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 요한일서 1장 “생명의 말씀과 빛” / 26년 5월 1일 금요일
- 한봉래 형제님 사회 : 요한일서 1장부터 5장까지 말씀을 이제 금, 토, 이틀 동안 성경 읽기나 말씀 집회로 다 살펴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합당하게 저희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원하고요.
이 시간이 이제 성경 읽기 요한일서 1장입니다. 제가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10).
아멘, 말씀 1장을 이제 살펴볼 때 세 가지로 우선 나눠서 해보겠습니다. 1. 우선 요한일서 1장에 대한 전체적인 '개론'을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요. 2.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1장을 두 토막으로 나누어서 1절에서 4절까지는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2절에 보시면 "생명이 나타나셨다." 그러니까 그전에 계셨는데, 이미 존재하고 계셨는데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다."라고 하는 거고요. 그래서 이제 생명이 나타난 이야기가 1절부터 4절까지고, 그다음에 이제 5절부터 10절까지는 이제 '이 생명과 교제하고 있는가?' 이 생명과 교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시험 세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6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사귐이 있다고 말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이건 모순이다 죠. 6절, 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면" 그다음에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그래서 이제 세 가지 테스트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1절부터 4절까지 하고, 그다음에 5절부터 10절까지 이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먼저 이제 개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그다음에 형제님들께서 이제 결론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우선 요한일서를 보면 첫 번째로 첫 번째 특징이 누가 썼는지를 말을 안 합니다. 보통 서신서를 보면 이제 사도바울께서 많이 쓰셨죠. 그러면 이제 "나 바울은" 그다음에 이제 받는 사람도 있죠. "누구누구에게",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니까 이제 보내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절 없습니다. 여기 보내는 사람 이름도 없고 받는 사람 이름도 없습니다. 당연히 인사말도 없습니다. 처음에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마지막에도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보통 이렇게 이제 편지 형식을 갖추게 되는데, 전혀 없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없는 서신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가 없는 거죠. 요한이서, 삼서는 또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없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분이 '받는 사람에게 너무 잘 알려진 사람이어서' 자기를 밝힐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좀 이해해 볼 수 있고요. 그리고 이제 가끔 이렇게 말합니다. 서신 요한일서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서로 아는 거죠. 이렇게 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 사도 요한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왜 자기를 밝히거나, 혹은 받는 사람들을 밝히지 않았을까 했을 때, 이렇게 한번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들이 가끔 이제 모임마다 조금 다른데요. 예배드리러 이렇게 모일 때 보면, 저는 개인적으로 예배드릴 때 이제 만찬상 이렇게 놓고 성도들이 주일날 아침에 이렇게 모이잖아요. 그럼 모이면 이제 금요일 날 뵀나요? 그리고 이제 한 며칠 만에 본 거잖아요. 그런데도 성도들이 서로 인사하기보다는 그냥 주님 앞에 묵묵하게 있는 이런 게 훨씬 더 좋아 보이거든요. 인사해도 좋지만,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먼저 예배드리고 나서 인사는 나중에 해도 된다, 이제 이런 생각이거든요. 그렇게 마찬가지로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이 빠지고, 이제 그다음으로 말하려고 하는 주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주님에 집중하기 위해서 이걸 이제 뺐다, 아마 그렇게 좀 생각해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요한일서의 특징을 조금 보겠습니다. 우선 요한복음에 이어지는 거죠.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이게 복음서죠. 구원받도록 이렇게 쓴 거죠. 그다음에 이제 요한일서로 넘어오면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생명을 얻은 자들이,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참으로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서,
그런데 이제 실제로 저희 마포 모임에서 한번 해보니까, 요한일서 성경 공부해보니까, 맨 마지막 마무리할 때 보니까 요한일서를 읽고 오히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분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발언들이 이거거든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이런 구절을 들으면 '나는 죄를 짓는데, 하나님 자녀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이게 이제 오해해서 생긴 거죠.
어쨌거나, 요한복음에서는 구원받도록 생명을 얻도록 했고, 요한일서에서는 얻은 생명이 참으로 확신할 수 있는 영생인 것을 확인하는 내용들로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고요.
또 하나 잠깐 이건 성경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이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이제 이게 극명하게 드러내는 거라서요. 요한복음 1장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 말씀이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씀해 주는 분'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해 주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우리 말로 또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이렇게 이제 알려주신 분이죠. 그런데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돼 있냐면, 3절을 보시면 "이분은 창조주다" 이렇게 나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하나님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오신 이 예수님이 사실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제시하되 '하나님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사람으로 오셨지만 사실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한 거고요.
그다음에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2절, 이분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함께'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는 '위치'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옆에 계셨다는 거죠. 위치죠. 그런데 단순한 위치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과 교제하시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교제하시던, 혹은 '하나님을 향하여 만족과 기쁨을 주시던 분', 이게 이제 '하나님과 함께'라고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 이렇게 해놓고 다시 요한일서 보시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을 보시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여기도 말씀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인데, 이 말씀은 요한복음하고 뭐가 다르냐면 1절에 보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일서'는 예수님을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졌다, 보았다, 들었다. 이렇게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라고 하는 점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하나만 더 강조해 보겠습니다. 2절에 보시면 "이 말씀이" 이 예수님이 누구와 함께 있었다고요?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고 하고, 요한일서는 주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보시면 요한일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누가 썼냐? 사도 요한이 썼는데, 누구에게 보냈냐?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보겠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서신은 다는 아니지만 주로 '교회 서신'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이렇게 하고 지역 모임, 혹은 큰 틀에서 모임의 한 지체된 입장에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천국 열쇠를 받았잖아요. 천국이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혹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왕국'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왕국의 백성인 성도를, 왕국의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 지체로 보는 거고요. 사도 바울은 교회의 주체로 보고요.
