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다윗

다윗 5 : 사울, 다윗, 요나단의 선택과 모습

박이레 2026. 7. 21. 08:04

< 다윗 5 : 사울, 다윗, 요나단의 선택과 모습 > 한봉래 형제님 / 26년 7월 18일 토요일

이 시간에는 제가 사무엘상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에 대해서, 그의 기도, 또 그의 선택, 또 그의 실수, 또 그의 놀라운 믿음, 이런 것들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사무엘 상 20장입니다. 조금 길기 때문에 뽑아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상 20장 우선 1절에서 10절까지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네 부친이 만일 나를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찌니 그런즉 원컨대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네가 네 종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거든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부친에게로 데려갈 것이 무엇이뇨 요나단이 가로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 부친이 혹 엄하게 네게 대답하면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삼상 20:1-10).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요나단이 그 부친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 부친이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줄 알고 심히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떠나고 달의 제 이일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삼상 20:30-34).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삼상 20:41-42).

아멘, 내용은 이렇게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고 하는지, 이제까지 계속 죽이려는 시도가 19장에 있었죠.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굳게 결심한 것이 사실이면, 이제 그는 도망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한 국가에서 국가의 권력이, 그 당시는 왕정이죠. 사울 왕이 국가의 모든 군인들을 동원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면 그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망가야 합니다. 이제 이게 뭐냐 하면 망명객입니다. 심지어 그는 이제 이스라엘에서 숨다가 숨을 곳이 더 이상 없으니까 그는 블레셋으로 도망갑니다. 망명자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기 전에 다윗은 한 가지 알고 싶었습니다. 사울 왕이 정말로 죽이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확실히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제 테스트를. 실험을 하나 하도록 합니다. 다윗은 이제 사울 왕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요. 이 식사 자리는 가족 간의 식사 자리가 아니고 국가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이 국무위원 장관들과 함께 아침에 모여서 식사하면서 국가 일을 의논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사울 왕이 있고,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이 참석하고, 사울 왕의 사위인 다윗이 참석하고, 국가적인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왕에 대한 충성을 의심케 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안 나온다라고 하는 것은 사울 왕을 중심으로 한 이 국가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아마 이제 그랬던 것 같아요. 월삭이니까, 이제 어떤 달의 첫날, 7월 1일, 8월 1일, 이렇게 첫날은 연속해서 식사를 합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했다면 이 첫째 주는 연속해서 하루, 이틀, 삼일간 계속해서 식사를 한다. 이런 식으로 왕궁에서 정해서 있었는데 하루 다윗이 참석 안 합니다. 그러니까 '왜 안 왔지? 다음 날 오려나?' 다음 날도 안 옵니다. 그러니까 이상하죠. 그러니까 사울 왕이 물어보게 됩니다.
"다윗은 왜 안 왔어?" 이게 그냥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용인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국가적인 행사에 그가 더 이상 동참하지 않겠다고 하는 건지, 그래서 요나단에게 물어보면 요나단이 대답을 이렇게 합니다.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 자기 가족 행사가 있어서 이렇게 국가적인 행사를 잠깐 빼고 거기 갔습니다." 라고 고향으로 가버렸다라고 말을 하면, 이건 실제는 아니죠.
그렇게 하면 사울 왕이 "그래? 그럼 갔다 오겠네." 하면 죽이려는 의도가 없는 거죠. 그런데 고향으로 가버렸다고 하니까 ,이제 사울 왕 입장에서는 죽이려고 한다면 죽이기 곤란한 곳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고향에서는 다윗을 어떻게든지 방어하려고 할 테니까, 그래서 요나단에게 화를 내면 "왜 그런 요청을 들어줬냐?"라고 화를 내면 죽이려고 하는 의도가 분명하다. 그래서 이제 테스트를 합니다.
