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일서 3장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 / 26년 5월 1일 금요일
- 강성찬 형제님 사회 : 저희가 이제 내용이 연결되는 2장 28절부터 읽도록 하겠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8-29).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1-24).
예, 이제 요한일서 3장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제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 우리 아버지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고, 또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며, 또 이제 진리에 이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분을 우리가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므로, 또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들도 동일하게 '의'와 또 '사랑'과 이제 '진리'가 나타납니다.
그 특징들이 이제 2장에서도 조금씩이나마 계속 언급이 되었습니다. 정말 거듭난 자들이 이제 의를 행하고, 또 형제를 사랑하고, 진리를 아는 것으로 2장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또 3장에서 다시 한 번 이제 그러한 내용들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단지 이제 반복이 아니라, 그러한 의와 또 사랑과 진리에 대해서 더 풍성하게 더 확장돼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선 이제 첫 번째 이제 '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이제 3장, 우리가 지금 시간 범위가 3장 1절부터이긴 한데, 이제 그 앞에 이제 내용부터 해서 2장 28절부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2장 28절부터 3장 10절까지가 이제 '의의 특징'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10절에 보면, 이제 의를 이제 다루고 있지만 또한 '사랑'이 같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 이제 '의'와 '사랑'이 동시에 언급이 됩니다. 그러면서 11절부터 '사랑'에 대해서 이제 언급이 됩니다.
사실 이 요한은 이 서신서를 쓸 때에 이제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또 연결되면서 우리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모든 의와 사랑과 진리의 성품은 한 분 하나님께 있는 성품이고, 그것이 딱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이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또한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10절까지는 이제 '의'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고요. 그리고 11절부터는 '사랑'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11절부터 18절까지 사랑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18절에서는 이제 '사랑'이 나오는데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또한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래서 또 이제 '진실', 사실 이 진실이라는 게 이제 '진리'와 이 같은 단어입니다. 이제 사랑과 진리를 여기서 연결시키고 있고, 그리고 이제 19절부터는 진리에 대해서 또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이제 3장 이제 마지막 24절까지 나오는데요. 이제 사실 이 진리에 대한 내용들이 이제 3장 24절에서 딱 끝나는 것은 아니고, 이제 그 이후에 이어서 이제 4장 부분에도 또 계속 이제 연결되어 가면서 그런 내용들이 진행되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제 3장 24절까지 나와 있는 내용들을 함께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의'와 '사랑'과 '진리'를 특징으로 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 3장에서는 또 그 반대되는 '마귀의 자녀들'도 언급이 됩니다. 그 마귀의 자녀는 이제 반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에 반대되는 '죄'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또한 사랑에 반대되는 '미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제 진리에 반대되는 이제 '거짓'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정 사이에 대립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이제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대립은 굉장히 오래된 대립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냥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대립이 아니라 정말 이제 인류의 역사부터 시작한 오래된 그런 대립임을, 우리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이제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또 이 마귀의 자녀들은 미워하고, 또 알지 못하고, 그리고 이제 계속적으로 이제 여러 가지 반대를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이러한 이제 상황 가운데서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 격려하고, 이제 그런 위험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고, 또 여러 가지 따뜻한 말로써 그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3장에 보면, 이 하나님의 가정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여러 가지 '호칭들'이 나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이제 3장 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 이제 21절에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이렇게 나와 있는데요. 참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특별히 여기서는 이제 하나님께 이제 사랑을 받은, 그 '놀라운 특권을 받은 자들', 이제 이것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장 2절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런 특권, 또 21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 담대함을 누리는" 그런 특권, 이제 그런 것들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이제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이제 7절에 "자녀들아"라고 되어 있고요. 그리고 18절에 또 "자녀들아"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것도 이제 가정 안에서 부르는 그런 표현입니다. 이제 사도는 그 가정에 연로한 그런 연장자로서, 또 마치 아버지와 같이 그 자녀들을 돌보는 사랑의 마음으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라는 표현은 특별히 이제 3장에서는 그들이 어려움 가운데, 또 위험 가운데 있을 때에 그것을 이제 미리 경고하는, 권면하는 그런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18절에서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리로 사랑하자." 이런 부모로서 자녀에게 하는, 그 하나님의 가정에 전체 자녀에게 하는 그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형제들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13절에 "형제들아" 이렇게 되어 있는데, 참 이런 표현은 사랑을 베푸는 대상으로서 세상은 그 형제들에 대해서 미워하지만, 참 하나님의 가정 안에 있는 형제들은 '서로 사랑하는 대상으로서' 이 호칭을 부르고 있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이 3장에서 또 두드러지는 것이 이 '두 가정'의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에 대해서 이제 우리는 쉽게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이제 "안다"라고 여러 가지 여러 번에 걸쳐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도, 우리가 1장에서도, 2장에서도, "안다"라는 표현이 나왔는데, 교제가 나오겠지만 이 "안다"라는 표현이 또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직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때때로는 이제 '보다'라는 단어로도 사용이 됩니다. 우리가 이제 딱 보면 바로 아는 것처럼, 이 '안다'라는 직관적으로 안다라는 단어, '보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이 단어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제 아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또한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런 것도 여기 이제 사용이 되는데요. 이 두 가지 모두 단어가 사용이 되면서, 이제 분명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그걸 안다는 것, 본능적으로 알 뿐만 아니라 또 경험적으로도 안다는 것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고, 누가 마귀의 자녀고, 이것을 알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의이고, 어떤 것이 죄인지도, 우리가 안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29절에 보면 이제 '의로움'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무엇이 의로운지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또 사랑에 대해서도 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진리와 관련돼서도 우리가 아는 것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자녀의 중요한 특징인, '의로운 것', 또 '사랑'에 대해서, 또 '진리'에 대해서, 또 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는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이제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아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서 소망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2절에 보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 아는 것", 주님께서 공중에 임하실 때에 우리가 그분을 보고 그분처럼 변화돼서 그와 같을 줄 아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제 '소망'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그 '아는 것'이 또한 의를 행하는 데에 '동기'가 되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5절에 이 땅에 오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때에 그것을 우리가 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아는 가운데서 또한 의의 행동을 하게 하는 그 힘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때, 그것을 견디고,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그것을 인내하는 또 힘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6절에는 "사랑을 알고" 우리가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또한 사랑을 하게 되는 그런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 가지 것들이 우리가 이제 본능적으로 이 새 생명 가운데서 아는 것이 있고, 또 우리의 신앙의 삶 가운데서 알아가는 것들이 있고, 이러한 것들이 이제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의를 행하게 하고, 또 소망 가운데서 또 인내하고, 또 더욱 사랑하게 하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이제 제가 앞에 세 부분으로 나눠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것을 이제 조금 더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고 이제 그 소 단락별로 교제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선 이제 '의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우선 2장 28절부터 3장 3절까지, 여기서는 이제 '의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부터 6절까지, 여기서는 '죄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의가 무엇인가 보면, 이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제 '그리스도'가 기준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죄가 무엇인가를 보게 될 때는 또한 그것도 이제 그리스도가 기준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그것을 순종하는 것이 이제 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어긋나는 것, 이제 그게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의로운 것, 또 죄, 모두 이제 그리스도가 이제 기준인 것을 보게 되고요.
