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다윗

다윗 3 : 사울의 시기와 요나단의 사랑

박이레 2026. 1. 22. 21:43

< 다윗 3 : 사울의 시기와 요나단의 사랑 > 한봉래 형제님 / 26년 1월 18일 일요일

이 시간은 제가 다윗의 생애를 쭉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사무엘상 18장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번 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바 되었더라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것이 가하니라 하라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의 귀에 고하매 다윗이 가로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경한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로라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여차여차히 말하더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것을 좋게 여기므로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삼상 18:1-30).

아멘, 다윗은 16장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17장에 골리앗을 죽입니다. 그리고 18장은 이렇게 됩니다. 17장에서 다윗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모독한 골리앗과 싸웁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자, 이제 그 반응입니다.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단'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게 '사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이 믿음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동일하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나단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다윗이 행하자, 육신적인 구원받지 못한 사울이 다윗을 미워합니다. 두 가지 반응을 이제 보겠습니다.

첫 번째,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1절에 보시면 "요나단이 자기 생명같이" 사랑합니다. 이게 자기 생명입니다. 다윗이 '나'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뭡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거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의 축복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사람, 이게 생명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요나단은 성도님들이 아시는 대로 14장을 찾아보면 14장에서 요나단이 어떻게 행동하냐면 이제 블레셋과 싸움을 하는데, 사울은 늘 안 하죠. 사울은 전쟁 안 합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부하에게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그래서 너하고 나하고 둘이지만, 저기 블레셋 군대가 저렇게 진치고 있지만, 우리 둘이 저 많은 블레셋 군대를 칠 수 있다." 그러니까 병기 든 자가 "마음에 있는 대로 하십시오." 그가 이제 하나님의 인도를 약간 받아봅니다. 그리고 가서 블레셋 부대를 치고, 이게 이제 블레셋과 전쟁이 시작된 거죠. 물론 이제 사울이 이상하게 훼방을 놔서 이렇게 됐지만, 이렇게 그래서 요나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윗과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독할 때, 하나님을 모독할 때, 다윗은 확신했습니다. 골리앗은 죽는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 곰과 사자가 양을 칠 때 오면 그가 곰과 사자를 싸워서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도 골리앗의 위협에서 하나님이 그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합니다. 자기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행위로 드러납니다. 그가 어떻게 하냐면 자기 옷을 벗어서 줍니다. 이건 이제 이제 해석을 해야 되는데요. 이 옷은 아마도 왕복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왕입니다. 요나단은 왕자입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그다음 왕이 돼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사울이 불순종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을 잘못했거든요. 그래서 "네 나라를 떼어 네 이웃 내 마음에 합한 자에게 주었다." 이렇게 지금 이미 15장에서 선언이 돼 있는 거죠. 이걸 배경으로 하고 요나단은 자기가 왕이 안 될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 왕자의 왕복을 다윗에게 넘겨줍니다. 이제 그 옷을 이렇게 벗어서 그 다음에게 주는 것은, 예를 들면 아론이 죽을 때 그 제사장 의복을 그 아들이 이렇게 이어받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 때 자기 겉옷을 던집니다. 그래서 옷은 그 사람의 직분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왕자입니다. 그다음 왕입니다. 그 왕 자리를 다윗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이걸 이제 사울이 되게 싫어하죠. "이 바보 멍청이야. 네가 왕이 돼야지, 왜!"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래서 사랑하고, 이 사랑이 행위로 나타나고, 그다음에 뭘로 나타나냐면 '언약'을 맺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약속을 합니다. 언약을 맺는 것은 예를 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습니다. 창세기 15장에 이제 짐승을 짐승을 잡아서 가운데를 쪼개고 그 쪼갠 사이에 이렇게 주님 홀로 가시죠. 여기도 요나단과 다윗이 서로 약속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예를 들면 결혼하죠. 결혼할 때 약속합니다. 가난할 때나, 병들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피를 근거로 하나님이 우리하고 약속하십니다. 새로운 언약입니다. 신약입니다. "내가 너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 내가 법을 너희 마음판에 새기겠다." 이런 약속을 하셨죠. 우리도 만약에 어떤 어떤 성도가 정말로 믿음의 성도고, 나하고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서로 약속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할 때마다 나한테 말씀으로 권면해 달라. 그 권면을 내가 무조건 받아들이겠다. 당신이 권면하면 내가 동의되지 않을 때도 받아들이겠다. 내가 잘못할 때마다 권면해 달라. 이렇게 약속할 수 있는 거죠. 내가 잘할 때마다 격려해 달라. 이렇게 언약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사랑하고, 옷을 벗어주고, 그리고 언약합니다. 두사람이 이 언약을 지킵니다. 어떻게 지키냐면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자의 자리에 앉아 먹게 합니다. 이게 안 되는 거죠. 보통 이제 왕조가 바뀌면, 예를 들면 이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서면 고려 왕족들을 다 죽입니다. 사울 가문이 망하고 다윗 가문이 왕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 가문의 손자 므비보셋을 다윗이 왕자의 상에서 먹게 합니다.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제 기브온 사람들이 막 저주를 해서 기근이 생겼어요. 기근이 생기니까 왜 그런가 그랬더니,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기도한 이유입니다. 뭐냐 그랬더니 자기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여호수아 때부터 약속을 했는데 사울 왕이 죽였다고,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사울 왕의 후손 중에서 몇 명을 우리에게 내어 죽여달라고, 그때 요나단의 가족들은 뺍니다. 약속을 지킵니다. 요나단도 약속을 지킵니다. 다윗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사울 왕에게 말합니다. 사울 왕이 화가 나서 요나단도 창으로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 편에 섰기에, 그래서 이제 두 사람이 약속을 한 거죠. 이렇게 보면 자기가 사랑하고, 옷을 벗어주고, 그리고 언약합니다.

