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사도행전

사도행전 15장 :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성령으로 자라가라

박이레 2025. 2. 1. 22:59

< 사도행전 15장 :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성령으로 자라가라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시간은 제가 사도행전 쭉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은 15장 말씀을 같이 살펴보시겠습니다. 우선 제가 말씀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행 15:1-21).

아멘, 여기까지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그동안 그 사도행전 저희들이 쭉 살펴본 내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교회가, 복음이 유대교에서 구약과 어떻게 분리되어 왔는가 하는 것을 쭉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이죠. 첫 번째 갈림길입니다. 첫 번째 갈림길이 사도행전 2장 36절이죠. 베드로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이 사실은 그리스도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심으로, 아까 형제님이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머리를 밟으신 것이다. 이제 사단을 멸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이시다. 이렇게 믿고, 그다음에 그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주인이시다. 이분이 우리 삶의 주인이시다라고 전하고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신약 교회에 속하고, 여전히 자기들의 생각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불신자들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첫 번째 갈림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로 모실 것이냐, 하는 문제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 갈림길입니다. 스데반 순교에서 나왔죠. 사도행전 사도행전 6장 가시겠습니다. 이제 스데반을 저기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이죠. 얼마나 미움이 심했으면 우리가 죽이기까지 하겠습니까? 첫 번째는 예수님을 죽이고, 그다음에 이제 스데반,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를 죽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죽일 때 명분이 뭐냐하면 13절 보면, "거짓 증인들은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이 거룩한 곳" 거룩한 곳은 성전입니다. 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말했답니다.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 이런 거죠. 그럼 스데반이 왜 모독했냐 그러면 이제 이렇게 되는 거죠. 구약에 의하면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으로 와야 합니다. 그리고 솔로몬 성전으로 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율법을 따라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고, 소제를 드리고, 이렇게 제사를 드리게 돼 있죠. 이게 구약의 예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절기 때마다 성전에서 율법대로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들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짐승의 피로 드리는 게 아니고, 예루살렘 지역 교회에서 떡과 잔을 가지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 예배다." 주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이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감사 찬송하는 것이 예배다. 이게 이제 두 번째 갈림길입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이 누구냐, 그다음에 예배가 뭐냐, 하는 걸 가지고 이제 갈라졌고요.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로 가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으로 가시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8절 보시죠.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하는 베드로 자신도 이거 처음에는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환상을 보이셔서 이제 하신 말씀 중에 하나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 10:28).

구약에서는, 구약을 따르면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죠. 하나님의 자녀는 믿지 않는 사람과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그러니까, "당신은 우리 서로 상종 안 하는데 왜 물을 달라고 합니까?" 상종도 안 합니다. 그게 구약이 말하는 거룩입니다. 부정한 것, 더러운 것, 죄에 속한 것을 멀리하는 것, 그게 구약적인 거룩입니다. 그다음에 신약의 거룩은 그렇게 하지 않고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와서 이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게 뭘 의미하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이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그래서 그것 자체로 부정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제 신약의 거룩은 뭐냐? 신약에서 말하는 거룩은 뭐냐? 죄가 용서된 사람이 거룩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죄가 용서된 사람이 깨끗한 사람이고, 그가 거룩한 것이다. 죄 용서받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율법을 지켜서 행한 것이 거룩한 거 아니다. 이게 이제 세 번째 갈림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를 용서받은 게 거룩한 것이고,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신약적인 거룩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거룩한 것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죄악이다.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이 죄다. 이렇게 신약적인 거룩의 기준이 변화된 것입니다. 여기까지고요.
그다음에 13장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13장 39절, 아까 형제님이 감사 때 말씀을 드린 건데요.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모세의 율법으로" 그러니까 구약에 있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 그건 안 되는 일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불가능합니다. "이 사람을 힘입어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다라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게 이제 계속 구약적인 율법과 신약 교회의 복음이 완전히 갈라지는, 차이가 있는 중요한 대목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이제 쭉 저희들이 살펴봤고요.
그다음에 15장입니다. 15장 1절을 보시면 이제 그래서 이제 교회가 그와 같이 이제 갈라지고 예수님을 누구라고 부르냐? 예배가 뭐냐? 그다음에 성도의 거룩은 뭐냐? 라고 하는 것들을 쭉 말씀을 따라 이렇게 쭉 오다가 15장에서 다시 과거로 되돌리려고 하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항상 이제 뭐 히브리서도 그렇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려는, 구약적인 것이 더 좋아 보이는, 이런 이제 반작용이 늘 있어온 거죠.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행 15:1).