그리고 7절부터 이제 10절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는 의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자녀는 죄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차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이제 "미혹되지 말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러한 것들이 이 앞부분, 2장 28절부터 3장 이제 1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의가 무엇인가? 죄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자녀들은 의를 행하고, 마귀의 자녀는 죄를 행하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2. 두 번째 이제 '사랑' 부분에 대해서 보게 될 때에 이제 11절부터 12절, 단 두 구절인데요. 이제 여기서는 이제 앞에 의로움을 말하다가 여기서 이제 사랑을 언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이 두 구절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의로움이라는 것은 이제 사랑과 같이 간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의로움이 사랑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제 그것을 이 두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반대로 죄와 믿음은 또 같이 간다는 겁니다. 그게 이제 아벨과 가인의 경우에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죄하고 미움은 꼭 같이 간다는 겁니다.
이제 사랑의 두 번째 부분, 13절부터 이제 15절, 이 세 구절에서는 이제 여기서는 '미움과 영생은 같이 갈 수 없다.' 를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이제 '의로움과 사랑은 항상 같이 간다.' 했는데,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미워하는 것과 영생은 같이 갈 수 없다. 그 사랑의 반대인 이제 미움, 그 영생은 영생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성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영생을 가지고 있는 자만 사랑을 할 수 있음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로 이제 사랑을 하지 않는 미워하는 자는 결코 그가 영생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16절부터 18절에서는 "행함과 진리로 사랑하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제 행하고, 그리고 또 진리 가운데서 사랑하자, 이것을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랑을 행하셨는지,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해야 되는지, 이제 그것을 16절부터 18절까지 말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이제 마지막 '진리' 부분입니다. 이 진리 부분은 이제 19절부터 24절인데요. 진리 부분은 이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제 19절부터 21절, 19절부터 21절에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이제 각 구절마다 나옵니다. 이제 19절에 "마음", 20절에 "우리 마음이", 21절에 "우리 마음", 그래서 이 마음과 관련돼서 우리가 사랑하고, 진리 가운데서 사랑하고, 이게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겠습니다. 그리고 22절부터 24절은 이제 "계명"이 나옵니다. 여기도 이제 각 구절마다 22절에도 "그의 계명", 23절에도 "그의 계명", 24절에도 "그의 계명"이 나옵니다. 이제 계명이 각 구절마다 나오는데요. 여기서 또한 이 계명이 또한 우리가 진리 가운데서 사랑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와가지고요. 이 성경 읽기 범위가 이제 3장으로만 되어 있어서 2장 28절 29절은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3장 1절부터 이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2장 28절부터 이제 3장 3절까지는 '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28절, 29절을 같이 이야기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제 3장에 1절부터 3절은 약간 '삽입절' 같은 이제 그런 부분입니다. 마지막 2장 29절 "이제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그에게서 났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게 이 서신서의 첫 번째로 '났다'라는 표현이 사용된 부분인데요. 그래서 이게 이제 '하나님의 자녀'하고 연결되는 것입니다. 29절에 그에게서 났다라는 것을 이야기한 다음에, 이제 3장 1절부터 3절에서는 갑자기 사도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이제 '보라'라고 말하면서 그 특별한 사랑에 대해서 이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삽입절이긴 하지만 이제 전혀 주제랑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게, 이 1절부터 3절까지가 우리가 그 의를 행하는 원동력, 그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삽입절을 빼고 보면 이제 29절에 중간부에 "의를 행하는 자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의를 행하는 자'에 대해서 나와 있고, 그리고 삽입절을 건너뛰고, 4절을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이게 대조되는 두 개의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앞에서는 의를 행한다, 4절에 처음에는 죄를 짓는다. 이 죄를 짓는다는 게 사실 이제 우리 말은 약간 표현이 다르지만, "죄를 행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를 행하는 것, 이제 죄를 행하는 것, 이 두 개를 대조해서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의를 행하는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이제 1절부터 3절까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러면 그 의가 뭔가, 의로운 게 뭔가, 라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사실 이제 이 부분이 중요하게 요한일서 3장에서 이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걸 쭉 살펴보면 정말 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의로운 게 뭔가를 볼 텐데요.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일이다.' 이제 그런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9절에 '의에 대해서'는 특별히 '정관사'를 넣어서 "그 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특별한 의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28절에 보면 그 의에 대해서 판단하시는 분이 '주님'인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평가할 때, 28절에 보면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라고 되어 있는데, 그 안에 거하는 것이 뭔가를 또 생각하려면, 27절도 생각을 해봐야 되는데요. 27절 후반부에 보면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께서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간단히 말하자면, 성령께서 알려주신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특별히 그 거하는 것의 특징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주께서 판단하실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의가 뭔가를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것,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 이제 그런 것들이 이제 의로움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1절부터 3절을 살펴볼 텐데요. 우선 그 의를 행하는 '동기'에 대해서 1절에서는 동기를 세 가지를 말하게 됩니다. 이제 각 구절마다 이제 하나씩을 말을 하고 있는데, 1절에서는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게 이 의를 행하는 우리의 동기가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 의의 '신분', 그것이 우리가 의를 행하는 첫 번째 동기가 됩니다.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그리고 그때 우리는 그분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제 그게 우리의 의의 동기가 됩니다. 그분의 다시 오심,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과 같이 나타나는 것, 그게 우리의 의로운 의를 행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 그리고 우리가 놀랍게 변화되는 것,' 이게 이게 우리의 의를 행하는 두 번째 동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깨끗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깨끗하심, 그분의 인격을 볼 때에 그것은 너무나 우리가 닮고 싶은 것이고, 우리를 매료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분처럼 되고자 우리가 지금 또 힘쓰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알기 때문에, 그 의를 행하는 동기가 이제 세 번째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형제님들께서 이제 1절부터 3절 또 교제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저희가 이제 첫 번째 성경 읽기 시간에도 '부정 과거'라든가, 이제 '현재'라는 것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3장에서도 계속 얘기가 돼야 될 것 같습니다.