옷을 벗어준 것에 대해서 하나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다윗이 요나단이 옷을 벗어줄 때 다윗이 받습니다. 나 같으면 안 이거 안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 사울이 다윗에게 옷을 줍니다. 무슨 옷이냐, 갑옷을 줍니다. 골리앗과 싸우라고, 다윗이 입어봅니다. 입어보고 불편하니까 "안 되겠어요." 하고 벗어버립니다. 이건 영적으로는 사울이 의지하는 것, '사울의 방법론'입니다. 적과 싸우는 방법이죠. 자기를 방어하는 것 하고 다윗이 적과 싸워서 자신을 보호하는 '원리'가 다릅니다. 사울은 무기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 자신을 지키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안 맞는 거예요. 영적으로 안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옷을 줬어요. 이것은 받습니다. 왜요? 같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왕자가 되겠다는 게 아닙니다. 같은 생명을 가진 믿음으로 화합할 수 있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합니다. 그런데 사실 보면 놀라운 것은, 다윗이 그와 같이 승리함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그다음에 사실은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물론 공식적으로 받은 건 아니죠. 사무엘이 이제 이렇게 한 거지만, 그래서 미래의 왕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 다윗이 등장하는 것을 가장 시기해야 되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보면 요나단입니다. 자기는 이제 물러나야 합니다. 자기는 왕이 못 됩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이게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그런데 사울이 이제 다윗을 시기합니다.
이유가 뭐냐 그러면 첫 번째, 보통 이제 전쟁에서 승리하면 옛날 고대 같으면 승리한 장군이 오고 이제 축하 퍼레이드를 하고 이러는 거잖아요. 이런 게 고린도후서 같은 데 영적으로 이렇게 여러 가지 설명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어떻게 했냐면 여자들이 나와가지고 찬양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15장에서 홍해를 건너자 미리암이 찬양합니다. 또 드보라하고 바락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니까 드보라가 찬양합니다. 입다는 좀 슬픈 이야기지만,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니까 누가 나오냐면 딸이 나옵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이 기쁨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이제 여자들이 그 몫을 맡아서 이 놀라운 승리를 이야기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는 이제 찬양하는 건 좋지요. 그런데 내용이 잘못돼 있습니다. 뭐라고 돼 있냐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이게 뭐가 잘못됐냐 그러면 우선 이게 '비교'했다는 건데요. 이 비교에 대해서는 물론 비교가 좋은 건 아니죠. 그래서 성도들 사이에도 비교하면 안 좋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 사이에도 비교하는 게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이제 로마서 16장을 성도님들이 나중에 가보시면, 로마서 16장을 보통 상급을 말한다라고 돼 있거든요. 사도 바울이 로마인은 성도들한테 편지를 쓰면서 "누구는 너무 수고했고", "누구는 뭐 했고"라고 해서 이렇게 성도들을 쭉 이야기합니다. 거기에 보면 비교합니다. 예를 하나 볼까요? 로마서 16장 한번 가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 16:12).

