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형제님/데이빗 길리란드 형제님

< 솔로몬 성전 3. 성전 뜰 >

박이레 2021. 7. 23. 21:44

< 솔로몬 성전 3. 성전 뜰 > 데이빗 길리란드 형제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사백 팔십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솔로몬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전은 장이 육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삼십 규빗이며"(왕상 6:1-2).

 

"또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로 둘러 안뜰을 만들었더라 제 사년 시브월에 여호와의 전 기초를 쌓았고 제 십일년 불월 곧 팔월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전이 다 필역되었으니 솔로몬이 전을 건축한 동안이 칠년이었더라"(왕상 6:36-38).

 

"또 큰 뜰 주위에는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를 놓았으니 마치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에 놓은 것 같더라"(왕상 7:12).

 

"솔로몬이 또 놋으로 단을 만들었으니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십 규빗이며"(대하 4:1).

 

"또 제사장의 뜰과 큰 뜰과 뜰 문을 만들고 놋으로 그 문짝에 입혔고"(대하 4:9).

 

우리가 솔로몬 성전의 말씀을 상고함에 있어서 아주 천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빠르게 진행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수요일 저녁시간에 이 주제와 관계된 전체적인 개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시간에는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그 장소, 모리아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시간에는 그 솔로몬 성전 주위를 두르고 있는 그 뜰에 대해서 살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 성전의 뜰입니다. 그리고 다음주에는 그 성전 안에, 성소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대로 '솔로몬 성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것은 성경에서는 단 한번도 이 건축물에 대해서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 표현이야말로 이 건축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정확한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성전입니다. 그 세가지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이 건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시간에 이 건축물을 설계하신분이 바로 하나님이신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 건축물은 단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건축물이기 때문에 이것은 '여호와의 성전'입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자기 권영을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대하 2:1).

 

이 구절은 이 건축물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바로 이 전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된 것입니다. 단지 솔로몬이 자기를 위해서 이 건물을 건축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 건축물이 여호와의 이름을 나타내는데, 간증 하는데 사용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소유하느냐를 나타내주고 있는 표현 입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성전인 것입니다. 이것은 지역모임에 대해서도 동일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쉽게, '우리모임'이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내 모임', '우리모임'이라고 설명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나와있는대로 이 지역모임은 참으로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의 이유가 모두 동일하게 지역모임에도 적용됩니다. 지역모임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지역모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한 존재합니다. 또 이 지역모임은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이유를 살펴 볼때 우리는 지역모임 안의 교제가 얼마나 큰 특권이며 얼마나 큰 책임을 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쉽게 이야기 할때, 이 구조물을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솔로몬은 이 구조물을 지을때에 이것이 미래의 뭔가 더 위대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의 맨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 1절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의 세계라" 라고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아들이라고, 솔로몬이 상징 하는바, 바로 그분이라고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솔로몬이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처음으로 원래 주어졌던 이름은 '아다디야' 입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다시 나타내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주님께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에서 이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주님께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6장에서도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주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 그리고 신약성경에 교회를 세우는 건축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솔로몬 성전이 지어질 때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중 중심인 시대였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그 나라 전체가 성전을 짓는데 모두 협력 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광야때에 성막 중심으로 모여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막이 지어질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행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성막 주위로 열두지파가 진을 쳤던 것입니다. 그 성막이 그들의 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성전은 이스라엘 나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 이후의 왕들은 그들이 성전에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항상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것과 관련해 어떤 왕들은 선한 왕이 되고 어떤 왕들은 악한 왕이 된 것입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선한 왕은 성전을 계속 추구 하였습니다. 악한 왕은 성전을 경홀이 여기고 그것을 또는 파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왕들을 평가하실때 그들이 성전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지를 보고 평가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은 이스라엘 나라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나타내주고 있는 하나의 체온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지역모임도 우리에게 대하여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지역모임과 관련되서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가 내가 영적으로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그 지역모임에 대해서 사랑하고 애정을 담고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발견하게 되는것은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연약해져 있고 낙심되고 침체된 상태라면 그는 모임과 관련해서 애정이 식어있고 흥미가 없어한다는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때때로 유대인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첫번째로 예루살렘에 방문하게 된 때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때에 그 어린 아들이 성전을 바라보며 얻는 감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막 올라와서 이 화려한 성전을 보았을때 느끼는 감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전의 뜰로 진입하는 문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 성전의 뜰안으로 들어가게 될때 이 소년이 받는 감흥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다음주에는 그 소년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세가지로 나눠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는 그 뜰의 배치입니다. 두번째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그 뜰에 있는 단입니다. 세번째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는 우리가 그 뜰을 볼때 무엇을 이해하는가 입니다.