3장 1절에 보게 되면 아까 사회자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신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이제 "보라"라고 돼 있는데요. 이 보라가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하고는 좀 다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을 때, 그 '보라'는 이제 '주목하라'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여기서 이제 "보라"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이것을 보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건 신분과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신분과 함께 우리는 이것을 실제 경험을 한 거죠. 그래서 이 '보라'가 요한복음 1장 29절하고 다르다는 것과, 또 이것도 이제 '부정 과거'입니다.
그래서 이 '부정 과거'라는 것이, 저는 이렇게 좀 설명을 합니다. 아까 형제님께서 잘 설명을 해 주셨는데요. 이게 사진처럼 '선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경이나 아니면 중요한 책의 문구를 이제 형광펜으로 칠한다거나, 이제 이런 것을 갖다가 좀 생각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십자가 사건은 보통 이제 부정과거로 표현이 되는데요.
신분과 관련해서 3장 1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이제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고요. 그리고 이제 아버지입니다. 이게 아버지와 자녀, 그리고 나중에 이제 7절 이후에 보게 되면 '두 가족'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가정과 그리고 여기 마귀의 가정이 나오죠. 그래서 아버지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자, 또한 이제 우리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또한 이제 아버지의 가족이 됩니다.
그때 "어떠한 사랑", '어떠한 사랑'이 이제 나와 있는데 이게 이제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인데, 이 사랑에 대해서는 4장에 이제 저희가 볼 수가 있습니다. 4장 9절과 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요. 그래서 저희는 이제 신분과 관련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제 자녀가 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29절에서도 이미 이제 "났다"라는 표현이 되어 있고요. 그것을 저희가 이제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2절에 보게 되면 여기는 주님의 이제 다시 오심인데,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제 사랑받은 자들아"라고 이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이 저희가 잘 알고 있는 '아가페 사랑'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받은 자들아', 이것은 자녀들, 아버지, 그리고 사랑받는다는 것, 이거는 가정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아까 사회자 형제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이제 다시 오심과 관련이 있고요. 그리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통해서 저희는 "그와 같을 줄을" 이제 알게 됩니다.
그리고 3절에 보게 되면 이제 "소망"이 나옵니다. "그 소망"이 이것은 이제 형제님들께서 또 교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누구를 향한 소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라는 그런 소망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제 정리를 해보면, 3장 1절부터 3절, 2장 28절부터라고 보았을 때는 이제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의는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는, 그 의를 행한다는 것은, 이 아버지 하나님의 가정 가운데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희가 그 신분을 가졌고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저희와 같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의 깨끗하심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그래서 2장 29절에 "의를 행하는 자마다" 이게 이제 '현재형'인데요. 현재형이라는 것은 저희가 '습관적'으로 의를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말씀을 준행하고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신분'과, '주님의 다시 오심'과, '주님의 깨끗하심'을 저희가 보면서, 이 하나님의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자녀들과 그리고 사랑받는 그 자녀들 가운데 의가 습관적으로 행해진다는 것을 저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예, 여기 보면, 3장 2절에 보면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단어의 끝에 조사 때문에 어감이 조금 달라지는데요. 그런데 이제 사도가 말하고자 했던,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지금도', 지금 이 순간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놀라운 사랑을 받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이 비록 이제 세상에는,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제 그것을 오히려 반대하고, 싫어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놀라운 특권과 영광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뒤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는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가지고 있는 특권과 영광을 우리가 의를 행하고, 또 사랑을 행하고, 진리대로 행하면서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을 만날 때에 이제 온전히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도 우리가 그것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2절을 통해 보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가 영광스러운 분을 볼 때에 우리도 영광스럽게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때에 그때 우리는 그와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지금도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우리가 이 순간에도 주님을 볼 때마다, 그 주님의 영광을 우리가 볼 때마다, 우리는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이제 마땅히 그와 같은 것을 계속 해야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제 "그의 깨끗하심"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분이 어떤 죄가 없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분 성품 자체가, 그분이 뭘 하고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분 성품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이제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는지를 "그의 깨끗하심"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분을 볼 때에 또한 계속해서 또 깨끗하게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을 이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그다음 4절부터 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죄가 무엇인가'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죄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런데 이 '불법'이다라는 것이 이제 '무법'이라는 것입니다. 법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아무 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법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이 사람이 무시한다는 겁니다. '무법자'라고 해야 되나요? 법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 이제 이게 죄다. 이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죄가 뭔가'를 했을 때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성품'과 관련돼서 죄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그리스도와는 결코 조화될 수 없다. 이걸 5절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죄는 결코 함께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6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결코 죄와 함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당연하게 "주 안에 거하는 자와는 이 죄는 결코 함께할 수 없다." 이것을 이제 6절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4절부터 6절 형제님들께서 교제 부탁드리겠습니다.
