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 1 : 사울의 폐위, 다윗의 기름부음 > 한봉래 형제님
예,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주님 허락해 주시면 제가 다윗에 대해서 계속 좀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다윗이 구약 성경에 보면 이제 여러 왕들이 있는데 그 왕들을 평가할 때 다윗처럼 행하면 선한 왕입니다. 다윗과 달리 행하면 악한 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유다의 모든 왕의 어떤 기준이 되는 왕입니다. 그래서 한번 살펴보고요.
그다음에 이제 다윗은 어떤 칭호를 받았냐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이렇게 호칭을 받습니다. 제가 저를 봐도 저도 제 마음에 안 듭니다. '왜 이럴까?' 이런 생각이 들죠.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마음에 든다 하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제 이런 점들을 좀 배워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완벽한 삶을 산 사람은 아닙니다.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바세라와의 사건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었던 그의 특징들은 뭔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윗이 맨 처음으로 나오는 대목이 사무엘상 16장입니다. 사무엘상 16장부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찌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사울이 이에 사자를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 아들 다윗의 손으로 사울에게 보내니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청컨대 다윗으로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삼상 16:1-22).
16장 1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사울 왕입니다. 첫 번째 왕이 사울 왕인데, 이제 하나님이 그를 왕의 자리에서 폐위시킵니다. 폐위시킨 이유가 이제 15장, 14장, 13장에 나옵니다. 세 가지 장에 걸쳐서 사울이 뭘 잘못했는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잘못입니다. 블레셋하고 이스라엘하고 이제 싸우게 될 때 블레셋이 공격을 해오니까 진을 치니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주일을 기다리십시오. 일주일 기다리면 내가 와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고 블레셋과 전쟁을 합시다." 이렇게 해놓고 사무엘이 빨리 안 오는 거예요. 사울 생각에, 보니까 블레셋은 전쟁 준비가 끝나가고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안 오니까 자꾸 흩어지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면 자기가 제사를 지내버립니다. 그래서 '기다리라.' 이건 성도님들이 잘 배워야 합니다. 기다리는 거 이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손대지 말고, 그런데 사무엘이 막 오고 있었는데 그냥 자기가 제사를 지내버립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책망합니다. "당신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다음 장에서는, 그 당시에 왕은 왜 세우냐 그러면 전쟁하려고 세웁니다. 왕이 있고, 그다음에 군대가 있고, 그래서 외국과의 전쟁에서 국가를 보호하고, 이러려고 왕을 세운 거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사울 왕은 블레셋하고 한 번도 안 싸웁니다. 그가 왕이 된 목적이 블레셋과의 전쟁인데 하나도 안싸웁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골리앗하고 할 때 보면, 40일간은 골리앗이 나와서 "나와라, 싸우자!" 안 나갑니다. 누가 나가죠? 다윗이 나갑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그를 전쟁하기 위해서 세웠는데 하나님이 세운 목적대로 일을 안 합니다. 그리고 누가 싸우냐 그러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싸웁니다. 요나단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말하냐면 "전쟁의 승패는 사람은 많고 적으면 있지 않다." 이게 이스라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가 약해도 이긴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가 강해도 진다." 이게 이스라엘 믿음이거든요. 이게 다른 나라는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하나만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나라이기 때문에 이런 게 되는 거죠. 그랫 요나단이 저기 블레셋 진이 있으니까, 블레셋 초소가 있었거든요. 요나단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는 둘 뿐이에요. 자기하고 병기 든 자, 2명이에요. 그런데 저기는 블레셋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거든요. 초소가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은 사람은 많고 적음이 있지 않다. 우리는 2명이고 저기는 수백 명이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가 이기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요나단이 이제 하나님의 인도가 맞나, 하고 그다음에 그 이스라엘 초소를 공격해 들어갑니다. 두 명이, 그래서 블레셋의 진이 무너집니다. 이걸 보고, 사울은 전쟁 안 하고 있거든요. 이스라엘은 전쟁 안 하고 있었어요. 이스라엘이 보니까 어느 한쪽 진에서 블레셋 군인들이 막 이렇게 죽어 나가는 거예요. 이걸 보고 용기를 얻어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믿음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승리를 주시고 있는 이 전쟁에 사울이 방해를 합니다. 사울이 뭐라고 그러냐면, 이 지금 막 전쟁이 시작됐는데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합니다. 금식을 명령을 합니다. 아니 전쟁하는데 금식을 하면, 그런데 이걸 모르고 요나단이 꿀을 찍어 먹습니다. 나중에 누가 먹었냐? 