 

이 첫번째 다루고자 하는 뜰의 배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이 뜰의 배치와 관련해서 성경 학자들간의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솔로몬 성전 주위에 몇개의 뜰이 둘러싸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조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것은 최소한 두개의 뜰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구절에서 '안 뜰'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깥 뜰'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두개의 뜰이 있습니다.

제가 스크린에 보여드린 이 모형은 안에서부터 바깥쪽까지 세개의 뜰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그런 그림인데 이것은 '토마스 뉴베리'이라는 분이 그린 그림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뉴베리'라는 성경을 들어보신적이 있으실텐데요. 그분이 그린 것입니다. 그분은 성경 연구가이며 또한 건축가입니다. 또한 그분은 성전 모형을 만드셨는데, 그 모형을 그려놓은 그림인 것입니다. 뉴베리 분이 여러가지를 그려 놓았는데 저 자신은 이 그림에 대해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늘나라에 가서 그분을 만나게 될때 몇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토마스 뉴베리는 돔 구조의 루프를 세개, 위와 옆에 뒤에 만드셨는데, 이것은 조금 제 생각에 의식적인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이 성전을 그리신 분은 평평한 플랫폼, 구조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긴 성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저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셔서 토마스 뉴베리를 만나게 될때에 제가 이런말을 했다고 먼저 말씀하지는 말기 바랍니다.(웃음) 여러분이 뉴베리 성경을 아마 가지고 계시다면 뒷부분에 그분이 왜 이렇게 성전을 그렸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해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성전의 지붕을 말하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가 루프모양으로 생겨있는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분은 이 성전지붕이 그렇게 생겼을거라고 해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분은 이렇게 세개의 뜰로 되어 있을거라고 하였습니다. 뉴베리씨가 세개의 뜰을 언급한 것은 에스겔서에서 천년왕국 시대에 지어질 성전이 세개의 뜰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두개의 뜰을 솔로몬 성전이 가지고 있었을거라고 믿습니다.

첫번째가 '안 뜰'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제사장의 뜰'이라고도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바깥 뜰'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 들어올 수 있는 뜰입니다. 많은사람들이 솔로몬 성전을 생각할때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좀 작지 않았나 라고 생각하는것입니다. 성전 자체로만 보면 단지 30m만 되는 건물입니다. 그리고 가로는 15m정도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그런 건물 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솔로몬 성전은 결코 많은 무리가 그 안으로 들어오도록 의도된 성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 성전안에 들어올 수 있는분은, 들어오도록 의도된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 뿐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은 다른 두개의 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뜰에서 번제단이 있었고 그리고 제사장들이 그곳에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바깥쪽에 바깥뜰이 있었는데 여기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개의 뜰에 대해서 다른 것을 더 몇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안뜰, 제사장의 뜰이라고 불리우는 곳은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윗뜰'이라고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바깥뜰, 큰뜰은 아래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읽은 구절에서 돌이 세켜로 놓여졌다는 것을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한켜를 놓게 됩니다. 제가 그리고있는 이런 모양으로 된 것입니다.(그림..ㅠㅠ) 이렇게 세개 층으로 돌을 쌓아서 담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백향목으로 만들어져 있는 그 담이 돌담 맨위에 놓여졌습니다. 이 돌로 된데는 견고한 돌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것이고 맨 위에는 백향목으로 만들어져 있고 이 부분이 뚫려져 있는 공간이고 이제 저런 울타리처럼 백향목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래뜰에 있는 사람들은 저 윗뜰에서 백향목 담을 통과해서 안을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볼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다시한번 아버지를 따라오고 있는 소년의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소년이 받았을 그 감흥의 첫번째는 그 성전이 높은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올려진 뜰 위에, 그리고 높이 세워진 그 구조물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조물에 대해서, 이 장소는 하늘과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성읍의 위치보다도, 그냥 일상적인 것보다 더 높은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구절에서 알수 있듯이 이 뜰의 문은 놋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자기가 지금 아주 특별한 장소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일상적인, 그냥 세상적인 것과는 다른 높이 솟아오른 것입니다. 우리는 지역모임이 가지고 있는 그 위엄과 다른성격에 대해서 항상기억하고 있어야 할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모든것을 다 속되게 만들고자하는 그런 경향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위의것을 우리가 살고있는 곳의 낮은 속된것으로 내리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높은 수준으로 올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성전으로 가는데 두개의 높아지는 다른 단계의 뜰이 있고 그 위에 성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뜰의 배치와 관련해서 말씀을 드린것입니다.