그래서 두루배나와 두루보사에 대해서는 '수고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다음입니다.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그다음 버시에 대해서는 표현을 할 때 약간 더 들어간 게 있습니다. '많이 수고하고' 그다음에 '내가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이렇게 이제 표현 형용사가 더 들어가죠. 이건 이제 비교라고 볼 수 있는 거죠. 하여간 이런 것들을 비교할 때, 이제 사실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지만 조심해야 되죠.
그런데 다시 오겠습니다. 사무엘상 18장에서 제일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는 표현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이 전쟁의 승리를 누구한테 돌리고 있는 거죠?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울이 이방 족속과, 사울이 기름부음 받고 사울 왕이 그다음에 전쟁 가죠. 그리고 승리하죠. 그리고 이번에는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죠. 그런데 사울도 아무것도 아니고, 다윗도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승리인 거죠. 그래서 사울과 다윗을 비교할 수는 있지만, 전쟁에서 이긴 규모가 다르니까 비교할 수도 있지만, 그 비교도 조심해야 되고, 그다음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걸로 인해서 부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자매님들이 모임 안에서 잘 영적으로 행동하셔야 됩니다. 사울이 이때부터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냐면 이제 나라를, 그가 왕이 되는 것 밖에 더 가져갈 게 뭐 있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이제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다윗이 왕인 나라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거 한번 보겠습니다. 사울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영적이지 않은 거죠. 구원받아도 육신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구원받지 않아서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이거 다윗하고 비교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훗날 압살롬이 반역합니다. 그래서 쫓겨갑니다. 도망가요. 그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따라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죠? 제사장들에게 "돌아가라. 예루살렘에 도로 언약해 갖고 가라. 만약 하나님이 나를 이제 됐다라고 하면 나는 왕에서 물러난다." 그는 왕이라고 하는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내가 다시 왕으로 복귀할 거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언약궤는 예루살렘 성에 가져가라." 이게 다윗의 태도입니다. 이게 영적인 사람의 태도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을 의지합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 선물, 그로 인한 혜택, 이걸 늘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 앞에서 보는 거죠.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시기해서 네 가지를 합니다. 첫 번째 시도입니다. 창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다윗을 왕궁에 두지 않고 전쟁터로 보냅니다. 천부장으로 세워 전쟁터로 보냅니다. 원래 보시면 18장 5절에 보시면 '군대 장관'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계급을 격하시켜서 13절에 '천부장'을 삼습니다. 그리고 그전에 16장 21절을 보시면 '사울의 병기 든 자'를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왕을 바로 옆에서, 근거리에서 지키는 사람으로 삼은 겁니다. 그리고 군대 장관을 삼은 거죠. 그런데 계급을 강등시켜서 천부장을 시킨 것입니다. 이게 이제 두 번째 조치고요. 창으로 죽이려고 하고, 그다음에 강등해서 전투 지역으로 쫓아내서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17절을 보시면 원래는 어떻게 돼 있냐면 이제 골리앗과 전쟁을 아무도 하려고 안 하니까 상을 내걸죠. 이제 상금을 걸고, 그다음에 사위를 삼겠다, 하고 그다음에 그 집안은 세금 면제한다. 이렇게 했죠. 그러니까 사위로 삼아야 합니다. 약속대로, 왕이 한 거잖아요. 약속한 거잖아요. 그래서 누구를 줘야 되냐면 맏딸 메랍을 줘야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죠? 19절에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이게 이제 줄 때가 된 거예요.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바 되었더라" 결혼시켜준다고 그랬다가 다른 사람을 사위로 삼은 거예요. 만약에 우리 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결혼시켜줄게." 해놓고 안 하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윗이 거기 그냥 있습니다. 그래서 네 가지를 했는데요. 창으로 죽이려고 하고, 그다음에 강등시켜 전쟁터로 보내고, 그다음에 약속을 어기고, 그에게 인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모독적인 상처를 주고, 그다음에 네 번째,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베어오라, 라고 말합니다. 이 네 가지를 사울이 다윗을 시기해서 하는 것입니다.
시기심에 대해서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누가 시기하냐 그러면 고라 자손이 시기합니다. 고라 자손이 반역한 이유, '시기심'입니다. '모세', 저나 내나 똑같은데 왜 저만 제사장이고 나는 아니야? 나는 왜 레위야? 이게 고라 반역의 이유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뭐죠? '시기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말은 안 듣고 주님을 따르는 거예요.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이 예수님을 쫓는도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진리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고 계시잖아요. 바리새인들은요? 제사장들은요? 자기 잇속만 챙기고, 자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고, 과부의 재산을 삼키고,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은 출교시키겠다고 권력 행사를 하고, 그러니까 백성들이 안 좋아하죠. 그러니까 시기심입니다. 이게 이제 성경에서는 계속적으로 이 시기심이 문제를 일으켜 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다윗이 지혜롭게 행합니다. 하나, 하나씩 보시겠습니다.
