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사도행전

사도행전 16장 :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과정

박이레 2025. 3. 28. 23:03

< 사도행전 16장 :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과정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제가 사도행전 쭉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사도행전 약간 떼어서 16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1절부터 40절까지 빌립보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그 결과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침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 16:11-40).

아멘.
이제까지 사도행전은 어떤 관점에서 쭉 이렇게 살펴봤냐면, 복음의 메시지가 유대교하고 뭐가 달랐나? 유대교하고 이제 계속 갈림길을 이렇게 쭉 살펴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 거부한 사람, 그리고 이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이 복음이 이제 점점 갈라져 왔죠.
그런데 2차 전도 여행부터는 이제 복음이 어디로 들어가냐면 이제 유럽으로 들어갑니다. 3차 전도 여행은 이제 아시아로 들어갑니다. 에베소니까요. 그래서 이제 유럽과 아시아로 복음이 증거됐을 때, 이때부터 복음의 문제점은 복음의 내용이 구약 성경하고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가 아니고 이제 그 유럽의 유럽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명과의 복음과의 충돌입니다.
예를 들면 이제 여기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빌립보에서 뭐가 문제가 있냐면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을 수 없는 풍속을 전한다." 우리는 로마 사람으로서 이렇게 쭉 살아왔는데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의 가치관과 충돌한다라고 복음을 반대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이제 복음이 이제 이와 같은 문화적 어떤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가 라고 하는 것이 이제 16장부터 이제 사도행전의 초점이 됩니다.
약간 우리 식으로 적용해 보면 이제 우리나라에 이제 복음이 들어오고 이제 구원받고 했을 때 제일 문제가 뭐였냐면 제사 제도입니다. 우리는 항상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왔는데 복음이 들어오면서 제사를 못 지내게 합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이제 예수 믿는 것이 뭐가 문제냐, 이건 조상도 인정하지 않는 몰상식한 받아들일 수 없는 종교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우리나라에서 꽤 오랫동안 겪었던 갈등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 여기 이제 로마 사람하고 이제 저희들도 한번 비교해 볼 수 있고요.
그래서 이제 첫 번째 이제부터 복음은 그 지역에 있는 그 문화와 가치관과 충돌하게 된다, 하는 거고요.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이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제 유럽의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곳이 빌립보입니다. 그리고 빌립보는 사실은 이제 위치적으로 보자면 여기가 그리스입니다. 그리스인데 문화적으로 보면 이제 로마 문명이죠. 그래서 로마 사람이 받을 수 없다라고 반대하고 사도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과 실라 둘 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은 재판에 넘겨져서 선고를 받기 전에는 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기가 로마 사람이라고 말 안 합니다. 로마 시민권이 있다라고 말 안 합니다. 그리고 때리고 맞는 일을 당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나가라고 하니까 나도 로마 시민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왜 그랬는가? 이런 것들을 잠깐 살펴보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이제 복음이 어디에 초점을 맞췄냐면 이제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다. 구약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다라고 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면, 이제는 시의 주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여기서는 이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분. 온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피 흘리셨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제 이제 주님이 소개되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는 세 번째 특징은 앞으로 이제 계속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님이 강조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런 것들이 이제 이 세 가지 특징을 앞으로 이제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하고 있는 이유들이 뭔가 이걸 이제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만 더 말씀을 드리면 사실 빌립보 지역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고 저희들이 빌립보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여기 보면 이제 그래서 이제 연관시켜서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는데, 이 빌립보 교회가 형성된 이렇게 만들어지게 된 상황을 설명하는데 교회로 모이는 것보다 루디아라고 하는 자매가 구원받는 것, 성경에 안 나와 있지만 아마 구원받았을 걸로 보이는데요. 점치는 귀신이 들렸던 어떤 여종, 여종이 해방된 것, 그리고 구원받았을 거고요. 그리고 빌립보 간수가 구원받는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로 형성되는 것보다 이 각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쪽에 사도행전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럼 이걸 통해서 잠깐 저희들이 이렇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이제 교회로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루디아 자매님한테 구원 간증해라 그러면 할 수 있겠죠. "내가 어느 날 기도처에 갔는데 사도 바울이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고, 그때 성령께서 내 마음을 열어주셔서 내가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다." 이 간증이 되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도 마찬가지죠. "사도 바울을 보고 내 안에 있는 귀신이 자꾸 사도바울을 쫓아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을 자꾸 하게 했는데 몇 번 고통스러워하다가 사도 바울이 나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버렸다. 이제 나는 해방되었다. 