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집회/매년 5월 성도집회

요한일서 2장 : 하나님의 자녀의 삶

박이레 2026. 5. 1. 22:03

요한일서 2장 “하나님의 자녀의 삶” / 26년 5월 1일 금요일

안녕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은 요한일서 2장 말씀 우선 읽어드리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1-11).

우선 여기까지, 11절까지 말씀 보고 교제한 후에 다음 넘어가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은 이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내용상 1, 2절 죄에 대해서 마무리하는 내용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3절부터 11절까지는, 1장에서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는 이제 잘못된 사람들이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니까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말하면서, 뭐라고 하냐면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본성이 변화됐다고 하는 사람, "나는 이제 죄에 대해서 유혹을 느낄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아직 몸이 변화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영광스러운 몸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나는 죄는 죄에 대해서는 전혀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 혹시 이런 사람 보셨어요? 저는 만나봤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분이 있더라고요.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는, "나는 구원받은 후에 죄를 더 이상 짓지 않는,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다." 완전주의자, 이 세 사람의 경우를 말하는데 이들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하는 문제거든요. 이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하는 거고요.
그다음에 이제 2장 3절에서 11절까지도 세 사람이 나옵니다. 보시면 4절 보시죠. "저를 아노라 하고" '저를 아노라'가 하나님을 안다, 예수님을 안다, 그런 거니까 이게 구원받았답니다. 구원받았다를 달리 표현한 거죠.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 4절. 그다음에 6절, "저 안에 저 안에 거한다라고 하는 자" 6절,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도가 아니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 그다음에 9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 이제 똑같이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형제를 미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그가 정말 하나님의 빛을 받고 있느냐', '하나님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느냐'를 살폈고요.
그다음에 이제 2장에서는 '그의 행동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삶이 잘못된, 그래서 1장은 '죄에 대한 태도'를 말한다면, '죄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면, 2장은 이제 '삶의 모습'입니다. 실질적인 삶에서 예를 들면, 4절 보면 말씀을 순종을 안 해요. 그다음에 6절, 주님처럼 행동하지 않아요. 주님을 본받지 않아요. 그리고 9절, 형제를 미워해요. 그래서 이건 이제 삶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래서 1, 2절은 죄에 대해서 이어서 이제 최종적인 발언을 하고, 그다음에 3절부터 11절까지는 이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그의 삶이 문제가 있는 세 가지 케이스를 댑니다. 그리고 12절부터 27절까지는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 셋으로 분류합니다. '어린아이'가 있고, '청년'이 있고, 그리고 '아버지'가 있습니다. 어른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청년, 어른,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는 이 세 부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12절 보시면 "자녀들아" 해서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가족에 있는 사람은 죄 용서받은 사람이 있다. 그다음에 13절,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 '아비'가 있습니다. 아비가 있고, 그다음에 13절,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14절,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각각 영적인 성숙도를 따라 성도들을 분류하고 각각에 대해서 말합니다. 14절, "아이들아"까지 했죠. 그러니까 이제 세 부류가 나오고요. 그다음에 14절에 보면 다시 "아비들아", 그리고 14절 "청년들아"가 나옵니다.
특징을 보면 '아비'들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안 해요. 아비들은 이제 가장 높은 수준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안다, 이게 이걸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청년들'은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13절에 보면 악한 자를 이겼어요. 그런데 청년들에 대해서는 14절부터 17절까지 다시 말을 덧붙입니다. 청년들에 대해서는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 사단을 이겼지만, 세상 사랑이라고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걸 넘어와야 된다.
그다음에 18절, '아이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어린 갓 구원받았거나,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거나, 혹은 구원받은 지 오래됐어도 영적인 수준은 아직 떨어져 있는 사람한테는 이렇게 말합니다. 뭘 말하냐면 27절까지 보시면, '적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영적으로 이제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의 문제는 뭐냐하면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게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고, 청년들에게는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 그리고 아비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게 이제 세 가지 성도들을 분류하고 각각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제 28절부터는 사실상 이제 내용이 3장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이제 27절까지만 다루겠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2장 1, 2절부터 보겠습니다. 2장 1절, "나의 자녀들아" 그러니까 이제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받는 직접 그 당시에 받았던 사람들이 있겠죠. 그리고 우리까지 다 집어넣어서, 하나님은 가족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이것은 1장을 쓴 것은, 1장을 쭉 써놓은 것은,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났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이라고 하는 게 뭐냐? 우리가 사는 이게 생명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의 생명, 영적인 생명, 혹은 이제 우리가 부활해서 주님 공중에 오시면 부활해서 이제부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때의 그 생명, 그 생명을 지금 저희들이 가지고 이 땅에서 사는 생명이죠. 이 생명의 특징이 뭐냐? 내가 생명을 봤다. 예수님에게서 들었고, 보았고, 만져봤다. 그 생명이 나타났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생명과 교제하는 거다. 그 생명과 공통점을 갖고 있는 거다. 그 생명의 중요한 특징을 함께 갖고, 기뻐하고 누리는 거다.
