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래 형제님/사도행전

사도행전 13-14장 : 1차 전도여행의 네가지 사건

박이레 2024. 11. 23. 16:26

< 사도행전 13-14장 : 1차 전도여행의 네가지 사건 > 한봉래 형제님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제가 사도행전을 쭉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13장 말씀부터, 13장은 지난번에 했는데요. 13, 14장을 한꺼번에 쭉 이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사도행전 13장 1절부터 몇 절 읽어드리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쌔..."(행 13:1-5).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행 13:7-12).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 13:14).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행 14:1-3).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행 14:8-15).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행 14:19-23).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행 14:27-28).

아멘, 사도행전 13, 14장이 사도바울의 1차 전도여행 과정입니다. 1차 전도여행을 13, 14장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이제 네 군데를 특별히 성경이 묘사합니다. 이제 네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 사건은 살라미 살라미에서 서기오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구원받는 이야기 나오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이제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전한 것이 나오고요. 그다음에 이제 14장으로 넘어가서는 이고이온에서 이렇게 복음 전하는 것을 짧게 소개한 다음에 루스드라 사건을 말합니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한 기적을 행하고 그것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한테 신이 사람 모양으로 오셨다 하고 제사 지내는 사건, 이게 나오고 그리고 나서는 이제 되돌아가는, 이렇게 이제 네 가지가 이제 큰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이 이제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제가 이제까지 쭉 해왔다는 거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은 역사서입니다.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그다음에 쭉 이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제 교회가 여러 가지로 이제 여러 사람들이 더해지고, 막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사도행전 28장에 로마로 복음이 들어가는 것까지 쭉 이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건을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록 가운데 저희들이 이제 볼 수 있는 것은 주제가 이것입니다. 교회가 처음에는 유대인들 유대인 회당과 관련돼 있었죠. 그래서 교회가 어떻게 유대인들 하고 이렇게 갈라져 왔는가, 하는 것들이 쭉 기본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제 후반부로 가면 세상 종교하고는 뭐가 다른가, 이런 것들이 사도행전의 주된 주제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뭔가? 복음은 다른 종교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이게 큰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살펴봤던 거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유대인과 갈라지는 것, 제일 처음에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보시죠.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성령께서 사도행전 2장에 오시고 그리고 교회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이 교회의 생일입니다. 오순절이죠. 그때 사도 베드로가 이제 전한 아주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이게 이제 유대교와 교회를 가르는 겁니다. 2장 36절, "그런 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과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가 갈라집니다. 뭘로 갈라지느냐? 구약 이스라엘의 유대교하고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예수님을 누구라고 부를 것이냐? 이게 이제 가르는 겁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주님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창세기 3장부터 인간이 죄를 범할 때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할 분을 보내주시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분, 창세기 3장부터 계속해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메시아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그 메시아가 드디어 오셨다. 그분이 예수님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아는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인 것처럼 보였는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다. 주님이시다. 이제 이게 유대교와 복음을 가르는 핵심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믿는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이 3천 명이 생겨서 3,120명이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게 이제 유대교에서 떨어져 나온 거죠.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 13절,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인데요. 이제 유대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행 6:13).