 

이 뜰에 있는 번제단에 대해서 이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소년이 이제 윗뜰로 오게 되었을때 그가 보게되는것은 아주 큰 놋으로 된 번제단 입니다. 그것은 가로가 20규빗이고 또한 세로가 20규빗이고 높이는 10규빗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자마자 볼수있게 되는것은 바로 이 커다란 번제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는 사람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것은 그 피가 흘려지는 희생제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역모임 간증에서 또 다른 중요한 한 성격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역모임의 집회로 모일 때마다 항상 가장 먼저 하는것이 주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그 희생제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주제가 우리의 모든 주제 가운데서 가장 높은 위치에 놓고 언급되야 하는 그런 주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 없이 지역모임의 간증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예를들어 복음집회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집회에서 죄인들을 구속하는 그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기도집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십자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우리의 만찬예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예배때에 우리가 항상 말씀드리고 감사하는것은 주님의 오실때가지 그분의 죽으심을 감사하는것이 아닙니까? 만일 어떤 방문객이 한달간 그 집회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방문객은 아마도 그 특별한 집회에 대해서 감흥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방문객은 언급된 모든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가 받았을 감흥 한가지는 이것입니다. 그 장소에 모이고 있던 그 사람들은 참으로 갈보리에서 십자가의 죽음에 참으로 감사하고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큰 번제단에 대해서 다른 한가지 것을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번제단은 지성소의 크기와 정확히 같습니다. 그리고 그 모양도 똑같은데요. 번제단도 정사각형이고 지성소도 똑같습니다. 이 지성소는 이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입니다. 이 번제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그 크기만큼 그 길이로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바로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하게 만족시키는 그러한 크기의 희생제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만족하시고 그 요구가 다 이루어졌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아주 흥미로운것을 다시한번 짧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번제단은 사각형입니다.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다 향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성격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또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 사면, 어느 방향으로나 전부 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오직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죽으셨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친구들을 이 복음집회에 데리고 와서 복음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충분히 주어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에 대해서 성경은 또 다른 표현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희생제사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커다란 번제단은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그 희생제사를 다 드릴 수 있는 크기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희생제사를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지역모임이 또한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희생 예물을 이제 지역모임에 나올때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시간을 드려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하는것을, 시간을 드려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드려서 가지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모든 면에서 이 번제단에 희생예물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뜰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은 바로 이 번제단일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언급한 그런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지역모임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것을 말해주고있는 그러한 서신서 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잠깐 주제와 벗어나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주님의 희생제사에 관련되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는 네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가지 다른 관점에서 그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억력을 테스트 해보겠습니다. 지역모임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고린도전서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수년전에 JR.콜드웰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고린도전서에 대한 주석을 쓰시면서 그 제목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지역모임의 헌법' 저는 이 제목이 참으로 정확한 제목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가운데 모인 젊은 성도님들께서 지역모임에 대해서 알고자 하신다면 고린도전서를 배우고 읽어야 할것입니다. 제가 말씀대로 주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해서 그 서신서에서는 네가지로 아주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네가지에 대해서 아주 빠르게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1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5장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것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가 아니고 여기서는 '희생제사'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0장 11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그리고 '희생', 그리고 '피', 그리고 '죽음'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러한 숙제를 내드리겠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을 바꿔가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언급했습니까? 이 1장, 5장,10장, 11장, 15장 모두가 그 희생제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주님의 사역을 네가지 다른 방식으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일 저에게 와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역모임에서 그 십자가가 가장 탁월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이 솔로몬 성전에서 번제단도 마찮가지로 탁월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번째로 이 뜰에 관해서 이해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과 관련되서 성경의 여러부분을 함께 보겠습니다. 제가 시편말씀 몇군데를 읽겠습니다. 시편 말씀을 읽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시편이 시가서인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안에 많은 시가를 기록해 놓으셨다는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이 '시'라는 것은 문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라는것은 그냥 산문과는 아주 다른 형식입니다. 산문은 우리의 생각에서 나오는 글입니다. 시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혼에서 나오는 글입니다. 산문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를 성경에 두셨는데, 그것은 사람이 지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주제를 시편에서도 보게 되며, 또한 복음서에서도 읽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십자가의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가지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가지셨던 마음의 깊은곳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는 여러군데에서 이 하나님의 집의 뜰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에서 그 뜰이 언급된 것을 빠르게 살펴보면서 그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 뜰과 관련해서 어떠한 감정들을 느끼게 됬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들이 이 뜰에 들어가면서 그들이 느꼈을 감흥의 단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네, 다섯군데의 시편을 한번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마치고자 하기 때문에 빠르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시 84:1-3).