그래서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대표적인 거죠. 율법 중에 하나가 대표적인 거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라고 지금까지 계속 교회가 걸어온,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온 길을 되돌리려고 하는 움직임이 15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나님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왜 허락하셨는가, 오히려 이와 같은 어려움이, 이와 같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유익을 끼치게 되었는가, 이제 15장에서 그 대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먼저 누가 그랬냐? 이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 거죠. 다시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거죠. 놀랍게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아서 모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받고, 이제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신분적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그걸 저기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침례를 받고, 그리고 모임에 영접된 사람이 다시 율법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 보면 이제 "어떤 사람이" 이 사람들이 누군지는 나중에 또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유대는 여기는 이제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래서 이제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와서 아마 이렇게 명백하지는 않아도, 이와 같은 것들을 많이 암시했을 것 같아요. 예루살렘 교회가 이제 12사도가 있고, 그래서 뭐랄까 중심 모임이 되겠죠.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가르치면서 아마르에 이런 암시를 주는 것입니다. "12사도도 우리를 지지한다. 나는 12사도가 있는 예루살렘 출신이다." 아마 이렇게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잠깐 다시 보겠습니다.
이제 편지를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15장 편지를 보면 34절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제 공식적으로 문서를 통해서 이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들은 즉 우리 가운데서" 이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 가운데서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그러니까 사도들이 천거해서 보낸 게 아닙니다. 사도들이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명백하게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이 "형제님, 저쪽에 가면 안디옥 교회가 있는데, 거기 가서 교제하고 오시지요." 이렇게 보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한 가지, 이런 대목에서 약간 이제 생각해 보는 거죠. 그래서 지역 모임의 천거 가운데 와야 된다. 정말 말씀을 가르치는, 예를 들면 간증을 하거나 뭐 이런 것까지는 좋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어느 지역 모임의 천거 속에서 와서 가르치는 것이 안전하다.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고요. 그다음에 다시 15장 1절로 오시면 내려와서 가르치되 그다음에 잠깐 더 보겠습니다. 5절 보시면 이들이 누구냐 그러면, "바리새파 중에서 믿는 어떤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름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말만 하는 건데요. 이들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입니다. 저기 저희들이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굉장히 충돌합니다. 안식일 문제로,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 메시아일 수 없다, 이렇게 한 거죠. 그런데 이들은 바리새인이었지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믿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성도가 아니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는 은혜로 구원받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자기는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가르칠 때는, 자기도 아마 모세 율법 못 지켰을 텐데요. 그래야 죄인이라고 느끼고 예수님은 대속의 그 죽음을 받아들였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도 말하고 가르칠 때는 율법 순종해야 된다. 할례 받아야 된다. 자기들은 이제 바리새인이니까 할례는 이미 받은 거죠. 이런 모순적인 경향이 있다는 거죠. 이분들이 구원 안 받은 게 아니에요. 구원받은 성도예요. 그런데 잘못된 가르침을 증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목을 저희들이 좀 생각해 보고요.
그래서 이제 한 가지 더 베드로후서를 하나 인용해 보면, 베드로후서 잠깐 보고 오시겠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베드후서는 성장을 강조하는 서신입니다. 그러니까 이분들이 구원받으셨어요. 그런데 성장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에 5절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하고 덧붙여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구원이 전부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처럼 복되고,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은 없지만, 구원이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성장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맨 마지막에 뭐죠?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이 코스를 밟아 와야 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안 하면 안 하면 어떻게 되죠? 9절 보시면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이게 없으면 어떻게 되죠?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9).

자기가 어떻게 죄 용서를 받았는지, 자기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자기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그리고 그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참 저희들로서는 약간 좀 이해되기가 어렵지만, 하여간 바리새인 중에 믿는 사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 중에 한 명이 안디옥 교회에 와서, 이제까지 교회가 계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이제 말씀과 원칙들을 세워가면서 가고 있는데, 지금 이게 이제 거의 마지막 원칙이거든요. 이제 16장부터는 이제 이제 다른 원리들이 나옵니다. 이제 세상과의 대결이 나옵니다. 지금은 유대교와의 어떤 차이가 나오고, 이제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는데 이걸 되돌리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한번 생각하고요.
그래서 이제 이제 이분들이 누구냐 하는 것보다도 이분들에게 이렇게 이제 저는 묻고 싶어요. "당신은 이제 구원받으셨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이 무언지 아십니까?"를 묻고 싶어요. 구원받은 후에, 이제 구원은 두 가지죠.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가 용서되면 그다음에 뭐가 들어오죠? 성령께서 이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죄 용서받은 성도에게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주세요. 그래서 이제 이 성령 하나님을 인도받고 있는가,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서 말씀을 사용해서 주님의 영광을 보이시고, 또 성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계속 인대하고 계신가를 그가 알고 있느냐? 그걸 경험하고 있느냐? 이걸 묻고 싶은 것입니다.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들도 개인적인 삶이나 모임 생활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가? 이걸 저희들이 이제 생각해 보고 저희들이 받고 있죠. 그런데 그걸 좀 더 잘 받고, 충만하게 받고, 이제 이렇게 나가야 되는 거죠.그 대목을 생각해 볼 수 있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 다시 오셔서요. 2절 보시면 그렇게 가르치니까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바나바가 당장 문제가 되죠. 안디옥 교회의 인도자죠. 바울과 바나바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죠. "형제님 그거 아닙니다. 그렇게 가르치시면 안 됩니다. 형제님 정말 구원 받으셨나요?" 이제 이렇게 가겠죠. 그래서 이게 "적지 아니한" 이게 우리나라 성경에는 표현을 좀 온건하게 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강력한 변론이 일어난 거죠. 이건 구원을 흔드는 거죠. 물론 이제 구원은 받으신 분이지만, 변론이 일어나니까 결국 이게 이제 저쪽에서 자꾸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지지한다, 자꾸 이렇게 하니까 할 수 없이 예루살렘 교회로 갑니다.