테스트를 했더니, 요나단이 그렇게 대답을 했더니 사울 왕이 어떻게 하냐면 자기 아들이거든요. 요나단이 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아들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을 죽일 뿐만 아니라 다윗 편에 서는 사람은 자기 아들이라도 창을 던져서 죽이려고 합니다. 이 사건이 벌어지자 요나단은 이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사울 왕, 우리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정했구나, 이 결정은 더 이상 바꿀 수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다윗에게 알립니다. "너는 도망가야 된다. 왕이 죽이려고 한 거다." 그래서 요나단과 사울이 서로 붙들고 울고 작별하는 내용입니다.

이 스토리를 통해서 저희들이 이제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첫 번째, 사울 왕입니다. 사울은 왜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까? 2. 그다음에 두 번째, 다윗은 이제 도망갑니다. 다윗의 도망가는 코스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도망을 잘 갔는가? 어디로 도망갔는가? 이것도 살펴보겠습니다. 3. 그다음에 세 번째 요나단은 왜 다윗과 함께 도망가지 않고 아버지 사울 쪽에 섰는가? 이 세 가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우선 다시 한 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삼상 20:33). 사울이 아들까지 다윗을 옹호한다면 내 아들이라도 죽이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사울은 왜 이렇게까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뭘 잘못했는가? 사울에게 해를 끼친 게 뭐가 있는가라고 하는 점을,
그래서 사울의 미움에 어떤 정당성이 있는가? 합당한 근거가 있는가? 이거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사울의 이와 같은 다윗을 향한 미움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다 아시지만 다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삼상 18:7-8).

그래서 이제 첫 번째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칭찬하고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어떤 어떤 말로 바꿀 수 있냐면 시기심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질투심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자기가 왕인데 이 나라에서 나보다 더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다윗이 백성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시기하고 질투하는 거죠.
그다음에 이 시기심이 어떻게 드러나냐 하는 걸로 보겠습니다.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삼상 18:21).

자기 딸을 다윗의 아내로 주려는 겁니다. 사위를 삼는 거죠. 주어서 왜 주느냐?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저희들이 이제 한 번 가본 거죠. 사울 왕은 다윗에게 "내 딸을 너한테 시집보내고 싶다.
네가 사위가 되어 달라." 그런데 보통 이제 그때 문화적인 관습상, 사위가 될 사람이 처갓집에 이제 폐물을, 혹은 예물을 이렇게 드리는 거죠. 그런데 다른 예물은 안 받고 싶고 다른 건 내가 다 있다. 이거 하나 받고 싶다. 그래가지고 요구한 게 뭐였죠?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개입니다. "블레셋 사람을 100명을 죽이고 그 증거물을 가져와라 그러면 내가 사위를 삼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도냐면 자기가 어떻게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이냐? 블레셋 사람 100명 죽이려고 하다가 그가 죽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죽이냐? 겉으로는 사위를 삼으려는 명목을 세워서, 겉으로는 절대 아닙니다. 다윗을 미워하거나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자기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포장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미움이 나타나는 첫 번째 방식입니다. 겉으로는 미워하지 않는 척, 오히려 위하는 척 하면서 사실상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 미움이 드러나는 첫 번째 방식입니다. 이 방법이 실패합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200명이나 죽이거든요. 그리고 그 증거물을 가지고 와서 사위가 돼 버립니다.