이렇게 이제 설명 그걸 설명한 이유는 "죄를 범치 않도록", 그리고 세 가지 종류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빛이 필요 없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람, 그다음에 본성이 변화됐다고 하는 사람, 죄를 안 진다고 하는 사람, 이걸 쓴 이유가 뭐냐? "죄를 범치 않도록"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 말은 어떤 뜻이냐면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죄를 범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은 죄를 범치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계속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죄를 범치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기본적으로 말씀 안에서, 주님과 함께 모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평안하게 사는 것이 기본적인, 정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죄를 완벽하게 안 짓느냐? 아닙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예외적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요한일서에서 할 수 없이 아까 이병호 형제님이 막 어려운 문법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동사의 '현재형'은 우리나라 말로 현재 형은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요한일서에서, 그리고 이제 '부정 과거'라고 하는 이 시제는 '단 한 번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여기 보면 2장 1절에 "죄를 범하면"이라고 하는 단어가 이게 '일회성'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성도들이 짓는 죄는, 한 번이라도 이렇게 죄를 짓는데 이와 같은 죄는 '예외적'이어야 한다. 예외적으로 범죄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삶이다. 이게 이제 말하는 거고요.

그런데 이제 그다음에 만약에 성도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다음에 "대언자가 있다"인데요. 외국에서 형제님들 초청하면 항상 칠판을 쓰시더라고요. 그래서 국내에서도 한번 써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주님께서 구원하신 성도가 영원한 속죄를,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 성도가 죄를 범했을 때, 이제 주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주님이 지금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시고, 부활하시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죠. 그런데 이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사역을 성경은 세 번 이야기합니다. "중보자"라고 하는 단어를 쓰기도 하고,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그다음에 "대언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들을 이 단어들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우선 "중보자"에 대해서는 성경 몇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겼어요. 하나님은 사실 문제가 없죠. 그런데 사람이 죄를 범했어요. 사람이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거죠.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냐? 그가 해결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이 가운데 '중보자'로 둘 사이를 해결하는 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중보자'는 반드시 '죄인'과 관련돼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고, 이건 죄인들을 위한, 죄인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중보자라고 합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

여기서는 이제 죄인들을 위해서 뭘 하냐면, "더 좋은 언약", 이게 '신약'입니다. 죄인들에게 신약으로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신약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죠. 신약은 이제 히브리서에서 맨날 나오는 거죠. 하나는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않는다."
그가 지은 죄뿐만이 아니고, 미래에 속한 죄까지 완전히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 참고로요.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잊어먹는다, 이런 뜻 아닙니다. 하나님을 잊을 수가 없는 거죠. 모르실 수가 없는 거죠. 1.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죄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정에 고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죄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2. 두 번째, '말씀을 마음에 새겨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죄인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피 흘려서 너희들로 하여금 너희들의 죄를 다시 기억지 않게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있게 해주겠다." 이것을 위해서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라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믿는 자에게 이와 같은 혜택이 주어지는 거죠. 이게 이제 '중보자'입니다. 그래서 '중보자 사역'은 '죄인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가리킵니다.
2. 이제 "대제사장" 사역은 몇 가지가 있는데요. 우선 너무 많기 때문에, 히브리서로 가시겠습니다. 나중에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도 찾아보시고, 6장 20절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아론의 대제사장 기능을 하시고, 멜기세덱의 대제사장 기능을, 성경이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는 시간 관계상 하나만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이제 '성도들을 위한 사역'입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기도해 주십니다.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특히 멜기세덱의 사역이 그렇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이 소돔왕을 만나기 전에, 소돔왕 오기 전에 개입하죠. 그래서 죄를 범지 않도록 기도하고, 죄를 범했을 때 다시 그 죄를 위한 기도를 하시죠. 그런데 이것은 항상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주님은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 가운데 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놓고요.