그래서 자기 아들 요나단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울이 한 두 번째입니다. 사울은 첫 번째, 기다리지 않고, 두 번째, 하나님이 시작하신 승리의 일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이제 15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말렉을 치라 그랬죠. 아말렉을 치라고 그랬더니, 남김없이 진멸하라고 그랬는데 살려둡니다. 아각왕을 살려두고 짐승 중에서 좋은 걸 살려주죠. 그때 이제 저희들이 배울 수 있는 저기 중요한 교훈 나오죠. 유명한 말씀이잖아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순종해라.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이제 이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폐위시킵니다. 그는 지금도 왕입니다. 하나님한테는 왕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도 실질적인 권력은 가지고 있죠.
이렇게 되자 사무엘이 1절에 보면 슬퍼합니다. 사무엘이 슬퍼할 일은 없거든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은 사무엘 아닙니다. 백성들이 좋아해서 세웠거든요. 그리고 그가 왕에서 폐위된 것도 사무엘 잘못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사울이 폐위된 것이 자기 책임인 양 슬퍼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책임질 일 아닌데 괜히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영적인 부담을 느끼는 거죠. 여기까지는 좋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책망합니다. 어떻게 책망하냐면, "내가 버렸는데, 그리고 나는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하는데 너는 사울을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그래서 우리의 슬픔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책을 느끼고 책임감을 느끼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기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잠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제 어떤 사람이 있었냐면 모세가 있었네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제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책임을 맡았죠. 그런데 모세 자신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왜요? 처음에 이제 광야를 지나다니 보니까 물이 없어요. 그래서 물을 어떻게 냈냐면 어떤 반석에, 이게 다 주님을 가리키는 거죠. 이제 반석을 모세가 칩니다. 지팡이로, 그랬더니 반석에서 물이 나왔어요. 요즘으로 치면 암반추입니다. 암반수가 나왔어요. 그러고 나서 또 이제 광야를 지나다가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납니다. 또 물이 없었어요. 광야니까, 이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번에는 반석 치면 안 되고, "반석에게 명령해라. 말로 물을 내라." 그럼 물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 명령이에요. 하나님 지시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도 강퍅하게 굴고 말 안 듣고 그러니까, 자기도 그게 그 영향을 받아서 반석을 두 번 쳐버립니다. 한 번, 두 번, 쳐버립니다. 이 반석은 주님을 상징하고, 치는 것은 십자가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물은 나왔지만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는 가나안 땅에 못 간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쭉 이끌고 이제 가나안 입구까지 와 있습니다. 자기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는 이제 가나안 땅 한번 올라가서 봐라." 그래서 느보산에서 이렇게 봅니다. 가나안 땅을 먼 눈으로 이렇게 봅니다. 그리고 이제 너는 죽어야 된다. 그랬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하냐면 이스라엘 백성은 양입니다. 자기가 경험해 보니까 양이에요. 세상에 그 짐승 중에 양이 참 독특한 짐승입니다. 자기 혼자 아무것도 못해요. 양은 돌보는 사람이 있어야만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짐승 중에 양을 하나, 이상한 동물을 하나 만들었어요.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킵니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먹을 것을 압니다. 뭘 먹을지, 뭘 먹으면 안 될지, 우리는 애들 막 아무거나 줏어 먹잖아요. 짐승들은 안 그렇습니다. 딱 먹을 거 못 먹을 거 압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호할 줄 알고요. 모든 짐승들이 그렇게 만드셨죠. 그런데 하나님이 양을 만드셨는데, 이건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사람이 돌봐주지 않으면 죽는 짐승입니다. 이제 그 짐승의 특징을 따서 모세가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양입니다." 저는 죽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그렇지만 모세는 누구를 생각하냐면 양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뭘 구하죠? "인도자를 세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를 세우시죠? 여호수아를 세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목자 없는 이스라엘 백성은 끝입니다. 우리도 그겁니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끝장입니다. 그럴듯해 보여도 이게 끝장 난 겁니다. 꼭 인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이거 참된 인도자, 예수 그리스도고, 말씀이고, 성령님이고, 이거 없으면 시간 문제입니다. 이제 죽는 게, 망하는 게, 시간 문제인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경우를 보면 인도자가 없으면, 자기가 인도자죠. 자기가 없으면 이스라엘이 망한 거예요. 지금 아무리 수가 많고 강해도 이건 망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인도자를 세우셔야 합니다." 했죠.