"이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기독교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이 거룩한 곳" 이 거룩한 곳은 솔로몬 성전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제 솔로몬 성전 아니지만, 헤롯이 지금 46년간 이렇게 짓고 있는 성전, "이 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 그래서 이제 복음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성전에 임대하셨지만 지금은 성전에 임대하지 않고 어디 임재하나요? 지역 모임에, 스데반이 속해 있는 예루살렘 지역 모임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이게 이제 차이입니다. 유대인들은 계속 아니다. 여기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다음에 그다음에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배를 이렇게 드렸습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율법을 따라드렸습니다. 일곱 절기가 있죠. 절기 때마다 와서 짐승, 양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드렸죠. 이게 이제 그들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교회는 어떻게 했냐? 지역 모임에서 떡과 잔을 놓고, 구원받은 형제들이 감사하고 자매들이 잠잠하고, 그리고 함께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다시 오심을 소망하고, 그 가운데서 자기를 살피는 것, 이게 이제 교회의 예배의 모습입니다. 이게 이제 유대교하고 교회를 가르는 핵심적인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조금 더 이제 가시면 사도행전 10장입니다. 세 번째 유대교하고 갈림길이 나와 있습니다. 10장 28절, 여기는 이제 고넬료에게 고넬료 같은 이방인이 교회에 들어오는 이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제 고넬료와 관련돼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거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행 10:28).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그래서 이제 유대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딱 구분돼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식이 있건 없건, 사회적 신분이 있건 뭐건, 아무 상관없이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구원하신 죄 용서받은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을 너희도 알거니와" 유대인들은 이방인하고 식사 안 했습니다. 같이 교제 안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건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의 거룩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거룩은 부정한 것들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죄와 관련된 것들을 안 하는 것, 그것이 자기의 거룩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아닙니다. 이제 교회로 오면, 이제 물론 교회가 저기 나쁜 것을 막 해도 된다 이런 뜻은 아니지만, 교회가 강조하는 거룩은 뭐가 거룩한 것이냐? 나쁜 짓을 안 하는 게 아니고, 부도덕한 것을 하지 않는 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그래서 이제 죄인이지만 가서 복음도 전하고, 이렇게 성령 충만하여 성령 인도함을 받는 것이 거룩이다. 그래서 거룩에 대한 정의가 변화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입니다. 13장, 이건 이제 지난번에 다룬 것입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이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래서 구약은 율법 하에서는 율법을 순종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은 죄를 깨닫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럼 의롭다 함은 어떻게 얻는 것이냐? 나의 행위로 얻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실을 믿을 때,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그리고 이제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 이 복음을, 이제 행위로 구원받느냐,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이게 이제 율법과 복음을 가르는 대목입니다. 여기까지 했고요.
그다음에 이제 14장에서는 하나 더 이제 전진합니다. 14장은 이렇게 보겠습니다. 14장에서는 13절 보시죠.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행 14:13).

그러면 이제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은혜로 보내주신 예수님을, 그분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라고 했을 때 그다음 주제입니다. 그러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율법을 안 지켜도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은혜로 십자가의 피로 의인이 되었고 죄 용서를 받았으니 율법은 상관없느냐? 율법을 어겨도 되느냐?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 14장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이렇게 이제 쓰스, 제우스, 우상이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와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신이라고 믿고, 신이라고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이게 이제 뭐에 걸리냐면 율법 중에서 대표적인게 십계명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첫 번째 계명이 뭐냐 그러면,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지니라"입니다. 이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지켜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이거 지킬까요? 바울과 바나바가 이거 지킬까요? 혹시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요? 신이라고 했으니까 제사 받아들이고, "내가 신인데 명령한다. 예수님 믿어 구원받아라."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같은 헛된 일을 하지 말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의 첫 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해가 있기 때문에 말씀을 제가 두 군데만 찾아보겠습니다. 이 율법으로 구원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이제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쭉 이제 설명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 로마서에서 이제 두 군데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이거 암송 구절로 저희들이 암송하면 참 좋겠다 생각되는 구절입니다. 로마서 3장 28절. 두 원리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해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보고 그 사람에게 너는 의인이다. 너에겐 죄가 없다.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 너는 내 자녀다. 천국에 올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져 있고 대표적인 게 이제 십계명이죠. 그 율법을 내가 행함으로써, 나의 행위가 그 율법을 맞춤으로써 얻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나는 선물로 받아들임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게 율법으로 되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라고 하는 것들을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다음에 로마서 8장, 똑같은 이 같은 말을 하신 사도바울께서 로마서 8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육신을 쫓지 않고 그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구원받으면 죄를 용서받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런데 하나가 더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죄가 용서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죄가 용서된 사람 속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믿는 사람은 이제는 자기 육체를 따라서, 육체가 요구하는 것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쫓아갑니다. 그래서 육신을 쫓지 않고 그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일부러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성령 인도하심만 따라갔는데 결과가 어떻게 되냐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사람에게 율법이 이루어집니다. 이게 이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두 가지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 원칙만 말하고 이 원칙을 빼버리는 것을 이제 무법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으면 이제 법은 상관없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무슨 죄를 지어도 다 용서됐으니까 천국 간다, 그건 사실이죠. 그런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육체를 따라서 마음대로 살게 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건 아주 나쁜 게 되는 거죠. 그게 이제 그래서 이제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못 얻는다. 그런데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게 13장 내용입니다. 그리고 14장 내용은 그렇게 전한 이들이 실제로 율법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이 율법을 지켰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율법을 구원받지 못하지만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게 이제 13장과 14장에서 성령께서 저희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우선 이렇게 해놓고요.