3. 그다음에 "대언자" 사역은 여기 있는 대로 보겠습니다. 다시 요한일서 2장 1절을 보시면,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연자가 있으니" 그래서 이 '대언자'는 여기는 이제 '성도들을 위한 사역'을 하시고, 성도가 죄를 지을 때 사역을 하시는 겁니다. 대제사장 이 두 가지가, 그런데 여기서는 성도는 이제 성도고 그다음에 이제 상대편은 '하나님'입니다. 여기는 "아버지"라고 표현돼 있습니다.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 가족으로서 지은 죄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개를 성경이 미묘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대언자 사역"이라고 하는 게 뭐냐 그러면, 우선 보시면 이제 성도가 죄를 딱 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제 대언자 사역을 하십니다. 대언자가 뭐냐 그러면, 요한복음 14장, 16장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위로하고 진리로 인도하는" 그 단어가 이 '대언자'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오십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하나님께 가지 않습니다. 대언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역하는 게 아닙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래서 하는 게 뭐냐 하면 1. 우리 '죄를 깨닫게' 합니다. "죄 지었다, 그건 죄다. 너는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죄다." 2. 그다음에 두 번째, '죄를 책망'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책망합니다. 3. 그리고 세 번째, '죄를 회개'하게 합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고 죄를 다시 범치 않도록, 죄가 예외적이 되도록, 죄가 습관이 되지 않도록, 4. 우리를 '교정하시는 사역'이 대언자 사역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그것 때문에 교제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 죄가 이제 문제를 일으킨 거죠. 이 관계가 어색하게 됐다든지, 즐거움을 빼앗았다든지,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데 머뭇거리게 된다든지, 하는 것들을 해결하는, 하나님께 가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옆에서 우리를 책망하고, 깨닫게 하고, 돌이키고, 회복시키는 사역을, 하늘에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대언자 사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성도님들이 혹시 마음에 거리끼는 일을 하시고 나면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양심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사용하셔서, 우리 마음속에 뭔가 일으키십니다. 그때 이걸 흘려보내면 안 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가고, 그리고 해결해 가야 합니다. 이게 이제 대언자 사역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요한일서가 조금 단어들이 어려워서 자꾸 문제가 생기는데요. "화목 제물이다"라고 합니다.
이제 대언자 사역을 하시는 근거가 뭐냐 하면, 뭘 근거로 하냐면 '주님이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화목 제물'이라고 한 이 단어를 보면, 예를 들면 이제 '화목시킨다'고 할 때는 이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상처를 주고받았는데, 이걸 다시 회복시키는, 화해시키는, 이런 뜻인데요. 여기서는 '화목'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화목 제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형제가 너에게 원망할 만한 일이 있거든 너는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하고 화목하고,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려라."라고 하는 그 화목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화목 제물'이라고 번역을 해서, 이제 아까 용수 형제도, "그거 태초라고 번역을 해서 혼동스럽게 만들고.." '화목'이라고 해서, 그런 '화목 제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화목'이라고 하는 단어는 사람이 있고, 사람이거나, 하나님이거나, 이렇게 '인격과 인격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게 이제 화목이죠.
그런데 여기서는 지금 어떤 성도가 죄를 지었잖아요.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무엇을 근거로 하냐면,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근거'로 하십니다. "이 죄 때문에 내가 죽었지 않느냐?" 그리고 이 죽음은 내가 얼마나 죄를 미워하는지, 하나님은 죄를 조금도 용납하실 수 없는 거룩한 분인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속죄가 없는 것을, 이제 성도가 이렇게 하겠죠. 그래서 이때의 이 "화목 제물"은 사실은 "속죄 제물"입니다. '속죄'하고 연관됩니다. 다시 말하면 '죄'하고 연관됩니다. 그 성도가 지은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이 죄를 위한 주님의 죽으심을, 피 흘리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속죄 제물이라고 하지, 그럼 왜 또 화목 제물이라고 해서 헷갈리게 하냐? 그런데 이 죄가 보통 이제 '속죄제' 했을 때는 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그 죄의 대가인 피를 흘리시는 것을 속죄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화목 제물은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이 치르신 피가 아니고, 물론 이제 피인데 그 피가 죄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족시켰다'라고 하는 뜻으로, 그래서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분노하십니다.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의 십자가가 완전히 해결해서 하나님이 드디어 만족하셨다. 하나님이 이제 됐다, 라고 하는 기능을 말하면서 화목제물,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목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그 죄를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게 아니고, 그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로 해결하셔서, 그리고 '하나님이 만족된', 그래서 이게 저희들이 보통 이렇게 하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다음에 두 번째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는 반드시 "피 흘림이 없음 즉 죄사함이 없는" 거죠.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 거죠. 이건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거죠. 이건 대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십니다. 부활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이 받아들인 겁니다. "이게 됐다. 그러면 죄에 대한 모든 해결책을 내가 인정한다." 이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잖아요. 그 기능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주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그다음에 예수님이 승천하셨잖아요. 이제 승천하신 것은 이제 예수님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하늘로 하나님 우편에 이렇게 앉히신 거죠. 우리도 우리의 죄에 하나님이 받으시고, 우리도 이제 하늘에 갈 수 있는 거죠.