여기서 이제 잠깐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면 이게 바울이 있는데요. 바울이 사도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12사도가 있었죠. 물론 이제 가롯 유다 빠지고 맛디아가 들어갔지만, 하여간 12사도가 있다면, 이 12사도는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뽑으신 사도고,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뽑은 사도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걸 보면 나는 복음을 사람에게서 배운 적이 없다. 하나님께 배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고린도전서 11장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것을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한테 받은 거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세우심을 입은 사도고,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당연히 그들이 이분들이 아무리 예루살렘 사도들, 막 이름을 대도 사도 바울이 "나도 사도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사도들하고 함께 개인적으로 교제한 적이 있는데 우리의 복음이 같았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안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교회적인, 전체적인 평안을 위해서,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사도보다 못해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동일하게 세우셨지만, 그런데 이제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이방인은 사도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지역에, 그래서 베드로에게는 교제의 악수를 하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다만 가난한 사람 돌보는 것을 서로 부탁하고, 이렇게 된 거죠. 그러니까 이방인 지역에서 오히려 이 복음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더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루살렘 교회를 바나바와 함께, 또 몇몇 형제들과 함께, 그래서 안디옥 교회의 인도자들이 이렇게 같이 갑니다. 역시 이제 이런 면에서 사도바울의 겸손함, 항상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고, 전체를 생각하면서 섬기고, 이게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런 걸 볼 수 있습니다.
가서 이제 조금 줄여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4절에서는 예루살렘에 이릅니다. 3전에서 이제 약간 지역을 이렇게 가는데요. 이제 다른 지역을 이렇게 거쳐서 갑니다. 이 여행을 하다 보니까 그런 면도 있고요. 안디옥에서 예루살렘 가는 길에 있는 교회이기도 하고, 또 사도 바울이 직접 이렇게 가지 않고 이렇게 지역 교회를 들린 것은, 이 문제가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 지역 모임에 다 연관돼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거쳐서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지역 모임에게도 동일하게 이와 같은 편지를 쓰고 구원의 원칙,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고 할례를 받아서가 아니다, 이런 것과 아무 상관없이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이걸 이제 분명하게 하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4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니까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그래서 이제 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이 있었고 그리고 장로들이 세워지는 전환기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다 가고 나면 장로들에 의해서 모임이 인도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교회 성도들과 그다음에 사도, 장로, 인도자들에 의해서 영접을 받습니다. 영접을 받고 그다음에 거기서 뭘 하냐, 영접 받은 후에 그 문제를 바로 논의하지 않고 일단 선교 보고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이미 했으니까 선교 보고를 하고요. 여기까지는 했고요. 그다음에 선교 보고를 했더니 그게 이제 계기가 돼가지고 딱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5절에 이분들이 이방인한테 복음을 전할 때 보니까 율법을 안 전하네, 할례도 안 주네, 그러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이 선교 보고를 듣고 딱 반발을 보이는 거죠. "이방인들한테 할례 지키라고 하고 율법 지키라고 하셔야죠." 이렇게 돼서 드디어 그들이 이제 하려고 했던 문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다음에 6절 보시면 이 문제를 누가 의논하냐? 사도와 장로들이 의논합니다. 교회 성도들이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건 그래서 이제 15장에서 있었던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허락하신 이유가 뭐냐 하면 이런 것들은 교회적으로 해결된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원칙에 따라서 입니다. 이 대목은 저희들이 하나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한번 보시죠. 물론 몸인 교회하고 관련돼 있는 표현인데요. 보겠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에베소서 4장 11절,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가" 주님께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에 주님께서 어떤 원칙을 따라 교회를 세워가시냐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저희들이 이 대목 맨날 한 거죠. 이 당시는 아니지만 지금 현재는 사도와 선지자가 없습니다. 성경의 완성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 교회의 인도자들은 '전도자'가 있고요. 그다음에 이제 목사와 교사인데요. 이걸 그냥 '교사'로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첫 번째로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도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이끌어가십니다. 물론 다 같은 형제고 우리가 모임 안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5장에서도 이 문제를 모든 성도들에게 논의를 붙이지 않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의논합니다. 안디옥 교회도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다 간 게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몇몇 형제들이 간 겁니다. 그래서 인도자들이 있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인도자들은 뭐 하는 사람이냐? 12절 이제 말씀을 가르치죠.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쳐서, 성도를 "온전케", 이 부분을 온전을 완벽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걸 다시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성도를 성장케 하며" 입니다. 구원받았어요. 믿음으로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구원처럼 중요하고 핵심적인 게 없죠. 그런데 구원받은 후에 성장해 가야 합니다. 