다시 내용을 조금 제가 설명을 안 한 부분들을 조금 이렇게 보충하면서 가겠습니다. 우선 13장으로 한번 가겠습니다.  13장 1절에서는 안디옥 교회가 나오는데요. 이 안디옥 교회가 조금 이따 나오는 뭐야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하고 다릅니다. 이게 이제 사도 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이렇게 파송했던, 하나님이 사용했던 이방인 교회입니다. 이방인 안디옥 교회의 인도자들 이름이 쭉 나와 있고요. 거기 보면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그다음에 마나엔, 사울, 해서 5명의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뭐라고 부르냐하면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는데 엑센트가 '교사'에 가 있습니다. 이들이 교사들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있었고, 그다음에 잠깐만 하나 더 생각해 보면 이 안디옥교회의 특징이 뭐냐하면, 안디옥 교회를 누가 개척했죠? 아무도 개척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스데반이 순교할 때 핍박이 일어나서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사도들은 남아 있었습니다. 사도는 위험을 감수하고 교회를 지키고 있었고,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이 여기저기 이제 뭐 그럼 어디서 살까,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이제 여기 안디옥이 좋겠네, 해서 이제 안디옥에 연고가 있거나 이런 사람들이 와서 이제 안디옥에 살다가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사람은 유대인에게만 전하고 어떤 사람은 이방인에게도 전하고 그래서 복음이 전해져서, 그런데 "주께서 함께하시고" "주의 손이 그들을 도우셔서" 거기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모임은 특정한 은사 있는 사람이 어느 지역을 기도하고, 또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오고, 그리고 거기서 복음을 증거하고 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이게 이제 안디옥교회의 굉장한 특징이고요. 그래서 이제 저희들이 이제 이런 면에서 정말 중요한 것, 하나님은 성도를 사용하신다. 구원받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이런 것들이 이제 분명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안디옥 교회를 전도 여행을 해서 여러 이방 지역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그 교회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사용하시죠? 그래서 이제 13장 1절 묘사는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성도를 사용하지 않고 은사 있는 사람을 사용한다. 이게 13장 1절, 2절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이렇게 이제 역사하십니다. 내가 이 교사 중에서 2명을 불러내겠다. 바나바와 바울입니다. 그래서 이 두 명을 보내라. 내가 이 두 명을 보내서 성령이 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이 두 명에게 뭘 시키죠? 은혜의 복음을 전해라.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이 복음을 너희들이 전해라라고 성령께서 두 사람을 뽑은 겁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이제 네 번 가서 전합니다. 구브로, 비시디아 안디옥, 그다음에 루스드라, 그리고 조금 더 갔다가 돌아오는 1차 전도 여행을 쭉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성령께서 교사들을 사용해서,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들을 사용해서 1차 전도 여행에 은혜의 복음을 증거케 하셨다. 이게 이제 큰 흐름에서 이제 나오는 첫 번째고요.