그다음에 사위가 됐는데도 19장 1절,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19장 할 때 저희들이 살펴봤었죠. 이번에는 이 미움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합니다. 이 미움을 더 이상 포장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미움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다윗을 죽여야 된다." 그리고 왕으로서 국가의 대신들에게,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여라."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 이제 요나단이 이야기하죠. "왜 죽이려고 하십니까? 그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블레셋을 치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지 않았습니까? 그때 왕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하면서 무얼 상기시켰냐면, 사울이 이제 왕이 됐을 때 성령이 임하고 그 암몬 사람이 길르앗 라못 사람들 눈을 빼버리겠다,
막 이렇게 했을 때 성령님하고 사울이 이 암몬을 용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모독한 암몬을 용납할 수 없다고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가지고 안 먼 사람을 치고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죠. 그때 어떤 일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사울 왕을 조롱했던 이스라엘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불러다가 누구 죽이십시다." 그때 사울이 뭐라고 말을 하죠? "오늘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날이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날이다. 이날 이스라엘을 죽일 수 없다." 이게 사울이 정상적일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을 완수할 때 그가 했던 발언입니다. 그 발언을 요나단이 다시 인용하면서 "지금 똑같지 않습니까? 다윗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날, 다윗을 비난하는 사람을 죽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윗을 죽이다니요?" 이렇게 해서 저기 사울왕이 받아들입니다. 죽이지 않겠다라고 그가 이성적으로 설득이 가능한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다음에 이번에는 20장 33절로 오시면, 그런데 이번에는 이제 시간이 더 지난 거죠. 이번에는 사울 왕이 어떤 상태가 됐냐면 자기를 설득하거나 다윗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들인데도, 19장에서는 요나단의 설득을 받아들였잖아요. 20장에서는 요나단을 죽여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시기심이 어떻게 점점 강해져 왔는가? 처음에는 시기심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스스로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자기 양심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시도를 포장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심이 점점 악한 수준으로 올라와서 이제 공개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설득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설득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많이 말하는 건데 이게 어떤 사람의 시기심이, 죄가 성경은 이렇게 말하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 훼방죄", 이런 건 용서가 될 수가 없는 거죠. 요한일서에서도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죠. 그런데 그건 뭐냐? 그게 사망에 이르는 죄는 뭐냐? 성령 훼방죄는 뭐냐? 이제 이런 거 다룰 때, 어떤 사람은 죄가 있고 이 죄에 대해서 이제 복음이 증거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대조하는 거죠. 그래서 이 죄가 아직 회개할 수 있는 수준에 계속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서는 "그가 통곡했을지라도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이 시기심과 이 죄악된 마음이 점점 커서 이 20장에서는 저희들이 말하는 '터닝 포인트'를 지나버린 것입니다. 저희들이 보통 이렇게 예를 들잖아요. 이렇게 배가 있는데 이제 강을 따라 쭉 갑니다. 그런데 여기는 낭떠러지입니다. 이 배가 돌아설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강을 따라 흐르고 있어도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을 지나면 이 배는 못 돌아섭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위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 터닝 포인트가 있는 것입니다. 이 터닝 포인트를 넘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자세히는 모르는데요. 이제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모임 초기에, 아마 1960년대쯤인 것 같아요. 진도에 계신 분인데, 그때 우리나라에는 복음이 어디로 들어오냐면 이렇게 육지 쪽으로 안 들어가고 섬으로 먼저 들어갑니다. 진도에 들어갔다가 이렇게 들어오고요. 또 인천 쪽에서도 이렇게 무의도라고 하는 섬에서 모임이 시작되고 이렇게 육지로 들어옵니다. 독특하죠. 진도에 있는 어떤 분이 한 20년 후에 모임에 나타났어요. 이분이 모임 초기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을 들었어요. 그리고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집에 갔더니 집에서 이제 보통 그때는 그런 일이 많잖아요. "야, 우리 집안의 종교가 둘이면 어떡하냐? 네가 갑자기 예수님 믿으면 난처해진다. 너 믿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분이 지금은 뭐 한 5-60 돼버린 분이지만 그때 젊었을 때잖아요. 젊었을 때 이 말을 듣고 복음을 안 받아들 믿는다고 했는데 믿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제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자기가 자유롭게 믿을 수 있는 때가 된 거예요. 그래서 그 옛날을 생각하면서 서울에서 어떤 모임에 오셨어요. "다시 믿고 싶다." 꼭 그렇게 되는 건 아니겠는데, 하여간 이분의 경우는 그래서 다시 복음을 들었거든요. 못 믿습니다. 참 안타까운 거죠. 복음은 언제든지 내가 원하기만 하면 믿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지금이 구원의 날이고" '날'은 하루라는 뜻이잖아요. "은혜의 때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게 무서운 일입니다.