그다음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아버지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형제 자매가 되는, 이 하나님의 가족을 기본적인 개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이든지, 아니든지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흑백입니다.
이제 지역 모임 같은 경우는, 이제 몸인 교회는 아니지만요. 지역 모임 같은 경우는 지역 모임은 지체로 있다가, 그러면 안 되지만 출교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족에서는 하나님의 가족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요한일서에서는 전부 대상이 하나님의 가족이고, 그다음에 이 '교제'라고 하는 단어가 전부 '구원과 동의어'입니다. 구원받았다,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게 같은 겁니다. 예를 들면 이제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는 교제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교제 밖으로 못 나갑니다. 교제 안에 있든지, 아니면 어둠 속에 있든지, 그래서 이제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흑백으로 이렇게 갈라진다, 이게 좀 특징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고요.
하나만 더 구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일서를 전체적으로 보자면, 1장 2절에 보시면 "생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생명이 나타났고, 생명이 나타났는데 이 생명은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저희들이 편하게 쓰면, "예수님이 누군가"라고 하는 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장, 2장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하고 있는 게, 1장 2절에 "이 생명이 나타난 바 됐다"라고 하는 단어하고 연관돼서 1-2장이 되고요.
그다음에 3장으로 가시겠습니다. 3장 5절을 보시면, "그가 나타내신 바 된 것을" 그래서 5절, 그다음에 8절은 이런 식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그래서 3장 5절, 8절에서는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 눈에 안 보이게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그분께서 '우리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활동하시고 말씀하시고 이렇게 하셨죠. 나타나신 것은 뭐냐 하면 5절에 보시면, "죄를 없이 하려고" 8절에서는 "마귀의 일를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1-2장은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그다음에 3장, 4장, 5장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맨날 하는 대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며, 무엇을 하셨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전체가 통으로 보면 이제 그렇게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개요를 여기까지 말씀드리고요.
형제님들께서 요한일서 1장, 요한일서 전체, 혹은 1장에 관한 개요가 있으시면 교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김보영 형제님 : 지금 1장 초반에서 육체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시면서 육체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집중적으로 그분을 자신이 실제 체험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이 같은 그 말씀의 배경에는 이단들의 우리 예수님에 대한 진리에 벗어난 분별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들은 일단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그야말로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우리가 말씀을 보게 되면 2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고요. 그런가 하면, 4장 2절 말씀을 근거로 하면 예수의 권위까지도 저들은 부인합니다.
그뿐이 아니고 우리가 이제 오늘 교제가 되겠습니다마는, 1장 8절과 그 10절 말씀에 보게 되면 이단,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죄성을 부인합니다. 자신들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2장 2절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 주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부인하고, 구원 자체를 주님으로만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이런 사실을 말씀 속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단들은 주님이 주신 그 새 계명, "사랑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의로운 삶 자체를 또 거부하고 있다라고 이렇게 3장 10절 말씀에 근거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 그리고 성도와 성도 간에 이루어지는 그 교제, 그 교제의 본질 자체도 저들은 부인하고 있다. 그것을 1장 3절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가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자들과 일꾼에 대한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고 있다고 하는 이런 사실을 2장 11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대략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사도 요한이 잘못된 어떤 그 교리를 가지고 있는 영지주의자들에게서 우리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참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요한일서 말씀을 '진리의 변증서'라고 이렇게 말하죠. 사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에 이와같은 그 서신서를 쓸 때까지 명확하게 어떤 그 교리가 이렇게 정리가 되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 사도 요한도 지금 이 같은 그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참된 진리인가를 이제 명확하게 선포하게 되고, 또한 그 같은 말씀을 선포함으로 인해서 성도들이 이제 더 확고한 신념과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가게 하며, 몸된 교회가 진리 안에 굳게 세워 지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라고 이렇게 저는 보고 있습니다.
- 이병호 형제님 : 요한일서가 기록된 목적에 대해서 이제 앞에 형제님 말씀하신 것처럼, 첫 번째는 '거짓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이제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표현을 하고 있고, 이제 대표적인 게 영지주지에 대한 그런 가르침이 교회 내에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강조하기 위해서 앞에서도 언급하신 것처럼 인사말 없이 바로 주님의 그런 신성과 인성을 말함으로 인해서, 이렇게 분명하게 주님이 실존 인물인 걸 강조하고, 또 이제 이 서신서가 쓰여진 목적이 이제 4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먼저 이것을 경험을 했습니다. 주님과 교제를 통해서 어떤 기쁨을 경험을 했고, 그리고 이것을 받는 수신자들이 이제 이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제 이것을 썼다고 이제 말하고 있고, 또 2장 1절에서는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해서" 이 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 이제 사회자 형제님도 언급하신 것처럼 죄에 대해서 이제 바르게 이해를 해야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죠. 우리가 이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이제 2장 12절에서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었다." 이게 우리의 신분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장 12절은, 우리가 이제 신분적으로 죄사함을 얻었는데, 그런데 이제 1장 9절에서는 또 이제 죄를 자백할 걸 말하고 있고, 그럴 때 우리 죄가 이제 사함을 얻는다. 그래서 2장 12절에서 이제 죄사함을 얻는 것은 완료 시제입니다. 이제 주님이 하신 사역을 근거로 그 효력이 계속 미치는 걸 말하고 있고, 이제 1장 9절에서 자백하고 이제 사함을 얻는 것은 이제 '현재 시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죄가 있고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이제 해결을 해야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제 죄에 대해서 우리의 '신분'과 이제 '상태'를 좀 구별해서 이해해야 될 필요성이 있는 것 같고요.