- 전의석 형제님 :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교제해 주셨는데요. 로마서에서는 이제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고 이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종이지만 유업을 이을 자로 변화시켜 주신 신분"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것"을 강조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제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사도는 강조해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으면 자녀가 자연스럽게 부모를 닮는 것과 또 외형적으로나 내형적으로 담는 것을 참 자연스러운 것인데요. 그것을 통해서 이제 저희는 하나님의 자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뜻을 이제 따르고, 하나님을 닮아가고, 이것이 이제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고요.
또 하나는 3절에서 저희는 이제 그 '소망'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데요. '깨끗게 되는 것'은 '주님이 오시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이 돼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금 5시 30분인데요. 만약 6시에 주님이 오신다고 하면 저희들의 생각이 꽤나 바뀔 것 같습니다. 또 저희들의 행함도 꽤나 바뀔 것 같습니다. 과거에 먼저 되신 형제 자매님들께서는 1988년도에 주님이 오신다는 굉장한, 그런 이제 교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1948년도에 독립을 했고, 주님이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내가 다시 오겠다고 했기 때문에 88년, 40을 더해서 그때 이제 굉장히 주님이 오실 것 같이 말씀하셨고, 곧 주님이 오신다는 굉장히 또 후유증이 있었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성도님들에게 좀 굉장히 경건하고, 또 주님을 고대하는 그와 같은 이제 또 모습도 보여주시는 걸 제가 들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이제 그런 주님이 다시 오심에 대한 교제가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은 곧 주님이 오시는 것을 이제 깊이 생각해야 되고, 사실은 만찬 가운데서도 주님의 죽으심과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는 강조점이 있는데, 다시 오심에 대해서는 조금 기억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가, 그래서 그런 부분이 이제 생각이 되어졌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여기 4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라고 돼 있습니다. 이제 '어떤 어떤 마다'라는 표현이 이 요한일서에서 많이 나오는 그런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 이제 뭘 염두에 두고 사도가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지를 이제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이제 죄를 지으면서도 '이건 나는 예외야. 이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나는 좀 예외이기 때문에 이건 죄가 아니야.'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에 대해서 사도는 예외 없이 모두 죄를 짓는 것은 불법을 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뒤에도 이제 그런 '마다'라는 표현이 나올 텐데요. 함께 또 이제 살펴볼 것이고요.
그리고 여기 이제 5절에 보면 이제 우리 '주님의 사역'과 이제 '성품'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5절에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것은 여기서는 주님께서 '초림'하신 것을, 그리고 이제 '십자가 사역'을 하신 것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2절에서 "나타나다"라는 것은 우리 주님의 '재림'을 이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나타나다라'는 것을 이제 잠깐 생각을 해보면, 2장에 거짓 교사들도 나타납니다. '그들의 정체'가 이제 나타납니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나타나냐면요. 그들은 그 성도들 무리 가운데서 이제 나가면서, 나감으로써, 이제 그들의 정체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로 우리 주님께서는 강림하심으로, 여기 28절에 보면 이제 그분의 강림하심, 그것은 '오셔서 함께하시다'라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가지고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그분이 나타나시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여기 5절에 보면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셨다"라고 돼 있는데, 이 '죄를 없이 하셨다'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이제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과 비교해서 이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이제 그 '죄를 없이 하시다'의 그 '없이'라는 것이 이제 '들다', '제거하다', 이제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1장 29절에 사용된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속죄 사역'을 강조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거기 이제 '세상 죄'라고 되어 있고, 이 '세상'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고, '죄'가 이제 '단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세상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죄를 없이 하시다"에서는 "우리 죄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제적으로 행하는 죄들, '복수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분은 십자가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오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이 거듭난 사람들이,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삶 가운데서, 우리의 그런 죄들도, 그 죄도 처리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 사는, 우리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역' 이걸 강조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그와 같은 죄를 없이 하려고 오신 분인데, 우리가 짓는 그런 실질적인 그 죄들을 없애 하려고 오신 분인데,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그건 너무나 그것과 모순되는 것이다. 이것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4절부터 6절에서는 이제 '죄가 무엇인가?' 여기서 이제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 그리스도의 하신 사역과 그분의 성품과 반대되는 것, 그리고 이제 6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임을 여기서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7절부터 이제 10절을 교제를 나눌 텐데요.
