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을 거절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 > 강성찬 형제님
어제 여기 대전 중구 모임 성도님들 이제 야외 활동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이제 저희 마포에서도 어제 야외 활동을 가졌습니다. 저희는 이제 특별히 이제 자매님들 배드민턴 대회를 했고요. 예상 외로 김지선 자매님이 1등을 하셔서 프라이팬을 받으셨습니다. 저희가 이제 그 전 주에는 여러 지방에 계시는 성도님들의 이제 가족분들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희가 이제 세 군데를 방문해서 성도님들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요. 지방에 계시다 보니까 저희가 자주 방문하지 못해서 이렇게 또 특별히 날을 잡아서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오늘은 이 복음 시간에 이제 저희가 만난 그 세 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세 분이 복음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 이제 그런 것들이 또 구도하시는 분에게 특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말씀을 보고자 하는데요. 요한복음 12장입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4-6).
이제 왜 이제 가룟 유다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냐면요. 이제 이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제 성경이 글을 이제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도적이라" 이제 제가 이 복음을 전하면서 만난 이 세 분에 대해서 이제 말씀을 드릴 때에, 이제 저도 이제 그 각각 만난 분들에 대해서 이제 한마디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이런 분이었다.' 이렇게,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이 그런 것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사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한마디로,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그 사람의 여러 스토리가 있는 것이고, 이제 어떤 환경과 또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살아왔는지, 이제 그런 것들이 다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사실 이제 사람으로서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이제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에 가룟 유다에 대해서 딱 이렇게 기록을 해놓으셨어요. "저는 도적이라" 저는 이제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왜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였는지 그렇게 설명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제 3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가 예수님을 팔았는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제 심리학적으로 여러 가지 배경,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떤 사상, 그런 것들을 이제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제가 예전에 구원받기 전에 이 성경을 잘 모를 때, 이 세상에서 이제 유명한 그런 뮤지컬이 있어요. 저는 그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고 봤는데 그게 무슨 내용이냐면,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는가라는 그런 내용을 가진 뮤지컬이에요. 보면 가룟유다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이제 스토리들이 쭉 나와요. 가룟유다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죠, 자기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지. 하지만 성경은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도적이었다. 그럼 무엇보다도 돈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판 것이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평가를 하신 것이죠. 그를 만드시고, 그의 모든 환경을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고, 그리고 매 순간 그의 마음에 그가 회개하도록 계속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론적으로 평가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것을 잘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제 구도하시는 분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도,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평가할 것인가? 저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이분들이 말씀을 많이 하세요. "내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이렇게 돼서 이렇게 하고 있다."라고 많은 말을 합니다. 그리고 왜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지도 말씀을 하세요. 왜 지금 내가 믿고 있지 않는지, 제가 그 자리에서 바로 그분한테 이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것은 그러면 그 말을 지금 나한테 그렇게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도 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는지,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듣고 뭐라고 대답하실지, 하나님께서는 딱 한마디 하실 것입니다. "너는 이런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이 "아닌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건 아주 정확하게 여러분을 평가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뭐라고 평가하실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첫 번째 만난 분을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이분은 성경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이제 나중에 생각을 바꾸시고 참으로 이 성경을 말씀을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데요. 지금 모습은 그런 그런 분이었습니다. 사실 이제 그분은 이제 장애가 있는 분이에요. 앞을 볼 수가 없는 분입니다. 전혀 앞을 볼 수가 없어서, 사실 저는 그런 분을 이제 처음 만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이제 앞이 안 보인다는 게 이제 그냥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데 앞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앞이 안 보인 채로 수많은 세월을 살다 보니까 이렇게 사람을 맞대고 교류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러니까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혼자서 사시는 분이서 그런 교류가 거의 없는 분이죠. 앞이 안 보이니까 그런 교류가 더욱 없는 분이죠. 그래서 우리가 방문해서 어떤 말을 해도 반응을 안 하세요. 아무런 말도 안 하세요. 그러니까는 말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그분이 딱 한마디 한 게 있습니다. 뭐라고 했냐면, 지옥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니까 그분이 딱 한마디를 하셨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떻게 알아요?" 이게 그분이 딱 한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아무 말씀도 안 하고 계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분이었는데, 그분도 많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제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물론 사람은 죽은 후에 일에 대해서 알 수가 없죠. 어느 누구도 죽고 나서 다시 돌아온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그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성경에 기록을 하신 겁니다. 이 성경에 보면 우리가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여러 번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이 성경에 이제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이 지옥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옥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입니다. 지옥에 대해서 신약 성경에서 12번이 언급이 되는데 그중에 11번이 이제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 부분입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3-48).