사무엘도 이걸 배웠어야 합니다. 사무엘도 이제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위시켰어요. 그러면 사무엘이 뭘 해야 되죠? 하나님 폐위 좋습니다. "새로운 인도자 세우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인도자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안 하고 사울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사무엘이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보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역으로 "내가 왕을 세우려고 한다. 네가 가서 그 왕에게 기름을 부어라." 이렇게 한 거죠. 그러니까 사무엘이 "지금 현재 사울이 왕인데 내가 다음 왕을" 사울은 누가 왕이어야 된다고 생각하냐면, 자기가 왕이고 자기 죽은 후에는 누가 왕이어야 해요? 자기 아들이 왕이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요나단이 왕이 돼야 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사무엘이 다른 왕을 세웠다라고 하면 자기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사울은 실제로 이제 여기서 보면 어떤 정치를 하냐면 '공포 정치'를 합니다. 이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내 말을 안 들어? 그러면 손해를 끼칠 거야, 라고 공포 정치를 합니다. 이게 이제 세상에 사는 거죠. 그런데 이제 사울이 얼마나 악하냐 하면 '하나님의 사람'도 죽이려고 합니다. 이건 하나님을 죽이는 겁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죠. 사사죠. 그런데 사무엘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무엘이 그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사울 시대 정치의 큰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냐면, 이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거든요. 다윗은 직업이 뭐냐? 목자입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왕이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보면 목자인데 인도자로 세운 사람이 모세가 있어요. 야곱이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를 뭐라고 말하시냐면 "내가 선한 목자다." 그러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인도자는 목자이기를 바랍니다.
어쨌거나, 이제 나중에 보시면 사울 왕이 누구를 죽이냐면, 이 다윗이 나중에 사울이 죽이려고 하니까 도망가죠. 다윗이 사울 왕궁을 떠나서 도망가려고 보니까, 갑자기 나와서 이제 망명을 해야 되죠. 어디로 가냐 그러면 갈 데가 없죠. 그래서 제사장한테 갑니다. 제사장 이름이 아히멜렉입니다. 거기 가서 배가 고프니까 성경에서 나오는 유명한 유명한 이야기죠. "먹을 게 있습니까?" 그랬더니 아이멜렉이 이렇게 말합니다. "먹을 거 없다." 그런데 이제 먹을 수 있는 거라고는 딱 하나가 있는데 진설병, 하나님께 드린 떡, 그리고 이것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이 있는데 다윗이 그거 달라고 그러죠. 안식일인데,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으 이거 다윗이 먹습니다. 이걸 주님이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걸 예로 듭니다. "다윗이 잘못했냐? 그러면 다윗이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셨느냐?" 그렇지 않은 거죠. 그 이야기를 했던 거죠.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합니다. 나중에 이 소식이 사울에게 들어갑니다. 그랬더니 사울이 아히멜렉을 부릅니다. 불러다가 "너 왜 다윗을 도와줬냐? 내가 죽이려고 하는 건데 왜 그를 도망가게 했느냐? 하고 책임을 묻죠. 아히멜렉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다윗이 그때 도망 중인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을 내가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을 해도 사울은 안 듣습니다. 안 듣고 "네가 다윗을 도운 것은 내 적 편에 서 있는 것이고, 내 적이므로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히멜렉을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이제 주위에 있는 사람한테 "아히멜렉으 죽여라." 이렇게 하죠. 굉장한 거죠. 