사람이 미움을 가질 수 있죠. 제가 왕이라 그래도 다윗 이렇게 나타나면 미워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거죠. 그래서 이걸 성경을 다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전번에도 말씀드린 건데요.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이게 무슨 뜻이냐면 '죽음 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죽음 앞에서 저항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는 안 죽을래." 생명을 가진 존재가 이 땅에서 나 안 죽을래 하고 죽음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그러면 사랑하면 이 사랑을 막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런데 이 사랑을 막을 수 있는 게 없어요. 우리의 죄악도, 우리의 불신도, 사단의 방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다음에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잠언에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거머리가 있는데 이게 다고다고해서 만족할 줄을 몰라요. 피 좀 빨아 먹었으면 됐잖아요. 저희들이 옛날에 모내기 할 때 보면 이렇게 논에 이렇게 물이 있는 곳에 이렇게 들어가잖아요. 반바지 입고 모 심으려고, 용수 형제는 모내기 그런 거 해봤어요? -안 해봤어요. 귀족이라서 그런 거 안 해 봤어요.- 이제 세대가 달라요. 저는 2년간 농사 지어 봤잖아요. 그러면 이게 거머리가 달라붙어요. 그러면 거머리가 피를 빨아먹죠. 빨아 먹었으면 됐죠 이제 떨어져야죠. 이게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배가 잔뜩 불러, 그래서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 중에 하나가 거머리고, 잠언 30장에 또 하나가 '음부'입니다. 그래서 "음부같이"라면 질투심은, 질투했잖아요. 그러면 이 정도 질투했으면 됐죠. 질투해서 이 정도 선에서 그를 미워하고, 그를 해치고, 그에게 나쁜 짓을 하고, 그 정도 했으면 됐어요. 그런데 만족할 줄을 몰라요. 죽일 때까지, 상대방을 죽여 없앨 때까지 그 질투심이 끝나지 않는 거예요. 이게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질투의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사울의 미움이 18장에서 끝나고, 19장에서 끝났고, 이렇게 끝났어야 되죠. 그런데 20장까지 끌고 왔다는 거예요. 만족할 줄을 모르고, 그다음에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이건 아마 성도님들이 성경읽기 시간에 다루셨을 것 같은데요. 요한일서 보시죠.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사울 왕에 대해서 구원받지 않은 분이다, 그런 거죠. 구원받지 않은 않는 사람입니다. 가인 같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보면 아벨이 가인한테 뭘 잘못했나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여기 보면 오히려 아우의 행위는 의롭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악합니다. 둘 다 하나님께 예배드렸잖아요. 제물을 드렸잖아요. 그런데 가인 것은 안 받고 아벨 것은 받았죠 하나님이 아벨 때문에 가인 것 안 받은 거 아닙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이유가 뭐죠?
죽여야 될 이유가 있나요? 없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여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거예요. 가인도 아벨을 이유 없이 미워하는 거예요. 다시 보겠습니다. 이게 이제 어디로 넘어가냐면 사단입니다. 사단이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만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타락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이렇게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사단에게 잘못한 게 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죠? 사단을, 루시퍼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가장 높은 천사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는 악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반역할 만한 어떤 이유와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한 자요.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 이게 가인에게 찾아옵니다. 가인은 아벨을 이유 없이 미워했는데, 미워했어도 어느 날 가인을 아벨을 불러다가 들으러 나오게 해서 그를 죽여버립니다. 그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요? 살인이 전혀 일어난 적이 없는 시대에 가인의 마음속에 그래서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가인의 마음속에 '죽여버려야지.' 이러한 이런 끔찍한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을까? 이것이 사단이 넣어놓은 겁니다. 그다음에 마찬가지로 사울 왕에게 다윗을 죽일 때까지, 그의 마음속에 질투심으로 가득 차게 만든 게 다윗의 잘못이 아니고 사단이 집어넣은 것입니다. 하나만 더 성경을 보겠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 7:7).