여기 지옥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고통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영원한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지옥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거기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너를 손을 자르고서도, 그 발을 자르고서도, 그 눈을 빼어버리고서라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자주 지옥에 대해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것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은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이것을 가장 잘 아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은 48절에 보면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더기도, 그 가장 하찮은 미물인 그 벌레도 거기서는 죽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이제 다른 곳에 보면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전갈에 쏘여서 고통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계시록에 보면 이제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 전갈의 독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죽기를 구하여도 죽을 수 없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우면 그것을 이제 끝내고 싶어 합니다. 죽음으로써 끝내고 싶어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죽음은 다른 모든 걸 다 끝내는 것이지, 그래서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 너무나 힘들어서 이제 그분이 이제 잘못 생각하고 차라리 이제 죽음으로써 이것을 끝내버리자,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죠.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지옥에서는 그 고통을 끝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큰 잘못을 이제 저지르고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그 대가를 자기가 다 치르지 못하면 이제 자기의 죽음으로써 자기가 죽음으로써 그 대가를 치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옥에서는 그게 이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지옥에서는 죽음으로 그 고통을 끝낼 수 없는 것이고, 이 지옥에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뤄서 여러분의 잘못한 그 죄를 처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옥은 죄를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적으로 아직 이 땅 가운데 있을 때에, 기회가 있을 때에, 그 죄를 처리할 수 있는 이 은혜의 시대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흘리신 그 피의 공로를 믿고 죄사함을 받으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까 제가 만난 분처럼 '지옥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라고 말했을 때 "그건 성경에 써져 있습니다." "아니, 그럼 성경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아요?" 이렇게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그러면 여러분이 믿고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믿고 있는 것들은 무엇을 근거로 믿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대부분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그 자리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보지 않았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99%가 다 그런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이제 신뢰를 바탕으로라고 말하기도 하고, 이제 권위를 바탕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권위를 바탕으로 그렇게 믿는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나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제 박사님이라든지, 의사 선생님이라든지, 그 분야에 대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분야에 대해서 공부하신 분이 "이것은 이렇게 됩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게 맞겠구나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내용을 살펴볼 때에 여러 가지 내용들이 진실되게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는 어떤지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니깐요. 그리고 성경이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정확하다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 사람의 어떠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그 내용을 보면 정말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런 부분까지도 성경이 아주 정확하게 말하고 있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이 성경을 신뢰하게 되고 그 권위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 우리가 죽은 이후에 있는 내용에 대해서까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분, 그것을 우리는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서울에 살고, 그래서 이제 대전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서울에는 이런 이런 빌딩들이 있어요. 63층 빌딩이 있고요. 제가 거기 가봤습니다. 말하면 여러분이 이제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안 가보신 분이 있다 할지라도, 제가 다른 내용도 여러분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내용에 대해서도 거짓말하지 않고 진실되게 여러분에게 말했으니까, 서울에 이런 이런 것들이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여러분이 그걸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이제 신뢰를 바탕으로 어떤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만난 그분이 "죽고 난 이후에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말한다면 그분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죠. 성경을 신뢰하지 않고, 성경의 내용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아직 들어본 적이 없고, 그래서 성경이 얼마나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지를 아직 모른 것이죠. 혹시 이 자리에 제가 만난 그분처럼 성경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우선 중립적인 마음으로 한번 이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가 얼마나 우리에게 진실되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지 한번 마음을 열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말씀이 분명하다, 이렇게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 어떤 청년인데요, 자신이 이제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그 청년하고 같이 이제 밥을 먹을 이제 기회가 있었는데, 이제 이런 내용들을 이야기했죠. 이제 그 청년이 말하기를 자기도 이 무신론을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럽니다. 이걸 계속 그 하나님은 없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자꾸 그거를 방해하는 일들이 이렇게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꾸 있는 것 같고,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 이 성경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도, 그것도 제 신념입니다. 그 사람이 고집이고, 그래서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하는 잘못인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이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길 바랍니다. 