 

우리는 2절에서 '여호와의 뜰'('여호와의 궁전'이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으로는 '여호와의 뜰'이라고 써 있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뜰을 사모하며 쇠약함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이것은 이제 그 집에 거하고 있는 한 이스라엘인이 성전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는 이제 그 성전에, 여호와의 뜰에, 여호와의 집에 갈때까지 그것을 기다리며 그것을 사모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곳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집에 가는것이 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해야한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뜰에 가고자 하는 열망이 그 마음에 가득해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사용된 단어들을 볼때 그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됩니다. 2절에 세개의 동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사모한다" 그래서 "쇠약함이여" 그래서"부르짖나이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열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각기 열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골프를 아주 좋아합니다. 어떤사람은 돈을 버는데 모든것을 다 쏟아 넣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교육을 받고자 하는 열망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임에 대해서 그와같은 열정을 가진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난것이 언제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그냥 모임에 가야하기 때문에 나온 사람들입니까? 그냥 의무로 나온 것입니까? 아주 지루하지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서 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하나님의 뜰에 가기에 아주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하나님의 집에 나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장으로는 단 하루도 빼먹지 않으려고 그렇게 열심인데 지역교회와 관련해서는 하루 빼먹는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우선순위가 아주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그 영혼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이 땅의 일에 더 열정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내 마음'이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 육체'라는 표현을 봅니다. 그리고 '내 영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것이, 전 인격이 하나님의 뜰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우리의 감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은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육체는 그 육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몸 자체가 그 장소에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사람들은 저에게 그냥 인사로 "데이빗, 우리가 영으로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모임에 나오지 못할때에 "우리가 영으로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분들의 몸이 여기 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분들의 영혼을 볼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몸이 여기있고 또한 그분들의 영혼도 여기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 그 여호와의 성전으로부터 멀리 떠나있는 사람은 바로 그 여호와의 집에 가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상황이 바뀌지 않고 어려워서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 때문에 못오게 된다 할찌라도 저는 그분들이 이와같은 그 집회를 못가게 되서 안타까워하는,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수년 전에 영국에 아주 나이든 자매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아주 나이가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걷기가 매우 불편하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항상 모임의 집회 가운데 가장먼저 홀에 가장먼저 와서 앉아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단지 설교자로써 그 모임에 일년에 한번정도 방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나이든 자매님이 항상 맨 처음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등이 굽었고 관절이 안좋은데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설교자가 그 나이든 자매님께 몇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몸이 불편한데도 이렇게 일찍 와있다는 것에서 놀랍게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자매님은 아주 놀라운 대답을 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제 마음이 그보다 훨씬 먼저 와 있었고, 제 몸이 뒤늦게 지금 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비결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먼저 그 모임에 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다리는 먼저 오지만 마음은 뒤늦게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는 더 늦게 오고 있습니다. 왜 와 있는지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은 모임에 오십니까? 그냥 친구가 가니까 갑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냥 건물이 좋아서 갑니다." 혹은, "거기 나오는 애찬이 좋아서 갑니다." 그런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임에 나오는 더 깊은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때때로 친구들은 어떤때는 친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 음식도 좋지 않을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 84편의 기자는 왜 그토록 여호와의 뜰에 가고자 하였습니까?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영혼이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뜰에 가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것이다 라고 기대하고 있는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 할 것이다 라는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석처럼 그를 그 열정으로 끌고 있는것입니다. 그는 이제 3절에서는 자기를 작은새와 같이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쉴 보금자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참새와 같습니다. 거기서 이 '보금자리'라는 것은 참새가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곳입니다. 아마도 이 시편을 기록한 기자는 예전에 그가 여호와의 뜰에 들어왔을때 그곳에서 새들의 둥지를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그 둥지가 내가 있었으면 하는, 내가 바라는 보금자리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금자리의 새는 새끼둘 자리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알로부터 작은 새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 새는 자기의 자식들을 성전에서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인은 '나와 똑같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 성전은 나의 보금자리일 뿐만 아니라 나의 자녀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임이라는 것은 어린 그리스도인에게도 아주 좋은 공간입니다. 그 작은 영혼들이 이제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보금자리가 모임인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여러분 10절에서 뭐라고 하고 있는지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그 뜰에서의 한 날이 다른 어떤 장소에서의 천날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어떠한 장소라 할찌라도 하나님의 뜰보다 나은 장소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지역모임에 대해서 느끼고 있어야 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우리 집보다도 더 좋은 장소여야 됩니다, 학교보다도 더 좋은 장소여야 됩니다. 대학교 보다도 더 좋은 장소여야 됩니다. 직장 보다도 더 좋은 장소여야 됩니다. 여러분이 기쁨을 느끼는 휴가보다도 더 좋은 장소여야 됩니다. 여러분이 하는 게임보다도 더 좋은 장소여야 됩니다. 어떤 휴가를 즐기는 장소보다 더 좋은 장소여야 됩니다. 돈보다도 더 좋은 장소여야 됩니다. 여호와의 뜰에 거하는것이 이 모든 장소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첫번째로 하나님의 뜰에서 느낄 수 있는것은 이 '열정' 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100편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시 100:3-4).