이게 상황 파악도 안 되고 굉장히 악하게 행동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아무도 제사장을 죽이려고 안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통해 죽이죠? 도엑이라고 하는 이방인을 통해서 아히멜렉을 죽입니다. 아히멜렉을 죽인 것도 잘못이지만 그 놉라고 하는 제사장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놉이라고 하는 마을에 있는 모든 제사장을 죽여버린 거죠. 이게 사울의 정치입니다. 사울이 왕이 돼어 하는 일이 이런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두려움을 느낀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으로 가라, 이새의 집으로 가라. 그리고 제사를 지내라. 화목제를 지내라." 이렇게 한 거죠. 그다음에 이렇게 갑니다. 갔더니 그 베들레헴 장로들이 두려워하면서 사무엘을 영접합니다. 영접하면서 이렇게 묻죠. "평강을 위해서 오십니까?" 이렇게 묻는 거죠.
이것도 잠깐 해석해 보겠습니다. 이제 사무엘 시대는 어떻게 시작이 되냐면 사무엘상 1장, 2장, 3장을 보면 그 당시에는 말씀이 없었던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이 타락 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누구냐 그러면 엘리입니다. 그 아들들이 홉니와 비느하스 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한 날, 한시에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광, 언약궤를 뺏겨버립니다. 그때는 이 제사장이, 그러니까 인도자들이 잘못한 거죠.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요즘으로 치면 예배죠. 이걸 막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거기 보면 그런 거 나오죠. 예를 들면 갈고리로 고기 찔러다가, 아니 부위도 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거든요. 어떤 부위는 드려야 되고 어떤 부위는, 그런데 말을 안 듣고,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해야 됩니다." 그랬을 때도 이 제사장들이 갈고리로 고기 찍어다가 "제사장께서 이거 원하시거든?" 뺏어가고 이렇게 했던 거죠. 이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제 한나가 기도해서 사무엘을 낳았죠. 그리고 이제 사무엘이 태어나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이 누워서 자고 있는데 "사무엘아" 부르시죠. 사무엘이 엘리가 부르셨나? 하고 엘리한테 갑니다. 엘리가 "내가 안 불렀는데?" 그게 세 번 반복되죠. 그러니까 엘리가 압니다. 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구나. "사무엘아 다음에 또 그런 소리가 들리거든 나한테 오지 말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라고 해라." 그래서 이 사무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제 쭉 갔죠. 그래서 이제 그 후로는 사무엘이 말하면 하나님이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베들레헴 장로들이 이제 사무엘이 오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오니까, 떨면 안 되죠. 그들이 뭘 경험을 못했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경우도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대가 있었고요. 이게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설령 우리에게 고난을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책망한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책망과 고난 속에 우리를 교정하시고 우리를 마침내 축복하려고 하는 손길이다, 이렇게 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디모데후서 3장 16절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한테 뭐가 되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제일 먼저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기준을 딱 제시받으면 내가 책망받아요. 그런데 책망만 하는 게 아닙니다. '책망'하고 '교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정된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말씀이죠. 그래서 저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책망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온전한 수준에 이른 사람이 없습니다. 