그다음에 이제 4절을 보시면 그래서 두 사람이 성령께서 은사 있다고 택하신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가서"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왜 교사들을 왜 뽑았냐? 거기 이제 첫 번째 이 살라미 구브로, 구브로라고 하는 키프로스라고 하는 섬이죠. 이 섬에서 있었던 일이 뭐냐하면, 여기서 이제 강조되는 단어들을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5절 보시면, "살라미에 이르러" 뭘 전했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쌔"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걸 약간 달리하면, 이걸 조금 쉽게 표현하면, 이게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지만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걸 이제 저희들이 쉽게 말하면 이걸 닥트린, '교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어떻게 받는가? 라고 하는 것들을 말하는 이 내용이 그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7절, 그런데 이제 거기 갔더니 거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이름이 서기오 바울입니다. 총독이었는데 이름이 좋죠, 서기오 바울.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 이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하고, 또 거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종교가 있고 여러 가지 이론이 많은데, 무엇이 참된 것인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추구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만나니까 불러다가, 이제 안디옥에서 온 사람인데, 여기 방문했는데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닙니다. 그가 총독이니까 이제 정보가 들어왔죠. 어떻게 했냐? 이게 지혜 있는 사람이다. "그래? 그들이 하나님과 의롭다 함과 율법과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불러다가 한번 말해봐라." 이게 지혜에 있는 사람입니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길이 있다라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그래서 이제 1차 전도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돼 있는가,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셨고 그다음에 이스라엘과는 어떤 약속을 하셨고, 이렇게 하나님 성경을 사람들에게 구원의 원리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조금 보겠습니다. 그다음에 듣고 12절,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그래서 여기 이제 여러 번 쓰이는 단어가 주님의 가르치심,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 이것들을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에서 주로 말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것이 가능한, 그렇게 할 수 있는 두 은사 있는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되, 핵심적인 내용은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 내용을, 여러 성경에 있었던 사건들 이런 것들을 들어서 핵심적인 이 내용을 전해라, 라고 했고 그걸 해낸 겁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보시면 여기서는 이제 첫 번째, 이 구브로에서는 이방인들이 있었고, 그리고 거기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죠. 6절에 보면 '바예수' 이렇게 되죠. '바'라고 하는 것은 보통 '아들'이라고 하는 뜻이죠. 영어로는 맥이죠. 맥도날드 하면 도날드의 아들, 이런 뜻입니다. '바예수' 그러면 예수의 아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이 굉장히 흔한 이름이다, 이렇게 알 수 있는 거죠. 바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도 구약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짓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키고, 하나님 말씀을 떠난 사람, 배도한 사람입니다. 아주 하나님께서 엄중히 심판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뭘 하는 거냐하면, 믿지 못하게 하는 건데 이게 박수라고 돼 있는데요. 거짓 선지자 박수대인데, 이게 이제 우리로 치자면 뭐죠? 무당, 가장 이제 아마 많이 하는 게 이런 것 같아요. 미래를 예언합니다. 이번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 비트코인에 투자해라. 동쪽으로 가면 뭐 어쩐다, 이렇게 미래에 대해서 예측하고 실제로 맞습니다. 이게 안 맞으면 사람들이 안 믿죠. 금방 알죠. 그런데 이 사람 말을 따르니까 실제로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가서 물어보고, 병이 걸리면 이거 병을 어떻게 치료했으면 좋겠냐라고 가서 물어보고, 아들 대학 갈 때쯤 되면 어디다 원서를 내야 되겠냐고 물어보고, 그리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을 해줘요. 그리고 그대로 했더니 일이 형통한 거예요. 이게 가짜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이익을 따를 것인가, 이게 복음에 항상 걸리는 겁니다. 이 바예수라고 하는 이 박수, 이 박수가 총독한테 와서도 막 이야기하고, 총독실에도 오고, 총독하고 이야기도 하고 한 걸로 봐서 이 사람이 그 사회 내에서 영향력이 있고 여러 가지 실적이 있는 거죠. 이게 이제 은혜의 복음이 증거됐을 때 항상 이와 같은 문제들이, 이와 같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런 것하고 반대된답니다. 그래서 항상 저희들이 복음은, 저희들이 이걸 이제 보통 이렇게 말하죠. 성경은 종교가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죠. 어떻게 말하면 종교 카테고리에 들어가지만,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는 건 뭘 강조하냐 하면 진리다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지, 어떤 하나의 어떤 종교적인 형태를 전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게 이제 이 대목에서 나와 있는 거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이제 구약 성경을 쭉 들어서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해 주신 이스라엘의 역사를 쭉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제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이런 것들을 제시하여 이것을 믿음으로, 이게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율법으로는 불가능했다, 이걸 했고요.