그러듯이 이 부활시켜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하나님이 만족히 여기셨다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하나님이 만족하셨다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그다음에 "십자가로 하나님을 내가 만족시켰다. 너는 아버지에게 다시 나갈 수 있다."라고 하는 기능을 이제 대언자이고, 그 기능을 하실 때의 근거가 '화목 제물'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3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1장 6절을 보시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그러니까 1장 6절을 보면 "우리가" 돼 있습니다. 누가 들어가냐면 사도 요한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1장에 있는 내용들은 '원칙'을 나타냅니다. 사도까지도 포함되는 보편적인 진리를 가르키는 겁니다. 그다음에 2장은 우리가가 아니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합니다. 누군가가 4절, "저를 아노라 하고" 이런 사람이 있는 거예요. 이건 모두 다 이러지는 않습니다. 모두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1장에 있는 것들은, 이걸 보편적인 원칙으로 자꾸 제시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1장은 '위치'를 가리키고, 2장은 '삶의 방법'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래서 4절, "저를 아노라고 하면서" 말씀을 불순종해요. 구원받았다고 그러면서 명백한 말씀을 불순종해요. 그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조금 미묘하지만,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침례는 안 받겠대요. 이상한 거죠. 또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여자인 경우, 너울을 못 쓰겠다 하는거죠. "기분 나쁘게 무슨 너울을 쓰라고 그래? 지금 21세기에." 이렇게 말하면 곤란한 거죠. 그리고 또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불신 결혼 안 된다, 이 관계 청산해야 된다." 그러면 굉장히 어렵지만, "맞습니다." 이렇게 해야죠. 그런데 이 말을 듣지 않고 강행하는 거예요. "교회가 왜 이런 것까지 간섭하냐? 내 문제지." 이렇게 강행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구원받으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합니다. 이게 구원의 증거입니다. 구원받으면, "말씀이 그렇게 돼 있어? 해야지, 그럼." 물론 그렇게 행하는데 나에게 희생이 필요하겠지만, 그렇지만 순종해야지.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데, 내가 이걸 못하겠는가?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나 말씀, 나 구원받았어." 해놓고 말씀은 순종 안 하는 거예요. 이게 이제 문제가 되는 거죠.

그다음에 6절입니다. "저 안에 거한다." 나는 구원받은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 안에 계속적으로 거하고 있다. 이것도 '거하다'는 단어는 이제 예수님 안에 있다. 하나님 안에 있다라고 했을 때, '사도바울의 서신서'에서 나오면 이건 '구원'을 말합니다. 아까 김보영 형제님이 읽어주신 로마서 8장 1절,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심판받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도 백보좌 심판대에 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심판대는 있습니다. 그래서 "안에"라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식으로 하면 구원을 말합니다. '신분'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이 "안에"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교제'라고 하는 것은 '공통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성도하고 공통점이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영원한 생명이고, 또 죄를 미워하고, 또 서로 사랑하고 이런 거죠. 그래서 이것은 '교제'를 나타냅니다. 교제의 즐거움이 있다는 겁니다. 이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관계상 이것은 굉장히 즐거운 관계에 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이런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안에"라고 하는, 약간은 똑같은 거지만, 이건 이제 '신분'이라면, 이건 '상태'라고 할 수 있겠죠. 약간 개념이 다르고, 그다음에 "안에 있다" 정도로, 그냥 안에 있다라고 하는 게 아니고, "거한다"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게 여러 번 나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이런 말도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런 말도 있죠. 그래서 이것은, "거하다"라고 하는 것은 이 '거'자가 항상 '내 집처럼 편안하다'입니다. 거기 가면 편안하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 거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교제하면 세상에 그것보다 즐거운 건 없다. 그게 나는 제일 편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걸 뭘 말하냐면,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말씀이 내 생각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있었죠. 그런데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거예요. 말씀이 내 생각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나는 이제까지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었는데, 말씀이 들어오면 그게 아니네. 말씀의 가치관, 그리고 그다음에 생각을 바꾸고, 그다음에 내 행동을 바꿔요. 거한다는 것은,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나는 이제까지 이렇게 살고 이렇게 하고 있었는데 이제 내 행동을 바꾸는 거예요. 이와 같은 것들을 "거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면,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그러면 말씀이 내 주인이 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편안한 거예요. 