그리고 이제 이걸 기록한 목적이 이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말했고, 이제 네 번째로 이제 "우리에게 영생의 확신을 주기 위해서", 5장 13절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이 '영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바르게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영생이 있다는 건 단지 그 영원토록 산다는 게 아니라, 영생에서의 핵심은 이제 함께하는 거고, 그리고 1장 3절에서 말하고 있는 사귐, 교제, 이게 이제 영생의 핵심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 한봉래 형제님 : 개요는 이만 넘어가겠습니다. 요한일서에 대한, 또 개요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요.
그다음에 이제 이제 1장 1절부터 4절까지를 먼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장 1절부터 4절은, 1장 1절을 보시면 예수님을 사도 요한이 만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듣고, 보고, 주목하고, 만졌다." 그래서 이게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1절에 하고 있고요.
그다음에 2절은, 이 자기가 만난 이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1절은 사도 요한의 경험, 2절은 그걸 다 사도 요한이 다른 사람한테 전하고 있고,
그다음에 3절에서는 이제 '교제'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만났고, 그리고 전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이 뭐냐 하면, '교제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교제했습니다. 교제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선 여기서 이렇게 보겠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성경에서 보면 이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되냐면, 예를 들면 어디쯤이죠? 이사야서에 보면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날개가 6개가 있는데, 두 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개로는 발을 가리고 이렇게 납니다. 그러니까 천사들도 실제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굉장히 경외심을 가지고, 가리고, 가리고, 그리고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천사가 그렇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이사야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나중에 요한복음 12장으로 연결되죠. 그래서 이사야가 실제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뭐라고 느끼냐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자로 거룩한 주님을 뵀구나." 이게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이사야의 고백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베드로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이제 예수님이 그냥 사람인 줄 알았는데 누가복음 5장에 보면 고기를 잡잖아요 "깊은 데로 가라." 그래서 이렇게 그물이 찢어지게 물고기를 잡잖아요. 그때 예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그가 뭐라고 말하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으로서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주님이 떠나시지 않고 그를 부르시지만, 그래서 실제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했을 때 그가 느끼는 감각은 '두려움', '경외심'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보았고, 증거하면서 핵심 내용은 내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혹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교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다음에 4절에 그런데 "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너희들에게 쓰고 있는 것은" 어떤 성경은 이제 '우리의 기쁨', 어떤 성경은 '너희의 기쁨', 하여간 마찬가지죠. "이 교제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사이의 기쁨을 위해서 쓴다."라고 했습니다. 4절에서 하나만 적용하면 저희들의 기쁨이 뭐냐? 우리가 여러 가지로 기쁨을 누리죠. 그런데 우리 최고의 영적인 기쁨은 하나님과 교제할 때입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교제할 때입니다. 이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다른 기쁨하고 비할 데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 조금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형제님께서 1, 2, 3, 4절에 나온 생명과의 교제, 영생과의 교제에 대해서 또 교제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 박용수 형제님 :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지칭하는데요. 그냥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이렇게 시작해도 될 것 같은데, 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을지에 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교제하라고 했더니..
- 이병호 형제님 : 네, "태초부터 했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이제 이것은 "주님의 신성"을 지금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초부터 있다는 것은 주님은 '영원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라는 그런 의미이고, 그다음에 앞에서 요한복음 1장 1절하고, 1-2절하고도 비교를 해 주셨지만 이제 그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이라는 그런 의미이고요. 그런데 각별히 여기서는 이제 또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기 때문에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런 하나님, 이런 주님의 신성에 대해서, 이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뒷부분은 이제 주님의 '인성'이죠. "우리가 들었고, 눈으로 봤고, 주목하고, 만진 바라." 그래서 이게 참 시제가 좀 특이한데요. 여기서 이제 "들은 바요, 또 본 바요"는 이제 '완료형 시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과거에 그걸 경험했고, 그런 확신 가운데 이제 있음을 말하고 있고, 여기 이제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는 이제 '부정 과거 시제'입니다. 부정 과거 시제는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을 강조'하는 시제입니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그 사실을 강조하는 시제이고요. 그래서 이제 사도요한이 주로 쓰는 표현이 이제 '증거'라는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에 이제 증거, 증인,이라는 말이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그다음에 요한일서, 그다음에 요한계시록에 이제 사도 요한이 이제 증거 증인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게 분명하게 주님이 하나님이시면서 이제 육체로 왔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제 1절에서 강조를 해 주고 있고, 그다음에 이것을 2절에서 증거합니다. '증거한다'는 말은 그냥 단순히 말한다는 게 아니라 이건 '법적 용어'입니다. 법정에서 사실을 책임지고 말하는 그런 증인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러니까 요한이 지금 자기가 경험한 것을 분명하게 추호의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지금 전하고 있음을 이제 증거한다. 이런 단어를 통해서 말하고 있고, 또 '전한다'는 단어도 이것도 그냥 단지 어떤 사실을 그냥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것은 어떤 확실한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한다'는 그런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신으로서 지금 그가 권위 있게 이걸 지금 전한다는 그런 의미로 이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 일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성도님께서 저기 진행하다가 질문, 혹은 조금 더 첨가하실 말씀이 있으면 이렇게 자유롭게 해 주시고요. 박용수 형제님 질문은 항상 몰라서 하는 게 아니고 알면서 하는 질문이라 영 대답하기가 껄끄럽습니다.
잠깐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찾아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시면 예수님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요한일서로 오겠습니다. 요한일서로 오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여기서는 생명의 말씀으로 표현해 놨습니다. 하나만 더 찾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책인데요. 요한계시록 19장 13절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 "생명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이제 표현이 세 가지 표현이 나와 있는데 이제 동일하신 분을 강조점이 다른 거죠.
"말씀"이라고 할 때는, 우리는 말로 내 생각을 표현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이제 의사 전달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말씀이라고 할 때는 이건 '계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는 분입니다. 여기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시는, 밝혀주시는 분이고, 그게 이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시다. 이를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 이게 이제 요한복음을 통째로 말할 수 있고요.