그다음에 이제 세 번째로 가겠습니다. 이고니온, 이제 그리고 이제 14장입니다. 14장에서 다룬 건데, 14장에서 이고니온는 제가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 일으키고, 그다음에 이걸 보고 이건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이게 보니까 제우스, 쓰스는 제우스입니다. 제우스 신이 왔다, 또 허메라고 하는 신이 왔다, 이렇게 해서 이제 거부한 이야기인데요. 그다음에 하나 더 19절 보시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행 14:19).

여기 이제 루스드라라고 하는 곳에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거기 살고 있는 이방인들이 사도 바울이 행한 이 기적을 보고, 이거 신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보니까 이거 제우스 신이다. 아마 이제 자기들이 생각하는 제우스 신이 그런 거 했나 보죠. 그래서 제우스 신께서 오셨으니 제사를, 제우스 신이 좋아하시는 소고기, 소 잡고 막 이제 이렇게 하려고 한 거죠. 그런데 이걸 사도바울이 못하게 했습니다. 이거 하면 안 된다. 이거 우상이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 제 첫 번째 계명에 나와 있는 거다. 이거 안 된다라고 했을 때,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때야 되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원래 이제 바울과 바나바를 싫어했죠. 왜냐하면 자기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사람인데, 바울과 바나바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이렇게 말하고 그리고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렇게 전하니까 이제 충돌이 일어난 거죠.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적대시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유대인과 교회의 공통점은 한 하나님이 계시고,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한 분이고, 우상은 없는 거고, 우상은 사단이 만든 거고,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비록 바울과 바나바가 자기하고 입장이 다를지라도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한 것에는 동의하고, 그래서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한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이 점에 있어서는 인정해야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쳐서" 돌로 쳤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 방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한 사람을 돌로 칩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은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요? 이방인들이 화가 난 것은 이해가 갑니다. 자기들이 생각할 때 이것은 신이 내려오신 것이니까, 열심을 내서 제사를 지내려고 한 건데 그걸 못하게 하니까 마음에 마음에 안 들고, 상처를 입고, 이렇게 할 수 있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요? 그래서 결국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헤롯과 빌라도가 한 편이 됩니다. 이 헤롯과 빌라도는 서로 원수였거든요. 헤롯은 왕이고 이제 빌라도는 로마 총독이죠. 그래서 이제 둘이 늘 경쟁관계에 있고, 늘 서로 싫어했죠. 그런데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는 한 목소리를 냅니다. 여기서는 어떻게 한 목소리를 냈느냐?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신을 섬기는 것을 뭐라고 표현했냐면, 사도바울이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이 헛된 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분이 나쁘죠. 그다음에 이 유대인들은 은혜로 구원받는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뭘 의미하냐면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는 행함으로 구원받아야 이 사회 질서가 유지된다. 