이제 나는 한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이렇게 해방시킨 이 사도 바울, 그가 전한 복음을 믿었다." 이렇게 이제 정확하게 간증할 수 있겠죠. 빌립보 간수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이제 빌립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첫 번째 ,구원 간증이 분명해야 된다. 구원 간증이 애매하면 성도가 아니다, 이런 쪽이 아니고, 구원 간증이 어떤 사람의 경우에 명백할 수 있고 조금 애매할 수 있지만, 이렇게 분명한 회심의 경험이 있어야 된다. 이걸 이제 성경이 강조하는 걸로 보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는 여기 이제 세 분의 세 성도님의 이제 구원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묘사하면서 두 번, "그 집이 침례를 받았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루디아만 침례받은 게 아니고 루디아와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걸 가지고 유아 세례를 이제 옹호하기도 하고 이제 하는데 이제 그건 잘못된 거고요. 그다음에 이제 지역 모임을 이루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가정이다. 가정이 서 있어야 합니다. 루디아의 가정, 그다음에 빌립보 간수의 가정, 그리고 이제 가정이 꼭 이제 가족만 말하는 게 아니고 '권속'이라고 돼 있으니까 그 가정에 함께 구성원이 된 일꾼들, 그 당시로 말하면 직원들, 이런 거죠. 사업체 직원들 까지 다 구원받은 거죠. 그래서 이제 가정이 교회에서 기본적으로 든든하게 서 있는 것이 훗날 보면 빌립보 교회가 계속 사도바울을 돕고,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하고, 이렇게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면이 있다. 이 두 가지를 미리 말씀드리고요.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배경이 되니까요. 이제 사도 바울이 저기 안디옥에서 출발했죠. 안디옥 모임에서 이렇게 간 건데 그다음에 이제 드로아에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전부 오늘날 드로아까지는 터키 지역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건너와서 도우라 그러니까 이제 유럽으로 넘어가는 거죠. 이 마케도니아가 어디냐 그러면 그리스입니다. 그리스가 이제 마케도니아인데, 그러면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가서 그리스 어떤 도시를 간 게 아니고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를 갑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 도시는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12절 보시면 "로마의 식민지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면 그 당시는 전부 로마 식민지입니다. 로마 식민지가 아닌 데가 없습니다. 로마가 유럽을 전체를 이렇게 지배하고 있었죠. 로마 제국이죠. 그런데 특별히 빌립보를 로마의 식민지라고 했다고 하는 것은 '로마의 직할 도시'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중에 저기 인터넷 같은 데서 이렇게 조사해 보시면 이제 로마가 어떻게 돼 있냐면 이 당시가 이제 로마가 이제 원래 공화정 제도를 유지하다가 로마가 점점 커집니다. 그래서 로마가 황제 제도로 바뀝니다. 역시 한 명의 왕이 결정을 해야 된다. 여러 사람들이 원로원이 있고 또 그것들을 견제하는 또 세력이 있고, 그래서 이렇게 권력이 분리돼 있어 가지고는 이 커다란 제국을 다스릴 수가 없다. 나라가 적을 때는 그게 가능하지만 로마가 이렇게 커져서 가지고는 이제 황제 제도가 도입돼야 된다라고 한 사람이 이제 '시저'입니다. 그리고 시저를 이제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아구스도'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아구스도라고 하는 이름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저가 이제 황제가 되자 그러니까 그 당시는 공화정이었는데 황제 제도로 제도를 바꾸니까 이제 반대하는 분들이 있죠. 그래서 이제 시절을 암살합니다. 저희들이 이제 학교에서 배운 유명한 브루투스가 시제를 암살했을 때 "부루투스 너마저!" 이렇게 배반감을 표현했다, 이런 것도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초대 황제 시저가 암살당하고 그리고 나서 이제 다시 권력 투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제 시저의 양아들이 옥타비아누스고 그리고 이제 시제와 함께 이제 집정관이었던 사람이 안토니우스인데 이제 이 두 패로 갈려서 이제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이 해전이 벌어지는데 이제 이쪽은 이집트, 애굽하고 합쳐서 군대를 형성하고 해서 어디서 전쟁을 하냐면 빌립보 앞바다에서 전쟁을 합니다. 빌립보 앞바다에서 옥타비아누스하고 안토니우스가 전쟁을 합니다.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서 누가 로마가 황제가 될 것이냐라고 하는 것이 결정되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빌립보가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합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에 승리합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 등극합니다. 두 번째 황제입니다. 그리고 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도왔던 이 빌립보 도시를 이제 보상해 줍니다.
세 가지로 보상합니다. 첫 번째, 이 빌립보는 자기들이 시장을 뽑을 수 있는 권한을 줍니다. 나머지는 전부 로마에서 총독을 보냅니다. 그런데 빌립보는 너희들이 뽑아라, 그래서 자치 행정을 허락해 줍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로마가 모든 지역을 이렇게 통치하니까 각 지역은 전부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각 지역에서 전부 이제 국가 정부에 세금을 내듯이 그때는 이제 로마에 세금을 내야 되죠. 그런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은 세금을 면제받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부가가치세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빌립보가 굉장한 거죠. 그다음에 그다음에 세 번째, 빌립보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줍니다. 요즘으로 치면 미국 시민권을 얻는 거예요. 그냥 그러니까 이제 빌립보가 굉장한 특권을 가진 도시가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로 넘어갔는데, 그리스 중에서도 로마 직할시인 빌립보로 갑니다.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이 "로마 사람인 우리가" 그리스 사람이라고 안 합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을 수 없는 풍속을 전한다." 이렇게 하고 여기에 주님께서 누구를 보내냐면 사도 바울을 보내고 그다음에 실라를 보냅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헤어지고 실라를 보내는데 바울과 실라가 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미리 배경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이렇게 섭리해 주신 거죠. 그래서 여기서 이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로마 시민들이 받을 수 없는 것이 뭔가?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복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 이런 것들을 지금 이 사도행전 16장에서 말해 놓고 있습니다. 일단 그렇게 해놓고요. 한 절 한 절 살펴보겠습니다.