그다음에 요한일서는 "생명의 말씀"은 이제 그 '진리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진리로 생명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원받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 그랬을 때 이게 진짜로 사는 거다. 이게 구원받은 성도다운 삶이다. 이렇게 살면 그건 말로는 아무리 구원받았다 해도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 이렇게 나타나는 거다. 그래서 이건 '실행'에 관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요한계시록에서는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지 않거나, 이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이런 개념, 그래서 이제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표현은 이제 요한복음과 계시록에 관련된 여기서는 하여간, '실행'에 관련된 것이다. 믿는 자들의 실질적인 삶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그걸 표현하고 점검하고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다.
- 최재홍 형제님 : 2절에는 이제 1절의 "생명의 말씀"이 누구이신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주 예수 그리스도시고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영원한 생명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고 이제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고' 친히 먼저 다가오셨음을 말씀해 주고 있고요.
2절에서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요한과 이제 다른 사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직접 목격했고 경험했던 그 사실을 바탕으로 이제 확신 있게 증언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본 그리스도를 교회에 이제 공적으로 증언하고 있고요. 현재 저희들은 저희들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그의 증언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영원한 생명이 어떠하심을 또한 보게 됨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2절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로 적혀 있는데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이제 태어나서부터 그분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 예수님께서는 본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이셨고, 이 땅에 태어나서 이제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이미 먼저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오신 분이심을 이제 말씀해 주겠습니다. 그래서 영원 전부터 계셨던 분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고요.
이제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이제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음을 말씀해 주고 있고요. 사람이 어떻게 해서 찾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이제 사도들도 보았고 이제 증언하고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3절에서는 이제 사도들의 '증언하고 있는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요. 사도들이 경험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도 함께 알기를 원하고, 누리기를 원하기에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사귐은 이제 교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고, 3절 말씀대로 우리의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제 교제할 수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고요. 또 이제 사도를 누리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교제 안으로 함께 저희들이 들어오도록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도들의 교제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 자신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계시고요.
4절은 이제 앞서 1절부터 3절까지 말한 생명과 사귐의 열매가 결국에는 4절에 나와 있는 "충만한 기쁨"으로 나타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기쁨의 근원이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음을 말씀해 주고 계시고요. 또한 이제 기쁨은 하나님과의 사귐에 그 결과물임을 또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귐이 없다는 것을 또한 말해주고 있게 되는 것이고, 또한 이 기쁨은 그리스도를 저희가 점점 더 깊이 알아가고 친밀히 알아갈 때, 점점 그 기쁨이 더 커짐을 이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 이제 "충만케 하여 한다"고 나와 있는데요. 충만케 하는 것이 '완료 수동 시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미 기쁨이 가득 찬 상태로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는데요. 이런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그 기쁨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감을 이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세상적인 즐거움이나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 안에서 오는 영적인 기쁨을 말씀해 주고 있고요. 이 기쁨의 근원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교제 안에 삶이 바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행복한 기쁨임을 또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 이상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여기 박영수 형제님, 1절에 "태초부터"가 언제인지? 그리고 1절에서는 "듣고, 보고, 주목하고, 만졌다"라고 돼 있는데 이 단어들이 사도 요한에게 실제로 어떻게 경험된 건지 좀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박용수 형제님 : 적혀 있는게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아마 뒷부분에 대해서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이렇게 여쭤보던 장면 한 것과 연관이 될 것 같고요.
그리고 "태초부터"가 언제였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냥 말을 하자면, 제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아까 물어봤는데요. "태초부터 있는"에 대해서는 예수님 이전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고, 그래서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말씀이니까, 생명은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전에 김동원 선생님이 교제하실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창조와 구원'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표현할 때 아주 합당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이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절망감을 느낍니다.(웃음) 저희들이 이제 참고 자료가, 이제 왓더바이블 티치스를 보면 AMS 구딩이라는 형제님이 요한일서 쭉 이렇게 해석해 놓으셨죠 그리고 저기 DS 오디오 가면 마포 모임에서 요한일서를 쭉 교제했습니다. 1장 1절, 이거 다 교제한 겁니다. 그런데도 이제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이제 "태초부터"가 이제 우리나라 말로는 요한복음 1장에 있는 "태초부터" 하고 똑같이 이렇게 번역이 돼 있잖아요. 그런데 저희들이 잠깐만 영어를 보면,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1절에 있는 태초에 '인더 비기닝'입니다. 'in' 전치사가 쓰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이건 이제 '창조 시점'을 가리키는 거죠. 요한복음은 이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영원을 가리키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나님이 계셨던 영원을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다음에 이제 요한일서는 영어로 읽어봐요. "태초부터" '프롬 더 비기닝'입니다. '인더 비기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는 건데요. 기본적으로 여기 "태초부터"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주님의 '성육신', 주님이 베들레헴에서 사람이 되어 오셨던 때부터입니다. 그걸 가리키고요. 2. 아니면 두 번째는, 보통 이렇게 많이 보는데요. 두 번째는 아주 분명하게 말하면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입니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은 어린 양이다."라고 지적할 때 거기 사도 요한이 있었죠. 사도요한하고 안드레가 있었죠. 그리고 그다음 날 주님이 또 지나가니까 침례요한이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래서 이거 제가 한번 설명한 적이 있는데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속죄의 제사를 드릴 것을 말한 것입니다. 두 번째, 그다음 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인격'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고,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이렇게 자기 선생님인 침례 요한이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과 안드레가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뒤를 돌아보시면서 "무엇을 찾느냐?" 그러니까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그래서 그날 같이 간 그때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내가 들었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을 포함한 사도들입니다. 열두 사도들이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생명의 말씀이었다. 진리였다, 하는 거죠.