도덕적이어야 된다. 그렇지 않고 만약에 은혜로 구원받으,면 행한 것이 없이 오히려 죄인일수록 구원받기가 쉽고 막 이렇게 전하니까, 그러면 이 사회에 도덕도 없어지고, 윤리도 없어지고, 이 사회를 인정하는 질서도 없어지고, 그 죄가 관영할 거고, 그럼 이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 것이냐? 라고 하는 생각으로 복음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이방인은 자기들이 섬기는 종교를 헛된 일이라고 부른 것,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자기들의 구원 원리를 말도 안 되는, 무질서한, 결국은 사회를 부도덕하게 만들어버릴 그와 같은 주장을 한다고 그래서 이 두 사람이 합쳐서 복음을 반대한 것입니다. 지금도 저희들이 이제 복음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때 이제 복음에 대한 거부감 이 둘로 나타나죠. 첫 번째, 왜 자기들만 옳다고 하냐? 아니 모든 종교가 다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진지하고 이런 건데, 저기 불교 스님들 봐라. 가족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그렇게 진리를 추구하고 그러는데, 그런 게 다 구원 못 받는다고, 그 세종대왕 어떻게 되고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냐? 이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 반대하는 거죠. 이제 그런 반대니까, 또 하나는 이제 기성 어떤 체제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신학대학도 나오고 또 교회는 다 위계질서가 있어야지, 목사님 계시고, 장로님 계시고, 집사님 계시고, 그리고 평신도, 이렇게 있어야지. 아니 다 형제, 자매면 이게 뭐 이게 말이 되냐? 다 이제 이런 생각, 그러니까 뭘 빼냐면, 성령께서 죄가 용서된 사람들이, 이제 죄를 미워하게 되고, 그리고 자기 안에 두신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또 하나님의 질서를 보고, 그러니까 성령을 모신 사람들은 특징이 뭐냐하면, 다 자기가 겸손하고, 낮아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까 염려하고, 이런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참된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이렇게 합쳐서 반대를 한 거죠.

그다음에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이제 크게 4개의 사건 가운데, 이제 1차 전쟁에서 4개의 사건이 일어났고 그리고 이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돌아갈 때 보겠습니다. 이제 돌아갈 때 이제 방문했던 지역을 다시 이제 역순으로 쭉 이렇게 방문하면서 가는데, 방금 구원받은 성도에게,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권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저희들이 잘 들어보겠습니다.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발휘해야 되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내가 그 말씀을 믿고, 이건 이제 내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들은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래서 믿음은 순종이죠. 그래서 내가 '듣는 사람이 해야 되는 책임'으로서의 믿음이라는 단어가 하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보통 이게 관사 없이 쓰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이 믿음' 해가지고 이게 관사가 들어갑니다. 영어로 하면 더라고 하는 관사가 들어갑니다. 이 믿음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들어가면 이건 주관적으로 개인이 행사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관적인 게 아니고 '객관적인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이제 예배는 예수님, 이제 하나님의 임재는 지역 모임에 있다. 예배는 떡과 잔을 가지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영어로는 닥트린입니다. 교리입니다. 말씀의 내용입니다. 이건 객관적인 내용입니다. "이 믿음에 거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믿음에 대해서 이고요.