12절 보면 이제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수일을 유하다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며칠간 머뭅니다. 왜요? 이제 어느 도시에 복음 전하러 왔습니다. 그래서는 며칠 그냥 그 도시에 머물고 있는 거예요. 전도 활동을 하지 않고, 왜요? 얼른 복음 전하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13절, 안식일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왜 안식일이 되기까지 기다렸냐? 그러니까 그 이유가 이거죠. 회당에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2차 전도 여행도 사도 바울의 전도 방식은 동일합니다. 그가 로마서에서 말했듯이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듣지 않으면 이방인에게로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신 원리를 따르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제 회당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냐면 방문한 사람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이 이제 회당에 가서 혹시 전 말씀 전할 사람이 있는가 그러면 자기가 일어나서 이제 복음을 전하는 거죠. 회당에서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회당이 어디 있나 하고, 빌립보에 회당이 있나 하고 찾아봤습니다. 찾아봤더니 회당이 없었습니다. 이제 안식일이 될 때까지 회당을 찾아보니까 없었어요. 유대인들은 이제 이렇게 흩어진 이후로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이제 회당을 지었는데, 이 조건이 뭐냐 하면 회당을 마음대로 지면 안 되고 모든 회당의 원칙이 뭐냐 하면 10명의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10명의 가정, 혹은 10명의 남자가 있어야 회당을 짓습니다. 만약에 10명이 안 되면 기도할 수 있는 기도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니까 이 빌립보에서는 형제들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여자들만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상황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제 회당을 찾아보자. 빌립도에 왔으니까 찾아보니까 없어요. 물어봐도 여기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라는 말씀 전하는 곳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사람들이 몰라요. 그래서 없으면 어떡하지, 그러다가 사도 바울이 그러면 회당이 없으면 기도처라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도처는 보통 강가에 둔다. 강가에 두는 것은 저희들이 이제 시편에 보면 바벨론 포로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강가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저기 수금을 걸어놓고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고 이런 거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러면 강가를 가보자. 거기에 혹시 여자들이라도 모여서, 혹은 10명 이하의 남자와 여자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간 거예요. 가봤더니 기도처를 발견했어요. 그리고 거기 여자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이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여기 이제 14절에 보면 '루디아'라고 하는 이제 제 여자가 있는데 이 루디아는 참고로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루디아는 지역 이름입니다. 그래서 루디아에 있는 어떤 자매 이름인데 그 자매 이름은 안 나왔어요. 그래서 그냥 우리가 루디아라고 하지만 루디아가 예를 들면 '바로' 그러면 바로가 사람 이름이 아니고 애굽 왕의 이름이듯이, 여기 루디아도 루디아라고 하는 곳의 루디아 출신의 어떤 자매입니다. 어떤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떻게 돼 있냐면 두아디라 성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자주 장사, 옷감을 자죽빛 이렇게 예쁜 색깔을 물들인 옷감을 파는, 그리고 출신은 두아디라 성의 출신의 여자가 이 빌립보에 와서, 그러니까 빌립버가 사업하기가 좋죠. 세금 면제니까, 그래서 이제 여기 와서 이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 보겠습니다. 이 여자는 터키 여자입니다. 두아디라 그랬으니까 저희들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두아디라가 들어가잖아요. 이 일곱 교회는 터키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터키 출신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제 유럽으로 건너와서 장사하고 있었고, 그런데 이제 터키 출신인데 하나님을 공경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는 성경을 가르쳐줄 만한 형제들이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추측해 보겠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터키 지역, 자기 고향에서 이 여자는 자기 문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신들이 있었습니다. 터키에 여러 가지 신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런 신들 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이게 맞다. 이게 하나님이지, 무슨 여기도 신이고, 저기도 신이고, 바다의 신, 산의 신, 이게 뭐냐? 그래서 그녀의 마음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마음을 둡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유대교로 개종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믿을래. 나는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래."라고 개종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게 어디서 일어났냐 그러면 자기 고향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제 이제 신앙은 이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다음에 이제 자기 사업을 하기 위해서 이제 여기 빌립보에 와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하나님을 믿겠다라고 한 것은 이건 다시 다른 성경을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렇게 돼 있죠. 거기 보면 이런 표현들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혹시 계신가? 내가 한번 찾아봐야지. 그래서 하나님 계시면 내가 믿어야지."라고 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 루디아 같은 경우는요?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을 찾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잠깐 보면 빌립보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날까지 이루실 것을 내가 확신한다." 사도 바울이 그런 표현을 합니다. 그걸 이 루디아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루디아에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좌절과 실패의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를 들면 누구의 죽음을 보고, 누구의 병으로 고통하는 인생의 연약한 것을 보고, 그리고 이제 찾기 시작합니다. 인생은 왜 이럴까? 그리고 이제 하나 하나님은 계신 걸까? 찾는 거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찾는 마음과 그다음에 이스라엘 하나님께 왔는데 더 이상은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있는데 기도처가 있으니까, 이 여자는 계속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기도합니다. 뭐라고 기도했을까요? 기도 내용이 안 나와 있지만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천지를 창조한 유일한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구약 성경의 하나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려주세요. 하나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려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보낸 것입니다.