그다음에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게 아니고 그 생명을 실제 삶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님의 행동을 보면, 그 생명이 나타나는 것들을 눈으로 목격한 거죠. 그리고 "주목하고"는 어떻게 해석했죠? 그리고 이걸 자기가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행동하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왜 그렇게 하셨는가를 생각해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만진 바"는 예를 들면 아까 이제 형제님 이야기한 대로 몸에 예수님의 품에 기대기도 했죠. 실존하는 사람이셨죠. 몸에 기댈 수 있는, 또 주님께서 실제로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을 때 거기 오셔서 "내 손과 발을 만져보라." 영은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나를 만져보라." 그리고 같이 "먹을 게 있느냐?" 생선 잡수시고, 이렇게 하죠. 그래서 제자들이 만졌는지는 모르지만 만져봅니다. 만질 수 있었던 거죠. 주님과 함께, 그래서 이제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경험으로 보여집니다.
그다음에 부족하시면, 조금 김보영 형제님 혹시 부족하시면 정리해 주시고요. 5절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5절부터 10절까지는 이제 이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혹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테스트입니다.
세 가지로 교제하는 건데 만약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6절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사람", 그다음에 8절은 "죄 없다고 말하는 사람", 이제 그런 이단적인, 지금도 우리 가운데 요즘에도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저희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거죠. 분별해야 되는 거죠. 10절,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이 세 가지 주장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그리고 8절에 죄 없다고 말하기, 그다음에 10절에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이런 주장들이 구체적으로 또 뭘 말하는 주장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틀렸는지에 대해서 이제 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녹음 파일이 잘 들리지 않아 적을 수 없습니다.)
(대략 박용수 형제님이 "태초부터"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하시고 그에 답하시는 내용입니다.)
- 한봉래 형제님 :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지금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설명하는 게 아니고 요한일서는 주로 예수님이 사람이다.
요한일서의 이단들은 주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이 실제로 사람이었다라고 하는 걸 부인하는 이단들과 지금 논쟁하고 있는 거니까. 이제 실제로 내가 만진 분이다. 내가 소리를 직접 들었다.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이걸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걸 말하려면 예수님이 보고 만지고 했는데 예수님이 최초부터 계시면 안 되죠. 계셨었지만, 그거보다는 공생애 시작을 하신, 실제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태초인 것이죠.
- 장승훈 형제님 : 그런데 그렇게 보면 태초라고 다시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박용수 형제님 : 그런데 그 태초는, '태초'라는 말은 진짜 태초잖아요. '완전 시작'이잖아요. 누가 태초를 공생애의 시작으로 봐요?
- 장승훈 형제님 : 그러니까 지금 방금 했던 논의를 따르면 태초를 우리가 원래 알고 있는 태초로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 한봉래 형제님 : 태초를 '공생애의 시작의 태초'라고 표현하면 안 되나요?
- 장승훈 형제님 : 왜냐하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성을 입으셨다는 내용을 방금 언급했잖아요. 그런 내용들을 하려면 이 태초가 어떻게 보면 번역이 잘 된 태초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나 싶어요.
- 박용수 형제님 : 그럼 번역이 잘못했네. 그냥 이거 지워야 겠는데....
- 김보영 형제님 : 8절 말씀에 대해서 좀 우리가 진리적 차원에서 분명하게 좀 교제가 돼야 되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이 들어갑니다.
사실 로마서 8장 1절 말씀을 근거로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말씀하시고, 또 히브리서 10장 10절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고요. 또 히브리서 17장에도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죄를 지으면 자백해야 되고, 자백할 때 우리의 죄를 사하셔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그 부분을 좀 형제님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우선 6절을 보시면,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잘못된 행동을 한다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어둠 속에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위치가 지금 어둠 속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으면서, 그러니까 이제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면, 죄를 지으면서 "그래도 나는 구원받았다." 라고 하는 주장이 6절입니다. 자기가 이제 계속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나는 구원받았다. 그러면 이제 이유가 뭐냐 그러면 아까 형제님이 말씀해 주신 대로 우리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걸 근거로 "내가 지금 죄를 짓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예수님 믿을 때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됐으니까, 지금 내가 짓는 이 죄라 할지라도, 내가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6절입니다.
그다음에 8절은 "죄 없다 하면" 했을 때 이 '죄'라고 하는 단어가 '단수'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영어로 볼 때 단수라고 돼 있으면 이게 죄의 '본성'입니다.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니까 '죄 없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해석하겠습니다. '나에게는 죄를 지으려고 하는 욕구가 없다.' 나는 거듭날 때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끌림이 없어졌다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다음에 10절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는 요건 단어가 '신스', '복수'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악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건 이제 '완전주의'라고 합니다. 나는 구원받은 후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원받은 후에는 완벽하게 산다. 이게 10절.
그다음에 8절은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의 본성만 있다. 성령의 생명만 있고, 선을 행하려고 하는 욕구만 있고, 죄에 대한 욕구 자체는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아담의 후손에서 다른 존재로 변화돼 버렸다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이거 다 말도 안 되죠. 그다음에 이제 6절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 구원받기 전하고 똑같이 행동하면서, 그래도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이 세 가지 주장이 있고요.
이것에 대해서 다시 이제 비교해 보면, 6절, 7절을 묶고, 8절하고 9절을 묶고, 그다음에 10절을 그냥 단독적으로 놔두든지 아니면, 10절을 2장 1절하고, 2장 1절에 보면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죄를 범하면" 하고 10절을 2장 1절과 연결시킬 수 있고, 혹은 연결시키지 않고 그냥 단독적으로 놓으면, 6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어둠 속에, 구원받지 않은 상태 속에 있으면서도 하는 사람은 7절에 보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돼 있기 때문에, 그는 '주님의 피로 인한 깨끗하게 함을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죄 의식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이제 십자가로 죄는 끝나버렸다. 이제 구원받은 성도는 또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이것이 죄니, 뭐니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이 실제로 좀 있었고요.