항상 책망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도 잘한 거지만, 주님 은혜고 하나님은 축복이지만, 여기서 머무르면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더 요구하시는가? 혹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더 기쁘게 섬길 수 있는가? 이게 이제 우리가 돼야 되죠. 베들레헴 장로들이 이 부분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 지내자." 그랬더니 드디어, 이제 사무엘상 16장의 핵심은 다윗을 왕으로 세운 장면이거든요. 이게 이제 핵심적인 내용인데, 여기서 이제 저희들이 받을 수 있는 교훈은 이겁니다. 사울 왕을 통해서, 사울 왕이 어떤 왕이냐 하면 "보통 사람보다 어깨가 하나가 더 있었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보통 사람을 세우면 사울의 어깨에 닿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덩치가 큰 거죠. 그가 이제 왕으로 뽑아놓고 보니까 그가 왕이 될 만한 사람이에요. 왕은 뭐 하는 사람이냐? 전쟁하는 사람입니다. 전쟁은 어떤 사람이 하냐? 힘센 사람이 해야 합니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앞장서서, 그러니까 사울을 보니까 이게 정말 왕으로 합당하다. 왕이 될 만하네. 벌써 키부터 다르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기술, 싸울 수 있는 기술, 역량, 왕이 됐네. 이렇게 했거든요. 그랫 폐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뭘 배워야 되죠? 사무엘이 배워야 되는 게 뭐냐? 외모 가지고 안 된답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게 하나님이 사울왕 시대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걸 아직 잘 못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을 왕으로 세우면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이제 상황을 보겠습니다. 이새가 아들이 8명 있었거든요. 이제 연락을 한 거죠. 사무엘이 이새에게 "당신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을 하나님이 왕으로 세울 것입니다. 내가 갈 테니까 그 아들 중에서 누군지 하나님 말씀 안 하셨고 현장에서 말씀하신다고 하니, 아들들 전부 식사 자리에 앉혀 놓으십시오. 그럼 내가 가서 하나님이 이 아들이다라고 하면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이렇게 한 거죠. 그러니까 이제 이새가 아들들을 싹 이렇게 앉혀놓은 거죠.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을 보고 사무엘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겠네.' 벌써 딱 보니까 왕 같아요. 외모가 벌써 왕 같아요. 위엄이 있고, 귀티가 나고, 전쟁 잘할 것 같고, 또 전략을 잘 세울 지혜도, 눈을 보니까 반짝반짝해서 영리해 보이고, 그래서 이거 왕이겠네, 했을 때 하나님이 말하십니다. "나는 외모를 보지 않는다. 나는 중심을 본다." 이거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게 이제 신약으로 오면 고린도전서 1장이죠.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씁니다. "여러분들 자신을 좀 보십시오. 여러분들 가운데 세상에서 문벌 좋은 자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영리하고, 세상에서 머리가 좋아서,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면 딱 알아듣고, 구원받고, 이게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말귀가 없어서 복음을 몇 번을 전해도 이게 뭔 소리인지를 모르고, 그런데 구원을 받은 거예요. 왜요? 세상에서 문벌 좋거나, 혹은 뭐 세상에서 능력이 있거나,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고,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은 사람들을 구원하신 거예요. 하나님 의도가 어디에 있죠? '세상에 있는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세상에서 머리가 영리하다고 성경을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 결단력이 있다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냐? 하나님이 오히려 미련한 사람을 택해서 세상에 강한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죠? 자기를 낮춰야 합니다. 하나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게 고린도의 성도들을 그렇게 구원하신 하나님 의도인 거죠.