그럼 저희들이 이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왜 사마리아로 가시죠? 보통은 안 가는데, 거기 안 가거든요. 그런데 가세요, 왜요? 수가성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들어가십니다. 여리고 보통 안 들어가시죠. 여리고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왜요? 거기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 일행이 원래는 자연스럽게 그 코스를 보자면 저리 가야 돼요. 그런데 이쪽으로 가는 걸 성령이 막으세요. 그러니까 이쪽으로 갈까 했더니 거기도 막으세요. 그리고는 빌립보로 인도하셨어요. 왜요? 루디아라고 하는 여인이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참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살피고, 그런데 자기가 홀로 깨달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하셨는지, 무엇을 믿는 건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건 뭔지,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바울을 이리 보낸 것입니다. 또 이제 그런 예가 성경에 많이 있죠. 에디오피아 내시가 있었어요. 그도 이제 에디오피아 사람인데 그건 내시였어요. 그러니까 이제 여러 가지 자기 신체적인 문제 때문에 고통이 있었겠죠. 나는 왜 내시가 됐는가? 왜 정상적인 가정 생활과 이런 걸 못하고, 그렇지만 권력은 있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겠죠. 그러다가 이스라엘 하나님을 찾고 그가 자기가 가진 신분 때문에 생긴 여유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려고 합니다. 성전에 가봐야 되겠다. 성전을 갑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성전에서 하나님을 못 만났어요. 성전이 온통 바리새인들 때문에 있어서, 또 이방인의 뜰까지밖에 못 들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성경책 하나 구해서, 이사야서 구해서 그건 이제 비싼 거죠. 성경책이 비싸지만 하여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고 있는데 뭔 뜻인지 모르겠어요. 성령께서 빌립을 보냅니다. 그래서 빌립이 말을 겁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랬더니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느냐?" 빌립 타서 그래요. "뭘 모르겠습니까?" "여기 이사야서 53장에 이 사람이 누굽니까? 자기입니까, 아니면 어떤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겁니까?" 이렇게 질문했을 때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가 찔림은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게 이제 제시한 거죠. 그리고 믿고 침례받고 흔연히 길을 간 거죠. 그래서 성경은 온통 이런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고, 그가 하나님을 찾고,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계속 기도하고, 하나님이 전도자들을 보내주시고, 또 이제 대표적인 게 고넬료죠. 고넬료는 베드로 환상 보여주셔서 가게 하고, 전부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 구원 간증 가운데 저희들이 찾아볼 수 있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여서 하나님께 찾아가게 되고, 그리고 전도자를 만나게 되고 그럼 이제 구원받는 거죠.
그다음에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그 '듣다' 입니다. 믿음은 어디서 나죠? 들음에서 납니다. 뭘 듣는 거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거 잠깐 성경 하나만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뭘 듣는 거냐?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거다. 이걸 이렇게 번역해도 좋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그리스도가 누구고, 그리스도가 뭘 했고,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이리 오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도 루디아라고 하는 여자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습니다.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믿는 자가 죄 용서받고, 죄가 용서된 사람 속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게 만든다. 이제 이런 복음을 들은 거죠. 듣고, 그다음에 들었을 때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믿고, 이렇게 해야 되죠. 그런데 그걸 누가 했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여기서 잠깐 보시면 "주께서" 그러는데 예수님이죠. 주님이시죠. 주님이 지금 어디 계시죠?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와 똑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움직이고, 여전히 일하고 계신 주님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누가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음을 열게 하고, 열어서 바울이 한 말을 듣게 한 거죠. 이제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저희들이 어제도 시흥 모임에서 이제 복음 집회를 했는데요. 이제 이제 구도자를 초청해서 이제 복음 전하고 이제 또 개인 교제도 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구원은 어떻게 일어나느냐? 여기 이 구절에 의하면 그거는 어떻게 일어나느냐? 우선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듯이, 이제 은사 있는 복음을 잘 이렇게 정리해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형제가 이렇게 하죠. 이제 이건 우리 책임이죠. 그런데 실제로 구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누가 해야 되냐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이게 결정적인 것입니다. 이게 없이는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복음 전할 때 이런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복음으로 저 사람 마음을 움직이려고, 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려고, 그래서 이 복음으로 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려고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안 되거든요. 마음을 여는 것은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정확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고 무엇을 하셨는가를 성경을 근거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가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 주님께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해야 될 책임과 주님이 하셔야 될 영역을 구분하고 있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주님이 하셔야 될 것을 우리가 하려고 하면 일어나지도 않고 또 어렵기만 하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항상 구원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신다. 그때 구원이 일어난다.
그다음에 이제 15절 보겠습니다. 그랬더니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저와 저 집이 다 침례를 받고" 침례받습니다. 침례를 그래서 저희들이 첫 번째 순종 후 걸음이다, 이렇게 돼 있는 거죠.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순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만 믿는 게 아니고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거죠.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구세주로 이렇게 받아들이고 가는 건데, 이제 첫 번째 순종이 이제 침례받는 겁니다. 침례는 저희들이 이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로마서를 보면 침대는 이렇게 물에 잠깐 들어갔다가 물에 들어갔다가 잠깐 있다가 다시 나온 거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같이 죽었다. 예수님이 장사될 때 나도 무덤에 있었다. 영적으로, 비유적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나도 새 사람으로 부활했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침례는 그 믿는 사람의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이제 나는 누구냐? 나는 죄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다. 나는 장사된 자다. 나는 이제 완전히 무덤으로 들어가 버려서, 세상하고는 이제 완전히 끊어진 사람이다. 그리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이다라고 하는 자신이 누군가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게 이제 일어났고요.

그리고 그다음입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그다음에 이제 루디아가 얘기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로 알거든" 이 믿는 자라고 하는 표현을 번역을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신실한 자로 알거든" 믿다가 '페이스'인데 이게 페이스북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루디아는 왜 갑자기 이와 같은 일을 했을까요? 이제 이렇게 해석해 보겠습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기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면 보통 이렇게 하는 거죠. 가장 좋은 것은 구원 받으면 구원받고 바로 하늘나라로 가는 게 제일 좋습니다. 세상 이런저런 꼴 안 보고 주님 앞에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고 주님이 주님을 거부한 세상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걸 보통 뭐라고 말하냐 그러면 이제 '청지기'라고 합니다. 이제 루디아는 이렇게 이해한 것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이전까지는 내가 주인이었는데, 루디아가 집이 있었으니까, 사업체가 있었으니까요. 이 사업체의 주인은 자기였죠. 그런데 믿고 나니까 이렇게 된 겁입니다. 이 사업체의 주인은 주님이다. 내가 가진 물질, 내가 가진 시간, 내가 가진 재능, 전부 주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이다. 나는 관리인이다. 나는 이것을 주인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되는 관리인이다. 청지기다, 이렇게 느낀 거죠. 그래서 그녀는 이 집, 내 집이 아니고 주님 집이다. 그러면 이 집을 어떻게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주님은 이 집을 어떻게 쓰면 제일 기뻐하실까? 주님의 사람들을 묵게 하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다라고 간단하고 분명하게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 모든 게 내 것이었는데 이제는 이게 전부 주님 것이다.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다가 나중에 주님과 다시 계산해야 되는 청지기다라고 하는 개념을 갖는 거죠. 이게 이제 이 루디아의 구원을 통해서 저희들이 알아낼 수 있는 또 영적인 사실들, 진리들이 이렇게 나와 있는 거죠.