왜냐하면 내 생각을 자꾸 굴복시키니까, 말씀이 내 안에서 기뻐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대로 따라와서 살아가니까, 이게 이제 거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 안에 거한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과 말씀과 기도로 이렇게 함께 사는 게 그때가 제일 편하다. 거기 나와서 세상에서 살려니까 왜 그리 불편하냐? 왜 그렇게 말씀대로 못 살게 만드냐? 못 살겠다. 그래서 자꾸 예수님한테 돌아가고, 일 끝나면 막 집에 가잖아요. 항상 그 가운데 그는 편안하고 좋고, 막 이렇게 되잖아요. 그렇게 한다라고 말하면, 예수님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고, 예수님하고 행동을 같이 안 하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제가 몇 가지 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그러면, 예수님이 자기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런 거 있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 멍에를 메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온유하거나 겸손하지 않아요. 자기가 진리를 다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높아요. 교만해져요. 다른 사람을 비판해요. 물론 이제 잘못한 거 비판하고, 이렇게 좀 끌어올리기 위해서 할 수 있겠죠. 그런데 하여간 기본적으로는 온유하고 겸손하게 돼 있어요. 2. 그다음에 두 번째, 주님께서 이제 하셨던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모든 사람은 피조물 이잖아요. 그런데 피조물들이 자기를 믿지 않아요. 그랬을 때에도 그와 같은 사람들의 핍박과 비난을 잘 감당하십니다. 십자가와 부끄러운 길을 가십니다. 영문 밖으로 나아가십니다. 그는 인정받고, 또 자기의 뜻을 이루어내길 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뜻이 아닐 때 기꺼이 희생하고 고난당하고 하는 일을 기꺼이 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 걸 못해요. 이런 인격적인 자기 희생, 또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이제 이런 것들이 없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 안에 거한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은 행동을 한다.

그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9절,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 그러면서 이제 쭉 나오는데요. 형제에 대한 사랑인데요. 이 사랑에 대해서 하나만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렇게 돼 있죠. 이제 복음이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나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 가지가 있죠. 1.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고, 2. 그다음에 미래의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3. 그다음에 이거는 과거형이죠. 사망의 생명으로 이미 옮긴 거죠. 이거 하고 그다음에 또 뭐죠? 요한일서 3장 14절, 이게 이제 저자가 같다고 하는 분명한 증거죠.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여기 보면 여기서 이렇게 돼 있죠.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죄인이 예수님 말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이 옮긴 거죠. 그다음에 요한일서 3장 14절은 뭐죠?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제 '형제 사랑'이 나옵니다. 그래서 형제 사랑은 그냥 서로 좋아하고, 뭐 이런 게 아니고 형제 사랑은 '초자연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이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옮겨온 것입니다. 이 형제 사랑은, 그래서 어떤 사람이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적용은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이제 모임 생활하면서 성격이 안 맞는 사람이 있어요. 저 사람만 보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계속 '왜 그럴까?' 하고 계속 비판적인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이 구절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래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내 눈에 거슬리는 면을 보지 말고,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고,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셨고,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는 걸 보고, 나도 이제 사랑해야 되죠. 이제 '적용'하는 거고요.
여기에 이제 '해석'은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형제를 미워해요. 대표적인 예를 보겠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가인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미워해요. 왜요? 아벨이 뭘 잘못했나요? 아벨이 가인한테 손해를 끼쳤나요? 아니에요.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됐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미워해요. 왜요? 자기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빛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제 형제를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그 형제가 성격이 나쁘고, 나하고 뭐가 안 맞아서 싫어하는 게 아니고, 이 형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사는 것이 싫은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세 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제 삶을 보고 구원을 점검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말씀을 순종하는가? 2. 두 번째, 예수님을 닮았는가? 3. 세 번째, 형제를 사랑하는가? 이 세 가지가 구원을 점검하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를 시험하는 세 가지 테스트입니다. 그래서 말씀 순종, 그다음에 주님 닮기, 그다음에 형제 사랑, 여기까지고요.