이게 이제 "온전케 되며" 성장하고, 성장하면 어떻게 되느냐? 성장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봉사하고 섬깁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죠. 누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큰 것입니다. 이게 주님이 세운 원칙이죠. 세상과 거꾸로의 원칙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주관합니다. 교회는요, 높은 자가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하면 그 특징이 뭐냐? 섬깁니다. 성장의 증거,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내려가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섬깁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도자가 있고, 인도자를 통해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인 성장의 특징이 낮아져서 섬기는 것이고, 이게 교회가 세워지는 원리고 방법입니다. 그다음에 이렇게 될 때 13절,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됩니다. 이제 구원의 원리가 둘이 되면 안 되잖아요. 하나는 모세 율법,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하고, 하나는 그냥 믿음으로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이 둘이 하나가 돼야 되잖아요.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을 이 에베소서 4장에 있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그대로 쓴 것입니다. 인도자들이 모여서 분별하고, 그다음에 이제 편지를 써서 지역교회에 보냄으로써 가르쳐서 성도들을 성장시키고, 그리고 그 성도들이 각 지역 모임에서 섬김으로써 여러 지역 모임이 영적으로 세워지는, 그와 같은 원칙을 지금 적용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다시 사도행전 15장으로 보시겠습니다. 6절에 이제 사도와 장로들이 모입니다. 사도와 장로들 사이에 이제 의논하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 많은 변론이 있습니다. 이제 자유롭게 이야기하도록 합니다. "왜 이런 일을 하냐?" 예를 들면 베드로가 혹은 사도들이 자기들의 권위로 말하면 됩니다. 이건 교리인데, 이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는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다. 주님이 전도할 때 보니까 이렇게 하셨다, 하면 끝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많은 이야기를 하게 놔둡니다. 왜요? 무엇이 핵심적인 논쟁점인가를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이렇게 보겠습니다. 이방인도 구원받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된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라고 하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제 이 부분이 분명하게 된 건데요. 유대인은 그냥 예수님 은혜로 구원받아도 된다. 그런데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유대인이 돼야 된다, 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유대인이 된 다음에 구원받아야 된다.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다, 라고 하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이 됩니다. 이걸 이제 명확하게 해놓은 거죠. 이걸 먼저 지금 지금 할례받자고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게 뭔가? 그들은 하나님은 유대인을 구원하신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이방인은 아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이방인에게도 구원받을 길을 열어주셨는데, 하나님이 이방인도 구원하시긴 하신데, 그 길은 이방인이 일단 유대인이 된 후에 구원받아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 대한 자부심, 유대인들에 대한 특혜, 하나님이 유대인을 특별히 대우하신다라고 하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걸 놓고 이제 이것에 대해서 이제 말합니다. 이제 누구누구 말하냐 그러면 베드로가 말합니다. 그다음에 바울이 말합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말합니다. 그래서 3명의 말로 끝나버립니다. 그럼 이 세 명은 뭔 권위가 있는가 하는 걸 보겠습니다. 첫 번째 베드로가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하는 것은 자기가 훌륭해서가 아니고, 이런 것에 대해서 경험이 있거나 이래서가 아니고, 주님이 베드로를 택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제가 성경 안 찾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저희들이 잘 아는 대목이죠. 주님이 제자들한테 주님이 물어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뭐 이렇게 이렇게 의견이 나오죠. 다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랬을 때 베드로가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하죠.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중요한 말씀을 하시고, "이 고백 위에,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 이렇게 하시죠. 이거 저희 잘 그리고 하나만 더 밑으로 내려가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뭘 주시죠? "천국 열쇠를 주노니" 그래서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베드로한테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열쇠를 세 번 사용합니다. 언제 사용하죠? 첫 번째, 오순절에 사용합니다. "오순절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해서 이걸 믿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행전 2장에 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천국 열쇠를 한 번 썼죠. 그다음에 두 번째, 사도행전 8장인가요?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사마리아에서 복음이 정확하게 전해지고 사람들이 믿었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누가 가냐? 베드로와 요한이 갑니다. 그래서 안수했을 때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구원 아닙니다. 죄 용서만 받아서는 구원 아닙니다.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죠. 그래서 이 두 번째, 사마리아 지역의 천국의 열쇠를 두 번째 베드로가 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이방인에게 천국 열쇠를 씁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서 이방인들이 천국에 들어오도록 천국 문을 엽니다. 누구한테죠? 고넬료한테, 그래서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이 나한테 천국 열쇠를 주셨다. 내가 이걸 세 번 썼다.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에게, 이방인에게, 그리고 지금 현재 이방인에게 지금 문제가 되잖아요.
그래서 이제 이방인에게 천국 열쇠를 썼던 것을 회고합니다. 이게 언제냐 하면 사도행전 10장입니다.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죠.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잠깐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행 15:7).

