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4일 월요일_<플러싱 수양회>
강사 : 한봉래 형제님
< 복음말씀_권능,기사,표적 >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 개역한글)
사도 요한은 스스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었을때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는 생명, 이땅에서 눈을 들어 우리 주님을 바라볼수 있도록 하는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목적을 가지고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요한복음에는 7개의 표적이 그 주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표적을 행하셨는가가 주된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면 믿을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이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을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면 구원받는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목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행2:22, 개역한글)
사도 요한과 똑같이 사도 베드로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을수 있는 근거를 세개를 듭니다.
권능, 기사, 표적 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세가지 단어를 써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하신일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능력입니다.
예를들면 예수님께서 죽은자를 살리셨습니다. 갓 죽은 야히로의 딸을 살리시고 죽어서 뭍으려고 관에 넣어 성 밖으로 나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냅니다.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사일째 되는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상하게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현실적인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하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기적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리셨을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일을 행하셨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워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일때에 가는길이 몇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살던 나사로의 동네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한 필수 코스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부인할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기적입니다.
그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와 함께 사셨을찌라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기적(기사)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는것을 그들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것만이 아니고, 거룩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것을 느끼게 하는것이 기사라는 표현입니다.
세번째, 표적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이 쓴 표현입니다.
표적은 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낼수 있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같은 말씀을 하시는구나!" 를 알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나사로가 죽었을때 주님께서 늦게 오셔서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많은 형제님들께서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라는 말을 떼버렷다면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왔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라는 특정한 한사람만을 불러냅니다. 이스라엘은 무덤을 동굴로 쓰고 그 동굴 입구를 바위로 막아 놓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주님, 썩는 냄새가 납니다" 라고 했습니다. 죽은지 사흘이나 되어서 돌문을 열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의 시신이 썩어있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십니다. 치우게 하고 말하십니다. "나와라" 그리고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일을 통해서 말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일을 행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야기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주무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독특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분입니다.
두번째, 이분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알수 있는것입니다.
세번째, 표적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죽은사람을 살려내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영적으로 죽었을찌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다시 살리기를 원하시는, 거듭나기를 원하시는, 우리를 다시 살리사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찬송하도록 우리를 살리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은 세가지 측면에서 이해할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3. 그 사건 가운데 영적으로 시대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에 대한, 기적을 기록하고 설명한 이유입니다.
저희들이 이제 두가지 기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요4:43, 개역한글)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요4:46-54, 개역한글)
저희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특별히 표적에 대해서 살피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지, 아직 구원받지 못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고 마음문을 열고 이분을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로 영접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토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의 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소리는 그가 권력자라는 말입니다. 그는 상단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병은 권력자라고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병에게 명령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병이 단순한 병이 아니라 거의 죽게된 병입니다.
성경에서 이같은 분을 구약에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큰 용사 였습니다. 그의 나라에서 국방부 장관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문둥병자 였습니다.
이스라엘 같으면 그는 접촉금지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잡아왔던 한 계집아이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 종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한 선지자가 계신데 그분에게 가면 그 병을 고칠수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높아도, 권력이 있어도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어떤 조취를 취해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으로서는 방법이 없음을 느낍니다. 더이상의 명의는 없고 더이상 좋은약도 없습니다.
이제 그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은 초자연적인, 자연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의 아들의 병을 고칠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이룩했어도 해결할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의 방법으로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할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수없이 하나님 앞에 갑니다.
이것이 첫번째 하나님께서 왕의 신하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온 가정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뿐 아니라 그의 가정을 다 구원하기로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첫번째로 내리신 조취가 그의 아들을 거의 죽게 하셨습닌다. 왜일까요?
이는 우리를 낮추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낮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앞에 오지 않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무릎끓지 않습니다. 뜻대로 되면 우리 마음이 높아져서 "하나님이 누구냐?"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구도하시는 분들이 이런말을 종종 합니다.
"나는 내 주먹을 믿고 산다"
내가 못할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교만을 뽑기 위해서 우리에게 인생으로서는 불가능한 문제에 부딧치게 하십니다. 혹시 이와같은 고통을 가지고 계시면 복된분입니다. 하나님이 손대고 있으며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하나님, 예수님이 계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분이 근처에 와 계신다는것 그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가 비록 권력자이고 돈이 있어도 그는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겸손하게 예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가서 그는 말했습니다.
"주님 제 아들이 병들었으니 저희집에 함꼐가서 고쳐주십시오. 제 아들이 곧 죽을지도 모릅니다. 죽기전에 저와함께 가셔서 고쳐주십시오."
저는 사람들이 인생의 위기때에 하나님을 부르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제가 재수학원에서 독일어를 가르친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많은 재수생들이 마포모임에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일류대학에 갈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일년 더 재수해서 자기가 원하는 대학을 가려고 공부합니다.
그런데 올해 혹시라도 떨어질까봐 불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올해 꼳 대학에 붙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만약 대학에 붙여주시면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거절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조건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내세운 조건을 합의해서 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구원받았다고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갔을때, 그는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능력을 믿고 아들의 병을 낫게 할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나는 너의 아들을 위해서 표적을 행해주지 않겠다."