세상이 주님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죽여야 시원합니다. 그리고 가장 모독적인 방법으로 죽이려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주님을 몰아갑니다. 주님이 뭘 잘못했나요? 세상에 해를 끼친 적 있나요? 그런데 왜 미워하죠? 이제 그 이유를 주님은 이렇게 대십니다. "내가 세상을 악하다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요,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 가인이 왜 그렇게 미워하죠? 아벨의 존재는 그를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는 빛입니다. 그리고 가인은 어둠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빛이 자꾸 어둠에게 너는 빛이 아니다. 너는 악하다라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까지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다윗을 보면 자기가 죄인인 것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의롭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고, 이걸 볼 때마다 자기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래서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됩니다. 이제 그의 선택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다윗의 편에 서고, 다윗처럼 되고라고 하는 변화되는 쪽으로 와야 되는데 이제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변화되든지, 아니면 빛을 꺼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빛으로 오든지, 빛을 끄든지, 이 선택을 사울이 한 것입니다. 빛을 끄기로, 다윗을 없애버리기로, 그래서 내 어둠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주님 은혜로 회개하고 구원받는 쪽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누구냐 그러면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왜요? 그랬더니 여러 번 이야기했죠. 다윗이 골리앗을 쳤을 때 요나단이 골리앗을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골리앗과의 승리 이후에 사울 왕에게 하는 그 대화를 듣고 그가 사랑합니다. 자기와 같은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의 경우는 이렇게 보겠습니다. 저희들은 구원받고 그다음에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사울이 가고 있는 이 끔찍한 길, 멈출 수 없는 패망의 길에서 저희들이 돌아서고 구원받고 했는데요. 이제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는, 저희들 속에도 질투심이 있을 수 있고, 우리나라 속담으로 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좋아해야죠.
사촌이 사는데, 그런데 배가 아픈 거죠. 이게 우리나라 기질인 거죠. 죄인들이 다 그렇게 하는 거죠. 거기서 넘어설 수 있었던 게 이거죠. 고린도전서 12장 26절, 모임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모임 생활을 하면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과 26절 "만일 한 지체가" 우리가 지체라고 하는 의식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머리고 우리는 그 팔과 다리가 되는 한 몸이다라고 하는 이 교회 진리 안으로 들어오면,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

이리 와야 합니다. 그래서 모임 생활이 이와 같은 것들의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저희 가운데는 육신적인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게 아니라 저희들이 영원한 생명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함께 가지고 있고, 특별히 한 지역에서 지역 교회를 이루어 서로 지체가 돼 있다라고 하는 이 개념이 들어갔을 때 우리는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고 하는 은혜 가운데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사울과 같은 삶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은혜로운 길인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다음에 두 번째로 가겠습니다. 이제 다윗입니다. 사무엘상 20장에서 다윗은  확인을 했습니다. '사울 왕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분명하구나.' 확인됐습니다. 요나단을 통해서 테스트를 해서 확인됐습니다. 이제 그는 도망갑니다. 그는 자기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한 국가가 군대를 동원해서 죽이려고 하면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망과 나는 한 걸음 사이다." 한 걸음이니까 굉장히 가까운 거예요. 사망이 바로 옆에 있는 거죠. 그래서 사망은 언제든지 나를 덮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이제부터 사울이 군대를 동원해서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이젠 모른다. 나는 죽음의 위협 아래에 있다. 이 부분은 많은 형제님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씁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만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언제 죽어도 좋도록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믿고 영원한 안전한 구원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제 복음으로는 그렇고요. 그런데 이걸 말씀 쪽으로 이렇게 살펴보면 다윗은 두려워합니다. 죽을까 봐, 그래서 도망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됩니다. 잘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다윗이 죽을 수 있을까요? 