그래서 여기서도 엘리압이 아니다. 그다음 사람 보니까, '하나님이 이쪽은 아니지만 얘는 이런 장점이 있으니까 이걸 왕으로 쓰시나?' 다 아니다. 그래서 7명 다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사무엘이 아무도 없네. 하나님은 이 가운데 왕을 세우신다고 그랬는데 하나도 없네. 그래서 다시 할 수 없이 이새에게 "아들이 전부입니까?" 그랬더니 이새가 말을 합니다. "한 명이 있긴 해요. 그런데 걔는 양치게 두었습니다." 왜요? 다윗이 왕이 됐는데, 다윗이 어떤 사람이냐? 다윗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다윗의 가족들이 얘가 왕이 될 리가 없다고 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운 겁니다. 이제 사무엘이 말했어요. "아들들 가운데 한 명을 왕으로 세울 테니까 아들들 다 데리고 오세요." 했을 때 그 말을 듣고도, 다윗의 가족들이 '그렇지만 얘는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얘는 왕이 될 수 없어.'라고 빼놓은 자를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겁니다. 사람들을 버린 돌을 하나님이 주춧돌로 삼으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평가를 뒤집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것 같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삼으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평가는 하나님의 평가와 반대일 수 있다. 내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늘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심지어는 야고보서를 보면, 야고보서에도 물론 교회라고 안 나와 있고 회당이라고 나와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야고보가 말합니다. 야고보는 구체적인 삶을 건드리는 서신서잖아요. "회당에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오고 혹은 가난한 사람이 오면 너희들이 어떻게 대하냐? 좋은 옷 입은 사람은 좋은 자리 여기 앉으세요 하고, 가난한 사람한테는 너는 서 있든지 말든지 뭐 이렇게 하지 않느냐?"라고 야고보가 책망하는 거죠. 그런데 그건 우리는 안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보고, 그래서 이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 다윗은 아무도 본인 자신까지도 왕이 될 리가 없다고 했던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세우셨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러했고, 또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가도 그러하고, 또 교회 내에서 누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가도 그렇고, 우리는 이 사람이 헌신할 것이다, 아니요. 전혀 헌신하지 않을 그 사람이 합니다. 그래서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인간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라고 하는 것을 다윗을 왕으로 세우면서 이제 가르쳐주시는 거죠.
그다음에 이 대목 하나만 보겠습니다. 이제 좀 난처한 게, 그래서 "말째 데려와라. 안 된다." 그래서 이 7명 가운데 데려와 보니까 하나님이 "얘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거죠. 그런데 12절을 보시면 데려와라, 그래서 데려옵니다.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다윗이 드디어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외모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안 보신다 그랬죠, 중심을 보신다 그랬죠.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외모 보시네. 그래서 이 외모를 어떻게 해석하냐면, 하나님이 이제 보시는 중심을 보시는데, 그러면 중심에 뭘 보시냐? 겸손한 것을 보십니다. 항상 성경이 이런 말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래서 이 사무엘상 16장 다윗에 대해서 저희들이 배우는 첫 번째 것은 '다윗은 겸손했다.' 아버지가 "야, 오늘 우리 형제 가운데 한 명이 왕이 될 거야. 그런데 너는 양 쳐." 간 겁니다. "아니, 왜 나는요? 아들들 다 오라고 했다며요? 나도 아들이잖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라." 그 말에 순종했던 사람. 그때 만약에 버텼으면, "아니 나 안 갈 거예요. 나도 지금 모처럼 고기 한번 먹어보겠는데, 그 자리에 왜, 나를 잔치자리에 왜 나를 빼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다윗의 특징이 뭐냐 하면 왕으로 기름 부은 후에도 겸손합니다. 이게 어떤 게 나오냐면 이제 왕이 되면 전임 왕이 있거든요. 지금 현재 사울은 왕이지만 실제로 폐위됐고 곧 폐위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왕입니다. 이 전임 왕과 새 왕 사이의 관계가 늘 나쁩니다. 사울은 다윗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요? 사울 왕은 어떻게 하죠? 선대합니다. 죽이려고 안 합니다. 그는 왕이 될 때도 겸손하고 왕이 된 후에도 사울을 섬깁니다. 자기가 왕이에요. 이 사람은 왕 아니에요. 그런데 참된 왕은 거짓 왕을 섬깁니다. 이게 지금 다윗에 관한 성경의 강조점입니다. 우리도 겸손해야 됩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겸손해야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계속 겸손할 수 있을까? 다윗처럼, 이게 이제 저희들이 성경에서 배워야 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외모에 대해서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다윗의 외모는 어떻게 설명이 되냐면 다윗의 중심이, 다윗의 겸손한 중심이 얼마나 겸손했으면 외모로까지 표현되었다. 이게 이 규제를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다윗의 겸손이 그의 눈빛과 그의 얼굴빛에 나타났더라. 그래서 중심이 중요하고, 그 중심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는 외모로 표현되고 나중에는 보면 이제 사울을 섬기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가 전임 왕인 사울을 위해서 수금을 타고 그의 두통을 해결하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이 사람 얼른 아파야 자기가 빨리 왕이 되죠. 이 사람 얼른 가야죠. 아픈 게 맞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하고 있는데 뭐, 그렇게 하지 않고 그가 사울을 위해서 수금을 타서 그를 상쾌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건 하나만 성경에서 좀 찾고 오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8-11).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4-5).