거기까지 그다음에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한번 보시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 1:1).

여기 "신실한 자들" 루디아가 "나를 믿는 자로 알거든" 믿는 자하고 동일한 단어가 쓰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번역이 조금 달리 돼 있어도 똑같은 뜻입니다. 에베소서가 그렇게 돼 있고요. 그다음에 골로새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골 1:1-2).

특별히 이 두 서신서가 그냥 똑같은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썼고,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것입니다. 골로새서도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썼고, 골로새라고 하는 지역의 도시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것입니다. 그렇게 다 이해하면 되는데요. 그런데 이제 특이한 것은 여기 "신실한 자들"이라고 하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실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 신실한 거죠. 그런데 이 단어를 구태에서 써놓은 이유는 뭐냐하면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보면, 에베소서는 주제가 뭐냐 그러면 교회입니다. 몸인 교회, 이게 에베소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교회가 어떻게 기능하고, 교회는 무엇인지를 누가 아느냐? 구원받은 성도가 아는 거죠. 그런데 하나만 더 나가면 신실한 자들이 아는 것입니다. 루디아와 같은 자들, 자신을 청지기로 이해하고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주님 앞에서 합당하게 사용하려고 하는 자들이 교회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골로새서는 뭐죠?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입니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보통 형제님들이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는 교회,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리스도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를 누가 아느냐?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는 거죠. 그런데 그 성도들, 특별히 "신실한 자들" 이렇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 저희들이 루디아처럼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그 교회의 영광 가운데 있기 위해서, 신실해야 된다. 청지기로 인식해야 된다. 그리고 이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알기 위해서도 신실함이 필요하다, 이렇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입니다. 16절부터는 이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인데요.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아마 매일이었든지, 아니면 일주일에 몇 번 기도처를 가고, 아마 이제 여기서부터 이제 루디아의 집에서 기도처까지 왔다 갔다 하고 또 이제 복음도 전하려고 했겠죠. 그러고 있는데 어떤 귀신 들린 여종이 사도 바울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다. 구원의 길을 전한다." 이렇게 말을 했어요. 사도바울이 괴로워해요. 이게 왜 괴로워해야 될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죠. 그래서 이제 그 대목에 대해서 첫 번째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복음서에서도 보면 귀신 들린 사람이, 귀신이 그러니까 타락한 천사죠. 루시퍼를 따라간 천사들이죠. 이 귀신은 우리나라 문화에서 말하는 귀신이 아니고 천사들입니다. 이 천사들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부르죠. 뭐라고 부르냐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들이여" 이렇게 부릅니다. 이거 몇 번 찾아보겠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만나니까,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막5:7). 이거 아주 정확하게 말합니다. 근데 그다음 발언이 문제입니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막:7). 이게 문제가 되죠. 그다음에 하나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8장, 거라사의 광인 이야기죠.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눅 8:28).

그러니까 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경을 근거로 이해하자면 예수님을 천년 왕국에서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통치하실 때의 주님의 이름입니다. 천년 왕국에서 주님이 받으시는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이 뭐라고 말하냐면 예수님에게 "아니 왜 벌써 오셨습니까?" 천년 왕국이 되면 그때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귀신들을 주님께서 잡아다가 천 년 동안 무저갱에 넣어버립니다. 그래서 천년 왕국이 시작되는 거죠. 그래서 귀신들이 역사하지 못하는 그 시대죠. 그 시대에 불리어지는 우리 주님의 이름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이 "아니 아직 천년 왕국 안 됐는데, 왜 와서 우리를 고통스러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까? 아직 아닙니다." 그래서 돼지 떼에 들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이제 이러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귀신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천년 왕국 때 주님이 받으셔야 될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과 연관돼서 천년 왕국 때는 할 수 없이 이제 무저갱으로 끌려가죠. 그건 자기들이 원해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강제적으로 그렇게 하시는 거죠. 그리고 지금은 불순종한다는 겁니다. 천년 왕국 때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겠지만, 지금은 자유롭게 불순종하면서 나돌아다닐 수 있습니다를 포함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이 지금은 불순종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들을 암시하는 이름을 대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거부했고요. 그리고 귀신 아니고 그리스도인은, 이제 불신자라도 지금 은혜의 때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보겠습니다.
두 번째 이름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이건 조금 조금 애매하긴 한데, 이 구원의 길이라고 했을 때 이 길이라고 하는 단어가 '정관사'를 쓰지 않고 '부정관사'를 썼습니다. A way입니다. The way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것은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은 '구원받는 한 길'을 전하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복음과 다른 종교의 구원, 예를 들면 불교의 구원, 불교의 해탈, 이런 여러 개 중에 하나다라고 물타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통스러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라고 한 거죠. 이제 그렇게 하니까 이제 나왔고, 그다음에 주인들이 이 여종 때문에 복채를 든든히 받았는데 우리 이제 수입이 끊어졌잖아,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을 고소해서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을 수 없는 풍속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제 고소를 했는데요.