 

우리는 4절에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영어성경으로 '그 뜰에')에 들어가서 감사하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 뜰과 관련된 두번째 주제를 봅니다. 그는 뜰에 들어올때 기도와 감사함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제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 장소입니다. 아주 즐겁게 들어오는 그러한 장소 입니다. 감사하면서 들어오는 장소 입니다. 실제로 여기 나와있는 시편은 하나님의 뜰에 들어가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들인 것입니다. 제가 바로 어떠한 마음으로 지역모임에 오는것이 좋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단지 불평하며 나오는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불평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약 3-4년전에 어떤 곳에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영적인 은사에 대해서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때의 촛점은 각 성도님들이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았다는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은사, 저런 사람들은 저 은사,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은사를 받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집회가 끝난 다음에 성도님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형제님이 저에게 인사를 하면서 아주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분은 슬픈 표정으로 저에게

말하기를 "저는 제 은사가 무엇인지 압니다." 제가 그것에 대해서  "그것이 뭔데요?" 라고 물어보기가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어보았습니다. "형제님, 당신의 은사가 뭔데요?" 그러자 형제님께서 말했습니다. "저의 은사는 불평하는 은사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런 불평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사람에게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다른 자매님을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자에 대해서 불평 합니다. 그리고 전등에 대해서 불평 합니다. 그리고 집회에 대해서 불평 합니다. 그들이 불평하지 않는것이 뭐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런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모임에 나오지 말기를 바랍니다. 아주 여러가지 문제들을 잔뜩 안고 모임에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뜰에 나올때 감사로 가득찬 마음을 가지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우리는 이땅의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4절에서 '감사'와 '찬송'을 보게 됩니다. 이 두 단어를 여러분께서 잘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편 96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찌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찌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찌어다"(시 96:8-9).