이제 이 대목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과 다릅니다. 성령은 일시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임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하나님이 어떤 임무를 준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그 임무가 끝나면 성령은 떠납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셨으니까, 성령이 임합니다. 사울을 폐위하면 이제 성령이 떠납니다. 왕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제 언제 떠나냐 그러면, 다윗에게 성령이 임하면,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이 임합니다. 왕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되니까 그 능력을 주시는 거죠. 그래서 다윗이 성령이 임하자 사울에게는 완전히 성령이 떠납니다. 성령이 떠나면 이제 뭐가 문제가 되냐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이 주어지지 않으니까 이제 다른 영향들이, 사단이 그를 건드릴 수도 있고, 세상이 그를 유혹할 수도 있고, 막 이제 이런 형태가 된 거죠.
그런데 두통이 나니까 신하들이 이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분별합니다. 신하들이 지혜로워서 "이게 병이 아니다." 이거 약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의사를 부를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이 문제를 도와줘야 된다. 그래서 다윗을 부릅니다. 그래서 다윗이 수금을 타니까 사라집니다. 그럼 다윗이 수금을 탔더니 왜 사라지냐 하는 건데요.
다윗이 이제 양을 치면서 그가 혼자 있을 때, 하나님과 자기하고 혼자 있을 때, 양하고만 있을 때, 그가 이제 하늘의 별들을 보고 그가 찬양합니다. 시편 19편이죠.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늘과 그 영광을 보니" 하고 그가 찬양합니다. 그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홀로 이렇게 믿음 생활을 할 때, 그때 탔던 수금이 사울의 두통을 해결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홀로 하나님과 있을 때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번에 그런 월례 집회 때 이제 그런 교제를 했는데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세 가지 신앙 활동이 나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구제가 있고, 기도가 있고, 금식이 있습니다. 구제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다음에 금식은 나와 내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를 하나님 앞에서 홀로 해야 된답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홀로 다른 사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내가 혼자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가? 그다음에 다른 사람을 도울 때, 정말 그 사람을 이렇게 물질로 도울 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이 도우라고 하셔서 돕는 것이다. 이건 하나님이 돕는 거고 내가 돕는 거 아니다. 영광은 하나님께만 가야 된다. 이렇게 구제하고 있는가? 그다음에 금식도, 금식을 하는 이유도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해야 된다. 내가 너무 즐거움에 노출되고 나 자신을 위한 삶에 노출되어서, 그런 게 습관이 돼 있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거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이렇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보통 이게 없으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환란을 겪었습니다. 아시아에서 환란을 겪었는데, 사도바울이 이 환란을 딱 분별하면서 이건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거다라고 판단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딱 결정했겠죠. "주님 가겠습니다. 이제 제 일을 마치고 주님 앞에 가겠습니다." 평안하게 그 환란을 이렇게 받아들인 거죠.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볼 때 틀림없이 데려가시는 거라고 상황을 판단했는데, 상황에서 풀려난 거예요.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이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이 같은 환란을 나에게 주셨지? 했을 때 그가 고린도후서 1장에서 두 가지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는 첫 번째, 하나님만 의뢰해라. 우리가 환란에 들어가면 이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사용하게 돼 있습니다. 이건 이렇게 한번 해결해 볼까? 혹은 이렇게 한번 기도하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거 하지 말고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사도 바울을 영적으로 단련시킨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그가 환란을 받고 그 환란을 해결받았을 때,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위로와 찬양과 그리고 그 환란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왜 이걸 경험하게 했냐? 고린도 성도들을 도우라고, 다른 사람에게 이 위로가 주어지도록 그가 먼저 환란과 위로를 경험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다시 다윗에게 쓰면 다윗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외로울 때, 아마 이제 다윗도 양을 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거예요. 