그러니까 이게 오래전부터 마태복음 16장부터입니다. 마태복음 16장부터 주님이 선택하셨죠. 그다음에 이 주님의 선택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현실적으로, 그러면 이건 이제 고넬료에게 10장에서 일어난 일이죠. 8절 보시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셨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사도행전 10장을 살펴보시면, 복음을 거의 죄 용서까지 전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마치기 전에 성령이 임해버립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죠. "성령이 임했으니 우리가 어찌 물로 침례 주는 것을 금할 수 있겠냐"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는데 우리가 누구관대, 우리가 뭐길래, 침례는 이제 그걸 이야기하는 거죠. "성령을 주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다시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고넬료가 성령을 받을 때, 성령을 받기 전에 율법 지켰냐? 고넬료가 성령 받기 직전에 할례 받았냐? 없었답니다. 고넬료가 율법 지키지 않았고, 할례 받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는데, 너희들이 만약에 이방인에게 할례 받아야 되고 율법 지키라고 하면 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높습니까? 이제 문제가 되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이방인이 구원받게 하셨다라고 하는 말은, 이게 지금 부드럽게 한 말이지만, 믿는 바리새인들, 율법과 할례를 지켜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당신들한테 시켰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원칙이죠. 하나님이 누구를 쓰고 계시냐? 만약에 당신들이 옳다면, 당신들이 주님 마음에 맞다면, 하나님이 당신들을 택해서 사도도 삼고, 당신들을 택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했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고 실제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베드로였고, 그다음에 두 번째 바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해서 이방인 지역에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와서 자기 어떤 이론을 따라서 이렇게 주장한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전부 모두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어떤 역사를 이루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신 그 일을 내가 말하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해서 하신 일은 없는데, 여러 가지 주장을 많이 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그렇게 말한 거죠.
그다음에 이제 베드로가 성령을 주셨다, 고넬료에게. 할례 받지 않았는데 성령 주셨다, 이렇게 말하고 그다음에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9절, 성령을 주셨다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는 거냐 하면 죄 용서받지 않은 사람, 의롭게 변화, 의롭게 되지 않은 사람, 깨끗하게 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성령은 무슨 영이죠? 거룩한 영입니다. 성령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마음, 의롭게 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임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임했다라고 하고 한 칸 더 갑니다. 이들은 깨끗하게 된 사람들이다. 어떻게요? 율법을 지켰어요? 아니요. 할례를 받아서요? 아니요. 율법과 할례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깨끗하다, 의롭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그 사람들한테 할례하고 율법을 지켜야 깨끗하게 된다라고 말하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게 되는 거죠. 그다음에 그래서 이제 10절에 말합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그 주장을 하면 첫 번째,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멍에를, 우리도 못 매는 유대 이스라엘 역사상 한 번도 맨 적이 없는 멍에를 매는 것이다, 합니다.
하나님 시험으로 보겠습니다. 이제 이방인 고넬료를 이제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게 한 사도행전 10장에서의 사건이 있었는데요. 이제 그때하고 지금하고 이제 얼마나 세월이 지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여간 그때부터 베드로가 고넬료를 침례를 줄 때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방인한테 침례를 줬어? 왜? 이방인도 우리하고 똑같이 구원받는 거야?" 이게 이제 사도행전 11장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있어 온 거예요. 15장까지, "너희들은 하나님을 시험한다." 뭘 시험해요?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 참아주실지, 이렇게 말해도 하나님이 별로 징계를 안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저기 말해도 별탈이 없네. 교회에서 징계도 안 하고, 또 하나님이 직접 자기를 어떻게 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 주장을 계속 갖고 있는 거예요. 이제 베드로가 말합니다. 더 말하면 하나님이 징계하실 것이다. 끝까지 고집을 피우면, 이제 예루살렘에 드디어 안디옥 교회 문제도 일으켰고,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지금 사도와 장로들과 기 다 모여 있는데, 이후로도 계속해서 율법과 할례를 주장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다. 하나님이 언제까지 내 잘못을 봐주실 것인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이다. 하나님이 시험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제 멍에는 뭐냐 하면 멍에는 자기들도 못한 거예요. 자기들도 율법을 못 지킨 거예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를 알기 때문에 자기를 죄인이라고 인정한 거죠. 그래서 신약이 그걸 분명하게 한 거죠. 율법을 왜 주셨냐?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렇게 된 거죠. 그런데 그래서 자기들도 못 지켰는데, 자기들도 못 지킨 것을 이방인한테 지키라고 하니, 이건 악한 거죠. 그래서 우리도 하지 못한 것을 왜 남한테 하려고 그러죠? 자기는 이미 통과했고 그다음에 이제 들어오는 사람한테는 아주 어려운 관문을 넣어서 뭘 하는 거죠? 자기를 자랑하는 거죠. 자기를 높이는 거죠. 이것은 스스로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태도하고 반대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가능한 한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도록 돕고, 이게 합당한 마음인지 자기도 안 된 것을 너는 해야 된다. 자기도 못 해놓고, 이것은 악한 의도가 숨어져 있는 거죠. 이제 왜 우리도 못하던 것이지 않느냐? 오히려 우리도 못했었다. 우리도 율법을 지키려고, 지키려고 했는데 지킬 수 없었다. 율법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모든 율법은 조항 위에 몇백 가지 조항이 있는 거죠. 모든 조항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야 됩니다. 항상, 모든 조항을,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도 할 수 없었다고 자기를 자백하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이렇게 낮아지는 쪽으로 안 가고, "나는 지켰거든, 너도 지켜야 돼." 이렇게 하면 완전히 복음을 엎어버리는 거죠. 베드로가 강력하게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이제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노라. 여기 보면 '왓더바이블 티치스'의 사도행전 존 헤딩 형제님이 쓰셨는데요. 그 형제님이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을 해 놓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게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우리 유대인처럼 똑같이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렇게 쓴 게 아닙니다. 어떻게 썼냐? '우리 유대인도 이방인과 똑같이 구원받는다.'입니다. 만약에 이방인이 우리처럼, 이방인도 그냥 우리와 똑같이 구원받는다라고 하면 이게 뭔가 이방인이 열등한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거꾸로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일찍부터 봤고, 일찍부터 알았어야 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은혜로 구원받는 것처럼 우리도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유대인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 특권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이제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12절입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지금 베드로가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 아니까 가만히 있는 거죠.