그다음에 또 하나 보겠습니다. "거하라"인데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 이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그런 내용이 있는 거죠. 그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유명한 겁니다. 이게 연세대학교나 대학교 보면 이렇게 늘 이렇게, 뭐죠? 이렇게 뺏지, 상징에 이런 게 늘 들어가는데요. 대학교에서 늘 하는 게 뭐냐하면 진리, 자유죠. 진리, 자유, 정의, 막 이런 것들이죠. 그때 이제 쓰는 단어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주님이 그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에 거하는 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규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인가요? 이렇게 돼 있죠.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에 거해라"라고 돼 있습니다. 성경에서 거하다는 단어가 나오면 여기 이제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우거하다'라고 하는, 우리는 안 쓰는 옛날 표현인데요. '우거하다' 그러면 이건 잠시 있는 겁니다. 어느 지역에 우거했다 그러면 잠시 한 달 살기, 우거한 겁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고향에 계속해서 산다, 이게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과 구원은 이런 것과 교회는 이런 것과 예배는 이런 것과 성도의 삶은 이런 것과라고 하는 이 내용, 이 믿음에 계속해서 거해야 합니다.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오해하지 않도록, 한 번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다음에 안 믿으면요? 그 믿음이 진짜면 한 번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도, 구원의 영원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구원 받습니다. 이제 이거 첫 번째 교리입니다. 그 두 번째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계속 그 믿음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믿었다고 그랬어요. 틀림없이 믿은 것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안 믿는다 그런 거예요. 그러면 이제 이 사람의 경우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에 믿는다고 하는 말이 가짜일 수 있습니다. 그는 구원 안 받은 사람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가능성은 그가 처음에 믿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후에 이제 세상적으로 사는 거죠. 그래도 천국에는 갈 겁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경우가 나오죠. 그런데 성경은 이제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닌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믿음에 거해라" 정말 믿은 사람은 계속해서 믿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믿고, 즐거운 일이 와도 믿고, 그런 것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믿은 사람에게 계속 그 믿음을 유지하십시오. 한 번 믿어서 된 거지만 그러나 계속 그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가십시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요? 말씀으로 배우고, 또 성도님들과의 교회의 교제를 통해서 확신하고,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거죠. 세상에 가서 안 믿는 사람 맨날 이야기 듣고, 이게 그러네. 아닌가?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 믿음의 계속적으로 거해야 된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이건 이제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으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구원이면 환란을 통과해야 구원받는다.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보내주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믿음으로 받습니다. 행함으로 받는 거 아닙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그 사람은 세상 속에서 미움을 당할 것입니다. 반드시,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님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할까요? 미워하죠. 그래서 환란을 통과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가 아니고, 믿은 사람은 세상 가운데서 환란을 겪게 된다, 반드시. 그래서 제가 여러 번 인용하는 말씀이 그거죠.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래서 이걸 거꾸로, 거꾸로 하면 약간 이제 진리가 아닐 때가 있는데요. 거꾸로 하면 뭐냐하면, 내가 세상에서 핍박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사는 데 어려움이 없다면, 고난이 없다면, 혹시 내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지 않아서는 아닌가라고 돌아볼 필요가 있는 거죠. 내가 그냥 세상 악에 대해서도 그냥 용납하고, 구원받지 않는 사람 큰일 났는데도 그냥 자기가 알아서 사니까 이거 놔둬버리고, 복음 안 전하고, 또 성도가 말씀대로 저기 살아가지 않고, 세상적인 방식 취할 때 놔둬버리고, 그러니까 핍박이 없는 거죠. 정말로 복음도 전하고, 욕 먹고, 그다음에 성도 어떤 문제를 보면 참견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말씀이 이렇게 돼 있지 않습니까? 그 성도를 사랑해서, 그 성도가 변화되길 원해서,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을 하면, 구원받으면 그렇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어려움이 오게 된다라고 하는 이 두 가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 믿음을 계속해서 붙들고 있으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 예수님을 믿고 하늘 나라에 바로가면 좋은데 십자가 강도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 가치관이 달라지고 모든 생각이 달라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어둠입니다. 그래서 변화된 사람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세상의 미움을 받게 돼 있습니다. 세상이 미워하거든, 세상이 이유 없이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고 혹은 세상에게 미움받지 않으려고 바꾸지 말고, 이게 반드시 필요한 환란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환란을 믿음으로 견디고 주님의 은혜로 강해지고 오히려 환란을 통해서 정결하게 변화되고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라고 사도바울이 가르친 거죠.

그리고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이곤이온을 제가 뺐는데요. 14장 3절을 보면 이고니온에서는 뭘 전했냐? 구브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그다음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은혜로 구원받는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행 14:3).

그래서 1차 전도여행은 "은혜의 말씀" 은혜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 은사를 가진 두 사람을 뽑아서 성령께서 시켜서 이 일을 완수하게 했다. 이게 1차 전도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제 잠깐 보시면, 1절 보시면 이제 역시 이제 똑같이 합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랬더니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믿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좋은 거죠. 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말씀에 거할 것이냐? 혹은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믿더라, 라고 하는 것은 좋은 출발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입니다. 저희들이 항상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사단도 일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행 14:2).