나는 왜 이렇게 양만 쳐야 되나? 왜 막내로 태어나서 맨날 구질구질한 일은 다 나한테 오고,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때 이 하늘의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보면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제 이렇게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었던 이 믿음의 삶이 이제 사울을 치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것들이 사무엘상 16장에서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됐을까?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에 의해서 "너는 올 필요 없어."라고 하는, 다른 사람이 자기한테 그러면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자기 아버지, 자기 형들이 자기를 그렇게 취급했을 때에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낮아진 마음, 그리고 자기가 왕이 된 이후에도 전임 왕인 사울을 섬기는 낮아진 마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것들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이 마음, 이게 사무엘상 16장, 이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신 이유다. 이렇게 말하고 있고, 이걸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좀 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하나만 보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시겠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사도 바울을 겸손케 만든 것은 그가 자격 없는 자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방인은 사도로 구원받았습니다. 사도로, 그런데 그 사도라고 하는 높은 자리를 그가 자랑할 수가 없어요. 이건 내가 자격이 있어서 된 게 아니다. 나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교회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 이걸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가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 사도 바울이 더 많이 수고합니다. 핍박과, 환란과, 여행과, 어디를 보나 더 많이 수고합니다. 그런데 그가 기억합니다. 내가 이 수고를 감당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함께하셨기에 가능했다. 이걸 잊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먼 데까지 가게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하고, 많은 일들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계속적으로 낮아질 수 있는, 겸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뭘 하셨냐? 육체에 사단의 가시를 두신 것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사단의 공격과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그를 겸손하게 한 것이고,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의 사역이 실패로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다윗처럼, 또 사도 바울처럼, 모임 안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자기가 한 게 있다면, 한 거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하신 것이다를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마태복음 18장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고, 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도들과의 관계로 나타납니다.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족시키지 않고, 다른 성도를 어렵게 만들지 않고, 그리고 나를 어렵게 만드는 성도를 용서하는, 이 관계가 세상의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예수님이 배척된 이후에 이제 새로 만드신 이 관계, 꼭 이런 느낌이 듭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주님이 소경 눈을 뜨게 하셨어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뜨게 한 거야, 안식일에, 그러니까 소경한테 자꾸 물어봐요. "너 소경 맞아? 누가 뜨게 했는데? 어떻게 눈을 뜨게 했는데? 자꾸 물어보죠. 그러니까 소경이 답하고, 그리고 소경 말 듣고 안 받아들이고 부모한테 물어보죠. 그리고는 다시 소경한테 또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소경이 두 번째 물으니까 이렇게 대답합니다. "혹시 제자가 되고 싶으세요?" 조롱하는 거죠. 화가 나서 "네가 죄 가운데 나서 어디 우리를 가르치려고 그래?!" 그래서 출교시킵니다. 회당에서 출교시킵니다. 그리고 출교됐을 때 주님이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인자를 믿느냐?" 출교 되자, 그래서 그쪽 관계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자, 이제 주님이 인자를 믿느냐? 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모임 안에 들어와서 이 관계는 이제 소중한 것입니다.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주인인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지역 모임을 세우는 데, 우리의 삶을 드리고, 그렇게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낮아진 마음이다를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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