이제 앞에서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었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러한 의를 행하고 마귀의 자녀들은 그러한 죄를 범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의를 행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의롭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제 사도가 말하는 것을 이제 이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혹하지 말라"라고 했을 때 이제 사도는 그 거짓 교사들이 무엇으로 미혹하는지를 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 교사들이 미혹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 하나하나 그들의 잘못된 말을 반박을 하고 있는 것인데요. 이 7절에 이 말을 보았을 때, 거짓 교사들은 이런 거짓말을, 잘못된 말을 한 것으로 이제 생각이 됩니다. 우선 첫 번째로 이제 무엇으로 속이는가를, 세 가지를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1. 첫 번째로는 '수준'을 속이는 겁니다. 어떻게 이 수준을 속인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 "너희들은 아직 수준이 낮아서 그래. 아직은 죄를 안 짓도록 그렇게 살아야 돼. 그게 이제 초보 단계야. 그런데 그거는 초보 단계고, 좀 더 영적인 수준이 높은 사람이라면 거기서 자유로워. 우리들은 그런 죄를 지어도 그게 문제되지 않아." 이렇게 수준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7절에서는 그 수준에 대해서 반박하는 그런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전치사가 "의로우심과 같이" 그 수준을 비교하는, 이제 "같이"라는 전치사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제일 높은 수준이 뭡니까?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운, 그 가장 높은 수준은 '의를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지 않고 죄를 행하는 자는 결코 그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8절에서는 '근원'을 거짓 교사들이 속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8절에서는 여기서도 "마귀에게 속하나니" 어디서부터 이 속한다는 것이, '어디로부터'라는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8절에서는 죄를 짓는 것은 그건 마귀로부터 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은 죄를 지어도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거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 악이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이것은 죄지만 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난 거야." 이렇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무마시키고, 자기들이 이제 마귀의 자녀면서도 이제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하려고 그들은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분명하게 이 마귀에게 속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3. 9절은 이제 '능력'을 속이는 겁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연약해서 그래. 아니 어떻게 구원받았다고 죄를 안 지어?" 하면서 그의 능력을 가지고 이제 속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도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모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분명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한다." 그 하나님의 성품, 이 씨라는 게 작지만 그 큰 것과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작을지라도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이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그 거짓 교사들의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거짓말을 이제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구원받기 전에는 그는 이제 죄가 이끄는 대로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구원받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습니다.
물론 이제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형제님들께서 그런 부분들을 이제 설명을 해 주시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 그런 삶을, 그런 삶의 스타일을 그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10절이 그것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7절부터 10절까지 내용들 우리 형제님들께서 교제 부탁드리겠습니다.
- 김영권 형제님 : 저희가 주제를 이제 생각해 봤을 때, 좀 어렵게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제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라든지, 아니면 "사랑"이라든지, 이런 주제가 굉장히 어렵게 생각이 됩니다. 여기서도 저희가 1절에서 보았지만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라고 말씀하시면서, 멈춰 서서 "아버지께서 어떤 사랑을 주셨느냐?"라고 화두에 던지면서 이 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제 앞서 형제님들께서도 말씀해 주셨지만 다른 교사 형제님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냐? 그리고 얼마나 영화로운 최고의 사랑이냐? 기이한 사랑이다. 또 하늘의 천상의 사랑이다. 그리고 초월하는 사랑이다.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의 교제가 된다면 사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실제적이고 눈으로 보여지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주셨고, 또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그의 죽음으로, 그의 부활로 사랑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하늘의 놀라운 저희가 이 땅에서 다 알 수 없는 그 깊이의 사랑이지만,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우리가 바라볼 수 있도록 그 사랑을 주님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받은 자들이 이제 어떠한 자녀로서 지내야 될지를 7절부터 10절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 사랑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은 의를 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저희에게 주신 그 사랑과 같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또 믿지 못하는 자들은 마귀의 자녀들로 서게 됩니다. 그들은 의를 행할 수도 없고, 또 이 사랑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는 이러이러하게 삽니다."라고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의 가정이 보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에서, 또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의 가정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모습과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또 형제를 섬기고, 형제를 위하고,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정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을 통하여 저희의 간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먼저 보이신 그 사랑을 저희의 삶 가운데 삶을 통해서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데 또 무서운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면 마귀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의를 이룰 수도 없고, 사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양 극단만 있고 그 중간 지대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를 보면서 거짓 교사들에 속해 있는지, 거짓 교사가 말하는 그런 영지주의의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또 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실질적인 사랑을 행함으로써야 한다라고 경계하시는 것 같습니다.
- 이기범 형제님 : 3장 10절까지 이제 정리를 해보면 '두 집'이 있습니다. 저희가 계속 얘기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 있고 그리고 마귀의 집이 있습니다.
저희가 어떤 집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아버지가 있고, 이제 자녀들이 있고, 그 집마다 특징이 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특징에 맞는 일들이 이제 일어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는 '의가 습관적'으로 행해지고요. 그리고 마귀의 집에서는 그 자녀들과 함께 '죄가 이렇게 습관적'으로 행해집니다. 그래서 이제 두 집이 있다는 것을 저희가 알 수가 있고요.