이제 사단도 일합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2절에서 사단이 일합니다. 그랬을 때 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여기서 하나 교훈을 받아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6장인가 이렇게 말하죠. 사도바울이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오래 있으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 있으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여기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두셨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문이 열린 뒤 어떻게 아느냐? 사람들이 이제 전도지 주면 들으려고 하고, 복음 집회 오고, 복음에 대해서 관심 있게 듣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거죠. 또 하나입니다. 그리고 반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단이 막 반대한다고 하는 것은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 보겠습니다. 이제 이게 하나님도 일하시고 사단도 일해서 이제 반대가 극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때 두 사도가 오래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적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대가 있을 때 오래 견뎌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저기 나한테 싫은 소리하고 맨날 그런데, 내가 뭐 거기 오래 있을 필요가 있나? 나는 자기들 좋나? 하고 떠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반대가 있을 때 오래 있어야 된답니다.
이게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담대히 말하니" 반대가 있으면 쫄아서 이제 말 못 합니다. 싫어하는데, 그런 그렇게 하지 않고 오래 있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기뻐하셔서 주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해주십니다. 그럼 거기서 담대히 말했다라고 하는 게 뭘 담대히 말했느냐? 은혜의 말씀을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말씀을 싫어해요. 사람들이 은혜의 말씀을 싫어해요. 우리 생각에는 그렇죠. 아니 은혜를 베푸셨다는데 그걸 왜 싫어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답니다. 그래서 은혜 그러면, 역으로 너는 안 되거든,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 자기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복음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무언가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임에서 불순종합니다. 자기도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권위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자기 나름대로 자꾸 이야기하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항상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반대가 뭐죠?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이 패망의 선봉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곳이 보겠습니다. 1절에서 은혜가 있고 2절에서 사단이 역사에서 강력한 반대가 일어납니다. 그때 두 사도의 태도입니다. "오래 있고" 이거 견뎌내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하고, 싫어하고, 비방하고, 견뎌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담대히 은혜의 말씀을 전했더니 주님이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자인 것을,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4절, 부득이한 결과입니다. 나뉩니다. 무리가 나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 편, 바울과 바나바 편, 구원받은 사람, 아닌 사람, 이게 딱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뉘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니 우리가 쟤들 오기 전에는 하나였는데, 쟤들이 와가지고 우리를 분열시켜놨다. 그래서 5절에 보면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걸 그렇게 못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일이 이제 여기까지 되면 주님께서 하신 일을 이루었다라고 보고, 이제 하나님의 역사가 완수되었다고 보고 다른 지역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1차 전도여행 13장, 14장에 나와 있는 것을 통해서 저희들이 여러 가지 교훈을 받고, 특별히 4개의 사건을 통해서 각각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복음, 그리고 반대가 일어났을 때의 태도, 그리고 루가오니가에서의 제사 드리는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했던 것,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사도바울이 어떤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었는가, 이런 것들이 저희들 마음속에 남아서 저희들이 이 말씀에 계속 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저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저희들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저희들의 모임 생활의 섬김을 통해서 나타나고, 그리고 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 변화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영광으로 아는, 특권으로 아는,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베드로가 그렇게 하죠. 이제 저기 복음을 전하다가 산헤드린에게 잡혀서 뭐 이렇게 하다가, 산헤드린에서 이거 어떡할까? 그러다가 가말리엘에게 물어보니까 하나님을 반대할 수도 있으니까 놔두세요. 하나님께로 온 거 아니면 이거 없어질 겁니다. 그래서 놔둘 때 그냥 놔둘 수 없으니까 때려서 놔두죠. 그래서 맞고 나서 베드로가 한 말이죠.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받을 수 있게 된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다." 이런 일들이 저희 가운데 있고, 특별히 모임 가운데 이와 같은 성도들이 나타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