잠깐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왜 점을 치려고 할까요? 우리나라도 뭐 점치는 나라입니다. 이제 점 중에는 이제 장난으로 하는 거 있어요. 요즘 젊은 애들이 타로점 해서 가서 둘이 안 믿는 사람들끼리 데이트하다가 우리 잘 결혼하겠는지 장난스럽게 묻기도 하고, 그런데 이건 이제 장난 비슷하게 하는 건데 믿지는 않고, 그런데 이거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걸 가지고 장난하면 안 됩니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장난입니다. 그리고 이제 보통 이제 점을 치는 이유는 이제 누가 이런 걸 치냐면 국회의원 선거를 나가려면 돈이 많이 들거든요. 떨어지면 완전히 좀 어마어마한 손해가 납니다. 그러니까 내가 당선되겠는지 물어보는 거죠. 혹은 어떤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사람은 미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알 수가 없고, 이번에 이 선택은 만약에 실패하면 어마어마한 손해가 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된다면 이건 물어봐야 합니다. 저희들도 보겠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그런 건 아니지만 저희들은 어느 경우에 물어보냐면 누구랑 결혼할 때, 이거 결혼 중요하잖아요. 이 사람하고 결혼해도 좋겠는지, 그래서 이제 점을 치는 거죠. 결혼이 왜 중요하냐면요. 이제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이제 어떤 외부에서, 이제 어떤 여자가 어떤 집안에, 그냥 제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어떤 집안에 어떤 여자가 들어왔어요. 어떤 여자가 그 집안에 들어오냐에 따라서 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여자가 와서 아들하고 아버지 사이 갈라놓고, 시어머니 사이 갈라놓고, 이혼하기도 하고, 요즘 세상이 이런 거죠. 그러니까 이게 겁나는 거예요. 이거 정말 괜찮을까? 정말 이렇게 결혼해도 될까? 저는 마포 모임에서 최근에 그런 경험을 했죠.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자매가 들어와서, 말하면 안 되나? 그래서 그냥 마포모임 안 다니겠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른 모임에 천거해 줬어요. 멀쩡한 형제 하나 잃어버린 거죠. 점칠까요? 점 쳐야 되겠죠? 사주라도 보고 궁합이라도 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점을 칩니다. 비싼 돈을 주고라도 칩니다. 자기들도 이게 100% 맞는다고 확신하지는 못해요. 그런데 이제 뭐 용하게 맞는 거 몇 개 있고 그러면 그냥 가는 거죠. 우리는요? 우리는 점 안 칩니다. 그래서 이제 한 가지입니다.
이거 제대로 적용하면 우리는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세상에서도 여러 가지 선택을 하며 삽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옳은 것인지, 주님 뜻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 안 되고, 내가 무엇을 결정할 때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1월 1일 집회나, 청년 집회나, 이런 거 많이 하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 그래서 맨날 했죠. 이거 수없이 했어요. 이거 잘 따라와야 합니다. 어떤 게 하나님의 뜻인가, 그다음에 이제 분명히 이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불행한 일들이 생깁니다. 옛날에는 그런 거 없었는데 요즘에는 저기 그리스도인끼리도, 분명히 그리스도인끼리 결혼했는데도 어려움 당하기도 하고 막 이런 거죠. 그러면 그러면 어떡하죠? 우리가 믿는 건 이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이죠. 저는 그래서 이제 최근에 이제 마포 모임에서는 모임 생활 안 하겠다고 하는 자매 때문에 다른 모임으로 간 형제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지금은 이제 이렇게 하도 강하게 주장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지만 기도합니다. 어떻게 기도하냐 로마서 8장 28절이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 보기에는 우리에게 손해가 나고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났을지라도, 이 일도 하나님이 선을 이루는 데 사용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게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일시적으로 괴로운 일이 생겼다 할지라도, 그게 영적인 교훈을 주고 우리로 하여금 한 걸음 더 거룩하고 주님께 합당하게 나아가는 데 필요한 일이어서 주신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반전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믿는 거죠. 그게 이제 점치는 귀신과 관련돼서 저희들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로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풍속,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풍속이 다른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렇게 점쳐서 미래를 예측하고 그리고 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방법이 아니고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길을 믿음으로 가는,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여종 주인들은 돈 때문에 이러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사도 바울을 고발한 거죠. 이 여종이 귀신 들렸다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해방된 것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고 자기 돈이 안 생긴 것만 관심이 있는 거죠. 이게 세상 사람들, 로마 사람들의 풍속이죠.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풍속은, 우리는 돈이 아니라 온 천하보다 한 영혼이 귀중하다라고 하는 풍속을 가지고 나가는 거죠.