11절 보시면, 창을 던졌는데 다윗이 '두 번' 피합니다. 이건 창을 한 번 던지고, 또 던졌더니 그다음에 또 피하고, 한 건데요.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창으로 던졌어요. 한 번 해서 피했습니다. 이게 뭐, 참 주님 은혜죠. 주님의 섭리적인 보호하심으로 지금 창이 빗나간 거죠. 그런데 왜 거기 또 있었을까요? 한 번 창 던지면 그다음 나가야, 어떻게 딴 데로 가든지 뭐 해야 되잖아요. 살 길을 찾아야죠. 왕이 죽이려고 하는데 자기가 뭐 함께 싸워서 대항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이잖아요. 왜 거기 또 있었을까요? 항상 다윗은 그 마음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나에게 창을 던진 것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에게 악신이 들어서 나를 잘못해서 한 거다라고 순전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악한 의도를 자기가 선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게 다윗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다윗이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했을 때, 지혜가 뭔가? 지혜는 분명하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 거죠. 그가 영리했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그가 머리가 좋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단순한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단 마음.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창에 대해서 한 번만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18장에서 보면 다윗의 손에는 뭐가 달려 있냐? 수금이 달려 있습니다. 수금을 킵니다. 사울의 두통을 해결해 주는 수금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악기를 그는 가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창은 자기의 왕 지위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볼 수 있냐면, 나중에 보면 다윗이 아비새하고 같이 "나랑 같이 사울의 군대에 가보자." 그래서 사울의 적진에 들어갑니다. 그랬더니 사울 옆에 뭐가 있었죠? 창과 물통이 있었습니다. 그 창은 사울의 왕위를 보호해 주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왕 자리는 창이 보호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아주 이걸 정밀하게 표현하는데요. 사울이 이 창을 언제 또 들고 있냐면 그가 죽을 때 들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장에 가시면 사울이 죽을 때 창을 의지하여 있는 거에요. 성경은 말합니다. 이 창은 무슨 뜻이냐? 사울이 생각할 때 자기의 왕위를 지키는 무기입니다. 방법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이 그를, 왕위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다음에 12절에 잠깐 보겠습니다. 사울이 왕이고, 창을 가지고 자기가 시기하고 질투하고, 훗날 요나단 대신 왕이 될 것으로 생각되는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피합니다. 누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그런데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됩니까? 지금 창을 가지고 있는 사울이 창을 피하는 다윗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는 이유가 뭐라고 돼 있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성경에 신약으로 오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헤롯 안디바 왕인데요. 이 헤롯이 나중에 침례 요한을 죽입니다. 침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를 비난합니다. "결혼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혼하고, 재혼하고, 안 된다." 헤롯 안디바가 침례 요한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헤롯이 침례 요한을 두려워하니라." 누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죽일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왕이 아무 보호 장치가 없는 침례 요한을 두려워합니다. 왜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처럼 강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무서운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실적인 힘을 가진 사람도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구절을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이제 믿는 자들이 모이죠. 온 교회가, 거기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있고, 그다음에 아직 영접되지 않은 자들이 있습니다. 무식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지역 모임에서 말씀이 교제될 때, 책망과 이런 것들이 있을 때, 권면이 있을 때, 그들이 보고 어떻게 말하죠? 모임 안으로 들어오길 원합니다. 원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이리 와야 된다. 그래서 저희들이 그와 같은 하나님 의지 앞에서 살게 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25절 한번 보시죠. 사울이 참 나쁘죠.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그것도 자기 손이 아니고 적군의 손을 빌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사위를 죽이는 건데요. 사울이 말하기를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해라. 그래서 이제 다윗에게 말을 넣는 거죠.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은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그러니까 이제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여서 그 증거로 양피를 베와라, 이렇게 한 거죠. 이것은 다윗을 죽이기 위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의도를 겉으로는 아주 다른 선한 의도처럼, 사위를 삼기를 원하고 이게 사위가 되기 위해서 줘야 되는, 신랑이 신부 집에 이렇게 결혼할 때 이렇게 갖다 드리는 예물 같은 걸로 하고 말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이것 자체도 나쁘지만 여기서 제가 단어 하나를 보겠습니다. 그는 블레셋을 뭐라고 표현하냐? '왕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블레셋이 사울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사울의 원수 아닙니다. 블레셋의 적은, 골리앗은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영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늘 생각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입니다. 개인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원수'라고 말합니다. 19장 17절을 보시면 미갈과 다윗이 결혼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데, 그래도 미갈이 아내니까 다윗을 도망가게 합니다. 그랬을 때 다윗에 대해서 사울이 뭐라고 말하는가 보십시오.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삼상 19:17).