그다음에 조금 더 나아가겠습니다. 모임 안에, 이제 이건 나이 순서가 아닙니다. 영적인 순서입니다. 모임 안에 구원받은 지 오래됐어도 영적인 어린아이가 있을 수 있고,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됐지만 영적으로 성장해서 아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걸 전제로 하고 보겠습니다.
1. '아비들'의 경우 13절 보시겠습니다. 아비들의 경우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그다음에 14절에서도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태초부터 계신 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그 주님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가 뭐냐?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한다." 이게 사도 바울의 생애의 목표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주님이 친밀합니다. 주님이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다. 정말 이 같은 분이 어디 있는가? 주님에 대해서 강탄하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따라가고, 이게 믿음의 최고 수준입니다. 이게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고 있는 아비들에 대해서 사도는 더 이상 말 안 합니다. 그러니까 아비들, 청년들, 아이들, 이렇게 3명을 쓰면서, 세 종류의 영적인 단계를 쓰면서 아비들에 대해서는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써요. '이걸로 됐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감탄하는 것이 영적인 성숙의 절정이다라는 거고요.

2. 그다음에 두 번째, 이제 '청년들'입니다. 청년들은 13절에 보면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 사단을 이긴 겁니다. 14절 보시면 사단을 어떻게 이겼냐?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단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단보다 강하다니, 어떻게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말씀이 있기 때문에 사단보다 강합니다. 이건 저희들이 예를 들 수 있죠. 사단이 광야에서 주님 시험하죠.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시험하죠. 주님이 어떻게 하시죠? "기록되었으되" 그래서 말씀이 있는 사람이 이깁니다. 예를 들면 이제 시편 119편인가요? 그렇게 돼 있죠. "청년이 어떻게 하여 행실을 깨끗히 하리이까? 내가 죄를 범치 아니 하려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이제 처음에 이제 구원받고 나서, 그다음에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뭘 해야 되냐?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오고, 이 말씀이 내 속에 거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편안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자꾸 내 생각하고 싸우면 안 됩니다. 말씀은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 이런 것도 있잖아. 뭐, 꼭 그렇게 해야 돼? 이렇게 하지 말고, 말씀이 그렇게 말하면 그냥 순종하고, "그래, 맞아." 이렇게 가는 것이 구원받은 후에 영적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되면 이제 사단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을 이겼지만 저희들이 이제 적이 세 가지입니다. '사단', 그다음에 두 번째가 '육신', 세 번째가 '세상'이죠. 이게 이제 우리 적이죠. 사단은 어떻게 이기냐? 말씀이 있으면 사단이 이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단과 대적하라고 하죠. 그러니까 야고보도 그렇게 사단과 싸우라, 이렇게 나갑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요한은 이제 관점이 다르죠.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는 '사단을 이긴 것'입니다. 사단을 이기지 않고는 구원으로 못 들어옵니다. 그래서 "너희가 이겼다." 어떻게 이겼냐?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 주님 영접하고, 믿고 그럴 때, 주님 말씀이 우리를 이렇게 감동하니까, 말씀이 그렇다고 하니까, 우리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 믿고, 십자가의 의미를 말씀대로 받아들이고, 또 내 죄에 대해서도 말씀대로 받아들이고,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말씀 때문에 사단을 이깁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이 계속 구원받은 성도 안에, 계속 말씀을 읽고, 또 사랑하고, 또 읽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하면서, 사단을 이기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조심'해야 될 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제 보시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그랬는데요. 세상이 뭐냐 하는 거죠.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 놓고 우리한테는 세상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세상'은 뭐죠? 우리나라 성경이 그렇게 되 있지만, 중국 성경에 보면 그 번역을 그렇게 해놨습니다. "세상'인'을 사랑하사"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세상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번역이 좀 그래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뭐냐?