다윗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상황을 보니까 자연스럽지만, 그러나 다윗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옳을까요? 왜냐하면 다윗은 죽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다음 왕으로, 그래서 요나단도 압니다. "다음 왕은 너다." 사울도 압니다. 다윗이 다음 왕으로 기름 부은 거 압니다. 그래서 더 죽이려고 하는 거죠. 다윗도 압니다. 하나님이 이새의 집에 있을 때 엘리엇 같이 장남도 있었고, 그 인물이 훌륭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없었던 양치러 가서 그 자리에 오지도 못했던 다윗 불러오라, 그래서 기름 부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왕으로 기름 부었는데 사울이 죽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입니다. 그는 이제 왕으로 16장에 기름 부음 받죠. 17장에서 그가 골리앗과 싸워서 이깁니다. 골리앗이 다윗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사울이 죽일 수 있을까요? 못 죽입니다. 그다음에 다윗은 또 이런 경험을 합니다. 사울이 죽이려고 하죠. 자기는 수금을 타고 있는데 사울에게 또 악한 영이 이렇게 역사를 해서 옆에 창이 있으니까 창으로 다윗을 찌르려고 몇 번 했다고요? 세 번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피했습니다. 물론 다윗이 잘 피한 것도 있지만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그의 창을 빗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다윗이 쭉 해온 겁니다. 다윗은 죽음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그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위험에 대비해야 합니다. 도망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망과 나는 한 걸음 사이다." 아닙니다. 사망은 그를 덮치지 못합니다. 그 가운데 누가 계시죠?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기름 부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이해하지만, 다윗을 이해하지만 다시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맨날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우면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저희들이 아는 비극인데요. 다윗이 어디로 도망가냐 그러면 도망갈 사람이 없죠. 사무엘한테 도망갔다 왔잖아요. 그다음에 누구한테 도망가냐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망갑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죠? 이걸 보고 있던 도엑이 사울 왕에게 일러바쳐가지고 아히멜렉을 죽일 뿐만 아니라, 사울이 그 놉땅에 있는 제사장 가족 85명을 죽여버립니다. 다윗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아비멜렉인가요? 아들이 이제 도망오죠. 혼자 살아서, 그랬을 때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책임이다." 그래서 다윗이 잘못 선택함으로 다윗은 하나님이 보호하시지만 피해가 갑니다. 다윗이 또 한 번 무슨 실수를 하냐면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 땅에 있을 수 없으니까 블레셋으로 도망갑니다. 골리앗이 있는 그 동네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이제 아기스 왕에게 갔는데 아기스가 시글락이라고 하는 곳을 주거든요. "너 그러면 여기서 부하들하고 같이 있어라." 시글락에 나중에 저희들이 쭉 성경을 살펴보면 시글락의 자기와 그때의 숫자는 한 600명 됩니다. 600명 되는 다윗의 동역자들이 아내와 자녀들을 놔두고 전쟁에 참여하러 갑니다. 갔다가 전쟁에 참여 못 하고 이제 돌아와 보니까 시글락은 불타고 아내와 자녀들은 전부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래서 다윗의 동역자들이 다윗을 치려고 하는 순간까지 갑니다. 이게 다윗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자기 방법으로 죽음을 피하려고 했었던 결과들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저희들이 다윗에게서 교훈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오"라고 하는 이 믿음이 발휘하기 쉽지 않지만, 다윗도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다윗의 경험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와 같은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부분은 성경 하나만 찾고 오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다윗에게는 잘 없었던 것 같은데요. 우리 얘기는 아까도 제가 교회를 말씀드렸는데 이번에도 교회입니다. 히브리서 10장, 저희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는 모여야 합니다. 자주 모여야 합니다. 물론 정기 집회로 모이는 그 때가 있죠. 이 수요일, 주일, 이렇게 모이잖아요. 그때만 모이는 게 아니고, 모일 의무가 없는 때라도 필요하면 모여서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돌아보고, 살펴주고, 그리고 서로 사랑하자. 선한 일을 하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증거하는 일을 하자,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럴 때 다윗이 미끄러져 갔던, 그런데 사실은 저희들이 다윗이라고 그래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사울이 막 죽이려고 하는데, 그게 눈앞에 뻔한데, 자기는 아무도 없고 도망가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도망갈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위험이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움이라고 하는 동기를 가지고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 이와 같은 상황인데 제가 어디로 가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고 이렇게 가야 됐었다라고 하는 것을 교훈 받고자 합니다.