그랬을 때 두 번째로 바울과 바나바가 말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딱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들이 이 복음을 전했다. 율법 없이, 할례 없이 구원받는다라고 전했더니, 뭐가 있었냐? 하나님이 기적을 행해 주셨다. 이게 이제 과거에 있었던 일이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보내고, 어떤 사람한테 말을 전하게 했죠.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람 말이 진짜 하나님 말씀인가를 의심할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이 말하거나 행동할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을 보여주시는 거죠. 이건 기적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들은 내가 보낸 사람이다. 이들의 말은 내가 인정하는 말이다, 를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이 기적 이야기를 합니다. 그랬더니 이 복음은 주님이 승인하신, 주님이 하라고 하신 복음이구나, 이게 또 입증이 된 겁니다.
그랬을 때 이제 야고보가 해결합니다. 여기서 잠깐 15절 보시면 구약 성경과 일치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여기서 이제 잠깐 이해해야 되는 거죠. 이것은 구약에 있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가 아닙니다. 이건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일어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구약 말씀을 보니까 이와 같은 원칙이 옳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리고 이제 인용했는데요. "이후에" 그랬는데,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내가 돌아와서는 이게 주님이 하신 말씀인데요. 이것은 주님의 지상 재림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지상 재림하실 때, 다시 말하면 천년 왕국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천년 왕국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냐? 첫 번째,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을 것입니다. 천년 왕국의 이스라엘이 영광스러운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천년 왕국에서 이방인은요? 거기 보겠습니다. 이렇게 그다음에 17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그 남은 사람들은 이제 유대인인데요. 이제 유대인 그다음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천년 왕국에는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천년 왕국은 이스라엘만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영광스러운 나라고, 수도가 예루살렘이고, 뭐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이제 성전이 있고, 에스겔 성전이 세워지고, 이렇게 하지만, 거기에 이스라엘만 사는 게 아니고 이방인들이 같이 삽니다.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주님을 찾아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들 나를 하나님께 좀 인도해 달라 하고 막 이제 이런 이런 게 있는 거잖아요.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천년 왕국에서도 이방인은 이방인으로 남아 있답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이 되지 않는답니다. 이 둘은 따로따로 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다. 이방은 계속 이방이고 이스라엘은 계속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굉장히 독특합니다. 교회는 들어오면 이스라엘도 아니고 이방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세 가지가 있는 거죠. 고린도전서 10장인가요? 인류를 셋으로 묶죠. 유대인,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 이렇게죠. 그래서 이 두 개가 그렇다면 이건 이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천년 왕국에서도 이방인은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면, 지금 교회 시대에, 지금 은혜의 시대에 이방인이 유대인이 돼야 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방인은 이방인으로서 구원받는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돼야 구원받는 게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까지 된 거죠.

그리고 그다음에 하겠습니다. 20절, 그래서 이제 베드로, 바울, 분별을 지지하고 이제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성경적이다. 앞에 말한 게 성경적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만 네 가지를 부탁합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행 15:20).

이건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이 4개를 지켜야 구원받는다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해석하면 앞에서 내 이야기한 것을 뒤집는 거죠. 이건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네 가지를 절제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는 이 네 가지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 이방인은 우상의 제물 먹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이 다루는데요. 우상의 제물 먹을 수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런데 만약 누군가에게 걸림이 된다면, 구도자가 "저거 먹어도 되네." 우리로 치면 제사 음식 먹어도 되죠. 구정 때, 제사 음식이 문제가 있습니까? 음식 거기 앞에 갔다 온 건데 뭐, 똑같은 음식인데, 먹어도 돼요. 그런데 누군가가 "그리스도인도 제사 음식 먹네. 그리스도인도 제사 지내도 돼네." 이렇게 될 수 있으니까,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혹은 성도를 위해서, 갓 구원받았는데, 이제 제사 지내는 거 아니다. 그건 우상에게 한 거다. 그래서 자기는 딱 그만뒀는데, 아니 모임 안에서 먼저 되시고 믿음이 있는 분이 제사 음식을 먹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실족하는 거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 이게 이제 이 네 가지 있잖아요. 다시 말해서 애고보는 이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며 산다. 내가 자유로워도 나는 그걸 해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나 개인에게는, 그러나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교회 성도를 위해서, 나를 절제하고 사는 것이다. 이게 이제 이 네 가지 이것들의 내용입니다.