저희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때에 구원은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고 우리는 죄인인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조건을 걸수 있습니까? 무엇을 요구할수 있습니까? 요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조건으로만 우리를 구원하실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표적을 주지 않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표적을 구합니다. "주님 저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읽는데 어떤 구절을 읽는데 갑자기 내 눈에 눈물이 흐르고 내가 저질렀던 죄가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고 그래서 죄를 자백했다"
이런일이 있는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구원받지 않고 주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우리가 따라가야 합니다.
"너희가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얻는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표적을 주지 않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주님을 말씀하시지 않고 네 아들이 살았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앞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조건, 주님이 우리집으로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능력을 사용하셔서 우리 아들을 고쳐주신다는 개념을 버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방법으로 '살았으니 너는 가라' 하는 주님의 방법을 순종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다른 말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시키는것입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닌다. 하나님과 나는 같은 수준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높아서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하나님을 해석하고 믿을만한 하나님이기에 내가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피조물로 도움을 구하는, 겸손하게 무릎꿇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건을 보고 한가지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수로보니게의 여인입니다. 그 여자는 이방인 여자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을 위해서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왔다"
그래서 이 가나안 여자의 간절한 요청을 예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이 여인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도 인종차별하시는군요?"라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나이다"
주님께서 그 여자를 모독하신 것이 아닙니다. 낮아져 있는지 겸손해 있는가 보신것입니다.
고넬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오셨으니 말씀하십시오. 당신이 하는말을 들으려고 여기 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조건입니다.
주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때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게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두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과 이 여인입니다. 둘다 이방인입니다. 왜 이방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앞에서 은혜받을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조건으로 구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조건이 가혹하게 보일찌라도 나는 절망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낮아짐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이 하신 조건을 받아들이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갑니다.
저희들이 그가 믿고 갔다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나요? 처음 아들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을때 그는 굉장히 급히 예수님을 찾아왔을것입니다. 한시가 급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내려오셔서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고쳐주십시오"
일초가 아까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말을 듣고 천천히 갑니다. 그 다음날 하인이 올라오는것을 보고 만납니다.
이 왕의 신하는 첫번째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두번째,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살았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는 과정입니다.
구원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이라도 나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죄악된 저를 능력으로 깨끗케 하시고 저를 구원하실 말씀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러한 측면이 있습니다.
왕의 신하의 경우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아들을 살리실 능력이 있으시지만 "집에 오셔서 고쳐주십시오" 라는 것은 주님은 먼데서는 못고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꼭 집에 가셔서 안수하고 해서 고치실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꿀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마음에 품기만 해도 물은 포도주로 바뀝니다. 주님께서 꼭 가지 않아도 여기서 고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그와같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기전에"
주님은 그가 죽어도 주님의 뜻이면 살려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능력이 있으실 분 아니라 멀리서도 고치실수 있는 분이며 죽었어도 다시 살리실수 있는 분입니다. 이런 주님에 대한 믿음이 커져가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주님의 말을 믿고 가고 있는데 종을 만났습니다. 종은 아들이 살은 이 기쁨소식을 전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주인을 만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의 신하는 그 병이 낫기 시작한때가 언제인지 물었습니다.
그때가 주님께서 살았다고 말씀하신 그때입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와 온집이 다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고자 하는것은 이 아들의 육체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는것을 주고 싶었습니다.
아들의 병을 통해서 아버지가 구원받고 아들이 구원받고 하인도 구원받는것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아들이 죽게 만든것입니다.
그래서 낮아지게 하신것입니다. 그가 권력자이고 돈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것이 다 소용없는 절망 상태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는 하는수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온것은 잘한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올때에 하나 더 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구원은 순종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순종했을때 온 가족이 믿음을 가졌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것으로보 해결할수 없는 문제 가운데 우리는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자기 자신을 양심을 따라 판단해 보면 죄인이라고 느끼지 않을수 없습니다. 내 양심에 비춰봐도 내가 죄인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얼마나 죄인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양심에 죄의식을 불러주시는것은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것입니다. 이 죄의 문제로 내가 왜 살아야 하며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그동안 무슨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참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는것을 고통스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고통스러워 한다고 해서 세상에 있는 철학이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제가 고3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대학원 1학년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20대 였습니다. 제 머리속의 고민은 사람은 왜 죽는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였습니다.
그때 저희집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돌아가신분의 혼이 어디 있다가 돌아가신 날 집에서 밥을 차려놓으면 드신다고 믿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죽은후에 어디로 가는지, 죽으면 끝인가를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책도 대답해 주지 못했습니다.
대답하는 책이 단하나 있었습니다.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죄 때문에 왔다는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병이나서, 두통이 와서 병원에 가면, 두통의 원인이 수백가지 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원인으로 두통에 걸렸는지를 걸러냅니다. 그랬어도 몇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한사람의 작은 질병에 대해서도 원인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에 대한 하나의 원인만을 댑니다. 죄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해결책도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죄의 문제로 삶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답을 얻어내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것에 내 생각을 굴복할때 내 마음에 평안과 확신과 기쁨이 오는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그 길을 걸었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병에 걸렸습니다.
행복했던 집에 갑자기 고통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고통이지만 영적으로 축복의 통로일수 있습니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춰서 하나님앞으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제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려오십시오. 우리집에 가서 고쳐주십시오."
주님은 가지않고 주권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살았으니 가라"
이 말을 믿을것인가요? 안 믿을것인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믿을때에 그는 온 집안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보다 나에 대해서 더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저희 가운데 동일하게 임하여 주님께서 영광을 취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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