 

9절에 보면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세번째 단어 '경배'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우리는 이 세가지 단어를 살펴보았습니다. '찬송'과, '감사'와, 그리고 '경배' 입니다. 이 세가지 단어는 서로 다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며, 그리고 찬송해야 하며, 그리고 또 경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간단하게 이 세가지의 차이점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가 있었고요. 그리고 찬송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일을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것,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것을 주셨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 모든것을 다 감사할 수 없을 정도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육체를 주신 것, 또한 정신을 주신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혼으로 주신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게 감사만 드리는것이 아니고 또한 찬송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에 대한 감사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우리는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리고 구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가장 높은 영광 가운데 주님을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어떠한 계시를 하셨습니까? 그 계시와 관련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행하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성경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하며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는 경배드립니다. 이것이 가장 높은 단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는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에게 좋은것을 주셨다고 감사드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어떤 위대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찬송을 드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 자신이 어떠한 위대하신 분인지에 대해서 보면서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함, 그분의 사랑, 그분의 은혜, 그분의 지혜, 그분의 영광을, 그분의 모든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는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찬송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바로 그분께서 위대한 하나님이신것에 대해서 우리는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서도 여러분에게 좋은 약이 될 것이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뼈에도 좋은 영약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에도 좋은 약이 될 것입니다. 이것외에 다른것을 여러분이 불평하지 않기 바랍니다. 슬픈표정으로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로 오늘 이시간 9시 15분에 불평을 담당하는 부서는 마포에서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감사하는 부서는 이제 문을 활짝 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여호와의 뜰에 나올때, 이 지역모임에 나올때 항상 감사과 찬송와 경배를 가지고 나와야 할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92편을 보시겠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시 92:12-15).

 

이것이 여호와의 뜰과 관련되서 세번째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그러한 이해입니다. 여호와의 뜰은 우리가 열정으로 사모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장소일뿐만 아니라, 이곳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해서 진보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이 시편 92편에 이것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뜰에 심겨진 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늙어도 결실하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13절에서 종려나무와 비유하고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지역모임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뜰에서 그 녹색의 나무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이제 여호와의 뜰에 방문하게 됩니다. 어떤 순례자는 올해 방문하게 됩니다. 그때 당시에 그 나무가 심겨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방문했을때 그 나무가 더욱 굳건하게 자라져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 다음해에 방문했을때 그 나무가 더욱 잘 자라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수년후에 방문했을때 그 나무가 완전히 장성하여 이제 결실을 맺고 굳게 서 있는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수년간의 나무가 어떻게 자랐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역모임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 지역모임 안에 어떤 성도가 막 구원받아, 침례를 받아서 모임에 더해진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년후에 다시 그 모임을 방문했을때, 그 성도가 이제 더 크게 자라있고, 더 성숙하고 더 은혜로워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뿌리는 더 깊이 내려있고 그 가지는 넓게 펼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그 생명이 나타나야 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는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할것입니다. 여러분의 뿌리가 더욱 깊숙이 성경에 뿌리내려 있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높이 하늘을 향해서 자라 있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사람에게 더욱 유익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자랄수록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늘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자라게 되면 더욱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나이많은 성도님들로부터 발견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 나이많은 분들은 나이어린 성도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줍니다. 보호를 해주고 좋은 조언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고 그것은 다른 성도들에게 좋은 휴식을, 쉼을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늙어도 결실하며" 라고 여기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전에 이 성전은 어린 성도들이 자라기 좋은곳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작은새가 그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는곳이 바로 그 지역모임입니다. 하지만 또 이 시편에서는 나이많은 성도님들에게도 이 지역모임은 좋은 장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모임에 어린 성도들이 있는것은 좋은 것입니다. 또한 나이 많은 성도님들이 있는것도 또한 좋습니다. 그래서 이 나이 많은 성도님들은 활기있게 더욱 기쁘게 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른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역할을 하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나이많은 성도님들이 아주 비판적이 될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북아일랜드에서는 그런 분에 대해서 '구부러진'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험상궂은' 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좋은 분이 아닙니다. 나이많은 성도님들이 이 종려나무와 같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 축복의 가지를 활짝 넓게 펴고 있어야 합니다. 이 백향목처럼 또한 되어야 합니다. 아주 굳게 서있고 그리고 향기를 내고 다른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랄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좋은 토양은 지역모임의 그 토양인 것입니다. 참으로 이 옛날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뜰에 가고자 원했던 그 마음이 놀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는 이제 성장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바로 사모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도 이와같이 지역모임에 대해서 사모하고 찬송하고 또 진보가 있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솔로몬 성전 3. 성전 뜰|작성자 강단 말씀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