요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3-24).
저는 이 짧은 시간 가운데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진정한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요한복음에서 참 우리를 위하여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정한 예배라는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고" 그래서 "예배하는 자들은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것은 구원받지 않은 그냥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태어나서 그 상태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른 상태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자연적인 그런 영역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또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 6장에서도 그 예배가 선언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
이것은 제가 믿기로 시몬 베드로를 통해서 참으로 예배가 무엇인지 또한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에서 일어나는 선언인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위해서 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진정한 예배자는 그분과 함께 있으며 그분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는 그 예배가 무엇인지가 정의되었으며, 우리는 6장에서 시몬 베드로를 통해서 그 예배에서 일어나는 선언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부분을 살펴보면서 그 '예배가 어떻게 전시되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 12:2-8).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예배가 어떻게 나타내지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 장면에 나타난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우리는 베다니 마리아의 그 한 일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는 수년간의 임금에 해당하는 그러한 '값비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붓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게 됩니다. 그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열흘 이상 동안 그 향기는 가득 차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날은 오직 갈보리 십자가를 앞둔 그 6일 전의 일입니다. 참으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하는 그런 일을 꾸미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을 그들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값비싼 것을 낭비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마리아는 자기가 그 의미를 알고 이것을 행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사실 이때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에 대해서 그 의미를 제자들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죽으심에 대해서 말씀을 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어리둥절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조차도 주님께서 죽음을 말씀하시자 "주여, 그리 되지 마옵소서."라고 말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야만 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서라. 너는 내 일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그분이 죽으셔야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한 여인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아주 값비싼 것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값 비싼 것을 그것보다 더 보배로운 분에게 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진정한 예배가 이렇게 나타내 보여진 것입니다. 7절에서 이제 그 여인이 한 행동을 칭찬하면서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조적으로 8절에서 가룟 유다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가룟 유다가 말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고 계십니다. 그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할 것을 염두에 두고 또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다시 한 번 이와 같은 예배가 나타내 보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장에서는 베다니 마리아가 기록되어 있었고, 20장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요 20:11-16).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또한 주님께 그의 기름을 가지고 나와 부은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열려 있는 무덤을 보고 주님이 어디 가셨는지를 찾고 있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지금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주께서 어디로 갔는지 몰라 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 14절에 보면 어떤 한 남자가 서서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남자가 한 어떤 말이 그 여자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15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는 주님의 그 몸이 누가 가져가 버렸고 그것을 찾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주님과 마리아의 사이에 이 두 단어가 특별히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그의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야." 그리고 마리아도 한 단어로 응답합니다. "랍오니여." 마리아는 이제 그 남자가 그분의 그녀의 주인이고 구주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리아는 자기가 바라고 있는 일에 대해서 지금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17절을 볼 때에 예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주님을 붙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두 개 읽은 본문에서 모두 두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로 그 읽은 부분에서 '베다니 마리아'의 경우에서는 그가 어떤 한 단어도 말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 여인은 그의 마음을 한 단어로 나타냅니다. 이제 이와 같은 질문으로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이 땅에서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우리는 여기서 주의 만찬의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때 당시에 그 교회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을 주님 자신께로, 성도들을 돌이키고자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그들이 행하도록, 그로 인해서 주님께 더욱 나아가도록, 주의 만찬을 주의 만찬답게 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만찬에 그들은 왜 그와 같이 모여서 떡을 떼는지 그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린 듯이 보였기 때문이 때문입니다.
그 앞에 부분에서 이 만찬을 자기만 배를 불리는, 마치 어떤 잔치와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이것에 대해서 "이것은 우리의 배를 채우기 위한 잔치가 아니다."라고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의 감사를 아버지께 가지고 나와서 주님을 기념’하는 그 자리라고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는 이 자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가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아주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우리의 초점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이 주님의 만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 여기에 '세 가지 상징물'이 나오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이 모임의 여러 가지 활동 가운데 우리는 항상 그 세 가지 상징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그 상징물의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되고요. 그것은 바로 그 '떡'과 '잔'입니다.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그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상징물은 무엇입니까? 사실 이 고린도전서 같은 장, 11장에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자매들이 그 머리를 가리는 '너울'입니다. 우리는 우리 모임 가운데 오직 이 세 가지 눈에 보여지는 상징물들을 사용할 것을 말씀을 통해 받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그 예배가 전시된 그 두 부분에서, 그 두 군데 모두 '여자에 의해서' 그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임에서 모일 때에 항상 ‘형제들’, 그 '남자의 목소리'만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잊고 있지만 자매들도 여기에 그 예배에 함께 참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제자들이 말한 것처럼, 또한 여기 형제들이 예배 시간에 입을 열어 말하는 것처럼, 물론 자매들은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드리는 그 예배만큼이나 하늘에서는 자매들의 예배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로 요한복음 12장과 요한복음 20장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참으로 이 여자들에 의해 드려지는 그 예배에 대해서 기뻐하시고 그것을 아주 귀하게 받으셨습니다. 참으로 자매들이 너울로 머리를 가리고 이제 잠잠히 있는 가운데 사실 그들은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권위를, 그 창세기에 나와 있는 그분의 질서를 이로 인해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형제들이 드리는 그 마음에 합하여 자매들도 예배로 그 마음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지역 교회의 상징물은 아니지만,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각 개인 자매들이 가지고 있는 '긴 머리'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1장 15절에서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영광이 된다"고 그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긴 머리를 갖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여자는 긴 머리가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전 11:15).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서 자매님들이 "여기서 긴 머리라는 게 얼마나 긴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이 길이에 대해서 많은 측정이 나와 있고, 구약에서는 그 길이가 아주 엄격하게 지켜야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경건한 하나님의 명령들, 그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수년 전에 나이 드신 분께서 이 주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금방 읽은 요한복음 12장과 20장의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연관 지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분께서 그 자매의 긴 머리에 대해서 그와 같이 설명한 것에 대해서 저는 그 이후로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마리아가 엎드려 주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칼로 씻었을 때, 그 머리칼은 그것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것을 아주 은혜롭게 그와 같이 이 주제를 설명한 부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냥 어느 누구도 "자매의 머리 길이가 몇 센티가 되야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머리가 길어야 된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것은 그 자매에게 영광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믿기로 주님께도 영광이 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때에 하늘에서는 우리가 드리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더욱 기뻐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됩니다. 참으로 이 장소에서 이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 것을 분명히 하늘은 알고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말, 그분께 찬송을 드리는 그 찬송, 그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감동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격려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 우리 주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실행에 어떠한 것을 더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어떠한 것도 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예배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어떤 한 사람의 인도나,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예배를 인도해 나아가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참으로 이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 집회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드리신 우리 주님께 향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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