그다음에 8절에 있는 "죄 없다"는 9절에 있는 자백하고 연결시키면 '자백은 필요가 없답'니다. 나는 자백할 필요가 없다. 죄에 대한 본성이 없는데 뭘 자백하냐?
그다음에 10절은 "나는 죄에 대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거죠.
이거에 대해서 이제 잠깐 우선 쉬운 것부터 해보겠습니다.
10절, '죄된 행동은 하지 않는다'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이제 복음을 어떻게 전했냐면, 우리들이 구원받을 때 이제 구원에 대해서 세 가지 시제로 이렇게 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한 단어를 썼지만 구원은 세 가지 시대가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가 있고요. 그다음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냐면 빌립보서 2장에 나옵니다.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그다음에 세 번째, '구원을 미래에 받는다'라고 하는 표현도 나옵니다. 주님이 오시면 그때 구원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이라고 하는 단어를 성경은 세 가지 시제로 표현합니다. '구원받았다'가 있고, '지금도 구원받고 있다'가 있고, 그다음에 '구원이 나중에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표현돼 있죠.
다시 보면 우리가 구원받은 건, 무엇만 구원받았냐면, 사람은 영, 혼, 몸으로 이루어져 있고 구원은 뭐만 받았냐 하면 '영혼'만 받았습니다. 뭐가 아직 안 받았죠? 몸이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아직 우리가 구원받지 않을 때의 몸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몸은 언제 바꾸어지느냐? 주님 공중에 오실 때 몸까지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 몸이 완전히 변화될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제 '범죄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아직 몸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완벽하게 죄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전한 복음과 모순됩니다. 우리가 몸이 있는 한, 8절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몸을 갖고 있는 한 우리 안에 죄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그렇게 돼 있죠.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를 기뻐하고", 그런데 다시 보면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다시 '자기 속에 죄에 대한 욕구'가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8절, 10절은 전부 처음에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전한 복음과 어긋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교재 가운데 있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은 후로는, 이걸 보통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두 번째 축복을 받아서" 그리고 혹은, 저희들이 굉장히 존경하는 아주 유명한 분인데 존 웨슬리라고 하는 분이 이제 이런 식의 주장을 간혹 했었습니다. "우리는 죄 없이 완벽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저는 그런 주장을 하는 분에게 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뒤통수를 한번 때려놓고 성질을 내는지 안 내는지 한번 봐야 된다. 이유 없이 한 대 그냥 확 때려놓고, "어? 죄 안 진다며?" 이게 간단하게 이건 무너지는 거죠.
그다음에 '자기 속에 죄가 없다'라고 8절에서 말하는 사람은, 사람은 몸이 아직 구원받지 않았고 몸을 놔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을 불완전하게 만드신 게 아니고 몸을 그대로 놔둠으로써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을 의지하여, 승리의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인데, 자기 안에 죄에 대한 본성이 없다라고 하니까 이건 말이 안 맞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6절은 이제 '어둠 속에 있으면서'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십자가에서 미래의 죄까지 용서됐으니까, "나는 죄를 지어도 이거 용서된 죄다. 이걸 다시, 그걸 죄라고 부를 필요가 있냐?"에 대해서 저희들이 이제 역설적으로 이렇게 늘 말하는 거죠. 성경은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죄 용서받은 사람은 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조금의 죄도 자기 안에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죄 용서됐으니까, 이제 죄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다가 사람의 논리입니다. 그다음에 생명의 논리는 이 죄를 위해서 나는 죄 용서를 받았지만, 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어떤 대가가 지불됐냐면 하나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 피 흘림으로 죄 용서가 된 겁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불한 게 없으니까 죄 용서 기쁨으로 받는 거지만, 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얼마나 끔찍한 것이며, 하나님이 그냥 용서해 주지 않고 반드시 자기 아들을 죽이는 대가를 통해서 죄 용서가 주어진 것을 안다면, 그는 죄를 지어놓고 "이거, 뭐 용서된 건데, 뭐"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게 생명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이제 6절처럼 말하는 사람은 죄 용서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죄 용서가 어떻게 주어진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주님의 생애를 모르는 거죠. 이제 그렇게 하고 그래서 이제 6절은 미래의 죄까지 단번에 영원히 용서됐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여기는 거 혹은 죄를 짓고도 무감각한 태도를 말하고요.
이제 그게 그다음에 7절 보시겠습니다. 6절과 7절을 하면 7절이 좀 이상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그러니까 6절은 어둠 속에서 행했잖아요. 그러니까 위치가 어둠입니다. 7절은 '빛 가운데'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사는 것이죠.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거룩을 기준으로 살면,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의식하면서 살면, 조그마한 죄도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면, 이게 빛 가운데 행하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과 계속 교제하고, 하나님과 계속 교제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다시요, 우리가 죄를 짓고 그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으면 예수님 피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장로교 측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제 믿을 때 구원받죠. 죄가 용서되죠. 그런데 믿은 후에 죄를 어떻게 할 거냐? 저희들은 믿은 후 죄까지 하나님이 용서해 놓으셨다, 이렇게 성경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죠. 그런데 이제 교파에서는 믿은 후에 죄는 자백을 해야 된대요. 그리고 자백을 하면 용서된대요. 그래서 이제 질문이 나옵니다. 이제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 혹시 자백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사고가 나서 죽어버렸어요. 자백하려고 그랬는데 교통사고가, 물론 아주 극단적이고 말도 안 되는 예지만 그렇게 가정해 보는 거죠. 자백하려고 했는데 죽어버렸어요. 그러면 자백을 못 했으니까 지옥 가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제 그런 예가 있습니다. 유명한 셰익스피어 맥베드라고 하는 5대 비극에 보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거기 보면 맥베드를 죽이려고 하는데, 죽이고 싶었어요. 죽이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죽여요. 이제 그런 게 전부 어리석은 그런 종교인 거죠. 그래서 자백하면 용서받는 게 아니고, 그래서 이제 자백이 용서 조건이 아니고, 거꾸로입니다.