그리고 좀 더 이제 자세히 보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는 아까 말씀을 드린 것처럼 그 자녀들이 '사랑받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이 3장에 보게 되면 주님의 초림과 재림이 다 나오는데 '재림이 먼저' 나온 것을 저희가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3장 2절에 그가 나타내신 그리고 이제 초림은 3장 5절에 이제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는 의가 습관적으로 행해지는데 그 '초림을 바탕'으로 "우리 죄들을" 아까 교제가 된 것처럼 3장 5절에 우리 죄는 이제 '복수'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들을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되었고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에게는 죄가 없다"고 해서 이 죄는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교제 가운데서 한 번 나왔었는데 이런 죄의 뿌리가,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초림 때 하신 일을 바탕으로 재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약에 저희가 어떤 사람을 갖다가 만나기를 소망한다면 그 사람을 닮으려고 할 겁니다. 그리고 그 닮은 가운데서 만나고자 할 것입니다. 3장 3절에 나온 것처럼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라고 되어 있고요. 그리고 7절에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는 이 예수님의 초림을 바탕으로 일어난 그 일을 기초로 삼고, 그 재림을 바라보면서 그 의가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에 반해서 이제 마귀의 집에서는 죄가 이제 습관적으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초림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이 마귀의 집에서는 8절에 보게 되면, 그러니까 그 집마다 그 특징을 가진 일들이 일어나는데,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제 '처음부터'가 언제냐라고 했을 때, 아까 첫 번째 시간에도 처음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이제 얘기가 됐었던 것 같은데요. 마귀도 이제 그 피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영원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마귀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후, 그리고 그 마귀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을 때', 그때부터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마귀가 처음부터 범죄했고, 그다음에 그 집은 그 마귀의 자녀들은 죄를 습관적으로 이렇게 범하는 것으로 특징 지어집니다.
그래서 두 집이 있고 두 집마다 특징이 다르다라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 집은 초림을 바탕으로 재림을 소망하지만, 그것이 의를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이 마귀의 집은 처음부터 범죄한 것이 그냥 그대로 그 집의 특징으로 이렇게 특징 지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전의석 형제님 :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 교제를, 좀 생각해 보고 싶은데요. 믿지 않는 자들도 의를 행하는 것 같습니다. 놀랍게 의를 행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의와 믿는 사람들의 의의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했을 때, 저는 그것은 '마음의 동기'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 의를 행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위안이나, 자기가 높아지거나, 자기가 만족하기 위해서,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두 가지의 대비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 근거는 가인과 아벨이 이제 뒤에서 나오는데, 두 사람 다 의를 추구했지만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이제 좀 차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예, 그래서 이제 10절까지 해서 의의 특징에 대해서 우리가 다루었고요. 그리고 의를 이야기했고, 이제 '사랑'에 대해서 이제 11절부터 하게 됩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10절에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그리고 "또는"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또는'이라는 것이 또한 '즉'으로도 번역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오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것, 의를 행치 아니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것이 같은 것이다라고 사도는 언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제 계속 앞에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제 11절부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가 쭉 나오는데요. 우리가 '왜 갑자기 사랑이 나왔을까'를 이제 생각하게 될 때에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제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참 다른 사람들에게 의를 행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잘 지키는 것, 그 율법을 다 이루는 것이 또한 이제 사랑임을 이제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의로움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이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우리가 행하는 것이었다면, 또 마찬가지로 사랑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행하는 것임을 이제 우리가 살펴볼 것입니다. 이제 의의 기준이 그리스도였다면 또한 이제 사랑의 기준도 이제 그리스도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11절, 12절을 이제 보게 된다면 우선 11절 12절에서는 이러한 '의로움과 사랑은 같이 가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이제 가인과 아벨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정말 그 부분이 '뭐가 의로운 것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자체가 정말 의롭다는 것이 뭔가, 가인의 경우에는 그 아우를 죽이기 전에도 이미 "그의 행위가 악하였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아우를 죽인 것은 이제 분명히 이제 악한 것이었지만, 이제 그의 미움이고, 사랑의 반대인 미움이고, 이제 그것이었지만 그전부터 그는 그의 행위가 이제 악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가인은 동생을 죽이기 전까지는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자기가 일한 걸 가지고 하나님께 드린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고, 앞에 형제님 말씀해 주신 것처럼 자기 의로 자기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이 악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악은 미움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순종하는 사람에 대한 적대심,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이제 미워하는, 이제 그것이 이 죄와 미움이 연결돼 있고 또한 사람과 또 의로움이 연결돼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1절 12절 짧은 부분인데요. 혹시 선생님 말씀해 주실 부분 있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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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바로 13절부터 15절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의 미움'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고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해서 이 미워하는 것과 영생은 같이 갈 수 없다. 이것을 이 단락에서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은 '사랑은 오직 영생을 얻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볼 때에 아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을 옮겼구나,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가진 자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굉장히 희귀한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이거는 죄인 된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주 죽이고자 할 정도로 이제 미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구원받으면 완전히 180도 바뀌는 것입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직 이 생명을 얻은 자만이 이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 그 미움은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을 죽이고자 하고, 그래서 그 안에 이제 생명이 없는 것을, 영생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13절부터 15절 형제님들께서 이 교제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저희가 아까 "처음부터" 이게 계속 나와가지고요. 짧게만 한 말씀드리면 11절에 "처음부터"는 '복음을 들은 때부터'라고 이렇게 해석이 될 수가 있겠습니다. 저희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저희가 구원을 받을 때 사랑은 빼고 들었는가? 저희가 어떤 의와 죄에 대해서만 들었는가?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저희는 복음을 들었을 때부터 그 '사랑'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지금 교제 되고 있는 것처럼 의와 사랑이 이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고요.