3.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안타까운 게 그가 다윗과 헤어져서 아버지 사울 왕이 있는 왕궁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선택이 중요하다.' 이 선택으로 요나단은 죽습니다. 이제 블레셋과의 전투가 벌어져 가지고 길보아 산에서 요나단은 죽습니다. 사울과 함께 죽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가 벧산이라고 하는 성벽에 못 박히게 됩니다. 아주 비극적인 죽음으로 죽습니다. 다윗은요? 다윗은 여기서 도망가다가 결국 아둘람 굴에 있습니다. 요나단하고 비교하면 요나단은 왕궁에 있습니다. 다윗은 굴 속에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해 주셔서 아둘람 굴에 사울 왕 체제에 원통한 자들이 400명이 모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훗날 다윗 왕궁의 용사들이 됩니다. 다윗이 왕이 됐을 때 이스라엘이 최강의 나라가 됩니다. 그때 그 새로운 다윗의 나라를 함께 세우는 그 사람들이 400명입니다. 그들이 굴에 살고 있었지만, 동굴 속에 살고 있었지만, 미래의 다윗 왕궁의 기초를 이룰 사람들입니다. 요나단은 지금 왕궁에 살고 있지만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벽에 그 시신이 꽂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 왕궁에 살았던 사람 중에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모세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선택하죠?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고 노예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다음에 저희들이 한 번 더 다뤘죠. 왕궁에서 살았던 사람 오바댜, 그가 왕궁에 있었지만,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크게 경외했던 사람이고,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그가 살렸던 사람이지만, 그가 뭘 모르냐면 그 시대는 그렇게 했는데, 지금 하나님이 엘리야를 사용해서 이 시대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이게 오바디아가 안타까운 점입니다.
말씀을 마쳐야 되겠는데요. 요나단과 관련해서 이런 예를 하나 살펴보고 싶습니다.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출 32:26).

유명한 장면이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하고 돌판을 이렇게 받는 40일 동안 산 밑에서는 아론을 꼬드겨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시고 모세에게 내려가라. 그래서 모세가 돌판을 가지고 내려와 봅니다. 그랬더니 1계명, 2계명을 어기고 있습니다. 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다음에 두 번째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첫째, 둘째 계명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판을 깨버렸죠. 왜냐하면 돌판 갖고 있으면 이 사람 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사람은 내게로 오라." 그래서 이제 레위 지파가 오고 그래서 레위 지파가 이제 성막에서 주님을 섬기는 지파가 되는 거죠. "하나님 편에 있는 자는 내게 오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 편에 있었을까요? 이제 레위지파가 왔는데,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12지파 중에서 한 지파가 온 거죠. 이 사람들이 3천 명을 죽입니다. 이 금송아지를 만들자라고 했던 주동자들을 다 죽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시작될 때 3천 명이 구원받죠. 그래서 이제 구약과 신약이 이렇게 대조되는 거죠. 그럼 하나님 편에 섰던 사람들은 누구냐 그러면 첫 번째입니다. 누가 하나님 편이냐? 이렇게 요나단을 보는 겁니다. 요나단이 하나님 편에 섰어야 합니다. 아버지 편에 서는 게 아니고,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
1). 첫 번째, '말씀 편에 서는 사람', 말씀이 뭘 말하고 있냐? 말씀은 그 시내산에서부터 이렇게 주어졌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출애굽 시킨 하나님이다."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편에 있다고 하는 것은 말씀 편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압니다. 다윗을 그다음 왕으로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 부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 왕은 다윗이다." 그는 하나님 편에 섰어야 합니다.