그다음에 하나 더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잡혀서 맞고 감옥에 들어갔는데요. 거기서 사도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거 살펴보겠습니다. 아니 억울하게,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억울하게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오해받아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바울과 실라는 우리하고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분들은 뭐 특별히 다르다거나, 이분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저희들이 이제 넘어갔는데, 나중에 15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툽니다. 그래서 각각 헤어져요. 아니 이렇게 영적인 분들이, 주님이 사용하시던 분들이, 뭐 마가를 데려가니, 마니, 이런 문제 가지고 서로 다퉈요. 얼마나 다투냐면, 심히 다퉈요. 그래서 헤어져 버려요. 이들도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차이는 뭐냐 하면 그와 같은 감옥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거 잘 못하겠잖아요. 그래서 바울과 신라에게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찬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매 맞고, 상처가 나고, 피는 흘려져 있고, 그리고 깊은 감옥에, 캄캄한 곳에 가 있는데, 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보겠습니다. 이유를 거기 보면 이제 24절에 보시면 "착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착고' 이게 저희들이 모르는 건데요. "발을 착고에 채웠더니" 했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 두 발을 이렇게 묶어 놓는 어떤 장치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을 이렇게 살펴본 형제님들이, 그 당시에 착고를 뭘로 만들었냐 그러면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발에 착고가 채워져서 발이 불편하죠. 자꾸 이제 느낌이 있는 거죠. 못 움직이게, 이렇게 돼어 자기들의 고난 속에서 자기 발을 묶고 있는 이 착고를 발견하고 이게 나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나무' 그러면 뭐가 생각나죠? 주님 십자가죠. 그래서 자기들의 형편과 고난 속에 있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초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정말로 죄를 지은 적이 없으신데, 모든 선한 일만 하셨는데, 사람들의 오해와 불신으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고 했는데,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 받으시고 피 흘리고 죽으셨죠. 이것을 보고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본 거죠. 그리고 이들의 마음속에 뭘 해야 되냐 그러면 그러면 우리는 첫 번째 기도해야 된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쪽으로 이렇게 집어넣으신 것은 우리더러 주님을 더욱 의지하라고, 더욱 주님께만 매달리라고, 우리를 집어넣은 게 아니겠느냐? 그래서 기도합니다. 뭐라고 기도했을까요? 일단 이런 기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얼른 풀어주셔야 됩니다. 억울합니다. 이런 기도가 아니죠, 그럼 뭘 기도했을까요? 그들이 온 것은 지금 빌립보 지역의 영혼들을 위해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 보내신 거죠. 여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야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 이 감옥에 있는 사람 중에, 주님이 보낸 이곳에서 혹시 구원받을 만한 영혼이 있으면 구원받게 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빌립보서에서 이런 내용을 씁니다. 이제 로마 감옥에 갇혀서 '내가 로마 감옥에 갇혔더니 로마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그들이 구원받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누굽니까? 로마 황제의 직속 경호부대,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간다고해서 그 황제를 지키는 군인들을 어떻게 만납니까? 그런데 그가 로마에 죄수로 갔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반역죄로 고소됐기 때문에, 특별히 로마 황제를 경호하던 군인들이 사도 바울을 24시간 경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누가 면회 오고, 누구와 이야기하고, 옆에서 다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걸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 씁니다. "나의 매임을 인하여 복음의 진보가 된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갇히므로 복음이 더 많이 확산되었습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게 빌립보서 1장이잖아요.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도 이제 여기 감옥에서 경험하는 거죠. 우리가 이렇게 이유없이 고난을 받지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지만, 이것이 손해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크신 목적이 있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람의 생각과 달리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찬양하고 이럴수 있던거죠. 그래서 저희들도 이제 어려운 상황 속에 들어갔을 때, 정말 억울하다,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할 때, 첫째 감옥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도 바울, 이들의 기도 제목, 그래서 아까 기도가 나왔는데요. 이제 루디아의 기도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루디아가 기도처에서 뭘 기도했을까? 그리고 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무슨 기도를 했을까?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찬양할 수 있었는가?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간수를 구원받게 하십니다.

그런데 간수 경우도 보면 이제 지진이 났는데요. 이제 하나님이 어떻게 이제 기도 응답을 하시냐면 지진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지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자연 현상이 있고, 그 자연 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진은 보통 이렇게 대륙 판들이 이렇게 서로 부딪히고, 그 사이에서 뭐가 나오고 이런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태풍도 있고 여러 자연 현상들이 있는 거죠. 그런데 그중에서 지진 하나만은 하나님의 뜻하고 연관돼 있습니다. 어디서 지진이 일어나냐면 시내산에서 율법을 줄 때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제 임재하시죠. 율법을 줄 때, 임재할 때 지진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지진이 어떻게 되냐면 이 산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거든요. 여기는 하나님이 임재하니까 거룩한 곳입니다. 여기에 함부로 오면 안 됩니다. 짐승이라도 오면 죽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와 그다음에 분명한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게 이제 첫 번째 지진이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 지진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때의 지진은 뭘 하냐면 성전의 휘장을 찢어버립니다. 그래서 지진은 특별히 하나님이 영적인 일을 하실 때 그 의미와 연관돼 있습니다. 그리고 지진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번 흔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히브리서에서 나오죠. 흔들리지 않는 나라, 지진이 없는 나라죠. 그 나라를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거죠. 그래서 이제 지진은 이제 기본적으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그러듯이 여기서 지진을 일으켜가지고 이 지진을 정확하게 힘을 사용하셔서 어떻게 일으키냐 하면 지진이 일어났는데 이 건물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건물은 그냥 잠깐 흔들려서 뭐만 하냐? 감옥의 문만 딱 엽니다. 세상에 이런 지진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죄수들을 묶어놓는 사슬만 딱 풀어냅니다. 그렇게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죄수들이 아무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죄수들은 억지로 잡혀온 사람들이죠. 죄 짓고 도망다니다가 체포돼서 재판받고 들어온 거죠. 죄수들은 소원이 있다면 탈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탈옥을 못 합니다. 아무도 탈옥할 생각을 못 합니다. 그러고 있는데 이 빌립보 간수가 자고 있다가 사도 바울이 기도하고 찬양할 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진이 일어나니까 깨어납니다. 그리고 일어나 보니까 그가 딱 발견한 것은 이것입니다. 감옥 문이 열려져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방 계산이 되죠. 탈옥했구나, 감옥문이 열려져 있는데 탈옥하지 않을 죄수가 누가 있는가? 감옥 문을 잠가놔도 그렇게 탈옥하려고 온갖 방법을 쓰는 애들인데 이거 반드시 탈옥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탈옥하면 이제 그 간수는 그 죄수들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아야 되죠. 그러니까 그 비참한 벌을 받느니 자살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가 칼을 빼서 자살하려고 합니다. 이게 이제 로마의 풍속이죠. 자기들의 풍속입니다.