그다음에 창세기 3장, 4장을 다시 생각을 해보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이제 의를 행치 않은 거죠.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창세기 4장을 보게 되면 아우를 죽임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의를 행치 아니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또한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은 순간적으로 4장 8절 근방에서 분노해서 갑자기 아우를, 서로 이야기하다 분노해서 아우를 죽인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악한 자에게 속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그냥 마귀의 집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 가운데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13절부터 보게 되면 그 세상이 너희를 미워합니다. 저희가 그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까 이제 사회자 형제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이 특별히 이 '형제 사랑'이라는 것이 '영생'하고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제 사랑은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입니다. 만약 살아있는 사람이 말도 하고, 걷기도 하고, 이런다라면, 형제 사랑이라는 것은 생명을 가졌다라는 것의 증거라는 것을 저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형제 사랑이라는 것은 생명의 증거이고, 다시 3장 초반부터 보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 가운데 있는 사람이 생명의 증거로서 하는 것이 형제 사랑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15절에 나오는 내용은 그런 이제 생명이 없는 사람, 형제 사랑이 없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이 마귀의 집에 소속돼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가 10절까지 '의'에 대해서 보고 다시 사랑으로 넘어오지만, 마찬가지로 '두 집'이 있고 있고, 생명을 가진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속한 그 증거는 '형제 사랑'으로 드러나고, 그렇지 않은 반대쪽 집에서는 '미워'하고 '살인'하는 것으로 이렇게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 강성찬 형제님 : 금방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이제 처음부터 들은 '소식'입니다. 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또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소식, 이제 우리가 이제 기다리고 들을 때 기쁘고 반가운 소식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영생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 생명에 맞는 것입니다. 그 생명에 좋아하는 그런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생명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그 형제에 대해서, 또 깊은 사랑을 내게 되는 그러한 생명인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그러한 사랑을 하라고 16절부터 18절까지 "행함과 진리로 사랑하라"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18절에 "행함과 진실함", '진실함'이 이제 '진리'라는 단어이기 때문에, "행함과 진리로 사랑하라"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러기 위해서 16절에서는 이제 '주님께서 하신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17절에서는 실제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이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16절과 17절의 사이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어서 좀 대조되는 면이 있습니다. 이제 간단히만 봐도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 굉장히 큰 사랑이죠. 그리고 17절에서는 이제 형제의 지금 필요를,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돕는 이런 사랑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좀 사소하고 작은 사랑입니다. 여러 가지 대조되는 면이 있지만, 또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방식의 하나이고, 또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17절에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특별히 언급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소하고 작게 생각되는 사랑이지만,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랑과 나의 재물을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주는 사랑에 분명히 이제 같은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또 하게 됩니다.
이 16절부터 18절 교제 부탁드리겠습니다.
- 김영권 형제님 : 여기서 16절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버리다'라는 말은 우리가 옷과 같이, 이제 '옷을 벗다.' 이제 '옷을 버리다.' '자발적으로 생명을 버리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이렇게 버리셨다는 것을 이제 알 수 있습니다.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17절에는 이제 "그러나"라는 부분이 다른 성경에는 나와 있는데 마치 이제 주님께서 목숨을 버린 것과 우리가 참 작은 재물로 이렇게 돕는 것이 얼마나 연관이 있겠느냐만, 이 말씀에서는 분명히 우리가 그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도우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바인 형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더라고요. '큰 사랑은 이제 작은 사랑을 포함한다.' 주님께서 하신 그 엄청난 사랑이 저희에게도 미쳤고, 또 저희도 다른 성도를 돌아보고 그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앞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 속해 있다 그랬고, 또 마귀의 자녀들이라 그랬고, 또 이것이 영생과도 연관을 미칠 정도로 참 중요한 문제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재물을 생각해 보면, 그냥 우리가 많이 재물이 있어서 그 남은 걸 가지고 이렇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목숨을 내려놓으신 것과 같이 적극적으로 섬기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재물을 적극적으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규모 없게 무조건 해야 된다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들 자매님들을 돌아보고, 그 필요를 그냥 순간적으로 우연히 알게 돼서라는 것이 아니라, 항상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그 필요를 알고,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희생하면서 이 재물로 도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그 사랑과 그 재물로 저희가 드리는 사랑이 저희가 봤을 때는 참 '어떻게 이것을 비교하나?'라고 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저희에게 주신 참 작아 보이는 그 재물로 섬기는 섬김을 형제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우리에게도 끝까지 그 필요를 알고 적극적으로 섬길 것을 사랑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네, 그래서 이게 작은 사랑이지만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그걸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고, 내가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그걸 딱 주면 되는데, 그걸 못 주는 겁니다. 자기한테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래서 자기가 놀라운 사랑을 이미 받은 사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이것을 준다 할지라도, 그 놀라운 희생을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계속적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을 채워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주는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주님을 닮고,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의 피로를 채워주는 그 기쁨이 그의 마음속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안에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19절부터 24절까지 보도록 할 텐데요. 여기서는 이제 '진리'에 대해서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이게 참 놀라운 것이 우리가 사랑을 하면 자신이 진리에 속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여기에 이제 19절에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 알고"를 그냥 '이 사람이 정말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이 정도로 표현하면 또 적당할 것 같은데, 갑자기 우리가 사랑을 하면 우리가 이제 진리에 속해 있다라는 것을 우리는 마음속에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이제 사랑에서 어떻게 이렇게 또 진리로 넘어가는가?' 이런 부분들을 좀 교제를 나눠볼 수 있을 텐데요.
일단은 19절부터 21절까지 이 세 구절에서는 앞에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마음은 우리를 이제 책망하기도 하고, 20절에, 그리고 21절에 마음이 책망을 안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절에 또 우리가 마음을 주 앞에 굳세게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이제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17절에도 "도와줄 마음"이라고 '마음'이 나왔습니다. 이제 17절에 나와 있는 '마음'과 지금 보고 있는 '마음'의 단어 자체는 다르지만, 사랑은 이제 마음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정말 사랑하는 데 있어서 "행함과 진리"로 해야 된다. '마음'뿐만이 아니라 '진리'가 필요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에 이제 진리 가운데서 사랑을 해야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합당하게 사랑을 하고 정말 이 담대함을 얻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단순하게 이제 마음만 가지고 사랑한다는 것은 '오류'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20절에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분을 인식해야 된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이런 부분들이 19절부터 이제 21절에 말을 하고 있는 내용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혹시 또 형제님들께서 다른 교제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전의석 형제님 : 19절에서 21절은 저는 요한복음 21장을 생각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만 그럴 수도 있는데요.