2). 그다음에 두 번째 말씀 말고, 그러면 좀 이상한데요. '실제 삶에서 누가 의로운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먹고 마시고 뛰어놀고 있습니다. 이게 합당한 행동입니까?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고 칩시다.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방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실질적인 삶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고, 이와 같은 삶을 사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아니하고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는 것입니다. 의롭고, 평안하고, 그리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모습이 말이 안 맞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요나단은 봐야 합니다. 요나단은 뭘 선택했어야 되냐? 하나님 말씀 편에 서야 되고, 두 번째, 그러면 사울 왕의 삶의 모습과 다윗의 삶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사울은 죽이려고 합니다. 이유 없이 자기 사위인데,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사위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건져낸 사람입니다. 그를 죽여서 무슨 이익이 있단 말입니까? 다윗은 어떻게 하죠? 다윗의 삶은 다릅니다. 그가 만약에 사울을 죽이려고 한다면, 사울과 대적해서 싸우려고 한다면, 골리앗을 이겼는데 사울을 못 이기겠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합니다. 나중에 동굴에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주어집니다. 그때 죽이나요? 안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기름 부으셨던 사울 왕을 내가 안 죽인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내가 칠 수 없다. 이게 다윗이 하는 것입니다. 이 행동이, 그 삶의 모습이 다릅니다. 이쪽 택해야 합니다.
3).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이건 뭐 항상 옳은 건 아닌데요. 하나님 편은 어떤 사람이냐? 항상 대부분의 역사는 말합니다. 소수입니다. 레위 지파 한 지파가 옵니다. 11 지파는 그대로 있고요. 옳은 길은 소수가 갑니다.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의, 자기 희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넓은 길로 갑니다. 왜요? 거기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아도, 자기의 욕구와 뜻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갑니다. 그러나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그래서 꼭 소수가 옳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편은 대체적으로 소수의 길이었다.
그래서 세 가지입니다. 말씀이 말하는 쪽에 서 있는가? 그다음에 말씀이 아니더라도 그 말씀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그 삶의 모습, 주님과 같은 삶의 모습을 살고 있는 사람 편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숫자가 아니라 '진리' 쪽에, 적다 할지라도 그쪽에 사용합니다. 이게 요나단이 잘못 선택한 방법입니다.

저희들은 하나만 적용하고 말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죠. 거절당한,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아버린 그 예수님을 따라 이 땅을 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으로 가시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이와 같은 이 모습을 띨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고린도 교회가 뭘 잘못했냐 그러면 고린도전서 4장 8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 하기를 원하노라"(고전 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이건 이 땅에서는 아닙니다. 천년 왕국에서, 영원한 나라에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땅에서부터입니다.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사도들을 빼고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배부르고 부유하고 왕처럼 산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 4:11-13).

이게 사도들의 삶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미 배부르고 사도 없이, 사도는 그냥 이제 구원 구원 복음 전해줬으니까 됐어요. 젖혀놓고 이제 우리끼리 배부르고 부유하고 왕 노릇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문제였는지 저희들이 고린도전서 볼 때마다 많이 나오잖아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사도들의 삶은 여러 가지 이 땅에서는 아직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 땅에서는 계속 고난 속에서 그러나 경건하게 주님의 생명을 나타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따라갔어야 했어요. 거절당한 미래의 왕 다윗을 따라갔어야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제 주님을 따라가야 되죠. 주님은 아직 이 세상에서 거절당하신 왕이십니다. 아직 왕으로 안 오셨습니다. 주님이 아직 왕으로 안 오셨는데 우리가 왕처럼 사는 것은 모순이죠. 그래서 주님이 이 땅을 거니셨을 때 가지셨던 태도를 우리가 유지하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많은 축복들은 미래에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우리에게 주실 것으로 믿고, 지금 이 땅에서 환란과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저희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2사무엘상 20장을 통해서 사울, 다윗, 요나단의 선택과 삶의 모습을 보면서 저희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영광스러운 길을 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