그런데 이 캄캄한 곳에서 자기가 자다가 일어나서 이렇게 상황을 보고,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이제 자살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간수가 자살하려고 하는데, 사도 바울이 그걸 어떻게 봐요? 캄캄한데, 자살하려고 한다는 것도 알아요. 무슨 자세를 보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해하지 말라" 해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말이 들립니다. 이 말이 들리자 그가 깜짝 놀라서 다 있다는 말에, 죽을 필요 없다는 말에, 그가 등불을 가지고 갑니다. 이게 이제 굉장히 상징적인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더 많은 빛을 구합니다. 그래서 등불을 가지고 사도바울 앞에 엎드려서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 이제 이 발언은 굉장히 놀라운 발언인데요. 첫 번째는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 앞에 있다는 걸 느낍니다. 이 지진으로 인해서, 이건 하나님이 손대시는 것이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지만 어떤 하나님께서 여기 계신다라고 하는 것을 그가 인정하는 거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는 자기가 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감각을 갖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핵심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그가 누구한테 뭘 들어서 전도를 받고, 정보가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게 아니고 그는 그냥 간수로서 그날도 변함없이 일하고 이러고 있었는데, 그가 무슨 사도 바울의 전도를 들었다든가 이런 암시가 없어요. 그런데 이 지진과 사도 바울을 해치 말라라고 하는 이 두 가지 말,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그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구원받아야 된다는 걸 느낍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 복음은 분명하죠. 사도행전 16장 31절이 굉장히 유명한 거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입니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저희들이 잘 아는 대로 마태복음 1장 21절이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이게 예수죠. '주'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 이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는 거죠. 이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분이 내 인생의 주인인가? 이걸 묻는 거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이제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이 왜 예수인가? 십자가를 설명했겠죠. 이분이 왜 주인인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가 다시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분이고 훗날 재판할 것이다. 이제 이런 걸 설명한 거겠죠.
그랬더니 그가 믿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이제 이 믿음 증거를 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침례를 받습니다. 이제 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첫 번째 순종의 행동을 보인 거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맞은 자리를 씻기고" 두 번째는 변화됩니다. 간수가 이거 때린 거죠. 그런데  때린 자리를 다시 시켜주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구원받기 전에 과거에 했던 행동과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변화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음식을 차려주고" 세 번째,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변화와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의 결과입니다.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기쁨,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기쁨, 이 기쁨이 있는 거죠.
그리고는 이제 이제 놓아주라고 그랬더니 그때 이제 사도 바울이 로마 사람인데, 로마 시민권이 있는데 너희들이 불법적으로 때리고 가두었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더러 가라고 그러면 안 되고 직접 와서 우리한테 사과하고 그리고 가야 된다 이렇게 하는 거죠. 여기서 이제 한 가지 질문해 보겠습니다. 아니 사도바울은 왜, 로마 시민이면 재판 없이 맞지 않습니다. 재판받지 않고는 투옥되거나 때리거나 이런 거 안 됩니다. 왜 때리려고 할 때 나 로마 시민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때 말해야죠. 이게 사람들의 풍속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행동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이 맞은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별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맞아야 된다. 내가 이걸 로마 시민이라고 밝혀서 이걸 피할 일이 아니다. 이 고난은 내가 받아야 된다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왠지 모르지만 이건 주님께서 주시는 고난이다, 해서 받은 거죠. 그래서 그가 감옥에 들어가고, 그가 맞고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간수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주님이 주시는 고난이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맞았습니다. 그다음에 근데 왜 이제 와서 그냥 안 밝히면 되는데 왜 이제 와서 밝혔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거죠. 자기는 이제 떠나니까 상관없지만 이 빌립보 간수, 그리고 루디아, 그리고 여종, 이들이 빌립보 사람들에 의해서, 빌립보 당국에 의해서 함부로 경이 취급받지 않도록 말한 것입니다.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한 것이죠.

다시 말씀을 마쳐보겠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인데요.
첫 번째입니다. 이제 루디아의 경우는 세상 사람들은 안 하는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기도가 중요하게 나옵니다. 기도처에 있었다, 루디아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갖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만이 갖는 것, 우리는 기도와 응답을 믿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일을 이루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또 성도들을 세우시고, 교회를 합당하게 세워가게 하시는 분이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바울과 점치는 귀신들인 여종과 관련해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고난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불평하지 아니하고, 그와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만드실 하나님의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풍속이 다른 거죠.
그다음에 이제 빌립보 간수하고 관련돼서는 저희들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어떻게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는가, 그래서 유럽에 있는 첫 번째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방식과 굉장히 다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원리들이 모임 안에서 실행되고 있었다. 이게 유럽 최초의 교회입니다.
저희들에게도 주님께서 대전 중구 모임이 기도하는 모임, 어려움이 생길 때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바꾸실 것을 신뢰하는 모임, 그리고 기꺼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 한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고난을 기꺼이 받고, 고난 속에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임, 이런 모임이 되어서 주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계속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서 저희들이 저희들이 세우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될 것인가를 이렇게 살펴보고 따라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