다시 잠깐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의 제물입니다. 그다음에 우상 제물 먹느냐 마느냐고, 음행은, 이 음행은 원래 안 되는 겁니다. 이거 저기 십계명에도 나와 있죠. "간음하지 말라" 돼 있습니다. 결혼 이외에 모든 남녀 간의 관계는 다 불법입니다. 하나님이 엄히 처벌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건데 이게 왜 들어가 있죠? 그래서 여기 있는 음행은 그런 음행이 아니고, 그 당시 우상 신전에 가보면 예를 들면 이제 저희들이 이제 아는 곳은 제우스 신전, 비너스 신전, 이런 로마 신전에 가보면, 여자 사제들이 있습니다. 신전에서 이제 의식을 이렇게 하는 여자 사제들이 돈 받고 몸을 팝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항상 그래요. 믿음에서 떠나면, 이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면 항상 도덕적 타락이 옵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상을 섬기면, 이 우상을 섬기고 이제 뭐 거기 제사도 지내고 우상에게 뭐도 하고 나서 끝이 음행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거기 들어가면, 우상에게 제사 지내러 혹시 가면 거기 가는 거죠. 이건 당연히 안 되는 거지만 하나 덧붙인 겁니다. 이 음행도 당연히 이방인들의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해서 안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절제해야 되는 항목이다, 이렇게 말한 거고요.
그다음에 이제 목매어 죽인 것과 피인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제 견해가 약간 다릅니다. 이제 목매어 죽인 것은 이제 어떤 고기를 잡을 때 목매어 죽였으니까 그 고기에 피가 많이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제 노아 홍수 이후로 피를 먹지 말라라고 돼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고기를 잡을 때 피를 빼야 합니다. 율법에 따라서 피를 굉장히 뺍니다. 그러니까 이제 고기가 맛이 없는 거죠. 그리고 이제 피를 멀리 해라 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 같으면 선직국이 있습니다. 해장국, 먹어도 되나요? 여기 이제 견해가 갈립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혹시 이제 우리 주위에는 유대인이 없긴 한데요. 하여간 이런 것들을 종교적으로 이렇게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저희들이 이제 성경 해석 원칙 중에 하나가 여기 이제 이렇게 나와 있죠. 창세기에서는 피를 먹지 말라라고 돼 있습니다. 피는 못 먹게 돼 있습니다. 피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못 먹게 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여기서는 이거 절제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디모데전서를 가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니까 모든 음식이 깨끗합니다. 그랬을 때 이제 성경에서 저희들이 취하는 원칙은 가장 나중에 있는 것들을 가장 우선시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피를 개인적으로 나는 안 된다 안 먹는다 말씀이 그렇다. 그래서 안 먹으시는 분들이 있고, 저 개인적으로는 디모데전서를 가지고 다 가능합니다. 가능하지만 만약에 누군가가 걸림이 될 만한 일이 있으면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 네 가지를 이야기를 했고요.

그다음에 이제 몇 가지 결론적인 이야기를 드려보겠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를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는다. 하나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했을 때, 늘 반대가 어디서 나오냐면 "그러면 은혜로 구원받으면, 행위로 구원받지 않으면 사람들이 막 살게 되지 않느냐?"라고 하는 염려가 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 때 과거의 죄가 용서됐죠. 현재의 죄도 용서됐죠. 복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미래의 죄까지 용서돼 있다. 온 세상 죄를, 주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잖아요. 그래서 그걸 믿으면, 그 믿는 사람이 훗날 믿은 후에 사람이 온전하지 않으니까 믿은 후에도 잘못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까지도 십자가에서 용서되어 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들이 죄를 합법화하고, 죄를 짓게 만들고, 죄에 대해서 가볍게 여길 게 아니냐라고 늘 우려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민감해져야 합니다. 만약에 자기가 죄를 지으면 이 복음을 약화시키는, 복음은 위험하다. 이렇게 인식을 주는 것입니다. 위험한 게 아닌데, 세상 사람에게는 복음을 미래의 죄까지 용서 다 해버렸어, 그런데 이제 사실은 이렇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안 집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안 짓는 게 아니고, 은혜로 전적인 용서를 받는 사람이 죄를 미워하고 죄를 안 짓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못하고, "저렇게 은혜를 저렇게 강조하면 이게 죄를 이렇게 약화시키는 게 아니야? 그래도 세상은 좀 도덕적이어야 되고, 질서가 있어야 되는데, 이게 세상의 도덕 질서를 약화시키는 게 아닌가?"라고 우려하는 사람이 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복음을 전하고, 만약에 우리가 죄를 짓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복음을 위험한 복음으로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하여간 첫 번째로, 그래서 다시 이 야고보가 말한 4개가 그런 뜻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네 가지를 지킵니다. 네 가지 안 지키면 지옥 가기 때문에 지키는 거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 아닙니다. 이걸 안 지켜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지킵니다. 왜요? 그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이제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사랑해 주셨으니 이제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삽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자기를 희생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의 원칙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가시면 할례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면 할례는 어디서 나오냐면 창세기 16장에서 나옵니다. 창세기 16장, 17장에서 나오는데요. 할례는 어떻게 해서 생긴 일이냐면, 율법에 있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거고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녀를 주신다고 그랬는데,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이삭을 주신다고 약속했는데도, 아브라함이 이걸 못 믿고 하갈을 취합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지금도 중동은 이것 때문에, 아랍이 이스마엘 후손이잖아요. 그래서 계속 이 문제를, 이게 대대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거 잘못한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내가 도와드리자. 