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세상이죠. 놀랍고 복된 세상이죠. 그런데 사단이 들어와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세상 임금이 사단이 된 겁니다. 사단이 세상 임금이 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체제'입니다. '가치관'입니다. "꼭 하나님 믿어야 사람답게 사나? 믿어도 별 볼 일 없는 사람 많더만" 이라든지, "나는 성경, 교회, 그거 답답하고, 성경 고리타분한 거, 뭔 소리인지도 모르겠네. 그거 맨날 읽고 있고, 그거 조그마한 교회, 별볼일 없는 사람들 모여서 이렇게 하는데, 거기 뭘 나가는 가? 나는 세상이 좋다." 라고 하나님 없이도 사람이 행복할 수 있고, 가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그와 같은 것들을 입증하기 위해서 세상에다 넣어놓은 게 뭐냐 하면 이제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본적인 것은 '쾌락'입니다. 세상은 재밌어요. 그래서 이제 뭐 게임, 재미있죠.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되게 재미있습니다. 사람을 흥분시키고, 거기에 비하면 이제 성경은 재미없죠. 성경은 다른 종류의 재미가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세상에 즐거움을 넣어서 그 즐거움을 찾아서 세상으로 오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세 가지가 있죠. 1. 육신의 정욕, 2. 안목의 정욕, 3. 이생의 자랑, 이 세 가지를 사단이 세상한테 딱 넣어놓고 "좋잖아, 얼마나 좋은데. 이거 되면 진짜 좋다." 육신의 정욕, 이게 이제 창세기로 가보면,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요한일서 2장하고, 창세기 에덴 동산에서 사단이 유혹했던 선악과하고, 그다음에 이제 주님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잖아요. 그 세 가지 시험이 전부 이겁니다. 육신, 안목, 이생의 자랑입니다. 주님에게 이렇게 말하죠.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세요." 그다음에 세상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절하면 이거 드릴게요." 그다음에 이생의 자랑,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놀라운 거죠. 이생의 자랑이죠. 그다음에 이제 하와가 볼 때 선악과를 보니까 어떻게 돼 있죠? "먹음직도 하고" 이게 육신이에요. 먹음직도 한 거예요. 그다음에 "보암직도 하고" 이쁘게 생긴 거예요. 그리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지라" 그거 먹으면 지혜롭게 된다니까, 이제 자기가 하나님처럼 된 거죠. 그거 먹어서 내가 지혜를 가지면 나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없는 거죠.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이 없는데, 이 잘난 맛에, 그다음에 보기 좋은 것, 그리고 먹고 싶은  것, 이걸 하는 거죠. 이 세 가지를, 청년들에게 세상이 이 세 가지 덫을 놔뒀습니다. 이거 빠지면 안 됩니다.  오늘 저녁에 뭐 주는 거 아무거나 먹고, 맛이 없다는 둥 뭐 이런 소리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또 "아니 좀, 기왕이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잘 좀 포장해 오지. 이게 뭐야?" 하지 말고, 그다음에 "우리는 대전 가서 이거 먹었다. 성심당 빵이라고 알아? 파리바게뜨보다 매출이 더 있는 거 알아?" 하여간 이제 이상한 예를 든 거지만, 청년들이 세상에 가보면 이런 게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있을 때마다 사랑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죠? 왜 사랑하면 안돼죠? 이걸 사랑하면 뭐가 안 된다고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들의 큰 문제점이 뭐냐 하면, 이건 다시 보겠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이렇게 생각한 거 아닙니다. "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하고 헤어질 거야." 이렇게 한 게 아닙니다. 선악과가 나쁜 게 아닙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리스도인이 밖에 나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했을 때, 하면 안 되는 것, 몰래 숨어서 해야 되는 것, 물론 그런것은 하면 안되지만, 그런 걸 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합법적이고 좋은 것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선악과 좋은 선악과죠. 그런데 먹으면 어떻게 되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제 공부해야 되죠. 저도 이제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해야 되죠.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이제 세상이 하는 공부를 하다 보면 어떻게 되냐면, 이 공부가 합법적이고 좋은 공부예요. 그런데 그것이 성경을 멀리하게 되고, 공부를 하다 보니까 '성경이 이상하네.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말씀이 이렇게 써진 거 뭔가 좀 잘못한 것 같은데.' 하면 그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항상 육신의 정욕은 뭔가 나쁜 걸 거야, 안목의 정욕? 나쁜 영화들, 이런 거 보지 말라. 그거 아닙니다. 합법적이고 좋은 것들이,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 눈에 볼 때 선하고, 괜찮고, 추구할 만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멀어지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청년들이 그 면에서,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 멀어지는 거고 그다음에 이제 두 가지죠.