사울 왕이 미갈 자기 딸에게, 결혼한 딸에게 "너는 어찌하여 나를 속여 다윗을 피하게 했느냐?" 그런데 다윗을 뭐라고 말하죠? '내 대적', 그는 사람을 사적으로 생각합니다. 나하고 사이가 나쁘면 그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지 관계없이 자기 원수입니다. 그는 자기 중심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삽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28장 16절, 사울은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을 안 하니까 그가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불러 올립니다. 물론 무당이 불러 올린 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내보내신 거죠. 그랬을 때 사무엘이 놀랍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계속 이렇게 사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하고 관계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관계를 계속 무시해 오자,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삼상 28:16).

그는 블레셋을 자기 원수라고 하고, 다윗도 자기 원수라고 하더니, 이제 하나님이 그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까지, 그래서 사무엘이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네 대적이 되셨거늘" 그다음에 다시 사무엘상 18장으로 오셔서요. 마지막 절 30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그 이름이" 다윗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심히 귀중이 되니라." 다윗을 시기한 사울이 네 가지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 어떻게 되냐? 다윗의 이름이 귀중한 이름이 됩니다.
이거 전번에 저희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 다시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멸시하리라." 저희들이 이 구절 할 때마다 한 이야기,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어떤 영국 달리기 선수가 올림픽에 나갔는데, 그때는 옛날이니까 올림픽이 이제 좀 허술했겠지요. 자기가 200m 달리기를 해야 되는데, 그 달리기 시합이 주일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나는 주일에는 안 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에 있는 사람들이 다 욕을 한 거예요. "이게, 국가대표로 올림픽 나가서 주일 경기라고 안 하는 게 어디 있냐?!" 그런데 "나는 그거 못한다." 그리고 주일 아닌 경기를 그가 택합니다. 주일 아닌 경기를 해서 400미터인가를 나갑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 생각에 200m나 400미터나 똑같은 것 같아도 그게 아니고 각각 다른가 봐요. 그런데 그가 400m에서 우승합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이 그렇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 합니다.
다윗이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은 비결이 뭐죠? 그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도 그를 멸시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아십니다. 내가 중심에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아시기에 주님이 나를 존중히 여기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해서,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에 대해서, 사무엘상 18장에 보면 사랑이 나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합니다. 잠깐 보겠습니다. 18장 1절 보시면 "요나단이 사랑하니라" 돼 있죠. 3절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그다음에 그래서 이제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이 있고요. 그다음에 도 사울도 사랑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삼상 16:21).

그러니까 사울도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크게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요나단의 사랑, 사울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미갈도 다윗을 사랑합니다. 이건 18장에 나오죠.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삼상 18:20).