참으로 이 말씀을 정직한 마음으로 듣고, 이 말씀의 마음을 열고 듣는다면, 참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실되고 여기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만난 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분을 이제 한마디로 이제 제가 정의하자면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이제 첫 번째 만난 분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좀 이제 정반대 분이었습니다. 이제 결혼해서 가족도 있고 좋은 이 곳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자녀들도 잘 교육을 하고 잘 자라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됐어요. 그 자녀 중에서는 이제 판사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모님은 아주 이제 자랑스러워하시는 분이죠. 그뿐만 아니라 이 부모님도 굉장히 종교적인 분이세요. 성당을 다니시는데 성경을 이제 계속 쓰십니다. 그 집에 갔더니 성경을 노트에다가 쓰신 게 노트가 한 이만큼 되더라고요. 우리 중에 성경 이만큼 노트로 쓰신 분 있나요? 그걸 아주 이제 자랑하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그러다 보니까, 제가 이렇게 평가하기는 좀 죄송한 마음이 좀 있습니다마는 자꾸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계세요. 왜냐하면 자신은 이제 모든 것을 다 잘 했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하는 거죠. 그래서 이분이 그 아들분의 말을 들어보면은 친구가 없대요. 경로당에 가서도 다른 사람하고 자꾸 싸우고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참 이게 사 사람의 비극인데요. 좋은 것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사람이 더 좋아져야 되는데, 겉으로는 많은 걸 가지고 있지만 그 사람 자체는 더 나빠지는 거예요. 이게 이 사람의 어리석음입니다. 이야 이사야서 말씀 한 군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서 64장 6절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사 64:6).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성경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의 의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준으로 보기에 여러 가지 것들을 잘 한 것으로 보이고 이 정도면 우리가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우리의 의에 대한 평가는 '더러운 옷과 같다'라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조금 며칠 입어서 더러운 한 번 세탁을 해야 되는 그 정도의 옷이 아니라 완전히 오물이 묻은, 그 원문을 보면 완전히 오물이 묻은 정말 만지기도조차 꺼려하는 이제 그러한 것과 같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의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그래도 나는 이 정도 이런 것은 했잖아, 내가 이런 것은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잖아, 이런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이미 채점을 해놓으셨습니다. 평가를 해놓으시고 그러한 사람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라고 평가를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로움, 이제 그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 3장 말씀을 잠깐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여기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시고, 그것은 우리가 받아야 되는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서 죽었어야 되는데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22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 하나님의 의가 그에게 주어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신다면, 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나의 구주인 것을 믿는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다. 참으로 여기 있는 모든 분이 이 하나님의 의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만난 그분은 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남 부러울 것이 없는 여러 가지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분에게 있어서는 나쁘게 작용해버립니다. 그 아들이 성공하고 이제 평안하고 부유하게 사는, 자기가 많은 종교적인 활동을 한 그 모든 좋은 것들이 그분에게는 나쁘게 작용해서 교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만들고, 친구가 없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분 아들이 평가하기를 또한 아들의 자녀들이 평가하기를 손녀들도 그 할아버지를 만나는 걸 무서워한다는 거예요. 손녀들한테까지도 이렇게 지적하는, 고집 피우는, 이런 완고한 할아버지가 돼버린 거예요. 좋은 것이 그렇게 작용해버린 것입니다.
한 가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2-24).
이게 어떤 상황이냐면 이제 아담과 하하가 범죄하였을 때 이제 하나님께서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제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을까 하니까 이제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 길을 지키게 합니다. 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생명나무는 좋은 건데, 왜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이 사람에게 먹지 못하게 내어쫓고 생명나무로 오는 길을 이렇게 막아버렸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싫어서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그 생명나무를 못 다 먹게 막으셨냐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좋은 것도 다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좋은 게 사람들이 그러죠. 이게 다 똥 돼버렸다고, 좋은 것이 그에게 좋게 작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가 만난 그분처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분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이 그분에게 좋게 작용을 안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죄가 해결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지금 이 성경의 맨 첫 번째에 이 생명나무에 대해서 하나님이 막으셨잖아요. 이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생명나무에 하나님께서 들어오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들어오게 하시는지를 보냐면 요한계시록 22장을 보겠습니다. 참 이래서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증거가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성경이 사람들이 그냥 막 썼으면, 사실 이게 몇천 년 동안 많은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거든요.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저자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오랜 기간 동안 다른 저자에 의해서 기록이 되었지만 이게 일관성이 있고 통일성이 있습니다. 이게 동일한 한분 하나님께서 그 펜을 든 기자들을 사용하셔서 기록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이제 마지막 부분에 보면, 22장 14절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여기 이제 생명나무에 누가 나아가는지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두루마기를, 이 두루마기 옷 긴 옷, 자기가 입고 있는 그 긴 옷을 세탁한, 빤 사람들, 그걸 깨끗하게 한 사람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루마기가 긴 옷을 이제 세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마 좀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좀 앞으로 가서 요한계시록 7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보면 많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이제 환난에서 나와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3-14).