이제 청년들드에게 하는 이거 왜 하지 말라고 그러느냐? (시간이 부족해) 여기까지밖에 못하겠네요. 하나는 이것들은 다 '일시적'입니다. 이것들은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잖아요. 어떤 부자가 죽으면서 관에다가 "내 손 밖으로 내놔라. 그래서 많은 사람들한테 보게 해라. 나 같은 부자가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빈손으로 가는 거예요.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죠? 하나님께 인정받고, 영원토록 보존될 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엘살바도르 선교사로 가서 30대에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형제님이 순교하잖아요. 그 순교를 할 때 그분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엘살바도르 밀림 지대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총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원주민들이 도끼를 가지고 죽여요. 이거 총 한 방이면 이기는 거예요. 그런데 죽어요. 왜? 자기는 아내도 있고, 자녀도 있고, 30살밖에 안 됐는데, 왜 죽는가요? 이제 그분이 늘 평소에 했던 거죠. "영원한 것을 위해서 일시적인 것을 희생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그가 한 명언입니다. 그렇게 순교하라는 뜻은 아니고요. 하여간 일시적입니다. 그다음에 지나가는 것, 없어지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우리는 영원한 것,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이걸 기억하셔야 되고요.
두 번째,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자'입니다. 이게 성도입니다. 청년들은 누구냐? 자기 정체성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로마서 12장 1절, 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내가 성경을 통해서 분별하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정체성입니다. 세상에 있는 이 합법적이고, 좋아 보이고, 그렇지만 이걸 하다 보면 하나님 사랑을 멀게 하는 것들을 금하고, 하나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3. 그다음에 이제 '아이들'에 대해서는 하나만 보겠습니다. 아이들은, 애들은 문제점이 뭐냐 하면 '속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하면 거기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저도 귀가 얇아서 누가 뭐라고 말하면 "그런가? 그럴 것 같네." 막 이렇게 생각이 들거든요. 예를 들면 제 집에 문을 두드리면 "누구세요?"
그러면 여호와의 증인, 이런 게 나오죠. 또 누가 이렇게 길거리에서 누가 잠깐 "당신 얼굴을 보니까 뭐 어떻다, 조상이 어떻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면 좋아, 내가 구원받았잖아요. 말씀도 알잖아요. 이제 붙는 거예요. "그래 들어오세요." 성경 펴놓고, 어린아이들이 이제 그렇게 하다가 넘어지죠. 자기 지식보다 이 논리가 더, 여기는 전문가거든요. 이렇게 하려고 딱 훈련받고 나온 사람이고, 여기는 그냥 이제 구원받아서 그냥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주님 배워가는 단계에 있는데, 이제 이렇게 생기는 거죠. 그런데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어린아이들한테 "너희는 진리를 안다." 기름 부음이 있은 즉, 배우지 않아도 안다, 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저 사람들하고 말을 할 때 내가 논리적으로 졌어요.
분명히 저쪽이 논리적으로 맞아요. 그런데 저건 아니에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저것을 반박할 수 없지만, 내가 가진 논리로 저것을 물리칠 수 없지만, 내 마음속에서 '그래도 저건 아니야.'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어린아이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을 해도, '진짜 말 잘한다. 그럴 것 같네.' 그래도 내 머리로는 그렇게 동의해도, 내 마음속에 '그래도 저건 아닌 것 같아. 뭔가 이상해.'라고 하는 감각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또 이제 긍정적으로 보겠습니다. 이제 모임 가운데서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내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울림을 줘요. 누가 이렇게 말을 하면 '저거 맞다. 내가 그렇게 못하지만, 저 말이 맞다. 저렇게 살아야 돼.'라고 하는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갓 구원받은 성도들은 내 마음 안에 감동이 있는가? 말씀을 들을 때, 읽을 때, 기도할 때, 내 마음에 성령께서 주시는 어떤 감동, 울림, 이런 것들을 많이 누리시고, 기뻐하고, 붙들고, 그리고 뭔가 그럴듯한 말이지만, 그래도 저건 뭔가 좀 이상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거부하고, 이렇게 살아가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간 아비들, 청년들, 아이들에 대해서 이제 사도요한이 교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저희들이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말씀을 따라서 잘 성장해서, 처음에 잘은 모르지만 저건 아니야. 그리고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 길이 맞아, 라고 하는 길을 따라 계속 가서, 그다음에 이제 말씀이 풍성히 거해서 이제 이기고, 사단을 이겨내고,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고, 세상에 대한 분별력을 갖게 되고, 그리고 올라와서 주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를 감탄하고, 찬양하고 사는 삶으로 올라와야 된다. 이게 요한일서 2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