주님이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랬을 때 베드로는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책망받을 것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는 그와 같은 권면을 해 주셨는데요. 그것이 이제 베드로를 굳세게 하였습니다. 19절과 같이, 저희들이 주님 앞에 갈 때만이 마음의 굳셈을 얻을 수 있고요. 또 형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같은 저자인 요한복음 21장을 통해서 이 세 절을 통해서 또 비침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저도 형제님과 같이 그 부분이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가 처음에 "제가 다른 사람은 다 버려도 자기는 버리지 않겠다."고 했을 때 그는 이제 주님을 사랑하지만 이제 자기 마음만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제 요한복음 21장에서는 그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부분들이 '마음'과 또한 이제 '진리'가 같이 가는 부분, 또 그걸 21절에서 표현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고요.
22절부터 24절 마지막 부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계명들"이 나오게 되는 것인데요. 사실 이 '계명'이라는 것이 '진리'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이제 사랑을 하는 것을 "계명들을 지키고" 이렇게 되고 있는데, '그럼 계명이 뭐냐?' 했을 때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라는 것은 그 이름이 담고 있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 그 진리들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이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진리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랬을 때에 우리에게 여러 가지 축복들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요. 사실 다하긴 했지만, 또 형제님들께서 마지막 부분들, 또 전체적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면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기범 형제님 : 저는 이 요한일서 3장을 아까 제가 계속 교제했던 것처럼, 이제 '두 집안 간의 대조'로 이렇게 정리를 해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19절부터 "진리에 속했다"라는 것도 참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의를 습관적으로 행하고 그것은 형제 사랑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진리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 '마음'도 나오고 막 '담대함'도 나왔는데요. 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는요. 하나님도 있고요. 주님도 있고요. 성령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신기한 것이 21절에 그 담대함을 얻는데, 담대함이 사실 2장 28절에도 있습니다. 동일한 단어고요. 주님 강림하실 때 이제 담대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21절은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이 아니고, "아버지 앞에서의 담대함"입니다. 그리고 23절의 "계명"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습니다. 그리고 24절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우리가 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버지 앞에서의 담대함, 그것은 부모님 앞에서의 담대함이라고 생각을 해보면 느낌이 오실 것 같고요. 그리고 저희가 무거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성령이 주어져 있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는 이렇게 '담대함'과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고 '연합' 가운데 있는, 그런 결론으로, 그래서 마귀의 집하고는 전혀 다른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강성찬 형제님 : 여기 24절에 보면 이제 '성령'께서 언급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4장에 있는 영들에 대한 내용과 연결이 되는데요.
우리가 이 전 앞에 2장의 마지막 부분에 맞춰지는 걸 보면, 이제 비슷한 결말을 보게 되는데요. 우리가 2장 마지막 부분에서도 "주 안에 거하는 것", 그리고 이제 "기름 부음"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제 거기서도 성령님과 주 안에 거하는 것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제 거기서는 특별히 이제 '성령'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하시는' 그런 부분들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3장에서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 쭉 나왔고요. 이제 그랬을 때 24절에 다시 한 번 성령께서는 "그 길이 맞다." 여기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지금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이 맞다'라고 확신을 주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또한 여기 이제 '거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3장에서 주님께서 이제 나타나시고, 초림하시고, 또 이제 재림하시고, 나타나시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하나님의 자녀의 그 특징들을 행할 때에, 의를 행하고, 또 사랑을 행하고, 또 진리대로 행할 때에, 그것은 이제 우리가 따로 떨어져서 그런 일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주를 의지하면서, 또 교제하는 가운데 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이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고, 계속 그 길을 격려하시는 부분을 이제 24절 결론 부분에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여러 형제님들께서 또 교제해 주시고 또 함께 참여해 주셔서..
- 김윤철 형제님 : 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설명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장에서 교제를 했던 것처럼, 저희가 구원은 받았지만 이 죄에 대해서는 완벽하지 않은 그런 육신을 갖고 있는 몸으로서,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자 죄를 짓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셨잖아요.
- 강성찬 형제님 : 예, 맞습니다. 예, 좋은 질문이고요.
- 김윤철 형제님 : 다른 관점을 말씀하시는 건지, 아니면 정말 죄를 짓지 않는 게 맞는 건지요?
- 강성찬 형제님 : 예, 그 질문을 하지 않으셨으면 중요한 언급을 하지 못하고 넘어갈 뻔했는데요. "이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것은 그의 '전체적인 삶의 모습'이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제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데, 앞에 시간에서 말씀이 나온 것처럼, 단순히 어떤 하나의 사건, 하나의 죄에 대한 그것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의 방식'은 그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이 미혹하는 자들이 "아니, 그런 능력이 어디 있어?" 이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다 죄 짓고 살잖아." 이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것에 대해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범죄치 못한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 말하자면 이제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겁니다. 예전에 요셉이 이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에 "내가 이 큰 죄를 어찌 지으리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영어 성경을 보면 '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이 큰 죄를 어떻게 내가 지을 수 있겠냐?"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범죄할 수 없다.' '어떻게 하나님께 이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이제 우리가 받은 생명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잘 대답하셨어요? 아니면 더 헷갈려요?
- 김윤철 형제님 : 아니, 분명히 1장 도입부에, 1장에 교제하실 때 이 부분이 가장 좀 (??)한 부분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 강성찬 형제님 : 제가 이제 앞에 내용하고 같은 맥락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기도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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