여기 그 옷을 씻었는데 그 사람들이 있는데 무엇으로 씻었냐면 어린 양의 피에 씻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오실 때에 침례 요한이 그를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이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어린 양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 어린 양이 대신 죽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어서 죽어야 되는데 그 어린 양이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어린 양의 피를 보시고 그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실 일을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누군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그 어린 양에 피에 자기 옷을 세탁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말미암아 자기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 예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들,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 이제 그 사람들이 생명나무에 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좋은 것을 참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 좋은 것이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이 되도록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아야지, 죄의 문제가 해결돼야지, 구원받아야지만이 정말 이 복이 복다운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이제 미루는 분입니다. 사실 저희가 이제 이분을 만나려고 간 것은 아니고 이제 이분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 겁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가 병이 드셔서 가보니까 이제 침상에 누워 계시고 잘 알아듣지를 못하세요. 그러니까 사실 대부분 부모님들이 생각보다 빠르게 금방 이렇게 침상에 눕게 되고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 금방 들어가는 것을 많이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분에게는 제대로 이제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분의 이제 아들을 이제 만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전에 그 부모님을 이제 만나러 가게 되면, 그 아들들은 다 밖으로 도망갑니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를 안 만나려고 다 피하죠. "언제 와? 언제 와?" 이렇게 물어보는데 그 '언제 와'가 그 시간을 알고 도망가려고 이제 물어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날은 이분이 있었어요. 그 아들이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분이라도 붙잡고 이제 복음을 이야기를 했죠. 그런데 그분이 어떻게 말하냐면, "이게 마음이 내켜야 되지. 나도 안 믿으려는 게 아니다. 언젠가는 믿을 것이다. 나의 형처럼 언젠가는 믿을 것이다. 그래서 자꾸 나한테 이렇게 강요하지 말라, 그러면 더 믿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일단 가만히 내버려 두고 믿은 마음이 생기면 그때 가겠다. 지금 가서 억지로 가서 앉아 있다가 또 마음이 또 안 좋아져서, 안 다녀! 이러면 더 안 좋은 일 아니냐?"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도 그 말을 들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이렇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기억이 딱 나더라고요. 제가 이분을 5년 전에 또 만났거든요. 그 집에 갔을 때, 그렇게 도망가려고 했지만 못 도망가고 있는 분을 만나서 이렇게 얘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그때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그 말을 들으니까, 그 하시는 말을 들으니까 생각이 났어요. "당신이 5년 전에도 지금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한 거죠. 생각해 보니까 똑같은 말을 지금도 5년이 지난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내키면 가겠다라는 그 말,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이 내키지 않고 있는 그분을 만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쩌면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는 어쩌면 많은 시간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마치 지옥에 있는 것처럼, 지옥에 딱 들어가는 순간 그때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때는 그냥 그 상태로 쭉 가는 거예요. 계속 고통받는 상태로,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사실 그래요. 주님을 안 믿으면 실제적인 좋은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 상태에서 계속 그렇게 가는 거예요. 실제로 그분의 형이 말했습니다. 사실 제가 만난 그분이 저랑 나이가 비슷해요. 그러니까 믿는 형은 저랑 그분을 계속 비교하게 되는 거예요. 5년 전에 저와 그 믿지 않는 동생의 모습, 그리고 10년 전에 저와 그 믿지 않는 동생의 모습, 보면 사실 30년 전에는 그 형이 믿었을 때 그 30년 전에는, 저도 뭐 학생이고 그 동생도 학생이고 별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이제 30년이 지났잖아요. 저는 그래도 이제 주님을 믿고 또 주님 안에서 여러 가지로 이 부서지고 깨어지고 이제 믿음 안에서 조금이나마 성장이 되는 거죠. 그런데 그 믿지 않는 동생은 30년 동안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분도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하고 그냥 혼자 살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제가 봐도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그분은 그대로 똑같이 살고 있어요.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영생을 정말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 그 오랜 시간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많은 시간이 주어져도 똑같아요. 변화가 전혀 되지가 않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4장입니다. 여기도 몇 년째 똑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이제 로마에서 유다를 다스리라고 보낸 총독입니다.
정치적으로 굉장히 높은 사람이죠. 이제 벨릭스가 그 이제 로마의 총독입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행 24:24-27).
여기 유대 총독 밑에 이제 믿는 바울,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그런 와중에도 총독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강론하였습니다. 그런데 벨렉스는 그 말씀을 들을 때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믿지는 않고 "지금은 가라, 내가 시간이 나면 다시 부르겠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다른 이야기는 많이 합니다. 바울을 불러서 또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혹시 그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부터 돈을 받을까, 좀 잘해달라는 그런 뇌물을 받을까, 그리고 또한 27절에 보면, 바울을 싫어하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해서 이제 그 바울을 그렇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2년이나 흘러 시간이 지나가 버립니다. 똑같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듣고 왜 제대로 반응을 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의 마음은 이 세상적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바라고, 그는 무엇보다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실까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나의 평판에 영향을 주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해서, 그게 관심사에 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에 제대로 반응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계속해서 지금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뭐라고 평가하실지 그것을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섰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뭐라고, 나의 인생에 대해서 뭐라고 한마디로 너는 이런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 복음을 들을 때에, 이 장차 오는 심판의 말씀을 들을 때에, 참으로 두려워하고 참으로 여러분의 죄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길 바랍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의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면 정말로 여러분에게 복된 것이 정말로 복된 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은혜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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