용서받은 사람이 자백합니다. 용서받았으면 자백합니다. 용서 안 받은 사람이 자백하는 게 아닙니다. 하여간 7절에 보면, 죄를 짓고 자백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아서 구원의 생명 속에서 살고 있으면, 계속해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이게 뭔 죄를 깨끗하게 하냐? 그러면 우리는 자백한다고 했을 때인가요? 죄를 짓고 나서 딱 의식이 된 거예요. '이거, 잘못했네.'라고, 그러면 그걸 자백하겠죠. 그런데 우리의 죄 중에는 이런 죄들이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는 죄예요. 자기 보기에는 죄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사니까, "뭐 이거야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죄라고 느끼지 않은 죄, 혹은 알지 못하고 죄, 죄를 지어놓고도 그걸 의식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알지 못하고 지은 죄, 이런 죄들이 있는 거죠. 이런 죄들을 그리스도의 피가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백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 중에서 일부입니다. 자기가 딱 의식이 된 거거든요. '이건 잘못했네.'라고 하는 것을 자백하면 용서받는 게 아니고, 우리가 구원받은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안에서 살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거죠. 그렇게 돼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자백'이라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이제 이렇게 됩니다. 혹시 이제 성도님들 가운데 이럴 수 있거든요. 주일날 만찬 예배를 드려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때 거리낌이 없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토요일 저녁에 싹 한번 일주일을 돌아봅니다. "아이고, 지금 저 잘못했습니다. 이거 잘못했어요." 그리고 이제 양심이 깨끗해서 주일날 만찬에 나오는 것은 안 됩니다. 이제 그게 뭐가 문제냐 하면, 내가 알고 의식한 행동만 죄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은 순간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이건 좀 문제다라고 하는 것만 죄가 아니고, 나의 삶이 하나님의 거룩한 눈에서 볼 때는 택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죄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부족하고 문제가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피가 계속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만찬상에 올 때는 내가 깨끗 내가 이제 정결한가를 보는 게 아니고, '만찬의 의미'를 생각하고 오는 겁니다. 이건 주님을 기억하러 오는 거다. 내가 깨끗한가만 살피는 게 아니고, 하는 그런 면이 있고요.
그래서 이제 그런 면에서 그다음에 '자백'에 대해서 한번 말씀드리면, 자백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많은 형제님들이 그래서 이 단어를 설명하는데요. '하나님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지은 죄가 있어서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 "잘못했습니다. 그때, 제가 어쩌다가 그걸 그때 그렇게 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하면 뭐가 문제가 되냐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미래의 죄까지 용서해 줬다는 게 문제가 되잖아요. 다 용서해 놓았는데 또 이걸 가지고 "주님, 또 용서해 주세요." 하면 이게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자백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그 견해에 내가 '동의'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원치 않게 보는 겁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살아도, 그래서 우리가 뭘 잘못하면 그것이 이제 '아, 이건 죄구나.'라고 생각되거나, 혹은 죄까지는 아니고 '이건 뭐 이렇게 안 그런 사람이 없겠지.' 한 거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누릅니다. 그래서 내 마음과 내 양심에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을 지적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또 내 양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저항하지 말고, 동의하고, "하나님 맞습니다." 그래서 '자백'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깨닫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수준에서 못 미친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지적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꺼이 바꾸기 위해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과 기꺼이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 이게 이제 자백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그리고 이제 9절에서도 그렇죠. "자백하면" 자백한 죄만 용서하시는 게 아닙니다. 거기 보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이 불의는 죄하고 이제 불의가 같이 쓰였으니까요. 죄를 지으면, 꼭 죄가 아니고 하여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않은 행동을 하면, 1. 첫 번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나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도 '교제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잘못한 자식이지만 자식입니다. 구원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이제 보통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일서 설명할 때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 가족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잘못을 했어요. 그래도 아버지죠. 아버지라고 부르죠. 그런데 아버지하고 약간의 어떤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 그걸 해결하는 겁니다. 그래서 죄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끊는 게 아니고 관계를 서먹하게 만듭니다. 죄를 지으면 서먹하게 만들고, 2. 두 번째 죄를 지으면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립'니다. 시편 51편 다윗 같은 경우는 이제 구원의 즐거움, 정말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내 최고의 기쁨이고, 그것보다 더한 건 없다가 이제 다른 쪽으로 마음이 가니까, 이게 즐거움이 약화되거나 즐거움이 없는 겁니다. 3. 그다음에 죄의 문제점 세 번째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능력이 없어집'니다.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셨잖아요. 주님께서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돌이켜야 형제들을 굳게 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하나님의 수준의 합당치 않게 행동할 때 생기는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가 어색해지고, 즐거움이 약화되고, 그리고 섬기는 능력이 약화됩니다. 이 부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전부 저기 상태가 수준이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조그마한 것도 민감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좀 수준이 낮고, 그러겠지만 하여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누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내가 너를 어떻게 불렀는데" 이런 게 있는 거죠. 그러면 이런 걸 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 동의하고, 그다음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회복시키고, 고치고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징계와 여러 가지 말씀과 교제와 이런 걸 주실 때, 기꺼이 밖에 나가는 겁니다.