미갈이 다윗을 사랑해서 결혼합니다. 그다음에 16절 보시죠.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래서 여기서 네 가지 사랑이 나옵니다. '요나단의 사랑', '사울의 사랑', '미갈의 사랑', '이스라엘 백성의 사랑'이 나옵니다.
그중에서 진짜는 '요나단의 사랑'뿐입니다. 요나단의 사랑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랑'입니다. 이건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사랑에는 기꺼이 '희생'이 있습니다. 희생합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왕자의 자리를 줍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왜요? 자기가 악신이 들러서 그냥 괴로웠거든요. 그런데 다윗이 와서 수금을 타니까 고통이 사라진 거에요. 그래서 사랑한 것입니다. 나에게 이득을 주기 때문에 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손해가 되면 시기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게 사울의 사랑입니다. 이런 경우가 세상에 많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합니다. 왜 사랑하죠? 자기한테 이득이 되니까, 자기한테 기쁨과 만족을 주었으니까, 그러던 사람이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면 미워합니다.
그다음에 미갈의 사랑입니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왜요? 젊은 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내고, 골리앗을 죽이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미갈과 다윗이 갈라서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디서죠?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이렇게 이끌면서 춤을 춘 거예요. 미갈이 멸시합니다. '왕이 돼서, 그렇게 천민처럼 천박한 춤을 추다니?' 다윗이 책망합니다. 미갈은 영적이지 않습니다.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는, 자기는 무시될지라도, 사람들이 보기에 "왕이 저러시면 체면이 안 서지. 왕이 왜 저러시나?"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왕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는 은혜 받은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죠. 미갈에게 말하죠. "내가 비록 이렇게 천박한 행동을 했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천박하다고 말할지라도, 당신은 나를 존경해야 된다." 그 이후로 미갈이 자녀를 갖지 못합니다. 이게 미갈의 사랑입니다.
그다음에 백성들이 사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왜요? 블레셋 노예가 될 뻔했잖아요. 다윗이 구원해줬죠. 그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백성들의 사랑은 언제 끝나냐 그러면, 압살롬이 와서 백성들의 사랑을 훔칩니다. 압살롬이 와서 반역하려고 제 백성들의 지지가 있어야 되니까, 다윗 왕에게 이제 뭐 말할 게 있어서 가려는 사람들이 길을 줄 서 있으니까, 압살롬이 거기 가서 "무슨 일로 왕한테 갑니까?" "내가 이런 일이 있는데, 이건 내가 억울하다. 왕이 내 편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압살롬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왕이라면 당신 편을 들어줄 텐데, 다윗은 어떨지 모르겠다." 백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다가버립니다. 나머지 사랑은 사랑 아닙니다.
자기에게 이득이 될 때만, 자기에게 고통이 되면 버리는 사랑, 영적이지 않은 사랑,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낮아질지라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  이 사랑이 아니고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끝까지, 변함없이, 왜냐하면 동일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어디서 나왔죠? 다윗이 자기와 동일하게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입증해 내는 인생을 살자고 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이 살아계시거니와 지금 하나님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이 블레셋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데 내 생애를 건다. 이걸 다윗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만이 갖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게 성도들 간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요한일서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요? 우리 죄를 위해서 아들을 대신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이 사랑을 알고, 이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어 이제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하는 성도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그 형제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뭐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성도들 간의 사랑은 뭐죠? 물론 성도가 어려움이 있는데 말로만 뭐 배부르라,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렇지만 이 성도 간의 사랑은 뭐냐 그러면, 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지키는 이 일을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주는 사랑을 성도 간에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8장을 통해서 요나단과 다윗의 사랑, 그것이 우리들 지역 모임 가운데 동일하게 역사하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살았을 때 그것을 동일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육이 있기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저 성도가 나보다 더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그래서 주님이 축복하시고, 성도들이 기뻐하는 일을 볼 때 내 마음속에 시기심이 생깁니다.
그때 우리가 사울처럼 가면 안 됩니다. 사울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항상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가?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고 있는가? 다시요,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가? 교회가 세워지는가? 그리고 나는 낮아져야 되는가, 이게 우리들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일들이 저희들의 구체적인 모임 생활에서 나타나서 저희들 가운데 주님과 말씀이 임재하고 있음을 알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