하나님이 사라가 불임이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녀가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사라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갈하고 잤더니 애가 나와버리잖아요. 사라가 문제인 거죠. 사라가 이제 아이를 못 낳는 거죠. 그래서 하여간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 저기 아이를 못 낳는데, 하나님은 주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하갈을 취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드리면 어떨까?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인간적인 힘으로, 우리의 세상적인 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면 어떨까? 이게 할례입니다. 하나님이 이거 안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식기를 자르는 것입니다. 이제 물론 생식기를 자르는 건 아니고 겉에 표면만 이렇게 자르는 건데, 이게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너의 인간적인 힘이나 노력으로 하지 마라. 전적인 은혜로만 된다라고 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복음을 말하고 있는 거죠. 구원은 하나님과 전적인 은혜로 된다. 너희들이 좀 지켜가지고 구원받는 거 아니다라고 하는 걸 말하는 거죠. 그런데 할례가 그걸 말하는데, 할례를 의식적으로 하면서 내용은 거꾸로 하는 거예요. 이게 의식의 연약한 점입니다. 의식을 지키는 사람이 그 의식이 뭘 의미하는 건지, 그 내용은 잃어버리고 형식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이게 이제 느후수단에서도 그런 게 나오죠. 지금도 저희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도 만찬 예배 드립니다. 만찬 예배는 어떻게 드리느냐? 주님이 누군가를 기억하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어떤 은혜로 구원하셨는가를 찬양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찬 드리고, 만찬 안 드리는 것들은 다 저거, 이렇게 하면 거꾸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겸손하고, 은혜 입은 자에 불과하고, 자랑할 것이 없고,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이쪽으로 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의 문제점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는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으니까 우리는 율법 가운데 없지 않느냐 그러는데 이제 성경에서 몇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법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이 다른 법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 한번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그리스도의 법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뭐냐? 서로 짐을 져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짐 지기 어려우면 내가 기꺼이 그 짐을 대신 져주는, 이게 그리스도 법입니다. 형제는 형제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 법 가운데 있는 거고요.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

그래서 법 중에서 최고의 법이 있습니다. 최고의 법이 뭐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법 가운데 있습니다. 이게 이제 주님이 한번 말씀하셨죠 어떤 율법사가 와서 가장 큰 계명이 뭡니까? 했을 때 주님이 요약해 주셨죠. 두 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됐죠. 그 법을 다시 하나로 줄인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라고 하는 최고의 법 가운데 우리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법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법 가운데 있고, 최고 법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우리는 "성령의 법" 가운데 있습니다. 성령의 법, 구원받은 생명을 가진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법, 최고의 법 가운데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네,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잘 아시는 구절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하신 명령이죠.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그래서 이제 우리는 사랑의 법, 그다음에 그리스도의 법, 최고의 법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이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법 가운데 있습니다. 이 법이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할례도 받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가 마음대로 하느냐? 다시요, 자유는 뭐냐 하면,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내가 마땅히 해야 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자유에 대해서 잘 정리를 하셔야 합니다.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자유라고 합니다. 하여간 이건 나중에 또 많이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 같고요.
그다음에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할례, 율법 아니다. 은혜의 믿음이다. 이렇게 돼 있죠. 그래놓고 사도행전 16장으로 오시겠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행 16:3).

"그"는 디모데입니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입니다. 디모데한테 할례를 줍니다. 15장에서 할례 안 된다. 원칙을 딱 세워놓습니다. 16장에서 디모데한테 할례를 줍니다. 왜요? 그 이유가 나와 있죠? 누구 때문에요? 유대인들 때문에, 아니 유대인들 때문에 원칙을 어겨요? 그래서 저희들이 이제 이런 걸 하는 겁니다. 원칙이 분명합니다. 원칙은 타협할 수 없습니다. 분명하고 양보할 수 없습니다. 일점 일획이라도, 조금이라도 타협하면 안 됩니다. 실행에 있어서는 유연하게 하는 것입니다.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절대로 할례 안 할 것 같죠? 16장에서 디모데에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저희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또 하나님의 마음과 이런 것들을 균형 있게 알고 있고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데 있어서 저희들이 자꾸 더 자라가야 합니다. 믿음의 덕을 그다음에 덕의 지식을, 절제를, 그리고 맨 마지막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하신 말씀들이 저희들에게 이루어져서, 저희들이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말씀을 실행해 가는 하나님의 교회로 성장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얻으시고, 또 우리가 주님 앞에 갔을 때 칭찬받는 저희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