하나만 더 말씀을 드리면 "빛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 8장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의 빛이다." 그러셨죠. 세상의 빛에 누가 오냐면 바리새인하고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랬더니 다 가버립니다. 이건 빛 가운데 온 거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빛 가운데 왔죠. 그런데 도로 다 가버렸어요. 이건 온 거 아닙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행하면"이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정죄할 수 있을 만큼 죄 없이 산 사람, 행동으로 간음이 아니고 마음으로도 간음하지 않은 사람," 이게 예수님 기준이잖아요. "그 사람이 돌로 쳐라." 이렇게 하신 거죠. 그랬을 때 그들이 가버리면 안 되고요. 그런데 이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은 와 있죠. 자기는 세상 율법으로도 죄인데, 예수님 앞에 오니까 이거 얼마나 죄입니까? 이 여자가 정말로 가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안 갑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온다고 하는 것,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준 가운데 온다. 그다음에 예수님의 기준에 의해서 기꺼이 내 죄가 폭로되는 것을 감수한다.
그리고 세 번째, 이 빛이 나의 어마어마한 죄를 폭로하면서 놀라운 것입니다. 이 빛은 '치유'합니다. 이 빛이 지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내가 빛 가운데 가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나를 자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추악한가를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걸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놀라운 역설입니다. 치유됩니다. 정죄하지 않는다. 그다음에 여기까지 오고 그다음에 한 번 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죄가 용서됐을 뿐만 아니라, 이제 거룩하게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살 수 있는 치유가 또 들어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을, 이 빛 가운데에다가 한번 이렇게 적용시켜 보시면 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걸로 생각이 됩니다.
제가 말을 많이 했는데 다른 형제님들이 조금 교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직 7분 남았습니다. 대전 중구 모임만 있는 놀라운 기계입니다.
- 이병호 형제님 : 그래서 이제 5절에서는 이제 "하나님이 빛이시다" 이렇게 말씀을 해 줬고, 이제 6절, 7절, 8절, 9절 10절 보면 이제 저희나라 성경에는 7절에 이제 '만일'이 없지만 이제 영어 성경을 참고하면 "그러나 만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래서 '우리'라고 했기 때문에 이제 사도를 포함해서 예외 없이 누구나, 이제 죄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가져야 될지를 6절에서 10절까지 이제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데, 그래서 이제 요약을 하자면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십니다. 죄를 지적하면 그걸 인정합니다. 죄라는 걸 인정하고, 자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러면 깨끗하게 되어지고, 이것은 어떤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 사귐, 지금 1장에서 핵심이 이제 하나님과 사귐, 교제인데, 이제 교제의 회복을 위해서 이 죄를 인정하고, 이제 참된 신자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거짓 신자는 이제 하나님이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거짓 신자는 "아닙니다. 이거 죄 아닙니다. 죄가 없습니다." 부인합니다. 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고, 그 안에 말씀이 없는 것이고, 당연히 하나님과 교제가 없는 거고, 구원받지 않은 거다. 이제 이렇게 기억을 할 수가 있을 것 같고요.
이제 저는 사실 9절 말씀을 좀 많이 묵상을 했는데요. 우리가 이제 죄를 짓죠. 이제 삶 가운데 죄를 지었을 때 '자백'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 형제님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이게 '현재 시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생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이렇게 죄를 자백하고 이제 해결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다" 이 '사하시고', '깨끗해 하는 게' '부정 과거 시제'입니다. 그래서 이제 좀 어렵긴 하지만, 이제 부정 과거 시제를 이제 잘 좀 이해를 할 필요가 있는데요. 그러니까 현재 죄를 자백했기 때문에 현재는 용서를 받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 부정 과거 시제라고 해서, 이게 과거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 '부정 과거 시제'는 그 문맥을 살펴서 실제로 이제 확인을 해야 됩니다. 특별히 이 '가정법'에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동작이 단번에, 완전히, 그 한 포인트로서, 이게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 어떤 그 장면을 이제 강조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죄를 자백했을 때, 이 부정하고 시제를 생각했을 때, 하나님이 그 순간 즉각적으로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시고, 죄를 사하시고, 깨끗게 되어져서 우리가 그 즉시로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어지고, 즉시로 그 기쁨이 이제 회복되어지는, 그런 측면을 이제 부정 과거 시제에서 이제 말씀하고 있음을 이제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 박용수 형제님 : 저는 8절에 "속이고"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요. 이제 아시겠지만 죄에 대해서는 헬라 언어에서는 '목적을 벗어났다' 이런 뜻이고요. 그래서 그리고 '속이고'는 '길을 잃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거를 그냥 문맥대로 얘기해 보면 '만일 우리가 표적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길을 잃게 된다.' 이런 뜻이 되고요.
이거 볼 때 운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전할 때 저희가 똑바로 가는 것 같아도 항상 벗어나고 있거든요. 눈 감고 운전해 보면 알 거예요. 그렇죠, 눈 감고 운전하는 사람 없잖아요. 왜냐하면 계속 벗어나기 때문에, 그러니까 항상 자기가 벗어나는 걸 인정하고 조금씩 조금씩 방향을 틀어서 길을 가는 것처럼 성도의 삶이 그렇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똑바로 간다라고 해서 눈을 감고 운전해 버리면 그 사람은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저는 "의로우사"에 대해서 또 생각을 해봤는데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나왔는데 여기에서도 사람이 만약에 의로우면 그 사람은 정죄하게 됩니다. 우리도 사람끼리 얘기할 때 어떤 의로운 사람 앞에서 나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나는 죄인이고 저 사람이 의로우면 그 사람은 저를 정죄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로움은 정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치 이거에서 마태복음 8장에서도 문둥이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렇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깨끗함으로 이어진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한봉래 형제님 : 김 형제님, 혹시 더 하실 이야기 없으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공식적인 교제는 여기까지 하고, 또 끝나고 나서 비공식적으로 교제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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